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사랑을 얻는 법 (28/87)

제4장 사랑을 얻는 법 

강은 푸르러 새는 더욱 희고 

산은 푸르러 꽃은 불타는 듯하다. 

올 봄은 어느새 또 지나가리니 

어느 날이 돌아가는 해이런가. 

대운하(大運河). 

중원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역사적인 산물. 일찍이 수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하려 했 

을 때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던가? 그건 미친 짓이라고. 

그러나 오늘날 중원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대운하는 유유 

히 푸른빛을 내며 대륙의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다.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이 운하야말로 수상교통의 혁신을 이룬 것이다. 운하를 

이용하여 강북에서 강남까지 배를 타고 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규모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또한 운하를 건설하는 대공사로 인해 숱한 희생을 치렀던 당시의 백성들에 대해 경 

외지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때는 오월. 

대운하를 끼고 있는 산동(山東) 태진현(太眞縣). 

운하 양쪽에는 버드나무가 가지 끝을 수면에 드리운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수양림은 아늑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 사이로 운하를 따라 남행하는 한 척의 화려한 선박이 있었다. 

여인. 

세상의 미란 미는 한 몸에 갖춘 듯한 절세미녀가 갑판 위에 서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신조차 질투할 것 같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검박한 백의를 입고 있 

었는데 도리어 그런 질박한 차림이 탈속한 기품을 더해주고 있었다. 

누군가? 이 미녀는? 

그녀는 바로 취옥교였다. 

"......." 

봉황의 눈을 연상케 하는 취옥교의 커다란 눈에는 아련한 슬픔이 담겨져 있었다. 그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늘이었다. 

지난 삼 년 간 그녀는 한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남창부의 신선루를 떠난 이후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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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 번민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천린.' 

운하 양변을 스치는 아름다운 버드나무 숲도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천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제 생각을 하고 있나요? 

옥교가 당신 생각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을 알고나 계시나요? 삼 년은 결코 짧 

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당신을 잊을 수가 없었답니다. 

취옥교의 눈망울이 흐려졌다. 그녀는 스스로 장천린의 곁을 떠났다. 

그후 삼 년이 흘렀으나 외로움과 아픔은 점점 더해만 갔다. 그녀는 아직도 장천린이 

매소련의 비검에 맞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 허전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일 

까? 미모는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수척해 보였다. 

"또 그의 생각을 하고 있었소?" 

상념에 잠겨있던 취옥교의 뒤쪽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취옥교는 돌아보지 않 

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등뒤에 나타난 자는 이십 육칠 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관옥 같은 용모를 지 

니고 있었다. 흰 피부에 관자놀이까지 뻗친 검미(劍眉)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연남 

빛 유삼에 문사건(文士巾)을 두르고 있었으며, 우아하면서도 달콤한 분위기를 풍기 

고 있었다. 

청년은 한 손에는 옥선(玉扇)을 든 채 살랑살랑 젓고 있었다. 

"천릉." 

취옥교는 돌아서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청년 숙야천릉(叔夜天陵)은 빙긋이 웃으며 취옥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아직 강바람이 서늘하오. 그만 선실로 들어갑시다." 

취옥교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칼이 가볍게 휘날렸다. 

"아니에요. 경치가 아주 좋아요." 

"하하! 그대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숙야천릉은 그녀를 바라보며 낭랑하게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허락해 주오. 그대 곁에서 함께 중원의 경치를 볼 수 있도록 

말이오." 

"......." 

취옥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망연한 시선으로 대운하의 푸른 수면을 바라볼 뿐 

이었다. 숙야천릉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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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옥선을 소리 없이 접으며 물었다. 

"벌써 삼 년이 흘렀소. 아직도 그를 못 잊겠소?" 

취옥교의 눈썹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 자의 이름이 장천린이라고 했소?" 

취옥교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숙야천릉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숙야천릉, 천하에서 누구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건만 그 자는 부럽군." 

그는 시선을 허공으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창천에 몇 마리의 물새가 비상하고 

있었다. 

"당신을 볼 때마다 그 자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곤 하오." 

취옥교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천릉, 당신은 그 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해요. 모든 면에서 말이에요. 절대 그런 

생각을 하실 필요가 없어요." 

숙야천릉의 눈빛이 우울하게 빛났다. 

"그렇다면 옥교, 왜 날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오?" 

취옥교는 한숨을 쉬었다. 

"아! 천릉, 당신에겐 구양(歐陽) 소저가 있어요.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해요. 그녀는 

분명 당신의 좋은 반려자가 될 거예요. 한데 왜......." 

숙야천릉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에게 내가 장천린이 될 수 없듯이 나에게 있어서도 그녀가 당신이 될 수 없소. 

결국," 

그는 취옥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정열에 불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옥교 당신이오. 알겠소?" 

"......." 

취옥교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감히 숙야천릉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수면 위를 스 

치듯 날던 물새가 물방울을 퉁기고 있었다. 햇살이 물방울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숙야천릉은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옥교, 그대를 포기하지 않겠소. 절대로. 나는 기다릴 것이오. 언젠가 당신이 스스 

로 내 품에 안겨올 때까지 말이오." 

"......." 

취옥교는 수면을 내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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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야천릉은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용모는 물론 학식과 무공, 심지어는 배경까 

지도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북해사태청(北海獅太廳)의 청주 숙야염의 아들이다. 장차 북해의 지배자가 될 

그가 아니던가. 무공만 해도 그렇다. 현재 그의 무공 수위는 북해의 제이인자에 속 

하고 있다. 

취옥교는 그가 싫지 않았다. 만일 장천린을 알기 전에 그를 만났더라면 필시 사랑하 

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천린을 먼저 만난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이미 장천린 

과 모든 것을 나눈 사이가 아니던가. 

선실의 창밖으로 달이 보인다. 

달밤에 운하를 따라 소리 없이 배가 움직이고 있었다. 

"......." 

숙야천릉은 자작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조각처럼 준수한 그의 얼굴은 달빛을 받 

아 신비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선실 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들어왔다. 그는 중년의 나이였는데 꼽추였다. 얼굴도 

심하게 얽어있어 누가 보더라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꼽추는 선실 안으로 들어선 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소청주(小廳主)님." 

숙야천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를 가리켰다. 

"이리 앉아 술 한잔 받아라. 심표(深豹)." 

"황송합니다." 

심표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후 두 손을 내밀었다. 감히 의자에 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숙야천릉이 술을 따라주자 공손히 받아 단숨에 비워버렸다. 

"알아보았느냐?" 

"예!" 

"말해 보거라." 

꼽추 심표는 잠시 머리를 정돈한 후 입을 열었다. 

"염무와 제갈사의 싸움은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접어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흠." 

"세력으로 보면 염무의 조화성이 십 배 이상 강하지만 신산의 세력은 암중에 숨어 

있는데다 신산의 예측할 수 없는 계략(計略)과 치밀한 심기(心機)로 인해 염무는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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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를 썩고 있습니다." 

숙야천릉은 기소를 흘렸다. 

"후후! 하긴 신산의 두뇌만큼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지. 그럼 무영 고검령은?" 

"그는 수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듯 

합니다. 신산 역시 무영과 접촉한지 꽤 오래인 듯합니다." 

심표는 품속에서 한 권의 얇은 책자를 꺼냈다. 

"여기 그간 조사한 것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숙야천릉은 책자를 받았다. 그는 책장을 들추다가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장천린에 대해서도 조사했느냐?" 

심표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난색을 떠올렸다. 숙야천릉은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그 자는 이미 삼 년 전에 죽었습니다." 

숙야천릉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소리냐? 그가 죽다니?" 

심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벌써 삼 년 전... 그 자는 셋째 아가씨의 비검(飛劍)에 맞아 죽었습니다." 

"뭣이? 매소련이?" 

숙야천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꼽추 심표는 고개를 숙였다. 

"틀림없습니다. 그 자는 금백만과 함께 죽었습니다." 

"......." 

숙야천릉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만금산장에 있던 신산 

제갈사가 금백만의 죽음을 자연사로 위장시키면서 장천린의 죽음을 첫째 아가씨와 

함께 실종으로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숙야천릉은 잠시 생각하다 이상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매소련은 왜 그 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단 말이냐?" 

"아마도 첫째 아가씨 때문일 겁니다." 

숙야천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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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지금 내게 한 말을 옥교에게 절대로 알리면 안 된다. 이건 명령이다. 알겠느냐?" 

숙야천릉의 음성은 냉랭했다. 심표는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소청주님." 

"나가 보아라." 

심표는 감히 일어서지도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숙야천릉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의 심정은 착잡하기 

만 했다. 

'장천린이 죽었다고? 아주 뜻밖이다. 이렇게 되면 생각보다 일은 쉬워지겠구나.'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 자의 죽음을 기화로 옥교를 차지하고 싶진 않다. 그건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내 힘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장천린의 존재를 없애야 완 

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의 눈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야망과 사랑을 얻는 일, 동시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지. 하지만 시간은 많다. 

바둑으로 치면 아직 첫 수밖에 안 둔 셈이 아닌가? 후후훗!' 

창밖으로 달빛이 기울고 있었다. 운하의 물결이 조금 거칠어진 듯했다. 

용문전장(龍門錢莊)은 개봉부(開封府)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로 보나 신용으로 보나 용문전장은 천하제일의 전장으로 전 중원에 걸쳐 수많은 

지점을 통해 은표를 발행하고 있는 곳이다. 

황실에서도 용문전장의 은표를 사용하는 실정이고 보면 여타의 전장들 중에서 용문 

전장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능히 알만한 일이다. 

용문전장의 주인은 상관홍(上官紅)이다. 

그가 천하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그의 재산은 당 

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십수 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반석처럼 든든한 기초를 

가지고 있었다. 

이 상관홍에게 두 가지 유명한 것이 있었다. 첫째는 천문학적인 재산이요, 둘째는 

그가 아끼는 일곱 명의 첩이었다. 

본래 그의 처는 십육 년 전 딸 하나를 낳고 죽었는데, 이후 일곱 명의 절세미녀를 

첩으로 맞아들인 것이다. 그녀들의 미색은 가히 백화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강북칠선녀(江北七仙女)란 이름이 붙었겠는가. 

용문전장의 후면에는 일곱 개의 아름다운 궁(宮)이 북두칠성의 방위로 세워져 있었 

다. 상관홍은 자신의 일곱 첩을 각각 하나의 궁에 거처하도록 했는데 사람들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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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을 칠선궁(七仙宮)이라 불렀다. 

상관홍-.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개봉부의 용문전장 본장. 

후원의 한 연무장. 바닥에 잔디가 곱게 깔려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지 

금 그곳에서는 노소(老少)가 무공 대련을 하고 있었다. 십육 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 

와 머리카락이 반백인 노인이었다. 

소녀는 순백색의 경장을 몸에 꼭 맞게 입고 있어 날씬한 몸매가 유난히 돋보였다. 

그녀는 한 자루의 목검(木劍)을 앞으로 뻗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자못 당찼다. 

"핫!" 

소녀는 앙칼진 기합과 함께 공격을 가했다. 목검 끝에서 꽤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 

다. 반백노인은 위치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목검 끝만 가볍게 움직여 소녀의 

공격을 차단시켰다. 여유가 있을 뿐더러 무게가 실린 검법이었다. 

"하아......." 

몇 차례 공격을 가했으나 노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자 소녀는 가쁜 숨을 연 

신 몰아쉬었다. 그러나 약이 오른 듯 더욱 빠르고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노인은 손목을 슬쩍 꺾었다. 그러자 소녀의 목검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 버리고 

목부분이 훤히 노출되었다. 노인의 목검은 어느새 소녀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허허! 이 늙은이가 이긴 것 같구려." 

소녀는 화가 난 듯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칫!" 

그녀는 목을 옆으로 튼 후 재차 노인을 공격했다. 윙! 하는 파공성과 함께 그녀의 

목검은 노인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허! 굴복을 안 하겠단 말인가?" 

노인의 신형이 유유히 미끄러졌다. 발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도 삼 척 가량 

이동하며 소녀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 소녀는 허탕을 치자 중심이 기울어 

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목검이 그녀의 이마를 때렸다. 

"아얏!" 

소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허허, 소저는 대체 목숨이 몇 개인가? 그래도 덤빌 텐가?" 

노인의 말에 소녀는 코웃음쳤다. 

"흥! 물론이에요." 

위...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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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그녀의 목검은 원을 그리며 노인의 명치를 공격했다. 

노인은 무릎을 굽혔다 펴면서 아래서 위로 목검을 쳐 날려버렸다. 

"앗!" 

졸지에 목검을 놓쳐버린 소녀는 손목에 찌르르, 통증을 느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통증보다도 패한 것이 더 분한 듯 얼굴이 온통 상기되어 있었다. 

노인은 목검을 내리며 부드러우면서도 위엄 있게 말했다. 

"소저는 비록 깨우침이 빠른 편이나 기법(技法)에만 급급하고 있소. 더구나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좋지 않은 자세요." 

소녀는 아픈 손목을 주무르며 코웃음쳤다. 

"흥! 잘난 척 말아요, 내가 진 건 당연한 거예요. 검선생은 나보다 무공을 배운 시 

간이 길잖아요?" 

그녀는 앙칼지게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길 거예요." 

그녀는 톡 쏘아 부치며 찬바람이 나도록 몸을 돌려 버렸다. 

반백노인 검선생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헛! 그 성질 하나만큼은 어떤 남자 못지 않군." 

그는 연무장을 가로질러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소녀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 

었다. 

'상관장주는 아들은 없어도 별로 섭섭하지 않을 게야. 분명 소저는 장차 용문전장의 

훌륭한 후계자가 될 테니까.' 

그는 바닥에 떨어진 소녀의 목검을 주으며 껄껄 웃었다. 

"허허헛! 열 명의 사내를 합친 것보다 나으니 말이야!" 

한편, 상관수아(上官秀娥)는 분하기 그지없었다. 

이번만은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 검선생을 한번도 이긴 적이 없었으 

나 며칠 전부터 벼르고 별러 웬만큼 자신이 붙었던 것이다. 물론 결과는 참패였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숨을 색색거리며 종종걸음쳤다. 

'두고 봐! 언젠가는 검선생의 그 잘난 척하는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녀는 몇 채의 건물을 지나 한 채의 별원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기거하고 있는 자 

매원(紫梅院)이었다. 

그녀가 막 자매원 안으로 들어가려는 데 시녀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장주님께서 용문각(龍門閣)에 들르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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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지?" 

상관수아는 빠르게 되물었다. 시녀는 방긋 웃었다. 

"남창의 옥류향(玉柳香) 공자님께서 오셨답니다." 

"뭐? 옥공자님이?" 

상관수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언제 기분 나빴느냐는 듯 활짝 웃음꽃을 피우 

며 말했다. 

"좋아. 지금 가볼게." 

다음 순간 그녀는 냅다 앞으로 달렸다. 시녀는 당황하여 부르짖었다. 

"아가씨! 옷을 갈아 입으셔야지요?" 

상관수아는 방금 전 검법 대련을 하느라 온통 땀에 젖은 경장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벌써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고 보이지 않았다. 

시녀는 그만 두 손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할 수 없어. 아가씨는." 

상관수아- 그녀는 용문전장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요, 말괄량이였다. 

금월사(金月寺). 

개봉부 외곽에 있는 자그마한 절이다. 상주하는 승려가 불과 십여 명밖에 안 되는 

한적한 곳이었다. 

금월사는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었으나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이따금 풍치를 감상하 

기 위해 명문대가의 귀공자들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매미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청아하게 울리는 처마 끝의 풍경소 

리만이 전부인 곳이다. 

선방(禪房).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 명은 노승이었는데 어찌나 늙었는지 인간사의 희 

로애락마저 잊어버린 듯한 주름 가득한 얼굴에는 표정을 엿볼 수 없었다. 

맞은편에는 흑삼청년이 앉아 있었다. 검소한 흑의에 머리카락은 길게 등뒤로 늘어뜨 

린 차림이었다. 별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는 눈과 진한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바로 장천린이었다. 

조용한 선방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이따금 떨어지는 바둑돌 소리 뿐. 

반상의 국면을 살펴보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장천린은 공격적인 바둑을 두고 있었 

고, 반면 노승은 세력바둑이었다. 두 사람의 대국은 팽팽한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국면은 점차 장천린에게 유리해져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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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은 미간을 좁힌 채 손가락 사이에 바둑알을 굴리며 고민에 빠진 듯했다. 

"대세가 기운 듯하군요." 

장천린의 말에 노승은 웃었다. 

"허허, 용시주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오." 

그는 반상을 내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장고에 들어가야 할 것 같소이다." 

장천린은 노승을 바라보았다. 노승의 이마에 주름이 짙게 잡히고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담운(曇雲) 노스님은 백 세가 넘어 속세의 일을 달관했는데도 아직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 만은 남아 있구나.' 

그는 쓴웃음을 흘리며 바둑돌을 통 속에 넣었다. 

'이런 분도 이렇거늘 다른 인간들이야 속세에 살면서 욕심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긴 

나 역시 그 범주를 빗나가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지.'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소생은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스님." 

"......." 

노승 담운은 골똘히 생각하느라 그의 말을 못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장천린은 그 

를 뒤에 두고 선방을 나섰다. 

금월사는 아담한 규모였으나 주변 공기가 맑고 절의 건축미도 아름다웠다. 그는 대 

웅전을 향해 걸어갔다. 

대웅전을 막 지나치는데 한 중년승인이 다가오더니 합장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바둑이 끝났나 보군요, 시주님."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아닙니다. 노선사께서 장고에 드셨기에 바람 좀 쐬러 가는 중입니다." 

"허허, 그러시군요. 절문 앞 경치가 빼어납니다. 한번 둘러보고 오시지요." 

장천린은 품속에서 은덩어리 한 개를 꺼내 주었다. 

"스님, 얼마 안되지만 사찰을 위해 써 주시겠습니까?" 

중년승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는 은덩이를 두 손으로 받으며 연신 굽실거렸 

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시주님!" 

중도 돈은 좋은 모양이었다. 중년승인은 은덩이가 묵직한 것을 확인하고는 좋아서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고 있었다. 그는 은덩이를 황급히 소매 속으로 집어넣으며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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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중얼거렸다. 

'흐흐, 이 돈이면 오늘밤 저자로 내려가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 아니. 

.. 향월(香月)이 년과도 며칠은 즐길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침이 줄줄 흘렀다. 

한편 장천린은 그의 표정을 보고 짐작되는 바가 있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세상이 탁세라지만 이 작은 사찰도 예외 없이 썩었구나!' 

혼탁한 세상이었다. 

명조는 부패의 극을 치닫고 있었다. 황실은 타락한 지 오래였으며 간신 모리배와 환 

관들의 득세로 올바른 말을 하는 자를 찾기 힘들었다. 

윗물이 썩었으니 어찌 아랫물이 맑으랴. 지방 관속들의 부패는 더욱 극에 달해 백성 

들은 관부의 수탈에 신음하고 세상 인심은 나날이 고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절간 

의 중이 타락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는 세상이었다. 

장천린은 씁쓸한 기분으로 산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뒤에서 중년승인의 아첨 어린 음성이 들렸다. 

"아미타불, 오늘밤엔 용시주님을 위해 불공을 드리겠습니다." 

장천린은 혀를 찼다. 

'쯧! 부처님의 귀가 백만 개라 해도 당신의 불공을 들어줄 리는 없을 게요.' 

잠시 후 그는 산문 밖으로 나왔다. 

과연 소문대로 금월사 인근의 풍광은 가히 절경(絶景)이었다. 조금만 나가니 눈앞이 

탁 트인 가운데 아스라이 평야가 보였으며, 구비치는 계곡 사이로는 맑은 물이 흘 

러내리고 있었다. 

금월사가 있는 곳은 그다지 높은 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풍치가 감탄을 우 

러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절경인들 무엇하겠는가? 

장천린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할 뿐이었다. 

더 이상 경치를 감상할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 

문득 산 아래쪽으로부터 한 명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띠었다. 그 자는 흑의를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흑의인은 각별히 눈길을 끌었다. 

"......?" 

안력을 돋궈보니 흑의인은 낡은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끌린 이유는 

딴 데 있었다. 그것은 흑의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고독감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멀 

리서도 메마른 느낌이 확연히 전달되었다. 

흑의인의 안색은 창백했다. 마치 평생 햇빛 한번 안 본 사람 같았다. 기이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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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을 손목까지 흰 천으로 칭칭 감고 있었으며 등뒤에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짚단으 

로 둘둘 만 물건을 메고 있었다. 

또한 역시 흰 천으로 감싼 네모난 상자를 받쳐든 채 산을 오르고 있었다. 

흑의인이 가까워지자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저 자는?' 

그는 가슴이 진동했다.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아직도 똑똑히 그 자를 만났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 년쯤 전이던가? 제남(齊南)에서 그와 스친 적이 있었다. 

당시 장천린은 그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 그런데 일 년 여 만에 다시 보는 

청년의 모습은 당시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한층 더 고독하고 메마른 분위기가 짙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손에 하얀 상자 

하나가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이때, 흑의청년도 장천린을 발견했다. 그는 힐끗 고개 들어 쳐다보았으나 아무런 표 

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까이 이르자 걸음을 멈추더니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의외로 정중한 태도였다. 

장천린은 우선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 보시오." 

"이 근처에 금월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장천린은 흠칫했다. 금월사라면 바로 자신이 묵고 있는 곳이 아닌가. 그는 즉시 대 

답해 주었다. 

"곧바로 올라가시면 바로 금월사요." 

"감사합니다." 

청년은 고개를 숙인 후 지나가려 했다. 장천린은 급히 물었다. 

"귀공, 우리는 초면이 아닌 것 같소. 그렇지 않소?" 

청년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눈길을 들어 장천린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일 년쯤 전 제남에서 한번 뵌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두 번씩이나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는 꽤나 인연이 

깊은 것 같소이다." 

청년은 조용히 말했다. 

"그렇군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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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소생은 시간이 없어서 이만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그는 장천린이 뭐라 하기도 전에 그의 곁을 지나쳐 걸어갔다. 장천린은 입맛을 다셨 

다. 

'무척이나 인상이 깊은 친구인데.' 

그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청년은 일정한 속도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품에 안고 있는 건 유골상자 같은데. 저 자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장천린은 곧 피식 웃었다. 

'단 두 번, 그것도 의미없이 지나친 사이인데 지나친 관심을 가질 필요야 있나?'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원계묵에게 심부름을 보냈었다. 원계묵은 그를 호위할 사람이 없다고 가지 않겠다 

고 우겼다. 

"이 사람, 날 평생 묶어둘 생각인가? 그러지 말고 다녀오게. 이곳은 한가한 곳인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원계묵은 그래도 망설였다. 

"하지만 백살대도 없는 마당에......." 

"하하, 글쎄 괜찮다니까." 

결국 원계묵을 억지로 보냈던 것이다. 

"홀가분하군." 

장천린은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혼자 있게 되니 허전한 기분도 있었지만 반면에 자유로운 느낌도 들었다. 사람에게 

는 어느 정도 개인적인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장천린은 간만의 개인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유스런 기분을 만끽할 겸 서서히 산중으로 접어들었다. 어느덧 

금월사에서 꽤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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