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77화 (177/184)

177화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풍광에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서찰을 받은 사람들은 십만대산을 향해 출발을 했을 것이다.

늦지 않게 그 행렬에 합류하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백마 다섯 필을 계곡과 연못이 통하는 가장 먼 쪽에 따로따로 메어 두었다.

그것은 계곡에서 튀어나온 적곤이 한꺼번에 말을 다 잡아먹지 못하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청운은 적곤이 말을 잡아먹는 동안 계곡과 연못이 통하는 입구를 막아버릴 생각이었다.

자신이 죽든 적곤이 죽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말을 다 묶어둔 청운이 이번에는 대붕의 둥지가 있던 곳에 집채만한 바위들을 수북하게 쌓아 올렸다.

적곤이 계곡에서 연못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곧바로 그 바위들을 밀어 적곤이 소(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아버릴 생각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청운은 대붕의 둥지 옆에 보료를 깔고는 방천호가 준 보따리를 풀었다.

가죽 주머니를 열어 호리병에 따르고는 한 모금 마셨다.

청운이 좋아하는 소홍주였다.

육포와 소홍주로 배를 채운 청운이 벌러덩 드러누워 호리병 모양으로 생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지형 때문인지 무수한 별들이 마치 호리병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싸움의 승패는 자신이 적곤의 삼 장 안에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삼공적, 아니 벽라적의 신기(神氣)는 삼 장을 넘지 못한다.

삼 장안에 접근해 적곤의 조문(照門)에 신단적을 박아 넣으면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어지간한 충격을 막아 줄 수 있는 백무기의 껍질로 만든 옷을 안에 받쳐 입었다.

그것은 사라유리가 청운을 위해 만들어 준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청운은 말들의 똥을 모두 수거해 소와 연못이 통하는 입구에 뿌렸다.

적곤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 * *

그렇게 사흘이 흘러갔다.

사흘째 저녁 무렵 고요한 연못의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운의 눈에 평소와 다른 이상한 파문이 일렁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최대한 운기했다.

거대한 뭔가가 쏜살처럼 연못처럼 쇄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청운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놈이다. 놈이 드디어 식욕을 참지 못하고 날뛰기 시작했구나. 어서 오너라. 기다리고 있었다.”

청운은 계속 연못을 주시했다.

잠시 후, 연못에 엄청난 물기둥이 솟구쳤다.

동시에 마치 지옥의 입구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듯이 붉은 괴물이 수면에서 튀어나왔다.

어마어마했다.

족히 삼십여 장은 충분히 될 것 같았다.

놈은 연못으로 튀어나오자마자 가장 가까이 있는 맞은편 백마에게로 돌진했다.

공포에 질린 말들이 마치 벼락을 맞은 듯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청운은 바로 이때다,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전력을 다해 연못과 소(沼)로 통하는 입구에 바위 더미를 밀었다.

으-르-릉-쾅-쾅. 십여 장을 굴러 내린 바위 무더기가 입구를 거의 메워버렸다.

세 마리째 말을 삼키고 있던 적곤이 머리를 돌려 청운을 노려봤다.

놈의 눈은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놈의 눈빛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청운은 심장이 오그라들고 온몸이 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놈을 잡기 위해 온갖 상황과 방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음에도 막상 놈과 맞닥뜨리자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청운은 받았다.

놈은 그만큼 공포스러웠다.

아득하고 진득한 공포가 전신을 짓눌러오는 것 같았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느꼈던 모든 공포를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한 공포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단지 놈과 한 번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청운은 심장이 시원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청운은 크게 한 번 깊은 호흡을 내쉬고는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청운은 속으로 되뇌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내가 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기지 못한다.”

청운은 무영검에 극한의 진력을 주입하고는 저곤을 향해 곧바로 멸환을 전개했다.

하지만 인간과 괴물은 그 근본이 달랐다.

놈은 두려움과 공포가 뭔지조차 모르는 괴물이었다.

청운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거대한 붉은 혀를 휘두르며 청운은 삼키려고 했다.

놈의 혀는 마치 거대한 불기둥 같았다.

굵기가 거의 다섯 척이나 되는 것 같았고 길이는 자그마치 오장 이상이나 되는 것 같았다.

무영검과 놈의 혀가 맞부딪칠 때 청운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혀가 아니라 마치 철벽을 때린 느낌이었다.

손목과 팔이 찢어질 듯이 시큰거렸고 놈의 힘에 밀려 거의 십여 장 이상이나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단 한 번의 부닥침으로 청운은 내기가 진탕되는 내상을 입고 말았다.

청운은 우웩, 거리며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선혈을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속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전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청운은 묘묘보허의 신법과 보법의 묘용을 최대한 발휘하며 피하기 급급했다.

접근전을 펼쳐야 삼공적을 불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데 놈의 힘이 워낙 가공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놈이 꼬리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 파괴력이 거의 이십여 장 가까이 미쳤다.

놈의 발톱이 할퀼 때마다 절벽의 바위가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고, 꼬리에 맞은 바위들은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심지어 놈의 꼬리가 일으키는 바람에 집채만한 바위가 자갈돌처럼 날아다녔다.

놈에게 가까이 접근해야 삼공적, 아니 벽라적을 불 기회를 잡을 수 있는데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청운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은 벌써 기력이 거의 다 소진되었는데 놈은 점점 더 사나워지는 것 같았다.

청운은 모험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딱히 머리에 떠오르는 묘수도 없었다.

어는 순간부터 청운은 놈에게 이리저리 몰리며 거의 절벽을 방패 삼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놈의 강철 같은 발톱에 할퀴고 쇠기둥 같은 꼬리에 맞은 절벽이 무너지면서 오히려 청운의 전신에 무수한 생채기만을 남겼다.

청운은 놈에게는 거의 무용지물인 무영검을 거두어 납검하고는 치우환으로 멸환겁을 펼치기 위해 전신 공력을 양 팔목에 집중시켰다.

다시 청운을 향해 놈이 발톱을 치켜든 순간 청운의 양 팔목에서 투명한 붉은 서기가 번갯불처럼 놈을 향해 쏘아졌다.

놈의 등짝에서 한 가닥 붉은 핏줄기가 솟구치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이제 됐구나, 하고 생각하다 말고 너무 놀라 절벽에 부닥치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놈은 치우환이 스치는 바로 그 잠시 잠깐의 순간만 주춤하는 것 같더니 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치우환으로 펼친 멸환겁은 놈의 피부만 살짝 갈랐을 뿐 치명적인 충격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더구나 청운은 전력으로 멸환겁을 전개하느라 더 이상 끌어올린 내력조차 없었다.

적곤이 탈진한 자신을 덮쳐올 때 청운은 속으로 여기가 끝이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고-오-오-오 하는 소리와 동시에 호로병 같은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뭔가가 적곤을 향해 쏜살처럼 덮치고 있었다.

청운을 공격하던 적곤이 머리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청운도 따라 쳐다봤다.

아! 대붕이었다.

청운은 자신이 아직 죽을 운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찰나의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린 청운은 치켜든 적곤의 머리 아래로 돌진했다.

삼 장 안쪽이라 생각하는 순간 청운은 삼공적, 아니 벽라적을 힘껏 불었다.

적곤이 잠시 정신을 잃은 듯 굳어지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적곤의 머리에서 네 척 정도 아래에 있는 손바닥 정도 크기의 푸른 비늘로 가려진 놈의 조문(照門)도 동시에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문적, 아니 신단적을 그 조문에 박아 넣었다.

꽤-애-액-쾌-애-액, 하는 놈의 괴성이 호리병 모양의 분지를 뒤흔들었다.

놈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발버둥을 칠 때마다 우-르-르-쾅-쾅, 화강암 절벽이 흙더미처럼 허물어져 내렸고 놈이 뒹구는 연못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렇게 이 각 정도 지속되던 놈의 발버둥이 어느 순간 잦아들기 시작했다.

다시 일각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나자 놈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청운이 벌떡 일어나 놈에게 다가갔다.

놈에 대한 공포가 워낙 심해 죽은 걸 확인하기 위해 가는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웠다.

오장 가까이 다간 선 청운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몸집 만 한 바위를 하나 번쩍 들어 올려 놈의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퍼-억 하는 소리가 났다.

놈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확실히 죽은 것 같았다.

청운은 무영검을 빼 들고 놈에게 다가 갔다.

둥지에 앉은 대붕이 목을 길게 빼고 청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영검을 빼든 청운이 적곤에게 접근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어마어마했다.

죽어 있는 눈알과 마주쳤는데도 오금이 저렸다.

청운은 먼저 적곤의 조문에서 무문적을 수습해 품속에 갈무리했다.

청운은 무영검으로 내단이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아랫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생기(生氣)가 다 빠져서 그런지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놈의 가죽이 그렇게 질기지는 않았다.

무영검을 적곤의 아랫배에 꽂고 일직선으로 쭉 당기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피가 대충 빠질 때까지 청운은 거의 일각 정도를 기다렸다.

피가 어느 정도 빠진 후 적곤의 뱃속을 살펴보았다.

있었다.

적곤의 내단은 마치 용의 여의주처럼 붉었다.

아니, 불덩이의 근본 같았다.

청운은 내단을 뜯어내기 위해 손을 갔다 댔을 때 깜짝 놀랐다.

마치 불을 만지는 것처럼 손이 뜨거웠다.

내단을 살펴보던 청운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삼키자니 두려웠고 삼키지 않으려니 지금까지의 고생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키자니 내단의 화기가 순식간에 자신을 태울 것 같았고, 포기하자니 더 이상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청운은 빙하기(氷河氣)의 심법을 믿어보기로 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청운은 눈을 질끈 감고 내단을 삼켰다.

마치 식도를 타고 불을 내려가는 것 같았다.

곧장 빙하기의 구결을 운용했지만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마치 누가 자신의 몸속 혈과 맥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뼈마디와 혈관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온몸이 용광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뜨거웠다.

청운은 그 불길이 자신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지독한 고통과 악몽의 공포가 한꺼번에 뒤섞여 자신을 태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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