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황금과 칼
대막(大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천막과 비슷한 가옥들이다.
그것은 사막을 횡단하며 장사하는 대상(隊商)이나 양떼를 치는 유목민들의 거처로
유랑생활의 특성에 맞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가옥구조다. 이런 가옥을 빠오라
부른다.
대상들이나 유목민들은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빠오에서 생활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 인구가 많은 마을에서는 빠오가 군락(群落)을 이룬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빠오.
수백, 아니 천여 장이 넘는 양피로 만든 빠오는 대단히 훌륭했다. 빠오의 내부도 놀
랄 정도로 넓어 기백 명이 들어가 있어도 좁은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바닥에는 자줏빛의 호화로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둥둥둥.......
삘리리리... 릴!
십여 명의 악사(樂士)들이 북과 호적 등으로 주악을 울리는 가운데 빠오 안에는 십
여 명의 무희들이 춤추고 있었다.
무희들의 복장은 실로 요염했다. 젖가슴과 사타구니의 주요부분만을 가죽끈으로 가
리고 있어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주악에 맞춰 춤추는 무희들의 모습은 노골적이면서 활력에 차있었다. 그녀들은 거대
한 유방을 정신없이 흔들어 대는가 하면, 둔부를 좌우로 실룩대고, 이따금 몸을 뒤
로 활처럼 구부려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구부렸다가 퉁기듯 벌떡 일어서며 정
열적으로 춤을 추어댔다.
빠오의 안쪽.
발등이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여러 겹 깔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넓은 상(床
)이 놓여 있고 각종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상 한
가운데 낙타가 통째로 구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상석에는 두 개의 호피(虎皮)를 씌운 의자가 놓여 있었고 청년과 노인 두 사람이 나
란히 앉아 있었다.
청년은 장천린이었다. 그는 지금 몽고족으로 보이는 노인과 담소하고 있었다.
이곳은 고랍특성(古拉特城)에서 북서쪽으로 십 리 가량 떨어진 초원지대였다.
노인의 이름은 아랍대(阿拉台)였다.
그는 유명한 거상으로 수십만 마리의 말을 기르는 목장 소유주기도 했다. 본래 그가
사는 곳은 막남지방이 아니라 막북의 객이객에 있는 토사도부(土謝圖部)라는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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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따라서 그의 목장도 툴라강 유역에 있었다. 조상 대대로 목장을 경영한 그는 원나라
때에는 군마(軍馬)를 납품하여 큰 돈을 벌기도 했었다.
빠오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먼저 장천린의 뒤에는 운표가 기립하고 있었으며 한쪽에는 백살대 소속의 도객 열
명이 도열하고 있었다. 십여 명의 악사들이 한쪽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체격이
우람한 몽고족 장한들이 수십 명이나 팔짱을 낀 채 우뚝 서있었다.
장천린은 중원에서 말을 사러온 상인 용백군의 신분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그가 막남지방까지 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으나 그것은 자신만이 아는 비밀
이기도 했다.
둥!
북소리가 크게 한 번 울리고 나서 주악이 멈추었다. 그러자 무희들의 춤동작도 멈추
어졌다. 비대한 체격의 아랍대는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이리 와서 귀인께 인사드려라."
아랍대가 호방하게 명령하자 무희들은 일제히 장천린의 발 아래 엎드려 절을 했다.
상반신과 두 손, 이마까지 바닥에 붙이는 큰절이었다.
장천린은 그녀들이 절을 할 때 풍만한 젖가슴의 계곡을 그대로 내려볼 수 있었다.
가까이 보니 여인들의 체격은 한족 여인에 비해 훨씬 컸으며, 몸매 또한 놀랄 만큼
풍요로웠다.
"자, 이제 물러들 가거라."
아랍대가 손을 젓자 무희들은 예! 하고 대답하며 뛰듯이 빠오 밖으로 사라졌다. 그
런데 무희들이 사라지자마자 이번에는 팔장을 끼고 서있던 몽고족 장한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장한들이 서로의 몸을 잡고 번쩍 들어 패대기치거나 다리를 걸어 쓰러뜨
리는 기술은 중원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수법이었다.
윗통을 벗어붙인 근육질의 장한들은 격렬한 격투를 벌였다. 특히 무기를 쓰지 않고
양손과 발만 사용하여 격투를 벌이는 모습은 몽고족 특유의 호방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엽! 하앗"
장한들의 우렁찬 기합성이 빠오를 흔들었다.
장천린은 처음 보는 몽고씨름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이따금 미소를 지었다.
아랍대는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번 용대인과의 상담이 잘되기 바라는 바요. 허허! 하지만 사업은 사업이고 오늘
만은 마음껏 마시고 즐겨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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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아랍대 대인."
장천린은 싱긋이 웃으며 포권해 보였다. 그는 손님으로 몽고족 특유의 융숭한 대접
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아랍대는 뿔잔의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실례지만 용대인께선 결혼은 하시었소?"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혼자입니다."
"허! 거 정말 뜻밖이오."
아랍대는 눈을 크게 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헛! 하기사 용대인 같은 분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좀처럼 찾기 힘들 것이오."
장천린은 그저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랍대는 살이 쪄 축 늘어진 눈꺼풀 사이
로 가느다란 눈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이다. 대체 만 마리나 되는 말을 사서 어디에 쓰려는 것
이오?"
장천린은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우리 피차간에 곤란한 문제는 묻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
업상의 비밀입니다."
"아! 그렇군."
아랍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상인답게 재빨리 화제
를 돌렸다.
"그런데 용대인의 몽고어는 무척 능통하여 현지인에 못지 않소이다. 대체 언제 배운
것이오?"
아랍대는 시종 질문을 했다. 그것은 아직 용백군이란 젊은 상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거래만 하면 그만이라고 해도 그는 호기심을 버리
지 못한 것이었다.
"그저 과거에 필요할까 싶어 좀 배워 두었지요."
장천린은 간단히 대답했다. 실상 몽고어를 배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부금
진으로부터 이곳으로 오기 전 배운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새외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닌 부금진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몽고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 몽고어를
익힐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한데 대인께서는 어찌 성내에 머무르지 않고 굳이 이 초원에 계시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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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대는 코웃음쳤다.
"흥! 나는 고랍특성이란 곳이 마음에 들지 않소. 그곳에는 온통 떠돌이 무사 나부랭
이들이 들끓고 있지 않소? 그 자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는 우매한
작자들이오. 그런 천박한 놈들과 어울리는 게 싫어서요."
아랍대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더욱이 사람을 사고 파는 중개업자 놈들은 더 꼴 보기 싫소이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 자는 같은 장사꾼이면서 무척이나 고고한 척 하는군.'
사실이 그러했다. 아랍대는 수대에 걸쳐 상인 출신이었으나 나름대로 고고한 면이
있었다. 특히나 그는 무사들을 경원했다. 그것은 몽고가 망한 것이 지나치게 무만을
숭상하여 중원 경영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원의 문물(文物)과 풍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 장천린과 처음 만났을
때 중원의 문화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했으며 스스로 외우고 있는 시구(詩句)들을
자랑스럽게 읊어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씨름판에는 장한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격투하고 있었다.
아랍대는 혀를 찼다.
"쯧쯧! 어리석은 놈들, 머리는 쓰지 않고 힘만 쓴다고 되는 줄 안다니까."
그는 손뼉을 딱딱 쳤다.
"여봐라, 율차(律車)를 불러와라!"
장한 한 명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빠오 안으로 한 사나이가 들어섰다. 그를
본 순간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장한은 거인이었다. 십 척에 육박할 정도의 장신에 피부는 구릿빛이었으며, 사각형
의 얼굴에 화등잔처럼 부리부리한 눈, 곰같은 어깨에 호랑이처럼 날렵한 허리를 지
니고 있어 한눈에 보아도 무서운 힘을 지닌 역사(力士)인 듯했다.
"부르셨습니까?"
사나이는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었다고 해도 앉은 키가 보통 사람의 선 키보다도
훨씬 커 보였다.
아랍대는 자랑스러운 듯이 설명했다.
"율차는 내가 가장 아끼는 투사요. 역발산의 힘을 지니고 있지요. 게다가 힘 못지
않게 지혜까지 지닌 놈이오."
그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헛헛, 만약 초패왕 항우가 다시 나타난다 해도 율차에게는 못 당할 것이오."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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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아랍대는 기분이 좋은 듯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뿔잔을 집어들었다.
"율차! 술 한 잔을 내리겠다. 이 술을 먹고 중원에서 오신 귀인을 위해 네 힘을 보
여다오."
"황공하옵니다."
율차는 무릎 꿇은 채 우렁차게 대답했다. 어찌나 음성이 큰지 빠오가 부르르 진동할
정도였다. 그는 두 손으로 뿔잔을 받더니 단숨에 마셨다.
율차가 씨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혼전을 벌이던 장한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그를 빙 둘러쌌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본래 씨름을 벌이던 장한들도 대단한 거한들이었다. 그러나 율차에 비한다면 마치
난쟁이를 보는 듯 왜소해 보이기만 했다. 율차는 마치 난쟁이 나라의 거인인 듯 그
들에게 둘러싸인 채 우뚝 솟아난 철탑처럼 보였다.
둥!
고수(鼓手)가 북을 치자 장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했다. 한꺼번에 오륙 명이
주먹으로 율차를 가격했다. 율차는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퍽! 펑! 펑!
흡사 가죽북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으나 율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장한들의 주
먹은 그의 가슴, 아랫배, 심지어는 얼굴을 후려쳤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에 아랍대는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보시오. 율차의 뼈와 살은 강철보다 튼튼하다오."
이때 비명이 터졌다.
팔짱을 낀 채 장한들에게 맞고만 있던 율차가 갑자기 양손을 뻗은 것이다.
그의 손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장한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붕붕 떠
나가 떨어졌다. 실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율차의 손은 번개처럼
뻗어 장한의 목과 팔을, 어떨 때는 허리춤을 잡아 내던진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 만이 남게 되었다. 두 장한은 겁먹고 비실비실 물러났다.
그러나 율차의 솥뚜껑만한 손이 뻗은 순간 아차할 겨를도 없이 허리를 잡혀 붕 떠올
랐다.
"으으악!"
장한들의 팔다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율차는 각각 한 명씩을 번쩍 치켜든 것
이었다.
"핫핫핫! 멋지다. 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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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대는 통쾌한 듯 대소를 터뜨렸다.
율차는 두 명의 장한도 멀리 던져버렸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사오 장 밖으로 날아
간 장한들은 바닥에 떨어지면서 어디가 부러졌는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자 동료 장한들이 그들을 안고 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율차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쪽에 세워져 있는 어른 팔뚝 굵기의 철봉(鐵棒)을 잡았
다.
"합!"
놀라운 일이었다. 가볍게 기합을 지르며 손을 오므리자 철봉이 마치 엿가락처럼 휘
어져 버린 것이다.
"와아!"
짝짝짝......!
빠오 안에 남아있던 몽고인 장한들이 일제히 함성과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말 훌륭하군요."
장천린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칭찬했다. 아랍대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율차는 힘만 쓰는 역사가 아니외다. 학문도 어느 정도 익혔을 뿐더러 십팔반병기도
모두 다룰 줄 알지요. 그야말로 문무를 겸전한 놈이외다."
그는 흥이 오른 듯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신나게 얘기했다.
"일 년 전에는 찰살극도부(札薩克圖部)에서 한 자루 목봉(木棒)만으로 삼십 명의 낭
인 무사 놈들을 깨끗이 쓸어버린 적도 있소이다. 헛헛헛!"
장천린은 감탄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빠오의 출입구가 열리더니 백살대 소속의 청년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장천린
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용대인, 초광(楚光) 형님께서 도착했습니다."
장천린의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번졌다.
"그래? 들어오라고 일러라."
무사는 즉시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한 명의 거인이 들어오더니 장천린에게 절을
했다.
"무슨 일이냐, 초광?"
초광은 갈색 눈을 굴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원어른과 반어른께서 담오와 함께 고랍특성에 돌아오셨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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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끝난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초광의 음성은 거구답지 않게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계묵은 뭐라 하더냐?"
"원어른께서는 그가 삼십만 냥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장천린의 눈에 이채가 빛났다.
"그래?"
이때, 호피의자에 파묻혀 있던 아랍대는 초광을 바라보며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그
것은 초광이란 사나이의 체구가 오히려 그가 자랑하는 율차보다도 큰 듯했기 때문이
었다.
초광 역시 십 척을 웃도는 신장에 우람한 체격, 피부는 갈색이었고 머리카락은 곱슬
머리였다. 기이한 것은 눈이었는데 갈색을 띠고 있었다. 어딘가 이국적인 생김새가
풍기는 용모였다.
아랍대는 의아한 듯 물었다.
"용대인, 이 장사 분은 누구시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제 수하입니다. 초광이라 하지요."
아랍대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가느다란 눈은 율차와 초광을 번갈아 바라보
고 있었다. 문득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용대인, 한 가지 제의를 할까 하오. 저 초광 장사는 힘깨나 쓸 것 같은데 어떻소?
율차와 한 번 붙여 보는 것이?"
장천린은 난색을 지었다.
"애석하군요. 초광은 투사가 아닙니다."
"그래요?"
아랍대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는 은밀히 율차에게 눈짓을 했다. 율차는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갑자기 초광을 손가락질하며 조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
닌가?
"흐흐흐! 덩치는 큰 놈이 이제 보니 간담은 송사리보다도 못한 것 같구나. 주인 어
른! 소인도 저런 놈과 싸우는 것은 수치일 뿐입니다."
그 말에 초광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도 몽고어를 웬만큼 알고 있으므로 율차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정면으로 던지는 모욕에 그는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그로서는 주인인 장천린이 시키지
않은 일은 감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인 반응은 율차도, 아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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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충분히 눈치챌 만한 것이었다.
"하하! 주인님, 저런 비굴한 놈과는 한 자리에 있는 것조차 부끄럽습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율차는 다시 한 번 고의로 초광의 비위를 긁으며 몸을 돌렸다.
이때 초광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의 갈색 눈은 모욕을 참기 힘든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역사(力
士)의 본성이었다. 다만 그가 나서지 못하는 것은 그의 성품이 워낙 충직하기 때문
이었다. 장천린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는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장천린은 물론 그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다.
그는 슬쩍 아랍대를 바라보았다. 아랍대는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잘됐군. 마침 적절한 기회로군.'
그는 초광을 바라보며 짐짓 내키지 않는 듯 물었다.
"초광, 한 번 해보겠느냐?"
초광의 갈색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주인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겨뤄보겠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해야 한다. 이건 너의 명예 뿐 아니라 나의 명예 또한 달린 일이다."
초광의 눈에서는 투혼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랍대가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핫핫핫! 염려 마시오, 용대인. 율차는 귀빈의 수하를 다치게 할 정도로 무식한 놈
은 아니외다. 그저 적당히 여흥 삼아 놀아줄 것이외다."
장천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관계치 않습니다. 한데 저는 이번 시합을 그냥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
이 듭니다."
"......?"
아랍대는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렇군! 이 좋은 기회를 어찌 그냥 넘길 수 있소? 우리 내기를 합시다."
"흥미 있는 일입니다."
아랍대는 손가락 한 개를 불쑥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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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 일만 냥이면 어떻소? 용대인."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그건 너무 작습니다."
"그럼?"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그가 펼친 것은 손가락 다섯 개였다.
"오만 냥이라? 헛헛! 그거 좋소......."
아랍대는 입을 다물었다. 장천린이 고개를 흔들었던 것이다.
"오십만 냥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대인께 어울리는 액수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아랍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십만 냥?'
오십만 냥이라면 아무리 거부인 그라도 결코 무시할 액수가 아니다. 더구나 단순한
여흥에 그런 거금을 건다는 것은 평소의 그의 성품으로 볼 때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
다.
아랍대는 율차를 바라보았다. 율차는 어느 새 돌아서서 주인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
있었다. 비로소 아랍대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좋소, 좋아! 내 오십만 냥을 걸겠소."
아랍대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다 율차가 지면 내 첩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루미로 하여금 용대인을 하룻밤
모시게 하리다."
실로 대단한 인심(?)이었다. 타루미는 그가 보물단지처럼 아끼는 첩이었던 것이다.
아랍대는 율차가 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않았기에 이런 호언장담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는가?
어수룩하고 순진해 보이기만한 초광이란 사나이의 내력을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만
일 알았다면 결코 그런 장담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빠오 한가운데 두 거인이 마주 섰다.
그들이 대치하자 넓은 빠오 안이 비좁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율차는 퉁방울 눈을
부릅뜨며 조소를 흘렸다.
"흐흐, 살살 다루어주마. 애송이."
초광은 무표정했다. 갈색 눈으로 상대를 보는 것이 마치 돌덩이를 보는 듯 무감동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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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었다. 장내의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두 거인의 대결에 시선을 집중했다.
모두들 기대와 흥분에 찬 표정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어 갔다.
보고 있노라니 점차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특히 아랍대는 술잔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완전히 매료된 모습이었다.
"간다, 애송이 놈!"
츳츳!
율차의 거구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바닥을 차며 접근한 그는 초광의 턱을
오른손으로 갈겼다. 주먹 뻗어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릴 정도였다.
초광은 슬쩍 몸을 옆으로 피했다. 주먹이 귓전을 스쳐갔다.
율차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흥, 제법이구나."
그는 빠르게 두 걸음 다가가며 이번에는 양손으로 동시에 공격했다.
윙! 윙!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경풍이 일었다. 그 주먹에 한 대라도 맞는다면
설사 장백산의 호랑이라도 복부가 터져버릴 듯했다.
초광은 침착하기만 했다. 그는 몇 차례의 주먹질을 피해냈다. 그의 동작은 빠르지
않았다. 육안으로 충분히 느낄 정도로 느릿느릿 했는데도 간발의 차이로 율차의 주
먹은 모두 빗나갔다.
문득 그는 양다리를 넓게 벌리더니 손바닥으로 율차의 주먹을 막았다.
두 거인의 양손이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마주쳤다. 그들은 즉각 손가락을 구부려 상
대의 손을 깍지꼈다. 율차의 얼굴에 가소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흐! 네놈이 힘 대결 하자는 거냐?'
그것은 가장 단순한 대결 방식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확실한 힘의 대결이기도 했
다. 마침내 두 거인은 힘을 쓰기 시작했다.
율차의 우람한 상반신이 부풀어오르며 심줄과 근육이 치솟았다. 순식간에 체구가 배
나 커진 느낌이었다. 그는 힘으로 초광을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초광은 두
발로 지면을 디딘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율차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는 철봉을 엿가락처럼 휘어버리는 괴력을 갖고 있
었다.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자신의 힘으로 못할 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아무리 힘을 주어 밀어도 마치 상대방은 철탑인 양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이놈이?'
율차의 관자놀이에 불거진 심줄이 터질 듯이 부풀어올랐다. 그때였다. 초광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것은 아주 순진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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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네가 아무리 그래도... 으윽!'
율차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손가락에 고통을 느낀 것이었다. 상대의 힘에 손목이 서서히 뒤로 꺾여진 것
이었다.
"끄으......."
그는 뒤로 밀려갔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적어도 아랍대에게는 그랬다.
마침내 율차는 연속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완전한 힘의 열세가 증명되는 순간이
었다.
'저럴 수가!'
아랍대는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몇 번 깜박였다.
한편 그와는 대조적으로 장천린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초광이로군.'
"찻!"
율차는 돌연 초광의 다리를 공격했다. 그의 육중한 다리가 초광의 하반신을 걷어찬
것이다.
초광은 다리를 슬쩍 들어 피하며 깍지 낀 상태로 율차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율차는 힘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초광은 합! 하고 기합을 발하며 율차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율차의 몸은 붕 뜨더니 오 장 밖으로 날아가 큰 대
자로 뻗어버렸다.
"컥!"
그는 떨어진 충격으로 비명을 토했다. 그 광경에 아랍대를 비롯한 몽고 장한들은 모
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율차는 잠시 버둥대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한쪽에 세워져
있는 창을 덥석 잡더니 살기가 등등해져서 달려왔다.
"이놈! 죽인다!"
슈욱!
맨손과 무기는 다르다. 거기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율차의 휘두르는 창 공격은
악랄무비했다. 더구나 엄청난 체격과 신력에서 우러나는 움직임은 태산이라도 갈기
갈기 후빌 듯했다.
"......."
초광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는 이리저리 피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창이 몸을
스칠 정도로 위기를 맞이했다.
"초광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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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찬 외침과 함께 백살대 소속의 무사 하나가 자신의 칼을 던져 주었다. 초광은
재빨리 칼을 잡더니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허공으로 뻗었
다. 왼손은 가슴 앞에서 비스듬히 세우고 있었다.
운표는 그 자세를 보고 안색이 변해 내심 부르짖었다.
'저건... 풍뢰도법(風雷刀法)의 뇌전단홍!'
그러나 곧 회의의 빛을 떠올렸다.
'그런데 저 왼손의 자세는......?'
그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설마 초형이 밀종(密宗)의 고미타사(古彌陀寺)에서 전해지는 대수인(大手印)을 익
혔단 말인가?'
"찻!"
율차가 창을 선풍처럼 회전하며 공격했다. 가히 수백 개의 창이 찔러가는 듯 현란하
고도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초광의 칼이 뒤늦게 움직였다. 칼이 허공에서 비스듬히 떨어지는 순간 은은한 뇌성(
雷聲)이 울렸다. 동시에 그의 좌수도 움직였다.
카캉!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더니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중인들은 볼 수 있었다. 율차의 창이 두 동강나 날아가는 것을!
어디 그 뿐인가? 초광의 칼이 율차의 머리를 자르고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칼이 지나가자 율차의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 허공에 비산(飛散)했다. 동시에 그의
가슴에 초광의 손바닥이 붙었다 떨어지자 율차의 몸이 붕 뜨더니 오륙 장이나 날아
가 빠오의 벽에 떨어졌다.
"율차!"
아랍대는 벌떡 일어서며 부르짖었다. 그의 안색은 허옇게 변해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율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몽고 장한들이 달려가 살펴보니 숨은 붙어
있었다. 충격으로 기절한 것이었다. 그의 근육질로 뭉쳐진 가슴팍에는 은은한 붉은
색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이럴 수가......."
아랍대는 허탈한 듯 자리에 주저 않았다.
초광은 칼을 백살대의 도객에게 돌려준 후 장천린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다행히 주인님의 명예를 욕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수고했다, 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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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수 잔에 술을 가득 따른 후 건네주었다.
"자, 승리의 술이다."
초광은 두 손으로 술잔을 받은 후 단숨에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그는 몸을 일으키
며 말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빠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몽고인들
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장내가 수습되었다. 정신을 잃은 율차를 여러 명의 몽고인들이 팔다리를 하나씩 들
고 밖으로 끌어낸 것이었다.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
다.
아랍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졌소이다, 용대인. 힘과 기, 모두에서 말이오."
그는 부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용대인은 정말 훌륭한 수하를 두었소이다. 약속대로 내기에 졌으니 오십만 냥을 드
리겠소이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율차도 훌륭한 역사입니다. 다만 초광을 너무 얕보았기 때문에 당했을 뿐입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오십만 냥은 필요 없습니다."
아랍대는 놀라 반문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찰합이부족(察哈爾部族)의 전사이자 영웅인 임단한
(林丹汗)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
아랍대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설마 장천린이 그런 요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임단한, 그가 대체 누구이기에?
장천린은 고랍특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운표와 백살대의 무사 사십 명은 장천린을 호위한 채 아랍대의 빠오를 뒤로 하고 출
발했다. 초광은 이미 하루 전에 성내로 떠났다.
운표는 장천린의 옆에서 말을 몰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용대인,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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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초광 형이 익힌 뇌전단홍은 용대인께서 가르쳐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데
초형이 왼손으로 시전한 무공은 제가 보기에는 대수인(大手印) 같던데 어떻습니까?"
"맞다."
운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초형이 어떻게 대수인을 안단 말입니까? 밀종의 무학은 타인에게 전하지 않지 않습
니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본래 초광은 밀석아국 출신의 노예였지. 그는 밀석아국에서 제일 가는 투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실수로 주인을 다치게 하는 바람에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었네.
한 서역상인이 그를 사서 중원으로 건너왔는데 그때 내가 사들이게 되었지."
"그래서요?"
운표는 흥미롭다는 듯이 바짝 다가왔다. 그는 줄곧 초광이 장천린의 시중을 드는 것
을 보고 내내 궁금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놀라운 무공을 보고는 더욱 관심을 갖
게 되었다.
"초광은 서역상인과 함께 천산북로(天山北路)를 넘어오던 중 서장 고미타사(古彌陀
寺)의 늙은 라마승이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지."
"......."
"겉보기에는 사나워 보이지만 초광은 성품이 온순하고 인정이 많은 친구네. 그는 자
신이 노예의 신분이면서도 노예상인에게 라마승을 구해줄 것을 간청하게 되었지. 결
국 그의 청이 받아 들여져서 라마승을 돌보게 되었지. 그러나 라마승은 워낙 나이가
든 데다 숙환이 있어 도중에 죽고 말았네. 그 라마승은 죽기 전 은혜에 보답한다면
서 자신의 무공을 모두 물려주었지."
운표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대수인은 밀종의 비전무공입니다. 제가 알기로 대수인을 아는 사람은 고미타사에서
도 오직 한 명 뿐입니다."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미타사의 기승 팔사파(八思巴)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그 라마승이 바로 팔사파일세."
"아!"
운표는 탄성을 발했다.
그는 새삼 초광에 대해서 재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광은 거구에 어울리지 않
을 정도로 행동이 민첩할 뿐더러 영민하기까지 했다. 장천린을 수행하면서 온갖 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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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무리 복잡한 일도 척척 처리해냈다. 따라서 운표
는 그가 집사(執事)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초광이 그렇게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운표에게 하나의 충격으
로 전해진 것이었다.
어느덧 고랍특성의 전경이 황원 저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천린은 고삐를 툭툭치
며 말했다.
"이제 다 왔네, 운표."
융고숙잔(融古宿棧)은 고랍특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객잔이었다.
"담오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비록 전력으로 겨뤄보지는 않았지만 저와 동
수(同手)라고 봅니다."
반송의 말에 장천린은 생각에 잠겼다. 융고숙잔에 돌아오자마자 담오와 원계묵의 보
고를 받은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원계묵을 바라보았다.
원계묵도 동감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 자의 도법은 신랄하고 잔인했습니다. 요북의 사도(死
刀)란 명호는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원계묵과 반송은 담오와 만났던 일을 모두 보고했다. 두 사람, 특히 그와 도법을 겨
루었던 반송은 입에 침을 튀겨가며 담오를 칭찬하고 있었다. 사실 반송은 그와의 싸
움에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백합(百合)을 겨루었지만 피차 막상막하였다. 담오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
이 아니었으므로 반송은 백합을 겨룬 후 싸움을 그만 두었다. 그러나 같은 도를 쓰
는 입장에서 담오의 파괴적인 도법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장천린은 염두를 굴렸다.
'뜻밖이군. 반송은 천월도법을 익혔다. 그의 실력은 천하에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
인데 그와 맞수라면 정말 대단한 실력이다.'
이때 원계묵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건 추측입니다만, 담오의 도법을 보면서 생각나는 도법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흑사도법(黑 刀法)입니다."
"......!"
장천린은 안색이 변했다.
천하오대도법 중에서 신랄함에 있어 으뜸으로 치는 도법이 있다. 그것은 대막(大漠)
의 흑사도법이었다. 그런데 담오의 도법이 흑사도법이라니!
장천린은 시선을 돌려 물었다.
"반송,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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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도 원소제와 같은 생각입니다. 삼십만 냥이란 엄청난 거액이긴 하지만 충분히 투
자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단, 성격상에 있어서 조금 문제는 있습니다."
반송은 수염을 꼬며 덧붙였다.
"너무 음울합니다. 게다가 자존심이 무척 강합니다. 말하자면 좀 건방진 놈입니다."
장천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능력이 있다면 성격은 언제라도 바꿀 수 있는 법이네. 설사 바꾸지 못한다 해도 일
에 지장만 없으면 관계할 필요가 없지."
그는 원계묵을 향해 말했다.
"그를 불러오너라, 계묵."
원계묵은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담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들어온 그는 간단히 칼을 늘어뜨려 예를 표했을 뿐 음울한 눈으로 장천린을
응시하기만 했다.
솔직히 담오는 궁금하기는 했다. 삼십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 자신을 사려는 인
물이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
그는 장천린을 보는 순간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나이가 많은 사람일 줄 알았
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생각밖으로 젊고 준수한 청년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
하고 상대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본래 그는 돈 많은 자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 아랑과
의 사이에 있었던 쓰라린 추억 탓이기도 했다. 그래서 장천린을 대면하고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어차피 상대는 자신을 돈으로 사려는 인물이 아닌가.
"차를 드시구려, 담무사."
장천린은 부드럽게 권유했다. 담오는 딱딱하게 받았다.
"나는 차를 좋아하지 않소."
사실이 그러했다. 담오는 평생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가 생각하기에 차는 사치품에
불과했다. 평소에 차나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 종족에 대해 그는 혐오감을 느끼고 있
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확실히 호
사스러웠다. 고랍특성에서도 가장 큰 객점인 융고숙잔 전체를 빌렸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방을 숙소로 정해놓고 있었다.
지금 그는 백호피로 감싼 의자에 앉아 있었고 앞에 놓인 탁자도 자단목으로 된 고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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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이었으며 찻잔 또한 옥자기로 된 최상급이었다.
장천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요북이 고향이라고요?"
"위록지방입니다."
담오의 말은 간단했다. 마치 긴 말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장천린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시선은 찻잔에 머물러 있었다.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던 분들이오?"
담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평소 말을 안 하면 몰라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성품이었다.
"아버님은 농사꾼이고 어머님은 가희(歌姬:노래하는 여인)였소."
"가희라."
장천린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에 머물러 있다.
순간 담오는 가슴 속에서 불덩이가 불끈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태도가
안하무인이란 느낌이 든 것이다.
"첫 살인은 언제였소?"
장천린의 세 번째 질문에 담오는 두 눈을 번득였다.
"아홉 살 때입니다."
"아홉 살?"
비로소 장천린은 그를 응시했다. 무척 흥미 있다는 표정이었다.
"대상은? 그리고 이유는 무엇이었소?"
담오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 참으며 대답했다.
"마을의 건달 놈이었습니다. 놈이 어머님을 희롱했기에 곡괭이로 목을 찍어 죽였습
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을을 떠났소?"
"그렇습니다."
"그럼 칼을 잡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소?"
"열 살 때입니다."
"누구에게 사사 받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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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오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는 날카롭게 상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것도 대답해야 하오?"
장천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담무사는 평생 계약을 원하지 않았소? 평생 데리고 있을 인물이라면 최소한 그 사
람의 신상에 대해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 주인의 권리가 아니겠소?"
담오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요북 흑수령(黑手嶺)의 수좌였던 사사문(斯斯文) 공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흑사도법을 말이오?"
담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사나운 눈빛을 번득이더니 시인했다.
"그렇소."
장천린은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십이 년 전쯤 사사문이 늙어 죽은 후 흑수령에서 분열이 일어나 혈겁
이 벌어진 적이 있었소. 흑수령 고수들 중 몇 명만을 제외하고는 수십 명이 도륙되
는 참사였었소. 그것이 담무사와 어떤 관계라도 있는지 궁금하구려."
"......!"
담오의 눈썹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내가 벌였던 일이오."
장천린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물었다.
"이유는?"
"놈들은 사사문 어른의 진전을 이어받은 날 시기하여 제거하려 했소. 그래서 내가
먼저 놈들을 친 것이외다."
"후후!"
장천린은 나직이 웃었다. 그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담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
이 엄숙하게 바뀌었다.
"잘 알았소. 한데 그대는 자신의 몸값이 충분히 삼십만 냥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소?
담오는 장천린이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상하게도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런 느낌은 평생 처음이었다. 아무리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라도 그는 추호도 두려
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상대의 눈빛은 분명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평생을 죽음 속에서 살아온 내가 일개 상인에게 압도되다니... 말도 안 된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정시했
다. 그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 마치 파충류의 그 속을 알 길이 없는 눈알처럼
기이한 안광을 번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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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에서 비릿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일 내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한낱 삼십만 냥 따위에 인생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오."
장천린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문 앞에 서있던 원계묵은 가슴이 철렁했다. 평소
부드럽기만 하던 장천린이 아니던가. 그는 장천린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일 각쯤 흘렀을까? 장천린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
러나왔다.
"잘 들으시오, 담무사."
"......."
"무사에게 있어 병기와 신념은 곧 자신의 생명이요, 자존심인 것이오. 만일 타인이
그것을 모욕하면 무사는 참을 수가 없을 것이오. 마찬가지로 상인에게는 돈이 곧 인
생의 목표요, 길이오. 그대는 조금 전 삼십만 냥이란 돈을 모독했소. 칼만 아는 그
대에게는 돈이란 보잘것없는 것일지도 모르오. 하나 당신이 얕보는 삼십만 냥이란
돈을 이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아시오?"
담오는 흠칫했다. 상대방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이 느껴졌다. 그것은 무서울 정
도의 집념과 확신, 그리고 이상의 불꽃이었다.
장천린의 음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수천 명의 가난한 백성들이 그 돈이면 일생을 아무런 걱정없이 풍요롭게 보낼 수가
있소. 하지만 당신의 칼은 스스로에게만 만족감을 줄 뿐, 타인에게는 그 어떤 도움
도 줄 수가 없소. 아니, 오히려 해만 끼칠 뿐이오."
"......!"
담오의 눈썹이 경련했다. 그의 눈에서 분노의 광채가 일어났다. 모욕감을 느낀 것이
다. 대저 무사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생명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는 청년상인이 지나치게 자존심을 건드린다고 느꼈다. 은연중 칼을 잡은 손에 힘
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상대방을 양단 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이때 원계묵이 소리없이 이동했다. 그는 무사의 본능으로 담오가 살기를 띠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여차하면 장도를 날릴 자세를 취했다.
이때 장천린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담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삼십만 냥의 은자와 그대의 칼 중 어느 것이 더
이 세상에 필요한 것 같은가?"
그는 말투를 바꾸었다. 존칭에서 하대로.
담오는 장천린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살기가 꽉 차 있었다.
'베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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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파충류 같은 눈알이 점점 더 이상한 빛을 내며 번들거렸다. 장천린은 그의 심
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했다.
"돈이란 쓰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돈 그 자체
는 신성한 것이다. 결코 모욕될 수 없는 것이다. 솔직히 현재 그대의 몸값은 삼십만
냥의 가치가 될 수 없다."
장천린의 말은 칼로 자르듯 단호했다.
키릭!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담오의 녹슨 칼이 일부 뽑힌 것이다.
일촉즉발. 하시라도 장천린의 목을 날릴 기세였다.
이때 원계묵이 노갈을 터뜨렸다.
"담오! 허튼 짓 마라. 그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두 동강이가 날 것이다!"
장천린은 힐끗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계묵, 자네는 참견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그는 불타는 듯한 눈으로 담오를 정시하며 말했다.
"담오, 그대가 일생을 칼에 걸었다면 어디 그 칼로 날 베어 보아라."
"......!"
담오의 눈에서 불똥이 퉁겼다. 그는 장천린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
서 부딪쳤다. 장천린의 눈은 타는 듯했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여전히 그 심부(深部)
는 호수처럼 고요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보였다.
담오는 그 눈에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상
대방이 점점 더 커 보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거산(巨山)처럼 청년상인의 모습이 부풀어 가는 것 같았
다.
"으으."
담오는 칼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압도되고 말았다. 칼을 잡은 손마디
가 부들부들 떨렸다.
'거물이다. 나 같은 낭인이 상대할 인물이 아니다.'
담오의 안색이 변했다. 몇 차례나 변하던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그것은 상
대방에 대한 패배감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수치와 모멸감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껏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베고 싶으면 베었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건 행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도 스스로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칼을 잡은 손에 스르르 힘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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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가벼운 소리와 함께 칼은 칼집으로 들어갔고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그는 몸을 돌렸
다. 그때 장천린의 음성이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왜 그냥 가는가?"
"......."
담오는 대꾸하지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옆에 서있던 원계묵은 순순히 길을 열어 주었다. 담오는 문을 열었다. 다시 귓전
에 장천린의 음성이 들어왔다.
"한 인간이 일생을 걸고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숭고한 것이다
. 담오, 나는 그대의 칼을 인정하겠다. 하면 그대는 날 위해 한 번 인생을 걸어보지
않겠는가?"
담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한참 후에야 등을 돌린 채로 물
었다.
"돈을 모으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소?"
장천린은 바로 대답했다.
"치세(治世)다."
'치세!'
담오의 내부를 뜨거운 화살이 관통하는 듯했다. 그는 빙글 몸을 돌렸다. 장천린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담오, 나의 수족이 되어다오."
그의 간단한 말에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과 진실이 깃들어 있었다.
담오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영상이 떠올랐다.
십수 년 전, 아름답고 청순하기만 했던 아랑의 모습이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랑이
돈에 미쳐 자신과의 삶과 여인으로서의 순결마저 포기하고 더러운 세계에 발을 들
여놓지 않았던가.
오늘날 아랑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삶에 찌들 대로 찌든 추한 모습으로... 주점에서 사내들의 농과 손장난에 허리를 비
틀며 그들이 찔러주는 동전을 움켜쥔 채 웃음을 파는 싸구려 창녀.......
담오의 눈자위가 경련했다. 그는 장천린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과 아랑, 모두 돈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어떤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랑과는 다르다. 아니, 여타의 상인들과는 틀린 그 무엇이 있다
. 그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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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황금(黃金).
평소 돈을 경멸한 담오였다.
그는 심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알아보고 싶었다. 이제껏 돈에 대한 그의
비뚤어졌던 판단과 생각을.
자신을 압도하고 있는 젊은 상인을 통해 진정한 돈의 의미를 한 번 알아보고 싶었다
. 그런 생각은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일으켰다. 찾고 싶어졌다. 다시 한 번 자신을
찾고 싶어졌다.
오직 칼 한 자루 뿐.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목표를 잃어버린 자신의 인생을 되찾고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인물이 잃어버린 인생의 의미를 되찾아 줄 것만 같
다는 생각이 담오의 뇌리를 강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담오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는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굴복한다고 여기지 말자! 아니 굴복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사십 가까이 살아오면
서 헤매기만 했던 인생을 되찾고 싶다. 이 사람, 아니 이 분을 통해서!'
입술이 깨물려졌다.
피. 핏방울이 찍어누른 입술에서 한 방울 진하게 솟아올랐다.
그는 자신의 손에서 한 번도 떠나보내지 않았던 애도(愛刀)를 두 손으로 받쳐 장천
린에게 올렸다.
"절 받아 주시겠습니까?"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그는 담오의 태도에서 자신의 생각을 약간 수정했다.
'이제 보니 무공만 강한 망나니가 아니다. 능히 용이 될 수도 있는 자다.'
그는 칼을 받아 들였다.
"환영한다, 담오."
문 옆에서 원계묵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히죽 웃는 모습이 보였다. 비로소 그는
장도를 잡은 손에 힘을 빼고 있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
반송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구레나룻이 잔뜩 덮인 얼굴에 불그스레하니 화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천린은 책을 읽다 그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군?"
"핫핫! 기분이 유쾌한데 그럼 술을 마셔야 되지 않습니까? 용대인."
"흠, 누구하고 마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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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오, 그 녀석하고 마셨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핫핫! 그렇습니다. 멋진 놈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 건방진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
지만 같이 일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장천린은 미소 지었다.
"잘됐군."
"앞으로 담오와 나 반송은 좋은 짝이 될 겁니다."
장천린은 화제를 돌렸다.
"만사통방에서 합향거가 보내온 낭인무사들은 점검해 보았나?"
"물론입니다."
"어떻던가?"
반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 모두 고랍특성의 낭인시
장에서는 꽤나 알려진 놈들입니다. 모두 일급이니 한 몫씩 해낼 것 같습니다."
"흠, 그럼 내일 아침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등급에 따라 계약금을 정해서 서류를
작성하게."
반송은 히죽 웃었다.
"맡겨 주십시오.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자넬 믿겠네."
"아무렴입쇼."
반송은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물러났다. 그런데 문을 열다 말고 돌아서 장천린을 바
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몇 번을 생각해 보았는데 말입니다. 용대인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핫핫핫!"
반송은 유쾌한 대소를 터뜨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장천린은 피식 웃었다.
'실없는 친구로군.'
그는 다시 읽던 책을 펼쳤다. 그때 밖에서부터 반송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조충! 너 당장 애들 데리고 따라와라. 내가 술 한 잔 사겠다. 황계! 너는 가서
원노제와 그 꼬마 놈을 데리고 와라."
그러자 누군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야, 임마. 꼬마가 누구긴 누구야? 그 계집애 같은 소진이지. 안 오면 내가 그냥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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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다고 말해라. 핫핫! 볼기에 불이 나도록 때려 준다고 말이다."
밖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소란스런 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방 안에서 장천린은 쓴웃
음을 짓고 있었다.
'정말 다혈질이야. 처음에는 꽤나 속이 깊다고 여겼는데 요즘 갈수록 정이 가는 인
물이야.'
장천린은 그 동안 반송에 대해 여러 가지로 평가해 보았다.
해남도를 떠난 이후 반송은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
더구나 백살대와도 뜻이 통하는지 자연스럽게 융화하고 있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무
척 좋아진 느낌이었다.
'담오와는 마음이 맞는 모양인데 정말 다행이로군.'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