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무영과 신산
산로는 순탄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저 멀리 남창성의 전경이 새벽 안개 속에 은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천린
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악몽과도 같은 밤이었다.'
그는 새벽 여명을 받으며 남창성을 향해 속도를 가했다.
획! 획!
새벽의 찬 공기가 뺨을 스치자 지난밤의 공포스러웠던 일들이 점차 기억 저편으로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
장천린은 동이 틀 무렵 자신의 집인 청하원(靑河院)으로 돌아왔다.
비록 엉망이 된 모습이었으나 마침 새벽이라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다만
청하원의 관리인 진(陣)노인이 문을 열어주며 그의 헝클어진 차림새를 보고 깜짝 놀
란 표정을 지었다.
장천린은 그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말았다.
"오는 도중 그만 낙상했지 뭐요? 별 일 없으니 안심하시오."
처소로 돌아온 그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목욕을 한 후 새옷으로 갈아
입었다.
아침 식사를 끝내자 진시가 다 되었다. 과연 약속대로 파자사국의 상인 아라사가 그
를 찾아왔다.
아라사는 금발에 벽안을 지닌 거구의 인물로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복장에
허리에는 짧은 만월도를 차고 있었다.
얼굴은 가파르게 각이 졌으나 젊은 날에는 대단한 미남이었음직한 용모였다. 그는
본시 파자사국(페르시아) 출신으로 그 곳의 귀족이었으나 중원을 자주 오가게 되면
서 색목국(色目國: 서양국가) 등에서 나는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와 파는 상인으로
변신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 번 돈으로 비단을 비롯한 중원의 특산물들을 사서 파자사국에 되팖
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무역상으로 대성한 인물이었다.
그는 장천린과 꽤 오래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다.
사 년 전, 그는 범선을 타고 중원으로 오던 중 태풍을 만나 난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 극심한 고생을 치를 때 우연히 장천린이 그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아라사는 장천린과 거래하게 되었다. 물론 각별한 거래였다. 이번에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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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에 오게 된 것도 실상은 장천린이 그에게 한 가지 물건을 부탁한 때문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내는 화청(花廳).
두 사람이 차를 나누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
"하하하! 일 년 못 본 사이에 장대인의 신수가 더욱 훤해진 걸 보아 사업이 많이 번
창하신 모양입니다."
아라사는 유창한 한어로 얘기했다.
"모든 것이 아라사공의 덕분입니다."
"하하! 거 무슨 말씀이시오? 모두 장대인의 뛰어난 상술 때문이지요."
아라사는 껄껄 웃고 나서 말했다.
"한데 이제는 장대인도 결혼해 가정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될 듯합니다."
"하하하! 그렇게만 된다면 이 아라사가 장대인을 위해 큰 선물을 하지 않을 수가 없
지요."
장천린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라사공의 영애께서도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라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십 육 세에 불과합니다. 몇 년은 더 있어야 하지요."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눈을 찡긋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그 아이 외에는 혈육이라곤 한 점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 아비된 자의 심정입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라사에 대해 알만큼 알고 있었다. 아라사는 부인
이 타계한 지 오래였으나 오직 딸인 유리공녀(琉璃公女)를 위해 그 동안 결혼도 하
지 않고 살아왔다. 따라서 딸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던 것이다.
"참, 장대인께서 부탁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아라사는 짐짓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건을 보시지요. 이건 내가 직접 불름국(로마의 옛 이름)에 가서 가져온 것인데
정말 귀중한 것입니다. 아마 장대인께서도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아라사는 금빛의 상자 하나를 꺼내 다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흠집이라도 날까 주
의를 기울여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아!"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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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갑 속에는 하나의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보통 목걸이가 아니었다. 목걸이
는 순금(純金)의 줄로 이어져 있었는데 줄을 연결하는 고리 하나하나마다 극히 세밀
한 세공이 되어 있었다.
줄 끝에 매달린 보석(寶石)은 엷은 하늘빛으로, 호두알 만한 크기였다. 그 보석으로
부터 찬란한 빛이 발산되어 가히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숨막히도
록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정말... 굉장하군요!"
장천린이 보석 목걸이를 바라보며 탄성을 발하자 아라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푸른 보석은 금강석의 일종으로 그 가치가 백만금을 헤아립니다."
그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목걸이 주위에 박혀있는 서른 여섯 개의 보석도 각기 천금 이상의 가
치가 있는 것입니다."
장천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걸이가 그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니 상상을 절하
는 일이었다. 아라사의 설명에 열기가 더해졌다.
"이 금강석은 불름국의 한 장군이 야만국에 원정을 갔다 전리품으로 얻은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유명한 장인을 시켜 세공케 해 삼 년 만에 목걸이로 완성시켰습니다.
그 후 장군은 목걸이를 생명처럼 아꼈습니다. 가보(家寶)로까지 정할 정도였으니까
요.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손자 대에 이르자 그만 가문이 기울어져 이것을 팔게 된
것입니다."
장천린은 목걸이의 내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그럼 대체 얼마에 구입하셨소이까?"
아라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세 개의 강과 스물 세 개의 산이 포함된 영지에 건장한 노예 백 명, 거기에다 은전
(銀錢)을 십만 냥 얹어주고 샀지요."
장천린은 얼른 계산해 낼 수가 없었다. 아라사의 계산법은 중원의 계산법과 맞지 않
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럼 얼마를 드리면 되겠소이까?"
아라사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장대인에게 만큼은 그다지 이익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셈하는 듯하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중원의 은자로 치면 육백만 냥이면 되겠습니다."
'육백만 냥!'
장천린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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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하나에 은자 육백만 냥이라니?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아닌가?
"솔직히 말해 너무 엄청난 가격이라 파자사국의 웬만한 거부들도 살 엄두를 내지 못
하는 물건입니다."
장천린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가 소유하고 있는 신선루 등 일곱 개의 업체를 모두 처분한다해도 은자 육백
만 냥에는 어림도 없이 못 미친다. 하지만 방법이 있기는 있었다.
'아버님께서 평생 모아놓으신 지하석부의 금은보화를 모두 합치면 육백만 냥은 조금
넘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써 목걸이를 구입한다면 내 계획에 차질이 올 것이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남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계획도 최소한 십 년은 늦어질 것이다.'
아라사는 그의 눈치를 보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험! 장대인에게 무리가 된다면 다른 것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장천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유창하게 말했다.
"칠백 개의 보석이 박힌 황금공작도 있고, 열 두 개의 금강석이 박힌 팔찌도 있습니
다. 뿐만 아니라 삼백 년 전 불름국의 황제가 쓰던 황금배(黃金盃)도 대단한 보물입
니다."
"......."
아라사는 초조한 듯 말을 계속했다.
"이 세 가지 물건들은 각기 은자 백만 냥 정도는 나가는 값진 보물들입니다."
장천린이 여전히 말이 없자 그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이 세 가지 물건과 저 보석 목걸이를 구입하는 데 나의 전 재산이 투입되었습니다.
사실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탐색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장대인께서 어떤 이유로 값진 물건을 구하시는지는 몰라도 이 네 가지 물건은 모든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천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일 년 전에 아라사에게 부탁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을 구해달라고.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엄청난 값을 치러야할 줄은 몰랐다.
아라사는 눈치를 살피며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참 후에야 장천린은 눈을 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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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목걸이를 사겠소."
아라사의 안면이 활짝 펴졌다. 그는 덥석 장천린의 손을 잡으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
다.
"대단히 기쁘군요! 솔직히 말해서 중원에서 이 물건을 팔 수 있을까 매우 걱정했습
니다."
그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것이 팔리지 않았으면 중원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데 큰 곤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정말 기쁩니다."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대금은 전액 오늘 내로 지불하겠습니다."
아라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라사의 입이 찢어졌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기쁜 일입니다."
이어 그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한데 대체 이 보물을 어디에 쓰시려고 합니까?"
"선물로 사들이는 겁니다."
아라사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치떠졌다.
"서... 선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 대체... 누구에게 이런 막대한 보물을......?"
장천린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하기 위한 선물이지요."
"......!"
아라사는 완전히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멍청히 장천린을 응시했다. 그의 상식으
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개 여인에게 청혼하는 예물로 자그마치 은자 육
백만 냥이라는 거금을 쓰다니!
아무리 천하갑부요, 왕후장상이라 해도 그처럼 엄청난 일은 결코 아무나 하지 못한
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라사는 역시 거상이었다. 그는 대소를 터
뜨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정말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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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아라사는 감탄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은자 육백만 냥의 거금보다도 장대인 같은 천하에서 가장 통이 큰 분의 청혼을 받
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것입니다."
장천린은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아라사의 얼굴에는 탄복의 기색이 한참 동안
이나 가실 줄을 몰랐다.
은자 육백만 냥이란 거금을 하룻동안에 마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천린은 약속대로 그날 오후까지 아라사에게 대금 전액을 계산해 주었다.
그는 부친인 장진군(蔣眞君)이 평생에 걸쳐 모아놓은 보화 중 금은(金銀)을 털어내
고도 모자라 열 두 상자의 보석까지도 모두 처분해야 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세 상자의 보석 뿐이었다.
그가 아라사에게 지불한 은자 육백만 냥은 마차 여섯 대에 꽉 찰 정도로 막대한 양
이었다. 그 날 신시 무렵, 아라사는 금릉(金陵)으로 떠나야 한다며 일곱 대의 마차
를 몰고 청하원을 떠났다. 아라사에게는 수십 명의 파자사국의 무사들이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호송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아라사는 출발하기 전 장천린에게 일 년 후에 재회하기로 약속하며 하나의 상자를
선물했다. 그가 떠난 후, 장천린은 상자를 열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자 안에는 수백 개의 보석이 박힌 황금공작(黃金孔雀)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은 아라사가 중원으로 가지고 온 네 가지 보물 중 하나라는 것을 그는 한눈에 알
아보았다.
상자 안에는 한 통의 서찰이 들어있었다.
<장대인의 앞날에 무궁한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일 년 후 행복한 두 부부의
모습을 뵙기 바라며 약소하나마 선물을 바칩니다.
-영원한 친구 아라사(阿羅斯).>
비록 간단한 글귀였으나 거기에는 상거래를 초월한 진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것은 종족까지도 초월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뜨거운 정이었다.
장천린은 서찰을 거두며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아라사 공, 고맙소이다."
그의 손은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공작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능히 은자
일백만 냥은 나가는 엄청난 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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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런 방 안.
벽면의 장식은 대부분이 고서화(古書畵)나 골동품들로 그 주인의 성품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그 물건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畵家)나 서예가들의 진품이었다. 만일 물건을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라면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나 서예작품을 보는
순간 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천린은 탁자에 앉아 아라사로부터 거금 육백만 냥을 주고 사들인 금강석 목걸이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정말 몇 번을 보아도 아름다운 보석이구나.'
목걸이 줄을 이루는 고리 하나하나에 새겨진 조각 솜씨는 장천린을 매료시키고 있었
다. 그는 본시 골동품과 보석류의 감정에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감탄할 정도라면 목걸이의 정교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한 일이었다.
장천린은 목걸이를 소중히 만지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목걸이의 이름이 중원어로 태양의 눈이라 했지. 과연 그 이름대로 한참 보고 있
으면 태양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군.'
문득 그의 뇌리에 한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가슴이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을 옥교에게 주면 얼마나 기뻐할까?'
그는 시선을 돌려 창 밖을 응시했다.
'내일쯤 신선루로 가 이 태양의 눈을 걸어주며 정식으로 청혼하리라.'
그의 눈빛은 목걸이보다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옥교, 그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소.
......'
장천린은 취한 듯 태양의 눈을 움켜쥐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태양(太陽)의 눈 앞에서 그대에게 청혼하리니... 하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으리라
. 내 사랑 옥교(玉嬌), 내 그대의 향기로운 입술에 입 맞추며 사랑을 맹세하리라.
복사꽃 같은 그대 두 뺨에 행복이 깃들게 하고, 별빛 같은 그대 눈망울 속에 환희의
빛을 심어주리라. 이 세상 여인들이 모두 그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리라..
.....
석양을 응시하고 있는 장천린의 옆모습은 노을에 짙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신이 조
각한 듯, 그의 손에 들려있는 태양의 눈에서 반사된 광채가 그의 얼굴에 신비한 서
기를 반사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한동안 넋 잃은 듯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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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는 태양의 눈을 금갑 속에 넣고 품 속에 갈무리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북경에 가야겠다. 태진왕(太眞王) 전하께 전달할 서찰이 어떤 내
용인지는 몰라도 네 분 노인의 뜻을 이뤄줘야 겠다.'
그는 처참하게 죽어간 네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새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일단 그 일을 떠올리자 어쩔 수 없이 만가산에서 일어났던 악몽과도 같았던 사건들
이 되살아났다.
'조화성이라고 했지.'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무림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의 체험이었으나 만가산의
사건을 통해 더욱 무림의 냉혈세계(冷血世界)에 대한 반감이 생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이미 운명은 그의 발길을 그가 원치 않았던 세계로 서서히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장천린은 홀연히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소림의 귀원선사로부터 개정대법을 통해 내
공을 전달받았었다. 그로 인해 만가산에서 신비한 체험을 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그
는 시험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려 보았다.
'어디.......'
구결에 따라 운공하자 단전에 잠재하고 있던 진기가 마치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전신
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장천린은 그만 가슴이 벅차 올랐다.
'백 이십 년의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 과연 신비하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이것도
이십 사 시진만 지나면 무로 사라진다니.......'
왠지 그는 아쉬움을 느꼈다.
'쓸데없는 일에 연연하지 말자. 나는 무림인이 아니라 일개 상인이 아닌가?'
그는 주전자에 식혀 둔 차를 따라 한 모금 입을 적셨다. 차의 향기로운 냄새가 입
안을 청량하게 감돌자 그는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그렇군, 오늘 유시(酉時)에 금대인이 저녁식사 초대를 했지.'
그는 약속이 떠오르자 머리 회전이 빨라졌다.
'시간이 다 되어가니 준비해야겠군. 금백만 그 양반은 강남에서는 제일 가는 거상이
니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가 생각을 마치고 움직이려 했을 때, 문 밖에서 진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
"무슨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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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루의 취소저께서 오셨습니다."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취누이가 왔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어서 들라 하시오."
장천린은 서둘러 의관을 정제한 후 화청(花廳)으로 나갔다. 화청은 평소 그가 즐겨
손님을 맞는 장소였다.
화청으로 들어서는 순간 취옥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화청에 가득한 화분 사이에
그림처럼 앉아 있다가 그가 들어서자 몸을 일으켰다.
"어인 일이오. 옥교? 이곳까지 오다니."
취옥교는 장천린을 응시하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곳에 오면 안되나요?"
장천린은 멈칫했으나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게 무슨 말이오? 나야 기분 좋은 일이지. 아름다운 옥교가 내 곁에 있
는데 싫을 리가 있겠소?"
취옥교는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빛이 감도는
눈빛이었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소?"
취옥교는 장천린의 눈을 응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밤늦게 길을 떠난 당신 걱정 때문이죠."
장천린은 흠칫했다.
'하기사... 자칫했으면 영영 못 볼 뻔했지.'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그는 아직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일
을 발설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취옥교의 뺨을 쓰다듬으며 낭랑한 웃
음을 터뜨렸다.
"하하! 옥교가 그토록 내 걱정을 했다니 정말 기분이 좋군."
취옥교는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잠시 후 나직이 한숨을 쉬며 그의 가
슴에 머리를 기댔다.
"천린... 사랑해요."
장천린은 그녀를 감싸 안으면서도 어딘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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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막 뭐라 물으려 했을 때,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
"천린, 아무 말씀 마세요. 오늘은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어요."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좋소. 그대의 이야기라면 아무리 재미없어도 사흘 밤낮까지는 들어줄 용의가 있소.
그는 취옥교의 오똑한 코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되오."
"왜요?"
"왜냐면 금백만 대인의 만금산장(萬金山莊)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오. 저녁식사를
유시까지 약속했거든."
취옥교의 안색이 변했다.
"그곳에 다녀와 이야기를 듣겠소. 그리고......."
장천린의 얼굴에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녀와서 옥교에게 줄 선물도 있소."
취옥교는 문득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약속... 취소할 수는 없나요?"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안되오. 며칠 전부터 한 약속이니 어길 수가 없소."
취옥교의 눈가에 가는 경련이 일어났다.
"내일 가면... 되잖아요?"
장천린은 정색을 했다.
"옥교, 금대인과의 일은 우리 두 사람의 사랑과는 별개의 일이오."
"하지만......."
"옥교."
장천린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었다. 평소
그의 성격을 아는 취옥교는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
시 깨물었다.
"그럼... 제가 따라가면 안될까요?"
취옥교는 그 말을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가 거절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장천린
은 도리어 밝은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좋소. 금대인도 당신이 가면 크게 기뻐할 것이오."
취옥교는 절망했다. 이제는 한 가닥의 희망조차도 사라진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고
개를 떨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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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그녀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화청 밖에 대기하고 있던 진노인을 향해 경쾌하
게 말했다.
"진노인, 마차를 준비해 주시오."
"예, 주인님."
진노인은 대답과 함께 급히 사라졌다.
"자, 갑시다. 옥교."
취옥교는 문득 고개를 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천린......."
"......?"
"당신은... 저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계시죠?"
장천린의 가슴 속에는 의혹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오늘 따라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
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금백만과의 사업 일이 들어차고 있
었다. 그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오? 그저 아름다운 나의 연인이라는 것만 알면 되지 않소?"
취옥교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저는 무림인이에요."
장천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것은 당신을 만가산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알고있던 사실이 아
니오?"
취옥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고아예요."
"역시 알고 있는 일이오. 당신이 이야기해주지 않았소?"
"저... 저는......."
마침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큰 눈에 눈물이 담뿍 고였다. 그녀는 눈물
어린 커다란 눈망울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천린, 어떠한 일이 생겨도... 저를 사랑하시겠어요?"
장천린은 더욱 더 의혹을 느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설사 지옥에 간다해도 사랑할 것이오."
취옥교는 그의 품에 몸을 던졌다.
"안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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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여인의 턱을 치켜들며 엄숙한 음성으로 물었다.
"옥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소?"
취옥교는 대답 대신 도리질을 하며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안아 주세요."
장천린은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가 여인의 나긋한 허리를 감싸자 여인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장천린의 얼굴에 갖다 붙이며 말했다. 마치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이.
"옥교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
마침내 장천린은 깊은 의혹에 빠졌다. 그때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왕문헌(王文軒)을 제거한 뒤 옥교 언니와 함께 찾아 뵙겠어요.
-설봉(雪鳳), 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
-왕문헌을 제거하기 위해 남창성 근처에서 몇 년 간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있었어요.
만가산에서 자의소녀와 독제(毒帝) 당선종이 했던 대화였다. 당시 그는 가슴이 철렁
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설마.......'
그는 품에 안겨있는 취옥교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뺨에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
고 있었다.
"입 맞춰 주세요. 천린......."
취옥교가 그를 향해 예쁜 턱을 들어올리며 속삭였다.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며 불길
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기우다. 지나친 상상일 뿐이야. 그건... 말도 안된다. 옥교가 어찌 조화성과 관련
이 있겠는가?'
그는 애써 불길한 상념을 지우며 고개를 숙였다. 취옥교의 꽃잎 같은 입술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취했다.
"음......."
취옥교는 가는 신음을 흘리며 목에 매달렸다. 장천린은 약간 놀랐다. 그녀가 너무나
정열적으로 응해온 것이다. 그녀의 뺨은 여전히 젖어 있었으나 향기로운 입술에서
는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천린, 용서해 주세요.'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는 가운데 취옥교는 내심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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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금산장(萬金山莊)은 남창성 동북 방향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장원으로, 여섯 개의
산과 두 개의 호수가 장원의 영역에 들어있을 만큼 그 규모가 방대했다. 그것은 장
원이라기 보다는 마치 하나의 성(城)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더구나 만금산장에서 일하는 식솔만 해도 천여 명을 헤아린다고 하니 능히 그 규모
를 짐작할 만했다.
사실 남창성에서는 장천린도 상당한 부호로 통했다. 그러나 만금산장의 금백만과는
아직 비교가 되지 못했다. 강남 칠 개 성(省)에 걸쳐 금백만의 사업체는 수백여 개
에 달하고 있었다. 그 사업체를 통해 금백만이 벌어들이는 돈은 매년 은자 수백만
냥에 달하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세인들이 어렴풋이 추측하는 금백만의 재산은 황실의 재산을 능가할 정도라는 것이
다. 따라서 금백만은 남창성은 물론 강남 칠성 전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
고 있었다.
만금산장의 육중한 대문 앞.
장천린과 취옥교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핫핫핫... 이거 신선루의 선녀께서도 함께 오시다니 이 금백만이 오늘 복이 터진
것 같소이다."
금백만은 마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연신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정말로
기분이 몹시 좋은 듯했다. 취옥교는 미소 지으며 나붓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금대인께서 청하시지도 않았는데 따라와 송구스럽습니다."
금백만은 껄껄 웃었다.
"그런 말 마시오. 취소저 같은 미인이 온다면 언제든지 만금산장의 대문을 활짝 열
어놓을 용의가 있소이다."
그는 장천린을 바라보며 의미있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장공자의 주먹에 이 늙은이의 갈빗대가 아래위로 섞여 버
리겠지? 핫핫핫......!"
금백만은 고개까지 젖혀가며 대소를 터뜨렸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금백만은 언제나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를 대해본 사람들은 그가 한 번도 얼굴을 찡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정도였다.
금백만은 소매를 휘두르며 경쾌하게 말했다.
"자, 어서 들어갑시다. 이 늙은이가 주책없이 떠들어 귀한 손님에게 밤이슬만 맞히
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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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 아니라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빛이 번쩍거리는 육중한 대문에는
등롱이 수십 개나 걸려 있어 주위가 대낮같이 밝았다.
그들은 환담을 나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에는 이미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탁자 위에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
득 차려져 있었다.
먼저 온 손님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화복노인이었는데, 바로 신선루에서 금백만
과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던 노인이었다.
다른 한 명은 남삼 차림의 청년이었는데 드물게 보는 준수한 용모에 이십 사오 세
가량 되어 보였다. 두 눈에는 혜지가 넘치고 패기만만한 기질이 엿보이는 인물이었
다. 입고있는 옷차림 또한 고급스러웠다.
대청 주위에는 이십여 명의 청의무사(靑衣武士)들이 허리에 검을 찬 채 질서정연하
게 서 있었다. 그들은 잘 훈련된 호장무사들인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앉으시오, 두 분."
금백만은 장천린과 취옥교에게 자리를 권한 후 화복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관형(上官兄), 자네에게 멋진 분을 소개하겠네. 이 젊은이가 바로 그 유명한 신
선루의 주인일세. 그리고 이 아름다운 소저는 취옥교라고 강남제일의 미인일세."
장천린은 정중히 포권했다.
"장천린이라 합니다."
화복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상관홍(上官紅)이라 하오. 내 장공자의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들었소이다."
취옥교도 사뿐히 절을 하며 맑은 음색으로 말했다.
"신선루에서 한 번 뵌 분 같군요."
"그렇소이다."
상관홍은 멋쩍게 웃었다.
"허허! 그만 주책없이 한눈에 취소저에게 반했다가 저 금가 늙은이한테 혼났지요."
취옥교도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그 광경에 금백만은 껄껄 웃었다.
"이 주책없는 늙은이는 노부와 오랫동안 친해온 막역지우외다."
그는 콧등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장공자도 아마 들은 적이 있을 것이네. 하북성(河北省)의 용문전장(龍門錢莊)에 대
해서 말일세. 이 늙은이가 바로 용문전장의 주인이라네. 강북에서는 늙은 색귀(色鬼
)와 돈귀신으로 주로 통하고 있지."
상관홍은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버럭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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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끼! 이 사람아, 손님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군."
금백만은 히죽 웃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는가? 선녀처럼 아름다운 강북의 칠선녀(七仙女)를 모조리
데리고 살면서. 게다가 오직 돈 모으는 것만을 취미 삼아온 게 자네 아닌가?"
"이 친구 큰일 날 친구로군! 사람을 매도해도 분수가 있지!"
두 사람은 얼굴을 붉혀가며 언쟁을 했으나 분위기가 험하기는커녕 도리어 화기가 감
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장천린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용문전장이라고?'
용문전장은 중원제일의 전장으로 무려 이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본시
전장의 규모는 보유하고 있는 자금력과 비례하는 법이다. 자금력에 의해 발행하는
전표의 신용(信用)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용문전장의 전표는 단연 대륙제일의 신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만큼 용문전장의 자
금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보유하고 있는 금전만으로 본다면 금백만을 훨씬 상회한다
고 할 수 있었다.
용문전장은 전 중원 십삼 개 성(省)에 백여 곳의 분점을 가지고 있으며, 관외나 막
북, 심지어는 국경 너머 이국(異國)에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상관홍
은 바로 그 용문전장의 제 칠대 주인이었다.
심지어는 황실에서조차 용문전장을 이용할 정도니 상관홍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정말 놀랍구나!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장천린은 좀처럼 놀라움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한 자리에서 중원의 상
권을 거머쥐고 있는 양대 거물을 동시에 만나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은 실로 경이로
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금백만은 고개를 돌려 남삼청년을 소개했다.
"이쪽은 제갈유풍(諸葛柔風)이라 하네. 노부가 존경하는 분의 자제가 되지. 서로 사
귀어 보게. 아마 의기가 통할 것이네."
남삼청년이 일어서더니 손을 마주잡고 공수했다.
"제갈유풍이라 합니다. 앞으로 장형의 많은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장천린은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도를 느꼈다.
'보통인물이 아니구나.'
그는 즉시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별 말씀을, 부족한 소생에게 많은 가르침을 바랍니다."
금백만은 미소 지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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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노부가 장공자를 초대한 이유를 알겠나?"
"글쎄요, 소생이 우둔하여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헛헛! 사실은 오늘이 노부의 생일이라네."
"아!"
장천린은 뜻밖의 말에 탄성을 발했다.
"하지만 번거로운 일이 일어날까봐 주위에 알리지 않았네. 다만 노부가 평소 잘 아
는 친구들만 초대해 오붓이 즐기려 했다네."
"......."
"장공자도 알다시피 노부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지 않는가? 실상 이렇게나마 생일
잔치라고 치르게 된 것도 오 년 만이라네."
금백만은 부드럽게 장천린과 취옥교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공자와 취소저, 모쪼록 부담 없이 이 늙은이를 위해 즐겨주면 정말 기쁘겠네."
이때 상관홍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 늙은이야! 그만 떠들게. 자네가 수다떨고 있는 동안 음식이 식는다는 것을 모르
나?"
금백만은 껄껄 웃었다.
"헛헛! 좋아, 좋아! 자 우리 건배 한 번 하세."
그 말에 모두 술잔을 치켜들었다.
마침내 장내에는 주흥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잔이 권커니 작커니하며
몇 순배가 돌아가자 모두들 얼큰해져 갔다.
장천린도 어느 정도 술기운이 도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는 취옥교도 몇 잔 술에 양
뺨이 도화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금백만이 입을 열었다.
"장공자, 취소저. 노부가 한 가지 무례한 부탁을 해도 되겠소?"
"......?"
장천린과 취옥교는 의아한 듯 눈을 돌렸다.
"장공자의 탄금(彈琴) 실력과 취소저의 가무(歌舞) 솜씨가 강서성 일대에서 쌍절이
라는 소문을 들었소. 오늘 밤 이 늙은이의 안목을 좀 넓혀주지 않겠소?"
장천린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 글쎄요."
금백만은 사정조로 말했다.
"장공자, 이 늙은이를 위해 한 번 탄금 솜씨를 보여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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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는 취옥교를 향해서도 애원하듯 말했다.
"취소저, 이 노부의 부탁 좀 들어주시구려."
취옥교는 당황한 표정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장천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
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오늘은 금대인의 생신이시니 제가 부족한 솜씨나마 보여 드리겠습니다."
"헛헛헛! 정말 고맙네."
금백만은 크게 기뻐하며 손뼉을 세 번 쳤다.
"어서 가져오너라!"
중인들은 그가 갑작스럽게 외치자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무엇을 가져오란 말인가? 의문은 곧 풀렸다. 대전 안쪽으로부터 두 명의 시녀가 나
타났는데 그녀들은 나란히 하나의 금(琴)을 받쳐들고 있었다. 그것은 칠현금이었다.
장천린은 그만 고소를 금치 못했다.
"벌써 준비해 놓고 계셨군요."
"으하하핫......! 당대의 명가 두 분이 오는데 어찌 이만한 준비를 안 하겠는가?"
장천린은 미소 지으며 금을 건네 받았다.
띵!
손가락으로 현(絃)을 퉁기자 맑은 금음이 장내를 청아하게 울렸다. 장천린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좋은 악기로군요."
"허허......! 백 년 전 음률의 대가였던 해랑선생(海浪先生)이 쓰시던 것이네."
장천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랑선생이라면 음(音)에 관한한 전설적인 인물이
었다. 그의 악기 다루는 솜씨는 가히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는 설이 있었다. 그가 사
용하던 금이라면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과연 거부답게 진품을 소유하고 있구나.'
그는 고개를 돌려 취옥교를 바라보았다. 취옥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교구를 일으켰다
술기운 탓인지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요염함이 더욱 돋
보여 마치 요정처럼 보이게 했다. 장내의 사람들은 그녀의 눈부신 미태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취옥교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머뭇거렸다. 대전 아래 도열해 있는 청의무사들이 의식
된 듯 그녀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지고 있었다. 금백만은 금방 눈치챘다.
"하하! 이거 노부가 실수했구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취소저의 가무를 즐긴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
그는 제갈유풍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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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현질, 저 아이들을 잠시 나가 있도록 하게."
제갈유풍은 난색을 지었다.
"숙부님."
"현질, 내 말대로 하게."
금백만의 말투가 완고해지자 제갈유풍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이십여 명의 무사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인 후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무사들이 사라지자 장내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장천린은 금을 안은 채 자
세를 잡고 취옥교를 바라보았다.
"......."
취옥교는 그의 눈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던 그
녀는 수줍은 듯 말했다.
"비파행(琵琶行)을......."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좋소. 나도 오랜만에 취누이의 노래 솜씨를 듣겠구려."
띠디딩......!
칠현금의 현을 고르자 청아한 금음이 울렸다. 장천린은 단정히 금을 무릎에 올린 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탄금하기 전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스스로도 음률에 젖어들 수 있을 뿐더러 실수 없이 탄주할 수 있기 때문이
었다.
띠딩... 디... 딩.......
마침내 은은하면서도 마음을 파고드는 감미로운 금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장천린의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칠현금 위에서 춤추듯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취옥교가
교구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음률에 맞추어 매혹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심양강 저문 날에 손을 보낼제( 陽江頭夜送客)
갈꽃 단풍잎에 갈바람 불어(楓葉萩花秘瑟瑟)
주인은 말 내리고 손은 배에 올라(主人下馬客主船)
잔 들자니 피리도 거문고도 없어라(擧酒欲飮無管絃)
취옥교가 금음에 맞추어 노래 부르자 중인들은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녀가 부르는 것은 시성(詩聖) 백낙천(白樂天)의 비파행(琵琶行)이었다. 그녀의 음성
은 마치 천계의 선녀가 노래하듯 그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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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비파소리 물을 타고 들려와(忽聞水上瑟瑟聲)
주인도 손도 갈길을 잊었구나(主人忘歸客不發)
비파 소리 따라서 타는 이 물어보니(辱聲闇問彈者誰)
소리는 그쳤어도 미처 대답이 없어(瑟瑟聲停欲語遲)
탄금 소리는 월야(月夜)로 흘러나가고, 음에 맞춰 부르는 취옥교의 노랫소리는 마침
내 가경에 이르렀다.
중인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 더욱이 음률과 노래에 맞추어 율동하는 취옥교의 하늘
거리는 자태야말로 속되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뱃전을 감도는 달빛 차게 빛나고(繞船明月江水寒)
이슥한 밤 꿈꾸던 내 청춘이여(夜深忽夢少年事)
흐느껴 우는 꿈에 눈시울이 뜨겁구나(夢啼 淚紅欄干)
내 듣노니 비파소리 탄식일레라(我聞瑟瑟己歎息)
탄주는 절정에 이르러 흐느끼듯 흐르고, 노래소리는 더욱 비창해졌다. 중인들은 자
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는 제갈유풍조차 넋을 잃은 듯 취옥
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무하는 취옥교의 모습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월궁의 선녀가 하강하여 춤추는 듯
, 한 마리 푸른 나비가 꽃밭을 누비는 듯....... 그녀의 춤사위에 모두들 넋을 잃었
다. 장천린도 흥이 고조된 듯 더욱 신명나게 탄주했다.
온종일 이곳에서 무슨 소리 들리니(其問旦暮聞何物)
두견이 피를 토하고 원숭이 슬피울어(杜鵑啼血猿哀聲)
취옥교의 발걸음은 알게 모르게 금백만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은연중 금백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호수 같은 두 눈이 이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격랑의 파도가
치듯.......
그녀는 교구를 빙글 돌리며 노래를 계속했다.
꽃 피는 봄, 달 밝은 가을밤에(春江花朝秋月夜)
흥겨워 홀로 잔을 기울여 봐도(往往取酒還獨傾)
취옥교는 금백만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춤추고 있었다. 금백만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망연히 그녀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취옥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뇌쇄
적인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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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금백만은 혼백이 온통 녹아나는 듯함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빛이 요염해지며 마력적인 유혹을 느낀 것이다. 그때였다.
'금대인, 용서하세요.'
마지막 그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원하노니 그대여, 한 곡조 더 타다오(莫辭更坐彈一曲)
슉!
섬광도 그처럼 빠를 수는 없다.
노래 한 소절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을 휘젓던 취옥교의 소매 속에서 한 줄기 푸른
섬광이 뻗었다. 그것은 너무나 빨라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컥!"
금백만의 목에 섬광이 작렬했다. 그는 흡사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거북한 소리를 내
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는 온통 경악과 불신의 빛이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그
는 벌떡 일어서더니 비틀비틀 뒷걸음질쳤다.
"우욱......!"
목을 움켜쥐는 순간 핏물이 손가락 사이로 뭉클뭉클 비집고 흘러나왔다. 실로 눈 깜
빡할 사이에 벌어진 참사였다. 바로 곁에 있던 상관홍과 제갈유풍은 안색이 급변하
며 벌떡 일어섰다. 상관홍은 황급히 금백만을 부축하며 외쳤다.
"금형! 금형!"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금백만의 안색은 이미 하얗게 탈색해 있었고, 선혈로 전신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이때 제갈유풍이 쩡! 하는 음향과 함께 검을 뽑았다. 그는 취옥교를 향해 검을 겨누
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숙부님을 해쳤느냐?"
비록 음성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으나 경황 중에도 신속한 조치를 취
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입술 사이에 대더니 삐이익! 하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 그러자 방금 전 물러갔던 청의무사들이 득달같이 달려 들었다.
한편 취옥교는 제갈유풍을 무시한 채 시선을 장천린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
장천린은 넋을 잃고 있었다. 그도 역시 취옥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도무지 정
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었으며, 혼란이 극에 이르러 눈 앞
의 경물이 흔들흔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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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옥교의 눈에 반짝하고 이슬이 맺혔다.
"안녕... 천린......."
그 말이 장천린의 귓가에 가물거리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교족으로 바닥
을 구르는 순간 환영처럼 밖으로 날아간 것이다. 제갈유풍이 노갈을 터뜨렸다.
"막아라! 주살해도 좋다!"
째애앵......! 슈파파아앗!
청의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취옥교의 퇴로를 막으며 공격했다. 취옥교는 조
금도 당황하지 않고 섬섬옥수를 뻗었다. 그러자 백광(白光)이 환상처럼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봉황검(鳳凰劍)이 발출된 것이었다.
"크아악!"
십여 명의 청의무사들이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제갈유풍은 그만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저럴 수가......!'
제갈유풍은 취옥교의 무공이 그토록 강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듯 전신을 부르르 경
련했다.
그때였다.
펑......!
폭음과 함께 취옥교는 눈 깜빡할 사이에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잡아라!"
제갈유풍의 노성에 청의무사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려 취옥교를 추격했다.
"크아악!"
그러나 그들이 채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이변이 벌어졌다.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
며 터져나온 것이다.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들은 연이어 고꾸라졌다. 그들의 이
마 한가운데에는 자줏빛의 비수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음......!"
제갈유풍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의 어깨에 한 자루의 비수가 꽂힌 채 바르
르 떨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고막을 찌르는 듯한 싸늘한 교소가 울려퍼졌다.
"호호호호홋......!"
스스슥......!
제갈유풍의 눈 앞에 자색인영이 연기처럼 나타났다. 흐릿한 인영이 또렷해지자 자의
를 입은 절세의 미소녀가 보였다. 깜찍한 미모와는 달리 미소녀의 전신에서는 얼음
장같은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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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유풍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빙심자봉(氷心紫鳳) 매소련(梅素蓮)!"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온통 경악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 매소련의 우수가 환영처럼 번뜩였다.
"큭!"
제갈유풍은 입으로 피를 뿜으며 뒤로 일 장 가량이나 붕 뜬 채 날아가 바닥에 뒹굴
었다.
"호호호호홋......!"
빙심자봉 매소련은 한동안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리더니 웃음을 뚝 그치며 고개를 돌
렸다. 그녀는 냉혹한 눈으로 장천린을 쏘아 보았다.
장천린은 눈은 뜨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 동안 설마설마 했던 일들이 명확한 현실로 다가와 무섭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매소련의 입가에 날카로운 한기가 맺혔다. 그것은 조소였다. 그녀는 비웃음을 흘리
며 장천린을 향해 새하얀 손을 뻗었다.
슉! 슉!
소매 속에서 두 자루의 비수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거의 빛처럼 보일 정도였다
.
장천린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자루의 비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복부와 심장에 화끈한 통증과 함께 깊숙이 박혀
버린 후였다. 그는 비명조차 발할 경황도 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옥교... 네가......!'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 취옥교가 함뿍 웃는 모습이었다.
매소련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더니 이번에는 상관홍을 향해 냉소를 터뜨렸다.
"호호! 상관홍, 너도 가거라!"
슛! 한 자루의 비수가 다시 섬전처럼 날아갔다. 상관홍은 공포에 질린 눈을 크게 떴
다. 그는 무공을 몰랐으므로 그저 망연자실한 채 사신(死神)의 방문을 맞이할 수밖
에 없었다.
그때였다. 품에 안겨있던 금백만이 돌연 우수를 뻗어 비수를 쳐내는 것이 아닌가!
땅!
비수는 불꽃을 퉁기며 날아갔다. 그의 손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장 맞은 편을
향해 위맹한 장력(掌力)을 뿜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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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소련은 안색이 대변했다. 설마 죽은 줄 알았던 금백만이 이런 반격을 가할 줄이야
! 그녀는 다급히 발 끝으로 바닥을 차고 떠올랐다.
그 직후 꽝! 하는 폭음과 함께 그녀의 뒤쪽 벽이 가루가 되며 무너져 내렸다.
"철수진기(鐵手眞氣)!"
매소련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떠졌다.
'이럴 수가......? 목의 천돌혈이 관통 당했음에도 여전히 무공을 전개할 수 있다니
?'
금백만은 어깨를 쭉 편 채 두 눈에서 시퍼런 광채를 뿜어내며 호통치고 있었다.
"물러가라, 매소련. 내 비록 중상을 입기는 했으나 남아있는 한 가닥 진기만으로도
최소한 너와 동귀어진 할 수는 있다."
매소련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화를 일으켰다. 그녀는 영활한 눈으로 금백만을 살피
더니 문득 싸늘한 교소를 터뜨렸다.
"과연 철솔선생(鐵率先生) 왕문헌답구나. 치명상을 입고도 견뎌내다니... 호호홋!
하나 천돌혈이 뚫린 이상 네 목숨도 한 시진을 넘기진 못할 거다!"
그녀는 갑자기 뒤로 벌렁 드러누운 채 날아갔다.
"호호호호호홋......!"
그녀의 교활한 웃음소리가 여운을 남기는 가운데 멀어져 갔다. 뒤로 드러누운 자세
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신법은 몹시 괴이해 보였다.
매소련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금백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금... 금형......!"
비로소 정신을 차린 상관홍은 급히 그를 부축하려 했다.
"날... 건드리지 말게....... 건드리는 순간... 나는 죽는다네......."
상관홍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금백만은 초점 잃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상관형... 부탁이 있네......."
"금형!"
상관홍의 노안에 눈물이 어렸다. 그는 평생의 죽마고우(竹馬故友)인 금백만의 만면
에 사신의 그림자가 깃든 것을 느끼며 비통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천하를 위해... 상관형... 내 뒤를... 이어... 주겠나......?"
금백만은 혼신의 기력을 다해 간신히 말했다. 상관홍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힘차게 말했다.
"맹세하겠네! 하지만 제발... 죽는다는 말은 말게!"
금백만의 주름진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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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맙... 네....... 친구......."
스르르!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고목(古木)이 넘어지듯 거꾸러졌다.
"금형!"
상관홍은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일세의 거부
금백만은 눈을 부릅뜬 채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금형......!"
상관홍은 노우의 시신을 끌어안고 절규했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
리고 있었다.
금백만의 생일날 밤이었다.
파국(破局)을 몰고 온 밤이었다. 그 밤이 던진 운명의 무거운 사슬이 향후 어떤 인
과(因果)를 파생하게 될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는 가운데 밤은 깊어 새벽이 다가오
고 있었다.
......복부에 꽂힌 단검은 다행히 급소를 피해 내장이 크게 손상되지는 않았습니다.
심장에 박힌 단검은 마침 품 속에 들어있던 금갑으로 인해 상처를 전혀 입지 않았
습니다. 실로 천우신조(天佑神助)입니다.
......살릴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몇 시진 후면 깨어날 것입니다. 상처의 회복 속도도 놀랄 정도로
빠릅니다.
......살려야 한다. 그를 통해서 반드시 조화성의 음모를 알아내야 한다.
'으아아악!'
불칼로 복부를 후벼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장천린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자
마자 그는 전신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옥... 옥교(玉嬌)!"
그는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때 옆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이제 깨어났군."
장천린은 비로소 정신이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상에 반드시 눕
혀져 있었다. 침상 곁에 한 명의 백의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는 청수한 용모에 코와 턱에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더구나 두 눈에는 은은한 현기가 어려있어
심연(深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실로 신비스런 분위기의 중년인이었다.
장천린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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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이 곳은 어디입니까......?"
그의 음성은 체력이 쇠잔한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중년인이 담담한 음
성으로 설명했다.
"여기는 만금산장(萬金山莊)이네. 자네는 어젯밤 빙심자봉 매소련의 단검에 부상을
입고 혼절했다가 이제 깨어난 것이네."
장천린은 비로소 어젯밤의 악몽과도 같은 일이 떠올랐다. 동시에 취옥교가 금백만을
죽이던 광경도 선명히 떠올랐다. 그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가래끓는 듯한 소리로 외
쳤다.
"오... 옥교는......? 우욱!"
다시 복부를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중년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한매설봉(寒梅雪鳳) 취옥교(翠玉嬌)를 말하는 것인가?"
장천린은 고통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물었다.
"옥교는... 어디 있습니까?"
"자네는 취옥교가 어떤 여인인 줄 알고 있는가?"
장천린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가 누구이든 상관없소. 나는 지금... 그녀를 만나보고 싶을 뿐이오!"
그는 중년인에게 적대감을 느낀 나머지 말투조차 변했다. 중년인은 고소지으며 말했
다.
"취옥교는 조화성의 일맥인 북해사태청(北海獅太廳)의 주인 북해창룡수(北海蒼龍 )
숙야염(叔夜焰)의 오제자 중 한 명이네.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장천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고함치듯 외쳤다.
"나는 지금... 그녀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소!"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중년인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침착 온건하여, 설사 눈 앞에서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조금도 동요할 것 같지 않았다.
"한 가지 깨우쳐 줄 것이 있네. 자네는 그 동안 취옥교에게 이용당했네."
"......!"
장천린의 안면에 경련이 일어났다. 중년인은 그를 내려다 보며 여전히 억양이 느껴
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조화성이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중년인은 그를 주시하다가 다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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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성은 악의 온상이네. 그것이 만들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단
삼 인에 의해서였네."
장천린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조화성인지 뭔지 관심 없소이다!"
그는 계속되는 복부의 고통에 안면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신선루로 가야겠소. 옥교는 그 곳에 있을 것이오. 그녀를 만나야 하오!"
중년인은 슬쩍 소매를 저었다.
어찌된 셈인지 장천린은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흡사 무형의 질긴 실이 그의
전신을 꽁꽁 묶어버린 것 같았다. 중년인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조화성을 만든 삼 인은 바로 염무(焰武), 고검령(古劍靈), 제갈사(諸葛師)란 세 사
람이었네."
장천린은 목청을 돋워 외쳤다.
"날 풀어주시오! 나는 가야만 하오!"
그러나 중년인은 그를 무시한 채 계속 이야기했다. 장천린은 듣고 싶지 않아도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 삼 인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는 염무란 자였네. 그 자는 고검령과 제갈사
의 힘을 빌어 단 몇 년 사이에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단체인 조화성을 만들어 냈네."
중년인의 안색은 시종일관 담담하기만 했다. 장천린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무섭게
노려봤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본래 조화성을 만든 목적은 중원무림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서였지. 그러나 그것
은 엄청난 시행착오였네. 그 이유는 애당초부터 염무란 자의 마음 속에 평화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네."
"......."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신경이 쏠리게 되었다.
"염무는 암암리에 비밀단체와 손을 잡고 중원에 마(魔)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네."
장천린은 문득 의문이 일었다. 백의중년인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더욱 무서운 사실은 염무가 고검령과 제갈사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한 단체의 주인
이었다는 사실이었네."
"......."
"놀랍게도 그는 천하만악의 근원인 마교의 교주였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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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의 안색이 처음으로 변했다.
마교(魔敎).......
그는 비록 무림인은 아니었으나 그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서 마교란
단체를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마교는 천하만악의 근본이기 때문이었다.
마교는 근 천 년 전에 생성되었으며, 무림에 존재하는 모든 마공(魔功)의 근원이 되
는 곳이다. 수백 년 전 마교가 자체의 내분으로 인해 붕괴되기 전만 해도 천하는 마
교의 횡행으로 인해 가히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었다지 않던가?
마교(魔敎). 그 이름은 아직도 공포의 대명사였다. 마교가 성(盛)하면 천하가 도탄
에 빠지고, 마교가 쇠(衰)하면 천하는 태평성대를 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년인의 말은 계속 되었다.
"고검령과 제갈사는 자신들이 염무에게 이용당했음을 곧 깨닫게 되었네. 그러나 때
는 이미 늦었지. 염무는 그들 두 명을 이용하여 이미 천하 곳곳에 자신의 세력을 구
축했을 뿐더러 정도의 무학을 철저히 파헤쳐 그 약점을 파악했네. 그 동안 그는 조
화성의 성세를 이용해 정도문파들의 무학을 구 할 이상 수집했던 것이네."
"......!"
"그야말로 무섭도록 치밀한 계획이었지. 그는 정도의 무학을 수집, 분석함으로써 정
도의 힘을 영구히 말살하려 했던 것이네."
가히 놀라운 말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비밀을 밝히고 있는 중년인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힘이 극강해지자 마침내 눈엣가시인 고검령과 제갈사를 제거할 음모를
획책하게 되었네."
장천린은 중년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숨도 크게 쉬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고검령과 제갈사도 보통 인물들은 아니었지. 그 전에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네. 또 염무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것도 눈치 채었네. 그래서 고심
한 끝에 은밀히 조화성의 분열을 획책하기 시작했네. 대세를 뒤집기 위해 역으로 염
무의 음모를 분쇄할 계책을 짠 것이라네."
장천린은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소. 고검령과 제갈사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염무를 위해 천
하 정도의 무공을 구 할 씩이나 모을 수 있었단 말이오?"
중년인은 고소를 지었다.
"그것은 오직 그 두 명에게만 가능한 일이지. 그들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네."
장천린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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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라. 말이 천하 정도 무공의 구 할이지, 실로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이 아
닌가? 가히 몇 만, 몇십 만 종류에 달하는 정도의 무학을 어찌 단 두 명의 힘으로
집대성할 수 있었단 말인가?
중년인은 힐끗 장천린을 바라본 후 다시 하던 얘기를 이어나갔다.
"어쨌든 고검령과 제갈사는 염무를 제거할 계획을 완벽하게 세웠네. 동시에 그 계획
을 달성키 위해 당시 조화성의 대총관(大總官)이던 만승금도 도담후란 인물을 포섭
하는 데도 성공했다네."
"......."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어느 날, 마침내 염무를 암습했네."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중년인은 침묵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실패했네. 염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는 했으나 그를 죽일 수는 없었네."
"......!"
"고검령과 제갈사는 할 수 없이 조화성을 벗어나야 했네. 조화성은 이미 염무의 개
인 단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그날부터 그들 두 명과 염무의
싸움은 시작되었네."
중년인은 이야기를 끝내고 잠시 침묵했다.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
늘이 깔리고 있었다.
"이십 년이 흐른 지금 천하에서 염무의 조화성에 상대할 자는 아무도 없네. 어떤 단
체, 어떤 고수라도 결코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성장하고 말았네. 다만.....
.."
"......?"
"염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고검령과 제갈사 때문이라네."
장천린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고검령, 제갈사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오?"
장천린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조화성의 인물인 철마왕 사진청과 독제 당
선종 같은 무서운 인물들을 직접 경험했다. 그런 가공할 고수들을 가진 조화성이 어
찌하여 개인 두 명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중년인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검령은 마치 안개와도 같은 인물이라네. 그에 대한 것은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
있지. 비록 그의 무공은 염무보다 약할지 몰라도 염무가 그와 세 번을 싸울 때까지
죽이지 못한다면 도리어 염무가 당할 수밖에 없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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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된단 말이오?"
"고검령은 천하의 어떤 무공이라도 한 번 보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버리는 무서운 능력을 지니고 있네. 만일 그가 염무와 세 번 만 싸운다면 그는 염무
의 무공을 파악할 뿐더러 약점까지 파악해 낼 수 있기 때문이라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중년인은 그의 의혹은 아랑곳없이 계속 이야기했다.
"자네가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네. 하지만 수만 권의 무경(武經)을 단 백 일 동안
모두 읽고 그 무공을 특성대로 분류하고 약점까지 기록해 놓은 인물이 바로 고검령
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그의 머리에는 최소한 천하무공의 칠 할이 담겨 있
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네."
장천린은 경악을 더해 그저 입을 벌릴 뿐이었다.
"제갈사는... 그의 무공은 고검령에 비하면 약하지만 반면 뛰어난 지략가(智略家)라
네. 이십 년 전 염무를 죽일 계획을 짠 것도 바로 그였었네."
장천린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고검령이 천하무공의 칠할을 알고 있다는 것만 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거늘 지략 방면에서 천하제일이라는 제갈사 또한 신비하기 그지없
는 인물이었다. 만일 중년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두 사람의 공격을 받고도 죽지
않은 채 조화성을 일궈낸 염무란 위인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는 설마하니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중년인은 한동안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잠시 후 그는 장천린에게 다
가오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검령의 별호는 무영(無影), 제갈사의 별호는 신산(神算)이라네. 조화성에서는 그
들을 가장 무서운 적으로 규정하고 있네."
무영(無影)과 신산(神算).
장천린은 처음으로 그 이름을 들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무영... 신산이라고......? 무영과 신산......."
그는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기이하게도 한 가닥 뇌전이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년인은 장천린의 표정을 살펴보며 계속 입을 열었다.
"염무는 그들을 극히 꺼려하므로 일 년 전부터 한 가지 무서운 계획을 세웠네."
장천린은 이제 온 신경을 기울여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 말
을 들어야 하는지, 중년인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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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 이십 년 간 비밀리에 키운 제자들과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용하여 무영과
신산의 세력을 분쇄하기 시작했네."
중년인의 표정은 점차 굳어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 마침내 무영과 신산의 오른팔 격인 만승금도 도담후가
조화성의 무정도(無情刀) 모용초란 자에게 암습당해 죽고 말았네."
"......!"
"그리고 어젯밤에는 무영과 신산에게 비밀리에 자금을 대주던 철솔선생(鐵率先生)
왕문헌마저 죽었네. 바로 한매설봉 취옥교에게 당했지."
장천린은 다시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는 의혹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철솔선생 왕문헌......?"
"철솔선생은 금백만의 또 다른 신분이었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염무는 전 중원에 공포의 살인혈첩(殺人血帖)을 뿌려대며 무영과
신산의 추종자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가고 있네."
중년인의 얼굴에 비감의 표정이 짙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 살인혈첩에 의해 진정으로 정도(正道)를 위하는 명숙들도 하나하나
사라져가고 있다네."
중년인은 갑자기 엄숙한 표정으로 장천린을 주시하며 물었다.
"자네는 내가 왜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는지 아는가?"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중년인의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는 약간 칼칼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한매설봉 취옥교와 빙심자봉 매소련은 그녀들의 사부인 북
해창룡수(北海蒼龍 ) 숙야염의 명을 받고 철솔선생과 냉혈팔숙(冷血八宿)을 제거하
려고 나섰네."
"......."
"냉혈팔숙은 바로 신산 제갈사의 수하들이었네. 당시 냉혈팔숙은 역으로 만가산에서
취옥교의 추적을 눈치채고 그녀를 반격하여 공격하는 데 성공했네."
장천린의 눈이 다시 크게 떠지고 있었다. 그는 만가산에서 처음으로 취옥교를 만나
던 장면을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눈 속에 파묻혀 죽어가고 있었다.
"당시 취옥교는 냉혈팔숙의 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네. 그런 데도 그녀는 죽지
않았네. 그것은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자네에게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네."
장천린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너무도 자세히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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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취옥교는 구사일생한 후 자네가 금백만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은밀히 한 가지 계획을 세우게 되었네. 그것은 바로 자네를 이용하는 것이었지. 자
네를 통해 금백만과 친분을 트고, 그것을 기회로 그에게 접근하여 제거하려 했던 것
이네."
장천린은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절대 아니오....... 절대로... 그녀는... 날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소....... 어찌
그럴 수가......!"
중년인은 힐끗 그를 응시했으나 여전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취옥교의 얼굴은 원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네. 그녀는 숙야염의 다섯 제자 중
첫째로 단 한 번도 중원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지. 더욱이 그녀의 얼굴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냉혈팔숙마저 매소련에게 죽었으니 그녀는 마음놓고 활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네."
장천린은 전신을 떨었다.
"그녀는 신선루에서 취랑이라고만 불려졌네. 그녀는 분명 자네에게 자신의 이름이
취옥교란 사실을 타인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적이 있었을 것이네. 그렇지 않은
가?"
장천린은 전신이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분명 취옥교는 그렇게 부탁한 적이 있었
던 것이다.
장천린은 갑자기 고개를 요란하게 저으며 부르짖었다.
"없소! 그런 적은 없었소! 결코......!"
중년인은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자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취옥교가 조화성의 끄나풀임은 분명한 사실이네."
"......!"
"더욱이 그녀가 자네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왜 매소련이 자네를 죽이려는 것을 방
관했겠는가?"
장천린의 안색은 횟빛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는 떨리는 음성으로 항변했다.
"날... 죽이려 한 것은 매소련이지... 옥교가 아니지 않소?"
중년인은 고소를 지었다.
"자네는 어리석을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우매한 짓이
네."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금갑을 꺼냈다.
"이것을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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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파자사국의 상인 아라사에게 사들인 태양의 눈이 들어 있는 금갑이었다. 중
년인은 금갑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찬란한 황금빛 광채와 푸른 광채가 방 안을 온
통 채웠다. 중년인은 태양의 눈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대단히 훌륭한 보석이군."
그는 기오한 눈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 보석이 목숨을 살려 주었다는 사실을 아나?"
"......?"
"매소련이 던진 두 개의 비수 중 하나는 자네의 심장을 정확하게 노렸네. 그런데 천
우신조로 가슴에 있던 이 금갑으로 인해 심장에 이르지 못했네."
중년인은 금갑 속에 목걸이를 넣은 후 장천린에게 돌려주었다.
"결국 자네는 죽을 뻔한 생명을 우연히 건진 셈이지."
장천린은 눈썹을 경련하며 물었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두 가지다."
중년인은 본론으로 돌아온 듯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첫째는 죽은 금백만의 뒤를 이어 강남의 상권(商權)을 맡아주는 것이네. 이유야 어
쨌든 자네 때문에 금백만이 죽은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네."
장천린은 입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결국 금대인의 뒤를 이어 무영과 신산에게 자금을 대달라는 말이구려?"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또한 천하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네."
그는 다시 그를 주시하며 물었다.
"상관홍을 아는가?"
"알고 있소."
"그는 용문전장의 주인으로 중원제일의 거부라네. 우리는 원래 금백만을 통해 그를
설득하여 그의 막대한 재력으로 우리를 돕도록 할 셈이었네."
이쯤 되면 장천린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의 제의를 거절했네. 그런데 변수가 생겼지. 어젯밤 그는 죽마고우인 금
백만이 죽게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우리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네."
중년인은 담담하면서도 확신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이제 자네만 도와준다면 우리는 아까운 인재는 잃었지만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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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을 수가 있는 것이네."
장천린의 안색이 차츰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눈 앞의 중년인에 대해 의혹
과 함께 막연한 두려움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이 자의 계획은 정말 무서울 정도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침착하게 완
벽한 계략을 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갑자기 무엇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어 안면이 씰룩거렸다.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안색은 여러 차례
변화를 일으켰다.
마침내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방금 전 나는 한 가지 우스운 생각이 떠올랐소."
중년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천린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금대인을 죽인 진정한 원흉이 당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놀라운 말이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눈썹을 한 번 꿈틀했을 뿐, 조금도 안색의 변화
를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그는 담담히 물었을 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
장천린은 여전히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이 일의 전후사정을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소."
"그래서?"
"어쩌면 당신은 옥교가 금대인을 죽이려 한 것조차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오."
"계속해 보게."
중년인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눈빛은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금대인이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
오."
"어떤 이유 말인가."
"첫째, 금대인에게는 그의 재산을 물려받을 후손이 없소. 따라서 강남에 뻗친 상권
과 사업체에는 오래 전부터 무영과 신산의 수하들이 손을 대고 있었을 것이오."
중년인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므로 금대인이 죽는다 해도 마땅한 후계자만 만들어 놓으면 사업에는 아무 지
장이 없을 것이오. 오히려 금대인이 없으니 더 마음대로 자금을 끌어들일 수가 있을
것이오."
"음......!"
중년인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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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여전히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그 특유의 날카롭고 치밀한 두뇌회전이
시작된 듯 눈빛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금대인이 죽음으로 인해 협조를 거부하던 상관홍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오. 상관홍은 중원에서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소. 어쩌면 당신들에게는
금대인보다 상관홍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오. 그의 엄청난 재력으로 조화성과 능히
자웅을 겨뤄볼 수 있기 때문이오."
중년인의 표정은 다시 담담하게 돌아가 있었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할 추리네."
"조화성주 염무는 금대인, 아니 철솔선생 왕문헌을 죽였기 때문에 장차 더 큰 압박
을 받게 될 것이오. 그것을 유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고 말이요."
중년인은 흠칫하며 반문했다.
"내가 말인가?"
"그렇소. 신산(神算) 제갈사 나으리!"
장천린은 말과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려 불타는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신산 제갈사(諸葛師)!
장천린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중년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러나 곧 평소의
안색을 회복하며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째서 날 제갈사라고 생각했는가?"
장천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무영과 신산 중 일 인이 아니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신
이 아까 무영과 신산의 이야기를 했을 때 반드시 그 분들이라고 존칭을 썼을 것이오
. 하나 당신은 그저 평칭으로 얘기했소."
"음. 그것만으로?"
"둘째, 당신은 무서울 정도로 감정의 절제가 뛰어난 데다 얼음처럼 차고 현명하오."
중년인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어찌해 날 제갈사라고만 생각하고 고검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무영과 신산을 이야기할 때 무영에 대한 칭찬은 많이 하면서도 신산에 대해
서는 별로 칭찬을 하지 않았소."
"......."
"타인 앞에서 자찬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있어서 조금은 쑥스러웠을 것이오."
중년인은 지그시 장천린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중얼거렸다.
"자네의 관찰력은 진정 놀랄 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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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는 시인했다.
"그렇다. 내가 바로 신산(神算) 제갈사라네."
장천린은 충격을 받았다. 비록 그의 추리가 논리 정연하고 자신도 그것을 정확하다
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확신은 없었다. 한데 정작 추론이 사실로 확인되자 그의 놀라
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신산 제갈사!
그가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장천린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이 날 구한 두 번째 목적은 무엇이오?"
신산 제갈사는 걸음을 옮겨 의자에 편안히 걸터앉았다. 이제까지 그는 내내 서 있었
던 것이다.
"자네는 한매설봉 취옥교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가?"
장천린은 숨이 콱 막힐 만큼 전율을 느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가 있소?"
제갈사는 지그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방법은 많이 있다."
"무슨 이유로 옥교를 만나게 해주려는 것이오?"
"나는 한 가지에 기대를 하고 있다."
"......."
"어쩌면 그녀가 진정으로 자네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네."
-어쩌면 그녀가 진정으로 자네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네.
신산의 그 한 마디는 장천린의 가슴을 거세게 회오리치게 했다. 장천린은 안색이 몇
차례나 변하더니 급기야 무엇을 깨달은 듯했다.
"후후......, 이제야 당신의 의도를 알았소."
"......?"
"당신은 날 이용해 옥교가 조화성을 배신하도록 획책하려는 것이 아니오?"
장천린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옥교가 당신 말대로 북해사태청의 대제자라면 조화성 내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
할 것이오. 당신은 그것을 이용해 조화성의 비밀을 캐내려 하는 것이오."
제갈사는 미소지었다.
"자네는 정말 두 마디가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 현명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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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다. 설봉이 진정 자네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회유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
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장천린의 얼굴에 짙은 불쾌감이 떠올랐다.
"남녀간의 진실한 애정을 한낱 음모의 도구로 사용할 수는 없소!"
제갈사는 설득하듯 말했다.
"그것을 도구화한 것은 설봉이 먼저다. 게다가 우리는 악을 붕괴시키고 중원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그렇게 하려는 것이네."
장천린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신산 나으리, 나는 애초부터 무림인이 아니라 일개 상인일 뿐이오. 내게 있어 중요
한 것은 사업이지 무림사가 아니오. 제발 그 점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소."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나는 무림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이 없소. 무림의 일은 당신들 일이지 결코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오.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당신의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들어
줄 수가 없소. 내가 버는 돈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싫고, 애정을 기만하는 행위는
더더욱 싫소!"
그는 시선을 허공으로 옮기며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사업을 벌일 것이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소. 그리고 옥
교에 관한 문제도 내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오."
제갈사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되면 자네는 영원히 설봉을 만나지 못할 것이네. 아니 만나기도 전에 조화
성 고수들에 의해 생명을 잃을 것이네."
"그것은 나의 문제요."
"진정 거절한단 말인가?"
"백 번을 물어봐도 마찬가지요."
제갈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길게 탄식했다.
"아아! 자네는 가장 현명하면서도 또한 어리석은 친구네."
한 칸의 밀실(密室).
신산 제갈사와 한 명의 청년이 마주하고 있다.
청년은 기골이 무척 장대했다. 턱에는 구레나룻이 나 있어 일견하기에 용맹무쌍할
뿐더러 강직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는 짧은 단창(短槍)이 세 자루나
교차된 채 메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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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이름은 단천굉(段天宏), 그의 별호는 신창(神槍)이었다.
그는 제갈사를 무척이나 존경하는 듯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정도(無情刀) 모용초를 추격한 일은 어찌 되었는가?"
제갈사의 음성은 부드럽기만 했다. 단천굉은 눈을 번쩍이며 대답했다.
"놈은 마치 여우와 같아 종적을 잡기가 극히 어려웠습니다. 섬서(陝西)에서 놈의 수
하 열 명을 죽이고 놈과 수십 초를 겨루었지만 놈은 싸울 마음이 없는지 그냥 사라
져 버렸습니다."
"음."
신창 단천굉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함께 투지의 빛이 어렸다.
"모용초의 무공은 영주께서 짐작하신 대로 도성(刀聖) 유백(柳白)의 독문무공인 무
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였습니다."
제갈사는 탄식했다.
"만승금도 도담후는 도(刀)에 관한 한 무적이라 여겼는데 모용초의 암습에 당하다니
실로 애석하구나."
단천굉은 이를 갈았다.
"도어른께서 당하신 이유는 결코 무공이 뒤져서가 아닙니다. 어른께서 아끼시던 손
미라는 계집이 배신하여 도어른의 유일한 급소인 명문혈(命門穴)에 부착되어 있던
철금경(鐵金鏡)을 떼어버렸기 때문에 당하신 것입니다."
제갈사는 신음을 흘리더니 물었다.
"도담후의 제자인 원계묵(元桂默)은 뭐라 하던가?"
단천굉의 얼굴에 흥분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는 정말 훌륭한 사내입니다. 그는 도어른의 직속 수하들 일백 인과 함께 이미 백
살대(百殺隊)를 조직하여 조화성과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원계묵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떠올라 있었다.
제갈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원계묵이 비록 도담후의 진전을 모두 이었다지만 잘 해야 모용초와 동수를 이룰 정
도다. 그와 일백 인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단천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에게 영주님의 의도를 알렸지만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신이 가루
가 될지라도 자신들의 힘만으로 조화성과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제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계묵은 훌륭한 투사다. 천굉, 너는 그와 계속 접촉하여 설득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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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교하십시오."
"장천린을 알고 있겠지?"
단천굉은 흠칫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를 그의 장원인 청하원까지 데려다 주고 오너라."
단천굉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장천린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가 영주님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까?"
제갈사는 고개를 저었다.
"거절했다."
단천굉의 눈썹이 불끈 솟구쳐 올랐다.
"하오시면?"
제갈사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강제로 안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는 포기하겠다."
"......!"
"대신 강남의 상권은 옥류향(玉柳香)에게 맡기면 된다. 설봉의 문제도 일단 없었던
것으로 한다."
단천굉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불만스럽게 항변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용문전장의 일이 만에 하나
라도 조화성의 귀에 들어간다면 상관대인(上官大人)의 생명도 보장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제갈사는 그 말에 언뜻 불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장천린은 입이 무겁다. 나는 그를 믿는다. 그는 결코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제거해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후환을 남겨 두면 언제 어느 때든 불씨가
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제갈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굉, 우리는 지금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를 들고 일을 하고 있다. 장천린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인다면 우리 역시 조화성의 무리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겠느냐?"
"......."
"내가 만일 그를 죽이라고 지시한다면 나를 믿고 따라오는 수많은 인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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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천굉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네가 한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다."
제갈사는 화제를 돌렸다.
"너는 장천린을 청하원에 데려다 준 뒤 항주(抗州)에 있는 옥류향에게 연락해 이 곳
으로 오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단천굉은 고개를 숙였다. 제갈사는 할 말을 끝낸 듯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나간 후
에도 단천굉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그는 짙은 감동에 싸여 있었다. 제갈사는 평생을 통해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
물 중 하나였다. 본래 그의 성격은 과격한 반면 단순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
하는 일이면 설사 온몸이 부서진다 해도 밀고 나가는 인물이었다.
오늘 아침 그가 만금산장에 왔을 때, 그는 비로소 금백만의 죽음을 알았다. 게다가
신산 제갈사의 셋째 아들인 제갈유풍은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한데 신산 제갈사는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은 한 번도 찾아보지 않
은 채 금백만, 아니 철솔선생 왕문헌의 죽음만을 애통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슬
픔 속에서도 매사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신중하고 치밀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 뿐 아니라 제갈사는 오늘 이 시간까지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들 제갈유풍에 대
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일반인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대인(大人)의 풍
도였다.
단천굉은 내심 갈등에 휩싸이고 있었다.
'영주님께서는 너무도 크신 분이다. 무림을 위해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자신을 헌신하
면서도 조금도 업적을 내세우지 않으시는 진정한 이 시대의 거성이시다.'
그는 생각을 계속했다.
'더욱이 공적인 일에는 사적인 모든 것을 묵살하시는 그런 분이다.'
단천굉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이 차 올랐다.
'단지 마음이 독하시지 못한 것이 흠이다. 영주님은 장천린을 보내주라고 했지만 언
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을 어찌 그대로 방관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놈을 죽여봐야 영주님께 꾸중을 들을 뿐이다. 내 손으로 놈을 제거해 버리겠다.'
그의 눈에서 살광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단천굉은 무림대의를 위해, 그리고 존경하는 신산 제갈사를 위해 장천린을 제거하
기로 일방적으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의 순수한 결심에서였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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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
한 대의 사두마차(四頭馬車)가 만금산장을 빠져 나와 어둠을 뚫고 달렸다. 워낙 심
야였으므로 아무도 사두마차가 빠져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
마차 안에는 이 인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장천린과 신창 단천굉이었
다.
장천린의 안색은 여전히 밀랍같이 창백했으며 복부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는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신산 제갈사는 약속대로 그를 풀어 주었
다. 장천린은 정말 뜻밖이라는 느낌이었다. 중대한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을
그가 이렇게 쉽게 풀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그는 만금산장을 뒤로 하고 떠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자 그의
뇌리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취옥교에 대한 생각이
었다.
'옥교,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그의 가슴은 찢어질 듯 괴로웠다.
'제갈사의 말대로 나란 존재는 정말 네게 있어 이용도구에 불과했단 말이냐?'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옥교는 날 사랑했다. 진정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장천린은 두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밤은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오늘은 약속이 있소.
......그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나요?
'그녀는 어떻게든 내가 만금산장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단 하루만이라도 나와
같이 있고 싶어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는 금대인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다만
누군가의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한 것 뿐이었다.'
장천린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쓸쓸함에 젖어 있었다. 지금 그의 귓전에 들리는
것은 야밤을 뚫고 요란하게 달리는 마차 바퀴소리 뿐이었다.
덜컹! 덜컹......!
이따금 바퀴가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 마차가 심하게 요동을 치곤 했다. 장천린은 다
시 눈을 감았다. 그의 뇌리에는 취옥교가 만금산장에서 금백만을 죽인 직후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그래, 그녀의 눈에는 말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담겨져 있었다.'
......안녕... 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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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옥교가 자신을 향해 나직이 말했던 한 마디-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장천린은 가슴
이 터질 듯한 심정이 되었다.
'옥교는 조화성과 나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금대인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도리어 조화성의 인물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까지도....
...'
장천린의 얼굴에 자조의 웃음이 어렸다.
'후훗, 자위일지는 몰라도 어쩌면 옥교는 날 위해서 내 곁을 떠났을는지도 모른다.'
장천린은 눈을 떴다. 그의 눈은 극도의 허무에 젖어 있었다.
'옥교, 네가 겪은 아픔과 고뇌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네가 저지른 일은 남들에게 결
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깊어지고 있었다.
'이제 널 만날 것이다. 그리고 물어볼 것이다. 과연 내가 널 사랑한 만큼 너의 사랑
이 진실했는지를.'
장천린의 눈에는 맞은편에 앉아 아까부터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신창 단천굉
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널 용서할 것이다. 세상 모두가 널 욕할지라도 나만은 용서하
겠다. 그리고 널 보호해 주겠다. 조화성은 물론 무영과 신산으로부터... 아니,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널 지켜 주겠다.'
장천린은 손을 들어 품 속에 간직하고 있는 금갑을 어루만졌다.
'내 생명을 구한 이 태양의 눈... 여기에 대고 맹세한다. 옥교, 너와 나의 사랑은
절대로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장천린의 눈에 강렬한 빛이 어렸다.
'절대로!'
이 때 줄곧 그를 응시하고 있던 단천굉이 문득 헛기침을 했다.
"험! 장공자, 기분이 무척 우울한 것 같소."
장천린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단천굉이라 하오."
장천린이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단천굉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장공자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아직도 취옥교를 사랑하시오? 그녀는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았소?"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날 죽이려 한 것은 매소련이오."
"어쨌든 그녀는 당신을 이용한 것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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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 듯했다. 단천굉의 두 눈에
경멸이 스쳤다. 그는 내심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연연해하다니, 무척이나 심약한 자로군. 영주님 말씀에 비해
서는 결코 큰그릇이 아니다.'
그는 짐짓 타이르듯 말했다.
"장공자, 모름지기 남아라면 천하를 직시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거기에
비하면 남녀간의 애정 따위는 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하오. 예로부터 모든 영웅들은
대의 앞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미녀와의 사랑이라도 초연했었소."
장천린은 힐끗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사랑해 본 적이 있소?"
단천굉은 미소지었다.
"나는 삼 년 전 결혼했소. 아들도 한 명 있소."
"당신은 대의 앞에서 부인을 버릴 수 있소?"
단천굉은 엄숙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오."
장천린은 그의 강직한 눈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 자는 제갈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부인은 물론 아들
까지도 버릴 것이다.'
그렇다. 실제로 단천굉은 그런 인간이었다. 실로 한 인간의 마음 속에 이토록 확고
한 신념이 깃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천굉은 본래 강직하고 용맹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그 자신보다는 한 사람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장천린은 그를 알고 있다.
그는 단천굉을 대의에 죽게 할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산 제갈사란 인
물의 능력에 한기마저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과연 그것이 정도일까?'
그는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하자 그는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켜 골치가 지끈거렸다.
이 때 단천굉이 다시 말했다.
"장공자,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고 만금산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소? 내가 장공
자라면 백 번 천 번 영주님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오."
장천린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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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당신은 청하원의 주인이고... 뛰어난 상술가이고......."
장천린은 잘라 말했다.
"됐소. 그러면 더 이상 아무 말 마시오."
단천굉은 그만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
직 마차가 달리는 소음만이 연속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좁은 마차 안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각각 딴 생각을 하느라고 오랫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문득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만금산장을 떠나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청하원에 도착하지 못했소?"
그 말에 단천굉의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뻗어 나왔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마차를 모는 마부는 남창의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소. 결코 실수
하지 않을 것이오."
덜컹!
갑자기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했으나 계속 요란하
게 흔들리며 달리자 장천린은 갑자기 언성을 높여 외쳤다.
"청하원으로 가는 길 중 이런 험로는 없소!"
그는 손을 뻗어 휘장을 젖히려 했다. 그 때였다. 하나의 단창이 소리 없이 뻗어와
목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단천굉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움직이지 마시오, 장공자."
장천린은 눈 가장자리에 경련을 일으켰다. 잠시 후 그는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훗."
나직한 웃음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제갈사가 날 제거하라고 했소?"
단천굉은 멈칫했다.
"후후, 이해할 만하오. 만에 하나 용문전장의 일이 조화성의 귀에 들어간다면 당신
들에겐 큰 타격이 될 것이오."
단천굉은 헛기침했다.
"험! 영주께서는 장공자를 청하원까지 무사히 보내주라고 했소."
그는 강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소. 장공자. 아니, 장형은 그 이유를 알겠소?"
"흥! 당신의 그 우직한 충심 때문이겠지."
단천굉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오. 장형, 장형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의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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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천린은 문득 무엇을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핫......!"
단천굉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했다. 한참 후에야 웃음을 그친 장천린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후후, 신산 제갈사는 과연 머리가 좋군."
"......?"
"금대인에 이어 이번에는 내가 그의 차도살인술(借刀殺人術)에 걸렸으니 말이야."
단천굉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후후후, 과연 신산다운 계략이야. 자신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필요한 상대의 생
명을 깨끗이 빼앗아 버리니 말이야. 우후후......."
단천굉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영주님을 모욕하지 마시오! 이번 일은 내 스스로 결정한 것이오."
장천린은 히죽 웃었다.
"단천굉, 당신 같은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시오?"
"......?"
"석두(石頭), 돌대가리라고 하는 거요."
단천굉의 안면이 돌을 씹은 듯 무참해졌다. 한동안 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하더
니 말했다.
"지금 날 모욕하는 것인가?"
"하하하......!"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공허한 웃음만이 한동안 마차 안을 메울 뿐이
었다.
단천굉은 싸늘하게 말했다.
"이 곳은 만가산이오. 조금만 더 가면 만가산의 가장 험난한 곳인 단정애(斷情崖)가
나올 것이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당신은 날 마차와 함께 단정애에 떨어뜨리겠군. 그리고 돌아가서 보고하겠
지. 분명 시키는 대로 청하원에 데려다 줬는데 내가 마차를 타고 신선루로 가기 위
해 만가산을 넘다가 사고라도 낸 모양이라고 말이오."
'귀... 귀신 같은 놈.'
단천굉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분명 그는 그럴 계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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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지 않은가?
"그럼 신산 제갈사는 탄식하겠지. 쯧쯧! 무모한 젊은이의 혈기가 생명을 앗아갔군.
이렇게 말이오."
단천굉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무서운 놈!'
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장형은 매우 머리가 좋구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틀렸소. 나는 영주님께 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것이오. 그 점에 대해 망설였는데 당신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
기로 결정을 내렸소."
장천린은 히죽 웃었다.
"그래 보았자 당신에게 돌아올 것은 약간의 문책 정도겠지."
단천굉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장천린은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미리 보기라도
한 듯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허탈하게 웃었다.
"후후, 내가 보기에는 조화성이나 당신들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소이다."
단천굉은 안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장천린의 목을 겨누었던 단창을 거두며 무
뚝뚝하게 말했다.
"지금 일에 대해선 할 말이 없소. 하나 나 때문에 우리 전체를 욕하지는 마시오."
장천린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 버렸다. 대화의 단절이 왔다. 반면 단천굉
은 할 말이 많았으나 어쩔 수 없이 함께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갈등이 어리고 있었다.
이 때 마차가 멈추더니 탁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단어른,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오, 장형!"
단천굉의 단호한 말에 장천린은 눈을 뜨더니 순순히 마차에서 내렸다.
휘이잉!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하늘에는 으스름한 초승달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장천린이 서 있는 곳은 섬뜩할 정도로 험악한 지세(地勢)로 마치 거대한 도끼로 내
려친 듯 길이 뚝 끊겨 있었다. 또한 그 아래로는 깊이를 모를 절곡이 검은 입을 벌
린 채 뻥 뚫려 있었다.
바로 이 곳이 만가산에서 가장 험하다는 단정애(斷情崖)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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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애는 가히 천장(千丈)의 깊이로 패여 있었으며 밑바닥에는 격류가 흐르고 있었
다. 그 격류는 장강(長江)으로 흘러드는 지류로 유속이 빠를 뿐더러 거칠기 그지없
어 일단 빠지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해도 도저히 빠져 나오기가 불가능한 곳이었
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칼날 같은 암석이 돌출해 있어 슬쩍 부딪치기만 해도 전신
이 난자 당한 듯 갈가리 찢겨지고 부서져 시신조차 보존하기 힘든 곳이었다.
"후후훗! 한 인간이 묻히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장관이로군."
단천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조금씩 후회하고 있었다.
'차라리 영주님 말씀대로 그냥 청하원에 데려다 줄 것을.......'
그러나 그는 강하게 마음을 먹었다.
'아니다. 단천굉, 너는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한편 장천린은 단정애에 선 채 내심 탄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 때였다.
'윽!'
갑자기 복부에 무서운 고통이 일어났다. 창자가 끊어질 듯 당겨지며 참기 힘든 고통
이 엄습해 오는 바람에 그는 배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홀연히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번쩍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단형, 지금 시각이 얼마나 됐소?"
단천굉은 이상한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마 축시 가까이 됐을 것이오."
장천린은 입 안이 바짝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지금이 축시라면 반야대능력의 내공이 소멸되는 이십 사 시진이 아직 지나지 않았
다.'
그는 가만히 내공을 모아보았다.
'흑......!'
순간 단전에 엄청난 고통이 왔다. 진기는 어떤 장애에라도 걸린 듯 잘 모아지지 않
았다. 그는 전력으로 내공을 모아보았다. 그러자 미약하기만 했던 진기가 조금씩 단
전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는 한 가닥 희망을 느꼈다.
'어쩌면 살아날 수 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품 속의 금갑을 만져보았다.
'심장에 비수를 맞고도 천운으로 살아난 나다. 신은 아직 나의 편일 것이다.'
"장형, 그만 마차에 오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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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천굉의 독촉에 장천린은 신비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제부터 조작된 살인극을 실현하려는 것이오?"
"미안하오, 장형."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당신이 날 청하원에 데려다 주지 않고 이 곳으로 데려온 것을 감사히 여기
게 될 때가 올지도 모르겠소."
단천굉은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후후, 단천굉. 당신은 역시 석두요."
장천린은 말을 마치자마자 단정애 끝으로 걸어갔다.
"장형! 당신......."
"큿큿, 조작된 살인극에 끌려가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장천린은 말을 마치자마자 단정애로 뛰어내렸다.
"앗!"
미처 말릴 사이도 없었다. 단천굉은 다급히 신형을 날렸으나 그만 한 발 늦고 말았
다.
휘이이잉!
강풍이 휘몰아치는 단정애 아래로 장천린의 모습은 유성이 점멸하듯 아스라이 떨어
졌다. 그의 모습은 눈 깜빡할 사이에 작은 점으로 화하더니 격류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단천굉은 넋을 잃고 말았다.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알 수 없는
전율로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장천린이라고 했던가?'
그의 눈빛에 어떤 두려움이 맺혔다.
'평생... 오늘 일은 잊지 못할 것 같구나.'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돌아섰다. 잠시 후, 마차는 그를 싣고 왔던 길을 향해 되
돌아 달렸다.
쿠쿠쿠쿵......!
단정애 아래의 격류는 굉음을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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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생사의 도박을 걸었다.
그는 단정애에서 떨어진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신의 피란 피는 모조리 어디론
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세찬 충격을 느끼며 격류 속에 떨어졌다.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그는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한 줌 모았던 진기
를 끌어올려 생명의 도박에 불을 당겼다.
학면귀식대법(鶴眠龜息大法)!
그것은 전신의 기관을 일시에 정지시키는 신비의 술법이었다. 그는 격류 속에 떠내
려가면서 필사적으로 그 대법을 시전했다.
잠시 후... 내장의 기능이 멎고 호흡이 서서히 정지되었다. 바로 그 직후, 쾅! 하
는 소리와 함께 그는 무엇엔가 부딪치면서 그만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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