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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序幕)② 살인혈첩(殺人血帖), 철막(鐵幕)의 살
인(殺人)
[1]
그는 일신에 낡디낡은 흑포(黑袍)를 걸치고 머리에는 깊숙이 죽립(竹笠)을 쓴 채 한
자루의 칼에 몸을 의지하고 무림에 출현했다.
때는 만력(萬歷) 이십 이 년.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출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삼십 세를 갓 넘은 젊은 낭
인무사 정도로만 모두들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 전 무림은 경악했다. 그가 묘강(猫疆)의 마군(魔君)인 구독잔마(九毒殘魔
)를 운남성(雲南省)에서 단 삼 초 만에 목을 날려 버렸을 때, 절강(浙江)의 명숙 천
수신마(千手神魔) 구여해(丘如海)를 단 일 초에 양팔을 잃게 하였을 때, 전 무림은
경악하다 못해 불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하의 어떤 고수도 그의 칼 아래 단 삼 초를 넘기지 못했던 것이다. 중원인들은 곧
그를 백 년 전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였던 도성(刀聖) 유백(柳白)과 견주기를 서
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도담후( 潭侯).
별호는 만승금도(萬勝金刀)였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게도 그는 무림에 등장한 지 꼭 육 개월 만에 다시 모습을 감추
어 버린다. 숱한 의문과 의혹을 남긴 채로.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만력 사십 이 년.......
[2]
<극비살인지령(極秘殺人指令).
집행자: 무정도(無情刀).
집행대상자: 만승금도(萬勝金刀) 도담후( 潭侯).
대상자거처: 사천(四川) 무산(巫山) 철마보(鐵魔堡).
무공등위: 초일급. 천절금도(天絶金刀)를 이용한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는 당대무
적이며 현문강기(玄門 氣)를 깊이 체득하여 전신이 도검불침(刀劍不侵)임. 생혈(生
穴)과 사혈(死穴)의 구분이 없음.
주의사항: 철마보(鐵魔堡) 입구에서 그의 거처에 이르는 곳까지 수십 개의 사진(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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陣)과 수백 개의 기관(機關)이 설치되어 있음.
게다가 도담후가 직접 키운 백 명의 절정고수들이 철통같이 그를 지키고 있음. 아울
러 철마보 내에는 특수하게 훈련된 천여 마리의 야효(夜梟:올빼미)와 산응(神鷹:독
수리)이 항상 철마보 위를 날아다니며 철저히 지키고 있음. 정면돌파는 불가능함.
기타 필요한 일체는 첩지(帖紙)와 함께 보낸 자료를 참조할 것.>
[3]
붉은 첩지 위에 쓰여진 검은 글씨.
그 글씨는 흡사 사망인(死亡印)인 양 촛불 아래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얇은 소책자가 놓여있다. 촛불 위에서 그 두 가지 물건을 바라보는 한 쌍
의 눈은 무감각하게 빛나고 있었다.
"......."
백발, 아니 은발(銀髮)이라 함이 더욱 어울리리라. 윤기 흐르는 백발을 단정히 백건
(白巾)으로 묶은 오순 가량의 노인, 두 눈은 냉정하다 못해 차디찬 얼음 조각을 보
는 듯하다.
각진 얼굴은 왠지 음산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사이한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
다. 왼손에는 석 자 길이의 금도(金刀)를 쥐고 있었는데 오십여 세의 나이치고는 그
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생애의 파란 탓에 이마의 주름살이 많아서일까?
이 노인이 만승금도(萬勝金刀) 도담후라면 믿겠는가?
또한 신비에 싸인 철마보(鐵魔堡)의 보주이기도 하다. 주름진 얼굴과 백발이 성성한
모습과는 달리 섬뜩하리만큼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그는 항시 천절금도를 손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가슴에 품고 잔다. 그의 전신은 언제나 무섭도록 긴장되어
있다. 단련된 무혼(武魂)이 습관적으로 배인 탓이다.
지금 그의 시선은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두 동공에 촛불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 비쳤다. 그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를 확실히 죽였어야 했다.'
파르르.......
백미가 떤다.
'단 한 순간의 실수가 지금에 와서 내 마음을 긴장시킬 뿐더러 숨통마저 조이고 있
다.'
무엇을 염려하는 것일까?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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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없이 그는 금도를 뽑았다. 순간 방 안이 온통 눈부시면서도 음산한 금빛 광
채로 휩싸였다.
환상인가?
촛불의 불꽃이 순간적으로 세 개로 갈라졌다가 합쳐졌다.
아! 언제 금도를 휘둘렀단 말인가?
'후회는 없다. 어차피 이십 년 전 그 때... 나의 혼은 하얗게 재가 되도록 태울 수
있었으니까.......'
철컥!
나올 때와는 달리 도집에 꽂을 때는 소리가 났다.
'하늘과 땅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럼 없이 살아온 오십 인생... 이제 더 무엇이 두려
우랴?'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어 걸음을 옮겨 휘장이 쳐져 있는 옆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옆방은 침실이었다. 침상은 검박한 나무침상이었다. 침상 옆에는 한 명의 여인이 공
손히 서 있었다.
"의부님."
양녀였던가?
자세히 보면 여인이라기에는 아직도 소녀 티가 풍겼다. 십 칠팔 세쯤 되었을까? 백
합처럼 깨끗하고 난초처럼 청초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소녀가 허리를 나직이 구부렸
다.
도담후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자애롭게 말했다.
"아직 침소에 들지 않았느냐?"
소녀는 눈을 들며 생긋이 미소지었다. 두 눈이 너무나 깨끗하고 지순해 보였다.
"의부께서 아직 침소에 들지 않았거늘 어찌 소녀가 먼저 잘 수 있겠어요?"
"허헛......."
도담후는 가볍게 웃었다. 도담후는 이십여 년 전부터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심지
어는 자신이 직접 키운 백 명의 고수들조차 완전히 신임하지 않았다. 다만 오직 한
명만은 믿었다. 바로 눈 앞의 소녀였다.
손미(孫媚).
자신이 한때 지극히 사랑했던 한 여인의 혈육이었다. 그 여인과 맺어지지 못한 그로
서는 손미는 쓰라리면서 달콤한 추억이 깃든 존재였다. 그 여인이 죽은 이후 그가
대신 맡아서 키웠다.
현재 나이 십 팔 세였다.
비록 딸처럼 키웠으나 손미는 자라면서 그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여인과 닮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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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 일종의 애정마저 그녀에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손미를 믿지 않겠는가?
"이제 그만 가서 쉬거라."
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손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의부님."
손미는 공손히 대답한 후 다가왔다.
"옷을......."
그녀는 도담후의 곁으로 가 그의 장포를 벗기려 했다.
"허헛... 참, 괜찮대두......."
하나 그는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손미는 그의 곁에서 고개를 숙인다. 고개 숙인 그
녀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워 자칫 도담후는 과거의 연인을 보는 듯한 달콤함을 느
꼈다.
손미는 뒤로 돌아가 그의 장포를 벗겼다. 그때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도
담후는 느끼지 못했다. 이윽고 겉 장포가 벗겨지자 그의 등 한복판에서 이상한 물건
이 나타났다.
그것은 거울이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둥근 금빛 거울이 끈에 묶여 등 한 복판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
을 보는 순간 손미의 눈이 경련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녀의 떨리는 손이 거울을 향
해 뻗는 것이 아닌가?
도담후는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손미, 이제는 가서......."
문득 그의 말이 끊어졌다. 갑자기 등 뒤가 허전해진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쨍그랑......!
그의 등 뒤에 매달려 있던 금빛거울이 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도담후는 흠칫하면서 몸을 돌렸다.
"손미!"
손미는 안색이 하얗게 탈색한 채 서서 겁먹은 눈으로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금빛 거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도담후가 몸을 돌린 그 순간, 도담후의 등 뒤에서
묵광(墨光)이 번뜩 일었다. 도담후의 동공이 크게 벌어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경악과 고통, 그리고 회의에 찬 표정으로 그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우... 욱!"
정작 비명은 뒤늦게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은 자신의 앞가슴을 내려보고 있었다.
한 자루의 검은 빛이 도는 칼! 칼 끝이 어느 새 등을 뚫고 가슴까지 삐죽이 튀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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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있는 것이 아닌가?
"누... 누구냐?"
촤악!
칼이 뽑혀졌다. 분수 같은 핏줄기가 그 바람에 등과 가슴으로 동시에 분출되었다.
동시에 도담후의 눈 앞에 한 명의 흑의(黑衣)를 입은 미청년이 나타났다.
흡사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그는 나타났다.
극히 섬세하게 생긴 미청년이었다. 아니, 여인처럼 곱게 생겼다. 그에게서는 아찔할
정도의 극미(極美)한 매력이 넘쳤다.
"......!"
도담후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불신의 눈빛으로 자신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피라
는 것을.......
도담후는 눈 앞의 흑의청년의 존재를 무시하고 힘겹게 시선을 손미에게 돌렸다.
"손미... 네가... 나를......?"
그의 시선은 절망을 담고 손미의 두 눈에 꽂혔다. 손미는 구석에 등을 붙인 채 격렬
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손미의 커다란 두 눈에는 온통 후회와 고통, 두려움이 뒤엉
켜 있었다. 눈물까지 그렁하게 고인 채 그녀는 계속 와들와들 떨었다.
"의... 부님."
지금 이 순간에서야 그녀의 마음 속에는 극도의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너
무도 늦은 후회였다.
이때 미청년의 입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탓할 필요는 없소. 그녀의 마음이 배신한 게 아니라 그녀의 몸이 배신한 것
이니까."
도담후의 안면은 더욱 창백해졌다. 하얗다 못해 푸르게까지 변색되었다.
"너는... 누구냐?"
미청년은 입가에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같은 남자가 보더라도 반할 정도
의 아찔한 미소였다.
"나는 당신의 삶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려는 분이 보내서 왔소."
순간 도담후의 눈이 공허하게 빛났다.
"그가... 그가... 너를 보냈구나. 각... 오는 하고 있었... 지만......."
도담후의 머릿속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줄은......."
미청년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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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후, 당신은 실수를 한 거요. 첫째는 여인이란 존재를 너무 믿은 것이었고, 둘
째는 그 여인에게 자신의 급소를 가르쳐 준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소."
"......."
"여인이란 말이오, 사랑에 눈이 멀면 어떤 행동이라도 해낸다는 것을 당신은 몰랐던
것이오."
"으하하하하핫......!"
갑자기 도담후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 광소는 어딘가 모르게 짙은 허무의 기운
이 어려 있었다. 그는 곧 웃음을 그쳤다.
그는 구석에서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미를 응시하며 뭐라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손미의 두 눈에 가득 찬 눈물과 그 속에 서린 후회의 빛을 발견한 그는 자신
의 모든 분노를 덮기로 했다.
그는 허망한 음성으로 탄식하듯 말했다.
"손미... 너를 탓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흑의 청년에게 돌아갔다. 이미 그의 오른손은 천절금도를 뽑고 있었다.
번... 쩍!
금빛이 휘황하게 물들면서 상상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그의 칼 끝이 흑의청년의
목을 노렸다. 그야말로 가공할 쾌도(快刀)였다.
미청년은 여전히 아름답게 웃으며 태연히 말했다.
"당신의 현문강기는 이미 깨어졌소, 도담후."
스윽!
그의 수중의 묵도(墨刀)가 비스듬히 움직였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움직임
이 완만하고 느려 보였으나 일단 펼쳐지자 섬광처럼 작렬했다.
"헉!"
두 자루의 도가 교차하자마자 도담후의 경악성이 울렸다. 그는 뒤로 칠팔 보나 밀려
나갔다. 이어 힘없이 벽에 기대더니 회의에 찬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도성(刀聖) 유... 유백(柳白)의... 무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
퍽!
그의 복부가 갈라졌다. 동시에 핏줄기와 함께 내장이 흘러내렸다. 오장육부가 모조
리 갈라터진 복부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도담후는 그것을 막을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는 고통스런 시선으로 미청년을 응시
했다.
"유... 유백의 후예냐?"
미청년은 담담히 웃었다. 도담후의 허연 눈썹이 가늘게 경련했다. 그는 벽에 기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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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한 손으로 천절금도를 짚고 중얼거렸다.
"차라리... 마음은 평안하구나."
그는 어지러운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지난 이십 년 세월은... 순간 순간이 고통의 연속... 이었다. 이십 년 동안... 나
는 긴장 속에서... 몸과 마음이 너무도... 늙어버렸지."
그랬던가? 그래서 그의 모습이 나이보다 그토록 훨씬 늙어 있었던가?
미청년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문득 도담후가 안간힘을 쓰듯 최후의 음성을 짜
내었다.
"하지만... 너는 알아야 한다. 나는 죽는다 해도... 아직 무영(無影)과 신산(神算)
이 살아... 있다는 것을."
그는 서서히 무릎을 꺾기 시작했다.
"조화성주(造化城主)... 그... 그의 뜻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
쿵!
결국 그는 쓰러졌다.
거목(巨木)은 쓰러졌다. 한 자루 천절금도로 천하를 경악케 한 뒤 사라져 조용히 철
마보에서 이십 년을 은거했었던 도의 명인, 천절금도는 꺾이지 않았으되 그의 주인
은 쓰러진 것이다.
천절금도는 도담후의 시신 앞에 박힌 채 음울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고목은 죽되
잔뿌리 하나는 남겨 언제고 새로이 태어나기를 암시라도 하는 것일까?
"의... 의부님!"
순간 봇물 터지듯이 손미의 오열이 터졌다. 그녀는 양손으로 한껏 입을 틀어막았으
나 터져 나오는 오열을 채 다 막을 순 없었다.
미청년은 묵도를 도집에 천천히 꽂으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이 눈물어린 손미의 두
눈에 뿌옇게 투영되었다.
"잠깐."
황급한 그녀의 제지에 미청년은 힐끗 돌아서며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러느냐, 손미?"
손미는 눈물로 얼룩진 두 눈으로 두려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를... 설마."
미청년은 문득 감미롭게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손미, 너는 도담후의 죽음을 보고도 나를 따를 수 있단 말이냐?"
순간 손미의 안색이 거듭 변화를 일으켰다. 그야말로 자신의 아픈 곳을 무자비하게
쑤시는 말이 아닌가?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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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는... 당신의 여인이에요."
순간 미청년의 아름다운 두 눈이 갑자기 빛을 상실한 듯 무감동하게 변해버렸다. 음
울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막을 씌우듯 덮어 내렸다. 섬뜩한 변화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전과는 달리 무섭도록 무정해 보였다.
"당신......!"
손미는 그의 그런 변화에 갑자기 어떤 무서운 예감을 느낀 듯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미청년은 앞으로 다가서며 무감동한 음성으로 말했다.
"맞아. 너의 일을 해결할 것을 잊고 있었어. 잊을 뻔한 일을 네가 일깨워 주었다."
번쩍!
묵섬(墨閃)이 일었다. 그 뿐이었다. 청년은 이미 무정하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
손미의 아름다운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두 눈은 공포와 절망을 담은 채 빛을
상실했다.
비틀.......
손미의 가슴에 뜨거운 선혈이 뭉클 솟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썩은 짚단처럼 허물
어지고 있었다. 그 때 문 밖으로 사라져 가는 무감동한 음성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
왔다.
"누가...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는가?"
방 안은 온통 피바다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직 한 자루 금도(金刀)만이 암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문득 피에 젖은 여인의 손 하나가 꿈틀거리듯 움직이더니 금도의 날을 움켜쥐었다.
칼날에 베여 여인의 손에 핏물이 흘렀다. 그러나 여인은 그 칼을 놓지 않았다.
여인은 손미였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하는 듯 금도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녀는 금도의 날을
움켜쥔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얀 손 끝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핏물은
차라리 처절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렇게 온갖 비밀을 간직한 채 잔혹무비한 살인의 막은 내려졌다.
만승금도 도담후의 죽음 속에 담긴 비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유유히 사라져버린 미청년의 정체는? 또한 무영과
신산은 또 누구란 말인가? 이 일막의 살인극이 몰고 올 훗날의 바람은 또 어떤 것인
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바람[風].......
때는 만력 사십 이 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