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까마귀에 봉황 딸
개봉부는 하남행성(河南行省)의 중심지다.
개봉을 다스리는 지부대인(支府大人)은 황보인(皇甫仁)으로 그에게서 개봉부의 모든
권력이 출발한다고 할 수 있었다.
지부(支府)는 정사품(正四品)에 해당하는 지방장관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개봉의 지
부는 여타 지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장천린은 개봉지부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부대인 황보인은 부중에서 가장 용한 의원을 보내주어 그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배
려해 주었다.
장천린은 상처를 치료받은 후 목욕을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검은 현의(玄衣)를 걸치고 황금빛의 요대를 두른 그의 모습은 산뜻하고 품위가 넘쳐
흘렀다. 특히 긴 머리칼을 빗어 등뒤로 넘기니 탈속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닷새가 지났다.
본래 그는 이곳에 머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부대인 황보인이
소문난 탐관오리였기 때문이었다. 성품은 그다지 나쁘지 않으나 워낙 탐심이 많아
재물을 밝혔으며 여색(女色)도 어지간히 즐기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지부에 머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단위제가 우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머물게 된 것이었다.
황보인이 장천린에 대해 예우하는 것은 가히 갸륵할 지경이었다.
그는 시녀들을 배치하여 아주 사소한 일에까지 시중을 들도록 배려했다. 시녀들에게
얼마나 다짐을 해두었는지 장천린이 말하기도 전에 모든 일을 척척 알아서 대령했
고 손을 써주었다.
물론 그것은 단위제 때문이었다.
듣기만 해도 으스스한 황실의 특무기관 동창의 대영반이란 엄청난 직분을 가진 단위
제였다. 그런 그가 장천린을 상전 모시듯 하니 황보인으로서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황보인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장천린을 황족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장천린의 기도가 워낙 뛰어나 더욱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는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다.
황보인은 황족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자신의 관리생활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단단히 후사(?)를 챙겨 두자는 심산
이었다.
장천린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자 두 명의 아름다운 시녀들이 무릎을 꿇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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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너희들은 아침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시녀들은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했다.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허례를 싫어하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시녀들은 금세 안색이 창백해졌다.
"대... 대인, 천비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만약 대인께서 저희들을
물리친 것을 아시면 지부대인께 문책을 받사옵니다."
장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시녀들을 지나쳐 걸어나왔다.
그가 묵고 있는 별원 밖은 곧바로 화원이었다. 온갖 꽃이 조화롭게 가꾸어져 있어
화향이 물씬 풍겼다. 그는 화원 사이를 걸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단도독은 아침부터 어디로 갔을까?'
한 사나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계묵은 좀 늦는다고 했지. 차라리 잘 된 셈이다. 그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면 자
신을 자책할지도 모른다.'
화원 사이를 걸어가자 꽤 넓은 인공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물은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다.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인공호수의 중앙에는 정자가 있었고 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장천린은 구름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 일반 백성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곳이야.'
호수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중원에서 볼 수 없는 이국에서
온 진귀한 물고기였다. 만일 그 값을 알게 된다면 백성들은 놀라 까무러칠 것이다.
장천린은 상인이므로 물고기의 모양만 보고도 능히 그 값을 점칠 수 있었다. 그는
황보인의 기름기 흐르는 얼굴을 떠올리고는 탄식했다.
'그런 자가 백성들을 다스리다니.......'
이때였다.
띵... 디딩.......
어디선가 청아한 금음(琴音)이 감미롭게 들려왔다.
'음?'
그는 호기심을 느꼈다.
음률에 대해서 이미 대가 급인 장천린이었다. 특히 금(琴)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가
지고 있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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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귀를 기울이던 그의 얼굴에 경탄의 표정이 어렸다.
'대단한 솜씨다. 탄금 솜씨로는 소옥을 제일로 꼽았는데 이 정도면 결코 그녀의 하
수가 아니다. 아니, 도리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금음에 맞추어 청아한 음성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양자강 언저리에서 밤에 떠나는 손님을 전송했네... 단풍잎 물들고 물억새꽃 희게
핀 쓸쓸한 가을날이었네."
계류가 흐르듯 감미로우면서 영롱한 노랫소리가 꿈결처럼 호수에 잔잔한 파문을 일
으키며 들려왔다.
'비파행!'
장천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노랫소리를 듣는 순간 과거 비파행(琵琶行)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한 여인이 떠오른
것이다.
'옥교... 그녀가 자주 부르던 노래.......'
그렇다.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을 취옥교는 유난히도 좋아했었다.
장천린의 표정은 감회에 젖었다. 다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술에 취해도 즐거움은 없고... 쓸쓸한 마음 그대로 지닌 채 이별하려는데... 끝없
는 장강의 수면에 달이 떠 물결에 젖고 있네."
장천린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래, 옥교의 노래는 일품이었지. 그녀는 틈만 나면 내 곁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했지. 나는 그녀의 노랫소리에 맞춰 탄금을 하고.......'
노랫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때로는 꽃 아래 한가로이 우는 꾀꼬리 소리 같고 때로는 얼음 밑을 흐느끼며 흐르
는 샘물의 여울소리 같기도 하고......."
장천린의 뇌리에 과거의 추억 한 자락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만금산장에서 금백만이 죽기 직전 그는 비파행을 듣고 있었다. 당시의 일은 그는 아
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오늘날 그가 천하를 유
랑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장천린은 기분이 울적해졌다. 마음 깊이 옥교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그는 탄식
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누군지 모르나 음성이 옥교와 비슷하구나.'
장천린은 노랫소리가 정자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구름다리로 오르고 있었다.
정자는 아름다웠다. 단청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옥으로 만든 풍경이 추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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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매달려 미풍에도 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붕은 팔각에 푸른색의 유리기와가
얹혀져 있었다.
정자에는 오색의 구슬주렴이 입구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한 여인의 그림자
가 은은히 비치고 있어 신비스런 느낌이 들었다.
장천린은 주렴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그는 멈칫했다.
정자 안에 한 미녀가 칠현금을 안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화사한 꽃무늬가 있
는 비단옷에 궁장으로 틀어 올린 머리, 늘씬한 몸매를 지닌 미녀였다.
피부는 백옥처럼 희었으며 오관이 뚜렷한 미인이었다. 굳이 취옥교와 비교한다면 성
숙한 면은 조금 부족했으나 화려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이었다.
특히 사슴을 닮은 듯한 커다란 눈과 큰 키에 가냘픈 체격에는 잔잔한 애상을 느끼게
하였다.
문득 탄금 소리가 멎었다.
여인은 느닷없이 들어선 침입자를 보고 큰 눈을 떴다. 왠지 서글퍼 보이는 눈이었다
"누구... 신가요?"
그녀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아차.'
장천린은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여인 혼자 있는 곳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
다니, 큰 결례를 한 것이다. 그는 급히 포권했다.
"실례했소이다. 소저의 탄금과 노랫소리에 취해 그만 나도 모르게 발길이 이곳으로
왔소이다. 소저의 흥을 깼다면 용서하시오. 그럼......."
그는 바로 몸을 돌렸다. 미녀가 급히 말했다.
"잠깐만......."
장천린은 몸을 돌렸다.
여인은 이십 세가 채 안되어 보였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공자님은 처음 뵙는 분인 듯한데... 어떤 분이신가요?"
"소생은 며칠 전 지부대인의 초청으로 받고 이곳에 묵고 있는 사람이오."
여인은 탄성을 발했다.
"이제 보니 아버님의 손님이셨군요?"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럼 소저는 황보대인과 어떤 관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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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녀의 이름은 황보설연(皇甫雪燕)이라 하옵니다. 지부대인이 바로 소녀의 부친이
십니다."
장천린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탐욕에 눈 먼 탐관오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딸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부녀로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제일 먼저 달라지게 되는 것이 옷차림이다.
낙수범(駱秀凡).
그는 금월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복장부터 바꾸었다.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복장인 자의를 벗어 던지고 황의(黃衣)로 갈아입었다. 그저 옷
색깔만 달아졌을 뿐인데도 그의 모습은 크게 달라 보였다. 또한 그는 부러진 판관
필 대신 패검을 찼다.
지금 그는 개봉지부의 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의 상처도 거의 완치되어 가고 있었
다.
관리들은 그를 보면 걸음을 멈춘 채 공손히 인사했다. 낙수범은 그들의 태도에 쓴웃
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자신을 존중하는 이유가 단위제 때문인 것이다.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것은 삼 년 간 몸담았던 조화성 때문이었다.
얼마 전 그는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전주인 천황 태사독과 자영구살의 수뇌인 탁무종
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일로 무림은 진동하고 있었다. 무림의 절대강자인 조화성이 신산과의 싸움에서
대패했다는 소문이 삽시에 전 무림에 나돌게 된 것이다.
무림은 술렁거렸다. 조화성의 참패가 향후 무림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올 것이란 예
감에 모두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소문 중에는 한 가지 기이한 것이 있었다.
'태사독을 죽인 것은 신산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한 신비인이다! 그 자는 태사독 뿐
만 아니라 단신으로 조화성의 고수 백 팔십 명을 무자비하게 죽인 후 유유히 사라졌
다!'
그런 소문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후 전 무림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태사독과 조화성의 고수 백 팔십여 명을 죽인 자에 대해서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얼굴, 나이, 내력 등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있을 뿐이었다.
물론 소문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낙수범은 추호도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태사독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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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무명고수에게 당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태사독의 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는 소문을 부정했다.
'만일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신산도 태전주의 적수가 될 수 없다. 한데 어찌 무명인
따위가 태전주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 소문은 와전된 것이다.'
낙수범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다.
그의 맞은편에서 한 명의 갈의를 걸친 청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약간 마른 듯한 얼굴, 눈은 쭉 째져 마치 살모사의 눈을 연상케 하는 날카롭고 잔혹
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청년은 어깨에 장도를 걸치고 있었다.
낙수범은 그가 다가오자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고수다.'
그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특히 갈의청년의 예리한 눈빛을 접하자 가슴이 섬뜩해졌
다.
갈의청년은 바로 원계묵이었다.
원계묵은 낙수범을 힐끗 보았으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낙
수범은 전신의 혈관이 팽팽하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 만큼 긴장한 것이다.
원계묵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귀하, 말씀 좀 묻겠소이다. 용대인의 거처가 어디인지 가르쳐 주시겠소?"
낙수범은 흠칫했다.
"귀하는 뉘시오?"
"불초는 원계묵이라 하오이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마도(魔刀) 원계묵!'
낙수범은 눈을 크게 떴다.
원계묵과 낙수범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훗날 두 사람 사이에 꽃 피우게
될 우정의 연(緣)이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었
다.
"훗, 사실 소녀는 공자님을 뵌 순간 깜짝 놀랐어요. 본래 이 소향정(素香亭) 근처에
는 아버님의 명령 때문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되어 있거든요."
황보설연은 섬섬옥수로 입술을 살짝 가리며 웃었다.
투명할 정도로 흰 옥수가 햇살에 투영되어 가히 선녀의 손을 보는 듯 했다. 장천린
은 그녀의 이마 근처와 목덜미에 뽀얀 솜털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싱그러운 느낌이
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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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것을 알았다면 결코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오."
황보설연은 부신 듯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소녀는 공자님께서 그 사실을 모르셨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요."
장천린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황보설연은 말머리를 돌렸다.
"아버님은 웬만한 분이 아니면 이곳 후원에 있는 자하별원(紫霞別院)에 모시지 않아
요. 그래서 소녀는 공자님의 신분이 몹시 궁금하답니다."
장천린은 멋적게 웃으며 말했다.
"소생은 한낱 떠돌이 부랑자일 뿐이오."
황보설연은 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농담을 하시는 군요. 아버님은 부랑자를 부중의 별원에 모실 만큼 너그러운
분이 못된 답니다. 공자께서 스스로를 부랑자라 하심은 소녀를 무시하셔서 말씀하시
는 건가요?"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는 의외라는 느낌이었다.
'수줍고 가냘픈 줄로만 알았는데 당돌한 면이 있었군."
그는 신분을 굳이 밝히고 싶지가 않아 슬쩍 화제를 돌렸다.
"소저가 쓰는 칠현금은 상당한 명기이구려."
황보설연은 안고 있던 칠현금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네. 옛날 음의 대가이셨던 해랑선생(海浪先生)께서 쓰시던 것이랍니다. 원래는 한
쌍인데 하나는 강남의 한 부호가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것은 금백만이 가지고 있었지.'
그는 만금산장에서 칠현금을 금백만이 자랑하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칠현금 소리를 듣다가 세상을 떠났지.......'
장천린은 왠지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주렴 너머로 보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우수가 어렸
다. 황보설연은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엇인지 몰라도 깊은 사연이 있는 분이야.'
황보설연. 그녀의 나이 십팔 세.
지금까지 그녀는 수많은 청년들을 보아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환심을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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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그녀에게 극도로 친절을 베풀었다. 그들은 모두가 준수한 외모에 출신 또한 대
단한 청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번도 그들에게서 이성의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허락도 없이 주렴을 들추며 소향정으로 들어선 사나이. 그를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강하게 파동 쳤다.
지금 그녀의 가슴은 이상한 감정으로 뿌듯하게 차 오르고 있었다. 그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사내에게 호감을 느낀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 분은 대체 어떤 분일까?'
사슴을 닮은 그녀의 눈은 장천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문득 그녀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대체 고결해야 할 규중처녀가 낯선 남자를 처
소에 들여놓고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한 황보설연은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혹시 이 분이 날 경망스러운 여자로 보진 않을까?'
이때 장천린이 고개를 돌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황보소저."
"네?"
"그 칠현금 좀 만져봐도 되겠소?"
"물론이에요."
황보설연은 다소곳이 칠현금을 받쳐 올렸다.
"고맙소, 소저."
장천린은 남자답지 않게 희고 긴 손가락으로 칠현금의 줄을 골랐다. 그것을 본 황보
설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줄을 고르는 저 솜씨... 능숙한 솜씨인데.......'
아니나 다를까?
띠딩... 딩... 딩.......
잠시 줄을 고른 후 장천린은 능숙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칠현금을 탄주하기 시작했
다.
황보설연은 호기심에 끌려 눈을 살풋이 감은 채 곡조를 들어보았다. 처음 그녀는 별
반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탄금 솜씨가 있을 뿐이려니 했던 것이다.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충격을 느꼈다. 이렇게 훌륭한 탄금 솜씨는 듣느니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아! 정말 아름다운 음률이야.'
장천린의 탄금 솜씨는 가히 대가 급이었다. 손가락이 현 위에서 춤을 출 때마다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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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이 쏟아져 내리듯, 심산유곡의 계류가 흘러내리듯, 산사의 풍경소리가 울
리듯, 한 많은 과부가 잠 못 이루고 한숨을 내쉬는 듯... 가히 넋을 빼놓고 있었다.
"......."
황보설연은 완전히 도취되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내려감은 채 금음에 빠져 들어갔
다. 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더욱 쉽게 빠지는 법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잊은 채 망
아지경에 빠졌다.
장천린도 음에 몰입해 들어갔다. 소향정의 두 남녀는 마주 않은 채 한 사람은 탄주
하고 한 사람은 무아경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금음에 도취된 황보설연의 입술이 열리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왕소군은 안장을 떨치고 말에 올랐으나 붉은 뺨에 눈물이 흘렀네......."
두 사나이는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계묵!"
"형님!"
장천린은 무릎을 꿇은 원계묵을 일으키며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반갑구나, 계묵."
비록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이었으나 두 사람은 떨어져 있었다. 특히 금월산에서
환난을 겪은 이후 장천린은 원계묵이 무척이나 그리웠었다.
그가 곁에 있었을 때 그런 고초를 겪은 적이 있었던가? 따지고 보면 원계묵은 그의
수호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계묵은 몸을 일으키며 장천린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
었다.
"그 동안 무척 초췌해지셨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장천린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네. 단지 일 때문에 좀 바빴지."
원계묵은 눈을 번뜩였다.
"이곳에 오는 동안 금월산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몹시 걱정했습니다. 혹시 형님께서
그 일에 연루되지 않았나 해서 말입니다."
"하하하! 내가 누구냐? 계묵. 그래도 머리 좋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남의 싸움에 휘
말려드는 것쯤은 피할 줄 아는 사람이다."
원계묵은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듯 표정이 풀어졌다. 장천린은 그가 자리에 앉은 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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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북경에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원계묵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태진왕 전하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 들어 더욱 악화된 상태입니다
. 소진이 곁에서 돌보고 있지만 용태가 좋아지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장천린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분은 황실의 마지막 기둥이거늘... 건강하셔야 하는데.'
그는 다시 물었다.
"백소저는?"
원계묵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요즘 무척 명랑해졌습니다. 몇 번씩이나 저에게 형님의 근황을 묻는 통에 혼났습니
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원계묵은 의미 있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눈치를 보니 백소저께서는 형님께 보통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천린은 가볍게 일축했다.
"쓸데없는 소리다."
그는 원계묵이 뭐라 말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물었다.
"참 산동(山東)에 갔던 반송에게서는 연락이 없느냐?"
원계묵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 매우 엉뚱합니다. 보름 전 담형과 낭인무사 십여 명을 데리고 산동의 청
도(靑島)에서 포국상인의 배를 타고 포국(葡國:포르투갈)으로 갔다고 합니다."
"포국으로?"
"예, 그것도 태진궁에서 은자 일만 냥을 빌려 떠난 모양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장천린은 그 말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반송은 막남(漠南)에서 자신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었다. 그것은 장천린이 구입한
오만 근의 화약 재료를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에게 은자 일만 냥을
투자해 달라고 했다.
그가 이유를 묻자 화포(火砲)를 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본래 그는 포국에서 십여
년 간 산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폭약제조 기술을 익혔다는 것이다.
훗날 그는 장천린에게 한 약속대로 가공할 위력을 지닌 화포를 만든다. 그것은 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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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震天雷)란 이름을 지닌 것이었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분명 진천뢰 때문에 포국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먼 곳이니 오랫동안 보지 못
하겠구나.'
그렇다.
포국은 수만 리나 떨어진 이역이다. 적어도 일 년 이상은 반송을 만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만일 남들이 두 사람을 봤다면 같은 사내끼리 무
슨 얘기가 그리 많을까 의아할 정도일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방안으로 한 인물이 들어섰다.
낙수범이었다. 장천린은 반색을 하며 그를 소개했다.
"계묵, 이 분은 날 도와주신 분이다. 서로 알고 지내거라."
낙수범은 흠칫하더니 먼저 포권했다.
"원형의 소문 귀가 따갑게 들었소이다. 금생의 영광이오."
원계묵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까 낙형에게 실수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별 말씀을......."
두 사나이는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을 통해 사나이끼리의 뜨거운 정이 흘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의기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개봉지부의 부중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다. 연회에 참가한 사람은 지부대인 황보인이
초청한 세 사람이었다.
단위제와 장천린, 그리고 하남행성(河南行省) 도지휘사 자문격(玆文格)이 참석했으
며 그 밖에 장천린의 수하인 원계묵과 낙수범도 자리를 같이했다.
자문격은 육순 가량 되어 보였는데 혈색이 무척 좋았다.
무장 출신답게 체격이 우람하고 턱에는 아직 세지 않은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
어 대단히 위풍스럽게 보였다.
연회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시녀들이 좌중을 돌아다니며 시중을 들고 흥겨운 주악이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자문격은 정중하게 단위제에게 술을 따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영반께서 개봉까지 행차하신 데는 특별한 이유라도 계신지요?"
단위제는 담담하면서 위엄 있게 말했다.
"조화성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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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격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들어 무림단체인 조화성이 너무 강대해지고 있소. 더욱이 관부와 결탁하여 각
지역에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고 있어 폐하께서는 크게 근심하고 계시오."
단위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폐하께서는 그들의 음모를 알아내라는 어명을 내리셨소. 용대
인께서 그 명을 받으셨기에 본인이 대인을 모시고 나선 것이오."
단위제는 눈 한 번 깜짝하지도 않은 채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고
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자문격은 황제의 명이란 말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폐하께 근심을 끼쳐드려 실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는 말하면서 장천린에게 몹시 신경을 썼다. 지금까지 내내 장천린의 정체가 궁금
했던 것이다.
동창의 대영반이 이렇듯 공경하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고관일 것이다. 그러나 나이
로 볼 때는 고관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분명 신분을 숨기고 있다. 저 분이 풍기는 품위나 기도로 보아 황족임이 분명하다.
한편, 황보인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단위제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도지휘사께서 이번 기회에 관내를 조사해 보도록 하시오. 조화성과 이곳 관내에 내
통관계가 있는지 말이오. 이건 어명이외다."
자문격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삼가 어지를 받들겠소이다."
단위제는 공손한 태도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용대인,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장천린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단위제의 심중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관리들에게 엄한 말을 하여 경
각심을 돋우자는 것이었다.
장천린은 곧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음, 그럼 한 마디 하겠소."
"경청하겠습니다."
자문격과 황보인은 모두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황보인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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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위엄 어린 어조로 말했다.
"요즘 황실에 들어오는 보고에 의하면 각 지방의 관리들이 관내의 백성들을 수탈하
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을 뿐 아니라 무림인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횡포를 외면해
주는 대가로 금전을 수수 받고 있다는 것이오."
장천린의 음성은 찌르는 듯이 두 사람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비록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번에 나와보니 놀랍게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
이 드러났소이다."
"......."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특히 황보인은 이마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
다.
장천린은 차분한 어조로 계속 이야기했다. 그의 음성은 비록 낮았으나 열기가 담겨
있었으며 때로는 사납게 질타하는 어조가 들어 있었다.
그는 주로 관부와 황실의 부패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침내 결론에 다다랐다.
"지금 북방에는 누르하치가 호시탐탐 중원진출을 노리며 여진 삼부족을 통일하여 힘
을 키우고 있소이다. 그런 마당에 관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며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를 해야할 때이오."
장천린은 자문격을 주시했다.
"자대인."
"예!"
"자대인의 청렴한 성품은 익히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자대인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
들은 해이해져 있는 것 같소이다. 이번 기회에 군기를 바로 잡고 군사력을 보강하여
하시라도 비상사태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 같소이다."
자문격은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천린은 시선을 돌려 황보인을 바라보았다.
"황보대인께서는 백성들에게 거두는 세금이 너무 많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그... 그건......."
황보인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번 기회에 세금을 줄이고 백성들을 위해 좀 더 헌신하여야겠소. 개봉 일대의 백
성들의 입에서 원성이 자자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황보인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민심은 곧 천심이오. 백성들이야말로 국가의 중심이오. 그들의 뜻을 반영해야만 태
평성대가 이루어지며 국력이 튼튼해지는 것이오. 앞으로 지부대인께서는 많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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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겠소."
황보인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그는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때문에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장천린은 안색을 바꾸며 술잔을 들어올
렸다.
"자, 여러분. 공연한 말로 흥을 깬 듯 싶소. 어서 술이나 듭시다."
그러나 이미 황보인과 자문격 두 사람은 술맛이 천리 만리나 달아난 상태였다. 그러
니 자연 연회는 일찍 파하게 되었다.
만월(滿月)이 휘황하게 후원을 비추었다.
장천린은 잠을 못 이루지 못한 채 후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따라 유난히
착잡한 심정이었다.
지난 며칠 사이에 그는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니 그 동안 잊고 있던 상념들
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달을 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득한 옛날이었지. 언제인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나는 아버님 품에 안겨 울며 보
채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날 끌어안고 당신의 뺨을 강하게 비비셨지
. 그 따가운 감촉에 도리질 치던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지.
그때는 몰랐지만 당시 아버님께서 눈물을 보이신 것은 어머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
이었지.......
장천린은 아득한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부친을 무척이나 따랐었다. 부친의 이름은 장진군(蔣進君)으로 상인이기 전에
훌륭한 선비였었다.
장진군의 학자 이상으로 깊은 학문을 닦고 있었으며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장천린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부친에게 바로 묻곤 했었다. 물론 장진군
은 막히는 법이 없이 언제나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또한 음률(音律)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장천린을 무릎에 앉히고는 음률에 관해 일러주곤 했다. 피리, 비파, 금
할 것 없이 음률에 관해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장천린이 탄금하게 된 것도
바로 부친을 통해서였다.
장천린에게는 어머니가 없었다.
장진군이 아내를 사별한 후 재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이 어린 장천린은 늘 부
친의 무릎에 앉아 부친이 들려주는 음률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었다.
장진군은 또한 훌륭한 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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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업수완은 정평이 나있었으며 사업은 일취월장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는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만은 한 번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도 그 일에 대해서만은 함구했으므로 장천린은 자신의 조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
었다.
장천린은 오늘따라 부친이 무척 보고 싶어졌다.
외로움 때문이었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남창성을 떠난 이후 그의 생활은 늘 타향살
이였다. 따라서 고독이 몸에 배긴 했으나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한 그루 나무아래 미녀가 서있었다. 황보설연이었다.
장천린은 흠칫했으나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어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황보소저."
황보설연은 미소지었다. 그녀는 동그란 턱을 치켜올리며 감미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달빛이 무척 곱죠?"
장천린은 그녀의 얼굴표정이 약간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낮에 보았던 천진한 표정
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그늘이 져 있었다.
"어인 일이오? 밤이 깊었는데."
황보설연은 고개를 떨구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낮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용대인님."
장천린은 번뜩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황보인이 나에 대해 이야기한 모양이구나.'
그는 담담히 말했다.
"소저가 언제 내게 무례한 적이 있었소?"
황보설연은 멈칫했다.
"황보대인이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한 모양인데 괘념치 마시고 가서 쉬시오."
장천린은 가냘퍼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밤바람이 차갑소. 몸을 해칠까 걱정되니 이만 들어가시오."
그는 몸을 돌렸다.
"저어... 잠깐......."
장천린은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대인이 무척 가깝게 느껴졌는데... 왠지 지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군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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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구려."
황보설연은 장천린을 바라보다 용기를 낸 듯 말했다.
"저어... 용대인님께 부탁이 있어요."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을 용서해 주실 수 있는지요? 아버님은 비록... 선관은 아니지만 소녀에게
있어서는 한 분밖에 안 계신 부친입니다."
장천린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황보설연은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왔다. 밤바람에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체향이
감미롭게 느껴졌다.
"아버님께서 저지르신 일을... 눈감아 주실 수 없는지요?"
장천린은 씁쓸해져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황보소저, 나는 지부대인의 신상에 대한 어떤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소."
황보설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비감이 어렸다. 그녀는 힘겹게 얼굴을 들며 애잔하게 말했다.
"만일 용서해 주신다면... 소녀는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설사... 대인께서
절 원하신다해도......."
그녀는 수치감에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말을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
는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장천린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황보인! 그가 설마 자신의 딸까지 팔아 책임을 회피하고 더러운 욕망을 유지하려
했단 말인가?'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소저의 의도는 알겠소. 하지만 사람을 잘못 보았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버렸다.
황보설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모멸감에 전신을 가늘게 떨다가 이를 악물며
불렀다.
"용대인님!"
"할 말이 또 있소?"
장천린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돌렸다. 황보설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용대인님은 지금 오해를 하고 계셔요. 이번 일은 결코 아버님이 시키신 것이 아니
에요. 다만 소녀가 아버님의 고민을 보다 못해 나선 것 뿐이에요. 아버님이 비록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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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받을 분은 못되신다해도 자신의 딸에게 이런 일을 시킬 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저
의 이런 행동을 아신다면 아마 혀라도 깨물어 자결을 하실 분이에요."
황보설연은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져 있었다.
"대인께서 소녀를 욕하시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에 대한 오해
나 모욕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장천린은 멈칫했다.
황보설연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는 느껴지는 바가 있어 안색을
부드럽게 풀며 말했다.
"소저, 아버님에 관한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외다. 다시 문제 삼지 않겠소. 아마 그
분은 앞으로는 잘 해낼 것이오. 그리고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관부의 일을 참견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오."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는 관부와는 무관하오. 다만 일개 상인에 불과한 사람이오. 소저가 생각
하듯이 황족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몸이라오."
황보설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황보대인이 착각한 것 뿐이오. 하하하! 모든 것은 나와 친한 대영반 나으리가 꾸민
일일 뿐이오."
장천린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일은 되도록 황보대인께 알리지 마시오. 그 분으로서는 낯뜨거운 이야기
일 테니 말이오."
장천린은 화제를 돌렸다.
"소저, 오늘밤은 매우 유쾌하구려."
황보설연은 몇 번이나 안색이 변하더니 물었다.
"용대인님... 이 사실을 알려주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장천린은 멋적게 말했다.
"글쎄올시다. 소저에게만은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았소."
그는 가볍게 포권한 후 돌아서 걸어갔다.
황보설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내게만은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고?'
그녀는 멍하니 장천린이 사라져가는 화원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지금 가슴 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이 희열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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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가만히 눌렀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손끝에 느껴
지는 심장의 박동에 따라 그녀의 얼굴이 조심씩 붉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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