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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序幕)③ 살인혈첩(殺人血帖), 비극의 사생아(私
生兒)
[1]
<너는 결코 태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인간이다. 너는 신의 저주로 태어
난 비극의 사생아(私生兒)다. 네 몸 속에는 내 피가 흐르고 있으나 너는 나의 아들
이 아니고 나 또한 너의 부친이 될 수가 없다.
하지만 용서해다오, 아들아. 내가 너를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은 운명이 어쩔
수 없이 맺어준 너와 나의 인연 때문이다.......
...... 중략(中略) ......
아들아, 나는 너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으로 키웠다. 그것은 네가 스스로 너
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게끔 해야할 이 아비의 최선이었다.
아들아, 어찌해서 내가 네게 얼굴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는지 의문을 품지 마라.
아 아비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네게 최소한의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아들아, 너와 나의 저주받은 이 운명을 네 스스로 해결하기 전까지는 결코 이 모든
의문을 알려고도 풀려고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다오. 이것은 하늘조차 어찌
할 수 없는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이 잘못 매듭지어진 저주의 수렁이니.......
...... 중략(中略) ......
아들아, 너는 이제 공동산( 山)으로 가거라. 그곳에 너를 위해 한 장의 첩지(帖
紙)를 남겼다. 거기 적힌 대로 행하라.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라. 네가 그것을 이루
었을 때, 너의 몸에 씌워진 저주의 굴레는 벗겨지고 너와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있으
리라.
아들아, 부디 네 앞에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빈다.>
손.
흰 천으로 칭칭 감겨진 두 손은 한 통의 서찰(書札)을 움켜쥔 채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버님......."
피로 쓴 서찰이었고, 그 서찰을 바라보는 두 눈은 차갑고 무심했으나 점차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부의 격동과 고뇌, 그리고 무한대의 고통을 포함한 눈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무심(無心)해 버린 그 한 쌍의 눈은 언제까지고 피로 쓴 서찰에서 떨
어질 줄을 몰랐다.
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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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동산( 山).
도가성지(道家聖地) 공동산에는 수많은 동혈(洞穴)이 있다. 살을 깎고 뼈를 태우는
구도고행(求道苦行)을 하는 장소로서 동혈의 수도 많거니와 때로 어떤 동혈은 너무
나 깊어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곳도 있었다.
석실(石室).
어둠침침한 석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폐쇄된 동혈 내에 있는 곳이다.
석실 중앙에는 사각형의 석대(石臺)가 있었다.
그 위에 붉은 빛이 놓여있다. 한 장의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의 시뻘건 첩지(帖紙)
였다. 그리고 첩지 앞에는 어둠의 화신인 양 어둠과 일체(一體)가 된 한 명의 검은
인영이 정좌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오직 얼음처럼 빛나는 차가운 두 눈과 흰 천으로 칭칭 감
은 두 손[手] 뿐이었다.
슥.......
소리 없이 첩지가 펼쳐졌다. 첩지 속에 간결하게 쓰여진 검은 글귀가 보인다.
<조화성(造化城)을 붕괴시키고 조화성주를 척살(刺殺)하라.>
간단한 글귀였다.
"흐흐흐흐......."
어둠 속의 인물이 음산무비한 괴소를 흘려내며 혈첩을 움켜쥐었다. 어딘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그의 얄팍한 입술이 열리며 그 속에서 자조의 음성
이 흘러 나왔다.
"비극의 사생아(私生兒)."
너무나 한스런 음성이었다.
"결코 태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인간이란 말이지?"
그의 차가운 음성은 어둠을 공명시키며 이어졌다.
"조화성(造化城)... 조화성주라 했던가?"
낮고 살벌한 음성이 들렸다.
"크큿... 어쩔 수 없지. 내 운명을 알아내고 아버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너를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공명은 점점 더 살벌해졌다.
"크크크큿큿......! 조화성! 깡그리 멸(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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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이 끼치도록 비정한 음성이 석벽에 부딪치며 회오리쳤다.
푸스스......!
그 순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혈첩은 파란 연기를 내며 가루로 화했다.
은밀한 곳, 공동산( 山)의 수많은 동혈 중 한 곳에서 벌어진 이 조그만 사건이
훗날 거대한 폭류의 흐름을 조성하게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먼 훗날,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컬어 이렇게 불렀으니.......
역천(逆天)의 겁(劫)이라고!
때는 만력 사십 이 년 겨울의 막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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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신선루의 젊은 주인
신선루(神仙樓).
남창성(南昌城)은 몰라도 신선루를 모른다면 강남인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
것은 천하오대호(天下五大湖) 중 하나로 그 풍광이 수려하기로 동정호(洞庭湖)와 함
께 선두를 다툰다는 파양호( 陽湖)의 호숫가에 신선루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신선루는 그 규모 또한 엄청나게 크다. 파양호의 수면에 수백 개의 기둥을 박아 그
위에다 누각을 지어, 마치 멀리서 보면 호수 위에 하나의 탑(塔)이 떠 있는 듯 신비
해 보이기까지 했다.
또한 주루의 벽과 지붕은 어린아이 몸통 굵기의 청죽(靑竹)으로 만들어 탈속한 느낌
이 들게 한다. 어디 그 뿐이랴? 폭은 그다지 넓지 않으나 호변을 따라 무려 백여 장
이나 길게 뻗어있어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
창가에 앉으면 바로 파양호를 볼 수 있었다. 특히나 신선루에서 바라보는 파양호의
석양은 가히 절경을 이룬다. 그로 인해 남창성은 물론 강서성(江西省)의 명물로 손
꼽혀 이름난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신선루에서 일하는 점원들이 모두 여인, 그것도 한결
같이 꽃같이 아름다운 미녀들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신선루의 요리 맛이야말로 일품이었다. 그 중에서도 파양호에서 갓 잡아 올린
잉어회를 곁들여 신선루에서 직접 제조한 신선주(神仙酒)를 마시는 기분은 정녕 신
선이 부러워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어찌 이곳이 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루지 않겠는가?
신선루의 한 자리.
한눈에 호반을 내려볼 수 있는 곳으로 특석이었다. 지금 그곳에 두 명의 노인이 앉
아 술을 들며 담소하고 있다. 나이는 모두 오십대 가량에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식탁에 오른 요리는 웬만한 부호가 아니면 감히 시킬 엄두도
내지 못할 최고급 요리들이었다.
먼저 금포(金袍)를 입은 뚱뚱한 노인- 이 근방에서 그를 모르는 자는 없다해도 과언
이 아니다.
금백만(金百萬).
이것이 그의 이름인지 아닌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
렇게 불렀다. 그것은 그가 강서제일의 거부였기 때문이다.
대체 그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 역시 없다. 그의 상권(商圈)은 남창성은
물론, 강남 전역에 뻗치고 있어 상계의 거목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가 기거하는 만금산장(萬金山莊)은 그 규모와 화려함에 있어 당대의 황제 만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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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歷帝)가 사는 자금성과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한 예로 만금산장이 얼마나
넓은지 그곳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으면 하루 동안을 헤매도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한편, 만금장주 금백만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노인은 화복(華服)을 입은 청수한 인상
의 노인이었다. 그는 멋진 턱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윤기가 자르르
감도는 흑염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노인의 눈은 마치 어린아이의 눈처럼 맑아
보였다.
화복노인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의 음식 맛은 상당히 좋군. 헛헛... 자네가 왜 딴 곳을 마다하고 굳이 이곳으
로 오자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네."
금백만 노인은 미소지었다.
"강북의 음식 맛이 어찌 강남을 따르겠는가? 특히 이 신선루는 강남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라네."
화복노인은 술 한 잔을 들이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음식 맛도 음식 맛이지만 이곳의 풍취는 정말 놀랍군?"
그는 감탄한 듯이 푸른 호수면으로 맑은 눈길을 돌렸다.
"호수 위에다 이런 곳을 만든 이 신선루 주인의 안목에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
군, 그래."
그는 분주히 좌석 사이를 오가고 있는 날씬한 몸매의 미녀 점원들을 눈으로 좇으며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게다가 강남의 미인이란 미인은 모두 이곳에 있는 것 같구먼."
그 말에 금백만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이 사람아, 그런 말 하지 말게. 강북의 절세미녀를 일곱 명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또 미인 타령인가?"
화복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헛기침했다.
"험! 세상에 미인이 많다고 싫어하는 남자를 보았나? 그런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위
선자이네. 미인은 그저 다다익선(多多益善)인 법이네."
"핫핫핫핫! 이 사람, 여전한 호색가구먼?"
"헛헛헛... 아직 늙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두 오십대의 노인은 우의가 깊은 사이인 듯 서로 농을 주고받으며 파안대소했다. 그
야말로 화기애애한 정경이었다.
금백만과 화복노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곳을 향해 한 명의 미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화복노인은 그녀를 본 순간 입가로 가져가던 술잔을 멈춘 채 흠칫하는 표
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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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일신에 취록색 궁장(宮裝)을 입은 미녀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절색이었던 것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그녀에게서 고귀함과 요염함이 동
시에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궁장미녀의 피부는 희다못해 투명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눈동자는 파양호
전체를 축소해 놓은 듯 한없이 깊어 보여 보는 이의 넋을 앗아갈 지경이었다.
딩딩.......
미녀가 교족을 옮길 때마다 취의궁장에 매달려 있는 금은옥의 장신구들이 부딪쳐 맑
고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화전, 취요, 금작, 옥소두 등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
신구들이 마침 서녘으로 기우는 햇살을 받아 온통 휘황한 광휘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신선루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손님들은 술잔을 멈춘 채, 또는 대화
를 하다만 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궁장미녀는 손님들 사이를 사뿐사뿐 걸으며 아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말을 건네
며 눈웃음을 보냈다. 그녀의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희색이 만면해졌다.
이윽고 궁장미녀는 두 노인이 있는 곳까지 다가오더니 금백만을 향해 나붓이 세류요
를 숙인 후 꽃잎 같은 입술을 열었다.
"금대인(金大人)께서 오셨군요."
아부하는 자세도, 그렇다고 오만하지도 않은 인사였다. 금백만은 너털웃음을 치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헛헛! 취랑(翠娘)의 아름다움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 같구려. 어떻소? 술 한 잔
받지 않겠소?"
취랑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만 들어도 취하는 듯하옵니다. 제가 어르신의 잔을 들었다 여기시고 계속 두
분이 즐기시기 바라옵니다."
그녀는 살짝 목례한 후 옆으로 비켜서 다시 걸어갔다.
딸랑... 딸랑.......
가벼운 옥장신구가 부딪치는 교음은 흡사 선녀의 비파음을 듣는 것 같았다. 그녀가
멀어져가자 화복노인은 들릴락 말락 하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허어... 굉장한 미인이군!"
금백만은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 강남에서 취랑보다 더 아름다운 미녀는 없을 걸세."
화복노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북에도 없네. 그것은 내가 보증하지. 내 생전 저런 미인은 처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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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백만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 쳤다.
"헛헛, 이 친구 단단히 반한 모양이군."
화복노인은 문득 진지하게 물었다.
"대체 저 놀라운 미인은 누군가?"
금백만은 만면에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신선루를 경영하는 여인이네."
화복노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주인이란 말인가?"
"주인은 따로 있네. 그녀는 다만 경영을 맡고 있을 뿐이지."
화복노인의 눈에 이채가 일어났다.
"혼인은 했나?"
금백만은 실소를 지었다.
"이 친구야! 공연히 엉뚱한 마음 품지 말게나. 자, 술이나 들게. 자네가 전 재산을
몽땅 준다해도 눈 하나 깜박 않을 여인이니까 말이야!"
화복노인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후후후,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군."
"그렇네. 솔직히 말해 세상에 황금으로 안 되는 일이 뭐가 있겠나?"
금백만은 술을 쭉 들이키며 탄식하듯 말했다.
"황금이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하지만 어찌 사랑까지 살 수 있겠나?"
"그렇다면?"
"임자가 있지. 그녀가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네."
"그가 누군가?"
금백만은 신선루의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곳의 주인일세."
"신선루 주인?"
"그렇네. 그는 이제 이십 세도 채 되지 않은 약관의 청년일세. 그리고 진정한 풍류(
風流)를 아는 아주 멋진 청년이지."
"겨우 약관이라고?"
"허허, 끝까지 들어보게나. 그의 부친은 과거 상당한 거부였지. 그런데 부친이 죽은
후 바로 그 청년이 이 신선루를 경영하게 되었네."
화복노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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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은 이 신선루 외에도 남창성 내에 몇 개의 주루(酒樓)와 고서점(古書店),
전장(錢莊), 포목점, 골동품점까지 경영하고 있는 상계(商界)의 젊은 귀재일세."
화복노인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헛헛헛! 그는 이 금백만까지 압박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야. 그의 사업 수완
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상술의 귀재란 칭호를 들을 만큼 놀랍단 말일세."
화복노인은 바짝 궁금증이 치미는 듯 물었다.
"그 젊은 친구의 이름이 무엇인가?"
"장천린(蔣天麟)이라고 하지."
"장... 천... 린......?"
벽옥빛 술이 담긴 옥배는 눈처럼 희고 투명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대의 진품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옥배를 잡은 손은 그보다 더
욱 희고 깨끗했다. 너무도 희고 투명하여 여인의 손을 연상케 했으나 그 완벽에 가
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손의 주인은 분명 남자였다.
미인의 섬섬옥수가 무색해질 조각 같은 손의 소유자, 그는 일신에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옥색의 유삼(儒衫)을 입은 청년이었다.
이마에는 단정한 유건(儒巾)을 둘렀으며, 허리에는 금으로 장식한 요대(腰帶)를 맸
다. 황금 요대만 하더라도 가히 수만 금의 가치가 있을 만큼 진귀한 것이었다. 그러
나 정작 유삼청년의 용모를 본다면 그러한 것은 그저 부속품에 불과했다.
반듯한 이마는 단아한 기품을 느끼게 했고, 눈썹은 검미(劍眉)라는 표현이 그지없이
어울릴 정도로 짙고 날카롭게 귀 밑까지 뻗쳐 있었다. 두 눈은 흡사 두 개의 보석
을 박은 듯 신비무쌍했으며, 코는 우뚝 솟아 힘찬 기질과 더불어 그 유려한 선은 풍
류미를 느끼게 했다.
옥배를 잡고 있는 청년은 체구 또한 당당하여 칠 척을 웃도는 헌칠한 키에 딱 벌어
진 어깨가 그가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청년, 그가 바로
신선루(神仙樓)의 주인이었다.
장천린(蔣天麟).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남창(南昌) 사람이 아니거나 바보천치일 것이다.
"......."
그는 지금 신선루에 딸려있는 한 채의 누각에서 파양호에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홀로 술을 들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 석양이 물들어 더욱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석양빛을 받으며 창가에 선 채 파양호를 내려다 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조각처럼 보
였다.
지금 그가 가볍게 쥐고 있는 옥배에는 술이 반쯤 남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혹 당대의 명시구(名詩句)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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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은 점점 짙어져 파양호를 온통 물들였으며 청년 장천린의 모습은 그에 따라 더
욱 신비한 느낌이 들게 했다. 문득 문이 살며시 열렸다.
취의궁장을 입은 미녀가 방 안으로 소리 없이 들어섰다. 그녀는 바로 신선루를 경영
하는 미녀 취랑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취옥교(翠玉嬌)다.
그녀가 신선루에 들어온 것은 이 년 전이었다.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장천린만이 그녀의 본명이 취옥교이며,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를 알 뿐이었다.
신비의 미녀 취옥교는 아름다운 눈에 어떤 동경을 담은 채 여전히 호반을 향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장천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렸다.
陽湖邊一色低
黃茅 裏 鳴
丈夫飄落今如此
一曲長歌楚水酉
파양호변에 날이 저물어
풀섶엔 자고새 설리도 운다.
장부의 뜬 마음 둘 곳도 없나니,
한 곡조 길게 빼어 노래 부를까 하노라.
"......!"
취옥교는 도취된 듯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야말로 지금 이 순간의 정취와 사나이의
기개가 잘 어울린 노래가 아닌가?
그녀는 살며시 다가가더니 장천린의 어깨에 섬섬옥수를 얹었다. 장천린은 고개를 돌
렸다. 그의 영준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 왔소, 취누이?"
"후훗, 정말 뜻밖이군요. 제가 오는 것도 모르고 낭만에 젖어 있다니요?"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석양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그만 흥취가 솟아 올랐소."
취옥교는 가볍게 손을 뻗어 장천린이 들고 있던 옥배를 빼앗았다.
"정말 당신답지 않은 낭만적인 말이군요."
장천린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후후, 취누이는 그럼 내가 낭만도 모르는 삭막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소? 그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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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인걸."
"호호호......!"
눈부신 웃음이었다. 취옥교는 교소를 흘리며 빼앗은 술잔을 고혹적인 입술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장천린은 검미를 쫑긋하며 주의를 주었다.
"많이 마시지 마시오, 취누이. 그것은 사천(四川) 특산의 천일취(千日醉)요. 한 번
취하면 최소한 사흘은 잔다는 독주요."
취옥교는 요염한 눈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제가 취할까봐 걱정이세요?"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하기사 미녀의 취한 모습도 아름답기는 하겠군."
"호호호호......!"
취옥교는 또다시 교소를 터뜨리며 천일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뺨에는 금세 발
그레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술 탓일까? 아니면 석양 탓일까? 그녀의 그런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선정적인 느낌
마저 주었다.
"천린, 당신 앞에서만은 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장천린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후회할 것이오. 남자는 여자의 허를 보면 때때로 음흉한 늑대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요."
취옥교는 까르르 은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늑대가 되면 어떻게 행동하죠?"
장천린은 씩 웃으며 말했다.
"잠자는 미녀를 그냥 둘 리가 있겠소? 냉큼......."
취옥교는 목이 타는지 다시 천일취 한 모금을 삼켰다.
"냉큼 어떻게 한다는 거죠?"
"잡아먹어 버리지."
여인의 고혹적인 눈에서 아름다운 광채가 솟아 나왔다.
"후훗... 늑대에게 잡아먹혀도 취하고 싶은데 어쩌죠?"
유혹인가? 그녀의 갸름한 턱이 약간 들려진 채 열기를 발산하며 장천린을 올려본다.
"하하하핫!"
장천린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취옥교는 남은 술을 모두 마셨다. 그녀는 벽옥잔
을 탁자에 내려놓고 빙글 돌아섰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뜻밖에도 그녀가 불시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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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목을 껴안은 것이다.
두 손을 깍지낀 채 목을 안고 발 끝을 들어올리자 그녀의 얼굴은 장천린의 얼굴에
닿을 듯이 다가왔다. 그녀는 입술을 장천린의 귓가에 대다시피 하며 속삭였다.
"당신은 아직 제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장천린은 코 끝을 간질이는 그녀의 체향을 맡으며 중얼거렸다.
"흠, 냄새가 무척 좋군."
"호호, 다행이에요."
취옥교는 더욱 교구를 밀착시켰다. 장천린은 그녀의 붉게 타오르고 있는 뺨을 쓰다
듬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어조였다.
"옥교, 신선루에는 더 이상 나가지 마시오."
뜻밖의 말에 취옥교는 움찔하더니 붉은 입술을 비죽이며 물었다.
"왜죠?"
장천린은 그녀의 뺨의 감촉이 손 끝에 묻어날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웃는 모습이 별로 좋지 않거든."
취옥교의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왜 그것이 싫을까요?
애교 띤 음성이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수려한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아마 당신을 사랑하기 떄문인 것 같소."
"!"
취옥교는 잠시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불현듯 그녀의 호수같이 깊은 눈에서 뽀얀 안
개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가느다란 음성으로 말했다.
"옥교가...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는 걸요."
장천린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갸름한 턱을 치켜올린 후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것 말고 또 있소."
취옥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또 뭐죠?"
"그건 말이오."
장천린은 그녀의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세류요를 한 손으로 감으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는 것이오."
취옥교의 교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그는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섬광과도
같은 전율이 스치는 것이요, 그녀의 영혼이 아득한 희열에 잠겨 파동 치는 것을 의
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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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請婚)... 하시는 건가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장천린은 담담히, 그러나 확신있게 대답했다.
"그렇소."
취옥교는 망연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안개가 짙어지더니 급기야는
눈물이 담뿍 고였다. 그러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기쁘... 군요!"
그녀의 눈망울이 온통 비에 젖는다.
"옥교는 정말...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춰 버리기를 바랄 만큼 기뻐요."
장천린은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사랑하오."
그런데 막 입맞춤을 하려는 순간 취옥교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뺨으로 눈
물이 방울지며 떨어졌다.
"아니? 왜... 우는 것이오?"
장천린이 놀라 묻자,
"그건... 너무너무 기쁘기 때문일 거예요."
"허... 기뻐서 운다?"
취옥교는 문득 그의 손을 이끌었다.
"만져 보세요, 옥교의 작은 가슴은 지금 터질 듯이 뛰고 있어요."
그러나 장천린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착 가라앉은 음성으
로 말했다.
"옥교, 솔직히 말하시오."
"?"
"지금 당신의 눈에는 기쁨이 아닌 슬픔이 깃들어 있소."
장천린은 그녀의 허리를 놓아준 후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색
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하오. 나의 청혼이 무례했던 것 같소."
취옥교의 교구가 바르르 떨었다. 마치 비바람을 맞는 풀잎처럼.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녀는 강하게 도리질하더니 애 타는 듯한 음성으로 호소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옥교는 당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단 말이에요."
장천린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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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거짓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천린... 흑."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취옥교의 행동에 장천린의 철석같은 마음은 그만 눈처
럼 녹아 버리고 말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울지 마시오. 옥교."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취옥교
의 오똑한 코를 스쳐 꽃잎 같은 입술을 살며시 덮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취옥교는
눈을 꼭 감은 채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입맞춤. 황홀하고 짜릿한 청춘(靑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여인은 사
나이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입술을 벌리고 있었다. 마치 벌나비를 향해 꽃술을 흔들
며 잎을 벌리는 장미처럼.
두 남녀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혼연일체가 되어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
다.
-천린(天 ), 당신은 저의 마음을 모른답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당신의 청혼에 저의 영혼이 온통 녹을 듯하여지는 것을... 하지만 말이죠. 저는 결
코 당신과 어울릴 수 없는 몸이랍니다. 당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몸이기에
평범하게 당신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되는걸요. 천린(天 ).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
는 마음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거예요... 천린.......
장천린은 긴 입맞춤을 끝낸 후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옥교, 당신의 입술에서는 장미향이 나는군."
취옥교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 어렸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당신만을 위한 향기가 될 거예요."
절세미인의 입술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올 때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나이가 아닐
것이다. 청년상인 장천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이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취옥교를 격정적으로 끌어안았다. 그의 손은 곧바로 여인의 가슴을 더듬어갔다. 손
바닥에 닿는 감촉은 부드러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탄력이었다.
"음."
취옥교는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당신을 내게 보내 준 것은 하늘의 축복이오."
취옥교는 몸을 가늘게 떨더니 갑자기 장천린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마구 부벼댔
다.
"옥교도 당신을 만나게 해준 신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옥교."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불꽃을 내며 부딪쳤다. 이번에는 더욱 뜨겁고 강하게.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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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입술이 벌어지고 뜨거운 입김이 오고 갔다. 여인의 몸에서는 더욱 달콤한 장미향
이 풍겼고, 사나이의 집요한 공세(?)가 그녀의 입술 깊숙한 곳으로 유영해 들어갔다
"아!"
여인은 달뜬 신음을 발하며 해파리처럼 교구를 늘어뜨렸다. 어느덧 그녀의 몸에서
선녀의 날개 같은 옷자락이 소리없이 흘러 내렸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여체의 관능적인 요소마다 스며들어 황홀한 그늘을 이루고,
그곳으로 사나이의 욕망은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조금도 처지지 않은 여인의 젖가슴은 팽팽하게 발달했으며 기름진 윤기가 흘렀다.
그 정상에 자리한 연분홍빛 돌기는 아직껏 한 번도 타인의 손길을 접해본 적이 없는
듯 순결해 보였다.
그 연분홍 돌기를 조각같이 섬세한 사내의 손가락이 애무한다. 이윽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타는 듯한 입술로 냉큼 삼켜 버린다. 여인은 전류에라도 감전된 듯이 바
르르 경련했다.
"사랑하오."
장천린은 취옥교의 나신을 침상에 눕혔다. 취옥교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도 갈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저도... 요."
장천린은 옷을 벗었다. 노을이 사면(斜面)으로 비쳐드는 방 안에 우뚝 선 그의 육체
는 마치 하나의 탑처럼 늠름해 보였다. 장천린은 알몸이 된 채 침상에 올랐다.
취옥교는 눈을 감고 그의 탄탄한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와 남은 더 이상 주저
하지 않았다. 무언의 합의로 그들은 뜨겁게 서로를 요구하고 응했다.
취옥교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몸을 사리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태워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도.
"옥교."
"아아... 천린."
남녀의 몸이 펄펄 끓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렬하게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
다. 석양은 절정의 고비에 올라 황홀한 잔광을 남녀의 육체 위로 쏟아 부었고, 마침
내 한 치의 틈도 없이 결합된 두 육체는 희열과 고통, 환희로 범벅이 된 채 떨었다.
-사랑해요. 천린.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가슴을 스치는 불
안은 무엇인가요?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인 양 불안한 것은? 당신이 없는 밤이
면 항시 베갯잇이 젖는 애달픔 속에 그 불안한 예감을 지우려 몸부림치죠. 사랑해요
, 천린. 이것만은 진심이에요. 설사 우리가 어떤 불가항력으로 인해 갈라진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예요. 사랑합니다. 천린.......
노을이 졌다. 파양호반에 어둠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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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의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으나 불은 켜지지 않았다. 그런 채로 밤이 이슥하고
다시 새벽이 올 때까지도 불은 켜지지 않았다. 굳이 불을 켤 필요가 있었을까?
새벽 공기가 누각의 창으로부터 흘러들어 온다. 시리도록 차고 맑은 공기였다. 침상
위에 장천린과 취옥교는 서로를 껴안은 채 나란히 누워있었다.
"옥교, 당신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오?"
취옥교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살짝 드러난 매끄러운 어깨
의 곡선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장천린의 단단한 가슴에 눌려 약간 옆으로 비어져
나온 뽀얀 젖가슴의 일부는 몹시 육감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장천린의 말에 그저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대답을 재촉하듯 눈
짓을 보내자 그녀는 교태 어린 웃음을 흘렸다.
"후훗...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난 날을 잊을 리가 있나요?"
"삼 년 전 만가산(萬家山)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던 나는 눈 속에 쓰러져 있는 당신
을 발견하고 깜짝 놀랬지."
그는 당시를 회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처음에는 동사(凍死)한 시체인 줄 알았소."
취옥교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당연하지요. 당시 저는 극심한 상처를 입어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렇소. 나도 당신 가슴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무림인들끼리 싸우다 죽은 것
으로 알고 마음이 언짢아져 그냥 가려고 했지."
그는 취옥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그러다 당신의 아름다움에 놀라 상세를 살피게 된 것이지."
취옥교는 코웃음 쳤다.
"흥! 그럼 제가 추녀였다면 꼼짝없이 죽었겠군요?"
장천린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이동하여 취옥교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낭랑하
게 웃었다.
"하하! 어쨌든 당신은 살아나지 않았소?"
취옥교는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간지러워요."
"응? 어디가?"
장천린은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가락으로 그녀의 젖꼭지를 가볍게
비틀었다.
"음... 못써요."
취옥교는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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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
장천린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젖가슴을 유심히 관찰했다. 지난 밤의 격렬한 사랑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티없이 곱던 젖가슴 언저리에 군데군데 붉은 흔적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혀를 찼다.
"쯧쯧, 사랑하는 님의 가슴이 멍들었군."
"정말 악당이군요!"
취옥교는 얼굴이 빨개져 금침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장천린은 짓궂게 말했다.
"어디 그게 내 잘못이오? 나 역시 할퀸 등이 무척이나 아프단 말이오."
그는 정말로 아픈 듯 잔뜩 인상을 썼다.
"어머!"
취옥교는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그의 가슴을 힘껏 꼬집었다.
"아야!"
"정말 계속 그럴 거예요?"
"하하하하!"
장천린은 그녀의 동그란 둔부를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웃
음을 뚝 그치더니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옥교."
"......?"
"삼 년 전 내가 당신의 상처를 치료할 때 가슴에 꽂혀있던 비수를 뽑으니까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취옥교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뭐라고... 그랬죠?"
장천린은 짓궂게 웃었다.
"아파요! 그랬지. 지금처럼 말이오."
취옥교의 얼굴은 그만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용서할 수 없... 음?"
그러나 채 항의(?) 하기도 전에 그녀의 말꼬리가 끊기고 말았다. 장천린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덮어버린 것이었다.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녀가 더 적극적이었다. 처음에
는 거부하는 척하더니 도리어 그녀 쪽에서 장천린의 목을 껴안으며 뜨겁게 요구했다
장천린은 그녀를 안고 위치를 바꾸었다. 그러자 취옥교가 그를 타고 오른 격이 되었
다. 취옥교는 그의 건장한 몸 위에 엎드리며 고운 눈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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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장천린의 입술을 맞추며 손을 움직
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은 섬세하고도 부드러웠다.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장천린
의 몸 구석구석을 헤엄치고 다니는 듯했다. 그야말로 농밀한 애무였다.
새벽의 찬 공기도 아랑곳없이 누각의 공기는 뜨겁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어느덧
파양호반에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출 때까지.......
다시 황혼이 졌다. 어둠이 파양호변을 부드럽게 감쌀 무렵 누각의 문이 열리며 일남
일녀가 걸어나왔다.
신선루의 젊은 주인 장천린과 밤 사이 그의 아내가 된 취옥교였다. 하루 종일 누각
에 틀어박혀 있던 탓인지 두 사람의 모습은 약간 수척해 보였다.
달콤한 피로감 때문일까? 특히 취옥교의 얼굴은 더 수척해 보였다. 반면 한결 성숙
하고 완미(完美)해진 듯도 했다.
장천린은 누각의 계단을 내려와 계단에 매어있던 백마의 고삐를 풀며 말했다.
"옥교, 그럼 남창성에서 장부를 정리하는 대로 금방 돌아오겠소."
취옥교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이제 곧 날이 저물 텐데 내일 아침 가시는 게 어떨까요?"
장천린은 듬직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시오. 한 시진이면 넉넉히 도착할 거리가 아니오?"
그는 눈을 찡긋하더니 그녀의 귓전에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어제 저녁 출발해야 하는데 당신 때문에 늦은 것이오."
취옥교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흥... 제 핑계인가요?"
"하하하! 하긴 내가 좋아 늦었으니 고생해도 할 말이 없소."
그는 가볍게 마상에 올랐다.
"자, 모레 다시 들르겠소."
그는 마상에서 허리를 굽혀 취옥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모레 올 때는 당신을 위해 멋진 선물을 가져오겠소. 하하하!"
그는 호탕한 웃음과 동시에 박차를 가했다.
히히히힝.......
백마는 앞발을 번쩍 들었다가 곧 질풍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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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세요. 천린."
"걱정 마시오, 옥교!"
말이 끝났을 때 말과 사람은 이미 저만큼 멀어져 파양호변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어둠이 곧 시야를 가리웠다.
장천린이 떠난 후에도 취옥교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더
니 몸을 돌려 신선루로 들어갔다.
신선루는 늦은 시각이라 텅 비어 있었다. 탁자와 의자 등속도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
다. 취옥교는 문득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장천린이 곁에 없기만 하면 그녀는 늘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그녀는 신선루를 한 차례 둘러본 후 장천린과 하루 밤과 하루 낮을 함께 보냈던 누
상의 방으로 돌아갔다. 텅 빈 방에서 그녀는 홀로 차를 끓인 후 조용히 의자에 앉았
다.
"......."
찻잔의 차는 식은 지 오래지만 그녀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몸을 일으켜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가볍게 침상 가에 걸터앉은 후 그
녀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쓰다듬었다. 마치 연인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듯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그녀는 침상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몽
롱했고, 뺨은 발그레 화기가 감돌았다. 마치 장천린과의 뜨거웠던 순간들을 회상하
는 듯해 보였다.
한동안 엎드려 있던 그녀는 돌아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여인
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보군요? 언니."
취옥교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창가에
섬세한 그림자 하나가 서있었다.
자의(紫衣)를 입고 있는 소녀였다. 그녀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백
설 같은 피부가 그녀가 입고 있는 자의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강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자의소녀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조각같이 섬세한 얼굴에는 투명한 얼음이 덮인 듯
냉랭하기만 했다. 곁에 있기만 해도 절로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쌀쌀한 느낌이 들게
했다.
자의소녀와 취옥교는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들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대조를 이루었다. 취옥교는 부드럽고 성숙한 아름다움을, 자의소녀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투명한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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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옥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 사매!"
자의소녀는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의 얇은 입술 가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삼 년 만이군요, 언니."
감정이라곤 한 점도 배어있지 않은 싸늘한 음성에 취옥교는 망연자실해졌다.
"그... 렇구나, 벌써 삼 년이나 되었구나."
"왜 그 동안 저에게 한 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죠?"
취옥교가 대답하지 못하자 자의소녀는 추궁하듯 말했다.
"설마 언니는 죽음을 가장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영원히 은폐시키려 한 것은 아니겠
지요?"
"나... 나는......."
취옥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때 언니를 상처 입혔던 냉혈팔숙(冷血八宿)은 그 동안 내가 모두 처치했어요."
자의소녀는 취옥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언니와 내가 사부님께 약속한 기간은 이제 채 보름도 남지 않았어요."
자의소녀는 여전히 창백한 표정을 짓고있는 취옥교가 딱하다는 듯 안색을 약간 풀며
혀를 찼다.
"언니는 지금 환상을 꿈꾸고 있어요, 언니가 마음만 먹으면 천하의 그 어떤 것도 성
취할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남자와 맺어질 수도 있어요.
"나는......."
"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생명의 은인이라는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에게 얽
매이고 있는 거예요."
"아니야!"
갑자기 취옥교는 강하게 부인했다. 그녀는 절실한 어조로 말했다.
"사매, 나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
자의소녀의 안색이 싸늘히 굳어졌다.
"미쳤군요."
그녀는 경멸하듯 잘라 말했다.
"그럴 듯한 외모에 홀려 겨우... 한낱 장사꾼 따위에게 사랑을 느끼다니, 실망이군
요!"
"그는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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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싫어요. 언니! 정신 좀 차리세요 사부님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아아!"
취옥교는 절망의 탄식을 발했다.
"사부님은 용서를 모르는 분이에요. 그 분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분이에요.
언니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언니는 물론 그 장천린인가 뭔가 하는 사내도 죽음을 면
치 못할 거예요."
자의소녀는 약간 부드러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더구나 언니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에게서 스스로 벗어나는 게 도리가 아
닐까요?"
취옥교의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자의소녀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물론 처음에는 고통스럽겠지만 차차 상처는 아물게 될 거예요."
취옥교의 얼굴에 허탈한 기운이 어렸다. 자의소녀가 한 말의 의미를 그녀는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으로 인해 장천린에게 무서운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
. 그 점을 생각하자 취옥교는 한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잘 생각해 봐요. 언니. 그는 그대로가 좋아요. 만일 언니와의 사랑의 불장난으로
그의 목숨이 달아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에요?"
"사랑의 불장난이라고?"
취옥교는 망연자실해졌다.
"언니와 그 자의 세계는 너무나 달라요. 그건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에요."
"그래... 그건."
"그것 보세요. 언니는 현명해요. 상처를 딛고 다시 출발할 수 있어요. 용기를 내요.
취옥교의 얼굴이 쓸쓸해졌다. 자의소녀는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철솔선생(鐵率先生) 왕문헌(王文軒)의 위치도 이미 파악해 두
었어요."
취옥교는 흠칫했다.
"호호... 놀랍게도 그 자는 이곳 남창성에 숨어 있었지 뭐예요."
"이곳에?"
"바로 금백만(金百萬)이란 자로 강남제일의 거부로 행세하고 있더군요."
취옥교는 내심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고 말았다.
'금백만!'
그녀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금대인이... 철솔선생 왕문헌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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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이었다. 언제나 유쾌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 강남제일의 거상 금백만 노인
, 그가 바로 자신의 사부가 죽이라고 명령한 무림(武林)의 신비기인(神秘奇人) 철솔
선생 왕문헌이었다니!
취옥교가 받은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자의소녀는 냉랭하게 말했다.
"냉혈팔숙은 모두 제거했으니 이제 그 자만 죽이면 우리는 사부에게 돌아갈 수 있어
요."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바람결에 촛불이 춤춘다. 흔들리는 촛불을 받아 흑백의 선명
한 윤곽을 이룬 취옥교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보석처럼 아름답던 사랑의 눈동
자도 이제는 생기를 잃은 채 공허하고 쓸쓸하게 변했다.
"언니에게 무조건 강요하지는 않겠어요. 단."
자의소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언니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사부님께 알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
취옥교는 멍하니 침상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자의소녀는 냉막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숨겨진 내심을 탐지하려는 듯이.
한참 시간이 흘러도 취옥교의 입에서 아무런 말을 듣지 못하자 자의소녀는 입술을
잘끈 물었다.
"대체 어떻게 그 이지적이고 차갑던 언니가 이렇게 변한 거죠? 한매설봉(寒梅雪鳳)
취옥교란 존재는 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그녀의 음성은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나 취옥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자의소녀는
최후의 통첩인 양 야무지게 말했다.
"내일 저녁 이 신선루의 주인 장천린은 금백만... 아니 왕문헌(王文軒)의 저택으로
초청되어 갈 거예요."
취옥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의소녀를 바라보았다.
"왕문헌은 비록 극고무상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장천린과 언니를 의심하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허(虛)를 드러내게 될 거예요."
미소녀의 말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얼음가루가 풀풀 날리는 듯 냉막해졌다.
"그렇게 되면 언니의 실력으로 충분히 왕문헌을 제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품 속에서 하나의 목갑(木匣)을 꺼내어 취옥교에게 건네 주었다.
"내일 아침까지 남창성 입구에서 기다리겠어요."
자의소녀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밖을 향해 걸어가며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
다.
"잘 생각해 봐요. 언니."
스... 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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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꺼져버렸다. 창문을 통해 유령처럼 사라진
것이다.
"......."
그녀가 사라진 것도 아랑곳없이 취옥교는 여전히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빛을 잃은
그녀의 두 눈 깊숙한 곳에는 고통과 절망만이 어둠보다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저 막연히... 한 가닥 기대만 했을 뿐이죠.
우리의 사랑은 애초부터 잘못된 인연(因緣)이었어요. 아아! 정녕 어찌할 도리가 없
단 말인가요? 신(神)이시여!
취옥교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또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금침 자락을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천린...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을.'
그녀의 시선이 침상에 놓여있는 목갑에 가 멎었다.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천린... 용서해줘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목갑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둥글게 말려 있는 달걀 모양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보통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취옥교는 한눈에 알아보
았다.
창!
물건을 움켜쥐고 가볍게 힘을 주자 맑은 쇳소리와 함께 눈부신 검광(劍光)이 치솟았
다. 동시에 방 안에는 차가운 한기가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종잇장같이 얇은 한 자루의 연검(軟劍)이었다. 손잡이는 상아(象牙)로 되어
있었으며, 검신에는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보이는 가느다란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봉황(鳳凰)을 새긴 것이었다. 취옥교는 이 검을 잘 알고 있었다. 봉황검(鳳
凰劍)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마(魔)의 검!
그녀는 봉황검을 눈 높이로 들어올렸다.
웅.......
검신이 진동하며 검명(劍鳴)이 울렸다. 마치 오랜만에 세상 공기를 접해 한시라도
빨리 피를 마시고 싶다는 듯이.
똑!
문득 검신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은 취옥교가 흘린 눈물이었다.
'안녕, 천린. 이제 우리는 영원히 이별입니다.'
그녀의 내부에서 고통스럽게 울린 중얼거림. 그것은 운명을 단절하고자 하는 결단이
었다.
밤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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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로(山路)를 말을 타고 달리는 일은 위험하다. 특히나 심야에는 더욱 그렇다.
두두두......!
심야의 만가산(萬家山)을 달리고 있는 마상에서 장천린은 고삐를 잔뜩 틀어쥐고 있
었다. 그는 지금 남창성으로 가는 중이었다.
신선루에서 남창성까지는 대로상으로 가면 약 칠십 리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시간
을 단축하기 위해 험준한 지름길을 택했다. 이 길로 가면 채 삼십 리도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에도 이 길을 많이 달려봤으므로 한밤중이었으나 능숙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후우욱... 꾸꾸룩!
이름 모를 야조(夜鳥)의 울음소리가 칠흑의 산로를 음산하게 울린다. 게다가 짐승들
의 포효소리가 공포스런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장천린은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본
래부터 그의 성품은 담대했다. 도대체가 겁이라고는 모르는 사내였다.
그는 비록 상인이었으나 웬만한 장정 십여 명 정도는 가볍게 때려눕힐 수 있는 호신
무술도 지니고 있었다. 그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어서 평소 신선
루에서 행패를 부리는 건달들은 눈을 씻고 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장천린의 기분은 유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내내 한 여인의 생각만을 하
고 있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반드시 옥교를 아내로 만들어야지.'
그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어렸다.
'그 연후에는... 아버님께서 평생 모아두신 보화를 밑천으로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
장할 것이다.'
장천린. 그는 상술(商術)의 귀재다. 약관 나이에 그가 경영하는 사업들이 한결같이
번창하고 있음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젊었다. 그러기에 그의 가슴에는
보다 큰 야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후후후! 강남은 물론 강북 쪽으로도 상권(商圈)을 넓혀 십 년 안으로 중원제일의
거상이 되리라!'
험한 만가산을 달리면서도 그의 생각은 계속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범선(帆船)을 이용해 바다 건너 파자사국(波刺斯國:페르시아)이나 색
목국(色目國:서양) 쪽으로도 진출할 것이다.'
장천린의 두 눈에는 야심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지펴졌다.
'후후... 옥교와 나란히 그 모든 곳을 누비리라.'
취옥교를 생각하자 그는 감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야천을 응시했
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걸려 있었다. 그는 달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옥교는 지금쯤 잠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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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생달을 향해 중얼거렸다.
'잘 자오. 나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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