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장 신산(神算)의 암계 (36/87)

제12장 신산(神算)의 암계 

산바람에 청아한 풍경소리를 울리며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전파하던 금월사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화마가 휩쓸고 지난 지 수 시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잔해에서 

는 연기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적막한 달빛 아래 보이는 폐허의 모습은 음산한 느낌마저 준다. 거기에 멀리서 들려 

오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가세하니 이곳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문의 정토(淨土) 

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두두두두......! 

산로를 따라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금월사로 향하는 산로로 수십 기의 인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실로 엉 

망이었다. 악전고투를 치른 듯 옷은 찢겨지고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기마대의 선두에는 청수한 용모의 중년인이 타고 있다. 

그는 바로 신산(神算) 제갈사였다. 

그들은 상관수아를 구하기 위해 용문전장에서 나온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금월사에 당도했다. 

히히힝! 

기마대가 폐허가 된 금월사 앞에서 정지했다. 

"......!" 

제갈사는 잿더미가 되버린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역시... 일이 있었다. 금월사마저 이 지경이 되다니.......' 

그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온 산이 불바다가 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약속장소인 금 

월사마저 이 모양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의 깊숙한 눈에 곤혹이 떠올랐다. 그는 갑자기 음성을 돋워 외쳤다. 

"태사독! 모습을 보여라!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위는 고요하기만 할 뿐 화답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갈사의 눈썹이 꿈틀했다. 

"태사독! 너답지 않은 일이다. 날 불러놓고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냐?" 

여전히 응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의 눈에 분광이 뻗어 나왔다. 

"상관수아는 노부와 아무 관계가 없다. 어서 그녀를 풀어줘라! 나와 담판을 짓자!" 

역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제갈사는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무사들에게 지시했다 

"뒤져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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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들은 말을 탄 채 잿더미가 된 금월사 경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식 

경 가량을 돌아보았으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상관수아는커녕 사람의 그림 

자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습니다. 어르신!" 

제 자리로 돌아온 한 무사가 고개를 흔들며 보고했다. 

제갈사는 눈썹을 찌푸렸다. 

'어찌된 일인가?'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황성마건과 연락이 닿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금월산에는 진작부터 천라지망이 쳐 

져 있음 분명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우리가 이곳에 오는 동안 저지는 있었으나 

그렇게 강력한 저지가 아니었다. 그 정도 힘에 황성마건대가 당할 리가 없지 않은가 

?' 

제갈사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설마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일부로 길을 터 주었단 말인가?' 

이때 무사들은 다시 폐허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단서 하나라도 찾 

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용문전장의 호원무사들이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장주인 상관홍은 딸을 구해 

오는 자에게 거금으로 포상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래서 모두들 상관수아를 찾기 위 

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문득 제갈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 

이때였다. 

쉬이이익!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제갈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을 가르며 불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저것은!' 

불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폐허가 된 금월사 경내로 떨어져 내렸다. 

제갈사는 안색이 대변했다. 그가 막 무사들에게 경고하려는 순간이었다. 

우르르르르....... 

갑자기 지축이 진동했다. 그것도 잠깐, 미증유의 폭음이 울렸다. 

꽈르르르릉! 

가공할 일이었다. 불화살이 떨어진 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니 땅가죽이 벗겨지고 화 

염과 돌덩이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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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저만한 폭발력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화약고가 폭발한 듯 방원 수백 장이 산 

산조각이 나 날아가 버렸다. 흙덩이와 돌, 불탄 금월사의 잔해가 폭풍처럼 회오리치 

며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금월사를 수색하던 무사들은 팔다리가 끊겨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날아갔 

다. 아니, 그들의 몸은 흔적도 찾을 길 없이 불덩이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실로 참 

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으윽......." 

비틀거리는 인영이 있었다. 

신산 제갈사였다. 방금 전의 가공할 폭발 속에서 오직 그 혼자만이 목숨을 부지했던 

것이다. 

그는 움푹 패인 불구덩이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의 전신은 온통 불에 그을리고 옷 

도 갈기갈기 찢겨져 있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당했다. 깨끗이.......' 

그는 입을 벌렸다. 시커먼 핏덩이가 울컥울컥 토해져 나왔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선 후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를 따르던 수십 명의 무사들은 흔적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금월사 있던 자리도 

거대한 구덩이로 화해 있었다. 

제갈사는 허망한 시선으로 한동안 구덩이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 

그의 몸이 멈칫하더니 나무처럼 굳어졌다. 

주변의 숲에서는 아직도 화광이 치솟고 있었다. 그런데 화광을 뒤로하고 수십 명의 

자의무사들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두에는 수염을 세 가닥으로 기른 위엄이 넘치는 육순 가량의 노인이 앞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바로 제삼신마전의 전주 천황 태사독이었다. 

태사독은 여유 있게 손가락으로 수염을 꼬며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구려, 제갈사." 

제갈사는 경직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태사독......." 

태사독은 그를 주시하며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이십 년 동안 잘도 도망 다니더니 결국 내 손에 잡히게 됐구나." 

태사독은 득의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너의 지략(智略)도 한계에 이른 모양이구나." 

태사독은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반면 제갈사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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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그의 뒤에 자의무사들이 포진을 하고 있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제갈사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문득 그는 벼락처럼 신형을 날려 태사독을 공격했 

다. 

"죽어라!" 

위잉! 

제갈사의 장력이 태사독을 향해 뻗어나갔다. 태사독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슬쩍 

소매를 떨쳐냈다. 

"우욱!" 

장력이 부딪치자 제갈사는 비명과 함께 십여 보나 주르륵 밀려났다. 일견하기에도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제갈사의 입가에는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새 태사독은 유령처럼 그의 면전 

에 다가왔다. 

"으으......." 

제갈사는 더 공격할 의욕을 잃은 듯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태사독의 눈이 이글거렸 

다. 

"흐흐, 네놈 하나 잡는데 이십 년을 소비했다. 이제 널 죽이면 남은 것은 무영 고검 

령 뿐이다." 

슥! 

태사독은 손을 뻗어 제갈사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제갈사,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느냐?" 

"......!" 

제갈사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크게 뜬 눈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 떠 

올라 있었다. 갑자기 태사독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버럭 노성을 질렀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그의 음성은 분노가 지나친 나머지 떨리기까지 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 

다. 

"......." 

제갈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 

었다. 그야말로 태사독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모습이었다. 

"네놈은 제갈사가 아니다!" 

태사독의 음성은 격노로 인해 한층 높아졌다. 

"크흐, 진짜 제갈사라면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이런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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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그의 발이 제갈사의 복부를 걷어찼다. 

"으악!" 

제갈사는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날아가 떨어졌다. 태사독은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 

붙으며 발로 그의 가슴을 짓밟았다. 

"말해라! 네놈은 누구냐? 제갈사는 어디 있느냐?" 

"크으으......." 

제갈사는 신음을 흘렸다. 문득 그의 눈에서 괴상한 빛이 번득였다. 

"흐흐, 태사독. 너무 가볍게 보았다. 신산 어른이 이렇게 쉽게 당할 것 같으냐? 너 

는 속았다." 

태사독의 눈썹이 부르르 진동했다. 

"흐흐! 신산 어른의 두뇌는 천하의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 감히 너 같은 돌 머리가 

어찌 그 분께 근접이나 하겠느냐?" 

"이... 이놈이!" 

우두둑! 

분노한 나머지 태사독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가짜 제갈사의 가슴뼈가 부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짜 제갈사의 안면이 시커멓게 죽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 

았다. 방금 전의 모습과는 판이했다. 

"말해라! 네놈은 누구냐?" 

태사독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밟은 채 물었다. 가짜 제갈사는 눈을 기묘하게 찡그리 

며 말했다. 

"신산이다." 

"으으, 네놈이 감히 노부를 희롱해?" 

태사독은 발에 힘을 주었다. 

"끄윽." 

가짜 제갈사의 입과 코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비웃듯이 말했다. 

"흐으으, 신산은 한 명이 아니다. 너무나 많아 셀 수조차 없다. 나도 그 중의 한 명 

이지. 흐흐... 네가 진짜 신산을 죽였다고 느끼는 순간 또 다른 신산이 등장할 것이 

다." 

"......!" 

"네가... 백 명의 신산을 죽이면 다시 백 명의 신산이 등장할 것이다. 흐으... 신산 

은 절대 죽지 않는다. 영원불멸의 불사조처럼... 죽여도죽여도 다시 환생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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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산이지. 흐흐흐!" 

태사독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발에 

힘이 가는 순간. 

"크아아악!" 

뼈 으스러지는 섬뜩하고 음향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짜 신산은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가슴팍은 완전히 뭉개지고 말았다. 

태사독은 속은 데 대한 분노와 수치로 인해 수염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산, 이놈! 네가 끝까지 나를.......' 

그때였다. 그의 수하들 가운데 누군가가 놀란 외침을 발했다. 

"전주님! 하늘을 보십시오!" 

태사독은 황급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보라! 밤하늘에 불가사의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달빛을 타고 수백 개의 검은 

그림자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편 괴 

조(怪鳥)의 무리들이었다. 

아니었다. 괴조가 아니라 그들은 인간들이었다. 

붉은 옷을 입고 양팔에 날개를 달고 있는 인간들이 하늘을 메우고 있는 것이었다. 

실로 괴기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 

태사독의 안색은 무섭게 굳어졌다. 하늘을 나는 인간들! 그들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 

본 것이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오성단(五星團)....... 야우혈성(夜羽血星)!" 

달이 기울고 있었다. 

달빛 아래 잿더미가 된 산길을 두 사나이가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군데군데 

타 구멍이 뚫려 있었고 피부와 머리카락도 불이 그을려 있었다. 

두 사람은 장천린과 낙수범이었다. 

낙수범은 어깨와 옆구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산장이 폭발할 때 파편에 맞은 

것이었다. 

장천린은 그와 나란히 걸으며 내심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해남도에서도 위기를 많이 겪었지만 이번과 비교하면 그때가 도리어 천국인 셈이군 

.' 

그는 고개 돌려 낙수범을 바라보았다. 

"낙형은 좀 어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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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수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장천린은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같은 편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장천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들어 야색을 살펴보았다. 

'자시가 훨씬 넘었겠군.' 

장천린은 쉬고 싶었다. 팔다리가 쑤시고 전신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아무 데나 눕기 

만 하면 그대로 곯아떨어질 정도로 피곤했다. 그러나 아직 금월산을 벗어나지 못했 

으므로 쉴 처지가 아니었다. 

이때 묵묵히 걷고 있던 낙수범이 입을 열었다. 

"용대인, 한 가지 질문이 있소이다. 아까 산장이 폭발할 때 말이오. 왜 혼자 호수로 

뛰어들지 않고 날 잡고 뛰어 들었소?" 

장천린은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오?" 

낙수범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당연하다고?' 

"지하실에 있을 때 낙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오." 

낙수범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전주로부터 용대인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소." 

장천린은 실소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덕분에 내가 살아났지 않소." 

낙수범은 침묵했다. 두 사람은 묵묵히 걸어갔다. 두 사람 다 피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어 한 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이십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자의무사들로 조화성 제삼신마전 

소속의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은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낙수범은 시체들을 둘러보며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이럴 수가." 

장천린도 전율을 금치 못했다. 

'대체 누가 이토록 잔인하게 죽였단 말인가?' 

낙수범은 무릎을 꿇더니 시체들의 상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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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중병기에 당했다. 그것도 단 몇 초만에 죽였다. 천하에서 중병기로 이토록 

신속하게 살인을 할 자라면.......' 

그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제오신마전주 철마왕(鐵魔王)을 포함하여 한두 명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여섯 구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그들의 머리는 마치 화탄에 맞은 듯 박 

살이 나 있었고 날아가 버린 부분의 살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이... 이 것은?' 

낙수범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믿을 수... 없다. 설마!' 

장천린은 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낙형, 단서라도 알아냈소?" 

낙수범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이건 추측입니다만....... 이들의 머리를 부순 무기가 혹... 만자혈폭륜(卍字血爆

輪)이 아닐까 합니다." 

"만자혈폭륜?" 

장천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낙수범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만자혈폭륜은 천년 전 마교(魔敎)의 교주였던 환궁(幻宮)이 사용했던 삼대마병(三

大魔兵) 중 하나요. 일명... 죽음의 혈뢰(血雷)라 불리던 것이었소." 

"죽음의... 혈뢰?" 

"당시 환궁은 그것으로 자신을 배신한 십대천마(十大天魔) 중에서 삼마를 한꺼번에 

죽였었소." 

낙수범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시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자혈폭륜은 모두 열두 개요. 그 중 두 개는 조화성주께서 갖고 있으나, 나머지 

열 개는 천년 이래로 나타난 적이 없었소." 

장천린은 그의 말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염무 즉, 조화성주가 천 

년 전 멸망한 마교의 맥을 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수하들을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염무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가 사용한 무기가 천년 전 마교의 전설적인 무기인 만자혈폭륜이라니 

'염무 말고도 마교의 맥을 이은 자가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지금 눈앞에 참혹하게 뒹굴고 있는 시체들이야말 

로 이미 자신과 세 번이나 만난 적이 있었던 신비의 청년 사문도가 죽인 것이란 사 

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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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범인이 누군지 몰라도 그가 조화성의 적이라면 엄청난 강적이 생긴 셈이오." 

낙수범은 언제부터인지 조화성을 마치 타 단체를 말하듯 하고 있었다. 장천린도 그 

점을 느꼈다. 그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조화성.......' 

조화성은 분명 악의 단체다. 그 구성체를 이루고 있는 인물들 중에는 거마(巨魔), 

효웅(梟雄), 만사만악(萬邪萬惡)의 악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개중에는 영웅호걸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천린은 점점 더 조화성에 대해 새로운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 

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낙수범 때문이기도 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다. 먹구름에 달이 삼켜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 

위에는 음산한 어둠이 깔렸다.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조화성이란 단체는. 이 낙수범 같은 사람은 어떻게 보아도 

악인이라 할 수 없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과연 조화성 전체를 집마부 

(集魔府)로 몰아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장천린의 생각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뇌(腦)가 있다. 

그러나 각자가 지닌 두뇌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두뇌의 능력에 따라 인간의 가치와 역할이 달라지게 된다. 

당대 최고의 두뇌를 가진 사람을 꼽자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 바로 신산 

제갈사다. 

지금 그는 뒷짐을 진 채 금월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 금월산에서 가공할 폭 

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수십 장 높이로 치솟았다. 그는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 

보고 있었다. 

'태사독, 너는 과거 수년 동안 함께 있었으면서도 아직 날 파악하지 못했느냐?' 

제갈사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너는 자신의 계획을 지나치게 과신했다. 또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나 제갈사가 

어떤 상황이라도 반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제갈사의 눈은 아직도 연기가 솟고 있는 금월산에서 떠나지 않았다. 연기 속에는 화 

염덩이가 섞여 있었다. 

'네게 당할 정도라면 이십 년 전에 벌써 염무에게 당했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당금 천하에서 내 적수는 오직 염무,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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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이 문득 공허한 기운이 어렸다. 염무를 떠올리자 이십여 년 전의 일이 꼬리 

를 물고 따라온 것이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던 지난날의 사건들이....... 

'과거 나는 염무를 보면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마의 벽과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영원히 뛰어 넘어설 수 없는 벽,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한때는 그를 좋아하기도 했 

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알고 부터는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가 세상 누구보 

다도 강하다는 것은 인정했었다. 그래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더욱이 무영(無影)과 

손을 잡았으므로 확률은 구할 이상이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절대로 실패할 수 없 

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었다.' 

제갈사의 눈빛이 쓸쓸해졌다. 

'내 나이 벌써 육십... 놈과 나의 싸움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돼야 한단 말인가?' 

그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어렸다.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휘이잉! 

바람이 분다. 

바람에 밀려온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제갈사의 귀밑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어느 덧 그의 머리칼은 희끗희끗해져 

있었다. 세월의 흐름만은 하늘의 뇌(天腦)를 가졌다는 그도 어쩔 수 없었음인가? 

신산 제갈사. 그도 이제는 늙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화성주 염무와의 처절무 

비한 싸움이었다. 만일 그 싸움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 인생 그 자체 

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문득 그의 뒤로 한 섬세한 인영이 다가왔다. 

요지선자 감운경이었다. 

"제갈 어른, 상관소저의 용태가 나빠지고 있어요. 호흡이 가쁘고 안색이 창백해요." 

감운경은 상관수아를 구출해 냈다. 그런데 상관수아는 여전히 혼수상태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상관전주께서 극도로 심려하고 계세요." 

제갈사는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무겁게 말했다. 

"운경, 상관소저의 문제는 나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태 

사독 뿐이다. 놈이 걸은 제혼술(制魂術)은 그 자신이 풀기 전에는 누구도 풀 수가 

없다." 

감운경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오나......." 

제갈사는 담담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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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경,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감운경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갈 어른." 

이때 멀리서부터 급촉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어졌다. 

잠시 후 한 필의 말이 달려오더니 황건을 쓴 인물이 뛰어내렸다. 

그는 황성마건의 수뇌 육자경이었다. 그는 품안에 피투성이가 된 옥류향을 안고 있 

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영주님을 뵈옵니다." 

몸을 돌려 옥류향을 바라보는 순간 제갈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얕게 한숨을 쉬 

었다. 

"류향의 상처가 꽤 심한 모양이구나." 

육자경은 이를 갈았다. 

"놈들은 대인의 몸에 끔찍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지금까지 견뎌내신 것만 해도 기적 

과 같은 일입니다." 

제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자경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 아름답기 그지없던 옥류향은 모습은 간데 없고 지금 그의 모습은 도무지 살아있다 

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제갈사는 시선을 옥류향에게서 거두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황성마건대의 생존자는 몇이나 되느냐?" 

육자경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십팔명입니다... 크으......." 

제갈사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대가가 너무나 크구나.' 

이때 육자경의 품에 안겨있던 옥류향이 힘겹게 눈을 떴다. 그는 제갈사를 발견하고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도록 난도질당한 얼굴을 씰룩였다. 

한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견디었습니다. 영주님 말씀대로. 하지만 대가가 적지 않았습니다." 

제갈사의 얼굴은 냉정하게 변했다. 

"고생했다." 

단 한마디 뿐이었다. 

옥류향은 눈을 부릅뜨고 제갈사를 바라보았다. 

"흐흐흐... 흐흐... 흣흣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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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옥류향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그의 괴소는 점점 더 커져갔다. 

"......!" 

제갈사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감운경과 육자경은 안색이 변한 채 긴장했다. 그 

들은 옥류향이 이제껏 제갈사 앞에서 그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 

었다. 

옥류향의 괴소는 점점 작아지더니 멎었다. 그의 몸은 축 늘어졌다. 기절해 버린 것 

이다. 

제갈사는 무겁게 말했다. 

"자경, 류향을 치료하거라." 

"넷!" 

육자경은 옥류향을 안고 몸을 일으켰다. 이때 감운경은 무엇을 보았는지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우연히 제갈사의 손을 본 것이다. 움켜쥔 제갈사의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 

지고 있었다.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톱이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감운경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음성으로 말했 

다. 

"그럼... 소녀도 이만 물러가겠어요." 

"......." 

제갈사는 말없이 눈길을 하늘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 

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후두두둑! 

처음에는 빗방울이 듬성하더니 곧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얼 

마 후면 새벽이 되어갈 터인데도 먹장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쏴아아! 

폭우였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금월산의 화재는 수그러들고 있었다. 다만 

연기가 더욱 치솟아 올라 금월산 전체가 온통 연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제갈사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득 폭우 속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한 놈도... 이 산을 벗어나지 못한다. 단 한 놈도." 

혈전(血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열 다섯 명의 백의인과 세 명의 자의인이 처절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자의인들은 자영구살 중 삼인으로 감운경을 추적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던 인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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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들은 도중에 백의인들에게 제지당했다. 그들은 제갈사의 수하들이었다. 

수적으로는 제갈사의 수하들이 월등히 많았다. 그러나 무공은 자영삼살이 훨씬 강했 

다. 제삼신마전에서 태사독의 직계이므로 그들의 무공은 초일류였던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바닥에는 이미 백의인들의 시체가 다섯 구나 뒹굴고 

있었다. 

차차창! 

싸움은 격렬했다. 그러나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백의인들은 수의 우세와 교묘한 

차륜전(車輪戰)으로 공격하고 있어 자영삼살은 좀처럼 그들을 처치할 수가 없었다. 

차차창! 윙! 

"으악!" 

선혈이 튀었다. 두 명의 백의인이 어깨에서 피를 뿌리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즉각 

다른 백의인이 그 자리를 메워 자영삼살의 공격을 막아냈다. 싸움은 장기전으로 흐 

를 판국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휙! 

돌연 허공에서 한 자영이 백의인들의 진세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출현한 그 

의 존재로 인해 상황은 급변하고 말았다. 

슈슈슉! 

"으아악!" 

자영의 손이 번뜩이는 순간 세 명의 백의인이 목에 구멍이 뚫린 채 즉사했다. 그는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다시 세 명의 백의인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공격이요, 무서운 살수였다. 

자영삼살은 희색이 만면하여 공세를 강화했다. 한결 운신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으하하하! 뒈져라, 신산의 졸개들!" 

차차창!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아갔다. 백의인들은 우왕좌왕했다. 이제 역전된 전세를 만회하 

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윽!" 

백의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마침내 일향각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풍차처럼 몸을 돌리며 백의인들을 죽인 자영이 비로소 몸을 멈추었다. 

그는 바로 낙수범이었다. 그의 손에는 피묻은 판관필이 들려 있었다. 백의인들을 모 

두 처치한 그는 안색이 조금도 변함없었을 뿐더러 호흡도 차분하기만 했다. 

방금 전 십여 명을 연속적으로 죽였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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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 형님!" 

자영삼살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낙수범은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희들은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 

자영구살 중 여덟째가 대답했다. 

"감운경 그 계집이 배신했습니다. 상관수아를 데리고 탈출했습니다. 그래서 전주님 

의 명을 받고 추격하던 도중 이놈들이 가로막는 바람에... 이렇게 됐습니다." 

낙수범의 그의 말을 다 들은 후 고개를 돌려 여섯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은 비 

수처럼 날카로웠다. 여섯째의 눈빛이 움츠러들었다. 

낙수범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양전(揚田), 물어볼 말이 있다." 

혈명도(血命刀)란 별호를 가지고 있는 양전은 몸을 떨었다. 

"내가 용대인과 함께 산장의 지하실에 있을 때 너는 밖에 대기하고 있다 전주님의 

지시를 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양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렇... 소......." 

낙수범의 눈이 찌르듯 그를 주시했다. 

"솔직히 말해주기 바란다. 산장에 불이 붙을 때 전주께서는 뭐라고 하셨느냐?" 

"그... 그것은." 

양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때 여덟째와 아홉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내 추측이 맞다면 전주께서는 지하실에서 나오라는 지시를 내리셨을 것이다. 그런 

데 너는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맞느냐?" 

양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 오해요! 그것은......." 

"오해?" 

낙수범의 얼굴에 냉기가 어렸다. 

"좋다. 오해라고 치자. 그렇다면 너는 왜 내게 불이 난 사실을 알리지 않았느냐?" 

양전은 더듬거렸다. 

"그... 그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오." 

"시간이 없었다고?" 

낙수범의 안색은 얼음처럼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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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전, 나는 너란 놈을 잘 알고 있다. 너는 내가 조화성에 들어갔을 때부터 날 못마 

땅하게 여겼었다. 그 동안 몇 번이나 날 모함한 것도 알고 있다. 너는 날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이라 여길지 몰라도 나는 네가 한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다." 

양전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모든 걸 알면서도 그 동안 참아온 것은 너와 내가 자영구살의 일원이기 때문이었다 

." 

낙수범의 눈에서 서서히 살기가 뻗어 나왔다. 

"하지만 이번만은 참을 수가 없다." 

낙수범은 판관필을 들어 올렸다. 

"네놈은 뒤늦게 들어온 내가 너보다 빨리 출세한 것을 질투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 

. 양전! 이젠 더 이상 널 용납할 수가 없다." 

낙수범은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덤벼라, 양전. 선공의 기회를 주겠다." 

아무 말도 못하던 양전은 조금씩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때 여덟째가 나서며 만류했다. 

"세째 형님, 그만 두십시오. 우리는 같은 형제입니다. 제발... 참으십시오." 

"참으십시오, 형님!" 

아홉째도 앞으로 나서며 사정했다. 그러나 낙수범의 마음은 굳어져 있었다. 

"너희들은 참견하지 마라. 우리의 형제의는 깨졌다. 너희들은 불구덩이 속에 날 내 

버려 둔 것이 간접적인 살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그러고도 형제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그 말에 여덟째와 아홉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편 양전은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고 있었다. 

그는 감히 도를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낙수범의 실력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 

었다. 

제삼신마전에서 태사독 전주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자영대살인 탁무종보다도 낙수범 

의 무공이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는 낙수범이 하락칠웅(河落七雄)이란 자들을 죽이는 광경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하락칠웅은 일류고수였다. 비록 지금은 몰락했으나 한 때 화려한 명성을 지니고 있 

던 공동파(  派)의 마지막 후예들이었고, 그들의 무공은 자영구살 전체와 비교한 

다 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날 밤 그가 본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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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삼 초였다. 

낙수범은 불과 삼초만에 하락칠웅의 목을 판관필로 뚫어버린 것이다. 그 믿을 수 없 

는 사실을 본 후 그는 두려움 반 질투심 반으로 기회만 나면 낙수범을 모함하곤 했 

었다. 

낙수범은 자신의 실력의 절반 이상이나 숨기고 있는 무서운 고수였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양전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겁을 먹지 않겠는가? 그의 실력 

은 낙수범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네가 공격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공격하겠다." 

낙수범의 차가운 말에 양전은 공포심과 수치감이 극에 달했다. 마침내 그는 눈알이 

뒤집히고 말았다. 

"흐흐흐! 낙가 놈! 조금 실력이 낫다고 날뛰지 마라!" 

차앙! 

양전은 마침내 도를 떨쳐냈다. 

"흐흐!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삼 년 전 그 때 네놈을 죽이지 못한 것이 원통할 

뿐이다!" 

낙수범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삼 년 전 그가 운공조식을 할 때였다. 양전이 그의 등뒤로 다가와 쳐죽이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우연히 탁무종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는 목숨을 건질 수가 있 

었다. 

"덤벼라." 

낙수범은 차갑게 말했다. 

"뒈져라! 이놈!" 

위이잉! 

양전은 죽을힘을 다하여 도를 날렸다. 

단 일 초였다. 

슉! 

파공성이 울리고 참혹한 비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어느새 판관필이 양전의 목을 뚫고 있었다. 양전은 그저 눈앞에 필봉이 번뜩인 것밖 

에 보지 못했다. 그것을 보았을 때는 이미 목에 구멍이 뚫린 후였다. 

"끄... 끄륵." 

양전은 눈을 부릅뜬 채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에는 후회의 

빛이 가득했다. 

"잘 가라, 양전. 지옥에 가서라도 편협한 성격은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사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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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널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낙수범의 차분한 음성이었다. 

"낙... 가놈... 이... 이... 원한을......." 

쿠웅! 

양전은 둔중한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그는 불운한 위인이었다. 넘어지면서 짚고 있던 자신의 칼에 그만 목이 잘리고 말았 

다. 결국 두 번 죽은 셈이었다. 

여덟째와 아홉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그들은 노성을 발했다. 

"세째 형님! 형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소! 전주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낙수범은 차갑게 말했다. 

"알고 있다." 

아홉째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어쩔 셈이오?" 

낙수범은 판관필을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대답은 이것이다." 

그는 판관필을 꺾어 버렸다. 뜻밖의 행동에 두 사람은 안색이 홱 변했다. 

"무, 무슨 뜻이오?" 

낙수범은 담담히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조화성을 떠나겠다." 

두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주께 전해라. 낙수범은 조화성에 떠났다고. 그것은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니다. 실 

상 오래 전부터 잘못 들어왔다고 느끼고 있었다. 꼭 전해다오. 나는 조화성에서 얻 

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그러나... 전주께는 미안하다고 전해다오." 

낙수범의 얼굴에는 확고한 결의가 어려있었다. 

여덟째와 아홉째는 그것을 느꼈다. 아무리 설득해봐야 낙수범의 마음은 요지부동이 

라는 것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후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대로... 전하겠소이다. 세째형." 

그들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몸을 돌려 떠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사를 

함께 하던 형제였으나 판관필을 꺾은 이상 이제 입장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빨리 헤어지는 것이 나은 것이다. 낙수범은 그들이 떠나자 허탈한 표정을 지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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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뒤에서 장천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양전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이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보았소?" 

낙수범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전주는 그리 속 좁은 분이 아니오. 전후사정을 안다면 뭐라 하지 않을 것이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돌아가면 태전주가 용서할 수도 있겠구려?" 

낙수범은 양전의 시체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소이다." 

"무슨 뜻이오?" 

"조화성은 내게 맞지 않는 곳이오. 나는 본래 음모를 꾸미거나 누군가를 모함하는 

따위의 일은 생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오. 오래 전부터 조화성을 떠나고 싶었소." 

장천린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그대는 조화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잘 생각하셨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후후, 비가 오는군. 낙형. 이 비와 더불어 모든 것을 씻어 버리시오. 과거의 모든 

것들을 말이오." 

"......." 

낙수범은 고개를 들었다. 

후두두두!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빗줄기가 대지를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사방 

이 온통 비안개로 가득 차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두 사나이는 폭우 속에서 한참 동안을 서있었다. 그들의 전신은 비에 흠뻑 젖어버렸 

다. 시뻘건 황톳물이 불어나 낮은 고랑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금세 계곡을 메우며 콸 

콸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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