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혈 전
소년 부금진.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눈 앞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귀송자 혁련노후와 원계묵
의 싸움은 벌써 백 초를 넘기고 있었다. 원계묵의 수중의 칼은 가공할 도광을 뿌리
고 있었다.
슈파파파팟!
수라구류도의 정수(精髓)가 그의 손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반면 혁련노후
는 장각찬(長脚讚)이란 이름의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창과 유사하게 생긴 기형의
병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싸움이었다. 너무나 격렬한 접전이었으므로 두 사람 사이로 감히 누구도
끼여들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부금진은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전세를 따져보고 있었다.
'내공의 심후함이나 노련함은 귀송자가 월등하다. 하지만 밀어붙이는 힘과 도법의
패도적인 기세는 원계묵이 한 수 위다.'
부금진의 얼굴에 찬탄이 어렸다.
'칠 년 전 아버님과 숙야염이 싸울 때만큼이나 대단하구나.......'
부금진은 도저히 전장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손바닥이 축축이 젖어들고 있
었다. 그는 긴장을 풀지 못한 채 계속 싸움을 지켜보았다.
한편 원계묵은 싸울수록 경이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과연 대단하다! 혁련노후, 이 정도면 천하에 대적할 고수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전세를 가늠했다.
'이렇게 싸우다간 오늘밤이 새도록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 자를 이긴
다 해도 사십 명이 넘는 저놈들은 무슨 수로 제거한단 말인가?'
고수의 싸움에는 정신력이 가장 중요하다. 원계묵이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자
금세 빈틈이 생겼다.
슉!
장각찬의 예리한 끝이 그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윽!"
옷이 찢겨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을 정도였다. 원계묵에게는
경종을 울려준 셈이었다. 그는 즉각 정신을 집중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편 혁련
노후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단한 놈. 보통 놈 같았으면 팔이 날아갔을 터인데도 겨우 약간 상처를 입을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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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
그의 움푹 꺼진 눈에서 기괴한 빛이 흘러나왔다.
'현문강기(玄門 氣)가 저놈의 몸을 에워싸고 있는 이상 일격에 급소를 적중시키지
않고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군.'
이때였다.
"혁련 노선배, 각오하시오!"
원계묵의 굵직한 음성과 함께 갑자기 칼의 움직임이 빨라지며 무시무시한 환청이 일
어났다.
우우우우... 웅......!
아수라의 호곡성이 전후좌우에서 들리며 가공할 도기가 쇄도했다. 수라구류도의 제
칠초인 혈해수라(血海修羅)를 전개한 것이다.
파츠츠... 츳츳츳!
도기가 그물처럼 방원 일 장여를 에워쌌다.
수라구류도의 제 칠초, 팔초, 구초 등 삼초식은 내공을 극심하게 소모시킨다. 그래
서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계묵은 승부를 걸기로 결정했다.
'......!'
혁련노후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도 승부를 결할 시점이 왔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그는 장각찬을 무섭게 회전시켰다. 장각찬은 무수한 환영을 이루며 사방으로 예기를
뻗쳤다. 그 순간 원계묵의 칼이 백 삼십 육 변의 변화를 일으키며 장각찬의 공세를
모두 차단시키고 말았다.
"음!"
혁련노후는 신음을 발했다. 가슴이 화끈했다. 어느새 삼도가 스친 것이었다. 그러나
원계묵은 틈을 주지 않았다.
"천일수라(天日修羅)!"
수라구류도의 제 팔초!
'흐윽.......'
혁련노후는 찬바람을 들이켰다. 도저히 상대의 공격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원
계묵의 도가 사면팔방에서 성난 파도처럼 밀려온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는 장각찬을 곧추세우고 좌수를 비스듬히 뻗었다. 그때 관전하던 부금진이 놀랜
음성으로 외쳤다.
"조심하시오! 흑마장(黑魔掌)이오!"
카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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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청을 찢는 듯한 파열음이 들렸다. 부금진의 경고는 한 발 늦고 만 것이다.
"음!"
두 마디 각기 다른 신음성이 들렸다. 두 사람의 위치는 바뀌어 있었다. 원계묵은 칼
로 땅을 짚고 간신히 신형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시커먼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혁련노후의 장각찬은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입가에 선혈을 흘리고 있었는데, 심장 부근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또한 부
릅뜬 눈에서도 핏물이 쿨럭쿨럭 비어져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두 눈동자가 터져버
린 것이었다.
혁련노후는 우뚝 선 채 중얼거렸다.
"훌륭하다... 아주 훌륭해......."
원계묵은 울컥, 한 사발이 넘는 피를 토해 낸 후 웃음을 흘렸다.
"흐흐... 노선배의 흑마장은 정확히 내 가슴에 적중되었소. 하지만 노선배의 장력은
내가 익힌 현문강기를 깨지 못한 것 같구려."
혁련노후는 동공이 파열되었으므로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연한 자세
로 말했다.
"자네가 이겼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허허!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침묵의 숲... 내 고향
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군......."
혁련노후의 음성에는 한 점의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기에 더욱 비감하게
들렸다.
이때, 원계묵의 주위로 사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도
혁련노후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다만 무서운 살기를 드러낸 채 원계묵을 향해 포위
를 좁힐 뿐이었다.
혁련노후는 울컥 피를 토해냈다. 그가 토해 낸 핏속에는 잘게 부서진 내장 토막들이
섞여 있었다. 그는 더듬더듬 말했다.
"원계묵... 저들은... 노부의 수하들이 아니라... 조화성 제... 삼신마전(第三神魔
殿)의... 천강삼십육검수(天 三十六劍手)들이야... 조심... 하는 게 좋네......."
이때였다.
혁련노후의 곁에 흑의인 한 명이 마치 지면 속에서 불쑥 솟아난 듯 모습을 드러냈다
. 그 광경에 원계묵은 눈썹을 경련했다.
'귀림의 술법자!'
흑의인이 비통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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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
혁련노후는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격동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귀림의... 제자냐......?"
"그렇습니다, 주군!"
"아직 날 잊진... 않았구나. 내... 시신을... 귀림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느냐?"
"주군......!"
흑의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 날 묻어다오."
혁련노후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부러진 장각찬으로 몸을 의지한 채 꼿꼿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주군!"
귀림의 술법자는 처절하게 외쳤다. 잠시 후 그는 혁련노후의 시신을 바닥에 눕히더
니 무릎을 꿇고 기이한 호곡성을 부르짖었다.
"우우... 우......."
실로 처량하기 그지없는 호곡성이었다. 이어 귀림의 술법자는 눈물을 흘리며 동쪽을
향해 세 번 절하더니 혁련노후의 시신을 안고 일어섰다.
스... 팟!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표흘무비한 신법이었다.
원계묵은 침묵하고 있었다. 부금진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소?"
"견딜 만하다."
부금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문제는 저 천강삼십육검수들이오."
그는 걱정된다는 듯 여인처럼 가느다란 눈썹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저들은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전주인 태사독이 친히 키운 절세의 고수들이오."
원계묵은 힐끗 부금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때문에 너까지도 위험하겠군."
부금진은 싱긋 웃었다.
"관계없소."
그는 정말 이상한 소년이었다. 상황은 극히 위험했으나 도리어 원계묵과 함께 있다
는 사실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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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천강검수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원계묵! 네가 혁련노후까지 꺾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너도 중상을 입었
다. 결국 네 생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원계묵은 입술을 씰룩이며 웃었다.
"흐흐! 안심해라. 네놈들을 모두 데려가 줄 테니."
"크큿! 입만은 살았군."
천강검수는 검을 쓱 뽑았다. 그것이 신호인 듯 나머지 삼십 오 인이 일제히 발검했
다. 찌르는 듯한 검기가 장내에 가득 찼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삼라만상(森羅萬
象)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했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쳐라!"
천강삼십육검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실로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차차차차창!
서른 여섯 자루의 검이 하늘을 뒤덮으며 원계묵과 부금진을 도륙낼 듯 휩쓸었다. 무
수한 칼그물이 사면팔방을 물샐틈없이 포위한 가운데 원계묵은 침착하게 신형을 지
탱하고 있던 칼을 비스듬히 올려 뻗었다.
캉!
"으악!"
불꽃이 튀며 한 명이 검과 팔이 동시에 절단되며 날아갔다. 그 순간 원계묵도 등줄
기가 화끈거렸다. 누군가의 검이 그의 등을 벤 것이었다. 그는 신형을 빙글 돌렸다.
눈 앞에 검을 잡고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천강검수가 보였다.
원계묵은 칼을 휘둘렀다.
"으악!"
천강검수는 허리가 두 동강난 채 쓰러졌다. 원계묵은 일단 싸움에 임하면 야수가 되
는 사람이다. 그는 상대를 벤 즉시 몸을 바닥에 굴리며 칼을 사방으로 휘둘러댔다.
"으... 아... 악!"
처참한 비명과 함께 두 명의 천강검수가 아래로 위로 두 쪽이 난 채 즉사했다. 실로
살벌하기 그지없는 혈전이 벌어졌다.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며, 바닥은 죽은
자가 쏟아 낸 핏물로 질펀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
부금진. 이 아름다운 소년도 혈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는 손에 소도를 만지
작거리며 한가롭게 서있었다. 그러나 여유는 오래 가지 않았다. 천강검수 한 명이
그에게 덤벼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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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어쩔 수 없군."
번뜩!
"......?"
상대방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벌렁 넘어갔다. 그의 이마 한복판에는
소도가 꽂혀 있었다. 그가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에 부금진은 소도를 뽑은 후 뒤로
던졌다.
"악!"
뒤에서 달려들던 또 다른 천강검수도 이마에 소도가 꽂힌 채 벌렁 쓰러졌다.
"저놈의 비도술(飛刀術)을 조심해라!"
그제서야 천강검수들은 놀라 부르짖었다. 십여 명이 원진을 형성하며 부금진을 에워
쌌다. 부금진의 얼굴이 떫은 감 씹은 꼴이 됐다.
'빌어먹을, 이렇게 되면 비도술은 더 이상 써먹지 못하겠군.'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 하나를 발 끝으로 차올려 잡았다. 고개를 돌려 원계묵 쪽을
살펴보던 그의 눈썹이 움찔했다.
원계묵은 전신에 성한 곳이라곤 없이 피투성이가 된 채 검수들과 뒤엉켜 있었다. 부
금진은 내심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쳇! 이럴 줄 알았다면 무공수련을 좀 더 하는 건데.'
이때 원계묵의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진! 내 걱정 말고 너만이라도 빠져나가라!"
부금진은 냉소했다.
"흥! 도망가려 했다면 벌써 갔을 것이오."
그는 검으로 눈 앞에 달려드는 천강검수의 어깨를 절단하며 재차 말했다.
"당신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오. 내게 술을 산다고 하지 않았소?"
원계묵은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 맞다. 그 약속을 깜빡 잊을 뻔했군, 그래!"
번쩍! 그의 칼이 원을 그리자 한 명의 목이 솟아올랐다. 그는 선혈을 온통 뒤집어
쓴 채 몸을 굴렸다. 천강검수들의 하반신이 장도에 의해 토막나며 피를 뿌렸다. 어
느새 그의 손에 죽은 자는 열 두 명이 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많았다. 더구나 그의 상처는 극심했다. 또한 부금진은 검이 손에 맞지
않았다. 그는 소도를 한 개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런 혼전에서 써먹기는 곤
란한 점이 있었다.
"뒈져라!"
한 천강검수의 검이 부금진의 어깨를 스치며 선혈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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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부금진은 비틀거리며 신형을 날려 간신히 피해냈다. 이때 그의 눈에 원계묵이 검을
맞고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등 뒤에서 한 명의 천강검수가 검
으로 목을 내려치고 있지 않은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손에서 하나 뿐인 소도가 날아갔다.
"으악!"
천강검수의 이마에 소도가 박혔다. 그는 사지를 허우적거리다 쓰러졌다. 원계묵은
힘겹게 돌아서며 말했다.
"고맙다. 꼬마친구!"
"꼬마, 꼬마 하지 마시오! 살모사 나리!"
"흐흐......."
원계묵은 웃었다. 그는 기진맥진하고 있었다. 눈은 초점이 맞지않아 사물이 가물거
렸고, 팔다리는 천근의 추를 단 듯 무겁기만 했다.
'결국... 이렇게 끝장나는 건가......?'
그는 하늘을 응시했다. 사위에는 어둠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저 멀리 언덕으로부터 뿌연 황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언덕의 능선을 따라 흙먼지를 구름처럼 일으키며 백여 필의 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마상에는 백의인(白衣人)들이 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원계묵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
켰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이... 이놈들......!'
그는 고개를 번쩍 들며 힘차게 외쳤다.
"소진! 힘내라. 우린 이제 살아 날 수 있다."
벌써 두 개 이상의 검에 부상당한 부금진은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무슨 소리요?"
실상 그도 지칠대로 지쳤고,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이 가물거렸던 것이다.
"으하하하......! 내 동료들이 왔다. 그들이 왔단 말이다!"
원계묵이 기쁨에 찬 광소를 터뜨렸을 때,
두두두두두......!
백여 필의 인마가 돌진해 왔다. 마상의 백의인들은 머리에 백건(白巾)을 두르고 허
리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형형한 안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부금진은 안색이 변하며 부르짖었다.
"백살대(百殺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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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라!"
"대주(隊主)를 구해라!"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말과 사람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이 돌변한 사태에 천강
삼십육검수들은 당황했다. 그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획획획!
백의인들은 탄환처럼 마상에서 몸을 날려 칼과 하나가 된 채 날아왔다. 만승검도 도
담후가 친히 키운 백 인의 정예고수라는 백살대의 등장에 천강검수들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더욱이 수적으로도 훨씬 열세였다.
백살대의 무공은 개개인이 모두 한 지방을 주름잡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들이 전권
으로 뛰어들자 천강검수들은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대항조차 못해보고 허수
아비처럼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그들은 몰살하고 말았다
.
"대주(隊主)!"
천강삼십육검수가 모두 토막난 시신이 되어 나뒹굴었을 때, 백의인 중 한 명이 원계
묵에게 달려가 무릎 꿇었다.
원계묵은 쿡쿡 웃었다.
"운표(雲票)... 네가 와 주었구나."
운표라 불린 이십대 초반의 백의청년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원계묵은 입가를 씰룩였다.
"하지만 알아야 된다. 이것은 나의 최선이었다."
말을 마친 순간 그는 푹 고꾸라졌다. 그 정도 버틴 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 운표는 급히 그를 부축했다.
"운표... 부탁이 있다......."
"말씀하시오, 대주."
"날 데리고... 가장 빠른 속도로... 대운하로 가서... 구룡상선의 주인 용백군을 만
나라.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원계묵은 혼절해 버렸다.
운표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강검수들은 깨끗이 전멸했으며
백살대는 질서있게 주위에 도열하고 있었다. 운표는 힘차게 말했다.
"모두 말을 타라. 운하로 간다!"
그는 한쪽에 창백한 얼굴로 서있는 부금진을 힐끗 보더니 재차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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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 소협에게 말 한 필을 드려라!"
부금진에게 한 필의 말이 건네진 후 운표는 부드럽게 권했다.
"소협도 같이 가십시다."
부금진은 히죽 웃으며 승낙했다.
"좋소."
이윽고 백살대는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달려갔다. 그들의 뒤쪽으로
는 구름같은 황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은 기세였다. 나타날 때
도 폭풍이었고, 사라질 때도 폭풍과 같은 인간들. 그것이 바로 백살대였다.
아무리 시선을 뻗어 보아도 끝없는 수평선만 보이는 곳. 만경창파(萬頃蒼波)의 바다
를 미끄러지듯 항진하고 있는 범선에는 구룡상선의 표기가 해풍에 휘날리고 있다.
구룡상선이 북경을 떠나 운하에서 백하(白河)를 빠져 동해로 들어온 지 오 일이 지
나고 있었다. 그동안 항해는 순조로웠다.
선실 안.
육 인의 인물이 담소하고 있었다. 침상 위에는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은 원계묵이
기대앉아 있었는데 주위에는 장천린과 단위제, 백연연이 있었고 미소년 부금진과 백
살대의 지휘자인 운표도 있었다.
"헛헛! 원대협의 그때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오싹 끼치오. 마치 혈귀(血鬼
) 같았으니 말이오."
단위제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단위제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평소 강해 보이기만 하던 원대협이 그 지경이 될 줄은 정말 몰랐소."
원계묵은 수척한 얼굴에 고소를 지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 당한 셈이지요. 그날 이후 느낀 점이 많습니다."
이때 부금진이 소도를 만지작거리며 참견했다.
"하지만 그 날의 싸움은 원대협이 아닌 누구라도 당했을 것이오."
그는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더구나 귀림의 일급고수들을 모두 처치하고 혁련노후마저 제거한 원형님의 무공은
가히 경이적인 것이었소."
방 안의 인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원계묵이 처치한 인물들
이 누구인가? 당금 무림에서 그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해 버리는 절세의 고수들이
아니던가!
장천린이 부금진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소진, 자네가 원제를 도와준 것에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일세."
부금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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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만 된 셈이었지요. 뭘......."
이럴 때의 소년 부금진은 계집아이처럼 수줍음을 타는 듯했다. 이때 단위제가 눈빛
을 번뜩이며 물었다.
"꼬마친구, 원대협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의 무공이 대단하다던데 실례지만 사문(師
門)이 어디인가?"
그 말에 모두들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십 오륙 세에 불과한 일개 소년이 그토
록 무서운 혈전의 와중에서 의연히 버텨냈다는 사실은 가히 경이적인 것이었다.
부금진은 한동안 소도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허공을 노려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함자는 백경(白景)입니다. 호는 취헌(醉軒)이라 하지요."
단위제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반문했다.
"자네... 춘부장이 취헌 부백경 대인이시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원계묵도 몹시 놀란 듯 중얼거렸다.
"술과 구름과 검만을 사랑하시며 평생을 살아오신 천애유자(天涯遊子) 어르신이 소
진 자네의 부친이라니......."
장천린은 궁금한 듯 참견했다.
"흠, 저는 견식이 짧은 탓인지 그 분에 대해 들은 적이 없구려."
단위제는 힐끗 부금진을 바라본 후 말했다.
"취헌 어른은 수십 년 전 섬서삼변총독(陝西三邊總督)에 봉직하신 분이었지요."
그는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반쯤 내리 감으며 설명했다.
취헌 부백경(符白景).
그는 사십여 년 전 북방을 수비하기 위해 설치한 구진(九鎭) 중 사진(四鎭)을 통괄
하던 섬서삼변총독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이십 세 후반이었으나 무예가 뛰어
나고 심기(心機)가 깊었으며 병법에도 통달했다. 그러므로 그가 있는 동안 북방의
경비는 철벽과도 같아 아무런 말썽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북방의 이족들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지나치게 빨리 출세한 탓이었는지 시기의 대상이기도 했다.
만력 사 년 경, 마침내 그는 북경의 자금성에서 획책된 음모에 휘말려 삭탈관직되고
만다.
그가 관복을 벗는 날이었다. 부백경은 총독부의 대청에서 사흘 밤낮 동안을 술을 마
셔댔다. 자그마치 그가 마셔댄 술은 백 독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
도 취한 기색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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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되는 날, 그는 자신을 문책하기 위해 파견된 자금성의 간신인 환관 도림사(
都林史)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 자금성 쪽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세 번
곡(哭)을 한 후 다시 세 번을 웃었다고 한다.
그 후 백의로 갈아입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독부를 떠났다는 것이다.
당시 섬서삼변총독부에서 일어난 이 유명한 일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이후 그 어른은 혈혈단신으로 중원을 유랑하시었소."
단위제의 얼굴에는 감회가 어려있었다.
"그 분은 관직에 계실 때도 그랬지만 무림에서는 더욱 유명한 분이셨지요. 사십여
년 가까이 무림을 유랑하시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이 그 분의 검 아래 무
릎을 꿇었기 때문이오."
단위제의 얼굴에는 존경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일화는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 북해제일고수인 북해사태
청(北海獅太廳)의 청주(廳主) 북해창룡수 숙야염과의 일전이었소. 당시의 대전은 장
장 삼 일 밤낮 동안 지속되었다 하오. 지금도 무림에서는 그 싸움을 일컬어 백야(白
夜)의 천전(天戰)이라 하여 인구에 회자되고 있소이다."
장천린의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북해창룡수 숙야염!'
그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숙야염은 취옥교의 사부였던 것이다.
이때 원계묵이 중얼거렸다.
"시와 구름을 사랑하시고 술을 즐기시며 한 자루 고검(孤劍)에 혼을 실은 채 강호를
유랑하시는 분으로 무림에 몸 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가르침 받기를
원하는 분이지요."
장천린은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부금진을 바라보았다. 부금진은 왠지 쓸쓸한 표정으
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천린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진, 자네의 춘부장께서 그렇게 훌륭한 분이신 줄은 생각 못했군."
부금진은 피식 실소했다.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시지요. 하나......."
그는 뭐라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흔들었다. 단위제가 궁금한 듯 물었다.
"춘부장께선 지금 어디 계신가?"
부금진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아버님을 못 뵌 지 수년이 지났습니다. 아버님은 늘 제 곁에 안 계셨지요. 제가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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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던 그때부터 말입니다. 항상 바쁘신 어른이니까요."
"......."
부금진의 반응에 실내 분위기는 다소 어색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껏 잠자코 경
청하기만 하던 백연연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말씀은 그만들 나누시고 차나 한 잔씩 드시지요?"
그녀는 찻주전자를 들어 그윽한 청향이 나는 차를 중인들에게 따라주었다.
"허허허! 그래도 백소저가 제일이오. 내가 목 마른 것을 어떻게 알았소? 아무튼 백
소저는 눈치 하나는 귀신이오. 장차 결혼하면 신랑에게 사랑을 듬뿍 받을 것이오."
단위제의 말에 백연연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
다.
"단도독님께서는 편리할 때만 제 칭찬을 하시는군요."
단위제는 펄쩍 뛰었다.
"거 무슨 섭섭한 소리요?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 백소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한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소?"
"어머!"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고, 중인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그로 인해 무거웠던
장내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이때 부금진은 슬며시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운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저 친구는 의외로 심약한 것 같군요."
그 말에 단위제는 코웃음치며 핀잔을 주었다.
"흥! 자네야말로 무식하도록 우둔하구먼."
"무... 무식요?"
운표의 얼굴이 빨개졌다. 단위제는 손가락으로 콧등을 긁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게. 백하(白河)에서 말이야. 운항하는 구룡상선을 느닷없이 막아선 채 칼
을 흔들며 배를 세우라고 설쳐대는 법이 어디 있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네. 당시 난 수적(水賊)인 줄 알았으니 말일세.
백살대를 지휘하며 고함을 빽빽 질러대던 자네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콧방귀가 나온
단 말씀이야?"
운표의 준수한 얼굴은 완전히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
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대주로부터 구룡상선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그대
로 이행한 것 뿐입니다. 당시 대주께서는 정신을 잃었기에 저로서는 무조건 앞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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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급히 변명을 해대는 운표의 모습에 중인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장내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한동안 담소가 그칠 줄 몰랐다.
어느덧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범선은 동해로 완전히 빠져 나갔으며, 망망대해를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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