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장 악마의 유희(遊戱) (20/87)

제17장 악마의 유희(遊戱) 

앞장 서 길을 열던 반송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피비린내가 납니다." 

"......!" 

일행은 그의 말에 숨을 죽인 채 냄새를 맡아보았다. 과연 어디선가 역한 피비린내가 

풍겨오고 있었다. 

"일단 앞으로 가봅시다." 

장천린의 말에 그들은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얼마나 갔을까? 울창하던 밀림이 다소 

성겨지면서 시야가 트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가히 공포스런 장면이 그들을 기다리 

고 있었다. 

수십, 수백 구에 달하는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늑대들의 시 

체더미였다. 그 수효는 엄청나게 많았다. 역한 피비린내는 바로 늑대들의 시체로부 

터 풍기는 것이었다. 

장천린을 비롯한 모두의 안색이 굳어졌다. 반송은 죽은 늑대들을 조사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늑대들은 도법의 달인에게... 당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명에 의한 것입니다."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금진은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 많은 늑대들을 단 한 명이 죽였다니......." 

장천린은 늑대들을 둘러보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짓을 할 자라면 왜국무사들밖에 없소." 

부금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받았다. 

"이 정도의 실력가라면 청산의명이나 석정일랑 중 일인이겠군요." 

반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린도 부금진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들은 몰랐다. 늑대 

들을 죽인 자야말로 신음류(新陰流)의 또다른 고수인 세천상유(細川常有)였다는 것 

을. 

"자, 어서 갑시다." 

장천린은 일행을 독려했다. 누가 늑대를 죽였건 이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은 한시라도 빨리 밀림을 벗어나는 것밖에 없었다. 일행은 늑대들의 시체더미 사이 

를 가로질러 다시 전진했다. 

그런데 얼마나 갔을까? 한 가닥 신음소리가 일행의 귀에 들렸다. 

일행은 안색이 변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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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한 그루 나무 아래 기대앉아 있는 왜국무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실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전신이 찢기고 뜯겨 있었고, 뼈 

까지 드러날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의 전신에는 열대지역에 서식하는 불개미떼들이 새카맣게 달라붙 

어 상처를 파고들며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 게다가 한쪽 눈마저 퀭하니 뚫려 있었 

다. 

그는 다름 아닌 세천상유였다. 

세천상유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한 손에 피묻은 장도를 움켜쥔 채로 헐떡이고 있었 

다. 그는 늑대떼들과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모두 물리쳤다. 그러나 워낙 탈진한 

데다 늑대들에게 수없이 물어 뜯겨 기력을 완전히 상실해 손가락 하나 들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기에 번연히 불개미들이 자신의 살을 파먹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대앉아 있는 것이다. 

"흐흐... 이 자식, 왜놈이었군." 

반송은 세천상유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구룡상선에서 왜인들의 공격을 받아 고초를 

겪은 데다 밀림에서 왼팔을 잃었으므로 증오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우수로 

칼을 뽑았다. 

"......." 

세천상유는 외눈을 힘겹게 떴다. 그의 입가가 실룩거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았으나 저항할 힘 

이 없었다. 

반송은 칼 끝을 그의 목에 갖다댔다. 

"말해라. 밀림 속에 네놈의 동료는 모두 몇이나 되느냐?" 

세천상유의 목에서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칼이 한 푼쯤 파고 들어갔다. 세천상 

유는 외눈을 힘겹게 뜨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반송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왜국어였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씨부리는 거냐?" 

순간 세천상유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꺼져라." 

"......!" 

반송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는 칼 끝을 더 밀었다. 

"음." 

이번에는 세천상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반송은 이를 갈며 물었다. 

"청산의명이란 놈은 어디 있느냐? 좋아, 말하기 싫다면 죽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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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살짝 비틀기만 해도 세천상유의 목은 쉽게 떨어질 것이 

다. 그때였다. 

"잠깐." 

장천린이 반송을 저지했다.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일 필요 없소. 그대로 두어도 죽을 것이오. 반대협." 

반송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 자는 저항 능력이 상실됐소. 굳이 죽인다면 반대협의 칼만 더럽힐 뿐이오. 내버 

려두는 게 좋겠소." 

반송은 내심 반발이 일어났다. 이제까지 그는 제멋대로 행동해 왔다. 그 누군가의 

지시를 들은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말을 들을 반송이 아니었다. 

그는 뭐라 반박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 장천린의 담백한 눈을 보았다. 순간 반발하 

던 마음이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심경 변화에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장천린은 세천상유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늑대떼들을 죽인 자가 자네인가?" 

세천상유는 초점이 불분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그렇다." 

장천린은 내심 의혹을 느꼈다. 

'청산의명도, 석정일랑도 아닌 또 다른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지금까지 왜인 고수로 그 두 사람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대 이름은?" 

세천상유는 잠시 장천린을 응시했다. 그는 비로소 장천린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견하기에 온화해 보이는 그가 반송과 같은 거친 인물을 쉽게 

물러나게 한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세천상유다." 

'세천상유라.' 

장천린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말했다. 

"좋다. 세천상유, 나는 그대들과 원한이 깊다. 그대는 상처 입은 몸이니 죽이지는 

않겠다. 그렇다고 그대를 치료해 줄 수는 없다. 그 점 이해하리라 믿는다. 만일 그 

대에게 운이 있다면 살아날 것이다." 

장천린의 말은 세천상유에게 기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지금까지 죽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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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느냐의 이분법(二分法)으로만 살아온 인물이었다. 조국인 왜국에서도 그러했고, 

조국을 떠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절대법이었다. 그런데 지 

금 그의 삶의 철학을 회의케 하는 인물을 만난 것이다. 

장천린은 돌아서고 있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림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일행들도 묵묵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잠깐!" 

세천상유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장천린은 돌아서며 물었다. 

"귀공은... 이름이 뭔가?" 

장천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용백군이라 한다." 

세천상유의 가슴이 뛰었다. 

'용백군! 저 자가 바로?' 

그는 무엇에 눌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밖에 없는 외눈을 부릅뜬 그는 용백군, 

즉 장천린의 모습을 새겨 두려는 듯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장천린은 그가 더 이상 말이 없자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 

세천상유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무감각해진 지 이미 오래였다. 불개미가 새카맣게 달려들어 전신을 뜯어먹고 

있어도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고통은커녕 눈까풀이 자꾸만 아래로 처지면서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자면 안 된다! 여기서 자면 끝장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나 세천상유가 한낱 불개미의 밥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칼로 몸을 지탱했다. 

'반드시... 살아난다. 반드시.' 

그는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외눈에서는 광기에 가까운 

생에 대한 집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절대... 죽을 수 없다. 생명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단지 이렇게 죽는 것이 너무나 

허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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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비틀....... 흡사 만취한 사람처럼 세천상유는 도에 의지한 채 밀림 속으로 사 

라지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끈적끈적한 피가 이어지고 있었다. 

"......." 

형부도독 단위제의 전신은 온통 피투성이다. 

지금 그의 앞에는 청산의명이 수수로운 자세로 서있었다. 청산의명의 눈빛은 물처럼 

고요했다. 그는 칼을 약간 아래로 기울인 자세로 정지된 모습이었다. 

단위제는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눈 앞의 상대와 이미 몇 합(合)을 겨룬 후였 

다. 그 사이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참이다. 

"훗훗훗! 과연 왜국 제일의 고수답군. 신음류의 대가로서 명불허전이야." 

청산의명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살인을 즐기지 않소. 다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행하오. 그대는 세천( 

細川)을 다치게 했고 또한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절대 살려둘 수 없소." 

단위제는 염두를 굴렸다. 

'내가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놈의 심기(心機)를 어지럽혀야 할 것이다.' 

갑자기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헛헛......! 칼 한 번 쓰는데 잔소리가 너무 많다. 솔직히 그대는 나보다 강하다 

. 하나 그대가 날 죽인다는 것은 조금 곤란한 문제야." 

"......?" 

청산의명의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 상대를 죽일 자신이 있었다 

. 그런데 상대방은 태연할 뿐더러 여유만만해 하는 것이 아닌가? 

"낄낄, 지금보다 수십 배 더 위험한 상황에서 번번이 벗어난 나 단위제다." 

단위제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했다. 그때마다 울컥거리며 피가 토해져 나왔다. 그 

모습에 청산의명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절박한 상태에서도 상대는 여유를 잃 

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청산의명은 확고한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칼 끝을 치켜들며 말했 

다. 

"그대를 베겠소." 

그가 누군가? 그의 조국에서 첫손가락을 꼽는 무사였고 매사를 신념에 따라 행동하 

는 무인의 표본이었다. 그러기에 대세(大勢)가 기운 줄 알면서도 멸망한 전 군주(君

主)의 복수를 위해 조국을 등지지 않았던가? 그는 눈 앞의 인물이 비록 아까운 생각 

이 들었지만 추호의 갈등도 하지 않고 칼 끝에 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때였다. 

단위제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는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끌러냈다. 청산의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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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살기를 띠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가 취한 것은 황금빛의 포 

승줄이었다. 그것은 관부에서 활동할 때 범인을 잡아 묶는 포승인 것이다. 그가 꺼 

낸 포승줄의 길이는 대략 다섯 자 가량 되었다. 

단위제는 포승줄을 잡은 채 태연히 말했다. 

"청산의명, 그대는 평생 처음으로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청산의명의 고요한 얼굴에 일말의 의혹이 떠올랐다. 그는 상대가 대체 무슨 짓을 하 

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단위제는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품 속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꺼냈다. 그것은 

잡동사니들이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엽전 몇 개, 은 덩어리 대여섯 개, 작은 붓 한 자루와 종이 두루마리, 거기에 자기 

로 된 호리병 하나, 손바닥만한 동경(銅鏡)도 있었고 호패도 있었으며, 더욱 이상한 

것은 때묻은 손수건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대여섯 가지의 잡동사니들까지 모두 꺼냈 

다. 

"......?" 

청산의명은 더욱 더 의혹을 느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것들이 무엇에 쓰 

려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단위제는 끄집어낸 물건들을 태연히 자신의 주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 

던 청산의명은 곤혹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편 단위제는 내심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흐흐, 네가 나보다 무공은 강할지 몰라도 심기 쓰는 데 적수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 청산의명.' 

단위제는 곧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산의명, 그대는 곧 나의 마지막 비장의 수법을 보게 될 것이다." 

청산의명은 선뜻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도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 그는 신중한 인물이었다. 

단위제는 껄껄 웃으며 수중의 황금색 포승줄을 들어올렸다. 

"이 금색의 포승은 나 단위제의 신표다. 이것으로 나는 지난 수십 년 간 수백 명의 

죄인들을 포박했지. 이놈의 길이는 다섯 자, 그대와 나와의 거리도 다섯 자다." 

단위제의 입가에 기묘무쌍한(?) 웃음이 어렸다. 청산의명은 내심 중얼거렸다. 

'저 자는 분명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려는 것이다.' 

그는 도에 힘을 주었다. 

"이 포승은 죄인을 묶는 데도 쓰지만, 또 하나 쓰이는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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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제는 다시 기침했다. 기침할 때마다 피가래가 튀어 나왔다.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으며 신형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쓱 문 

지른 후 청산의명을 노려보며 버럭 고함치는 것이 아닌가? 

"청산의명! 그 자리에서 제발 움직이지 마라!" 

외침과 동시에 그는 포승줄을 휘둘렀다. 

청산의명은 그만 가슴이 섬뜩해져 자신도 모르게 뒤로 사오 자나 신속하게 물러났다 

바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단위제는 포승줄의 방향을 꺾어 뒤로 던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고무줄 

처럼 쭉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십여 자 이상 늘어난 포승줄은 한 그루의 나무에 

휘감겼다. 

"차!" 

기합성과 함께 단위제의 몸이 빨려들 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포승줄이 급격히 줄어 

들며 그 탄력으로 무서운 속도로 끌려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수십 장 밖 

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아차! 속았다!' 

청산의명의 안색은 무참하게 구겨졌다.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상대방은 달아나기 

위해 그토록 괴상망측한 행동을 하며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이다. 

"으헛헛헛! 청산의명! 나의 마지막 수법이 바로 이거야. 중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삼십육계주위상책(三十六計走爲上策)이라고 한다네. 으헛헛헛......!" 

단위제는 대소를 터뜨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포승줄을 거두고 다시 건너편 나무를 

향해 던져 그 탄력을 이용해 쏜살같이 날아가면서 그는 득의에 찬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웃음소리만이 울려오고 있 

었다. 

"포승줄의 또 다른 쓰임새는 바로 도망치는 데 있었던 거야, 으헛헛......!" 

"......." 

청산의명은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다시 조롱하는 듯한 비양거림이 회천지음술(廻

天之音術)로 울려왔다. 

"으하하하! 무공은 그대가 강할지 몰라도 계략은 아직 한참 멀었다. 청산의명. 으하 

하하하!" 

청산의명은 어이가 없었다. 한 칼이면 그는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 한데 이게 무슨 

꼴인가? 말도 안 되는 속임수에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게 아닌가? 

그는 씁쓸해진 나머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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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대단한 인물이다. 비록 계략을 쓰긴 했어도 대담하지 않고는 그런 수를 쓸 

수 없는 법.' 

청산의명은 허탈한 심정으로 칼을 거두었다. 

이때 숲이 흔들리더니 사 인의 무사가 모습을 드러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청산의명님께 아뢰옵니다." 

"무슨 일이냐?" 

사 인의 무사는 왜인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황이 떠올라 있었다. 

"큰일입니다! 탁일비의 장원에서 원계묵이란 자가 백살대와 함께 혈전(血戰)을 일으 

켰습니다.!" 

"......!" 

좀처럼 변할 것 같지 않던 청산의명의 안색이 변했다. 또 다른 무사가 보고했다. 

"동방사성도 그 틈에 탁일비를 데리고 도주했습니다." 

"뭣이!" 

"달아나던 도중에 그의 수하들은 원계묵에 의해 모두 죽었습니다." 

청산의명의 얼굴에 비로소 당황이 떠올랐다. 

'계략이 전부 실패했단 말인가?' 

무사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했다. 

"지시해 주십시오!" 

"먼저 숲 속에 흩어진 제자들을 모두 모아라." 

"옛!" 

"그리고... 용백군이란 자의 일행을 모두 제거해라. 단, 용백군만은 사로잡아라." 

"알겠습니다!" 

휙휙! 

사 인의 무사들은 놀라운 속도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청산의명은 우뚝 선 채 눈썹 

을 꿈틀거렸다. 

'동방사성이 탁일비를 데리고 도주했다고?' 

그는 도를 움켜쥐었다. 

'동방사성, 네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를 바란다.' 

청산의명의 물처럼 고요하던 눈에 파문이 번졌다. 어찌 알았으랴. 그 파문으로 인해 

엄청난 피를 부르게 될 줄이야. 

밀림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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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은 앞장 서 길을 열고 있었다. 그는 장도로 덩굴과 나뭇가지를 치며 전진했다. 

그의 옆에서 부금진이 잔가지를 쳐서 돕고 있었다. 뒤에는 장천린이 백연연을 안고 

걸었으며 맨 마지막에는 동방옥이 따랐다. 

백연연은 장천린의 품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동방옥은 고개를 숙이며 걷고 있었는 

데 어딘가 모르게 우울한 표정이었다. 장천린은 생각에 잠긴 듯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반송은 이따금 눈썹을 경련했다. 칼을 잡은 손아귀가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쇠못에 박힌 상처가 아물지 않은데다 쇠독이 침투해 파상풍(破傷風) 기운이 남아 있 

었다. 

당시 그는 양팔을 다 잃을 뻔했으나 간신히 회복했었다. 두 다리 역시 무리한 보행 

으로 인해 상처가 덧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반송은 비록 참을성이 강한 사 

내였으나 인내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뇌리에 한 여인의 영상이 떠오른 것은. 

'요미(妖美)!' 

반송은 이를 악물었다. 

'내 언젠가 네년의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일어났다. 

'금월(金月), 네놈도 예외는 아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원한도 가중되고 있었다. 그는 이를 갈며 장도를 휘둘렀다. 밀림이 

와르르 쓰러지고 있었다. 

부금진이 주의를 주었다. 

"여기서 사오 리만 가면 불귀림입니다. 지금부터는 길을 우회해야 합니다." 

뒤쪽에서 장천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진, 한 시진 안으로 장원에 도착할 수 있겠느냐?" 

"가능합니다. 용대인." 

이때,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전진하던 반송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귓전에 미세한 

음향이 들린 것이다. 

'......!' 

그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연이어 겪은 고초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 

워져 있었다. 

머리 위에서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 떨어져 내렸다. 

"어딜!" 

반송은 코웃음치며 장도를 휘둘렀다. 실로 전광 같은 동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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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허공에서 신음이 울리며 장도가 무엇엔가 휘감겼다. 반송은 뒤로 일 보 물러나며 장 

도를 재차 휘두르려 했다. 그때 쿵! 하고 누군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단도독님!" 

놀랍게도 상대는 단위제였다. 그는 황금 포승으로 간신히 반송의 장도를 막았으나 

기력이 쇠진한 상태였다. 전신이 피투성이였으며 안색도 횟빛이 되어 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반대협, 날 죽일 생각이었나?" 

반송은 황급히 장도를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단도독님." 

단위제는 쓰게 웃다가 뒤에 장천린이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용대인! 무사하셨군요." 

그는 마치 죽은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양 반가워했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 

었다. 

"어찌된 일이오? 어디서 오는 길이오? 몸은 왜 그 모양이오?" 

단위제는 대답하려다 말고 기침을 쿨럭쿨럭 했다. 그때마다 핏덩이가 토해져 나왔다 

. 그는 입을 틀어먹으며 말했다. 

"너무 많이 묻지 마십시오. 대답을 다 할 힘이 없소이다." 

간신히 그 말을 한 끝에 그는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단도독님!" 

놀란 부금진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단위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후후, 고맙다. 소진. 젠장,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군." 

장천린은 침중하게 말했다. 

"소진, 단도독의 상세를 돌봐 드려라." 

부금진은 단위제를 바닥에 눕힌 후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위제의 상처는 참혹할 정도였다. 여러 군데 도상(刀傷)을 입었는데 특히 옆구리와 

복부의 상처는 내장이 상할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장천린도 놀라마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소?" 

단위제는 잠시 숨을 돌린 후 입을 열었다.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음모를 엿듣게 

된 일, 왜국 고수 세천상유를 만나 싸웠던 일, 그리고 다시 청산의명을 만난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중인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가 청산의명을 속이고 도망친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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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장천린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단도독이다. 그런 배짱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장천린은 그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 번이나 놀라며 듣던 단위제 

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하겠군요. 어쨌거나 이번 일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소 

이다 그려." 

느닷없이 그는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운표, 그 멍청한 친구는 아직도 바둑판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 

소이다?" 

그 말에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단위제의 인생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경에 처할수록 여유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웃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부금진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웃지 마시오. 치료 중이니까." 

단위제는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왜 이렇게 따끔따끔하지?" 

부금진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상처를 꿰매는 중이니까요. 그냥 두면 큰일나요. 그러니 제발 그만 떠들고 웃지 말 

아요. 상처가 터질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 말에 단위제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좋아, 웃지 않겠네. 하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뚱이인데 넝마처럼 꿰매지 말고 

좀 예쁘게 꿰매다오."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끝까지 농담을 하는 단위제의 태연함은 감탄을 넘어서 존경 

스러울 정도였다. 

장천린은 화제를 돌렸다. 

"원제가 백아에게 소식을 전달받았는지 모르겠소." 

단위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놈의 새는 영악하고 교활하니 분명 전달했을 것이오." 

장천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계묵과 백살대는 그의 형제요 수족이었다. 걱정이 되 

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동방옥은 줄곧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이 모든 일이야말로 자신의 오빠로 

인해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죄책감 때문에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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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울러 오빠인 동방사성에 대한 미움과 환멸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단위제의 상처 치료가 끝나자 일행은 다시 행보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전진했을까? 

"소진! 소진!"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일행은 깜짝 놀랐다. 허공에서 날갯짓 소리와 함께 앵무 

새 백아가 떨어져 내렸다. 백아는 곧장 부금진의 어깨에 내려앉더니 다급히 지껄여 

댔다. 

"동방사성이 탁일비를 데리고 도망갔다. 원대협이 모두 죽였다. 죽였다!" 

숨차게 지껄여대는 백아의 전언(傳言)에 일행의 얼굴에는 일제히 희색이 떠올랐다. 

부금진도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용대인, 원형님이 선수를 친 모양입니다." 

백아는 빨간 눈알을 굴리며 다시 지껄였다. 

"원대협이 백살대 끌고 밀림으로 온다! 밀림으로 온다!" 

단위제는 껄껄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기특한 놈이다. 백아! 헛헛, 나는 네가 잘 해낼 줄 믿고 있었다." 

그는 생각난 듯 앵무새에게 물었다. 

"참, 원대협이 내 안부를 묻지 않더냐?" 

백아는 눈알을 사르르 굴리더니 즉시 대답했다. 

"원대협이 말했다. 그놈의 단위제는 영악하고 교활하다고! 잘해낼 거라고 했다!" 

"뭣?" 

단위제는 멍청해지고 말았다. 곧이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앵무새 백아의 

놀림감이 되고 만 것이다. 

"핫핫핫......!" 

"하하하......!" 

중인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심지어는 조금 전 깨어난 백연연까지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남해의 한 작은 섬. 

청산의명과 석정일랑이 수하들과 함께 병영(兵營)으로 삼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오백여 명이 넘는 무사들과 그들에게 딸린 식솔들이 해안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은 반쯤 비어 있었다. 무사들이 모두 해남도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자들은 부녀자와 힘없는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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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평화롭기 만한 이 마을! 

적어도 하루 전만 해도 이곳은 그지없이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백사장에서 조개를 

잡고, 노인들은 그늘 아래 그물을 깁고, 아낙네들은 출정을 떠난 남편들이 돌아오기 

를 기다리며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주방을 들락이던 곳. 

그런데 지금 이 마을은 지옥(地獄)이 되고 말았다. 

불타는 가옥들! 시뻘건 불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마을 

주위에는 시체가 가득 널려 있었다. 피! 피의 강이 마을 어귀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굉음을 내며 치솟아 오르는 화염 속에서 수십 명의 인물들이 광란 

(狂亂)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으며,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썩은 짚단 자르듯 난도질하고 있었다. 

노인이든 부녀자든 가리지 않고 난도질했다. 심지어는 어린애까지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크핫핫핫......! 죽여라! 씨를 말려라!" 

"꺄아아악!" 

녹장아문.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무릎꿇고 있었다. 꿇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의 등을 한 명의 

장한이 발로 밟고 있기 때문이다. 

대청 위에는 금발인(金髮人)이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금빛 털을 지 

닌 독수리가 내려앉아 붉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금발인은 해적단 검은 바람의 수령 금월(金月)이었다. 

하루 전. 

석정일랑은 급히 배를 타고 섬을 떠났다. 그가 떠난 직후 검은 바람이 섬에 상륙하 

여 공포의 살륙제를 벌인 것이다. 무사들이 모두 해남도를 떠났으므로 마을은 속수 

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검은 바람의 잔악무도한 습격에 개나 돼 

지처럼 칼을 맞고 죽었다. 

해적들은 무지막지한 위인들이다. 그들의 모습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온갖 인종(人

種)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버림받거나 중죄를 지은 자들로, 돌 

아갈 곳이 없는 작자들이다. 그들의 행동은 잔혹하다못해 악마적이었다. 

금월은 벽안을 번쩍이며 물었다. 

"늙은이, 석정일랑은 어디 있느냐?" 

녹장아문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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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평생 꺾어지면 꺾어졌지 굽힐 줄 모르는 것이 녹장아문의 신념이요 생명이다. 지금 

그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입술이 갈래갈래 터 

져나가 있었다. 

"흐흐! 늙은 놈의 뼈가 얼마나 단단한지 보고 싶군." 

금월은 턱을 까딱했다. 그러자 녹장아문의 등을 밟고 있던 흑면(黑面)의 장한이 발 

에 힘을 주었다. 

"크윽!" 

녹장아문의 몸은 바닥에 짓이겨졌다.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금 

월은 다시 물었다. 

"석정일랑은 어디 있느냐?" 

"모... 모른다." 

녹장아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쿡! 대답을 못들을 것 같으냐?" 

금월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한 명의 머리칼이 붉은 장한이 

달려와 보고했다. 

"두목, 한 놈도 남김없이 청소했습니다. 헤헤! 물론 쓸 만한 계집들은 가려서 잡아 

놨습니다." 

금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석정일랑에 대한 소식은?" 

"몇 놈을 심문했습죠. 놈은 어제 아침 배를 타고 떠났답니다." 

"그래?" 

금월은 잠시 생각하더니 명령을 내렸다. 

"좋아, 한 시진 내로 철수한다. 준비하도록." 

장한은 손바닥을 비비며 물었다. 

"헤헤! 잡아 논 계집들을 어떻게 할까요?" 

금월의 눈이 가늘어졌다. 

"큿! 전리품이니 너희들 좋을 대로 해라." 

장한의 입이 벌어졌다. 

"단, 일이 끝난 뒤 청소하는 걸 잊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장한은 두 주먹을 가슴 앞에 모으더니 음탕한 괴소를 흘리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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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장아문은 척추가 으스러진 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늙은 몸에 당한 충격으로 정 

신이 가물거리고 있었으나 방금 전의 말은 모두 알아들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고 

개를 들며 부르짖었다. 

"안된다! 이놈들......! 짐승만도 못한... 큭!" 

흑면의 장한이 발로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녹장아문의 얼굴이 땅바닥에 반쯤 박혔 

다. 그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흑면장한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두목. 청산의명의 세 딸을 발견했습니다. 흐흐, 대단한 미인들입니다." 

"그래?" 

금월의 눈에서 기묘한 빛이 일어났다. 

"데려와라." 

흑면장한은 즉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세 명의 여자들을 끌고 나타났다 

여인들은 고초를 당한 듯 머리칼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의복도 여기저기 찢겨 있 

었다. 그러나 한눈에 대단한 미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의 창백하게 질린 얼 

굴에는 은은한 기품이 어려있었다. 

"큿, 괜찮은 계집들이군." 

금월은 세 명의 여인들을 차례로 훑어 보았다. 

그의 시선이 스치자 세 여인은 마치 징그러운 뱀이 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금월의 눈은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녀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벽안에서 짐승과 

같은 빛이 일어났다. 

소녀는 유난히 흰 피부와 큰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받자 공포에 질려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흐흐! 쓸 만하군." 

금월은 손가락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계집만 남기고 나머진 치워라." 

"옛! 두목." 

흑면장한은 희희낙락하여 즉시 두 여인의 머리채를 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되자 소녀는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전신을 후들후들 떨었다. 그때였다. 

혼절해 있던 녹장아문이 힘겹게 고개를 들며 애원했다. 

"제발....... 그 분만은 건드리지... 마시오. 제발." 

금월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아직도 힘이 남아있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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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밖을 향해 외쳤다. 

"누구 없느냐?" 

"넷!" 

외눈박이 눈의 장한이 달려왔다. 지금 이곳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성한 곳으로 나지 

막한 담장이 있는 아담한 집이었다. 석정일랑이 살던 집이기도 했다. 

"저 계집의 옷을 벗겨라." 

"넷." 

장한의 애꾸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벌써부터 흥미로운 일에 몸이 달아오르는 듯 히 

죽거리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아! 제발......." 

소녀는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담장에 등을 부딪히자 절망 어린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순간 애꾸눈의 우악스런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잡아 당겼다. 

부... 욱! 

천 찢어지는 소리가 연거푸 났다. 소녀는 머릿속이 텅 비는 듯했다. 눈 깜짝할 사이 

에 옷이 갈기갈기 뜯겨져 나가고 순식간에 알몸이 되고 말았다. 소녀의 몸은 완전히 

성숙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여인의 면모는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녹장아문의 부릅뜬 눈에서 다시 피눈물이 흘렀다. 그는 차마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크하하하......!"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척추가 완전히 으스러진 녹장아문이 광소를 터뜨리 

더니 갑자기 금월을 향해 덮치는 것이 아닌가!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녹장아문의 손이 금월의 목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채 닿기도 전, 그는 눈 앞에 무 

엇인가 번뜩하는 것을 보았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우뚝 서있었다.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그의 표 

정이 이상했다. 빛이 번뜩한 순간 어렴풋이 정수리가 뜨끔한 것을 느꼈을 뿐이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마 한복판에 혈선(血線)이 생기더니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그의 몸은 정확히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아악!" 

소녀는 공포에 찬 비명을 질렀다. 금월은 고개를 돌렸다. 알몸이 된 채 부들부들 떨 

고있는 소녀의 아래위를 훑어보는 눈에서 광기가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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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에 묶어라." 

애꾸눈은 소녀의 머리채를 잡아끌더니 대청 기둥에 소녀를 잡아 묶었다. 소녀의 두 

팔은 뒤로 돌려진 채 단단히 결박되었다. 

금월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소녀에게 다가갔다. 

"네가 청산의명의 딸이냐?"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공포에 질려 입이 얼어붙어 있었다. 

"청산의명. 소문은 들었다.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놈이었지." 

금월은 소녀에게 바짝 붙었다. 소녀의 눈이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무엇을 보고 

자 해서가 아니었다. 지나친 공포가 그녀의 동공을 확대시킨 것이다. 

금월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가슴이었다. 

그는 자세를 낮추었다. 그의 입술이 소녀의 이마에서 뺨으로, 다시 입술을 덮었다. 

"......." 

소녀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금월의 입술은 오래 머물지 않았 

다. 그는 더욱 자세를 낮추었고 소녀의 목덜미를 지나 가슴을 공략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소녀의 몸은 나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금 

월의 입술이 어디를 어떻게 누비는지 그녀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 

소녀의 입에서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금월의 자세는 더욱 낮 

아졌다. 그의 얼굴은 소녀의 하반신에 붙어 있었다. 

악몽. 

악몽이라면 어서 빨리 깨야해! 

소녀는 진저리를 쳤다.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악마의 혓바닥이 춤추고 있었다. 

그녀는 뱀이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에 전신이 마구 비틀어지고 있었 

다. 악몽이야! 이건 악몽이야! 

금월이 떨어져 나갔다. 소녀는 정신이 들었다. 사내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는 혀 

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악마! 악마의 얼굴이었다. 

"......!" 

소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내가 옷을 벗고 있었다. 그의 장삼이 벌어지는 순간 소 

녀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는 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금월이 다가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사내의 몸이 그녀의 가 

냘픈 몸을 짓이겼다. 

"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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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소녀는 입을 딱 벌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하는 고통 

에 그녀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혼절하고 말았다. 

허리띠를 묶은 후 금월은 힐끗 돌아다보았다. 기둥에 묶인 채 소녀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괜찮은 계집이었어." 

소녀는 바닥을 보고 있었다. 바닥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다. 그녀의 눈빛은 

멍했다. 초점도 생기도 없이 그녀는 핏방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수고했다. 이제 곧 편안해질 거야." 

금월의 음성이 들렸다. 

"......!" 

소녀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금월은 손바닥을 떼었다. 소녀의 작은 가슴에 선명한 홍색장인(紅色掌印)이 찍혀있 

는 것이 보였다. 

"먼저 간다고 억울해 하지 마라. 네 애비도 곧 따라 갈 테니 말이다." 

금월은 돌아섰다. 

"이제 그만 해남도로 가야겠군. 황금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으하하하, 으하 

하핫......!" 

일진광소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악마의 유희(遊戱)는 그 첫 번째 막을 내리고 

있었다. 

"추격자가 있다! 추격자가 있다!" 

앵무새 백아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경고했다. 밀림 속을 강행군하던 장천린 일행 

은 걸음을 멈췄다. 

부금진이 허공을 올려보며 물었다. 

"추격자라니? 무슨 소리냐?" 

백아는 날개를 파다닥거리며 빠르게 종알거렸다. 

"칼을 든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아주 많다!" 

장천린이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청산의명의 수하들일 것이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수하들을 통해 동방사성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들었을 것이오. 그 

래서 무사들을 풀어 우리를 추격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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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이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설사 그렇다 쳐도 이 넓은 밀림에서 어떻게 우리를 추격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단위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들이 그들에게 방향을 일러주고 있지 않소?" 

반송은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일러준다니요?" 

"쯧, 덩굴과 나무를 자르고 지나왔으니 흔적만 따라오면 추격하는 것은 식은 죽 먹 

기가 아니오?" 

"아!" 

반송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자신의 둔한 머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고 말았 

다. 이때 정천린이 백아를 향해 물었다. 

"백아, 어디쯤 오고 있느냐?" 

백아는 날개를 차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 다시 내려오며 종알댔다. 

"가깝다. 아주 가깝다!" 

그러나 백아의 표현만으로는 적도들이 어느 정도 거리에 와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영활하다고 해도 한낱 날짐승인 백아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소진, 팔을 좀 놔주게." 

부금진은 부축하고 있던 팔을 놔주었다. 단위제는 땅바닥에 엎드려 지면에 귀를 갖 

다 붙였다. 잠시 후 그의 안색이 변했다. 

"오 리 밖에 있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군!" 

중인들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지금까지 겪은 일만으로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판국에 또다시 추격자라니! 눈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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