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80화 (184/184)

180화 이건 차원과 차원의 전쟁이다.

“무림인에게 그게 별것이 아니라면 뭐가 별것인가. 어떻게 세상의 행운이 모두 자네에게만 관대한지. 이제 나 같은 늙탱이는 물러날 때가 된 것 같군.”

월동문을 열고 별채에 들어서자마자 수라만군이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련주님, 당대제일인 무위검 강 소협이 왔습니다.”

소리가 끝나자마자 별실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마련주 제혼마감이 환제와 함께 나타났다. 환하게 웃으며 청운을 향해 말했다.

“강 소협, 어서 오시게. 그동안 잘 있었는가.”

청운이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련주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동안 별래 무양하셨는지요. 환제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모두 자리에 앉자 제혼마검이 청운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나는 자네가 도와달라고 해서 오긴 왔네만, 그래 자네는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는가?”

청운이 그의 말을 곧장 받았다.

“마족들은 삼계를 열 제전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방어막을 구축하고 필사적인 저항을 할 것입니다. 련주님께서는 저와 곤륜선인이 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온갖 사악한 주술과 환술의 힘을 이용해 상상도 할 수 없는 괴수나 괴물들을 만들어 입구에 배치해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깨부수자면 련주님 같은 차원이 다른 고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련주가 빙그레 웃으며 청운의 말을 받았다.

“어떤 괴물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 깨부숴 주겠네. 아무 걱정 마시게. 그런데 자네 그때와는 또 기도가 달라 보이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에 진입한 것 같군. 그새 자네에게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청운이 다소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나 작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청운과 마련주는 약 한 식경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련주가 좀 더 기다렸다가 한잔하고 가라는 걸 사양하느라 청운은 조금 애를 먹었다.

청운은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반드시 밤을 새워 대작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간신히 그의 거처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청운은 무림삼괴를 만나기 위해 다시 <천성루>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술자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삼괴는 곤륜선인 일행이 있는 별채 뒤 내원에 머물고 있었다.

청운은 내원 앞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청운입니다.”

청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원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혈불인마, 귀수하백, 만수귀왕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뛰쳐나왔다.

청운이 크게 읍을 하면서 말했다.

“형님들,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만수귀왕이 청운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아우! 어서 오게! 어서 와!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그새 신수가 더 훤해졌구먼. 자, 어서 들어가 한잔하면서 그동안의 회포를 푸세.”

방안에 들어서자 후아주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이미 술판을 벌인지 오래된 것 같았다.

만수귀왕이 청운을 보며 말했다.

“내가 아우와 한잔하려고 꼭꼭 꿍쳐놓았던 후아주 두 동이를 들고 왔네. 자, 오늘 밤 실컷 마셔보세. 우선 한잔 받게.”

만수귀왕이 커다란 사발에 후아주를 가득 따랐다.

청운이 단숨에 들이키자 다시 또 따라주었다.

연달아 석 잔을 마시고 나자 그제야 돌아가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협불인마가 말했다.

“아우의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네. 워낙에 유명 인사가 되어서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도 다 들리더군. 이 길이 아우가 가려는 길의 종점인가. 내 목숨을 걸고 돕겠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은 그동안 쌓인 회포나 푸세.”

귀수하백이 혈불인마의 말을 받았다.

“아우, 형님 말씀이 맞네. 오랜만에 우리가 모두 모였는데 오늘은 모든 걸 잊고 회포나 푸세. 나와 아우님은 또 다른 인연도 있지 않나. 그래, 설산을 다녀왔다고. 모두 잘 있던가? 딸이 너무 예쁘지 않던가?”

청운은 귀수하백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청운과 무림삼괴는 축시(丑時)가 지나도록 통음을 했다.

만수귀왕이 가지고 온 후아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거들을 내고서야 모두 잠자리에 들렀다.

* * *

청해성을 떠나온 지 삼 일째 되던 날 청운 일행은 드디어 십만대산의 입구에 도착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무림맹의 토벌대를 포함한 모두가 도착했다.

자신들보다 먼저 떠났다는 일만 금군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먼저 진입한 것 같았다.

청운은 그들이 함부로 삼계로 들어가려다 큰 낭패나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을 했다.

맹주의 제안으로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곤륜파와 전진파의 문도들이 십여 개의 커다란 자루를 말에서 내렸다.

곤륜선인이 말한 환약이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에게 두 알씩을 나누어 주었다.

청운은 그 환약이 효과가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환약은 만독불침인 청운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약이었으나 행동을 통일한다는 의미에서 기꺼이 먹었다.

한 시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모두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봄인데도 나무와 풀들은 시들고, 새들은 울지 않고, 개들도 짖지 않았다.

드디어 십만대산의 중심.

아니 삼계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한 붉은 안개가 산 전체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과 시간의 끝에서 피어나는 저승의 안개 같았다.

바로 그 순간 붉은 투구에 갑주를 입고 말을 탄 장수 셋이 청운에게 달려왔다.

청운의 십여 장 앞에서 말에서 뛰어내려 청운을 향해 다가왔다.

잠시 후, 일제히 청운에게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청운도 마주 보며 포권을 취했다.

가운데 있는 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태사령님을 뵙습니다. 저는 황제의 명을 받고 태사령님을 도우기 위해 출정한 유처현이라 합니다. 많은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청운이 곧장 그의 말을 받았다.

“유 장군님이셨군요. 예까지 오신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 다른 애로 사항이 없으신지요.”

유처현이 갑자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사령님. 저, 그게 말입니다. 일부 장수가 먼저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에 함부로 붉은 안개 속으로 진입을 하다 수천의 군사들이 원인을 모른 채 쓰러져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청운이 옆에 있는 곤륜선인을 쳐다봤다.

곤륜선인이 제자들에게 턱짓을 하자 그들이 십여 개의 자루를 말 잔등에서 끌어내렸다.

곤륜선인이 유 장군에게 말했다.

“흰 자루와 검은 자루에 있는 환약 한 알씩 모두 두 알을 서둘러 모든 병사들에게 먹이시오. 쓰러진지 채 삼 일이 되지 않았다면 반나절 안에 깨어날 것이오.”

유 장군과 그 일행들이 환약이 담긴 자루를 챙겨 서둘러 군영으로 되돌아갔다.

청운이 맹주에게 말했다.

“맹주님, 반나절 후 병사들이 깨어나면 그때 본격적으로 진입을 하시지요.”

청운의 제안에 맹주가 고개를 끄떡이며 찬성을 표했다.

맹주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검붉은 안개 속 하늘이며 땅 그리고 그 속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이 서로 뒤엉킨 채 서로를 뒤틀고 있었다.

태양이 낮을 잊어버리고 달이 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삼계의 지평선과 하늘의 공제선이 맞닿는 그 접점에서 이계의 하늘이 현실의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검붉은 색조 속에 시공간의 경계가 먹물처럼 번지며 서로를 침범하고 있었다.

지옥의 어둠처럼 더할 수 없이 어두침침한 불모의 시공간 속에서 검붉은 안개가 두꺼운 구름처럼 일렁거렸다.

이계의 땅과 하늘이 팽팽하게 서로를 밀고 뒤트는 공간 속에 출렁거리는 붉은 안개가 차갑고 축축한 불안과 공포를 주변에 살포하고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청운은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습하는 공포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때였다.

사방에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검과 도를 휘두르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아비규환의 비명이 허공에 비산했다.

일렁이는 검붉은 안개와 뒤섞인 비명은 저승이 이승에 실현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죽어라! 죽어! 퍽—푹—퍼—억. 으—악—으—아—악—악—악.”

“…….”

급기야 같은 편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맹렬하게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공력이 약한 금군과 제마단의 진영에서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이 일었다.

주술로 불러낸 악독한 환술이었다.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악독한 환술이었다.

지독한 환상에 사로잡혀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에 순식간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채 이 다경도 안 되어 수천 명의 금군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백여 명이 훨씬 넘는 제마단 단원들이 죽거나 다쳤다.

갈수록 상황이 심각해졌다.

수십여 명의 곤륜과 전진의 제자들이 서둘러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커다란 원의 형태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각자 품속에서 한 움큼의 부적을 꺼내 허공에 던지며 서둘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천지지지여지아지(天知地知如知我知)…….”

“천지지지여지아지(天知地知如知我知)…….”

놀랍게도 그들이 허공에 던진 부적들이 수백 수천 마리의 화조(火鳥)처럼 허공을 누비기 시작했다.

채 일각도 안 되어 서로를 죽일 듯이 미쳐 날뛰던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금군 수천 명과 제마단 단원 수백여 명이 죽거나 다쳐서 전력에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다.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와 사상자의 숫자로 토벌대의 기개를 가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이것은 왕조 간의 권력투쟁도 아니고 나라 간의 영토 싸움도 아니다.

이건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 대상의 실체도 모호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악(惡)과의 싸움이다.

이건 차원과 차원의 전쟁이다.

그래서 바깥세상에서 절대적 힘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상대와 대적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 싸움은 필패다.

차원의 힘은 차원의 힘만으로 대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 싸움이 기존의 전쟁과는 양태가 다르다는 걸 정확히 인지해야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커다란 웅덩이를 파서 죽은 사람들을 서둘러 매장하고 금군과 토벌대는 다시 삼계의 중심을 향해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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