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떠나간 자들
장천린은 염두를 굴렸다.
'왜인들은 최소한 우리보다 몇십 배는 될 것이다. 더욱이 이쪽은 대부분 상처를 입
고 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그는 부금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소진, 과거에 불귀림을 지난 적이 있다고 했지?"
"네, 용대인. 그런데요?"
"통과할 수 있겠느냐?"
부금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그는 불귀림의 무서움에 대해 누누이 설명
했다. 밀림을 전진하면서도 불귀림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 우회하기까지 하지 않았던
가?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다니.
그는 본래 영활한 소년이다. 잠시 의아하긴 했으나 이내 장천린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불귀림을 중앙으로 통과해 본 적은 없어도 지난 적은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혈소(
血沼)를 피할 수는 있어도 부골장독이나 흡혈박쥐까지 모두 피할 자신은 없어요."
부금진은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흡혈박쥐는 물론이고 흡혈거머리의 공격까지 받게 되면 그땐 장담할 수 없어요."
장천린의 얼굴에 그늘이 덮였다. 확실히 그 점이 문제였다. 그도 흡혈박쥐와 거머리
를 경험한 적이 있었으므로 충분히 그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잠자코 있던 백연연이 물었다.
"소진, 그것들과 장독만 피하면 불귀림을 통과할 순 있나요?"
부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가능하죠. 하지만."
백연연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만일 폭우가 쏟아지면 장독은 기체이므로 허공에 뜨지 않고 가라앉을 거예요. 그리
고 박쥐도 비를 피해 숨어들 거예요."
"그렇... 겠지요."
백연연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서 불귀림으로 들어가요."
모두들 어리둥절해 했다. 부금진은 급히 반문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백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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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연은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일각 안에 폭우가 쏟아질 거예요."
일행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늘
은 약간 흐리긴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폭우가 쏟아질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백연연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은 더운 지방이에요. 자주 소나기가 내리죠. 게다가 이곳은 오지산 기슭이므로
산악지방 특유의 기후가 작용할 거예요."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더운 지방에 자주 비가 온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일각 후에 폭우가 온다는 말은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폭우가 내릴 시각까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그녀의 말만 믿고 불귀림에 들어갔다 폭우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일행은 내심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만 믿고 생명을 내건 모험을 할 수는 없다는 생
각들이었다.
장천린은 생각에 잠겼다. 그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백연연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녀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다.
백연연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장천린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태진왕의 서찰에 적혀 있던 글귀였
다.
-백연연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특이한 능력이 있네.
그는 부금진을 향해 말했다.
"소진, 불귀림을 향해 가는 동안 일각은 걸릴 것이다. 그곳에 도착한 후 비가 내린
다면 안심하고 통과할 수 있지 않겠느냐?"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써는 달리 묘안이 없지 않은가.
마침내 일행은 불귀림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쯤 갔을까? 장천린의 품에 안긴 채 백연연이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용대인도 제 말을 안 믿으시는군요."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믿소."
백연연의 눈에 반짝 이채가 어렸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한숨을 쉬며 그만 두었다.
일행은 속력을 내어 덩굴과 나무를 자르며 불귀림을 향해 전진했다. 뒤에 추격자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급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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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어요! 여기서부터 불귀림입니다."
부금진이 일행을 저지시키며 말했다.
그들이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각 정도가 흐른 듯했다. 중인들은 걸음을 멈추며 일제
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안색이 변했다. 밀림을 헤치느라 의식하지 못한 사이
에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잔뜩 덮여 있었던 것이다!
사위가 밤처럼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한 분위기였다.
"비가 와요!"
부금진이 들뜬 음성으로 외쳤다. 과연 후두두둑! 하며 흡사 쌀알을 흩뿌리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더니 곧이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오!"
중인들은 기쁨의 탄성을 발했다.
쏴아아아......!
불귀림은 자욱한 우연(雨煙)에 덮힌 채 폭우 속에 잠기고 있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
려질 정도였다.
단위제는 기침을 쿨럭쿨럭 한 후 괴소를 흘렸다.
"흐흐! 정말 대단하구려, 백소저."
백연연은 얼굴을 붉히며 장천린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는 힘찬 사나이의 음
성을 들었다.
"소진! 앞장 서라."
"네! 용대인."
부금진이 앞장 선 가운데 마침내 일행은 돌아오지 않는 숲, 불귀림으로 들어섰다.
불귀림은 일견하기에는 일반 밀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곳곳에 도사린 수많
은 혈소와 이름도 모를 갖가지 독충들이 서식하고 있어 일단 들어서면 설사 원주민
이라 해도 살아 나오기 힘든 곳이었다.
부금진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전진해 나갔다.
중인들은 그가 이따금 걸음을 멈춘 뒤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았으나 아무도 이의를
표시하지 않고 묵묵히 뒤따랐다.
얼마쯤 갔을까? 장천린은 주의를 주었다.
"폭우로 인해 흔적은 별로 남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되도록 나무나 덩굴에는 손대
지 마시오. 추격자들이 뒤따라오면 이 고생도 보람이 없으니 말이오."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린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백연연을 내
려보며 물었다.
"백소저, 비가 얼마 동안 내릴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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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연은 대답 대신 섬섬옥수를 뻗었다. 손바닥에 빗방울을 받아낸 그녀는 들릴락말
락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쾌한 비군요."
왠지 그녀의 말은 우울하게 들렸다.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한 얼굴은 빗물에 젖어 있
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모습이 비맞은 이화(梨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연연은 고개 들어 장천린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닿을 듯이 가까웠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훗, 제가 너무 감상적인 말을 했나봐요. 비는 반 시진 가량 내릴 거예요."
'반 시진.'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백연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빗줄기가 그
녀의 창백한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망연자실한 표정
이었다.
'전하께서는 유난히도 비를 좋아하셨어.......'
"소진, 통과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느냐?"
부금진은 장천린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지금의 속도라면 반 시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염두를 굴렸다.
'속도를 좀 더 내면 우리가 불귀림을 통과한 직후 비가 그칠 것이다.'
그의 눈빛이 맑아졌다.
'그렇게 되면 멋모르고 추격해 오던 자들은 불귀림에 갇힌다.'
장천린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불귀림에 갇히면 어떻게 되겠는가? 실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동정은 금물이다.'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일행을 독려했다.
"여러분, 속도를 좀 더 냅시다."
"옛, 용대인."
부금진은 힘차게 대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일행은 한참을 걸어갔으나 폭우 탓인지
부골장독은 볼 수 없었다.
부금진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혈소를 피해 이리저리 돌며 불귀림 깊숙이 진입하고
있었다.
쏴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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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열대성 폭우였다.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집중적으로 내렸다.
밀림은 온통 물 천지가 되었다. 곳곳에 골이 패였고, 경사진 곳을 따라 급류가 콸콸
거리며 흘렀다. 뿐만 아니라 장막이라도 쳐진 듯이 시야는 온통 뿌옇기만 했다.
폭우 속을 전진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선두에는 청산의명(靑山義明)이 걷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팔십 명이 넘는 왜국무사
들이 학익진(鶴翼陣)의 형태로 따르고 있었다.
청산의명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의 나무와 덩굴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장천린 일
행이 길을 낸 곳을 따라 추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청산의명의 전신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심 중얼거렸
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군.'
그는 전방의 나뭇가지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쓸어 보았다.
'나무의 쓰러진 형태로 보아 반 시진이면 놈들을 따라 잡을 수가 있다.'
그는 계속 전진했다. 얼마쯤 갔을까?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덩굴과 나무가 쓰러진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흠, 우리가 추적하는 걸 눈치챘군.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때 청년무사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사부님, 폭우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피장파장이다. 우리가 어려우면 그들은 더욱 고초를 겪을 것이다."
청산의명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전진한다!"
청년무사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허리를 굽히며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가 뒤를 향해 손을 휘두르자 대열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청산의명의 수하들은 어려서부터 무가(武家)에 입문하여 수없는 전투를 치른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들의 근육과 뼈는 강철같이 단단했으며 의지는 대쪽처럼 굳었다.
비록 폭우가 쏟아지는 밀림 속이었으나 대오는 추호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전진하는
속도 역시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마침내 그들은 불귀림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 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자신
들이 공포의 불귀림에 들어섰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계속 전진해 들어갔다.
쏴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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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는 쉬지않고 쏟아져 내렸다.
밀림 속에는 물이 불어나 때로는 무사들의 허리까지 찬 곳도 있었다. 게다가 야자수
나 열대 식물들의 잎사귀가 빗물에 늘어져 전진에 방해가 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불귀림에 들어선 지 일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혈소(血沼)를 만나지 않
은 덕에 이렇다할 사고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
청산의명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묵묵히 폭우 속에서 강행군하는 수하들을 바라보
며 안색이 침중해졌다.
'해남도에서는 여러 가지로 느낀 점이 많군.'
그의 주름진 얼굴에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젠 나도 늙었다. 지난 날의 명쾌했던 청산의명이 아니다. 지력(智力)도 떨어지고
판단력도 흐려진 것 같은 느낌이다.'
청산의명의 상념은 계속 이어졌다.
'본국에서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무사혼(武士魂)을 수호하기 위해 대세가 기운
것을 알면서도 본국을 떠나 유랑생활한 지 몇 년....... 그 사이 덕천가강은 반석처
럼 자리 잡았다. 이제 와서 그를 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의 일만 잘 되면 막대한 황금을 이용해 재기할 수도 있었다.'
그의 미간에 그늘이 덮였다.
'한데 일이 틀어졌다. 고작 용백군이란 상인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 이 고생이라니.'
청산의명의 뇌리에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장난스럽고 바보스럽기만 한 청년. 그러나 알고 보면 매사에 달관해 있는
청년 석정일랑! 그를 떠올리는 순간 청산의명의 눈빛은 부드럽게 변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석정에게 대권을 양도해야겠다.'
짧은 순간에 그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걸물이다. 바보스런 행동을 하는 것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벌써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기가 싫었을 뿐이다. 진작부터 그는 무궁한 지혜와
패기(覇氣), 담력을 겸비했던 인물이다. 돌아가면 그에게 모든 것을 넘겨야겠다.'
사실 청산의명과 석정일랑은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왜국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무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로에게 양보할 수 없는 팽팽한 경쟁
심리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청산의명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석정일랑이 매사에 양보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 점
을 인정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해남도에서 겪은 좌절과 중원의 상인 용백군과의 대
치를 통해서 이젠 정말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허허, 석정일랑은 분명 잘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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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등으로 얼굴의 빗물을 훔쳤다.
'지금쯤 후발대 사백 명은 해구(海口)에 도착했겠군.'
그는 합병하게 될 무사들이 해남도에 당도할 때가 되었음을 떠올렸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석정일랑은 오지 않았겠지.'
석정일랑이 일부러 뒤켠으로 빠지며 전권을 그에게 미루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부터
의 일이었다. 해남도에 오기 전까지는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청산의명은 고개를 흔들며 내심 탄식했다. 그때 갑자기 처절한 비명소리가 그의 상
념을 산산이 깨뜨렸다.
한 명의 무사가 늪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곳은 다른 곳과 아무 차이도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보는 사이 무사는 가슴까지 빠져들며 두 팔을 휘두르
는 것이 아닌가?
"구해라!"
명령이 떨어지자 근처에 있던 무사들이 급히 칼집을 뻗어 주었다.
"이 끝을 잡아라."
무사는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칼집을 잡았다. 칼집을 잡은 순간 무사의 얼굴에 안도
감이 어렸다. 그의 몸은 칼집에 매달린 채 서서히 빠져 나왔다.
그런데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사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는 잡고 있던 칼집마저 놓아 버리고 말았다.
"왜 그러느냐, 석전(石田)?"
"크으으! 무엇이... 내 몸 속으로... 으아악!"
무사는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늪지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를 삼켜버린 늪지는 본래의 평탄한 바닥으
로 돌아와 있었다. 도저히 그곳이 늪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럴 수가!"
무사들은 치를 떨었다.
하긴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곳은 불귀림 곳곳에 산재한 혈소(血沼)의 하나였다.
더구나 혈소 속에는 수만 마리의 흡혈거머리들이 서식하고 있어 무서운 속도로 무
사의 몸 속으로 파고든 것이었다.
청산의명은 멍한 표정으로 늪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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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대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넋을 잃고 있는 무사들을 둘러본 뒤 날카롭게
외쳤다.
"전진!"
대열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금 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멋모르고 불귀림에 들어섰을 때는 거침이 없
었으나, 비명횡사한 동료를 본 후로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육안으로는 구별할 수 없는 늪지를 혹시 밟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의 발길
을 더디게 한 것이었다.
얼마쯤 갔을까?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이번에는 네 명의 무사가 한꺼번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금세 허벅지까지 잠겨 들어갔다. 그들은 동료들에게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저 제자리에 서서 덩굴을 던지는 자,
허리띠를 끌러 던지는 자가 있었을 뿐,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했다.
네 명의 무사들은 눈이 뒤집힌 채 삽시에 혈소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으으......."
대열은 술렁거렸다. 무사들의 얼굴에는 공포심이 차올랐다.
청산의명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불길한 예감은
더욱 짙어져가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전진해라!"
그의 독촉에 대열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도는 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
었다.
그래도 아무 일만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으악!"
대열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전진하는 동안 무사들은 속속 혈소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의 죽음은 모두 똑같은 모습이었다. 일단 혈소에 빠지면 흡혈거머리가
순식간에 체내로 파고들어 생명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으으, 이럴 수가......!'
청산의명은 회의를 금치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도 이런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
었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
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밀림의 불가사의한 함정인 것이다. 그 함정에 빠져 수
하들이 참혹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대책도 없이 밀림 속으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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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아아! 너무 경솔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을 모르니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마찬가지였다.
"비가 그쳤습니다!"
누군가가 외쳤다.
청산의명은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빗줄기가 멎어 있었다. 숨가쁘게 벌어
진 상황들로 인해 비가 그친 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리며
하늘을 살펴보았다.
무섭게 퍼붓던 폭우는 거짓말처럼 그치고 날씨는 쾌청하게 개어 있었다. 푸른 하늘
에는 눈부신 태양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런 날씨로군.'
어쨌든 비가 그치자 절로 안도감이 느껴졌다. 폭우로 인해 차단되었던 시야가 확 트
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하들을 독려했다.
"다시 전진한다. 최대한 앞을 주의하도록."
대열은 속도를 더욱 늦추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하나 어찌 알았으랴? 지금까지보다도 더욱 무서운 사신(死神)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불귀림에 햇살이 비치자 축축했던 습기는 빠르게 증발하기 시작했다. 습기가 증발하
면서 지면으로부터 자욱한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증기인줄만 알았
다. 그러나 색깔이 이상했다.
지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수증기는 은은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더구나 곧바
로 증발해 버리지 않고 일정한 높이까지 피어 오른 후에는 띠처럼 옆으로 퍼지며 대
류현상을 보였다.
그것은 불귀림을 죽음의 숲으로 만든 부골장독이었다. 열대림의 낙엽이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썩고 발효하면서 독충(毒蟲)들의 독기와 섞여 무서운 독기를 품고 있는
부골장독인 것이다.
더구나 비온 뒤의 증발 현상으로 인해 장독의 독기는 평소보다 수 배나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무사들은 목을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부골장독
을 흡입한 순간 삽시에 독기가 퍼지며 숨통을 부식시켜 버린 것이다.
무사들은 픽픽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몸에서는 자색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이번에는 빽빽한 밀림 속으로부터 요란한 날개짓소리와 함께 새까맣게 박쥐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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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크아악!"
흡혈박쥐들은 쓰러진 무사들에게 달려들어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수천, 아니 수
만 마리의 박쥐가 삽시에 주위를 뒤덮고 말았다. 아직 비틀거리고 있던 무사들의 몸
에도 새까맣게 박쥐가 달라붙었다. 실로 공포스런 광경이었다.
청산의명은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이놈들! 이제 보니 죽음의 숲으로 우리를 유인했구나!'
분노로 치를 떨던 그는 현기증과 함께 구토를 느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골장
독을 흡입한 것이었다.
'끝... 장이다.'
청산의명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흡혈박쥐들을 바라보며 사물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귓전에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었다.
누가 이름 붙였던가? 불귀림(不歸林). 돌아오지 않는 숲이라고.
콰콰쾅! 콰아앙!
짙푸른 남해의 바다 한가운데서 미증유의 폭발이 일어났다. 한 번 폭발음이 울릴 때
마다 불기둥과 물기둥이 십수 장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폭발음은 연쇄적으로 울렸으며 불기둥도 쉬지않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바다 한가운데서 일어난 연쇄적인 폭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폭발음이 멎은 후 남해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적에 휩싸였다.
다만 방금 무서운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듯 높아진 파도가 물거품을 일으키며 출렁
거릴 뿐이었다.
파도 위에 수많은 잔해(殘骸)들이 둥둥 떠있었다. 그것은 부서진 배의 파편과 불에
타다 남은 갖가지 기물들이었다.
배.
한 척의 소선(小船)이 파도에 흔들리며 떠 있다.
뱃머리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청년이 넋을 잃은 채 잔해들을 바라보며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는 바로 왜국청년 석정일랑이었다.
'오오......, 신이여!'
그는 화사의 죽음을 목도하고 새벽에 출발한 선단이 위험함을 직감했다. 그래서 즉
시 배를 타고 쫓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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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 선단의 빽빽한 돛을 멀리서 발견한 순간 굉렬한 폭음과 함께 모든 것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엄청난 불기둥과 치솟는 물보라 속에 이십여 척의 선박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석정일랑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쥔 채 마지막 한 척의 배가 산산조각이 되어 날
아가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으으! 모두... 모두 죽었단 말인가?'
석정일랑의 눈은 부유하는 선박의 잔해들 위에 허망하게 떨어졌다.
"검은 바람."
그의 입술이 달싹여지며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검은 바람!"
다시 똑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분노에 찬 장소성이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
야수 같은 눈빛을 번뜩이며 그는 칼을 휘둘렀다.
번뜩! 하는 도광과 함께 세 개의 머리가 춤추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채 비명조차 지
를 겨를도 없이 세 개의 생명이 절단난 것이다.
"으으으."
한 명이 남았다.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는 불분명한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그의 눈은 절망의 빛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의 바로 앞에는 방금 동료 셋의 목을 한꺼번에 날린 원계묵이 피묻은 장도를 비스
듬히 내린 채 서 있었다.
주위에는 백살대(百殺隊)가 빈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원계묵은 야수 같은 눈빛을
번뜩이며 물었다.
"동방사성은 어디 있느냐?"
"......."
생존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감각을 상실한 듯 안면근육이 멋대로 비틀어
지고 있었다.
"동방사성은 어디 있느냐?"
원계묵은 똑같은 어조로 다시 물었다. 비로소 장한의 얼굴이 움직였다.
"말하면 살려 주시겠습니까?"
"동방사성은 어디 있느냐?"
세 번째 질문은 억양도 똑같았고 눈빛 또한 여전히 야수의 눈빛이었다. 냉혹했다.
장한은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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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었다.
"탁노야(卓老爺)와 함께 해구 쪽으로 가셨습니다."
"해구."
원계묵은 중얼거리다가 곁에 있는 운표에게 말했다.
"운표, 저 자를 보내줘라."
"넷!"
운표의 시원스런 대답에 장한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어렸다. 그는 원계묵에게 절을
했다.
"감사... 으악!"
그는 상상도 못했다. 고개를 숙이기 직전 그의 심장에 운표의 기형도(奇形刀)가 파
고든 것이다.
"끄... 왜?"
장한은 자신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는 것을 보며 회의에 찬 눈을 부릅떴다. 운
표는 히죽 웃었다.
"놈, 지옥으로 보내 주라는 뜻도 모르느냐?"
"그럴 수가......."
운표는 기형도를 회수하며 침을 퉤, 뱉었다.
"애당초부터 네놈들은 우리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쿵!
장한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앞으로 쓰러졌다. 그로써 마지막 생존자마저 사라진 것
이다.
원계묵은 차갑게 불렀다.
"운표."
"넷!"
"백살대 오십 명을 데리고 밀림으로 가라. 걸리는 것은 무조건 척살(刺殺)해라."
평소에는 장난기가 넘치던 운표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대주께서는?"
원계묵은 무심하게 말했다.
"동방사성을 추적하겠다."
돌아서는 그에게서 나직이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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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흔들하는 순간 그는 비조(飛鳥)처럼 날아갔다. 운표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는 돌아서서 백살대를 바라보았다. 백살대는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채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었느냐? 대주께서는 우리들에게 밀림의 사냥을 허용하셨다."
운표의 말이 떨어진 순간 백살대 청년들의 얼굴이 한순간에 똑같이 변했다. 야수(野
獸). 그것은 야수의 표정이었다.
"가자!"
운표는 힘차게 말하며 밀림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폭우가 지나간 밀림 속은 질척거렸다. 밀림의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는 동방사성이었다. 그는 밀림을 헤치며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가 가는 방
향은 해구 쪽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탁일비를 끼고 있었다. 탁일비는 노쇠한 데다 병중이었으므로 안색이
잿빛에 가까웠다.
동방사성은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특히 왼쪽 어깨는 붉게 젖어 있었다. 원계
묵의 도에 당한 것이다. 달릴 때마다 어깨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그는 이를 갈았다
'원계묵! 이 고통은 훗날 배로 갚아 주마.'
그의 얼굴에 자조가 어렸다.
'흐흐, 천하를 우습게 알던 나 동방사성이 이렇게 도망을 치다니?'
그는 이를 악물었다.
'훗날의 도약을 위한 후퇴일 뿐이다. 황금만 손에 들어오면 천하를 움켜쥐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밀림 속이 질퍽해 몹시 힘이 들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 적당한
곳에 탁일비를 내려놓은 후 혈도를 쳐 풀어 주었다.
"......?"
탁일비는 눈을 떴다. 그의 앞에 전신이 피로 물들다시피 한 동방사성이 있었다. 비
록 늙고 병든 몸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바로 판단했다. 그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어렸다.
동방사성은 어색하게 말했다.
"탁노야, 미안하외다."
탁일비는 심하게 기침을 했다. 간신히 기침을 그치며 물었다.
"사성, 그렇게도 황금이 탐나더냐?"
동방사성은 안색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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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십여 년 전부터 이 일에 인생을 걸었소."
"쿨럭, 쿨럭!"
탁일비는 다시 기침을 했다.
동방사성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탁노야, 황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시오."
탁일비는 흐트러진 웃음을 잠시 흘렸다. 그러나 웃음기가 가신 후 그의 얼굴에는 온
통 쓸쓸한 빛만이 떠올랐다.
"옛날 나도 너 같은 때가 있었다. 육십 년 전, 황금에 미쳐서 전 중원의 산이란 산
은 다 뒤졌다. 황금광맥(黃金鑛脈)을 찾아 인생을 몽땅 바쳤었지."
탁일비는 몽롱한 표정이었다. 과거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했다.
"결국 오십 년 전 해남의 오지산 기슭에서 엄청난 금맥(金脈)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동방사성의 얼굴이 탐욕으로 빛났다.
탁일비는 그를 힐끗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것을 파내어 미증유의 황금을 모았지."
탁일비는 허탈한 듯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의 입에서는 힘없는 음성이 이어졌
다.
"하지만 황금에 미쳐 수십 년의 인생을 탕진한 내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
다.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거대한 황금산이 쌓였을
때는 이미 몸은 늙고 병들어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허무함을 느끼게 됐지."
동방사성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황금에 대한 탐욕 외에는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아까운 청춘을 쓰지도 못하고 황금에 집착해서 흘려버린 것이다."
동방사성은 조급하게 외쳤다.
"나에게는 그 황금이 필요하오!"
탁일비는 총기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성, 네가 내 밑에 일하러 왔을 때부터 야심이 있음을 알아 차렸다. 그러면서도
그냥 둔 것은 힘없고 늙은 나로서는 네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탁일비는 다시 기침을 했다. 동방사성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노야, 당신의 생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그 막대한 황금을 지하에 묻은 채 사
라지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 아니오? 그것을 나에게 주시오! 노야!"
탁일비는 그를 응시했다. 잠시 후 더욱 쇠잔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북경의 태진왕 전하께 서찰을 올린 진정한 목적은... 죽기 전에 내가 모은 황금을
나라에 바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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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사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탁일비의 뜻을 이제서야 안 것이다.
"평생 보람없이 살아온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하지만
황금 주위에 너무 많은 벌레가 끼었어."
여기까지 말한 탁일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왁!"
그의 입에서 한 사발도 넘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동방사성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바닥에 떨어진 피는 검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피를 토하다니!'
동방사성은 언젠가 탁일비를 치료했던 한 의원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노야께서 자줏빛 피를 토하게 되면 그때는 끝장이오.
동방사성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갑자기 그는 털썩 무릎을 꿇더니 애원하듯 말
했다.
"노야, 어쨌든 나는 당신을 위해 수년간을 노력했습니다. 당신에겐 어차피 혈육도
친지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종처럼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기왕 죽을
바에야 노야가 모아놓은 황금을 주십시오."
실로 비굴한 태도였다. 동방사성은 연신 고개를 바닥에 조아렸다. 그를 바라보는 탁
일비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한편으로는 연민의 빛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사성."
"말씀하십시오!"
"용등대(龍登台) 위의 귀두암(鬼頭岩)을 부숴 보게. 그곳에 황금이 있을 것이다."
"노야!"
동방사성은 입이 벌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동안 벙벙한 표정을 짓다 넙
죽 절을 했다.
"감사, 감사합니다, 노야! 오오!"
그는 들뜬 음성으로 말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마음이 바쁜 듯 앞으로 달려갔다
.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
그의 눈에 비친 탁일비는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는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죽어가
고 있었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는 힘없이 웃었다.
"사성, 마음이 약해졌느냐? 허허, 어서 가라. 그 황금으로 네 인생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죄송합니다, 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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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사성은 신형을 날렸다.
"허허."
사라져 가는 동방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탁일비의 노안에 눈물이 어렸다.
"쿨룩! 쿨룩......!"
그는 다시 기침을 하며 더욱 많은 양의 피를 토해냈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다리
를 뻗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이제는 그만 잠들었으면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
휙!
문득 누군가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탁노야."
무정하면서도 묵직한 음성. 나타난 사람은 바로 원계묵이었다. 그는 바닥에 눕다시
피 한 탁일비를 부축했다.
"원... 무사."
탁일비는 그를 알아보고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탁노야, 동방사성은 어디 가고 노야만 이곳에 있는 것이오?"
탁일비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는... 꿈을 찾아... 떠났소."
탁일비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용대인은......?"
원계묵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살아 계실 것입니다. 반드시."
"용대인에게 전해 주시오. 내 황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소. 모두."
탁일비의 숨결이 가빠졌다.
"황금은 모두 다섯 군데에 묻어 두었소. 그 중 하나는 사성에게... 가르쳐 주었소."
"노야."
"나머지 네 곳 중... 첫 번째는 백사안(白沙岸)... 백사안의 모래 속에. 두 번째는.
.. 태(太)... 태......."
원계묵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탁일비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던 것이다.
"노야!"
그는 강하게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탁일비의 몸은 힘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그는 황금을 묻어 둔 다섯 군데의 위치 중 한 곳은 동방사성에게. 한 곳은 원계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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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나머지 세 곳은 미처 알려주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만 것이다
황금의 손 탁일비.
오직 황금만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그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노인이었는지
도 몰랐다.
황금충 탁일비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가 모아 둔 세 군데의 황금의 위치를
영원히 비밀에 묻어둔 채로 이승을 떠나고 만 것이다.
"......."
원계묵은 허탈해졌다. 그의 팔뚝에 의지한 채 숨을 거둔 탁일비의 몸은 가랑잎처럼
말라 있었다. 그렇게 숨을 거둘 바에야 황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허허! 허허허허헛......."
일행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죽음의 숲 불귀림을 통과하는 것은 지옥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과도 같았다. 체력과
심력(心力)이 모두 소진될 정도로 일행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장천린은 백연연을 안은 채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약간 처진 채 동방옥
이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해남도 출신이었으나 거듭되는 고초로 인해 탈진한 듯했
다.
부금진은 혈소(血沼)를 피해 가느라 신경을 소모한 탓인지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
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점차 득의의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앵무새 백아의 들뜬 음성이 시끄럽게 들렸다.
"밀림이 끝났다! 밀림이 끝났다!"
"......!"
일행의 얼굴에는 일제히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앞장 서 가던 반송이 제일 먼저 땅
을 박차고 달려갔다. 한 무더기의 덩굴을 헤치고 나간 순간.
"오!"
그의 입에서는 부지중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보라!
그토록 울창하던 밀림이 거짓말처럼 끝나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나지막한 구릉지
대를 포근하게 덮고있는 녹색의 초지(草地)가 아닌가?
반송은 너무나 기뻐 하나밖에 없는 팔을 번쩍 치켜들며 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 끝났다! 이제 고생은 끝났어!"
밀림 속에는 닿지조차 않았던 화창한 햇살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을 환하게 비치
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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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핫핫!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숲을 벗어나고야 말았어!"
반송의 희열에 찬 웃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덩굴을 헤치고 일행이 하나 둘 빠져 나
왔다. 그들의 얼굴에도 기쁨의 빛이 넘쳐나고 있었다.
부금진은 단위제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단도독님, 이제 고생은 끝났습니다."
단위제는 대소를 터뜨렸다.
"껄껄! 소진,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아느냐? 술이야, 술! 으핫핫핫!
오늘은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셔야겠다."
부금진의 눈도 반짝 빛났다.
"제가 대작을 하지요!"
"좋아, 소진! 너는 확실히 말귀를 알아듣는 귀여운 꼬마야."
부금진은 꼬마라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초지 위를
빙글빙글 돌며 한껏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편, 장천린은 감개무량하기만 했다.
'정말 다행이다. 그 위기를 넘기고도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니.'
그는 시선을 돌려 일행들을 하나하나 부드러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때 품에 안겨 있던 백연연이 속삭이듯 말했다.
"다행이에요. 정말."
장천린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백연연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뺨에 햇살이 밝게 스며들고 있었다.
"백소저."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만일 내가 태진왕 전하라면 소저 같은 여인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
오."
"......!"
백연연의 얼굴이 복사꽃처럼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심경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환란을 겪고 나니 절망했던 가슴 속에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척추를 다
쳐 거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그러
나 역경을 이겨낸 지금 그녀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것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한쪽에 선 채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방옥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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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도 기쁜 빛이 없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비록 죽음의 숲을 헤쳐 나오긴 했지만 앞으로의 걱정
이 태산처럼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옥 동생."
동방옥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몹시 다정한 호칭이었다.
장천린의 품에 안긴 채 백연연이 따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연연은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생, 오늘 중으로 용대인은 동생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
동방옥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연연은 맑은 눈에 담뿍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용대인의 옷이 찢어지고 더럽혀졌어요. 동생이 꿰매고 손질해 주어야겠어요."
동방옥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가슴이 쿵쿵, 소리내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녀는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는 눈길을 장천린에게 옮겼다.
장천린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싱긋 웃었다.
"해 주겠느냐, 소옥?"
동방옥의 눈에 뽀얀 이슬이 어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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