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장 혈우겁(血雨劫) (37/87)

제13장 혈우겁(血雨劫) 

뿌옇게 시야가 차단된 우막(雨幕) 사이로 두 사나이가 걷고 있었다. 

그들은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걸었다. 

얼마쯤 갔을까? 낙수범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양전의 친형은 양도위(揚道位)란 인물로 제일신마전에서 서열 이위의 고수입니다. 

그는 양전보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많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끔찍이 위했었지요." 

장천린은 묵묵히 그의 듣고 있었다. 

"양전에게 있어 그는 부모와 같은 존재였소. 일찍부터 그 위세를 믿고 제삼신마전에 

서 온갖 행패를 부려 왔었지요." 

낙수범은 씁쓸하게 웃었다. 

"삼 년 전 내가 조화성에 가입할 때부터 놈은 못마땅하게 여겼지요. 더욱이 서열이 

자신보다 높아지자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장천린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 때문에 안 좋아진 것이오?" 

"아닙니다. 삼 년 전 놈은 내 여동생의 방에 침입하여 강제로 범하려 한 적이 있습 

니다. 다행히 내가 발견하여 놈의 팔을 꺾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놈은 앙심 

을 품고 운공 중이던 날 암습하기도 했습니다. 탁형이 뛰어들어 위기는 모면했지만 

그로 인해 더욱 사이가 안 좋아지게 됐지요." 

장천린은 쓴 입맛을 다셨다. 

"옹졸하고 치사한 놈이로군." 

"그 후에도 놈은 수 차례나 날 모함하고 제거하려는 수작을 벌이곤 했습니다." 

장천린은 문득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낙형이 조화성을 등진다면 누이동생이 위험하지 않겠소?" 

낙수범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제가 없는 편이 누이에게 편할 것입니다. 저의 매제인 신안수사(神眼秀士) 

여문송은 제오신마전주 철마왕(鐵魔王)의 신임을 얻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부친 

은 마교의 원로이므로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하지요. 설사 양도위라 해도 감히 건 

드리지 못하는 존재이니까요. 여문송은 충분히 누이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장천린은 비로소 이해가 갔다. 두 사람은 계속하여 걸어갔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오?" 

"글쎄요. 아직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먹고는 살아야 하니 조만간 다른 일 

자리를 구해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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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범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장천린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낙형, 나와 함께 일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낙수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동정은 원치 않습니다." 

장천린은 진지하게 말했다. 

"절대 동정이 아니오. 낙형이 과거 목장을 경영해 보았다는 말을 들었소.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낙형에게는 탁월한 사업능력이 있소. 나는 상인이오. 정에 이끌려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소." 

낙수범은 그를 바라보았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곁에 두고 싶은 것이 내 입장이오. 그것은 투자 

이지 동정 따위가 아닌 것이오." 

장천린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낙수범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저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용대인." 

장천린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알겠소. 낙형." 

낙수범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폭우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빨리 내려가야겠습니다. 공연히 이곳에 어정거리다 신산과 조화성의 싸움에 말려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나도 그러긴 싫소이다. 갑시다, 낙형." 

두 사람은 걸음을 빨리 했다. 

쏴아아아! 

폭우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그 바람에 금월산을 휩쓸었던 불길은 점차 꺼져나고 

있었다. 

탁무종(卓茂宗). 

그는 어느 정도 지쳐 있었다. 

그는 삼인의 자영구살과 백여 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옥류향을 추적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폭우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비가 옥류향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추 

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추적해야 했다. 그래야 태사독에게 최소한이라도 변명할 수 

가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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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걷던 자영구살의 둘째인 우장경(牛長鯨)이 침중하게 말했다. 

"대형, 아무래도 놈은 금월산을 벗어난 것 같습니다." 

탁무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금월산 주위에는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다. 놈이 탈출했다면 연락 

이 없을 리가 없다." 

우장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놈은 교활합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놈입니다." 

탁무종도 내심으로는 그 말을 인정했다. 그러나 추적대의 책임자인 그가 내놓고 인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대꾸없이 걷기만 했다. 

나머지 고수들도 철벅거리며 황토 투성이인 산기슭을 전진했다. 

그들은 회의하고 있었다. 이제 옥류향을 잡기는 틀렸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탁무종은 흠칫했다. 비안개 저편으로 한 검은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규칙적인 발자국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탁무종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인영은 괴이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낡은 흑의를 걸쳤는데 등뒤에 짚단으로 싼 

기다란 물체를 메고 있었다. 양손을 하얀 붕대로 감싸고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중병 

기인 삼첨극을 아무렇게나 거머쥐고 있었다. 

쏴아아! 

폭우를 맞으며 걸어오고 있는 인영, 그는 사문도였다. 

그는 어둠의 마신(魔神)인 양 규칙적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탁무종 일 

행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멈칫하거나 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탁무종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는 누구냐?" 

거리가 좁혀지자 탁무종은 차갑게 물었다. 사문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조화성의 개들이냐?" 

탁무종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친구! 말이 심하군!" 

사문도는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은 마치 어둠의 공간 속에 박혀 있는 듯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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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흐흐, 자의를 걸친 것으로 미루어 태사독의 수하로 단정해도 좋겠군." 

탁무종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쩔 셈이냐?" 

사문도의 눈에서 찌르는 듯한 살기가 뻗쳐 나왔다. 

"모조리 도륙을 내주마." 

이때 자영구살의 다섯째인 기호운이 참다못해 노성을 질렀다. 

"이런 미친 새끼!" 

번쩍! 

평소 쾌검을 자랑하던 섬전점(閃電劍) 기호운은 불을 뿜듯 발검하며 사문도를 덮쳤 

다. 

사문도의 눈에 섬뜩한 괴광이 흘렀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다만 우수에 쥐고 있던 

삼첨극의 끝을 약간 움직였을 뿐이었다.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끔찍한 일이었다. 기호운의 검은 그대로 박살이 났다. 동시에 그의 육신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두 쪽이 나버렸다. 삼첨극이 검과 육신을 그대로 쪼개버린 것이다. 

털썩! 

기호운의 시신은 진흙구덩이에 쓰러졌다. 시뻘건 선혈이 바닥을 물들였다. 

단 일 초였다. 기호운은 너무나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이럴 수가!' 

탁무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때 우장경이 왁! 하고 노호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탁무종은 급히 그를 제지하며 사문도를 향해 물었다. 

"그대는, 신산의 수하인가?" 

사문도는 음침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의 수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죽이려는 건가?" 

사문도는 잘라 말했다. 

"알 필요 없다. 조화성의 인물이라면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만 알면 된다." 

슈슉! 

삼첨극의 끝이 움직였다. 빗줄기를 타고 승천하는 용처럼 사문도의 신형이 도약했다 

. 묵룡(墨龍)처럼 사문도는 자의무사들 속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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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 바퀴 신형을 돌렸다고 느낀 순간.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십여 명의 자의무사들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 

굴었다. 

탁무종은 대경실색했다. 

"막아라!" 

"으하하하핫!" 

폭우 속에서 사문도의 광소가 터졌다. 

"이 하늘 아래 어떤 놈이 날 막겠다는 것이냐?" 

위이이이잉! 

삼첨극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살이 튀고... 뼈가 튀고... 피가 튀었다. 

삼첨극이 스치는 곳에 어김없이 피보라가 일어났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도륙( 

屠戮)일 뿐이었다. 애당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단 한번의 움직임에 최소한 수명의 생명이 마감했다. 자영구살의 네째는 좌측에서 

덤볐다가 삼첨극에 복부가 뜯겨나가며 황천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그는 죽어도 자신 

이 죽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처박혔다. 

일각도 채 지나기도 전에 장내에서 살아남은 자는 단 두 명밖에 안되었다. 

한 순간에 벌어진 폭우 속의 참변! 

훗날 무림에서는 이 혈겁을 일컬어 혈우겁(血雨劫)이라 칭했다. 

"으으......!" 

"이럴... 수... 가......!" 

마지막 생존자인 탁무종과 우장경은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사문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의 인물은 흑마신(黑

魔神)인 양 삼첨극을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표정도 없었다. 창백한 안색에 숨결 또한 고르기만 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꿈... 꿈이야!' 

탁무종과 우장경은 내심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마(魔)의 무공이었다. 

그들은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 

었다. 빗물에 섞인 흘러내린 피가 내를 이루어 콸콸 흘러내렸다. 지옥이 따로 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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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무종은 전신을 떨며 외쳤다. 

"인명은 중한 것! 네가 조화성에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무자비한 살 

상을 하다니...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사문도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허튼 소리 마라. 어차피 조화성 자체가 악이거늘 악의 부스러기를 제거한다면 천하 

인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찢어 죽일 놈!" 

우장경이 치를 떨며 외쳤다. 

"둘째, 흥분하지 마라." 

탁무종은 그를 진정시켰다. 사문도는 그를 바라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조화성의 쓰레기들 중에서는 그래도 네가 제일 나은 것 같군." 

"......." 

탁무종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우장경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둘째, 저 자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게. 놈과 정면대결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스스! 

탁무종은 검을 자신의 미간 중심으로 곧추세웠다. 사문도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흐흐, 이곳에 너 같은 고수가 있을 줄은 몰랐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자세를 구 

현하다니, 비록 초보단계긴 하지만 대단하다." 

"......." 

탁무종은 대꾸하지 않고 고요한 자세를 유지했다. 우장경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수중 

의 철선(鐵扇)을 가슴 앞에 펼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자세는 전력을 다하기 

위한 최후의 자세인 듯했다. 

사문도는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그렇게 덤비기가 겁난다면 내가 한 수 양보해 주마." 

그는 삼첨극을 바닥에 꽂고는 뒷짐을 지었다. 그야말로 상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다는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아닌가? 

우장경은 모욕감을 참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질렀다. 

"애송이 놈! 뒈져라!" 

촤라라락! 

철선이 한 차례 접었다 펼쳐지며 일직선으로 사문도를 공격해 갔다. 

"안 된다,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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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무종이 급히 제지했으나 이미 늦었다. 우장경은 벌써 사문도의 일장 앞으로 다가 

간 것이다. 

'어쩔 수 없구나!' 

탁무종도 땅을 박차면서 도약했다. 검과 몸이 하나가 된 자세였다. 

사문도의 입가에 음산한 웃음이 어렸다. 그는 뒷짐을 풀면서 양손을 두 사람을 향해 

펼쳤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파팟! 

그의 손에 감겨져 있던 붕대가 틑어져 나가며 맨손이 드러난 것이다. 

아아! 너무나 섬뜩했다. 사문도의 양손은 뼈와 핏줄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완전 

히 투명한 손이 드러난 것이다.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지더니 탁무종과 우장경 

을 향해 뻗어나갔다. 

"헉! 천옥신수(天玉神手)!" 

탁무종은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장경의 몸이 허 

공에서 폭발하듯 터졌다. 

푸학! 

복부가 벼락에라도 관통된 듯 뚫어지며 등뒤로 터져나간 것이다. 구멍이 뻥 뚫린 채 

쏟아져 나간 내장이 폭죽처럼 다시 한번 터졌다.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탁무종도 무사하지 못했다. 천옥신수를 검으로 막았으나 그 순간 검이 산산조각 나 

면서 파편이 온몸에 박혀버린 것이다. 

"크윽!"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탁무종은 꾸역꾸역 핏물을 토해내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는 불타다 남은 나무둥치에 간신히 몸을 의지했다. 그의 안색은 백짓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뜬 채 중얼거렸다. 

"투명한 쌍수(雙手)... 형체도... 소리도 없는... 그것은... 천옥신수뿐... 맞는... 

가?" 

사문도는 괴소를 흘렸다. 

"후후, 꽤나 안목이 있구나." 

탁무종은 울컥 피를 토했다. 

"하... 하지만... 천옥신수는... 실전된... 마교의... 천마구예(天魔九藝) 중... 

하나이거늘...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사문도는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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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탁무종의 입에서는 선혈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그 속에는 토막난 내장 부스러기가 

섞여 있었다. 

"어... 어찌됐던 간에... 너는 나 탁무종이 본...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고수.. 

. 겨... 경의를... 표한다......." 

"......." 

사문도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그대에게는 공연히 살수를 쓴 것 같군." 

탁무종의 안면에 경련이 일어났다. 

"조화성이 좋은 단체는 아니지만... 선량한 사람도 다수... 있다... 그대 손에 죽어 

간 자들 중에도... 그런 자가 꽤 있다." 

"......." 

"그들에게도 처자식이 있고... 노부모가 있음을 생각한다면... 살생은... 죄악임을. 

.. 알 것......." 

사문도는 침묵했다. 

탁무종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실상 그는 누구보다도 

정이 많은 인간이었다. 다만 신이 외면한 운명을 타고나 살인귀가 되었을 뿐이었다. 

탁무종의 말은 그로 하여금 회오하게 만들었다. 

사문도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탁무종은 안간힘을 짜내며 물었다. 

"친구의... 이름은......?" 

"사문도다." 

"사... 문... 도......." 

탁무종은 더 지탱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후 다 

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을 하직하고 만 것이다.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서열 이위에 오른 고수 탁무종은 이렇게 죽었다. 

폭우는 그의 주검 위에 슬픈 눈물을 하염없이 퍼붓고 있다. 

"......." 

사문도는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탁무종의 주검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의 눈에서는 연민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안하오, 친구. 하지만 어쩔 수 없었소. 내 인생에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서는 반드시 조화성을 멸해야 하기 때문이라오.' 

사문도는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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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미안하오, 친구!' 

그는 몸을 돌렸다. 

폭우는 여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자욱한 우막 저편으로 사문도의 모습은 사라 

져갔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금월사 쪽이었다. 

여명(黎明). 

처절한 어둠이 스러지고 금월산 일대에는 희뿌연 여명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기승을 부리며 퍼붓던 폭우도 한 풀 꺾인 듯 부슬비로 화했다. 여명에 떠오 

른 금월산 자락에서는 뭉클거리는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 높지 않은 한 산봉우리. 

"......." 

그는 비에 흠뻑 젖었으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신산 제갈사였다. 

희끗희끗한 귀밑 머리칼도 비에 젖어 양뺨에 늘어붙어 있었다. 

그의 뒤에는 호위무사들이 시립하고 있다. 그들의 옷도 비에 젖어 찰싹 달라붙어 있 

었다. 

천하제일뇌 제갈사의 깊숙한 눈은 현기를 띤 채 능선을 따라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는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르륵! 

허공에서 거조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선회하다가 급강하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일신에 붉은 옷을 걸친 그는 얼굴 또한 붉은 천으로 복면 

으로 하고 있었다. 그가 새로 보였던 것은 양쪽 겨드랑에 날개모양의 천을 대고 있 

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수(首)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오성단 야우혈성(夜羽血星)의 수뇌인 광무염(廣武炎)이었다. 

"영주님께 보고 드립니다." 

광무염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갈사는 등을 돌린 채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예, 태사독은 철수명령을 내렸습니다. 그에 따라 제삼신마전의 생존자 사백여 명은 

타구봉(駝丘峰)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음, 태사독을 공격한 결과는?" 

"태사독 주위에 있던 육십여 명은 모두 제거됐습니다. 하나 태사독의 무공이 워낙 

강해 형제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그래서 정면공격은 포기했습니다. 지금은 영주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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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제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사독은 천하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다. 너희들의 힘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다. 직접적인 공세는 펴지 말고 타구봉 주위를 철저히 봉쇄한 후 그곳으로 

집결하는 그의 수하들을 제거해라. 목표는 태사독을 타구봉에 고립시키는 것임을 명 

심해라." 

"알겠습니다." 

광무염은 고개를 숙인 후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그는 두 날개를 활짝 벌리고 거붕 

처럼 산봉 아래로 추락하다가 기류를 타고 까마득히 상승해 어디론 가로 사라져 갔 

다. 

제갈사는 산곡 사이로 피어오르는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얄팍해 보이는 입술 사이로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날 사냥하려 했지만 곧 있으면 거꾸로 사냥 당하게 될 것이다, 태사독." 

타구봉은 낙타의 굽은 등처럼 생겨 그런 이름이 생겼다. 생김새처럼 경사가 완만했 

으며 산등성이에는 수목이 듬성듬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히 퍼지고 있는 타구봉 정상에 한 명의 자의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태사독이었다. 지금 그의 주위는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였다. 

제삼신마전 소속의 자의무사들이 태반 이상이었으며 나머지는 드문드문 오성단 야우 

혈성의 고수들이 섞여 있었다. 처절한 싸움의 흔적이 역력했다. 

"......." 

태사독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 

다. 

지난밤은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악몽의 밤이었다. 

그의 계획에는 빈틈이라곤 없었다. 그는 확신했고, 초기 단계는 완전한 성공이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황성마건을 거의 궤멸시켰던 것이다. 

일이 어긋난 것은 남서풍이 일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바람을 타고 일어난 화재가 

그의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이다. 일단 아귀가 틀어지자 그의 모든 계획은 걷잡을 

수 없이 엉켜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뒤늦게 등장한 신산의 계락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치명 

적인 실수를 한 것은 오성단 야우혈성의 등장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태사독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그가 타구봉에 온 지도 벌써 한 시진이 지났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연락을 보냈 

던 수하들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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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수 시진 동안 공격해 오던 야우혈성도 갑자기 공격을 중지하고는 자취를 감 

추어 버렸다. 

안개가 자욱히 깔린 타구봉에는 기괴한 정적만이 짙게 깔린 채 부슬비만 내리고 있 

었다. 

'왜 아무 소식이 없단 말인가?' 

태사독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하루 사이에 부쩍 나이가 들어 보였다. 

'자영구살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탁무종은 또 어디 있는가?' 

그는 육십 평생 오늘처럼 초조한 적이 없었다. 오늘따라 자신이 무척 외롭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전주로 언제나 위풍당당하고 화려했던 생애가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시체가 즐비한 산봉우리에서 비를 흠뻑 맞은 채 초조하게 수하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을 뿐이다. 

문득 안개가 자욱한 봉우리 아래쪽으로부터 인영이 어른거렸다. 인영은 그가 있는 

봉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인영은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걸어왔다. 

"......?" 

태사독은 안력을 집중시켰다. 행여나 탁무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 곧 실망이 떠올랐다. 

낡은 흑의. 그나마 여기저기 찢어진 옷을 걸친 채 등뒤에 짚단으로 싼 물건을 멘 청 

년이었다. 그는 서서히 산봉우리로 올라왔다. 양손을 천으로 둘둘 감고 있었고 오른 

손에는 삼첨극을 들고 있었다. 

사문도였다. 잠시 후 그는 태사독의 면전에 이르렀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순간 태사독은 가슴에 묘한 압박을 느꼈다. 그것은 평생에 걸쳐 단 두 번밖에 느껴 

보지 못했던 타인에 대한 압박감이었다. 

그들은 무영 고검령과 조화성주 염무였다. 그 두 사람 외에 태사독은 천하의 그 누 

구에게서도 이런 종류의 압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문도는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 태사독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도 고 

요하여 마치 아무 것도 보고있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신이 바로 태사독이오?" 

태사독은 무겁게 말했다. 

"그렇다. 자네는?" 

사문도는 짤막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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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도라 하오." 

태사독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당신에게 한 가지 빌릴 것이 있어서요." 

"......?" 

태사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문도는 담담히 말했다. 

"바로 당신의 목이오." 

"......!" 

태사독의 얼굴이 나무처럼 딱딱해졌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신산이 보냈느냐?" 

사문도는 기소를 흘렸다. 

"후후, 이상하군. 왜 당신들은 나만 보면 신산과 연관지으려 하오? 나는 평생 신산 

이란 인물의 코빼기도 본 적이 없거늘." 

"......!" 

태사독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시라면 그는 벌써 눈앞의 건방진 청년을 피곤죽으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문도에게서 풍기는 심상치 않은 기도 때문이었다. 

태사독은 마침내 이유를 깨달았다. 

'내 자신이 불신할 만큼 이놈의 기도는 경이적이다. 결코 무영 고검령 못지 않은 기 

운이다.' 

이때 사문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태사독, 금월사를 날려버린 것이 당신이라고 들었소." 

태사독은 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흐흐, 그 사찰에는 양부의 유골이 봉인되어 있었소. 당신 때문에 영원히 유골을 찾 

지 못하게 되었소." 

태사독은 흠칫했다. 

'그렇다면 이 놈은 애초에 아무 관계도 없었는데 유골 때문에 날 찾아왔단 말인가?' 

그는 몹시 엉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문도는 비 묻은 얼굴을 쓱 닦으며 그를 주시했다. 그의 눈은 더욱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당신과 원한이 없소. 다만 불행이라면 당신이 조화성의 인물이라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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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사문도는 삼첨극을 천천히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그의 자세는 마치 태산이라도 일 

격에 쪼개버릴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 

"준비하시오. 태사독." 

태사독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 올랐다. 그는 분노로 인해 상대적으로 가라앉은 음성 

으로 물었다. 

"지금 노부와 싸우자는 것이냐?" 

"그렇소." 

태사독의 눈에서 섬뜩한 광채가 일어났다. 사문도의 자세를 이리저리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흐드러진 광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흐하하하핫!" 

그는 한참 동안 웃은 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노부 평생 수 없는 격전을 치렀지만 너처럼 혼자서 노부에게 도전한 놈은 처음이다 

." 

사문도는 입술꼬리를 기묘하게 비틀며 중얼거렸다. 

"의외로 말이 많은 늙은이로군." 

그 말은 천황 태사독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모욕이었다. 그의 안색이 흉하게 일그러 

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 놈." 

쿠르르......! 

공기가 들끓으며 소용돌이 쳤다. 태사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양장을 날린 것이다 

. 은은한 자색(紫色)의 강기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뻗어나갔다. 

사문도는 냉소하며 좌수를 뻗었다. 

꽝! 

공기가 수천만 근의 압력으로 압축됐다가 일시에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두 

사람은 똑같이 어깨를 흔들며 일보씩 물러났다. 

"......." 

사문도의 표정에는 이렇다할 변화가 없었다. 반면 태사독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이럴 수가? 이 어린놈이 나의 장력을 받아내다니!' 

경악. 그것은 미증유의 경악이었다. 

그가 누군가? 조화성의 제 이인자로 불리는 하늘 아래 손가락 꼽히는 고수가 아니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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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의 장력을 일개 약관에 불과한 무명청년이 한 손으로 받아낸 것이다. 그야말 

로 직접 겪지 않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사문도의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태사독, 무기를 쓰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동시에 그의 수중에서 삼첨극이 번뜩였다. 

삼첨극의 끝이 약간 움직였다 싶은 순간 전광처럼 태사독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실 

로 불가사의한 속도였다. 

'헉!' 

태사독은 양손을 십자(十字)로 교차시키며 삼첨극의 중간부분을 받아쳤다. 

파파팟! 

파공음이 일어나더니 삼첨극이 퉁겨 올라갔다. 사문도의 눈썹도 똑같이 솟구쳤다. 

'대단하구나! 맨 손으로 중병기를 받아내다니.' 

생각은 생각일 뿐이었다.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그는 재차 공격을 

가했다. 

태사독은 삼첨극이 가공할 기세로 뻗어오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애송이 놈! 함부로 날뛰지 마라!" 

그의 손이 번뜩인 찰나 품속에서 금광(金光)이 번쩍 일었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는 쌍환(雙環)이 쥐어져 있었다. 순금으로 된 쌍환에서 금빛 광 

채가 환상적으로 뻗었다. 쌍환은 삼첨극을 향해 부딪쳤다 

카카캉! 

고막을 찢는 듯한 금속음이 연이어 열 여덟 번이나 울렸다. 

사문도는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전신을 떨었다. 

'과연, 태사독이다.' 

하나 그는 절대로 물러설 줄도, 포기할 줄도 모르는 전혼(戰魂)을 지닌 인간이었다. 

여전히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은 채 삼첨극을 연달아 휘둘렀다. 

쐐애애액! 

삼첨극이 그의 손에서 가공할 위력으로 회전했다. 

마치 풍차가 돌 듯, 번개가 집중 난타하듯이. 단 한번이라도 스친다면 어떤 물체이 

든 갈가리 찢겨져 나갈 정도로 으스스한 기세였다. 

그러나 상대는 태사독이었다. 

그는 수중의 쌍환으로 사문도의 공격을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다. 둥근 환에 부딪치 

면 중병기인 삼첨극은 불꽃을 퉁기며 미끄러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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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엄청난 싸움이었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하늘도 맑게 개기 시작했다. 구름은 바람에 밀려 빠르게 빠져 

나가고 있었고 동녘으로부터 찬란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처절하던 어둠을 단번에 밀어버리며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태양 빛은 화마에 

여기저기 흉측한 검은 상흔을 드러내 금월산을 어루만지듯 구석구석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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