소설리스트

도비검무-172화 (172/184)

172화 겁화(劫火)의 홍념(紅念)이 타오르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자는 바로 만불사에서 한쪽 팔이 잘린 채 대웅전을 넘어 달아났던 혈화제천이었다.

그런데 분명히 자신의 무영검에 잘린 그의 두 팔이 멀쩡했다.

청운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망친 그자가 이곳 황궁의 지하에서 또 무슨 요사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 나삼의 소녀들과 화려한 궁장을 한 여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바로 그 순간 청운은 병필태감에게 귀비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가 ‘이미 늦었다.’고 했던 말을 언뜻 떠올렸다.

청운은 대경실색했다.

설마 저들이 이곳에서 삼계를 열려고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 궁장의 여인은 바로 귀비!

청운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막아야 한다.

일단 일이 터지면 걷잡을 수가 없다.

그전에 막는 것이 최선이고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황궁의 지하에서 귀비가 삼계를 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청운은 직감했다.

아직 완전히 삼계가 열린 것 같진 않았다.

이 황궁의 심처에 사후 세계의 문을 열려고 하는 무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니…….

청운은 곧바로 무영검을 빼 들고 재천신교의 무리를 짓쳐 갔다.

무영검이 한 차례 번뜩일 때마다 청운을 막아서던 재천신교 무리 중 서너 명의 목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운의 서너 번 칼질에 순식간에 십여 명의 목이 달아나자 재천신교 무리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청운의 무위에 잔뜩 두려움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두려움을 느낄 땐 누구나 무리 가운데로 숨으려고 한다.

그 순간 누구나 나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것이 본능이다.

바로 그 순간 혈화제천이 청운을 막아섰다.

그가 백무기 같은 사이한 눈빛으로 청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또 네놈이구나. 감히 우리 혈족의 신성한 제전(祭典)을 망치려들다니… 도저히 용서를 할 수가 없구나. 이놈! 받아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천혈화의 장심에서 붉은 안개 같은 귀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청운을 향해 번개처럼 장심을 쭉 내밀었다.

마치 핏빛의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청운은 느꼈다.

청운을 달포간이나 석가장의 제갈신의에게 치료를 받게 했던 바로 그 가공할 혈화현음장이었다.

그동안 또 얼마나 젊은 처녀들의 음기를 흡취(吸取)했는지, 그의 혈화현음장은 만불사에서 상대했을 때와는 그 차원이 달랐다.

그 사이에 혈화현음장을 대성한 것 같았다.

혈화재천의 혈화현음장이 노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본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호신강기로 전신을 보호한 후 이기어검의 일종인 수어검의 수법으로 멸환을 전개했다.

청운의 멸환과 혈화제천의 혈화현음장이 정중앙에서 격돌했다.

그 순간 천장에 달려 있던 집채만한 종유석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동굴 전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심하게 진동을 했다.

그 엄청난 폭음 속에서 한 줄기 외마디 비명과 묵직한 신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외마디 비명은 가슴이 쩍 갈라진 혈화제천이 지른 것이었고, 묵직한 신음성은 청운이 내뱉은 것이었다.

한편, 어느새 청운을 뒤따라온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 검후를 비롯한 수십여명의 황궁 시위들도 재천신교의 무리와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귀비는 삼계를 열기 위해 지-요-마-경-문-명-곤-계… 하는 역행 주술로 저주의 염송을 쉬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

주문 소리가 커질수록 요기와 사기와 마기가 지하 광장에 펄펄 끓어올랐다.

귀비가 사악한 주술로 살아 있되 살아 있지 않은 구천을 떠도는 원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이계(異界)의 요기와 사기와 마기가 이쪽 세상으로 범람할 것 같았다.

“후천개벽(後天開闢), 광제창성(光霽昌盛), 후천개벽(後天開闢), 광제창성(光霽昌盛). 마계(魔界), 명계(冥界), 요계(妖界)의 제왕이시여! 권능을 보이시어 저 더러움에 찌든 세상을 일소하소서! 저들 모두를 재로 만들어 삼계의 하늘과 땅에 흩날리게 하소서!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만드소서!”

한순간 귀비가 자기 몸보다 더 큰 괴이하게 생긴 기형도를 들어 올리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지막 제물로 나삼 소녀들의 피를 제단에 바치려는 것 같았다.

청운은 다급했다.

삼계(三界)는 절대 열려서는 안 된다.

최후의 제물이 제단에 바쳐져 겁화(劫火)의 홍념(紅念)이 타오르면 모든 게 끝장이다.

삼계가 열리는 바로 그 순간, 삼계가 지배하는 시공간에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환대와 조화, 존중, 연민, 배려, 이해, 성찰, 용기, 열망 같은 선한 심성은 사라진다.

대신 분노와 증오, 혐오, 배신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를 배척하고 이간질하는 악한 심성들이 그 공간을 지배하게 된다.

세상에는 눈에 너무 빤히 보여서, 손에 확실히 만져지기에 오히려 잘 모르는 것이 있다.

사람의 성정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의 삶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의 심성이 바뀌면 세상 자체가 바뀐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심성이 망가지면 세상도 따라서 망한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역사가 인간에게 가르쳐준 가장 소중한 진실이다.

청운은 혈화제천과의 격돌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음에도 최후의 진력을 끌어모았다.

곧장 귀비가 해괴한 춤을 추는 제단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조금 늦은 것 같았다.

이미 몇몇 소녀의 피가 제단에 뿌려졌다.

그 순간 귀기 어린 붉은 겁화(劫火)의 홍념(洪念)이 동굴 천장으로 확 치솟으며 커다랗게 일렁거렸다.

너무 다급한 나머지 청운이 이기어검의 일종인 목어검의 수법으로 귀비를 향해 무영검을 던졌다.

귀비가 커다란 기형도로 괴이한 원을 그리며 무영검을 너무나 쉽게 막아냈다.

청운은 깜짝 놀랐다.

귀비의 무공이 결코 병필태감에 못지않았다.

귀비가 자기의 몸보다 더 큰 기형도를 휘두르며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감히 나, 새로운 세상의 천주(天主)가 집전하는 신성한 제의를 방해하다니… 지옥 불에 타 죽어도 시원치 않을 놈 같으니… 뒈져라!”

귀비가 휘두르는 기형도에서 동굴 전체를 베어버리고도 남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도기를 막지 못하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뒤에서 재천신교 무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천리신개 일행과 황궁 시위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청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영검이 없는 청운이 믿을 수 있는 건 치우환밖에 없었다.

치우환으로 멸환겁을 펼치면 내력이 고갈될 게 뻔했다.

하지만 청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전신 공력을 치우환이 잠들어 있는 양쪽 팔목으로 운기했다.

치우환을 깨울 참이었다.

귀비의 도기가 막 청운의 전신을 절단하려는 순간 청운의 팔목에서 둥근 자색의 빛이 번쩍하며 귀비를 향해 섬전처럼 쏘아져 갔다.

마치 꼬리에 불을 단 유성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두 마디 비명이 제단 주변에 울려 퍼졌다.

하나는 처절했고, 다른 하나는 묵직했다.

처절한 비명은 귀비의 것이고, 묵직한 것은 청운의 것이었다.

귀비는 가슴이 짜개진 채 제단에 널브러져 버둥거리고 있었고, 청운은 뒤로 주르륵 미끄러진

채 동굴 바닥에 울컥울컥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청운이 상제와 혈화제천과 연달아 싸우는 바람에 진력이 거의 고갈되지 않았다면 아마 귀비의 몸은 차우환에 천참만륙(千斬萬戮)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바로 그때 제단에서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제단 뒤쪽에 있는 동굴 한쪽 벽면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어둠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청운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아차! 싶었다.

청운의 치우환과 귀비의 도기가 격돌할 때 십여 명의 소녀들의 몸이 잘리면서 그 피가 겁화(劫火)의 홍념(洪念) 위에 흩뿌려진 것 같았다.

청운은 삼계의 일부가 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일념에 청운은 본능적으로 삼재구(三災球)를 품속에서 꺼냈다.

삼재구를 왼손에 들고는 백두산 무영문에서 익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월성진(日月星辰), 성휘만천(星輝滿天), 능조천하(能照天下)…….

일월성진(日月星辰), 성휘만천(星輝滿天), 능조천하(能照天下)…….

“…….”

청운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직감했다.

삼재구는 깜빡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주문은 틀림이 없었다.

틀릴 수가 없었다.

공력이 문제인 것 같았다.

내력이 너무 소진되어 삼재구에 잠든 신령(神靈)의 기운을 깨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청운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제갈신의가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라며 준, 별의 기운이 담긴 침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침을 꺼내자마자 청운은 곧장 자신의 명문혈에 그 침을 찔러 넣었다.

일순간 청운의 전신이 자황색의 서기에 휩싸였다.

다시 삼재구를 들고 청운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월성진(日月星辰), 성휘만천(星輝滿天), 능조천하(能照天下)…….

일월성진(日月星辰), 성휘만천(星輝滿天), 능조천하(能照天下)…….

“…….”

청운의 주문이 끝나자마자 번쩍하며 삼재구에서 쏟아진 찬란한 황금빛 광휘가 동굴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그 순간 청운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바닥으로 서서히 쓰러졌다.

“됐다. 됐어. 내가 막았…….”

허물어지는 청운의 눈에 혼원벽력도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 * *

성운과 유성이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소용돌이는 주변의 모든 시공간을 집어삼켰다가 토해내기를 반복했다.

청운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빠져나올 수도 버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소용돌이를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는 대신 깃털이 바람의 결을 타듯 청운은 그 사나운 흐름에 자신의 전부를 맡겨버렸다.

점점 편안해졌다.

더 이상 소용돌이는 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청운이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리자 소용돌이도 마치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소용돌이가 때로는 힘껏 자신을 품었다가 때로는 자신을 다독이는 것 같았다.

그 지극한 편안함은 곤한 잠을 불러왔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청운의 귀에 아주 어릴 적 듣고는 여태껏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아버지가 아침잠을 깨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청운은 벌써 아침인가 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아버지가 아니었다.

의원 복장을 한 늙수그레한 노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노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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