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결의형제
한 마리 불나방이 황촉(黃燭)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다.
불꽃의 현란함에 이끌려서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춤사위에 젖어서인가? 불나방은 점
점 불꽃 가까이 접근해 갔다. 그리고 막 불꽃에 몸을 사르기 직전.
환상인가?
번... 쩍!
섬광이 명멸했다. 순간 불나방의 날개가 네 조각으로 나뉘어져 팔랑거렸다. 불나방
의 몸체가 정확히 두 쪽이 난 것이다. 몸체가 완전히 분리되기도 전.......
슷! 슷! 슷!
하는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섬광이 뒤따랐다. 불나방은 다시 수십 동강이가 되어 종
이조각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촉의
불꽃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원계묵은 천천히 칼을 칼집으로 넣고 있었다.
'됐어, 몸은 웬만큼 치유되었다.'
한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에 한 가닥 미소가 어렸다.
그때였다.
"훌륭한 솜씨다, 아우."
등 뒤에서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원계묵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문가에 장
천린이 서 있었다.
"형님."
"눈부신 솜씨였다. 칼솜씨에 있어서 자네야말로 당세무적일 것이네."
원계묵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습니다. 소제의 실력이야 티끌 정도에 불
과합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도법에 대해 문외한은 아니네. 당금 무림에서 칼로 자네를 이길 자는 결코 없
을 것이네."
원계묵은 미소 지으며 칼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과거 사부께서는 폭설 속에서 도법을 수련하신 적이 있지요."
그의 얼굴에는 아련한 추억의 빛이 떠올랐다.
"당시 그 분은 주위 다섯 자 이내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한 개도 남김없이 동강내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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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습니다. 그것도 장장 세 시진 동안 계속, 더욱이 밤중에 말입니다."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대단하군!"
"백 년 전 어떤 기인은 칼 끝에 흐르는 기운만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고수 십
육 인을 죽인 적도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
"그 기인의 이름은 도성 유백(柳白), 제가 인정하는 무림사상 제일의 도신(刀神)이
지요."
장천린은 한동안 침음하다가 반문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설 속에 묻혀버린 기인이 아닌가?"
원계묵은 눈을 반쯤 감으며 말했다.
"사부님을 죽인 자의 이름은 무정도 모용초입니다. 놈이 쓰는 도법은 바로 도성 유
백의 무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였습니다."
장천린은 가슴 속에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모용초, 그놈은 같은 하늘 아래 숨쉬고 있는 나의 원수이자 칼에 관한 한 평생의
숙적인 놈입니다."
원계묵은 문득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형님께서도 도법을 익히셨다고 했지요? 일수삼도 강중문의 삼도귀변팔법(三刀鬼變
八法)과 풍뢰도법(風雷刀法) 말입니다."
장천린은 이미 자신에 대한 얘기를 원계묵에게 모두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수박 겉 핥기 식일 뿐이네."
원계묵은 다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강중문은 섬서 일대에서 알아주는 일류 도객이지요. 그의 도법은 환도술(幻刀術)의
일종으로 그 방면의 명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씩 웃으며 묘한 어조로 말했다.
"언젠가 한 번 형님과 비무해 보고 싶군요."
장천린은 턱으로 황촉 아래 흩어져 있는 불나방의 잔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양하겠네. 저 불쌍한 나방 꼴이 되고싶진 않으니까. 더욱이 난 무사가 아니라 일
개 상인일세. 상인은 계산이 빨라야 하네."
원계묵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사는 싸울 수는 있어도 결코 대륙을 지배하고 난세를 다스리지는 못합니다. 천하
를 장악하는 사람은 무사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님 같은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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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진정한 강자입니다."
장천린은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난 그렇게 큰 인물이 못되네. 더욱이 나는 천하를 장악하는 것 따
위에는 취미가 없네. 그저 상술을 발휘하여 큰돈을 벌고 싶을 뿐이네."
원계묵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은 곧 돈입니다."
장천린은 빙긋이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형님."
원계묵의 눈에 열기가 솟았다.
"......?"
"소제는 부상을 입은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음, 무슨 생각을 했나?"
갑자기 원계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우! 이게 무슨 짓인가?"
장천린이 당황하며 부르짖자,
"거두어 주십시오! 형님."
원계묵의 음성에는 확고한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장천린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
라보았다.
"일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소제도 나름대로 계산을 했습니다. 소제가 움직이기에
는 이 대륙은 너무나 광활합니다."
원계묵의 눈에는 진지한 빛이 가득했다.
"무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공에게 목숨을 겁니다. 천애고아인 이 원계묵을 가장 먼
저 알아주신 분이 바로 형님입니다. 형님과 소제가 만난 것은 운명입니다. 이 아우,
형님 곁에서 이 드넓은 대륙에 승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장천린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원계묵의 말이 결코 즉흥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자네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네. 그리고......."
그의 말은 원계묵에 의해 끊겼다.
"소제 개인적인 일은 형님을 위해서라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
장천린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원계묵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자신을 거두어 달라는 것. 그것은 곧 주군(主君)으로 모신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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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자신의 운명을 그에게 송두리째 맡기겠다는 것이다.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중
대한 문제였다.
장천린은 원계묵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원계묵의 굵직한 목에서 설령 칼이 떨어진
다 해도 후회 않는 사나이의 완고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원계묵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며칠 전 북경에서의 그가 아니었다. 며칠 사이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으며 또 성숙해져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달관한 것 같았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탁자를 향해 걸어가더니 탁자 위의 장도를 움켜쥐
었다.
스릉!
하는 음향과 함께 도광이 번쩍! 빛났다. 어느새 도가 뽑혀진 것이다. 이어 한 가닥
핏줄기가 허공에 뿜어졌다. 장천린은 원계묵 앞에 무릎 꿇고 새끼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로 바닥에 둥근 원을 그렸다.
그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원(圓)은 끊이지 않는 선(線)이다."
그는 활활 불타는 눈으로 원계묵을 주시했다.
"아우, 자네와 나의 운명도 이제부터는 이 원 속에 영원히 공존하게 될 것이다."
"......!"
원계묵의 눈썹은 물론 얼굴의 근육이 일시에 잔 경련을 일으켰다. 장천린은 그에게
장도를 넘겨 주었다. 원계묵은 두 손으로 칼을 받은 다음 서슴없이 새끼 손가락을
베어 버렸다. 그도 역시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동심원을 그렸다. 그의 원
은 보다 작게 그려져 장천린이 그린 원 속에 자리잡았다.
"이 원계묵, 하늘에 두고 맹세하건대 일생을 형님과 같이할 것이며 목숨과 더불어
모든 것을 형님께 바치겠습니다! 비록 태어난 시각은 달라도 죽는 순간만큼은 같이
할 것을 하늘에 맹세합니다!"
격동어린 원계묵의 맹세가 끝난 순간,
"아우!"
"형님!"
손.
두 사나이의 손이 서로의 손을 힘차게 마주 잡았다.
눈.
두 사나이의 뜨거운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혀졌다.
피로 맺은 결의형제의 탄생이었다. 하늘 아래 각각 틀린 성(姓)과 개성을 지니고 각
자가 다르게 살아왔으나, 앞으로는 생명을 함께 할 것이며 야망과 목적을 함께 하기
로 맹세한 두 사나이! 그들의 뜨거운 직정(直情)이 밤바다를 항해하는 범선의 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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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식을 줄 모른 채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항해 칠 일째.
구룡상선은 황하(黃河)의 하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타는 듯한 노을이 하구를 붉게 물들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노을을 한껏 받으며 구
룡상선은 유유히 하구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타......!"
백의무사 세 명이 목도(木刀)를 움켜쥔 채 비무하고 있었다. 상대는 한 사람이었다.
백살대의 대장 운표가 한 손은 뒷짐진 채 여유있게 삼 인의 무사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장소는 구룡상선의 선상이었고 삼 인은 백살대(百殺隊) 소속의 무사들이었
다.
슉! 슈슉!
부릅뜬 눈에는 패기가 만만했고, 그들이 휘둘러대는 목도에서는 진도(眞刀) 이상의
예리한 기운이 쉴새없이 발출되고 있었다.
운표의 표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엄숙하기만 했다. 그들이 비무하는 주위에는 백
살대의 무사들이 양쪽으로 나뉜 채 단정히 무릎 꿇고 관전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두
청년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단위제와 원계묵이었다.
한동안 비무를 지켜보던 단위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흠, 저 친구는 평소 덜렁거리기에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보니 무공이 보통이
아니구려."
원계묵은 싱긋이 웃었다.
"백살대 중 으뜸입니다. 아마 저와 비교해도 그다지 차이가 없을 겁니다."
"아! 그 정도요?"
단위제는 탄성을 발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운표의 목도는 상당히 짧은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원계묵은 담담히 말했다.
"제가 쓰는 칼은 넉 자 세 치로 상당히 긴 반면 운표는 두 자 여덟 치로 짧은 편이
지요. 그것은 운표가 개인적으로 힘보다는 변화를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실제로 운표의 칼은 기형도(奇形刀)입니다."
"탓!"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렸다. 단위제가 급히 시선을 돌려보니 운표를 상대하던 한 무
사의 목도가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운표의 목도가 무사의 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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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졌다.
"윽!"
무사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갈!"
운표의 얼굴은 살얼음장이 되었고, 그의 입에서는 준엄한 질책이 떨어졌다.
"무사에게 있어 무기는 생명이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라도 절대 놓쳐선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쓰러진 무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가서 천황련(天 鍊) 일만 회를 연습해라!"
"알았습니다."
무사는 추호의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도리어 만면에 부끄러운 빛을 띄우며 맹종
했다. 그는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한 후 두 손으로 목도를 안은 채 뒤로 물러났
다. 운표는 고개를 돌려 외쳤다.
"조충(兆忠)!"
"넷!"
오른쪽 대열의 첫 번째에 앉아 있던 청년무사가 힘차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이제 네가 훈련시켜라."
"알겠습니다."
운표가 뒤로 물러서자 조충은 대열의 한가운데로 걸어가며 목청을 돋구었다.
"일어서라! 지금부터 상호 대련을 실시한다!"
그의 구호가 떨어진 순간,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벌어졌다.
따다닥! 딱! 딱!
선상에서는 때아닌 격전이 벌어졌다. 비록 진도가 아닌 목도였지만 백살대의 대련광
경은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격렬했다. 귀청을 찢는 파공성과 경풍소리, 기합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굉장하군! 저 정도면 웬만한 문파들은 감히 견줄 수도 없겠는걸? 더구나 무서운 점
은 저들의 도법이 완전히 실전도법이라는 점이다.'
단위제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실상 백살대는 보통 조직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도담후가 직접 도법을 전
수하며 양성한 자들이었다. 도담후는 그들에게 허구적인 형식을 완전히 배제한 실전
도법만을 가르쳤다. 그로 인해 백살대는 개개인이 모두 도귀(刀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계묵은 운표가 다가오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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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다."
운표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대주께서 직접 지도하시는 것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요."
그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덜렁대고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돌
아온 것이다. 그를 바라보며 단위제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음! 한 순간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군.'
이때였다.
"수고들 하시는군요."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와 삼 인은 고개를 돌렸다. 백연연이었다. 그녀는 과일
접시를 들고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과일 좀 드세요."
백연연이 내온 과일은 푸짐했을 뿐더러 깎은 솜씨도 정성이 듬뿍 깃들어 있었다. 운
표는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접시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소저!"
백연연은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선실 쪽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운표의 눈에는 동경이 담겨 있었다. 그는 완전히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단도독님, 아무리 생각해도 백소저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단위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자네 눈은 제대로 달린 모양이군."
"......?"
운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백소저 같은 성격의 미녀를 좋아합니다."
"으허허허헛!"
단위제가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짓자 운표는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하듯 물었다.
"왜 웃습니까?"
"저게 무엇인가?"
단위제의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운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하늘이지요."
"저것은?"
"바다."
단위제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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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됐네."
"무슨... 뜻입니까?"
"헛헛헛, 난 몹시 걱정이 되었네. 혹시 자네가 어디 아픈가 해서 말일세."
그 말에 이제껏 말없이 듣고만 있던 원계묵이 쿡! 하고 웃었다.
그제서야 운표는 자신이 희롱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다
. 그는 단위제를 무섭게 흘겨보았으나 감히 말은 하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간 단위
제의 독설(毒舌)이 더욱 심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석양은 진홍빛에서 암갈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구룡상선의 선미(船尾).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물결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격랑을 이루고 있는 선미에 두
발을 배 밖으로 내민 채 앉아있는 소년은 바로 부금진이었다.
사각... 사각!
그는 조각을 하고 있었다. 소도로 나무를 깎아 만들고 있는 것은 미녀상(美女像)이
었다. 그는 조각하는 데 몰두하여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소도가 나뭇결을
깎아나갈 때마다 미녀상의 형태가 점차 뚜렷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미녀상은 완성되었다. 부금진은 멍하니 미녀상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소년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뿌연 습기가 어렸다.
'차라리 당신은 제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때 떠나야 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그랬더라면 아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부금진의 눈에 반짝 빛이 일어났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합니다. 안타깝습니다. 당신이 그리워지면 질수록
당신에 대한 증오 또한 커지기에......!'
부금진은 품 속에서 피리를 꺼냈다. 피리는 비취옥으로 만든 것으로 한눈에 보기에
도 명품인 듯했다. 그는 입술로 피리를 가져갔다.
삘리리... 삘릴리리... 릴!
감미로우면서도 구슬픈 피리소리가 파도를 타고 애잔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야말로 심금을 찌르는 듯한 묘한 마력이 깃든 음향이었다. 그러나 피리소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부금진은 다시 조각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번민이 어려 있었다. 사랑과 증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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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엉킨 채 뿌연 습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휙!
그는 갑자기 조각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미녀상은 바다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삼켜져
버렸다. 잠시 후,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미녀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저만
치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멍한 눈길로 바다를 바라보던 부금진의 눈꼬리에 이슬이 맺혔다.
삘릴리리......!
그는 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번의 피리소리는 더욱더 구슬펐다. 애잔한 선율
은 가슴을 후비는 듯했고, 곡조가 높이 올라갈 때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비통함이
, 낮게 깔릴 때는 울적한 심사가 회색의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좋은 곡이군."
피리를 불던 부금진의 몸이 굳어졌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음성의 주인이 원계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언제... 왔습니까?"
부금진은 피리를 입술에서 떼며 물었다.
"아까부터 지켜보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있었지. 피리 솜씨가 대단하더군
. 하지만 곡조가 너무 슬프더군."
"쿡쿡쿡......."
부금진은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비웃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살모사 나리께서는 음에 대해 좀 아시나 보군요?"
원계묵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아까 네가 던진 것 말이다. 훌륭한 조각 같은데 왜 버렸느냐?"
부금진의 몸이 다시 경직되었다. 갑자기 그는 차갑게 외쳤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시오!"
원계묵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네 일에 참견할 이유가 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소진! 너는 내 생명을 한 번 살려준 셈이다. 게다가 너와 나는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부금진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원 형님도 꽤나 감상적이군요."
원계묵은 그의 곁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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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 너는 나이답지 않게 너무 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는 것 같구나. 네 고민이 무
엇인지 모르겠지만 알면 안되겠느냐?"
부금진의 안색이 몇 번이나 흐렸다 개었다 했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더니 냉
소(冷笑)했다.
"흥! 무슨 자격으로?"
원계묵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자격은 없다. 하지만 널 좋아한다."
부금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소진, 갈 곳이 없다면 나와 함께 해남으로 가자."
원계묵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소진, 남자는 말이다. 어떤 고통이라도 능히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 너는 강한 놈
이니 내 말뜻을 알아들으리라 믿는다."
원계묵은 말을 마친 후 일어섰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선실 쪽으로 사라져 갔다. 부
금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멋대로 씰룩거렸다.
"치잇... 제까짓 게... 뭔데......."
그는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암갈색의 하늘이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그
의 표정에 힘이 빠져 있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소년 부금진.
그는 향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떤 방면으로 나가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
나 자존심 강한 그의 성품은 자신의 나약함을 남에게 드러내고 싶어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가슴에 천 근의 납덩이가 얹힌 듯 답답하기만 했다.
푸드드득......!
갑자기 허공에서 날개짓 소리가 들리더니 한 마리 새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것은 털이 눈처럼 흰 앵무새였다.
"소진아, 소진아, 너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너는 이 아비의 마지막 희망이다!
앵무새의 종알거리는 소리에 이제껏 음울하기만 했던 부금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
랐다. 그는 앵무새의 부리를 손가락으로 탁, 퉁기며 내뱉았다.
"이놈, 백아! 언제고 네놈을 튀겨 술안주로 만들어 먹어 버리겠다!"
앵무새는 화들짝 놀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바보 같은 소진아! 앵무새 고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푸후훗......!"
부금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래, 해남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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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금진은 몸을 일으켜 선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황하의 하구로부터 흘러
내리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면서 내는 요란한 파도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쿠쿠쿵......!
황하와 바닷물의 만남은 거대한 파도의 벽을 수십, 수백 겹으로 만들고 있었다. 밀
물일 때는 더욱 그 벽이 높아진다.
산신묘(山神廟).
사당 주위에는 사람의 키를 넘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향화(香火)가 끊
긴 지 수십 년이나 지난 듯 황폐한 풍경이다.
사당 안으로 노을이 핏빛처럼 섬뜩하게 비쳐들고 있다.
관(棺).
사당 안에 하나의 관이 놓여 있다. 핏빛 노을이 관을 비추니 괴기스런 느낌이 들게
했다. 관 옆에는 누군가 웅크린 자세로 앉아 있다.
백의를 입은 미청년이었다. 고사에 나오는 절세미남자인 송옥(宋玉)도 울고 갈 만큼
준수한 용모의 청년은 한 자루 묵도(墨刀)를 바닥에 놓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정한 풍류객, 무정도 모용초가 아니라면 이런 분위기를 풍길 사람
은 없다.
지금 그의 영준한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관은 뚜껑이 열려 있었다. 관 속에는 귀
송자 혁련노후가 누워 있었다. 혁련노후는 오래 전에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신이었으
나 회색의 얼굴만은 이상하게도 평온해 보였다.
"......."
모용초는 망연한 눈길로 혁련노후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째다. 그는 미동도 않고 있었다.
'노야(老爺), 당신은 정말 세상을 떠난 것이오? 진정 죽었단 말이오? 당신은 언제나
사람을 기만하는 것을 좋아했지 않소? 지금 당신의 모습도 날 기만하는 게 아니오?
나는... 믿을 수가 없소. 당신이 죽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오.'
모용초는 바닥에서 잡초를 한 움큼 뽑았다.
사당은 너무나 낡아 지붕이 훤하게 뚫려 있었고, 바닥에는 잡초가 자라 있었다. 그
는 잡초를 뜯어 입에 넣고 씹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혀를 쏘는 쓴맛은 그의 슬픔
을 세포 구석구석으로 스며들게 하고 있었다.
모용초는 자꾸만 잡초를 뽑아 입 안에 구겨 넣었다.
쓰디쓴 풀즙의 맛은 그의 혈관 끝까지 번져나가 격정을 더욱 회오리치게 했다.
'당신이 내게 보여주던 그 강철 같은 힘은 어디로 갔소? 흐흐! 이렇게 당신은 누워
있고 나는 앉아서 당신의 시체를 바라봐야 한단 말이오? 그까짓 원계묵 정도에 거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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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질 정도로 당신은 늙어버렸단 말이오?'
모용초는 계속 잡초를 뽑아 입 안에 구겨 넣었다. 이제는 쓰다 못해 혀가 아려 쓴맛
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혁련노후의 시신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대체 당신의 그 평온한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요?'
그는 퉷! 하고 씹던 잡초를 뱉었다. 그의 눈빛이 스산해지고 있었다.
"원계묵!"
갑자기 증오에 찬 중얼거림이 그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
사당 안의 공기가 파동치더니 관 앞에 한 명의 흑의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땅에서
솟았는지,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갑작스럽게 나타난 흑의인은 바로 귀림의
인물이었다.
그는 귀림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한때 번창했던 귀림의 술법자들은 그 언젠가 치열
한 혈전에 거의 소멸된 데다가 이번에는 원계묵에 의해 모두 죽고 그 혼자 살아남게
된 것이었다.
흑의인은 허무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용 어른, 해가 지고 있습니다. 이제 주군의 시신을 옮겨야겠습니다."
"귀림으로... 말인가?"
흑의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초는 특유의 비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왜 곧바로 귀림으로 가지 않고 날 찾았느냐?"
흑의인은 움푹 꺼진 눈가에 그늘을 드리우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용 어른께만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용초는 한동안 침묵했다. 흑의인은 몸을 숙여 관 뚜껑을 닫으려 했다.
"잠깐."
찌... 익!
모용초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내더니 혁련노후의 가슴 위에 얹어놓았다. 그의 눈은
이제 무심(無心)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되었다."
흑의인은 관 뚜껑을 닫고 주변을 정리했다. 모용초는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상곡(商谷), 너는 앞으로 어쩔 작정이냐?"
상곡이라 불린 흑의 중년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귀림으로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을 작정입니다. 어른께서 돌아가신 이상 성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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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귀림을 찾지 않을 테니까요."
모용초는 이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 무엇을 바라느냐?"
상곡은 멍하니 그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용초의 입에서 스산한 음성이 떨어졌다.
"원계묵은 내가 죽여주겠다."
상곡의 얼굴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태사독 어른께 전해주십시오."
태사독은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전주로 원계묵을 죽이기 위해 끈질기게 살수(殺手)들
을 보낸 장본인이다. 모용초는 의아한 눈으로 상곡을 바라보았다.
"천강삼십육검수가 나서 주기만 했어도 어른은 돌아가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말
입니다."
상곡은 관을 둘러멨다.
"언제고 시간 나시면 귀림에 방문해 주십시오. 비록 빛이 없는 침묵의 숲이지만 더
러움은 없는 곳입니다."
스스스!
상곡의 모습이 사라졌다. 귀림의 마지막 생존자인 그가 영원히 무림에서 모습을 감
춰버린 것이다.
"......."
모용초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석양빛이 그의 얼굴에 떨어져 비감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제 갈 사람은 갔다. 사당에는 그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이때 귓전으로 누군가의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마음이 괴로운가, 친구? 그런 모습은 자네답지 않군."
모용초는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문 옆에 한 사나이가 비스듬히 기대 서 있었다. 사나이의 그림자가 사당 안
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나이는 몹시 특이했다. 입술에는 풀잎을 물고 있었으며, 머리칼은 멋대로 자라 어
깨 너머로 헝클어져 있었다.
옷은 마의(麻衣)를 입었으며, 반쯤 걷은 팔과 다리는 구릿빛이었다. 얼굴에는 무수
한 상처가 나 있어 마치 야차를 보는 듯 무서운 느낌을 준다. 한쪽 눈에는 검은 안
대가 채워져 있었다. 나이는 대략 사십 세 정도로 보였다.
"막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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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초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괴사나이 막청은 기묘하게 입술을 씰룩이며 사
당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다, 친구."
두 사람은 강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광경이 조금도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가슴 뭉클하게 하는 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모용초는 격동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막청, 너무 소식이 없어 자네가 죽은 줄 알았다."
막청의 눈에도 감상이 어렸다.
"그렇군,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었어."
그는 미소 지었다. 그러나 안면이 온통 상처투성이라 미소 같기는커녕 흉측한 느낌
만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용초의 영준한 얼굴을 바라보
며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흘흘, 자네는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여전히 아름다워."
모용초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겉보기에
그는 막청보다 훨씬 연하로 보였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와 막청은 동년배였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막청은 흐흐, 웃었다.
"조화성의 표기를 봤지."
"그간 어디에 있었나?"
"천산(天山)."
막청은 허리춤에서 호로병 하나를 꺼내더니 입에 쑤셔 박고 목울대가 움직이도록 꿀
꺽꿀꺽 술을 마셨다.
"자네도 마시게."
모용초는 호로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독한 배갈이 목구멍을 넘어가며 독한 향기
를 풍겼다.
"혁련노인이 돌아가셨더군. 소문은 들었네. 원계묵이란 자, 그렇게 강한가?"
모용초의 눈에서 섬뜩한 광채가 솟아났다.
"자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막청은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 혼자 하겠다는 말이군."
그는 사당 안을 서성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취영의 얘긴 들었다.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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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초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와 그녀만은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만!"
모용초는 느닷없이 막청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서 무서운 광기(狂氣)가 솟
아났다.
"그만해라. 그녀의 이름을 내 앞에서 올리지 마라! 이름만 들어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살심을 느낀다!"
막청의 안면이 경직되었다. 그는 모용초가 이토록 흥분할 줄은 몰랐다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용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그녀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그 말에 모용초의 안색이 누그러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친구......."
막청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그들 사이에는 한동안 어색한 침묵
이 흘렀다. 문득 모용초는 호로병을 뺏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어 손등으로 입술
을 쓱 문지르며 말했다.
"이십 년 전 그녀는 갑자기 변했다. 정숙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언제나 빛나 보이던
그녀가 무섭게 변해 버렸지."
막청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내가 성주의 명을 마치고 하북(河北)에서 돌아와 곧장 그녀에게 달려갔을 때... 그
때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흐흐! 그때 그
녀는 낯선 사내 놈들과 어울려 그 짓을 하고 있었네."
"......!"
막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충격을 받았지. 현실이 아니라고... 꿈일 것이라고 수도 없이 외쳤지.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었네."
모용초는 다시 호로병을 입에 쑤셔 박았다.
"더욱이 말이다. 그녀는 문 앞에 넋을 잃은 채 서있는 날 보고 웃었네. 그때 그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겠나? 요부! 그녀의 얼굴은 방탕한 요부의 그것이었네!"
"음......."
막청의 이마에 심줄이 불거졌다. 그도 무한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군... 당신도 이리 오세요... 우리 함께 즐겨요... 라고."
모용초의 안면 근육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악다문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
다. 막청의 얼굴도 푸르뎅뎅하게 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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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청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대체 친구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세상에 존
재하는 모든 위로의 말을 떠올려 보았으나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듯 아무 말도 떠오
르지가 않았다.
갑자기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으으......!"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빌어먹을 세상을 깡그리 쓸어
버리고 싶다는 광폭한 살기가 그의 전신 혈관을 무섭게 뒤틀고 있었다.
밤하늘에 별빛이 가물거리고 있다. 황량한 들판에는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용초와 막청은 나란히 들판을 걷고 있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변해 버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 마디의 변명도 하
지 않았고 나 역시 묻지 않았지."
막청은 입술을 씰룩이며 물었다.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흐흐... 으......."
모용초는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막청은 흠칫했다. 일찍이 모용초가 이런 웃음을 흘
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하자."
막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초는 화제를 돌렸다. 그의 음성은 예전의 활기찬 음성
으로 돌아가 있었다.
"막청, 자네 아버님은 평안하신가?"
막청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헛! 돌아가셨네. 햇수로 치면 십 년이 흘렀지."
모용초는 걸음을 멈추었다. 막청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평생을 복잡하게 살아오신 분이었지만 마지막만큼은 깨끗이 정리하고 가셨네. 모두
지난 일이야."
모용초는 할 말이 없어 침묵했다.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 그는 고개를 떨군 채 걸었다. 얼마쯤 가다 그는 다시 물었다.
"무슨 일로 나왔나?"
"천산으로 성주의 서찰이 왔네. 내가 필요하다더군."
"그 때문에 나왔단 말인가?"
막청은 허허로운 웃음을 웃었다.
"후후... 십삼사(十三邪)의 운명은 모두 마찬가지야, 친구. 마교(魔敎)의 일맥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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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청도 예외일 수는 없네. 성주는 서찰을 통해 신산 제갈사를 제거하라는 명을 내
렸네."
"신산을......?"
모용초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의 눈에 곤혹의 빛이 어렸다.
"신산은 지금 독로장미(禿路薔薇) 서문표(西門彪)가 맡고 있는......."
막청은 눈을 번뜩였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글쎄, 누가 맡고 있든 관계치 않겠네. 성주의 명은 절대적인 것, 난 명을 따를 뿐
이네."
모용초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 자는 보통이 아니네. 지난 이십 년 간 성주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를 죽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왔네."
막청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글쎄,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딘가 허점이 있을 테지.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있
다고는 믿지 않네. 반드시 틈이 있을 거야."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나 막청이 지난 사십 년 간 살아오면서 절대로 깰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네. 바로 내 아버님이지."
모용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막청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두 사람. 그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달
랐다. 어릴 적부터 모용초는 준수한 용모에 학문과 무학조차도 월등히 뛰어났었다.
반면 막청은 모든 방면에서 그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였다.
막청은 모든 것을 모용초에게 양보하며 살아왔다. 하다못해 그는 난생 처음으로 사
랑을 느꼈던 여인조차도 모용초에게 양보했다.
또한 그의 한쪽 눈이 멀게 된 것도 두 사람이 비무할 때 그가 양보함으로 인해 얻은
상처의 결과였다. 만일 그때 그가 양보하지 않았다면 모용초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
이다.
모용초는 그런 막청을 좋아했다. 아니, 그는 살아가면서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그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우정은 지순하다기 보다는 어딘가
숙명적인 굴레가 씌워져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었다.
"곧 겨울이 오겠군."
막청의 중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것 같다. 모용초는 갑자기 을씨년스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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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에 어깨를 움츠렸다. 추위를 느껴서가 아니다. 왠지 가슴이 텅 비는 듯했기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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