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칼 끝에 지고 제2부 풍운만장편 제1권
▣등장인물
◈장천린(蔣天麟) - 강남 무창의 동정호반에서 신선루를 경영하던 젊은 상인으로 정
인 취옥교의 의문의 배신과 신산 제갈사의 계략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의 나락에서 되살아나 용백군이라는 전도유망한 청년상인으로의 새 인생을 시
작하게 되는데... 사랑을 되찾고 누르하치의 음모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그의 앞날은
과연.......
◈취옥교(翠玉嬌) - 장천린의 정인으로 신선루를 운영하던 절세의 미인. 천린으로부
터 청혼을 받은 꿈같은 날 어둡기만 한 과거로부터의 부름이 있게 된다. 사랑을 위
해 배신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운명... 조화성의 명에 따라 금백만을 살
해하고 천린의 곁을 떠나는데.......
◈원계묵(元桂默) - 마도(魔刀)라 불리워지는 당대 도법의 일인자. 조화성의 살수
모용초에 의해 연인 손미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부인 만승금도 도담후가 살해당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백살대를 조직하여 필살의 의지를 불태우던 중 용백군이라는 젊은
상인을 만나게 되는데.......
◈모용초 - 조화성의 살수이자 마교십삼사의 일원. 절세의 미남자로 여인을 유혹하
여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무정도(無情刀)라는 별호만큼이나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여인에 대한 유별난 증오심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으니.......
◈부금진(符錦眞) - 피리를 즐겨 부는 미소년으로 약칭으로 소진(小眞)이라고도 불
리워진다. 영물에 가까운 흰 앵무새 백아를 데리고 다니며 비도술 및 의술에 일가를
이루었다. 신비에 싸인 인물. 그의 과거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위제(檀偉帝) -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으로 형부도독(刑府都督)이자 동창의
대영반. 청렴강직하며 흉악무도한 범인을 체포하는데 달인의 솜씨를 지니고 있으며
미궁(迷宮)에 빠진 사건을 처리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
◈반송(盤松) - 해적선 검은 바람에 의해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백군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화포인 진천뢰를 제작할 수 있는 인물로서 천월도법의 달인.
◈담오(覃吾) - 북방의 고랍특성 낭인시장에서 몸값 삼십만 냥에 자신의 인생을 내
놓은 무사.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아내 아랑을 저주한다. 용백군과의 조우 이후 돈과
세상을 함께 저주하는 그의 인생이 뒤바뀐다.
◈태진왕(太眞王) 주익적(朱翊 ) - 신종(神宗) 만력제(萬歷帝)의 이복동생으로서
어지러운 황실을 구하기 위해 뜻있는 충신들을 규합하고 변방을 강화하였다. 황실의
특무기관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의 실세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연연(白娟娟) - 태진왕을 마음 속 깊이 사모하고 있는 지혜로운 여인. 환관의
음모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충신 백시열(白時悅)의 딸로 태진왕에 의해 목숨을
구함 받고 태진궁의 시비로 살아간다.
◈사문도(射文島) - 생사집혼(生死執魂)이라는 별호를 가질 정도로 엄청난 무공의
바로북 99 3
소유자. 친부모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비극의 사생아로서 조화성을 멸하고 염무를 죽
여야만 비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존재. 철저히 비밀
에 가려진 사문도와 조화성과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황보설연(皇甫雪燕) - 개봉부 지부대인(支府大人) 황보인(皇甫仁)의 외동딸. 탐관
오리인 아비와는 달리 순수한 정열을 가진 미인. 운명적인 만남 이후 장천린의 일행
이 개봉부를 떠나는 날, 그녀는 일생일대의 운명을 건 결단을 단행하는데…….
◈동방옥(東方玉) - 해남도 동방사성의 여동생. 황금에 눈이 먼 오라버니의 속임수
에 빠져 장천린을 함정에 몰아넣게 되지만, 여인의 사랑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게 마
련이다. 무공을 익혔으며 비파의 달인으로서 천린의 여인이 된다.
4 바로북 99
제1장 미녀 타루미
장천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일쯤 고랍특성을 떠나야겠다. 이곳에서의 목적은 모두 달성한 셈이니.'
그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늘상 책을 읽는다. 그것은 자
연스럽게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다.
다만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책의 종류였다. 늘 보던 문학 방면의 책에서 근래
들어서는 천문지리(天文地理)나 잡학(雜學)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를 넓히게 된 것이
었다.
특히 병서(兵書)를 주로 탐독했다. 병서를 읽으며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관찰
력과 판단력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사람을 쓰는 방법 면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천병팔법(天兵八法)이란 제목의 기문병서(奇門兵書)였다.
그가 한참 독서에 몰두하고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원계묵이었다.
"어서 오너라. 계묵."
원계묵은 매우 유쾌한 표정이었다.
"하하! 반형이 형님께 뭐라 이야기했습니까?"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조금 시끄럽더군."
원계묵도 혀를 내둘렀다.
"아주 혼났습니다. 밤을 새면서 같이 술 마시자고 잡아끄는데 거절하느라 진땀을 흘
렸으니까요."
"자넨 왜 따라가지 않았나?"
원계묵은 나직이 웃었다.
"소진과 운표는 물론 초광도 끌려갔습니다. 안 따라오면 그냥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데야 모두들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마저 가면 형님은 어떡합니까?"
"하하하......!"
장천린은 대소했다.
"아주 대단합니다. 요즘 와서는 정말이지 한두 번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진도 술
고래지만 반형에게는 쩔쩔 매더군요."
바로북 99 5
원계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북경에 있는 단도독이나 와야 겨우 대작을 할까요?"
"그 정도란 말인가?"
원계묵은 문득 생각난 듯 무릎을 쳤다.
"참, 형님을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아랍대의 부하가 방금 전 선물을 보내왔
습니다."
"선물?"
장천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원계묵은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말 기막힌 선물이더군요."
"......?"
"여인이었습니다."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네, 그것도 아주 대단한 미인 말입니다."
장천린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차!'
비로소 그는 원인을 깨달았다.
'아랍대가 내기에 진 것 때문에 자신의 첩을 보낸 모양이구나.'
원계묵은 싱긋 웃었다.
"형님, 아랍대의 배려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이곳에서는 그런 것을 거절하면 모욕으
로 간주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 미녀는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원계묵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예로부터 영웅은 호색이란 말이 있습니다. 형님 역시 영웅이 아닙니까?"
장천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원계묵은 그런 장천린을 바라보며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그는 음성을 낮추더니 은밀히(?) 말했다.
"북경의 동방옥 소저께는 비밀을 엄수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장천린은 헛기침을 했다.
"험, 계묵."
"네?"
장천린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아랍대가 보낸 미녀는 내 얼굴을 모른다. 그러니 자네가 대신......."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원계묵은 급히 손을 흔들었다.
6 바로북 99
"그러지 마십시오. 소제는 대역은 싫습니다. 사나이 대장부가 어찌 치사하게 대역을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장천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럼 그 미녀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하하하하핫!"
장천린은 그만 떫은 감 씹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임단한의 일을 생각하느라고 아랍대의 말을 깜박 잊었으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시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오."
방안에 미녀가 들어섰다.
뜻밖에도 그녀는 금발벽안(金髮碧眼)의 이국여인이었다. 중원의 여인보다 훨씬 큰
키를 지녔으며 늘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피부는 어찌나 흰지 투명해 보일 정도
였다. 나이는 어림잡아 십 팔구 세쯤 되어 보였다.
장천린은 생각지도 않게 젊은 벽안미녀를 대하자 약간 당황했다. 육순에 접어든 아
랍대의 첩이니 적어도 삼십대는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벽안미녀는 큰절을 올렸다.
"타루미( 鏤美)가 용대인을 뵈옵니다."
장천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이 정도면 아랍대가 정말 아끼는 애첩일 것이다.'
미녀의 시원스럽게 큰 눈동자는 초록의 바다였으며, 높게 치솟아 있으면서도 늘씬한
콧날과 육감적인 붉은 입술은 인세에서 보기 드문 우물(尤物)이라 칭할 만 했다.
'농담처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런 애첩을 보내다니, 아랍대는 실로 괴팍하구나
.'
장천린은 타루미가 아직 무릎꿇고 있는 것을 보고 담담히 말했다.
"일어서라."
"감사하옵니다."
타루미가 일어섰다. 여인으로서는 드물 정도로 훤칠한 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균형 잡힌 몸매는 가히 일품이었다.
장천린은 타루미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어디 출신인가?"
타루미는 꽃잎 같은 입술을 열었다.
"아국(俄國:러시아) 출신이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7 바로북 99
"아랍대 대인이 뭐라고 하면서 보내더냐?"
타루미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번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수줍은 듯 떠듬떠듬 말
했다.
"대인께서는, 용대인을 오늘밤 반드시 정성껏 모시라고... 그리고 돌아와서 보고하
라고. 만일 하나라도 실수하거나 대인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노예로 팔아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끝말은 두려움으로 떨리기까지 했다.
장천린은 어이가 없었다.
'위협까지 하다니. 정말 아랍대 답구나.'
그는 방금 전 원계묵이 한 말을 떠올렸다. 아니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상행을 하면
서 여러 지방을 두루 다녀본 그는 지방마다 특별한 풍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어떤 지방에서는 자신의 아내를 귀빈에게 하룻밤 빌려주는 것이 예의였으며, 그것
을 거절하면 주인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곳도 있었다.
만일 오늘밤 거절한다면 타루미는 정말 노예상인에게 팔려갈 게 뻔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의 말에 타루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비록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날지라도 널 잊지 않겠다."
장천린의 부드러운 말에 타루미는 푸른 눈을 들어 마주 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장천
린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
그녀는 눈이 부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껏 그녀는 낯선 사내에게 선물로 바쳐진다는데 대한 두려움으로 온몸이 긴장되
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은 너무도 젊고 준수한 인물이 아닌가?
그녀에게도 미(美)를 사랑하는 본능이 있었다. 장천린을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아름다운 분이야. 이런 분과의 밤이라면!'
그녀의 육체 깊은 곳으로부터 자발적인 욕망의 불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초록색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타루미는 아국에서 태어난 몸이었으나 가난했기에 어릴 적부터 돈에 팔려 몽고로 흘
러들어 오게 되었다. 그녀는 몽고에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아랍대의 눈에 띄어 첩
이 되었다.
그녀는 많은 사내들을 겪었다. 그녀가 아는 사내들이란 모두가 한결 같았다. 그들은
오직 욕정만을 알 뿐이었다. 타루미는 그들에 의해 놀이기구가 되었으나 정작 스스
로는 사랑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었다.
8 바로북 99
그런데 지금, 눈앞의 준수한 청년 앞에서 타루미는 처음으로 스스로 사랑을 표현하
고 싶은 욕망이 발동했다.
장천린은 타루미의 눈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도 뜨거운 피를 지닌
사내였다. 특히나 타루미 같은 이국미녀라면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타루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음."
타루미의 입에서 달콤한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저 손목을 잡았을 뿐인데도 그녀의
피부는 벌써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타루미는 남자를 안다. 그 동안 겪었던 성적(性的) 경험이 자발적 본능과 결합되어
삽시에 뜨겁게 몸을 달구었다.
타루미의 혈관 속 피는 가파르게 치달았다. 비단옷 속에 감추어져 있던 젖가슴이 부
풀어올랐고 숨결은 차츰 가빠졌다.
장천린은 그녀의 비단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음."
타루미는 콧소리를 내며 스스로 몸을 움직여 그가 옷을 쉽게 벗길 수 있도록 도왔다
. 비단옷이 아래로 흘러내리자 눈부시게 흰 상체가 드러났다. 그녀는 속에 아무 것
도 입고 있지 않았다.
한족 여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몸매였다. 우선 젖가슴이 그러했다. 놀랄 만큼 팽팽
하게 발달되어 있었으며, 조금도 처지지 않은 채 우뚝 솟아 마치 탑처럼 보이게 했
다.
타루미는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다. 긴 속눈썹 끝이 가늘게 경련했다. 머리칼처럼
속눈썹도 금빛이었다.
장천린의 손길은 알게 모르게 떨렸다. 그는 여인을 다루는데 익숙한 인물이었으나
타루미 같은 이국여인을 대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타루미의 묻어날 듯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던 그는 치마를 끌렀다. 치마가 흘러내리
자 마침내 적나라한 나신이 드러났다.
대리석 조각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육체는 실로 완벽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잘록
한 허리 아래로 호선(弧線)을 그리며 풍요로운 둔부가 솟아 있었으며, 그 아래 늘씬
하게 뻗어 내린 다리는 유난히도 길었다.
장천린은 타루미의 긴 다리를 쓰다듬다가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내실로 들어가 침
상 위에 그녀를 눕혔다.
타루미는 눈을 감은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퍼지지 않고 탄탄하게
솟아 있었다. 장천린의 눈길은 그녀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군살이라곤 한 점도 없
는 아랫배를 지나 귀엽게 패여 있는 옹달샘, 금빛의 숲이 밀집되어 있는 여인의 비
역까지도 단숨에 쓰다듬듯이 훑어보았다.
9 바로북 99
'음.'
장천린도 건강한 남자였다. 여인에 대한 욕망 역시 남 못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도 강한 편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
며 타루미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황금의 비경(秘境)이었다. 삼각지대는 은밀한 계곡을 이룬 채 황홀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타루미는 부끄러움을 느낀 듯 다리를 오므렸다. 그 광경은 실로 자극적이었다. 장천
린은 한숨을 토하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도 나신이 되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다소 유약해 보였으나 막상 벗고
보니 딱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이 마치 조각처럼 균형미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침상 위로 올라갔다.
"불을."
타루미는 속눈썹을 떨며 가늘게 말했다.
장천린은 머리맡의 유등을 입김으로 불어 껐다. 방안에 어둠이 밀려들었다. 창문을
통해 스며든 달빛이 휘장을 통과하면서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장천린은 타루미를 안은 순간 그녀의 몸이 완전히 달아올라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놀랄 만큼 적극적으로 감겨들었다.
뼈가 없는 듯 나긋나긋한 여체가 뱀처럼 그의 몸을 휘어 감았다. 그녀의 육체는 인
어처럼 싱싱하면서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굉장하구나. 중원 여인에게는 볼 수 없는 정열적인 태도구나.'
이때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갑자기 타루미가 자세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
랜 노예 생활을 통해 남자에게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음."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타루미는 자세를 낮추더니 그의 발끝으로
내려가 입술과 혀를 사용하여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장천린은 그녀의 애무에 압
도되고 말았다.
그것은 끝없는 파도였다.
불같은 바람이었다.
환락의 소용돌이였다.
환열의 극치를 향해 자아(自我)를 느낄 여유조차 없이 휘말려 들 수밖에 없었다.
장천린도 여체라는 악기를 다루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타루미 앞에서 그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애무에 온몸이 둥둥 뜨는 듯 했
으며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극한의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타루미는 성적으로 완벽하게 조련된 여인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쾌감의 극점을 놓치
10 바로북 99
지 않고 훑었고, 움직임 하나 하나마다에 극도의 환열을 이끌어낼 줄 알았다.
장천린은 반듯이 누운 채 그녀의 봉사를 받았다. 이제까지 그가 알고 있던 남녀관계
의 역학적 구도가 부질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타루미의 애무는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
었다.
"굉장하구나. 타루미......."
그는 자세를 바꾸어 타루미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입에서 나온 탄성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폭풍 같은 정사가 시작되었다. 타루미는 전신을 조이며 그의 탄성에
보답하고 있었다. 방안에 회오리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정열의 회오리바람
이었다.
융고숙잔은 주점을 겸하고 있었다.
전면에 이층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은 주로 주점의 용도로 쓰였으며, 후면의 방사들
은 객잔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밤. 막남 지방의 밤은 대체로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지만 이곳만은 예외였다.
낭인시장이 열리는 기간 동안 고랍특성은 늘 활기에 차 있었으므로 낮에는 물론 특
히 밤이면 더욱 열기가 올랐다. 그것은 각처에서 몰려든 낭인무사들이 주점에 모여
들기 때문이었다.
융고숙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밤은 좀 특이했다.
"핫핫핫......!"
주점에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소음으로 가득 찼으며 땀냄새와 술냄새가 코를 찔
렀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십 명이 넘는 낭인무사들이 자리를 메운 채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반송이 끌고 온 백살대였다. 일행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온
부금진을 비롯하여 담오, 운표와 거인 초광, 백살대의 이인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조충과 서열 삼위에 드는 황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점 안은 시끌벅적했다. 그들은 주점을 통째로 빌렸다. 모두가 양껏 마셔대서 하나
같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시간은 이미 자시(子時)를 넘고 있었다.
반송은 횡설수설하면서도 연신 담오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평소 음울하기만 하던 담오의 안색도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인생을 장천린에게 의탁하기로 결정한 터라 차라리 마음이 편한 상태였다.
반송이 쉴새 없이 잔을 내밀자 그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반형, 좀 천천히 주게. 이러다가는 밤새기는커녕 도중에 뻗어버리겠네."
반송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11 바로북 99
"흐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의 그 도마뱀 같은 눈이 한 바퀴 돌아가는 걸
봐야겠네. 아직 어림도 없다구."
옆에 있던 부금진이 눈을 흘기며 참견했다.
"제가 보기에는 반대협께서 먼저 술잔에 얼굴을 박을 듯 싶은데요?"
"뭐?"
반송은 그를 노려보다가 껄껄 웃었다.
"어림도 없다. 소진. 이 어르신은 취하려면 아직 멀었다. 이 집의 술이 얼마나 있는
지 모르지만 동이 나기 전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거다."
반송은 계속 술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러다 귀찮은 듯 아예 술병 째 입에 처박았
다.
부금진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정말 지독한 주량이야. 어쩌면 단도독보다도 셀 것 같은데? 아버님과도 맞먹을 정
도야.'
그는 건너편에 홀로 앉아있는 초광을 바라보았다. 초광은 묵묵히 자작하고 있었다.
'초형이 술 마시는 건 처음 보는데?'
그는 이제까지 초광이 술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초광이 회교도(回敎
徒)였기 때문이었다. 회교도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초광은 술을 물 마시듯 하고 있었다. 워낙 체구가 컸으므로 몇 차례만 홀짝해도 금
방 술 한 병이 비워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광의 갈색 얼굴은 조금도 변함
이 없었다.
부금진은 초광의 발 아래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탁자 아래 수십 개의 술병이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대충 보아도 족히 사오십 병이
넘어 보였다.
'설마?'
부금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술을 모두 초광이 마셨는지 궁금해 졌다. 그는 자
리를 옮겨 초광의 옆으로 갔다. 그가 옆에 앉으니 마치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듯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초형, 이걸 모두 초형이 마신 건가요?"
초광은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네."
"아니? 이걸 모두 혼자 마셨단 말입니까?"
초광은 얼굴을 붉혔다.
12 바로북 99
"술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초광은 머리를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생전 처음 마시는 걸세. 그런데 상당히 맛이 좋은걸?"
"맙소사."
부금진은 이마를 쳤다. 그 순간에도 초광은 연신 술을 들이켰다. 마치 물을 마시는
것 같았다. 문득 그는 술잔을 내려보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술잔이 좀 컸으면 좋을 텐데."
부금진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졌다. 정말 강자는 따로 있었구나.'
주점 주인이 반송에게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나으리, 말씀하신 계집들을 데려왔습니다."
반송은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잘 골랐겠지?"
"물론입니다. 성내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애들로만 골라왔습니다."
"흐흐! 그럼 들여보내라."
"알겠습니다."
주인이 사라진 직후, 주점 안으로 사십여 명의 여인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모두 성장을 하고 화장을 했는데 언뜻 보기에도 대부분 아름다워 보였다.
비록 절세 미인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대로 쓸 만한 여인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녀들이 다양한 인종(人種)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피부가 희
고 푸른 색의 눈을 가진 색목녀(色目女)가 있는가 하면, 아랍계 여인이나 피부가 새
까만 흑녀(黑女)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여인들이 들어서자 장내의 사나이들은 환성을 올렸다.
"와... 아!"
특히 백살대의 도객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오랫동안 단체생활을 했으므로 여인을 접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여인들이
들어서자 모두 들뜬 기분이 된 것이었다.
반송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인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대로 쓸 만 하군."
그는 품속에서 엄지손가락 보다 조금 큰 금괴 세 개를 꺼내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
았다. 금괴가 등불 아래 빛을 발하자 여인들의 눈에 탐욕의 빛이 흘렀다.
금덩이 하나면 그녀들이 수년 간 벌 금액을 훨씬 능가할 정도의 거액이기 때문이었
13 바로북 99
다.
"이건 진짜 금이다."
반송은 여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을 갖고 못 갖고는 모두 너희들이 하기에 달렸다."
여인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껏 단장한 여인들은 사나이들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온몸을 훑어보는 데도 부끄러
워 하기는커녕 둔부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눈길을 끌어 보려
는 수작이었다.
"오늘 밤 너희들은 손님들을 한 명씩 맡아서 모셔야 한다. 단!"
반송은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들 중 한 명이라도 실수한다거나 잘못 모시면 이 금은 줄 수 없다는 것을 명심
해라."
여인들은 모두 교태 어린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자신 있다는 표정들이었다.
반송의 눈이 여인들을 한 명씩 쓸어 보았다. 그는 한 여인을 향해 손짓했다.
"너. 이리 오너라."
지목된 여인은 허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 중 네가 제일 쓸 만 하구나."
반송이 지목한 여인은 머리칼이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다. 얼굴도 상당한 미인형이
었는데 가냘프면서도 굴곡이 완연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피부였다. 그녀는 한족과 이국인의 혼혈인 듯 윤기가 자
르르 흐르는 피부가 일품이었다. 여인은 도발적으로 가슴을 불쑥 내민 채 반송을 바
라보았다. 제법 요염한 눈웃음을 치면서.
반송은 그녀의 가슴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게 제일 어려운 임무를 내리겠다."
여인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보조개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어떤 것인가요?"
반송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은 장내를 한 바퀴 돌더니 부금진을 가리켰
다.
"저 꼬마는 내가 가장 아끼는 막내동생이다. 오늘밤 모실 자신 있느냐?"
여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부금진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부금진은 그녀가
늘 대하던 고랍특성의 낭인무사들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미소년이었다. 세상에 어떤
여인이 미소년을 마다하겠는가? 그녀는 무척 기뻐하는 눈치였다.
"물론이에요! 최선을 다하겠어요."
14 바로북 99
반송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좋아. 오늘밤 저 아우를 모신다면 네게 따로 금괴 하나를 내리겠다."
여인의 입이 벌어지더니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부금진의 반응이 볼만했다. 그는 놀라 안색이 횟빛이 되고 말
았다.
"반대협!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으하하하! 소진, 오늘밤 이 형님이 네 숫총각 딱지를 떼어 주마."
"......!"
부금진은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자, 가 보아라."
반송이 둔부를 철썩 때리자 여인은 교태 어린 비명을 지르며 부금진에게로 달려갔다
.
여인들은 각각 백살대 무사들 곁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되자 주점의 분위기는 희
희낙낙해졌다.
"어... 어?"
부금진은 쩔쩔매고 있었다. 그에게 달려간 여인이 다짜고짜로 무릎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어머, 정말 아름다우신 도련님이셔! 도련님 피부가 저보다도 더 아름답고 고우네요
."
그녀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허리를 꼬며 말했다.
"호호! 어쩜 남자 피부가 이렇게 부드러울까?"
그녀는 자신의 뺨을 부금진의 얼굴에 대고 비벼댔다. 부금진은 미칠 지경이었다.
"비, 비켜라!"
그러나 닳고닳은 여인에게 그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아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녀는 물러나기는커녕 예쁘게 눈을 흘기며 부금진의 품에 안겨 들었다.
"자, 도련님. 우리 한 번 재미있게 놀아봐요. 네?"
부금진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여인의 말랑말랑한 엉덩이가 무릎을 누르고 화장내 나는 몸이 바짝 기대오는 데는
그야말로 질색이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제 빛깔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15 바로북 99
그 광경에 사나이들은 대소를 터뜨렸다. 마침 자신의 짝인 여인의 가슴에 손을 집어
넣고 주물러대고 있던 조충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부 공자님, 오늘 밤 멋지게 즐겨 보시오. 핫핫! 누구든지 처음에는 다 쑥스러운 법
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나이라면 그 나이에 알 것은 다 알아야 한단 말이오. 핫핫
핫!"
그의 무릎에 걸터앉아 있던 여인이 콧소리를 냈다.
"흐흥! 그러는 당신은 도통했단 말인가요?"
"물론!"
조총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치맛속으로 쑥 들어가고 있었다.
"어머! 성급하셔."
여인은 몸을 비틀었다. 무사들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
아올라 모두들 여인들을 희롱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여인들의 교성과 비
명(?)이 그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쾌락의 천국이었다.
다만 한 명에게만은 지옥이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부금진이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여인의 입술 공세에 고개를 이리저리 피하느라 울상을 짓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치르는 열정적인 정사였다.
게다가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색적인 정사이기도 했다. 이국녀 타루미의 파
격적인 봉사로 인해 장천린은 밤새 몇 번이나 천국에 오르곤 했다.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타루미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지나치게 정열을 발산한 탓이었을까? 그녀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여전히 아름다웠다. 헝클어진 금발이 젖가슴을 살짝 가리고 있는 모습은 그지없이
매혹적이었다.
창문으로 흘러드는 달빛이 그녀의 나신을 비추고 있었다. 백설처럼 흰 피부가 요정
같기만 했다.
장천린은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 보다 금침을 덮어 준 후 방을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보름달이 누리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북방에서 보는 달은 그로 하여
금 기이한 감회에 젖게 만들었다. 그는 후원을 걷다가 걸음을 멈춘 채 달을 바라보
았다.
'해남도에서 그 일이 있는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 구나.'
그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했다.
'남창의 청하원을 떠난 지는 어언 삼 년이 되었고.'
16 바로북 99
청하원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렸다. 그가 피땀 흘려 세운 청하원을 신산(神算)의
농간에 의해 고스란히 빼앗기지 않았던가.
'지난 삼 년의 세월은 혼신의 힘을 기울인 나날들이었다. 정말 후회 없이 노력해 왔
다. 하지만.'
그는 뺨을 스치는 봄밤의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과연 나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가?'
막남 지방은 황량한 풍토를 지니고 있다. 중원에 비하면 계절이 늦게 오는 편이었다
. 그래서 아직도 바람은 싸늘한 편이었다.
융고숙잔의 후원은 제법 신경을 쓴 듯 수목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달빛이 수목에
떨어져 땅에는 어지러운 나뭇가지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유독 기다란 그림자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장천린이 상념에 잠겨 장승처럼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밤 타루미와 함께 했던 격정적인 시간도, 이제는 아득한 과거인 듯 기억 속에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
장천린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가 되면 찾아오는 외로움. 가슴 한 곳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허전한 느낌은 아
무리 부인하려 해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는 고개 들어 달을 응시했다. 밤하늘은 맑았다. 별빛이 가물거리는 가운데 달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했다.
'그래, 모든 것이 옥교, 너 때문이다.'
장천린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옥교.'
달 속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달 속에서 그를 내려보며 웃는 미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여인.
화려한 분위기에 달콤한 음성을 지닌 여인.
그에게는 이 세상 전부를 합친 것보다 큰 의미였던 여인.
취옥교의 얼굴이 웃고 있다.
'옥교,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동안 장천린은 취옥교의 행방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미 수십 명의 사람
을 북해로 보냈었다. 해남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보낸 사람들은 돌아와서는 한결같은 소식만을 전했다. 북해를 아무리 뒤져봐
17 바로북 99
도 취옥교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오래 전 북해
사태청의 청주 숙야염의 아들 숙야천릉과 함께 어딘 가로 떠났다는 것이다.
'숙야천릉.'
그 소식을 들은 장천린은 숙야천릉이란 인물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숙야천릉은 북
해에서 두 번째로 꼽히는 고수(高手)였다. 그는 사태청의 후계자로 탁월한 무공을
소유한 것은 물론 젊고 매력적인 청년이라는 것이다.
장천린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숙야천릉에 대해 신경이 쓰여졌다.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라면 옥교가 그를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더구나 옥교는 내가 매소련에 의해 죽은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장천린은 우울해졌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를 찾아 나서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기
만 할 뿐이다.'
그는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신은 어찌하여 내게 단순한 행복을 허용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평소의 꿋꿋한 태도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
었다.
"형님."
등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장천린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
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느냐? 계묵?"
원계묵은 충직하게 말했다.
"형님이 주무시지 않는데 어찌 제가 먼저 잘 수 있겠습니까?"
장천린은 가슴이 뭉클했다. 해남도 이후로 원계묵은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
었다. 설혹 어쩌다 자리를 비울 때면 백살대의 수십 명의 도객들로 하여금 장천린을
보호하도록 지시하곤 했다.
오늘도 반송을 따라 술을 마시러 가지 않은 것은 장천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장천린은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장천린도 그런 원계묵을 믿고 있었
다. 두 사람은 그저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정도로 유착되어 있었다.
장천린과 원계묵은 담소를 나누며 후원을 거닐었다. 그 모습은 마치 형제처럼 보였
다.
"형님, 타루미는 괜찮았습니까?"
장천린은 쓴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18 바로북 99
원계묵은 그의 마음을 알았다.
"형님, 취소저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까?"
"......."
원계묵이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언성을 높였다.
"정 그녀를 잊지 못한다면 소제가 수하들을 끌고 북해로 가겠습니다. 취소저를 모셔
오면 될 것 아닙니까?"
"계묵."
장천린은 걸음을 멈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감격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의 감정일 뿐이다."
원계묵이 뭐라 반박하려하자 장천린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계묵, 오늘 밤 나와 술 한 잔 하지 않겠느냐?"
원계묵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형님과 둘이라면 무엇이든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장천린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좋아! 오늘 밤 자네를 술독에 빠뜨려 보겠네."
원계묵은 파안대소했다.
"핫핫핫! 소제의 술 실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아마 술독에 빠지는 건 형님이 될 겁
니다."
"하하하! 그럼 어디 두고 봄세."
두 사나이는 어깨동무한 채 달빛을 받으며 주점으로 향했다. 달빛도 시샘할 정도로
정다운 모습이었다.
19 바로북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