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장미림(薔薇林)
빠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금진은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바닥에 깔아둔 양탄자를 들추어냈다.
"아!"
반송이 입을 벌리며 탄성을 발했다.
양탄자 아래는 평범한 풀밭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가느다란 대롱 하나가 풀잎
사이로 비죽이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금진은 풀밭을 들추어냈다. 마치 뗏장처럼 지면이 들춰지며 구덩이가 파여진 것이
드러났다. 구덩이 속에는 예의 소녀가 입에 대롱을 문 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실로 놀라운 기지였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소녀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금진은 소녀를 조심스럽게 끌어냈다. 흙투성이가 된 소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가
느다란 대롱 하나로 호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소 결핍이 된 듯했다.
장천린은 소녀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돌아갔으니 안심해도 되오."
"아!"
소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대체 어찌된 일이오? 소저."
장천린의 음성은 갑자기 변했다. 어딘가 모르게 차가워진 것이다. 소녀는 그의 눈치
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녀의 부친은 본래는 한인이었으나 어릴 적부터 과이심부에서 자라나 과이심부의
여인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는데 그녀가 바로 산혜(珊慧)였다.
산혜는 어려서부터 미모가 출중한데다 총명하여 주위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특히
그녀는 여진의 귀족 여리표(黎理豹)의 눈에 들어 십삼 세 때 양녀로 들어가게 되었
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더욱 더 아름다워졌다. 그러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양부인 여리표가 그녀의 미모에 혹해 탐심을 품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여리표는 기회만 나면 산혜를 집적거렸다. 나이 어린 산혜의 괴로움은 이
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사일 전.
여리표는 그녀를 대동하고 막남의 과이심부를 방문했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는 과
이심부의 족장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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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곳에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산책을 하던 중 산혜는 우연히 후원의 정자에서 황태극과 여리표, 과이심부 족장의
밀담을 엿듣게 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산혜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부친이 한족의 첩자
였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야 밝혀졌으며, 그녀가 여진을 떠나던 날 밤
부친은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산혜의 처리 문제를 상의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자리에서 황태극은 산혜
의 처리를 여리표에게 일임한다고 말했다.
산혜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그런데 마침 황태극이 과이심부 족장에게 지시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병력
과 말을 내줄테니 과이심부의 병력으로 하여금 찰합이부의 임단한을 죽이라는 것이
었다.
산혜는 공포에 질린 채 방으로 돌아왔다. 부친이 한족의 첩자라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비통함에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런데 밤이 이슥해졌을 때, 누군가 그녀의 방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그 자는 바로 여리표였다. 그는 술냄새를 풍기며 다짜고짜로 산혜를 덮치는 것이 아
닌가?
산혜는 비명을 지르며 반항했으나 여리표의 무지막지한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
녀의 옷은 갈가리 찢겨졌으며 이윽고 겁탈되기 일보직전에 이르고 말았다.
절망에 빠진 산혜의 손에 머리맡에 있던 촛대가 잡혔다. 그녀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촛대로 여리표의 등을 찍었다.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리표의 몸이 축 늘어
졌다. 하필이면 급소를 찔렸던 것이다.
여리표는 눈을 까뒤집은 채 즉사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산혜는 그곳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죽기를 각오하고 탈
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무사들이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쫓기는 와중에서
그녀는 몇 대의 화살을 맞아 쓰러지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마침 회오리바
람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녀는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었고, 무사들은 그녀를 찾을 수가 없게 되
었다. 이후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다 우연히 장천린의 행렬에게 발견된 것
이었다.
장천린은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말에서 몇 가지 모순점을 느낀 것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일개 소녀가 과연 여리표를 죽이고 무사들의 집요한 추격을 따돌린
채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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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극심한 출혈과 탈진상태에서도 그녀는 끈질긴 생명을 유지했다. 그것은 보통
의 체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런 기구한 일을 겪은 소녀가 어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그토록 조리있
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산혜의 말은 청산유수일 정도로 능숙했다.
그러나 장천린은 자신이 느낀 의문점들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한 마디만 했
다.
"소저는 황태극에 대해 알고 있소?"
산혜는 겁먹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그는 여진의 왕인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이에요."
"......!"
장천린은 마치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누르하치의 아들이라고!'
그는 운명의 칼날이 심장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기도로 보아 왕자로 만족할 인
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천린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한 가닥 영감을 느
꼈다. 어쩌면 장차 황태극이 여진의 왕위를 이어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이틀이 흐른 후, 그들은 찰합이부로 들어섰다. 그 동안 산혜의 상처는 거
의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자의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걸음을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것은 부
금진의 뛰어난 의술 덕분이었다.
찰합이성의 변경에 오노제(烏魯齊)란 이름의 작은 현이 있었다.
장천린 일행은 그곳의 한 객점에 여장을 풀었다.
이른 아침.
산혜는 객점의 후원을 산책했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
금 그녀의 모습은 며칠 전과는 딴판이었다. 절륜한 미모에 눈부시게 흰 피부는 고귀
하면서도 청순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후원을 천천히 거닐며 이따금씩 한숨을 쉬곤 했다.
"부공자님!"
문득 그녀는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불렀다. 저만치 앞에서 부금진이 걸어오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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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이다. 부금진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이고 있다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몸은... 좀 어떠시오?"
"좋아요, 아주. 모두가 부공자님 덕분이에요."
"천만에."
부금진의 안색이 괴이하게 변했다. 그는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소저는 내가 왜 그토록 열심히 치료했는지 알고 있소?"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산혜를 바라보며 그는 괴소를 흘렸다.
"후후훗! 천하를 다 속여도 날 속일 순 없소. 표상아(票霜娥) 소저!"
표상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산혜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탈색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거짓말처럼 회복되었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표상아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부금진은 더욱 괴이쩍게 웃었다. 그의 말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후후! 변명하지 마라. 나도 처음에는 몰라볼 뻔했지. 하나 네 겨드랑이에 새겨진
붉은 장미 문신을 보고 정체를 파악했지."
산혜의 안색은 다시 창백해졌다.
"장미꽃 문신 속에 네 개의 꽃술 표식은 무엇이지? 그건 곧 여인밀문(女人密門)인
장미림(薔薇林)의 서열 사위임을 알리는 표식이 아니냐? 너는 백장미(白薔薇) 표상
아가 아니냐?"
"......!"
산혜의 안색이 홱 변했다.
슉!
돌연 두 개의 손가락이 빳빳이 세워지며 부금진의 눈을 찔러갔다. 그야말로 전광석
화 같은 습격이었으며 악랄하기 그지없는 수법이었다.
부금진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젖혀 피하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후훗! 넌 상처 입은 몸이야. 아직 움직이면 좋지 않아."
산혜, 즉 백장미 표상아는 아미(蛾眉:눈썹)를 파르르 떨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후후후!"
부금진은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손목을 놓아주고는 일보 물러나며 자신의 팔
뚝을 걷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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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그의 흰 팔뚝에 표상아의 것과 똑같은 붉은 색 장미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
져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다른 것은 장미 문신 가운데 있는 꽃술이 두 개라는 점
뿐이었다.
표상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 당신은?"
부금진은 미소 지었다.
"부금진이다. 하지만 십 년 전에는 수영(殊營)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
"아!"
표상아는 탄성을 발했다. 그녀의 얼굴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야 내가 기억난 모양이구나?"
"수영!"
갑자기 표상아는 나비처럼 몸을 날려 부금진을 껴안았다. 그녀는 치솟는 기쁨을 어
쩔 수 없다는 듯이 뺨을 부금진의 뺨에 대고 마구 비벼댔다. 그것은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표현하지 못할 태도였다.
그러나 부금진은 담담하기만 했다.
"상아, 함부로 남을 껴안는 버릇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표상아는 꾀꼬리처럼 말했다.
"너무 반가워서야!"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흥분의 빛이 역력했다.
그녀는 부금진의 얼굴을 코앞에 두고 자세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홋! 정말 자세히 보니 과거의 귀여운 모습 그대로야. 하지만 차림이 바뀌어서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어."
부금진은 씩 웃었다.
"상아의 소문은 가끔 들었지. 사 년 전 여진에 갔다더니 그 동안 여리표의 양딸로
있었군?"
"훗! 나도 많이 변했지?"
부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십 년 전에는 말괄량이였는데 지금은 제법 아름답군. 가슴도 나오고 말이야."
"어머!"
표상아는 예쁘게 눈을 흘기며 비명을 질렀다. 부금진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을
쿡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부금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수영, 우리 조금 걸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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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좋지 않을 텐데."
"괜찮아."
이윽고 두 사람은 객점의 후원을 거닐었다. 그 광경은 마치 사랑하는 한 쌍의 남녀
가 정담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금진은 표상아와 나란히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
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영의 곁에는 늘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 원래 아버지란 존재는 세상에 없는 줄 알고 자랐다. 그를 키운 것은 어머니
였는데 그녀는 대단한 미인으로 신비한 능력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양녀가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비슷한 또래였으므로 수
영(殊營)과 잘 어울려 늘 한 덩어리가 되어 친 혈육처럼 뛰어 놀며 지냈다.
그 중 한 명이 표상아였다. 그녀는 수영이 여덟 살이 되던 해 어딘가로 떠나게 되었
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 때문이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노을 빛이 후원의 꽃나무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표상아는 부금진의 어깨에 머리를 살며시 기댄 채 종알거리고 있었다.
"지금 장미림은 과거보다 몇십 배나 커졌어. 또 아름다워졌어."
노을에 물든 표상아의 얼굴은 고혹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장미림에서 기거했는데 양어머니의 명을 받고 여리표에
게 접근해 양녀로 입적했어. 그때부터 줄곧 여진에 살았어."
부금진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호호! 내 아버지께서 과이심부의 장로(長老)였기 때문에 일은 정말 쉬웠어."
부금진은 담담히 물었다.
"왜 여리표에게 접근한 거지?"
표상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며 말했다.
"신산 제갈사란 사람이 양어머니께 여진의 동태를 살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어.
그에 대한 금액을 지불했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날 보내신 거야."
'신산!'
부금진의 가슴 한 구석에서 한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
쥐었다. 그가 여덟 살 되는 해, 결코 보아서는 안될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뇌리를
스친 것이었다.
부금진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그래서 여진의 동태를 정탐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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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랬지."
"어떤 내용이었지?"
"그 바람에 아버님은 여리표에게 죽고 난 여리표를 죽인 후 탈출했어."
"무슨 일을 했냐고 물었잖아."
"......."
표상아는 입술을 다물었다. 부금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괴소를 흘렸다.
"후후! 나에게까지도 비밀이란 말이지?"
"미안해, 수영."
"......."
표상아는 부금진이 말이 없자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영, 화났어?"
"아니."
그녀는 약간 안심한 듯 화제를 돌렸다.
"부대인님은 안녕하셔?"
부금진은 피식 웃었다.
"나도 아버님을 못 뵌지 오래다."
"양어머니께선 가끔 부대인님 얘기를 하셔."
부금진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내 앞에서 어머님 얘기를 꺼내지 마라!"
표상아는 움찔했다.
"어머니란 이름만 들어도 증오심이 끓어올라!"
갑자기 분노성을 발하는 바람에 표상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부금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금진은 탄식하며 말했다.
"상아, 상처가 낫는 대로 이곳을 떠나라. 나는 용대인이 너로 인해 어떤 피해라도
입는 것을 원치 않아."
표상아는 원망스런 눈으로 부금진을 응시했다. 그러나 부금진의 시선을 돌려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제 할말은 다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표상아와 부금진.
그리고 여인밀문이라는 장미림은 또 어떤 곳인가?
실로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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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장천린 일행은 목적지에 당도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산(
巨山)이 목전에 들어온 것이다.
탈목산(奪目山)이고 했다.
험준한 탈목산 기슭을 따라 끝없이 뻗어있는 성벽이 보였다. 산세를 따라 흡사 지네
가 기어가는 듯한 형상의 성벽은 가히 천연의 요새라 할만 했다.
장천린은 멀리 바라보이는 성을 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막남몽고의 영웅 임단한의 본거지로군. 과연 위용이 범상치가 않구나.
일단 그들은 성이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행렬을 멈추었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가 탈목산으로부터 들려왔다. 잠시 후 십여 기의 인마(人
馬)가 다가왔다.
그들은 전형적인 몽고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탁월한 마술(馬術)로 말고삐를
당기며 일제히 멈추었다.
"어느 분이 용백군 대인이시오?"
체격이 우람한 한 장년인이 우렁차게 외쳤다. 장천린은 마차의 주렴을 들추었다.
"계묵, 그를 데려와라."
잠시 후 원계묵은 장년인을 데려왔다.
"내가 용백군이오. 임단한 족장께서 보냈소?"
몽고병사는 처음에는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으나 장천린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흠, 안내해 주시오."
장년인은 주위를 둘러본 후 고개를 흔들었다.
"대족장께서는 용대인님 외 두 분만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곁에 있던 원계묵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
장년인은 완강했다.
"대족장님의 명입니다."
원계묵은 노갈을 터뜨렸다.
"임단한이 찰합이족의 대족장이라면 용대인은 우리들의 주군이시다. 어찌 호위무사
도 없이 주군을 보낼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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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인의 안색이 변했다. 금방이라도 원계묵이 어깨 위의 장도를 뽑아 내려칠 것만
같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이때였다.
"좋다. 그쪽의 관례에 따르겠다."
장천린의 말이었다. 그는 원계묵이 뭐라 말하려는 것을 막으며 낭랑하게 말했다.
"계묵, 담오, 자네들만 따라오게."
"알겠습니다. 형님."
원계묵은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으나 장천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천린은 원계묵과 담오만을 대동한 채 임단한의 본거지로 출발했다.
대막의 풍운아 임단한이 있는 곳은 삼엄하기가 철통과도 같았다. 성루(城樓) 위에는
수백 명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으며 여기저기 높다란 망루가 솟아 있었고, 망루마
다 병사들이 광활한 초원을 내려다 보며 감시하고 있었다.
성을 향해 뻗어있는 길은 구불구불한데다 협소하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백만대군이
쳐들어간다 해도 그 힘을 십분 발휘하기가 불가능한 천연의 요새지였다.
장천린은 마침내 성문을 통과했다. 성안으로 들어선 그는 약간 놀랐다. 밖에서 보기
와는 달리 성안의 풍경은 의외로 평온했던 것이다.
예상과 달리 남녀노소들이 자유스럽게 활보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대부분 무장 차림
이었으나 긴장감이 없어 보였으며 표정도 밝아 보였다.
다만 빽빽하게 설치되어 있는 수천 개의 군막들로 미루어 병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의 표정이 자유롭고 평온해 보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천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문 대로구나. 이 정도 규모라면 능히 대막의 풍운아가 될 자격이 있구나.'
그는 군막들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한 채의 초대형 빠오로 안내되었다.
"대족장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단, 용대인 혼자 들어가셔야 됩니다."
안내한 몽고인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하자 원계묵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장
천린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린 손님이다. 손이 주인의 방식을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혼자서 빠오를 들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
장천린은 멈칫했다. 빠오 안의 풍경이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는 발등이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맞은편에는 호피(虎
皮)가 여러 장 겹으로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 삼십대 정도로 되어 보이는 우람한 체
격의 사나이가 반라 차림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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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는 커다란 상이 놓여 있었는데 상 위에는 먹음직스런 음식과 술이 가득 차
려져 있었다.
사나이는 가슴팍 근육이 발달되어 있었다. 게다가 털이 수북하게 나있어 가히 곰을
연상케 했다. 얼굴은 각이 져 있었으며 매부리코에 고리눈이었고, 눈에서는 번갯불
같은 안광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장천린이 놀란 것은 그의 용모 때문이 아니었다. 사나이를 시중들고 있는 네 명의
여인들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들은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여인들은 망사의만 걸치고 있어 풍만한 젖가슴과 허벅지가 고스란히 비쳐 보이고 있
었다. 그런 차림으로 사나이에게 달라붙어 온갖 교태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천린은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영웅호색(英雄好色)이란 말이 있다한들 너
무 한다 싶었다.
사나이는 양손에 두 명의 여인을 끌어안고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여인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고, 반대쪽 손으로는 다른 여인의 젖가슴을 떡 주무르듯 하고 있었다.
또 한 여인은 그의 무릎에 걸터앉은 채 사나이의 털투성이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
었다. 그녀는 이따금 허리를 흔들어 대며 간드러지는 교성을 발하고 있었다. 네 번
째 여인은 부지런히 안주를 집어 사나이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여인들은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투명한 천 한 조각이 전부였으며, 그나마 풀어 헤쳐
져 있어 눈부신 속살이 거의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장천린이 빠오 안에 들어온 것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직감적으로 이 야만적인 사나이가 바로 대막의 풍운아 임단한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임단한은 실로 대단한 기인이었다. 장차 수십 년 간에 걸쳐 여진의 누루하치와 황태
극에 대항하여 막남몽고를 지켜낼 위대한 전사였다.
임단한은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손은 거침없이 여인의 계곡 사이로 미끄
러져 들어갔다.
"흐응......."
여인은 허리를 비틀며 신음을 발했다.
장천린은 입구에 선 채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네 명의 여인들은 임단한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임단한의 무릎 위에서 앉아있던 여인이 짧은 신음을 토하며 뒤로 넘어갔다. 그녀의
동공이 돌아가 있었다.
"당신이 용백군 대인이오?"
임단한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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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정중히 포권했다.
"그렇소이다. 귀공이 바로 임단한 대족장이시오?"
임단한은 커다란 물소뿔 잔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킨 후
입가에 묻은 술방울을 손등으로 닦았다.
"내가 바로 막남의 문제아 임단한이오."
그는 손등에 묻은 술을 여인의 젖가슴에 문질러 닦으며 턱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앉으시오, 용대인."
"감사하오이다."
장천린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임단한은 다시 손을 뻗어 여인의 젖가슴을 주물렀
다. 여인은 신음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에 안겨 들었다.
"무슨 일로 아랍대에게 날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했소?"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소생은 상인이오. 사업 이외의 목적이 있을 수 없겠지요."
임단한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살다보니 나 임단한과 장사해 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군."
그는 생각만 해도 우스운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친 그는 고리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십만 명의 군사와 열세 명의 애첩, 그리고 양 수만 마리가
전부요. 용대인은 그 중에서 무엇을 사고 싶소?"
장천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흐, 애첩들 중에 미인이 몇 명 있긴 있소. 그 아이들을 사고 싶다면 싼값에 팔
수도 있소. 은자 수십만 냥만 내면 말이오. 핫하! 하지만 군병은 나의 힘이고 양은
식량이니 팔 수가 없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내가 사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오."
임단한은 잔을 들어 올렸다. 한 여인의 재빨리 술을 따랐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대족장께서는 포국(葡國:포르투갈)의 한 상인에게 양질의 화
약(火藥) 재료를 오만 근 가량 구입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
임단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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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사고 싶은 것은 바로 그 화약입니다."
임단한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로
자빠진 여인들의 허벅지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임단한의 눈에서는 무서운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장천린은 태연하기만 했다.
"상계에 관한 정보들은 본인에게 빠짐없이 입수되고 있소이다. 대족장께서는 반년
전 포국 출신의 한 암상인을 통해 은밀히 은자 수십만 냥을 주고 오소리강(烏蘇里江
) 유역에서 화약재료를 구입하셨소이다."
임단한의 눈에 냉기가 어렸다. 갑자기 그는 손을 저었다.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네 명의 미녀는 물론 빠오 안을 지키고 있던 여섯 명의 병사들이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빠오 안에는 임단한과 장천린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임단한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장천린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본인은 천하각처에 정보망을 깔아놓고 있소이다."
임단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음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화약을 어디에 쓰려는지도 알겠군."
"아마도 후금의 누르하치와 싸우기 위해서일 것이오."
임단한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그대는 상인치고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군!"
장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대족장께서 가지고 계신 화약재료 오만 근은 현 상태로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소이다."
"무슨 소린가?"
"찰합이부 내에서는 그 재료를 이용하여 화약이나 화탄(火彈)을 만들 수 있는 기술
을 지닌 자가 없지 않소이까? 한데도 대족장께서는 무리해서 구입하는 바람에 현재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화약재료 구입으로 너무 많은 돈을 썼기에 십만 군사들
의 낡은 병기와 군수품을 교체하지도 못하고 있을 뿐더러 필요한 군마들도 구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임단한의 안면이 씰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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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대족장께서는 화약재료를 구입한 것을 후회하고 계실 것이오."
임단한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눈앞에 있는 젊은 상인의 말 하나 하
나가 그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지금 상태가 지속된다면 찰합이부를 따르는 막남의 제부족들이 불신임을 하게
되어 대족장의 권위가 추락될지도 모르는 일이외다. 뿐만 아니라 병력이 약화되어
언젠가는 후금에게 패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
장천린의 말은 치명타를 준 셈이었다.
임단한은 이빨을 꽉 물며 장천린을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장천린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당당히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는 임단한이 압도될 정
도였다. 임단한은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용대인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바로 그 화근이 되고 있는 화약재료를 사려는 것이외다."
"어디에 쓰려고?"
"후후, 상인은 무엇이든 다 팔 곳이 있기 마련이오."
임단한은 길게 드러누웠다.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듯 허탈한 심정이었다. 기실
그가 막대한 돈을 들여 화약재료를 사들일 때는 나름대로의 원대한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뜻한 대로 일이 되어가지를 않았다. 그로 인해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장천린의 말 대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애써 구입한 물건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간 마음이 쓰라린 것이 아니었다.
긴 침묵이 흐른 후.
"얼마에 사겠소?"
마침내 그는 굴복하고 말았다.
"돈으로 사지는 않겠소이다."
임단한은 몸이 경직되었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럼?"
"돈 대신 군마 일만 필과 새로 만든 병장구 이만 점을 드리겠소이다."
임단한의 안색이 확 변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군마 일만 필과 병장구 이만 점.
실로 어마어마한 물량이 아닌가? 그것은 화약재료를 구입한 액수의 몇 배나 되는 물
량이었다. 임단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잠시 머리를 굴린 그는 상인들은 절대 손해 보는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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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떠올리곤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 말고 또 무엇을 원하오?"
장천린은 빙긋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역시 대족장은 통하는 데가 있소이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막남과 막서, 그리고 막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물품의 구입을 전담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주셨으면 하오이다."
실로 엄청난 주문이다.
그것은 곧 대막 모든 부족들이 중원에서 사들이는 물품들의 판매를 독점하겠다는 엄
청난 요구였다.
'지독하군!'
임단한은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쉽게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천린이 건네는
조건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거기에 따른 유혹이 너무 컸다. 게다가 장천린의 말하
는 영향력 행사는 그의 힘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장천린은 엄숙하게 말했다.
"또 한 가지 있소이다. 그것은 대족장께서 언제든 본인의 부탁을 한번만 들어주셔야
한다는 것이외다. 단 한번이면 되오."
임단한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약속을 천만금 이상으로 중히 여기는 인물이었으므로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대초원의 사나이로서,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임단한은 손을 내밀었다. 장천린은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나이의 마주 잡은 손에
힘이 주어졌다.
"용대인, 당신은 내가 본 중에 가장 무서운 상인이오."
"후후, 과찬이시오."
"푸하하하핫!"
"하하하!"
두 사람은 대소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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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따로 태어난 두 사나이, 그들의 굳게 잡은 손과 손을
통하여 뜨거운 약속이 교환되었다. 이로써 향후 대륙에 휘몰아칠 풍운을 누가 짐작
인들 하겠는가?
두 사나이는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비
록 처음 만난 사이였으나 짧은 만남을 통하여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
끼고 있었다.
장천린은 임단한의 군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화약재료를 인수하고 장차 대막에서
벌일 사업에 관한 안배를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그 동안 임단한과 여러 차례 만나 밀담을 나누었다. 임단한은 겉보기에는 근육질의
인물이었으나 실제로는 침착한 성품에 치밀한 두뇌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임단한
과 여러모로 뜻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밀담 내용은 오직 그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임단한은 장천린에게 극진히 대우했다. 음식물은 최상급으로 대접했으며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각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는 찰합이부에서 고르고 고른 최상의
미녀 두 명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장천린은 극구 사양했으나 워낙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할 수없이 두 미녀를 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다.
원계묵과 담오는 장천린의 절륜한 정력(?)에 혀를 내둘렀다. 왜냐면 장천린이 머물
고 있는 처소에서 밤마다 여인들의 교성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하하! 형님, 이제 보니 대단한 바람둥이셨군요? 형님께서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
다?"
"예끼, 이 사람. 그거야 임족장의 성의 때문이 아닌가? 이곳 사람들은 성의를 무시
하면 모욕감을 느끼는 풍습이 있지 않나?"
"하하!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단 하루도 안 거른단 말입니까? 아까 보니 여인들의 얼
굴이 노랗게 떴더군요."
원계묵의 이런 놀림을 받으면서도 장천린은 밤마다 성의(?)를 표시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열흘 후, 모든 일이 끝났다.
임단한은 매우 섭섭해하며 수천 명의 수하들을 직접 인솔하고 찰합이부의 경계선까
지 그를 배웅해 주었다.
장천린은 백살대와 낭인무사들을 대동하고 출발했다. 그는 무척이나 홀가분한 기분
이었다. 자신이 대막에 온 목적을 십분, 아니 십이분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임단한과의 거래를 만족스럽게 끝냈다고 생각했다.
'태진왕은 임단한이 누르하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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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필과 군사장비들을 대가 없이 선물로 주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렇게
하면 역효과가 난다. 임단한의 성격상 도움을 받으면 후금을 견제하는 것이 자의가
아니기 때문에 반발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래를 통해 군마와 장비를 건네줌으로
써 그는 자발적으로 누르하치와 싸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인 셈이다. 나
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태진왕 전하의 부탁도 동시에 성사시킨 셈이 된다.'
장천린의 이번 대막행은 대성공이었다. 상인으로서, 또한 태진왕의 밀사로서도 완벽
한 임무 수행을 한 것이었다.
원계묵이 다가오며 물었다.
"형님! 이제 어디로 갑니까?"
장천린은 시원스럽게 말했다.
"중원으로 간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원계묵도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핫핫핫! 그럼 이제 돌아가는군요!"
"그렇다, 계묵. 여기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장천린도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핫!"
"핫핫핫!"
뒤를 따르던 담오와 부금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
다. 그들의 웃음이 초원을 뒤흔드는 가운데 행렬은 힘차게 남쪽으로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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