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어디 입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태사령님, 이제야 정신이 드십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워낙 기본 체력이 좋아서 망정이지 아니면 큰 사단이 날 뻔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몸속에 있는 한 올의 잠력까지 모조리 다 써버려서 자칫 목숨이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다 비워진 경락과 맥 어느 순간 다시 잠력이 차올랐습니다.”
“…….”
“거기다가 잠력이 몽땅 비워질 때 몸속의 탁기까지 다 빠져나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오십 년, 의원 생활에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그 정도의 초주검 상태에서 이렇게나 빨리 쾌차한 분은 태사령이 처음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삼황자의 명으로 황족만이 먹을 수 있는 귀한 어환단(御丸丹) 두 알을 한꺼번에 드시기는 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튼 참으로 다행입니다. 참으로… 그래도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몸을 완전히 회복하시려면 최소한 보름 정도는 정양을 해야 합니다.”
청운이 상체를 반쯤 일으키면서 말했다.
“어의님이셨군요.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얼마나 혼절해 있었는지요. 그리고 황궁의 상황은 지금 어떤지요,”
어의가 말했다.
“꼬박 세 시진을 정신을 놓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태사령님의 활약 덕분에 반란이 거의 진압되었습니다. 반란의 수괴인 귀비와 병필태감도 추포했습니다. 그들은 태사령님에게 하도 호되게 당해 무공까지 모두 잃은 상태입니다.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전 앞에서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죄인들을 추국推鞫하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밤을 꼬박 샐 것 같습니다.”
청운이 몸을 일으키면서 어의에게 말했다.
“저도 지금 추국장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어의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고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회복하자마자 그 험한 곳으로 가시겠다니… 조금 더 안정을 취하시지요. 태사령님, 그게 낫습니다.”
청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원의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확인할 게 많습니다. 이렇게 누워있는 게 더 불편합니다.”
청운은 누군가 자신의 머리맡에 갖다 놓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추국장이 열리는 대전의 마당으로 향했다.
몇 군데 상처와 힘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몸은 전혀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며칠만 지나면 저절로 회복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전 앞마당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수백여 명이 넘는 죄인들이 병사들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청운이 추국장 이십여 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분기에 찬 황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비와 병필태감. 내가 너희 둘을 그렇게 총애하고 신임했거늘,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삼계를 열어 감히 황위찬탈(皇位簒奪)을 꿈꾸다니… 내가 너희들에게 뭘 섭섭하게 했느냐. 관직도 주고, 황금도 주고,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주었거늘, 이런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르다니. 어디 입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뭐가 부족했느냐!”
“오-호-호-호.”
귀비가 황제를 바늘 끝 같은 눈길로 노려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총애! 총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당신의 그따위 값싼 총애나 얻으려고 황궁에 들어온 줄 아시오. 그런 건 지나가는 똥개나 물어가라 하시오, 뭐가 부족했느냐고? 당신네 중원인은 진짜로 부족한 게 뭔지를 몰라! 암 모르고, 말고! 당신네 중원인들 기준으로 보면 나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
“…….”
“하지만 내 부모와 그리고 그 부모의 부모인 우리 혈족에게는 모든 게 부족했지. 수천 년 동안 너희 중원인이 우리 혈족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갔으니까. 땅도 빼앗고, 집도 빼앗고, 목숨도 빼앗고, 희망도 빼앗아 갔다. 우리 혈족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차별과 모욕과 혐오 그리고 좌절과 절망뿐이었다. 이래도 뭐가 부족하냐고? 전부가 다 부족하다.”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귀비의 절규를 듣고 있던 병필태감이 거들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고, 빛과 실체가 있으니 어둠과 그림자가 있고, 외침이 있으니 메아리가 있고, 동기가 있으니 결말이 있는 법이지요. 중원인들은 늘 그랬소. 아무 죄 없는 우리 혈족에게 악(惡)의 낙인을 찍어놓고 자신들은 늘 선(善)이라고 우겼지. 자신들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선했고, 우리 혈족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악행을 저질렀다고 매도당했소.”
“…….”
“언제나 그 가당치도 않은 중원인의 그 이분법이 우리 혈족의 운명을 결정지었소. 중원인들은 비둘기의 깃털을 가진 사악한 뱀이었소. 그런 중원인들이 악과 선을 가르는 유일한 셈법은 바로 자신들이 가진 힘이었소. 우리 혈족은 실제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늘 죄를 범한 자로 간주되고 말았소. 그 힘의 부족함 때문에 오늘도 우리 혈족은 악이 되고 말았소.”
병필태감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지. 중원이 아무리 우리 혈족을 부정해도 우리가 그동안 받은 고통까지 모두 부정되는 건 아니오. 아니, 너희 중원인들이 우리 혈족을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중원을 향한 우리 혈족의 저주는 더 커질 것이오. 영원히… 내 비록 오늘 죽더라도 우리 혈족은 스스로의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다시 또다시 끊임없이 중원을 향해 칼을 벼릴 것이오.”
“…….”
“단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한. 아! 원통하구나. 또다시 우리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다니.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나의 뒤를 이을 또 다는 귀비와 병필태감이 우리 혈족의 한을 반드시 풀어줄 것이라고.”
분기탱천한 황제가 소리쳤다.
“저런 배은망덕한 연놈들을 봤나. 믿음과 사랑을 불신과 혐오로 받아들이다니. 그건 거세된 놈이 온전한 남자와 여자를 증오하는 자격지심 같은 것일 뿐이다. 너희 혈족인 마족은 스스로 중원과 화합하려는 노력은 도외시한 채 남 탓만 하는구나. 내가 너희 둘을 차별했으면 너희 연놈들이 어떻게 귀비가 되고 병필태감까지 되었겠느냐.”
황제는 조금 지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더 이상 너희 연놈들의 말은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 같다. 당장 목을 치고 싶지만,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의문이 많고,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너희 연놈들 때문에 짐의 진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다. 오늘은 밤도 너무 늦었고 피곤해서 더 이상 추국을 열 수가 없다. 내일 사시(四時)에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추국장을 열 것이니 모두 쇄금옥에 가두고 물 한 방울도 주지마라.”
황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굴비를 꿰듯 오라를 지어 죄인들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 * *
난리가 났다.
오늘 아침 사시(四時)에 재개될 추국이 갑자기 연기되었다.
밤새 쇄금옥에 감금되어 있던 귀비와 병필태감이 탈출을 해 버렸다.
쇄금옥에 누가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쇄금옥을 지키던 옥졸들이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그들을 깨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어보았으나 수십 명이 훨씬 넘는 옥졸들은 무슨 지독한 약물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모조리 이지를 상실한 몽롱한 눈빛으로 횡설수설했다.
설상가상으로 황제가 갑자기 쓰러졌다.
황궁 어의들은 하나같이 황제의 병이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추국을 비롯한 모든 실권이 한순간에 삼황자에게로 넘어갔다.
삼황자가 청운을 불렀다.
청운이 삼황자의 집무실로 달려갔을 때 삼황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청운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삼황자는 청운의 예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태사령.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저들이 어떻게 쇄금옥을 탈출했다고 생각하는가. 쇄금옥은 황궁의 감옥 중에서도 중죄인만 감금하는 철옹성 같은 곳인데…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쇄금옥을 지키던 옥졸들의 상태는 왜 저 모양인가?”
“…….”
“밤새 무슨 약물을 먹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렇게 건강하시던 황제 폐하까지 갑자기 쓰러지시다니…. 이 사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네. 태사령은 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고견이 있으면 말해보시게.”
청운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들에게 최후의 한 수가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저들이 사악한 섭혼술로 옥졸들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쓰러진 것도 그 섭혼술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마 귀비는 평소에 그 섭혼술로 황제 폐하의 이지를 조종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조종자와 조종당하는 사람 간의 거리가 멀어지자, 즉 시술자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피시술자가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지금 이 사태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삼황자가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혹시 치료할 방법이 있는가?”
청운이 즉시 대답했다.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섭혼술은 악독하기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마족의 술법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마족 출신이 아니면 거의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최고의 법술을 지닌 마족 출신만이… 설령 그런 자가 있다고 해도 황실에 협조적일리도 만무하고… 삼황자님.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삼황자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닐세. 이게 어디 자네가 송구할 일인가. 다 내가 부주의하고 부덕한 소치이지. 자네는 할 만큼 했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일이 이 정도까지 수습되지도 않았을 것이네. 자네가 황실에 기여한 공로는 내 평생 잊지 않을 걸세. 그건 그렇고 그들이 어디로 도망친 것 같은가. 어디 짐작 가는 데라도 있나.”
청운이 잠시 생각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그들 혈족의 본산인 십만대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다시 삼계를 열어 최후의 승부를 보려고 할 것입니다.”
삼황자가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저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 같으니… 아직도 헛된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런 사악한 짓거리를 벌이려고 하다니… 내가 직접 백만 금군을 일으켜 십만대산을 짓밟아 버리고 말겠다.”
청운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황자님. 그건 아니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그들에게 엄청난 위협은 되겠지만 그들은 더 깊은 세상의 끝으로 꼭꼭 숨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숨어서 오랜 세월 또다시 저주의 사술로 힘을 비축할 것입니다. 또 때가 되면 다시 중원을 향해 발톱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사술과 저주에 휘말리면 막대한 인명피해를 각오해야만 합니다.”
“…….”
“그들의 사술과 저주는 인간계의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운신을 못하는 이럴 때일수록 황자님께서 중심을 잡고 자중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에 들끓고 있는 혼란을 하루라도 빨리 수습하실 수가 있습니다. 마족의 처리 문제는 저희 무림인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저에게 복안이 있습니다. 정 도움이 필요하면 황자님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