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0장 낭인시장 (23/87)

제20장 낭인시장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대륙의 주인은 숱하게 바뀌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영 

웅호걸이 부침하였으며, 기남기녀(奇男奇女)들의 파란만장한 청춘 또한 흐르는 세월 

속에 낙화(落花)처럼 떠내려갔던가? 

천지를 얼어붙게 했던 겨울은 지나가고, 봄바람은 동토(凍土)를 해빙시켜 잊혀졌던 

뿌리를 살궈내며 대지를 무성한 초록의 빛으로 물들인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무르익어 여름이 되는가 싶으면, 다시 산들바람 부는 

가을로 이어져 간다. 이것이 대자연의 섭리가 아니던가! 

대원제국(大元帝國). 

한때 힘찬 말발굽소리로 천하를 질타하며 대장정의 거보(巨步)로 중원을 군림했던 

제국의 역사도 서서히 사기(史記)의 한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 

대초원의 주인인 몽고의 후예들은 중원의 북방에서 크게 네 개의 세력으로 분할되고 

있었다. 

천산북로(天山北路)에 위치한 막서몽고(漠西蒙古)를 위시하여 청해지방(靑海地方)의 

청해몽고(靑海蒙古), 흥안령(興安嶺) 일대에 자리잡은 막북몽고(漠北蒙古), 열하( 

熱河), 찰합이(察哈爾) 일대의 막남몽고(漠南蒙古). 

이 네 곳으로 분할된 몽고족들은 대원제국의 영광을 과거의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 

을 뿐, 오늘날에는 내분으로 인해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다. 

때는 만력(萬歷) 사십 오 년. 

예상치 못했던 풍운(風雲)이 북방의 거친 황원(荒原)에서 발원하기 시작했다. 

고랍특성(古拉特城). 

이곳은 막남몽고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중원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이곳은 중원과는 판이한 풍속을 지 

니고 있었다. 각계 각층의 다양한 신분과 계급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인종 

(人種) 또한 저마다 틀려 가히 인종 전시장이라 불릴 만했다. 

이곳에서 유명한 것은 이른바 일 년에 네 차례 열리는 낭인시장(浪人市場)이었다. 

낭인시장은 보통의 시장처럼 물품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곳에서는 인간이 상품처럼 거래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시장은 

아니었다. 

낭인시장에서는 한 가지라도 재주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주를 팔았다. 

그들은 자신의 신상 명세서를 적어 역내(域內)의 중개업자에게 제출한다. 중개인은 

낭인(浪人)들의 신상 명세서를 수십, 또는 수백 장씩 지니고 있다가 고객들에게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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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를 보여주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낭인을 소개하는 것이다. 

즉, 인간을 상품으로 놓고 손님과 중개업자가 가격을 흥정하는 것이다. 일단 팔린 

낭인들은 자신을 산 사람에게 일정기간 동안 봉사하게 된다. 

이곳 낭인시장에 몰려드는 자들은 온갖 희귀한 재주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중 태반은 낭인무사(浪人武士)들로, 자신들의 무예(武藝)를 돈을 받고 파는 셈 

이었다. 

낭인시장이 형성된 데는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로부터 중원의 군사통치를 벗어나 있는 북방지역에는 비적(匪賊)이 들끓었다. 그 

비적들로부터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필요가 있거나, 대상(隊商)들이 교역을 할 때마 

다 호송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낭인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상인들이나 지방의 호족(豪族)들, 또는 북방의 비옥한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은 비적들의 수탈에 맞서야 했으므로 낭인시장의 주요 고객들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낭인시장은 해가 갈수록 번창하여 수많은 낭인들이 몰려들게 되 

었다. 낭인시장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차례에 걸쳐 열린다. 그때마다 대단한 

활기를 띠었다. 

낭인들 중에는 개인 자격으로 오는 자도 있었고, 수십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일단 계약금을 받게 되면 고객의 주문에 응하게 되고 나머지 금액은 봉사기 

간 동안에 나누어 지급받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낭인시장은 신의(信義)를 생명으로 내걸었다. 만일 약정을 위반하게 되면 이 

후로는 낭인시장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또한 일 년 간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게 되면 이듬해에는 몸값이 크게 뛰게 마련이 

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낭인들 중에는 한때 비적생활을 했던 자들도 있다는 것 

이다. 그러나 낭인시장의 철칙은 여하한의 경우라도 과거가 불문에 부쳐진다는 것이 

었다. 

고랍특성의 낭인시장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성명 : 담오(覃吾). 

나이 : 삼십 칠 세. 

출신 : 한인(漢人) 부친과 아국(俄國:러시아) 

모친 사이에서 태어남. 

경력 : 살인 이십 칠 회, 약탈 십 육 회, 방화 삼 회. 

금액 : 평생 계약금으로 은자 삼십만 냥을 요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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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시키는 일은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함.> 

"재미있는 자로군." 

손님이 나직이 웃었다. 

낭인점포 만사통방(萬事通房)의 주인은 손님의 눈치를 보며 두 손바닥을 비볐다. 

"예, 아주 괴상한 놈이지요. 하지만 위험한 놈이니 웬만하시면 다른 놈으로......." 

비단옷에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손님은 그 말에 씩 웃었다. 

고랍특성의 낭인시장 중개인의 한 명인 합향거(合香居)는 손님이 짓는 미소에 왠지 

끌려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 앞의 화려한 복장의 손님은 강한 인상을 풍겼다. 나이는 이십을 조금 넘어 보였 

으나 워낙 침착하고 완숙한 행동으로 인해 그보다 훨씬 성숙한 느낌을 준다. 

용모도 상당히 준수했다. 자세히 보면 한쪽 뺨에 보일락 말락한 상흔(傷痕)이 있었 

으나 그 점이 더욱 사나이다운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렇게 특이한 분위기의 손님을 합향거는 처음 보았다. 

손님의 뒤에 바짝 붙어 서있는 사람은 역시 이십대의 청년이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합향거는 자신도 모르게 찬바람을 흑, 하고 들이켰었다. 

마치 살모사 같은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움푹 들어간 째진 눈에서 흘러나오는 무심 

한 안광이 마치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합향거는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아무튼 좀 괴상한 놈입지요." 

손님은 담담히 말했다. 

"흠. 이렇듯 많은 살인과 약탈, 방화를 하고도 법에 걸리지 않았단 말인가?" 

합향거는 입술에 침을 축였다. 

"그 자의 말로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본 사람이나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 

요. 헤헤! 깨끗이 증거인멸을 했다고나 할까요?" 

화려한 손님, 즉 장천린은 매우 흥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자의 평생 계약금이 은자 삼십만 냥이란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합향거는 손을 벌리며 말했다. 

"터무니없는 액수입죠. 소인이 비록 이 장사를 하긴 하지만, 일반 낭인무사 한 명을 

고용하는 데 일 년 계약으로 많아야 오백 냥에서 천 냥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정말 터무니없는 요구입죠." 

합향거는 마치 자신이 매우 양심있는 장사꾼이라는 것을 설명하듯 침방울을 퉁겨가 

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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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 전에 부하 이백 명을 데리고 온 요대서(遙大書)란 인물도 일 년 계약으로 이 

백 명 수하와 함께 은자 십만 냥에 계약했지요. 한데 겨우 혼자 몸에 삼십만 냥이란 

터무니없는 수작입지요." 

장천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자가 온 것은 언제였소?" 

"일 년 반 정도 됐습죠. 보시다시피 아직 팔리지 않고 있습니다요." 

"흠." 

"헤헤! 정신이상자가 아니고서야 그런 놈을 살 까닭이 있겠습니까?" 

장천린은 히죽 웃었다. 

"잘못하면 내가 그 정신이상자가 될지도 모르겠군. 계묵!" 

합향거는 멍청해졌다. 

"예! 형님." 

뒷켠에 그림자처럼 서있던 청년 원계묵이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반송과 함께 그 자를 찾아보아라. 과연 삼십만 냥의 가치가 있는지도 알아보도록." 

원계묵은 간단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는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사라졌다. 합향거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정말, 그놈을 사려한단 말인가? 세상에, 그건 말도 안 된다. 말도 안돼!' 

"주인장." 

"예에?" 

"다른 서류를 좀 봅시다. 어쨌든 내일까지 백 명 정도의 무사를 골라야 하니 말이오 

." 

"예? 예! 곧 가져 오겠습니다요!" 

합향거의 입이 쭉 찢어졌다. 

'이거 오늘 횡재수를 만났는걸? 한꺼번에 낭인 백 명이라?' 

그는 서류가 있는 벽장 쪽으로 신바람이 나 달려갔다. 그러다 무심코 창 밖을 보게 

된 그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자신의 점포 만사통방 주위에 칼을 찬 백의무사(白衣武士) 백여 명이 철통과 같이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하나같이 젊은 청년들이었는데 눈빛이 형형하고 체격이 강철처럼 단단해 보 

여 능히 일당천(一當千)의 용자들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합향거는 가슴 속에 의혹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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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저 손님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가 어찌 알겠는가? 점포를 포위하고 있는 백 인의 도객(刀客)들이야말로 그 유명 

한 백살대(百殺隊)라는 사실을. 

사내들이 모이는 곳에 필연적으로 따라 다니는 것이 있다. 

술집과 여자가 그것이다. 

남자가 있는 곳에는 술이 있고, 술이 있는 곳에 여자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 

도 모른다. 

아랑(阿娘)은 그런 여자였다. 

철새처럼 부평초처럼 흘러 다니는 여자.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고 돈만 내면 누구든 

지 마음대로 몸뚱이를 주무를 수 있는 여자. 

아랑은 바로 그런 여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싸구려에 속했다. 그녀의 출신은 

오사장(烏斯藏:서장 지방)이었다. 

아랑도 젊었을 적에는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뭇 청년들이 그녀 

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선물공세를 아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아득한 

추억거리에 불과하지만. 

어느덧 삼십 세가 넘어버린 그녀를 찾는 사람이 이제 드물어졌다. 여자로서는 퇴물 

인생인 것이다. 

"아, 피곤해." 

오전 내내 객방(客房)에서 취객에게 시달리다 파김치가 되어 나서는 아랑은 노곤한 

듯 허리를 펴고 있었다. 

그녀가 빠져나온 객방에는 털투성이의 장한이 알몸으로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장한 

의 얼굴에는 포만감이 어려 있었다. 

'흐으. 나이가 들었다고는 해도 아직은 쓸 만한 계집이란 말야.' 

장한은 방금 전 연방 교성을 질러대던 아랑을 생각하며 팔다리를 쭉 뻗고 있었다. 

아랑은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주점으로 나왔다. 비록 피부의 윤택은 점점 사라 

지고 있었으나 아직도 과거의 미모의 흔적이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특히 붕새의 눈 

처럼 커다란 눈동자에는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던 과거가 엿보이는 듯했다. 

다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점으로 나오는 순간. 

"......!" 

아랑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주점 한쪽 구석으로 가 못박히고 있 

었다. 그곳에는 한 사나이가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마시는 술은 싸구려 배갈이었다. 

주둥이에 이가 빠진 술병을 통째로 들어 입에 처박고 있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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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낡은 폐포(弊袍), 텁수룩한 수염이 왠지 고독과 방황 

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늘져 있는 얼굴을 자세히 보면 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세파에 찌든 탓인지 전신이 온통 피곤과 권태에 젖어 있었다. 나이는 

대략 사십 세 전후로 보였다. 

탁자 위에 녹슨 칼 한 자루가 놓여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랍특성의 낭인시장에서 흔 

히 볼 수 있는 낭인임이 분명했다. 

아랑은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다가갔다. 낭인은 그녀가 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본 

척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셔댔다. 

"저......." 

아랑은 잠깐 눈치를 보더니 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놓았다 

"술만 마시면 몸에 해로워요. 드시고 싶은 것이 계시면 드세요. 모자라는 것은 제 

앞으로......." 

낭인, 즉 담오(覃吾)는 힐끗 동전을 바라보았다. 그는 서슴없이 동전을 집어들었다. 

"큿!" 

담오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돌려 외쳤다. 

"주인장! 여기 술 한 병 더!" 

칼칼한 음성이었다. 다만 지나친 음주로 인해 약간 쉬고 꼬부라진 음성이었다. 

아랑은 안쓰러운 듯 말했다. 

"일 년 이상 당신은 술만 드셨어요. 그러다가 몸에 병이라도 나시면." 

담오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부담스럽다면 언제든지 나가 주마." 

아랑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금세 큰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때였다. 

"이 새끼로군! 아랑의 기둥서방이란 놈이." 

지독한 술냄새와 함께 탁성이 아랑의 등 뒤에서 들렸다. 

허리에 대감도(大坎刀)를 찬 건장한 체격의 무사였는데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작자였다. 그는 주기가 가득 오른 얼굴로 담오를 노려보며 사뭇 시비조로 말했다. 

"흐흐! 할 지랄이 없어 몸파는 계집에 붙어 피를 빨아먹느냐? 불알 두 쪽 찬 놈이라 

면 차라리 벽에 대갈통을 박고 뒈질 일이다." 

아랑은 어쩔 줄 몰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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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그만 두세요. 이 분은......." 

무사는 눈알을 부라렸다. 

"네년은 배알도 없는 계집이로군!" 

그는 손을 뻗어 아랑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조금만 기다려라. 계약만 되면 곧 널 찾아오마." 

무사는 탁자 위의 술병을 들더니 담오의 머리 위에 거꾸로 기울여 술을 쏟아 부었다 

아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겁에 질린 눈으로 담오를 바라보았다. 

"......." 

그러나 담오는 술을 뒤집어썼으면서도 여전히 무표정할 뿐이었다. 무사는 경멸에 찬 

웃음을 흘렸다. 

"흐흐! 그렇게 술이 먹고 싶으면 네 얼굴을 핥아라. 너 같은 놈은 그렇게 먹어야 제 

격이다. 아핫핫핫핫!" 

무사는 대소를 터뜨리며 밖으로 사라져 갔다. 마치 상대할 값어치도 없다는 듯이. 

그가 사라진 후 아랑은 황망히 손수건을 꺼냈다. 

"닦으세요......." 

담오는 손수건을 받아 얼굴에 흐르는 술을 닦았다. 그의 눈빛은 암울하기만 했다. 

그러나 한순간 파충류의 그것처럼 무섭게 번뜩였다. 

아랑이 몸을 떨며 나직이 말했다. 

"참으세요. 그 분은......." 

담오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몸 한 번 섞었다고 그 자를 두둔하느냐?" 

아랑은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어찌... 그런 말을." 

"큿큿!" 

담오는 괴소를 흘리며 술병을 들어 조금 남아있는 술을 들이켰다. 연후 탁자 위의 

칼을 집어들며 몸을 일으켰다. 

"안돼요, 참으셔야 해요. 절대로 다시......." 

아랑은 한사코 그의 소매에 매달렸으나 담오는 사정없이 그녀를 밀쳐 버렸다. 

"비켜라." 

그가 채 두 걸음도 옮겨 놓기 전이었다. 아랑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앞을 가로막았 

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가 죽일 년입니다. 과거 당신을 믿고 기다렸으면 되는 것을... 제가 죽일 년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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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제발 참으세요, 담상공." 

담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한동안 아랑을 내 

려보던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 옛날 너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었고, 내게 필요한 것은 칼이었지." 

"상공......." 

담오의 눈은 허공을 더듬었다. 

"하지만 너는 내 칼을 용납하지 못했고, 나는 너에게 필요한 돈을 용납치 못했다." 

아랑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결국 너는 돈 때문에 내 곁을 떠났고, 지금은 싸구려 창녀가 되었다. 나는... 큿큿 

! 칼만 믿고 살다 가난뱅이 낭인이 되었지." 

담오의 파충류 같은 눈알이 번들거렸다. 

"십 년 전 나는 널 위해 칼을 놓으려 결심했었다. 그리고 약간의 돈을 모아 널 찾았 

다. 그런데 너는 약속한 일 년을 참지 못하고 마을을 떠난 후였다." 

아랑은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마음 속으로 바랬다. 그 후 미련없이 다시 칼을 잡았 

지. 하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 너와 나 둘 중 아무도 행복하게 살거나 성공하지 못 

했다." 

담오의 입술 꼬리가 춤을 추었다. 

"큿! 과거 사랑했던 여인이 놈팡이들에게 몸을 파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나, 내 

앞에서 그 짓을 하면서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는 너. 흐흐!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 

이 되어 버렸어." 

아랑은 고개를 들며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은 저와 당신의 행복을 위한 길입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우 

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담오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는 냉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어. 안타깝게도 나는 너에게 조금의 감정도 느낄 

수 없단 말이야." 

"......!" 

아랑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제가, 몸을 팔았기 때문인가요?" 

담오는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파충류의 그것을 닮아 있었 

다. 

"만약 내가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다면, 네가 이보다 더한 곳에 있다 해도 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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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용서했을 것이다." 

그는 몸을 돌렸다. 

"잘 들어둬. 세상은 돈만 갖고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야." 

담오는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아랑은 망연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 

록 깨물더니 절규를 토해냈다. 

"나는 가난이 싫었어요! 나는 돈이 필요했던 거예요! 과거 당신이 날 사랑했다고 했 

지만 당신에게 과연 무엇이 있었나요? 칼 뿐이었지요! 오직 칼 뿐, 그래서... 그래 

서 사람들 말대로 돈을 벌기 위해 당신을 떠난 것 뿐이에요! 흐흐흑! 이런 내가 잘 

못인가요?" 

아랑은 무너지듯 바닥에 엎어지며 오열을 터뜨렸다. 그녀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 한 번의 실수가 그렇게도 당신에게 한이 맺혔던가요? 그렇게도?" 

담오는 객점을 나오면서 눈을 찡그렸다. 

태양 빛이 너무 강렬했다. 

그는 태양 빛에 노출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에게 반문했다. 

'너는 아직 아랑을 사랑하느냐?'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과거만큼 그녀에게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 뿐 

이었다. 

'큿큿! 그저 약간의 연민만, 조소만 남아있을 뿐이지' 

담오는 눈을 가늘게 한 채 태양을 노려보았다. 

'흐흐, 하지만 그러는 너는 무엇이 잘났느냐 말이다. 담오.' 

담오는 괴소를 흘리며 걸음걸이를 빨리 했다. 

얼마쯤 갔을까? 

그의 눈빛이 한 곳에 멎어지며 번들거렸다. 성 밖으로 향하는 수구문(水口門) 쪽으 

로 어깨를 편 채 걸어가고 있는 무사가 있었다. 방금 전 주점에서 그에게 술을 부었 

던 무사였다. 

'큿.' 

담오의 입술꼬리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조용히 무사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무사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는 듯 한가하 

게 걷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수구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섰다. 

담오는 그의 뒤를 따르며 내심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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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됐군. 주위의 이목이 없는 곳이 더 낫지. 네 무덤 장소로는 말이야.' 

두 사람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성 밖으로 나갔다. 

성 밖은 황토 흙으로 된 관도가 뻗어 있었는데 한낮이라서인지 행인이 드문드문했다 

. 무사는 관도를 따라 걷다가 길이 갈라진 곳에서 잠시 멈추더니 소로를 택해 걸어 

갔다. 

얼마 후 그는 한 그루의 관목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돌리며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쥐새끼 같은 놈. 벌써부터 네놈이 쫓고 있는 걸 알았다." 

담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무사는 콧등을 찡그리며 뇌까렸다. 

"늙은 창녀 아랑의 기둥서방치고는 그래도 배알이 남아있는 모양이군?" 

담오는 대꾸없이 계속 다가갔다. 

"흐흐! 계집 앞에서 당한 모욕을 갚고 싶다 그 말인가?" 

담오는 무사와 일 장 남짓한 거리에서 멈춘 채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무사는 눈썹을 불끈 치켜올렸다. 

"좋아! 어차피 너 같은 놈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내가 죽여주지. 마침 이곳은 조 

용하니까 말야." 

무사는 관목을 등진 채 살기를 드러내며 음침하게 말했다. 

"기왕이면 이름은 알려 주어야겠지? 나는 객이객(喀爾喀:막북몽고)의 추달(酋達)이 

다." 

담오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도 추달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은 바 있었던 것이다. 

막북(漠北)에서 첫손가락을 꼽는 도귀(刀鬼)로 알려진 추달은 손속이 잔인하고 성정 

이 흉폭한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주가도 무척 높아 낭인시장에서 꽤 알아주는 상품 

이기도 했다. 

"흐흐, 왜? 겁나느냐?" 

추달은 담오가 멈칫하는 것을 보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 

담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추달은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 같은 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깝구나." 

슈욱! 

추달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공중에서 대감도를 뽑더니 담오를 양단해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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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위이잉! 

그의 도법은 무시무시했다. 자욱한 황진이 도풍에 휘말려 회오리쳤다. 

"뒈져라, 애송이!" 

대감도는 담오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실로 흉폭무비한 도법이었다. 

담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감도가 그의 

정수리에 떨어지는 순간. 

절꺽! 

들릴 듯 말 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수중에서 녹슨 칼이 뽑혔다. 다음 순간 칙칙한 

빛이 허공에 호선(弧線)을 그렸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허공에 떠있던 추달의 심장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어 

느 새 그의 심장이 정확히 두 쪽이 나버린 것이다. 

쿵! 

추달은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너... 너는 누구... 냐?" 

추달의 눈에는 온통 회의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고개 숙여 자신의 가슴을 내 

려다보았다. 가슴이 쩍 갈라져 있었다. 

"담오(覃吾)."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추달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담오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네... 네가 바로... 요북(遼北)의 담오?"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머리가 텅 비는 것을 느끼며 고목이 쓰러지듯 벌렁 뒤로 넘 

어갔다. 큰 대자로 드러누운 추달의 가슴에서는 여전히 쿨럭쿨럭 선혈이 품어져 나 

오고 있었다. 사방으로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담오는 녹슨 칼 끝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칼 끝을 타고 핏방울이 뚝뚝 흘러 내렸다. 

그는 칼을 추달의 옷자락에 슥 문지른 후 칼집에 집어넣었다. 

"원망하지 마라. 네가 먼저 날 건드렸으니." 

그는 무심히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방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다. 창천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허무한 빛이 흘러 나왔다 

. 그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 몸을 돌렸다. 

"아주 훌륭한 도법이다, 친구." 

한 가닥 음산한 음성이 그의 뒤통수를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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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오는 안색을 굳히며 빙글 돌아섰다. 

소나무 뒤쪽으로부터 두 명의 인물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한 명은 어깨에 장도(長刀

)를 걸친 살모사 눈을 한 청년이었고, 한 명은 역시 도를 허리춤에 묶어 놓고 있는 

외팔이 중년인이었다. 

두 사람은 바로 마도 원계묵과 반송이었다. 

외팔이가 된 반송은 턱수염이 부숭부숭했다. 그 동안 수염을 한 번도 깎지 않고 길 

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딴 사람으로 보였다. 

반송은 강렬한 눈빛으로 담오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대가 바로 그 유명한 담오인가?" 

반송 역시 도 한 자루에 일생을 건 도객이었다. 방금 전 담오가 칼 쓰는 것을 본 그 

는 맹렬한 투지를 느낀 것이었다. 

"......." 

담오는 직감적으로 두 사람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꼈다. 그것은 도를 익힌 자만이 

갖는 무언의 느낌이었다. 

그는 전신의 신경이 팽팽히 긴장되며 혈관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겉으로 

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 그대들은 누군가?" 

반송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담오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틀림없군. 요북의 사도(死刀) 담오의 소문은 꽤 들었지만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담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불필요한 대화를 하는 것도,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다. 

"내게 무슨 용무가 있소?" 

"만사통방의 매매중개인 합향거(合香居)를 아시오?" 

질문을 던진 것은 원계묵이었다. 그는 살모사 같은 눈으로 추달의 아래위를 훑어보 

며 대답도 듣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그에게 꽤나 비싼 몸값을 불렀더군." 

담오는 원계묵과 반송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너희들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는 반말을 썼다. 그러자 반송이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핫핫핫! 우리의 주인나리께서는 그대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시험 

해 보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대가 과연 삼십만 냥의 가치가 있는지를 말이다." 

담오는 눈길을 내려 깔았다. 

"날 시험하기 위해 그대들을 보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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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담오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만족할 거야. 그대들의 주인은." 

"무척 자신 있게 말하는군?" 

반송의 눈빛이 타는 듯 달아올랐다. 담오는 여전히 오만하게 말했다. 

"막남과 막북에서 날 꺾을 자가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반송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내뱉었다. 

"과연 말만큼 실력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군." 

담오는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나이는 얼추 비슷해 보였다. 또한 사용하 

는 병기도 같았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서는 야성적(野性的)인 면이 있었다. 여러모 

로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 

담오의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은 반송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으나 적 

의도, 경계도, 그렇다고 무시하는 빛도 없었다.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내 칼은 잔인하다. 또한 내 생애에 인정이란 말은 없다." 

담오의 착 가라앉은 말. 

반송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안심해라. 죽어도 원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힘들걸? 나란 놈은 염라대왕조 

차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담오는 더 이상 대화하는 것이 싫은 듯 짤막하게 말했다. 

"칼을 뽑아라." 

반송은 다시 히쭉 웃었다. 털로 뒤덮여 있는 그의 얼굴은 언뜻 보면 험상궂게 보였 

으나 자세히 보면 느긋한 여유가 엿보였다. 그것은 장천린과 동행하면서 생긴 새로 

운 변화였다. 

반송은 하나밖에 없는 팔로 칼을 뽑았다. 칼은 반월형(半月形)이었으며 길이는 석 

자, 폭은 손가락 두 개를 합친 정도, 두께는 종잇장처럼 얇았다.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의 칼빛은 새벽녘 달의 한정(寒精)을 닮아 있었다. 

담오의 눈이 파충류의 눈처럼 음울하게 번뜩였다. 

"좋은 칼이다. 하나 내 앞에서 칼을 뽑은 것은 실수다." 

츠륵! 

섬뜩한 음향과 함께 담오의 손에서 칼이 뽑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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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간 손질 한 번 안 한 듯 벌겋게 녹슨 칼은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리기만 해 

도 부서질 듯 허술해 보였다. 

그의 칼은 중병(重兵)에 해당할 정도로 폭이 두껍고 무게가 있어 보였다. 길이는 넉 

자 정도로 원계묵이 사용하는 장도에 비해서는 짧았으나 역시 긴 편에 속했다. 그 

나마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어 두부조차 베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그 녹슨 칼 아래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무조각처럼 절단났던 

가? 

"......." 

두 사나이. 반송과 담오는 칼을 든 채 대치했다. 

도와 도. 

같은 종류의 병기를 움켜쥔 두 사람은 상대방의 칼 끝을 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그 

것은 난생 처음으로 무서운 적수를 만났다는 인식이었다. 상대방의 칼에서 흘러나오 

는 기(氣)가 숨조차 막아버릴 정도로 막강했던 것이다. 

특히 담오는 자신이 오판을 했음을 깨닫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는 순간 보통은 넘 

는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강한 자들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한편 반송은 하나밖에 없는 팔로 비스듬히 칼을 치켜세운 채 담오를 노려보고 있었 

다. 비록 팔이 없는 한쪽 소매가 헐렁해 보였으나 이상할 정도로 그의 자세는 안정 

감이 있어 보였다. 

담오는 강한 의혹을 느꼈다. 

'천하에서 이처럼 안정된 도법을 지니고 있는 자는 다섯 명을 넘지 않는다. 대체 이 

자는 누구길래?' 

땀. 

등줄기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똑같았다. 그만 

큼 긴장의 도가 비슷하다는 증거였다. 

두 사나이의 칼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묶어 두기라도 한 듯 바닥을 향해 기울어 

져 있었다. 그것은 몹시 기이한 광경이었다. 대체로 칼이든 검이든 상대를 향해 겨 

누는 것이 상례다. 그렇지 않다면 각각 상단이거나 하단으로 나누어 겨누는 것이 보 

통이었고, 그것도 아니라면 각각 가슴 앞에 바짝 끌어당겨 기회를 노리는 것이 일반 

적인 대치상태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은 마치 싸우기를 극도로 기피하는 듯 칼 끝을 땅에 끌리도록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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