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사검(邪劍) (29/87)

제5장 사검(邪劍) 

계곡을 오르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몸에 꼭 맞는 백색의 경장을 입은 발랄해 보이는 소녀와 영준하게 생긴 미청년이었 

다. 

소녀는 천하제일의 재산가 용문전장주의 금지옥엽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상관수아. 

말괄량이로 소문난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몹시 흥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동행하는 청년은 옥류향(玉柳香)이란 자였다. 

그는 이십 오륙 세 정도 되었는데 옥같이 흰 피부에 조각처럼 섬세한 오관을 갖춘 

절세미장부였다. 여인들의 밤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준수한 청년과 단둘이 산책을 

나온 것이었다. 

옥류향은 누구인가? 

그는 만금산장의 장주 금백만의 양자로 금백만이 죽은 후 강남의 상권을 일시에 장 

악해버린 상술의 천재로 알려져 있었다. 

"호호!" 

상관수아는 방울소리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갔다. 

그녀는 아직 경장 차림이었다. 본래부터 격식이나 예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이므로 매사에 적극적이라 다람쥐처럼 계곡을 오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옥류향을 알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이었다. 상거래를 위해 용문전 

장에 들렀는데 부친이 소개해서 친해지게 되었다. 

그녀는 옥류향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녀가 반한 것은 그가 강남제일의 

청년거부라서가 아니었다. 그의 준미한 용모와 다정다감한 태도가 말괄량이 소녀의 

방심(芳心)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옥류향은 용문전장을 찾을 때마다 그녀와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상관수아는 그가 오기만 하면 떼를 쓰다시피 하여 바람을 쐰다, 구경을 간다하여 끌 

고 나가곤 했었다. 

얼마쯤 뛰어 올라갔을까? 

옥류향은 비단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밴 땀을 닦았다. 그는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 

다. 

"날씨가 무척 덥죠?" 

상관수아는 그를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옥류향도 빙긋이 웃었다. 

"사실, 상관소저만 아니라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오." 

바로북 99 70

"훗!" 

상관수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가볍게 나무랐다. 

"아무래도 옥공자님은 몸이 너무 약해요. 그러니 무공을 배우세요." 

옥류향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시간 낭비요. 무공은 무사들이나 배우는 것이오." 

이어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무릇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소. 따라서 자신에게 맞는 일을 수행하 

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라오. 하물며 이 옥류향은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어찌 무공 

따위를 익힐 수 있겠소?' 

상관수아는 그렇지 않다는 듯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험해요. 살다 보면 예상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아요? 그 

러니 무공을 익혀두는 것이 나쁠 건 없잖아요?" 

옥류향은 미소 지었다. 

"그건 그렇지 않소. 황금만 주면 얼마든지 일류무사를 살 수가 있소. 그들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오." 

"음. 하긴." 

상관수아는 그 말에 수긍했다. 그녀 역시 거부의 딸이므로 누구보다도 황금의 위력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작은 반발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실상 부호의 딸이면서도 그녀 자신이 무공을 배우는 이유는 황금이 할 수 없는 가치 

때문이었다. 실상 그녀는 무엇이든 지는 게 싫었다. 따라서 상술이든 싸움이든 다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틈틈이 무공을 배우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옥류향을 슬며시 훔쳐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옥공자는 확실히 보기 드문 기재이셔. 용모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학식도 풍부하거 

든. 하지만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무 심약한 게 탈이야.' 

그녀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때 옥류향이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관소저, 소생이 허약하다고 여기시는 모양이구려?" 

상관수아는 찔끔했다. 그가 자신의 내심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맞아요. 솔직히 그래요." 

옥류향은 담담히 말했다.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들은 무수히 많소. 그 중에서도 뺄 수 없는 것은 용기요. 

하지만 무(武)를 바탕으로 한 용기는 진정한 용기가 아니오. 진정한 용기란 마음속 

에 있는 법이오." 

71 바로북 99

상관수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 얘긴 그만 하죠." 

그녀는 주위를 살펴보며 쾌활하게 말했다. 

"우리 좀 더 걸어요." 

옥류향은 빙긋이 웃으며 동의했다. 

"좋소, 소저." 

'대인, 주위에 수상한 자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들려온 전음에 옥류향의 안색이 흔들렸다. 

'방향을 바꾸십시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다시 전음이 들려왔다. 옥류향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실 그가 어디로 움직이든 간에 비밀리에 호위하는 자들이 있었다. 특히 그의 신변 

에는 열두 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일급고수들로, 신산 제갈사 

가 붙여 준 인물들이었다. 

물론 계곡을 오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게 호위하고 있었다. 

'대체 누가 접근한단 말인가?' 

옥류향은 의혹을 느꼈다. 

'설마 날 노리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조화성?' 

여기까지 생각한 옥류향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그렇다. 놈들은 금대인이 죽은 후 목표를 바꾸었을 것이다. 이번엔 내가 표적이 될 

차례다.' 

옥류향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무서운 놈들. 개봉부에 온 것은 극비사항인데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옥류향은 비록 단단히 마음은 먹었으나 그렇다고 겁을 내지는 않았다. 

그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항상 그를 따르는 십이인의 고수, 즉 천원십이검(天圓十二

劍)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옥류향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낭랑하게 말했다. 

"상관소저, 저쪽으로 갑시다." 

상관수아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쪽은 구경할 게 없어요. 금월사 쪽이 경치가 더 좋은 걸요." 

옥류향은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저쪽부터 갑시다. 금월사로 갈 시간은 충분하지 않소?" 

72 바로북 99

"그럴까요?" 

상관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잠시 내려가자 맑은 물이 흐르는 

계류가 나타났다.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물 속에 곳곳에 산재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옥류향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 적당하군.' 

그는 갑자기 엄숙하게 말했다. 

"상관소저, 절대 당황하지 마시오." 

상관수아는 흠칫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뜻이죠?" 

옥류향은 대답 대신 침착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때였다. 

스스슷! 

숲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인영들이 속속 나타났다. 수십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었다. 그들은 모두 흑의에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민첩한 신법으로 두 사람을 포위했 

다. 

상관수아는 아미를 성큼 치켜올렸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죠?" 

그녀는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바짝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바로 남창의 옥류향이냐?" 

복면인 중 한 명이 옥류향을 노려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옥류향은 조금도 흔 

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소만, 당신들은 누구요?" 

복면인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누군지는 알 필요 없다. 다만 죽어 주면 된다." 

창창창!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복면인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순식간에 주위에 살 

벌한 예기가 가득 찼다. 

바로 그때. 

획획휙!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허공으로부터 십이인의 흑영이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로 등에 장검을 메고 있었는데 눈빛이 형형한 것이 상 

당한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73 바로북 99

그들은 옥류향의 앞을 가로막았다. 

혹의인들은 뜻밖의 사태에 움찔하는 기세였다. 옥류향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 

라보며 물었다. 

"누가 날 죽이라고 명령했는가?" 

우두머리 흑의인이 음침하게 말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옥류향!" 

그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 너만 죽이면 우리의 임무는 완수다." 

다음 순간. 

"쳐라!" 

그는 칼을 뻗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장내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흑의 복면인들 

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십이인의 흑삼청년들 중 한 명이 차갑게 외쳤다. 

"둘째와 셋째는 대인과 상관소저를 보호해라! 나머지는 놈들을 척살해라!" 

카캉! 쩌저정!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과 십이인의 청년들이 드잡이질을 시작 

했다. 상관수아는 그 광경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대낮에 살인을 하려 하다니!' 

한편 그녀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대체 저 자들이 옥공자님을 죽이려는 이유가 뭘까?' 

물론 그녀는 옥류향의 신변에 얽힌 비밀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싸움을 지켜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옥류향은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소문대로 대담한 소저로군.' 

싸움은 치열했다. 수적으로는 흑의 복면인들이 월등히 많았다. 그러나 무공실력으로 

본다면 흑삼청년들, 즉 천원십이검이 강했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흑의 복면인 한 명의 팔뚝이 날아갔다. 그가 팔을 잃은 비틀거리는 순 

간 천원육검의 검이 심장을 관통했다. 

"......!" 

상관수아는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대담하다해도 역시 여자였다. 때마침 떨어져 나 

간 흑의인의 팔뚝이 그녀의 발아래 떨어져 펄떡펄떡 뛰는 것이 아닌가? 

'욱!' 

74 바로북 99

그녀는 구토를 느끼며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때, 흑의복면인의 우두머리가 고함쳤다. 

"무엇들 하느냐? 옥류향부터 처치해라!" 

그러자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몸을 빼며 옥류향을 향해 덮쳤다. 

"어딜!" 

번... 쩍! 

천원이검과 삼검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크... 악!" 

다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천원십이검의 우두머리가 가공할 검법으로 두 명의 

흑의인의 허리를 양단한 것이었다. 

한편, 옥류향은 위기에 몰렸다. 한 명의 흑의인이 천원이검과 삼검의 저지를 피해 

지척에 이른 것이다. 그러자 곁에 있던 상관수아가 앙칼지게 외치며 발길질을 했다. 

"나쁜 놈!" 

슈슉! 

상관수아의 발길질은 원앙각(鴛鴦脚)이었다. 그녀의 작은 발은 흑의인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흑의인은 하마터면 낭심을 얻어맞을 뻔했으나 다급히 피해냈다. 

"이제 보니 계집이 잔재주를 조금 익혔군!" 

쐐... 액! 

그는 낭아도(狼牙刀)로 상관수아의 젖가슴을 향해 그었다. 신랄무비한 공격이었다. 

"흥!" 

상관수아는 바닥에 떨어진 검 한 자루를 발끝으로 걷어찼다. 검은 빙글 떠올랐다 그 

녀의 손에 잡혔다. 검을 잡자마자 그녀는 흑의인을 향해 공격했다. 

가가각! 

그녀의 검법은 교묘했다. 상대의 도를 쳐 방향을 어긋나게 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안쪽으로 파고들며 연속 칠팔검(七八劍)을 공격했다. 흑의복면인은 문호가 열린 채 

허둥지둥 뒷걸음질쳤다. 

옥류향은 눈을 크게 떴다. 

'대단하군! 비록 검선생의 지도를 받았다고는 저 정도일 줄은 몰랐군.' 

어느새 흑의복면인들은 십여 명이 거꾸러졌다. 천원십이검은 장내를 장악한 상태였 

다. 상관수아와 싸우던 흑의인도 천원팔검이 맡아 상대했다. 

상관수아는 검을 거둔 채 가쁜 숨을 쉬었다. 그녀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실전 

이라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75 바로북 99

옥류향은 침착하게 정세를 판단했다. 

'이놈들의 목적은 날 제거하여 강남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상관수아가 다가오자 그는 빙긋이 웃었다. 

"소저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소." 

상관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무공을 더 익혀야겠어요. 저런 무림의 잡배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이런 

수치가 어딨어요?" 

옥류향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군. 조화성의 무사들을 잡배 취급하다니.' 

그렇다. 흑의복면인들은 사실 일류고수들이었다. 단지 천원십이검의 무공이 더 강하 

기에 일방적으로 밀려 보일 뿐이었다. 

흑의인들은 절반 이상이 쓰러졌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달아날 구멍을 찾는 듯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척살하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천원십이검의 우두머리가 칼칼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는 흑의인들을 전멸시킬 생각 

인 듯했다. 그때였다. 

"신산은 정말 대단한 수하들을 두었군." 

어디선가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음랭한 음성이었다. 

숲으로부터 한 사나이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마의(麻衣)를 입은 중년인이었는 

데, 왼쪽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 애꾸였다. 

한손에 고검(古劍)을 든 그는 전체적으로 황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사나이. 

이름은 막청(莫靑). 

무정도(無情刀) 모용초의 친구로 천산(天山)에서 신산을 죽일 임무를 띠고 중원으로 

들어온 막청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구인의 흑의인들은 그가 나타나자 만면에 안도의 빛을 떠올렸다. 

막청은 무심한 표정으로 천천히 천원십이검을 향해 다가갔다. 

"귀하는 누구요?" 

천원일검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물었다. 막청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조화성에서 왔소?" 

두 번째 질문 역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가의 미소가 점점 짙어질 뿐이었 

다. 그의 미소에는 음산한 비린내가 묻어있는 듯했다. 

76 바로북 99

천원일검은 뒤로 물러섰다. 

"아홉째! 처리해라." 

"옛!" 

슈... 악! 

천원구검이 즉각 검을 날리며 덮쳤다. 막청은 검을 뽑지 않았다. 검집 만으로 천원 

구검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버렸다. 그리고 좌수로 느릿하면서도 확실하게 뻗었다. 

그의 수도는 천원구검의 갈빗대 아래를 파고 들어갔다. 

"흑!" 

천원구검은 숨이 콱 막혔다. 막청은 손가락으로 갈빗대를 위로 들어 올렸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크아아악!" 

천원구검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붕 떠올랐다 일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실로 어이없게 죽은 것이다. 

이 일련의 사태는 너무도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 막청의 동작은 모든 사람들이 보았 

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천원구검은 죽음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 

이제 천원십일검이 된 청년들은 멍청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경악은 잠시 뿐, 그들은 

재빨리 막청을 포위했다. 

"쳐라!" 

천원일검의 살기에 찬 외침과 함께 십일인의 검이 일제히 막청을 향해 날아갔다. 

위이이잉! 

검광이 작렬하고 귀청을 찢는 듯한 검풍이 일어났다. 막청의 얇핏한 입술에 차가운 

조소가 떠올랐다. 그는 신형을 뒤로 활처럼 굽히면서 오른손 엄지로 검자루를 밀었 

다. 

스륵! 

오후의 햇살이 조금 밀려나온 검신에 비쳐 한광을 뿌렸다. 찰나적으로 검이 검집에 

서 발출되었다. 섬뜩한 한광이 달무리처럼 허공에 호선을 그렸다. 그것을 바라보던 

상관수아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아!" 

단 일검(一劍)! 

달무리 같은 검광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며 터져 나왔다. 동시에 두 명이 

뒤로 날아갔다. 두 청년은 옆구리에서 시뻘건 선혈이 분출되면서 바닥을 몇 바퀴 뒹 

굴다가 잠잠해졌다. 

77 바로북 99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단말마의 비명이 연속적으로 들렸다. 천원십일검은 마치 썩은 짚단처럼 거꾸러지고 

있었다. 막청의 검이 스치는 곳에는 한 치의 어김도 없이 피가 튀었다. 실로 상상도 

못할 가공할 살검(殺劍)이었다. 

"......!" 

땅을 딛고 있는 것은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는 천원일검이었다. 두 눈에 경악과 불신을 가득 담은 채 스스로의 검으로 바닥을 

짚고 간신히 서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검을 짚고 신형을 버티고 있을 뿐, 그의 목에 

붉은 혈선이 생기더니 주르륵, 핏물이 배어 나왔다. 

"너는... 대체... 누구냐?" 

그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막청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산검부(天山劍府)의 사검(邪劍) 막청(莫靑)이라면 알겠느냐?" 

"네... 네가... 그......?" 

쿵! 

그것이 끝이었다. 천원십이검의 영수도 황천으로 가고 말았다. 그는 바닥에 큰 대자 

로 쓰러졌다. 그러나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부릅뜬 눈에는 경악이 가득 담겨 

져 있었다. 

사검(邪劍) 막청의 등장! 그로 이해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막청은 천원십이검을 짚단처럼 베어버린 후에도 여전히 무표정하기만 했다. 

그는 피묻은 검을 한 시체의 옷에 문질러 닦고는 검집에 꽂았다. 

저벅, 저벅. 

그는 규칙적인 걸음으로 옥류향과 상관수아를 향해 다가왔다. 

"......!" 

상관수아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도무지 겁을 모르는 소녀였다. 그러 

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후들후들 떨렸다. 

막청은 그녀에게는 일별조차 주지 않은 채 옥류향 앞에서 멈추었다. 

"네가 옥류향이냐?" 

"그렇소." 

옥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청은 무심한 애꾸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78 바로북 99

"나는 말 많은 것을 싫어한다. 간단히 묻겠다. 신산 제갈사는 어디 있느냐?" 

옥류향은 도리어 반문했다. 

"제갈사가 누구요?" 

막청의 얄팍한 입술에 미소가 어렸다. 

"꽤 많은 말이 필요하겠군." 

슉! 

그의 검자루가 움직였다. 검자루는 일직선으로 옥류향의 복부에 쑤셔 박혔다. 

"욱!"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옥류향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복부가 찢어지는 듯한 격통 

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절로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때 벌벌 떨고 있던 상관수아가 이를 갈며 외쳤다. 

"이... 악적!" 

그녀는 들고 있던 검으로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막청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검집째 

로 빙글 돌렸다. 

"악!" 

상관수아는 옆구리에 검집이 박히는 것을 느끼며 짧은 비명과 함께 나가 떨어졌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막청은 발끝으로 옥류향의 혈도를 짚은 후 장내에 남아있는 구인의 흑의복면인들에 

게 명령했다. 

"두 명은 시체를 묻은 다음 계집을 처리해라. 나머지는 날 따라오도록." 

"옛!" 

흑의인들이 일제히 대답하는 순간 막청은 신형을 날렸다. 그는 한 줄기 빛살처럼 어 

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일곱 명의 흑의인들은 급히 옥류향을 떠메고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뒤따라 갔다. 장 

내에는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검을 뽑았다. 

"......!" 

상관수아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으나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때 목에 차 

가운 검끝이 닿았다. 흑의인이 그저 살짝 밀기만 해도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흐흐흐!" 

흑의인은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눈에서 불현듯 음탕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서서히 검을 움직였다. 

79 바로북 99

톡. 

단추가 떨어졌다. 상관수아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 

다. 반항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단추가 검끝에 잘려 떨어졌다. 상관수아는 울부짖었다. 

"그만둬요! 제발." 

흑의인은 오히려 흥이 난다는 듯이 괴소를 흘렸다. 

"흐흐, 앙탈하는 모습이 더욱 예쁘군." 

찌익! 

비단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상관수아의 상의가 아래로 갈라졌다. 동시에 뽀얀 젖 

가슴의 일부분이 노출되었다. 

"크큿! 볼만한데?" 

흑의인은 검끝으로 젖가슴을 슬슬 문질렀다. 상관수아는 차가운 검날의 감촉도 감촉 

이려니와 엄청난 모욕감에 악을 썼다. 

"더러운 놈들! 차리리 죽여라!" 

"음?" 

두 흑의인은 같잖다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호오, 아직도 입은 살아 있군?" 

흑의인은 검을 아래로 그었다. 그러자 속옷은 물론 경장 바지까지 그대로 길게 갈라 

져 버렸다. 두 흑의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비록 완전히 성숙하지는 않았으나 

팽팽하게 여물은 소녀의 젖가슴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박속 같이 하얀 아랫배와 귀엽게 패인 배꼽, 그리고 그 아래까지 아슬아슬하게 드러 

난 것이다. 

'아아!' 

상관수아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태어난 이래 이런 수치와 모욕은 처음이 

었다. 그녀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이 모욕은 천 배 만 배로 갚아줄 테야!' 

아무리 그래도 현실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차가운 검날이 젖가슴을 희롱하 

는 것을 느끼며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죽는 건 싫었다. 정말이지 죽으면 아 

무 것도 남는 게 없는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날... 어쩔 셈이냐?" 

흑의인은 침을 삼켰다. 

80 바로북 99

"흐흐, 너 같은 미인은 그리 흔치 않지. 그냥 죽이기엔 아깝거든. 좀 데리고 논 다 

음 이 검으로 흐흐......." 

흑의인은 검끝으로 상관수아의 배꼽 아래를 살짝 찔렀다. 

"악!" 

상관수아는 비명을 질렀다. 

"흐흐흐!" 

흑의인은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바지를 더 이상 찢지 않은 채 검날을 옮겨 그녀의 

목에 대었다. 연후 손을 뻗어 상관수아의 젖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다른 한 명의 흑의인도 탐욕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동료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상관수아는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한번도 타인에게 보인 적이 없는 소중한 젖가슴을 

치한이 멋대로 주무르다니! 그녀는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흑의인은 연신 침을 흘리며 이번에는 그녀의 아랫배를 향해 손을 밀어 넣었다. 

"끄아악!" 

갑자기 그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벌어진 입으로부터 한 

자루의 비수 끝이 불쑥 튀어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상관수아의 목에 대고 있던 검날이 움 

직였다. 

"악!" 

상관수아는 목이 선뜻함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누, 누구냐!" 

다른 한 명의 흑의인은 경악성을 지르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유령처 

럼 한 사나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네놈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사나이의 손바닥이 그의 가슴에 붙었다 떨어졌다. 

"우... 악!" 

그는 상대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시커먼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천과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나이. 그는 장천린이었다. 

그는 금월사에서 산책 삼아 주변을 거닐다 우연히 이 사태를 목격하고 나타난 것이 

었다. 

"......." 

그는 묵묵히 두 흑의인의 시신을 내려보았다. 그의 심정은 약간 착잡해졌다. 본래 

81 바로북 99

상인 출신인 그는 인명을 해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해 왔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으나 두 흑의인을 죽이고 보니 마음이 언짢았단 것이다. 

두 구의 시체를 내려보던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음, 그러고 보니 이들의 복장은 삼 년 전 만가산(萬家山)에 나타났던 조화성의 무 

사들과 같구나.' 

장천린은 섬뜩해졌다. 

'그렇다면 이들도 조화성의 인물이란 말인가?' 

그의 얼굴에 의혹이 일어났다. 

'그들이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고개를 돌려 상관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쪽에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민망한 모습이었다. 옷자락이 잘라져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젖가 

슴이 노출되어 있었다.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상처부터 살펴보았다. 목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다행히 급소만은 피했구나. 위험천만이었다.' 

그는 상관수아의 옷을 여며주며 더욱 의혹을 느꼈다. 

'대체 어떤 소녀이기에 조화성의 무사들이 죽이려는 것일까?' 

그는 주위에 쓰러져 있는 수십 구의 시체들을 둘러보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지난 날 

만가산에서 있었던 일이 새삼스레 떠오른 것이다. 

'일단 치료부터 해야겠다.' 

그는 상관수아를 안고 금월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금월사(金月寺)의 선방 안.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장천린은 상관수아를 내려다보며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담운 노선사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담운은 말끝을 흐렸다. 

"아미타불. 심한 성처는 아니오. 하지만......." 

담운은 상관수아가 다친 연유를 묻지 않았다. 다만 장천린이 그녀를 데리고 왔을 때 

무슨 까닭인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염주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허허, 임술년(壬戌年) 임오(壬午) 미시(未時)라, 허어! 이럴 수가." 

장천린은 의아하여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담운은 주름진 눈에 짙은 그늘을 지었다. 

82 바로북 99

"아니외다. 이 늙은 중의 헛소리 외다." 

그는 손가락으로 상관수아의 목 한 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상처에 흐르던 피 

가 멈추었다. 간단히 지혈(止血) 시킨 것이다. 

담운은 흰 천으로 상관수아의 상처를 싸맸다. 그 전에 천에 무언지 모를 끈끈한 고 

약 같은 것을 발랐다. 상처를 대충 처치한 후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이 엄 

숙하게 변해 있었다. 

"용시주, 부탁이 있소. 여시주가 깨어나는 즉시 함께 금월사를 떠나 주시오." 

장천린은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노선사님,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미타불, 그런 것이 아니오." 

"하오시면?" 

담운은 탄식했다. 

"아아, 여시주와 용시주가 금월사에 머물게 되면 두 분은 물론 금월사 조차도 감당 

할 수 없는 화를 입기 때문이라오." 

장천린은 담운을 바라보았다. 노승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로 가득하여 희로애락의 감 

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무른 눈가에 짙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장천린은 난색을 지으며 말했다. 

"소생은 이틀 후 이곳에서 사람들과 만날 약속을 해 두었습니다." 

담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셨다가 이틀 후 다시 오십시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한 연후 고개를 끄덕였다. 

"선사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조용한 절간에 본의는 아니나 아녀자를 데려온 것 

이나 피냄새를 풍기게 한 것은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담운은 미소지었다. 

"아미타불,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장천린은 생각난 듯 물었다. 

"참, 한 시진쯤 전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까?" 

담운은 안색이 변했다. 

"알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왔었지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객당에 있소이다." 

83 바로북 99

"그가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도 될까요?" 

담운은 합장했다. 

"아미타불... 부친의 유골을 모시고 백일불공을 부탁하더군요." 

"음." 

장천린은 신음을 흘렸다. 담운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 젊은 시주도 다른 곳을 찾게 해야할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의아했지만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생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 동안이면 저 소녀가 깨어날 것입니다." 

장천린이 막 선방을 벗어나려는데. 

"용시주." 

담운이 부르는 바람에 그는 걸음을 멈추며 돌아섰다. 

"귀찮지 않다면 이 늙은 중의 몇 마디를 들어주시겠소?" 

장천린은 공손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스님, 하명하십시오."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담운은 고개를 끄덕인 후 감회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허, 이 나이가 되도록 이 늙은 중은 능력과 불도(佛道)가 모자라 해탈하지 못했 

소. 그래서 백 세가 훨씬 넘었는데도 이 작은 절간에서 돌중 아이들 몇몇을 데리고 

주저앉아 있소이다." 

"......." 

"실상 이 늙은 중과 함께 불도에 입문했던 분들 중에는 일찍이 해탈한 사람도 있고 

또 그 중에는 성승(聖僧)이 된 분도 있지요." 

담운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내렸다. 

"아미타불, 오직 빈승만이 아직도 세속의 욕망을 버리지 못해 이렇게 추하게 늙었소 

이다."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소생은 노선사님이야말로 진정한 불도를 깨우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허, 날 위로해 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이 늙은 중도 한 가지 

재주만은 자부하고 있다오. 그것은 사람의 상(相)을 조금 볼 줄 아는 것이고 또한 

천기(天機)에 대해서도 약간은 내다본다는 것이외다."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았다. 담운에 대해 기이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84 바로북 99

담운은 시선을 돌려 바닥에 누워있는 상관수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흰 눈썹이 가늘 

게 떨리고 있었다. 

"이 분 여시주를 잘 보호하시오. 여시주와 용시주는 전생부터 강한 인연이 맺어진 

사이요. 만일 용시주가 일 년만 더 늦게 이 여시주를 만났다면 그 인연은 끊어졌을 

것이외다." 

"......!" 

장천린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운은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허허, 남녀간의 일은 이 늙은 중이 잘 이해하지 못하겠소만 아무튼 이 여시주는 장 

차 용시주의 운명을 바꿀 만큼 큰 작용을 하게 될 것이오." 

장천린은 고개를 돌려 상관수아를 바라보았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험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 이상으로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과 그토록 강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니. 그는 반신반의했 

다. 

담운은 염주를 굴리며 말했다. 

"빈승은 용시주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용시주의 양손에 난세(亂世)의 천하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천린은 다시 한번 놀랐다. 담운의 말은 어딘가 심오한 데가 있었다. 

"아미타불... 용시주, 훗날 기회가 닿는다면 필히 두 사람을 만나 보십시오." 

"어느 분을 말입니까?"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에 끌려들며 물었다. 담운의 흐릿하기만 하던 노안 

이 한 순간 기이한 광채로 빛났다. 

"그 두 분은 용시주의 앞날에 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고 빈승은 생각합니다." 

"어떤 분이시기에?" 

"북경 보광사(菩光寺)의 해우선사(海宇禪師)와 항주(抗州) 천불동(千佛洞)에 계시는 

반가노선사(盤伽老禪師)를 찾아보십시오. 필히 얻는 바가 있을 것이오." 

장천린은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해우선사라면?' 

북경의 태진왕(太眞王)이 그에게 당부한 적이 있었다. 만일 자신이 죽는다면 보광사 

의 해우선사를 찾으라고 했었다. 

장천린은 알 수 없는 운명의 끈이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실 

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태진왕의 부탁과 한적하고 보잘 것 없는 한 산사의 노승 

담운에게서 똑같은 해우선사란 이름이 나온 것이다. 

85 바로북 99

그는 담운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 담운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빈승의 말은 이제 끝났습니다." 

축객령(逐客令)이었다. 장천린은 정중히 인사했다. 

"말씀 감사히 들었습니다. 그럼." 

그는 선방을 물러 나왔다. 

담운은 망연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한동안 넋을 잃은 듯한 모습이 

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미타불." 

그는 합장을 했다. 

"부디 저 젊은 영웅의 앞날에 부처님의 자비가 깃들기를." 

86 바로북 9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