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초 설
제남부(齊南府)는 산동성(山東省) 제일의 대도시로 대륙의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화북대평원(華北大平原)에 자리잡고 있다.
기름진 땅이 끝간 데 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평야지대는 풍부한 산물(産物)과
농작물이 생산되는 곳으로 누가 이곳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천하의 주인이 결정되곤
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들이 누대에 걸쳐 피를 흘려 왔던가?
제남부에는 양가장(楊家莊)이 있다.
이십 년 전, 자금성에서 호부판서(戶部判書)를 지냈던 양응시 대감이 관직을 버린
후 낙향하여 세운 장원이었다. 그후 양응시는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당대에는 그의 아들 양익상이 대를 이었으며, 그는 상업(商業)으로 양가장의 성세를
넓혔다. 오늘날 양가장은 제남은 물론 산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거부로 주위의 존경
과 부러움을 사기에 이르렀다.
양익상은 완고한 성품을 지녔다. 그러나 약자를 존중하고 인정이 많은 그는 황하에
수재가 나거나 가뭄이 들 때마다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칭송 받고 있었다.
양가장은 황하를 굽어보는 산언덕에 자리잡았다. 비록 웅장한 규모는 아니었으나,
주변의 경치와 더불어 장원의 아름다움은 단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했다.
양가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구룡상선에서 내린 선부들과 백살대의 무사들, 그밖에도 양가장의 식솔과 하인들이
북적댔다. 주방 하녀들은 바쁘게 술과 음식을 대청으로 운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대청의 상석에는 장주 양익상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육십여 세 정도에 청수한 용모
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장천린이 앉아 있었고, 단위제와 원계묵, 운표, 백
연연, 부금진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익상은 일행을 환대했다. 특히 북경에서 성공적으로 거래를 마치고 온 장천린에게
는 대견하다는 듯 연신 어깨를 두드렸다.
처음 그는 장천린의 일행이 많은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장천린은 사업을 위해 고
용한 인원이라고 소개했다. 그에게 태진왕과 맺은 비밀 협약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
던 것이다.
어쨌거나 양익상은 몹시 기뻐했다.
"허헛! 정말 수고가 많았다. 사실 물건이 워낙 많아 은근히 걱정했다. 그런데 하나
도 남김없이 처리하고 올 줄이야."
장천린은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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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숙께서 다져놓으신 길인데 무슨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허허허! 지나친 겸손이다. 실상 내가 직접 갔더라도 다 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년 전, 양익상은 사업의 대부분을 장천린에게 맡겨 버렸다.
그 후 양가장의 사업은 눈부시게 성장해 열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불과 이 년 사이
에 양가장은 제남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부호가 되었다. 만일 장천린이 아니었
다면 짧은 기간에 그만큼의 성세를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양익상은 그런 장천린이 대견하기만 했다.
장내는 화기애애했다. 구룡상선의 일행들은 술잔을 나누며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곳곳에서 호탕한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양익상은 흐뭇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장천린에게 물었다.
"참, 진총관(陣總管)을 당산(唐山)으로 보냈다고?"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산 근처에 철광(鐵鑛)이 상당량 매장된 곳이 있는데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북경
가는 길에 미리 보냈습니다."
양익상은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진총관은 몸이 약한데......."
"그래서 초광을 딸려 보냈습니다."
"음, 그랬나?"
양익상의 얼굴은 환해졌다. 장천린이 하는 일엔 도무지 빈틈이라곤 없었다. 그는 마
음이 놓인 듯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장천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세옥(世玉)과 문완(文婉)은 어디 있습니까?"
"허헛! 사냥을 간 모양이다.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만사를 젖혀놓고 달
려올 텐데, 이번엔 꽤나 멀리 간 모양이다."
"그랬군요."
장천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였다. 하인 한 명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더니 양익상
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갑자기 양익상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놈이... 감히......!"
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 버럭 외쳤다.
"당장 그놈을 내쫓아버려라!"
하인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주인님, 하지만......."
양익상은 탁자를 탕, 치며 거듭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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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쫓아 버리지 못하겠느냐?"
"예, 예!"
하인은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장천린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외숙?"
"아무 것도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자, 술이나 한 잔 받아라."
장천린은 공손히 술잔을 받아 비운 후 양익상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군요."
양익상은 단숨에 술잔을 비워버린 후 노기띤 음성으로 말했다.
"너도 알 것이다. 호개악(胡介岳)의 청무관(靑武館) 말이다."
"압니다. 그곳은 제남부에서 가장 큰 무술도장이 아닙니까?"
"호개악 관주에게 은이랑(殷伊郞)이란 조카 놈이 있다. 그놈은 호개악의 위세를 믿
고 천방지축 날뛰는 놈이지. 한데 보름 전 갑자기 그놈이 사람을 보내 청혼을 해왔
지 뭐냐?"
양익상은 짜증스럽게 수염을 꼬았다.
"내 참 기가 막혀서! 문완을 달라지 뭐냐?"
장천린은 흠칫했다.
양문완은 양익상의 외동딸로 금년 나이 십 칠 세였다. 그녀는 제남제일미로 불릴 정
도로 미모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미모 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에도 뛰어나 명문대
가의 귀공자들은 그녀를 한 번 만나 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혼담이 오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양익상은 분기탱천했다.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놈은 소문난 호색한에다 개망나니로 소문난 놈이다.
게다가 벌써 첩이 여섯 명이나 된단 말이다."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정말 고약한 놈이군.'
이때, 두 명이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들을 보자 장천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들은 일남일녀로 귀엽게 생긴 십 이삼 세 가량의 소년과 막 피어난 꽃 같은 미소
녀였다. 다름 아닌 양익상의 아들 양세옥과 외동딸 양문완이었다.
"형님!"
세옥은 장천린을 발견하자마자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는 한달음에 대청을 가로질러
장천린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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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이 개구쟁이 녀석! 형님 가슴에 구멍 나겠다."
세옥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형님이 오셨단 얘길 듣고 누나와 급히 달려오는 길이에요."
양 뺨이 발갛게 달아있는 소년의 모습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으나 한편으
로는 당찬 느낌을 주었다. 장천린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냥 갔다고 들었는데 많이 잡았느냐?"
세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요, 노루를 두 마리나 잡았어요."
이때 양문완이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가는 허리를 숙이며 절을 했다.
"오라버니, 북경까지 다녀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어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수고는? 그건 그렇고 집안에만 박혀있던 네가 사냥을 갔다니 뜻밖이구나."
문완은 얼굴을 노을처럼 붉혔다.
"세옥이 떼쓰는 바람에 억지로 따라갔던 거예요."
"거짓말! 사냥 가서는 나보다 더 설쳐놓고 이제 와서는 새침을 떨어?"
세옥이 혀를 쏙! 내밀며 빈정거리자 문완은 그만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옥아, 그만 까불고 형님의 친구분들에게 인사드려라."
세옥은 눈을 반짝이며 급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단위제, 원계묵 일행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하는 것이 아닌
가?
"양세옥이라고 합니다."
그 광경에 중인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명가의 후손이라 다르구나. 방금 전만 해도 철부지 개구쟁이 같았는데 한 순
간에 딴판이 되다니.'
이때 양문완도 옷깃을 가볍게 잡고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했다. 비록 소녀 티를 완전
히 벗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게다가 부호의 딸이면
서도 옷차림이나 행동거지가 검박하고 겸손해 보였다.
운표는 팔꿈치로 원계묵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대주, 대단한 미인인데요?"
원계묵은 무뚝뚝하게 반문했다.
"양소저가 미인인 것이 무슨 상관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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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표는 혀를 찼다.
"멋없소, 대주."
그는 고개를 돌려 양문완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눈에 반한 듯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 양문완은 장천린의 곁에 붙은 채 이따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그 모
습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운표는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답구나. 백소저도 아름답지만 그녀에게는 왠지 가까이 하기가 어려운 면
이 있는데 저 양소저는 정말.......'
한쪽에서는 백연연과 단위제, 부금진이 담소하고 있었다. 단위제의 화술은 정말 뛰
어났다. 이따금 그가 우스개 말을 할 때마다 백연연과 부금진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연회는 흥겹게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분위기를 가장 잘 타는 사람은 단연 단위제와
운표였다. 그들은 평소에는 앙숙(?)이었으나 이번만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특히 단위제의 우스개 소리는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으며, 중인들은 술이 얼
근해 감에 따라 더욱 화기애애해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근엄한 편인 양익상도 오랜만에 기분이 좋은 듯 자리를 뜨지 않고 어울리
고 있었다. 주인이 즐겁고 객이 즐거우니 연회는 해가 기울었는데도 끝날 줄을 몰랐
다.
문득 단위제가 몸을 일으키더니 원계묵에게 말했다.
"원대협, 이 사람이 여러분을 대신해 한 가지 청할 일이 있소이다."
"......?"
중인들은 궁금한 듯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단위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원대협이 천하제일의 도객이라는 것은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오. 이번 기회에 칼솜
씨를 보여주셔서 안목을 높여 주시지 않겠소?"
원계묵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설마 단위제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그런데 이
때 좌중의 인물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것이 아닌가?
"와......!"
"옳소! 원대협의 신기를 보고 싶습니다!"
"대주! 부탁합니다!"
원계묵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선부들은 물론 양가장의 식솔들과 백살대까지 들고
일어서니 상황은 어쩔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는 야속한 눈길을 단위제에게 돌
렸다.
"단도독께선 날 곤경에 빠뜨리는군요."
단위제는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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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헛, 이해해 주시오. 이 사람은 그저 중인들의 마음을 대신했을 뿐이외다."
"좋습니다. 대신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먼저 단도독께서 솜씨를 좀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더욱 분위기가 익을 것 같습니다."
"......!"
단위제는 멍해지고 말았다. 설마 그가 자신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줄이야! 이때
좌중이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단위제는 그만 너털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헛! 이거 원대협께 한방 먹었구려."
그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좋습니다. 미숙하지만 한 수 보이겠습니다. 여러분께선 웃지나 마시기를."
중인들의 얼굴에는 잔뜩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 점은 장천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까지 단위제가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태진왕의 서찰 내용으
로 볼 때 그가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양익상과 양씨 남매도 잔뜩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무림인이 아니므로 아직 본격적인 무예를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단순한
호신술이나 평범한 권각술 따위를 호장무사들을 통해 구경했을 뿐이었다.
이때 장천린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단도독의 신기를 구경하게 되다니 정말 행운입니다."
"허허, 이거 창피나 당하지 않을는지 모르겠소이다."
이때였다. 잠시 밖으로 나갔던 부금진이 장천린에게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용대인, 방금 전 들은 말인데 몇 명의 무사들이 밖에서 난동을 부린다더군요."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들이 누구라던가?"
"청무관의 문하제자들이랍니다."
장천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소란이 심한가?"
"하인들 몇 명이 다쳤답니다. 그런데 기세로 보아 곧 이곳으로 쳐들어 올 것 같답니
다. 후후! 제가 손 좀 보고 올까요? 아까 양어른 말씀을 들으니 청무관의 은이랑이
란 놈이 망나니라고 하는 것 같던데."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소진, 네가 수고 좀 해다오. 하지만 너무 심하게 하진 마라."
부금진은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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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부금진은 중인들의 시선이 단위제에게 쏠린 틈을 타 몰래 대청을 빠져나갔다.
"와아!"
우렁찬 함성이 울렸다. 단위제가 대청 한가운데로 나선 것이다. 단위제는 주위를 두
리번거리더니 시중 드는 시녀에게 말했다.
"술잔 다섯 개에 술을 모두 채워다오. 가득 말이다."
시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손님의 명인지라 곧 다섯 개의 잔에 술을 가득 채
웠다.
"여러분, 부디 웃지나 마시오."
단위제는 다섯 개의 술잔을 하나씩 잡더니 대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윙! 하는 소리
와 함께 술잔은 화살처럼 날아가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중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천린도 단위제가 무슨 목적으로 술잔을 던진 것
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원계묵은 만면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중인들은 귀를 기울여 보았다. 술잔이 깨지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
리 귀를 기울여봐도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글쎄?"
중인들은 웅성웅성 거렸다. 이때 단위제는 시녀가 들고 있던 쟁반을 건네 받아 양세
옥에게 주며 말했다.
"이걸 들고 있게나. 단, 절대 움직이면 안되네, 양공자."
"네."
양세옥은 귀여운 눈을 깜빡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잔뜩 긴장한 표정
을 지었다. 이때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창문에 구멍이 뚫렸다.
쉭! 쉭! 쉭!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어떤 물체가 양세옥을 향해 쏘아 들어왔다. 중인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양세옥도 놀라 피하려 했다.
"움직이지 말게!"
단위제의 말에 그는 엉거주춤했다. 그때였다. 어느새 쟁반 위에 다섯 개의 술잔이
나란히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창문을 뚫고 쏘아온 것은 바로 술잔이었던 것이었다.
"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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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요!"
함성이 일어났다. 양익상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박수를 쳐댔다.
양세옥은 멍한 표정으로 쟁반 위에 내려앉은 술잔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술잔에
담겨있던 술은 한 방울도 흘러 넘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술이 가득 찬 술잔을 던졌는데 엉뚱한 방향에서
돌아오고, 또 한 방울의 술도 넘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치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장천린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대단한 회선비류(回旋飛流)의 솜씨다. 만약 저 술잔이 암기였다면?'
그는 새삼 단위제를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단도독은 상상보다 훨씬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구나.'
단위제는 멋쩍게 웃더니 쟁반 위의 술잔을 양익상, 장천린, 원계묵, 운표에게 차례
로 돌렸다. 마지막 잔은 자신이 잡더니 껄껄 웃었다.
"허허헛! 미숙한 솜씨로 추태를 보였소이다. 아량으로 받아주시고 술을 드시기 바랍
니다."
양익상은 연신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오오! 정말 신기요!"
다시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단위제는 중인들을 향해 두루 포
권한 다음 원계묵을 향해 말했다.
"이제 원대협의 차례요."
원계묵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천천히 대청 한가운데로 걸어나갔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이미 마도(魔刀)
원계묵의 이름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과연 그가 어떤 절기를 펼칠지, 중인
들의 호기심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원계묵은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종이 좀 구해 주시겠습니까?"
"네!"
시녀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대청 안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그녀는 한 뭉치의 종
이를 가져왔다. 원계묵은 말려져 있는 종이를 세어보았다. 모두 열 두 장이었다. 그
는 양세옥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양공자, 종이를 허공에 던져주지 않겠나?"
양세옥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한 장씩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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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한꺼번에 던져 주게."
양세옥은 명랑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는 서슴없이 열 두 장의 종이를 허공으로 휙 던졌다. 그러자 종이는 허공에 흩어
지며 펄럭펄럭 어지럽게 날았다.
번... 쩍!
허공에 칼빛이 현란하게 일어났다.
중인들은 원계묵이 언제 장도를 뽑았는지 보지 못했다. 그가 발도(拔刀)하는 동작을
본 사람조차 없었다. 다만 그의 주위에서 도광(刀光)이 찰나적으로 일어난 것을 보
았을 뿐이었다.
그것은 환상이었다. 처음에는 흰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흰나비는 곧 무
수히 많은 숫자로 불어났다. 수없이 많은 나비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열 두 장의 종이가 조각조각 잘려 휘날린 것이다. 아니, 거의 가루가 되도록 잘게
잘려졌다. 하얀 나비는 더욱 잘게 잘려져 마침내 흰 눈송이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
중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나 그것은 약과였다.
"타!"
원계묵은 허공을 향해 일장(一掌)을 날렸다. 순간 바닥에 눈처럼 쌓여 있던 종이조
각들이 태풍에라도 휘말린 듯 회오리치며 한쪽 벽으로 날아갔다.
파파파파팍......!
벽에서 격타음이 일어났다.
잠시 후 중인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봐야만 했다. 보라! 단단한 목질로
된 벽면에 종이조각이 박혀 글씨를 형성한 것이 아닌가?
양문천세(楊門千歲)!
벽에 그런 글자가 생겨났다. 그것은 잘게 잘려진 종이조각으로 이루어진 글자였다.
종이조각은 모두 일정한 크기로 잘려져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작은 종이조각은
한결같이 매화꽃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의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
장내에서는 아무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계묵은 장도를 안고 중인들에게 포권했
다.
"미숙한 솜씨로 여러분의 시선을 어지럽혀 드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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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장내가 떠나갈 듯 우렁찬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중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지
경이었다.
특히 양가장의 식솔들은 마치 꿈을 꾸는 듯 멍청한 표정들이었다. 백살대의 도객들
은 만면에 흥분의 빛을 띤 채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댔다. 박수와 함성은 근
일각이나 계속되었다.
장천린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제 자리로 돌아가 있는 원계
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원제다.'
연회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호탕한 웃음소리가 어우러
진 채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아침.
어느덧 계절은 초동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원계묵은 일찌감치 일어나 후원을 산책하
고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화원에는 서리맞은 꽃들이 고개 숙이고 있었다. 수목들도 겨울준비를 하느라 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내일 오후면 해남으로 출발한다.'
원계묵은 을씨년스런 화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장장 일만 리의 역정이다. 최소한 한 달은 잡아야 할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응시했다.
'문제는 과연 황금의 손 탁일비란 자가 그 많은 황금을 순순히 내 줄 것이냐는 것이
다.'
원계묵은 눈썹을 찡그렸다.
'설사 순순히 응한다 해도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정확히 얼만지도 모르지 않은가
?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도 없는 실정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두자. 내 주제에 머리 쓰는 건 어울리지 않아. 형님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는 화원을 끼고 걸었다. 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건물의 담장 쪽에 나있는 월동문
으로부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계묵은 흠칫했다. 인영은 부금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
이지 않은가? 산뜻한 남삼 차림에 하얀 털조끼를 걸쳤으며, 머리는 단정히 묶어 등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본래부터가 미소년이었던 부금진은 더욱더 영준
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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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형님, 새벽부터 웬일입니까?"
부금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자네야말로 웬일인가?"
부금진의 표정은 꽤나 밝아 보였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엉뚱한 말을 했다.
"형님, 천색이 흐린 걸 보니 첫눈이 내리지 않을까요?"
"음."
지금은 십일 월, 다소 이르긴 하지만 날씨가 쌀쌀한 걸 보면 첫눈이 내릴 만도 했다
. 부금진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형님, 전 먼저 안채로 들어가겠습니다."
"음, 그래라."
부금진은 몇 걸음 가다 말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참, 저도 해남에 따라가고 싶으니 형님께서 용대인께 말씀 좀 잘해 주십시오."
원계묵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 생각했다."
부금진은 히죽 웃어 보인 후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원계묵은 그의 뒷모습을 한동
안 묵묵히 지켜보았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기 때문일까? 왠지 그에게는 정이 쏠리는
느낌이었다.
원계묵은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흠, 정말 눈이 오는군."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눈송이가 깃털처럼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손바닥에 떨어진 눈송이는 금세 물이 되어 녹아 내렸다. 원계묵은 기분이 들뜨는 것
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막 가산(假山)의 모퉁이를 돌아갔을 때였다.
'......!'
원계묵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 미소녀가 나무에 미려한 몸을 살며시 기댄 채 눈송이
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갸름한 턱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미소녀. 그녀를 보는 순간 원계묵의 가슴에
격동이 일어났다.
'손미!'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비볐다. 다시 보니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게 되었다. 미
소녀는 그가 생각했던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양익상의 외동딸 양문완이었다
'하긴. 손미... 일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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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묵은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이때 인기척을 느낀 듯 양문완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뺨에 보조개가 피어났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열었
다.
"원무사님......?"
"......."
원계묵은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가슴은 다시금 찢어질 듯한 괴로움으로 비틀어지고
있었다.
'왜? 어째서 손미를 생각했단 말인가? 날 배신하고 사부님마저 죽게 한 그녀를 왜..
....? 왜?'
그가 계속 바라보자 양문완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는 타는
듯한 원계묵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어 옷고름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원계묵을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마음이 강하게 끌렸었다. 양가장의 금지옥
엽(金枝玉葉)으로 자라난 그녀는 원계묵처럼 강인한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특히
그가 연회장에서 도법을 시전했을 때는 온통 넋을 빼앗겼을 지경이었다.
첫눈이 내린다.
어느덧 눈송이는 함박꽃만하게 커진 채 쉴새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눈 속에 두 남
녀는 아무 말 없이 마주 서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지금 이 순간 두 사람 사
이에 운명적인 사랑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금포(錦袍)에 허리에는 옥류대(玉柳帶)를 차고 발에는 검정 가죽신, 머리칼은 가지
런히 빗어 등 뒤에 길게 늘어뜨렸다. 조각같이 섬세한 얼굴은 다소 차가운 느낌을
주었으나 누가 보아도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다.
더구나 그의 눈빛은 한성(寒星)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
운표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곁에서 보기는 했으나 오늘처럼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
었다. 그는 장천린의 단정한 모습에서 일종의 신성(神性)마저 느꼈다.
장천린의 표정 하나, 눈짓, 몸짓 하나까지도 은연중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거암
(巨巖)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장천린에 대한 존경심은 더해
만 갔다.
'과연 오만한 대주가 형님으로 모실 만해. 이 분은 장차 거물이 될 게 틀림없어.'
운표는 일찍부터 장천린을 수행하여 양가장을 나섰다.
장천린은 제남부에서 내로라 하는 부호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다. 북경으로 떠나있
는 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그가 방문하는 자들은 이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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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호이거나 제남 일대의 거상들이었다.
운표는 장사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도 장천린이 만나는 사람들이 대단
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장천린이었
다. 장천린은 그들에게 추호도 비굴함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오만하게 행동
하지도 않았다.
그런 데도 만나는 사람마다 장천린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그들은 장천린보다 대부분
연상이었으나 감히 결례하는 자가 없었다. 극도의 예를 갖추어 맞이했던 것이다.
어느덧 정오가 지났다. 두 사람은 제남부의 대로를 걷고 있었다.
"운표, 피곤하지 않나?"
운표는 히죽 웃었다.
"저야 워낙 단련된 몸이니 피곤을 느낄 까닭이 없지요."
장천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무사가 일개 장사꾼 뒤를 따라 다니는 것은 꽤나 권태스런 일
이 아닐까?"
운표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저도 처음엔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용대인을 수행하면서 그런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장사도 쉬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니, 배울 것이 무척 많다고 느꼈습
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했다니 다행이군."
운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십니까?"
"마지막 방문지일세. 그의 이름은 황학산(黃鶴山)이며 산동성에서 첫손 꼽히는 거부
일세."
물론 운표가 황학산이란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듣는 순간 그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고개를 번쩍 들며 물었다.
"혹시... 병장기를 만들어 파는 황학산, 그가 아닙니까?"
"맞네."
운표는 놀라 입을 벌렸다.
황학산은 제남부 일대에서 십 이 개나 되는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철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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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조상으로부터 십대 이상을 내려온 가업이었다. 말이 철공소지, 그 규모는 엄청났
다. 한 철공소에서 일하는 장인(匠人)의 숫자만 수십, 또는 수백 명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황학산의 철공소에서는 농기구는 물론 각종 병장기와 갑옷, 심지어는 화포(
火砲)까지 제작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철기에는 황공(黃工)이란 표식이 새겨진다.
그 표식이 있는 철기류는 대륙 곳곳에 퍼져 있으며 품질에서 대단한 신뢰를 받고 있
었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황가철장은 지방 행성의 병부(兵部)에 무기류를 납품하기
도 했다.
운표가 황학산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무림에서도 황가철장(黃家鐵莊)에
서 만든 도검류(刀劍類)가 명기로 꼽히기 때문이었다.
"저도 약간은 압니다. 사실 제가 쓰는 칼도 황가철장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운표는 흥미가 당기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소문에 의하면 황학산의 성격이 몹시 괴팍하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그의 재산도 상
상할 수 없을 정도라는데 사실입니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동성 내에서 난다 긴다 하는 부호 열 명을 합친다 해도 황학산의 재력에는 미치
지 못하네."
운표는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그 정도라는 겁니까?"
"글쎄, 대충 계산해도 은자로 치면 오천만 냥에서 일억만 냥 정도는 될 것이네."
"......!"
운표는 숨이 콱 막히고 말았다.
'이... 일억!'
은자 열 냥이면 일반 백성이 한 달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액수다. 그렇다면 일
억만 냥이란 액수는 어느 정도겠는가? 운표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액수
였다.
'과거 철마보(鐵魔堡)를 처분했을 때도 고작 은자 십만 냥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그렇다면 철마보 재산의 천 배가 넘는단 말인가?'
그만 머리가 복잡해지고 말았다. 아니,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않았다.
장천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운표, 자네가 돈 계산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네."
운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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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대로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장천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앞쪽에서 누
군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죽립(竹笠)을 쓰고 낡은 흑의를 걸친 인물이었다. 죽립 아래로 보이는 얼굴로 미루
어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평생 햇볕 한 번 안본 듯 피부가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마저 띠고 있었다. 그는 몸매는 깡말라 있었으나 턱선은 준수
하게 빠져 있었다.
청년에게서는 고독한 기운이 뼈저리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등에 둘둘 만 보퉁이
를 걸머지고 있었으며 양손은 흰 천으로 칭칭 휘감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장천린은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과거 원계묵을 처음 보
았을 때 이상으로 강한 느낌이었다.
이때, 죽립 청년도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죽립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텅 비어 있
었다. 아무런 빛도 없이 그저 공허하기만 했다. 청년은 무심히 그의 곁을 스쳐 지나
갔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용이다. 내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를 흔들 상(相)이다.'
그는 아쉬움을 느꼈다.
'황학산만 아니라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건만.......'
그는 걸음을 멈춘 후 청년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곁에서 운표가 물었다.
"용대인, 무슨 일입니까?"
"자네 방금 전 그 자를 보았나?"
운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봤습니다."
"어떤가?"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자세히 보지 않아서... 전 딴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음......."
장천린은 신음을 흘렸다. 운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자가 무슨......."
"아닐세, 그만 가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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