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회하(淮河)의 결의(結義)
그 사나이는 삼 일 전부터 내내 그 자리에 서있었다. 무심한 눈을 지긋이 감은 채로
. 그가 있는 곳은 혼잡한 시장 한 구석이었다.
그는 물건을 팔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손님을 부르려 하지도 않았고 아
무도 그의 물건을 사지 않았다.
그의 분위기 탓이었다. 걸레가 되다시피 한 낡은 흑의(黑衣)를 걸친 데다 양손은 흰
천으로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또한 등에는 짚단으로 감싼 기다란 물체를 메고 있
었다.
얼굴은 준수했으나 평생 햇볕 한 점 보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했다.
그런 모습으로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있으니 누가 그의 물건을 사겠는가?
그가 팔려는 물건은 황소보다 큰 대호(大虎) 두 마리와 멧돼지 세 마리, 노루 두 마
리였다. 아마 사냥한 짐승을 내다 팔려는 모양이었다.
정말 놀라운 물건이었다.
대호는 보통 호랑이보다 훨씬 큰 것으로 숙련된 사냥꾼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정
도였다.
처음에는 그의 주위로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으나 인상이 워낙 음산하여 시간이 흐르
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피해버렸다. 그러니 물건이 팔릴 리가 없었다.
그는 누군가?
바로 사문도였다.
얼마 전 개봉부에서 삼첨극을 사고 남은 은자로 단위제와 몽땅 술을 마신 터라 사냥
에 나섰다. 사냥한 짐승으로 은자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텃세를 부리는 불량배들이 다가왔으나 그의 분위기 탓
인지 모두 질려 달아나 버렸다.
사문도는 정말 고지식한 위인이었다.
은자가 떨어졌으므로 그는 밤이면 산에 가 찬이슬을 맞으며 잤으며 허기는 산짐승을
잡아 메웠다.
그래도 은자는 필요했다. 옷도 갈아입어야 했고 그 밖에도 쓸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 일이 지나도록 한 푼도 벌지 못한 것이다.
한 소년이 다가왔다. 커다란 눈에 호기심이 잔뜩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죽은 호랑
이를 손가락을 쿡 찔러보더니 물었다.
"이거 진짜 호랑이예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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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계속 물었다.
"정말 아저씨가 잡은 거예요?"
사문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으와! 굉장히 크네요. 아저씨는 힘이 대단한 모양이에요? 헤헤... 어떻게 잡았나요
?"
이때 소년의 부친인 듯한 한 중년인이 다가오더니 소년의 팔뚝을 잡아 당겼다.
"아복(阿福), 뭐 하는 거냐? 어서 가자!"
소년은 중년인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떼를 썼다.
"싫어! 좀 더 구경할래... 난 호랑이를 처음 본단 말이야!"
"안돼, 이놈아! 저 자는 낭인무사야. 가까이 하면 위험해. 어서 가자!"
부자는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사문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의 눈빛은 더욱 고독해졌다. 지난 오 일 동안 그는 개봉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금월사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
을 느꼈던 용백군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 개봉을 떠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내내 한 마리의 한 마리의 짐승도 팔지 못했다. 도대체가 장사에는 재주가 없
었던 것이다.
문득 칼칼한 음성이 들렸다.
"대주(隊主), 대단한 크기의 호랑이입니다."
"음. 그렇군."
몇 명의 사나이들이 다가왔다.
선두에 선 갈의를 입은 청년은 원계묵이었다. 그는 백살대의 수하 네 명과 함께 바
람을 쐬러 시장에 나온 것이다.
원계묵의 눈이 번쩍 빛났다. 사문도를 본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보통 인물이 아니다. 이토록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자는 처음이다.'
이때 사문도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 다 똑
같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수에게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원계묵과 마찬가지로 사문도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무서운 인물이다. 결코 태사독 못지 않은 기도다. 개봉에 저런 인물이 있었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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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원계묵이 다가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친구, 이 짐승들은 팔려고 내놓은 것이오?"
"그렇습니다."
사문도는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원계묵은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흠, 친구는 장사를 하려면 옷차림부터 바꾸어야겠소. 그런 모습을 보고 누가 물건
을 사려고 하겠소?"
사문도의 무심한 눈에서 일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내 일입니다. 상관 마시오."
원계묵의 입술이 약간 비틀어졌다.
상대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그다지 공손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아무렇
게나 널려있는 짐승들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한여름인데 고기가 상하겠군. 이 호랑이 얼마요? 친구."
사문도는 여전히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고 싶은 대로 주십시오."
원계묵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친구로군.'
그는 이상하게 상대에게 끌리고 있었다. 비록 말투는 껄끄럽기 그지없었으나 대하면
대할수록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품에서 삼십 냥쯤 되어 보이는 은덩이를 꺼내 바닥에 던지며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소?"
"아까 말한 그대로입니다."
사문도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간단히 대꾸한 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원, 무뚝뚝한 친구로군."
원계묵은 히죽 웃고는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가자."
"예, 대주."
네 명의 백살대원들이 호랑이를 들쳐 메었다.
원계묵은 돌아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는 평생 가도 장사로 성공하긴 어려울 것 같소. 하하핫!"
그는 곧 사문도를 뒤로하고 사라졌다. 사문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으나 곧 본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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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으로 돌아갔다.
자하별원.
후원에서 원계묵의 수하들은 호랑이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호랑이는 무척 컸다. 마
침 그 광경을 바라보던 장천린은 원계묵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척 큰 범이군. 어디서 구했나, 계묵?"
원계묵은 싱긋 웃었다.
"개봉부 저자거리에서 샀습니다. 아주 괴상한 친구에게서 말입니다."
"괴상한 친구?"
"후후! 평생 가야 물건 따위는 팔 줄도 모를 것 같은 청년이었습니다."
장천린은 흥미를 느꼈다.
"사냥꾼이었나?"
"글쎄요? 사냥꾼이라기엔 지닌 바 기도가 놀랍더군요."
원계묵은 히죽 웃었다.
"어쨌든 돈이 아쉬운지 짐승을 내놓고 팔리기를 기다리더군요. 멍청히 선 채 그것도
입을 꾹 다물고 말입니다."
장천린은 그의 말에 점점 더 흥미를 느꼈다.
"후후! 게다가 그 차림새라니. 보통 사람은 접근조차 하지 못하겠더군요."
"차림새가 어떻기에?"
"낡은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걸레나 다름없는 데다 피까지 군데군데 묻었더군요. 게
다가 양손에 붕대까지 감고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지요. 자세히 보면 얼굴은 잘 생
긴 편인데 말입니다."
장천린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급히 물었다.
"혹 등에 무슨 물건을 메고 있지 않던가?"
원계묵은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형님께서 그걸 어떻게? 맞습니다. 뭔지 모를 짚단으로 싼 기다란 물체를 메고 있더
군요."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사문도다! 금월사에서 만났던 그 청년.'
원계묵은 그의 표정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아시는 친구입니까?"
장천린의 안색이 환해지고 있었다.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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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묵, 잠깐 나갔다 오겠다. 다녀온 후에 얘기해 주마."
원계묵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딘가 들떠 보
이는 걸음걸이였다.
원계묵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형님께서 무척 기뻐하시는 것 같은데. 대체 누굴까?'
원계묵은 얼마 전 만났던 사문도를 떠올렸다.
'아무튼 마음이 끌리는 친구였는데 잘하면 다시 만나게 되겠군.'
백살대의 수하들은 대호의 가죽을 완전히 벗겨냈다.
"대주, 훌륭한 호피(虎皮)입니다."
한 수하가 호피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그 호피를 형님의 의자에 씌워드려야겠다."
원계묵의 관심은 늘 장천린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문도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느덧 황혼이 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짐승을 더 팔지 못했다. 지금 그의 품에
는 원계묵이 준 은자 삼십 냥이 있었다.
'그만 둘까?'
삼십 냥이면 그래도 한동안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저자에서 팔리지도 않는 물
건을 놓고 기다리는 일에 진력이 날대로 나고 있었다.
그는 우울한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기다란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지며 누군가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노루는 얼마요?"
사문도는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무심하기만 하던 눈에 이상한
빛이 일렁거렸다.
눈앞에 한 청년이 서있었다. 바로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했던 용백군이었다.
황혼 빛을 받아 사문도의 창백한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미
소가 그의 얼굴에 그려지고 있었다.
회하(淮河).
개봉부를 거쳐 흘러가는 강이다.
노을이 회사의 강변 백사장을 곱게 물들이고 있었다. 낙조(落照)를 받은 백사장과
강물은 하나가 되어 초여름 저녁의 운치를 돋구고 있었다.
백사장에 두 사나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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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편한 자세로 백사장에 앉아있었고, 사문도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노루의
가죽을 벗기는 중이었다.
삭... 삭.......
작은 손칼을 이용하여 가죽을 벗기는 사문도의 솜씨는 능숙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죽을 벗겨낸 그는 역시 익숙하게 내장을 긁어냈다.
연후 모래사장 위에 모닥불을 지핀 후 노루고기를 통으로 꿰어 불 위에 올려놓기까
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장천린은 줄곧 미소 띤 얼굴로 사문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유랑생활을 했군.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사문도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입가에는 멋적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관계없소이다. 나는 기다리는 데는 익숙한 몸이니 말이오."
타다닥.......
모닥불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사문도는 불 위에 나무를 얹으며 차분하게 말했
다.
"지난 오 일 간 줄곧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산에서 짐승을 잡아 이곳에서 요리를 해
먹으면서 말입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개봉성 내에 머물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천린은 모닥불 빛을 받아 약간 상기되어 보이는 사문도의 얼굴을 응시했다.
'평소에는 고독해 보이던 모습이 오늘따라 무척 밝군. 마치 홍안의 소년처럼'
사문도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강가로 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차가운 강물에 담가
두었던 몇 병의 술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원계묵에게 호랑이를 팔아 만든 돈으로
산 것이었다.
"한 잔 받으시지요."
사문도는 공손히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였다.
장천린은 두 손으로 술을 받았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킨 후 사문도에게 잔을 돌
렸다.
강변에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닥불 빛으로 인해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따사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나누었다. 술이 몇 순배 돈 후 사문도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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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월산에서 헤어진 이후 용대인을 뵙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산에 불이 났기 때문에
그곳에 계시지 않을 것 같아 개봉에서 용대인을 찾게 되었지요."
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사형과 나는 꽤나 인연이 있는 듯합니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한데 개봉에서 누구를 만난다고 들었는데 그 일은 잘 되었습니까?"
사문도의 눈에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그가 침묵하자 장천린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분명 여자일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사랑하는... 그런데 표정을 보니 만나지 못한
것 같구나.'
장천린은 말을 돌렸다. 상대방이 듣고싶지 않은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화술(
話術)의 기본인 것이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주로 장천린이 얘기하고 사문도는 듣는 편이었
으나 그는 줄곧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태도였다.
그가 이렇게 남의 이야기를 오래 듣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한 번 있기는
있었다. 술집에서 단위제와 만났을 때였다. 그때 그는 상당히 취해있었다. 지금 그
는 장천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느덧 두 사람은 얼큰하게 술이 올랐다. 장천린은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그는 술
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사문도가 워낙 셌다.
그래도 그는 술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얼마든지 술을 마셔도 좋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강변은 완전히 어둠에 덮였고, 모닥불은 계속 타올랐다.
노루고기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기는 가운데 술잔을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에는
훈훈한 인정이 흐르고 있었다.
원계묵과 낙수범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상당히 친숙해져 있었다. 원계묵과 낙수
범 둘 다 과묵한 성격이라 서로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낙수범의 바둑은 차분하면서 실리적(實利的)이었다. 그는 조용히 바둑알을 놓았다.
국면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원계묵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따라 계속 실수를 하고 있었다. 그는 바둑을 두다말고 연신 밖을 응시하곤 했다
낙수범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내심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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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 원계묵, 천하제일도라 소문난 것과 달리 의외로 단순한 성격을 지닌 친구다.'
낙수범은 차분하면서 치밀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원계묵의 심중을 벌써부터 헤
아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지금 용대인을 걱정하고 있구나. 용대인은 정말 좋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셈이다.'
그는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때 원계묵이 바둑알을 던지며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낙형."
낙수범의 과묵한 얼굴에 한 가닥 미소가 번졌다.
"용대인 때문에 원형의 심기가 복잡한 모양입니다."
원계묵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형님은 늘 혼자이길 원하시고 저는 늘 곁에 있으려 하고 말입
니다."
그의 얼굴에는 충후한 표정이 어렸다.
"실상 금월산에서 형님께서 고초를 겪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님이 제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늘 안쓰러운 느
낌이 듭니다."
그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몇 명의 수하들을 시켜 몰래 형님을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아
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군요."
낙수범은 내심 감탄했다.
'이 친구가 용대인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신봉적이구나. 어떻게 이런 인간관계가 가
능할 수 있단 말인가?'
원계묵은 화제를 돌렸다.
"낙형은 전에 목장을 경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낙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원계묵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물었다.
"앞으로 낙형의 꿈은 무엇입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낙수범은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담담히 말
했다.
"과거 목장을 경영하던 기전령(騎全嶺)에다 다시 목장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입니다......."
원계묵은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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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이번에는 낙수범이 물었다.
"원형은 꿈은 무엇이오?"
원계묵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하지만 목표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표가 꿈이 될 수는 없지요. 굳이
꿈이라 이야기한다면 평생 형님의 곁에서 그 분의 일을 돕는 것입니다."
낙수범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원계묵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마도(魔刀)란 명성이 아닌 한 인간
원계묵에 대한 호감이었다. 그는 원계묵과 같은 종류의 인간을 믿었으며 본능적으로
좋아했다.
낙수범은 성품이 차분하고 지혜로운 위인이었다. 그렇다고 음모나 술수 따위를 쓰는
것은 극히 싫어했다.
그가 조화성에서 삼 년 간 몸을 담은 것은 단순히 몸을 의탁하기 위한 것이었기는
했으나 그곳에서는 묵묵히 자신의 위치만을 고수했다. 만일 그가 적극적으로 출세(
出世)를 지향했다면 필경 자영구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솔직한 인간을 좋아했다. 그래서 원계묵 같은 인간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었
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그 침묵은 한 명의 침입자에 의해 깨
지고 말았다.
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단위제가 불쑥 끼여든 것이다. 그는 술을 꽤 마신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단위제는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원노제 답지 않게 웬 바둑인가?"
원계묵은 담담히 말했다.
"술을 꽤 하셨군요."
"핫핫핫! 술이란 곧 내 인생일세. 황보인과 한 잔 했네. 하지만 내가 목을 축이기도
전에 뻗어버리더군. 그래서 자네를 찾아온 것이네."
단위제는 원계묵을 끌어 당겼다.
"자! 자! 원노제, 이곳에서 청승떨지 말고 나가서 한 잔 하세."
그는 낙수범을 돌아보더니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낙가 젊은 친구도 같이 가세."
원계묵은 고소 지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같이 갑시다, 낙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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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범은 담담히 말했다.
"저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두 분께서 다녀오십시오."
"음?"
단위제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말이나 되냐든 듯이 눈알을 부라리며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불알 두 쪽 차고 나와 사내가 술을 못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닌가? 자네 다시 배워야겠군? 술 없는 인생은 사막 같다는 걸 모르나?"
낙수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조금만 대작해 드리겠습니다."
"헛헛헛! 당연히 그래야지."
그는 낙수범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사람아! 그냥 따라오면 될 걸 가지고 왜 입을 아프게 만드나, 응? 다음부터 또
그러면 용서하지 않겠네."
단위제는 이번에는 원계묵에게 고개를 돌리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계묵. 자네 요즘 몸 괜찮나?"
"예?"
원계묵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단위제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했다.
"내가 말일세... 개봉에서 아주 기막힌 곳을 알아 놓았네. 술값이 좀 비싸긴 해도
계집애들이 상당한 미모를 지녔지. 어떤가, 몸 한 번 풀지 않겠나?"
원계묵은 그만 멋적은 웃음을 흘렸다.
"원, 단도독님도......."
"핫핫핫! 그래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군, 좋아! 가세. 조충과 황계도 함께 데려가야
겠네."
그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놈들 요즘 황보인의 딸을 보더니 두 눈이 때글때글 구르며 계속 몸살을 앓고 있
더군. 으하하하하!"
단위제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양손으로 원계묵과 낙수범을 잡아끌다 시피하며 밖으
로 나갔다.
아무튼 고약한 늙은이였다.
온갖 못된 짓이란 짓은 그가 모두 전염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타다탁.......
회하 강변에서 모닥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장천린과 사문도는 밤이 깊었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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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문도가 말했다.
"고기가 다 익었습니다."
그는 비수로 노루고기를 쿡 찌르더니 능숙한 솜씨로 살을 베어 내 장천린에게 내밀
었다.
장천린은 비수가 꽂힌 대로 고기를 한 점 맛보았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기 맛
은 의외로 좋았던 것이다.
"허! 정말 대단한 솜씨요."
사문도는 멋적게 웃었다.
"다 유랑생활에서 배운 것이지요."
장천린은 고기를 다 먹은 후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한 부위를 잘라 내 사문도에게
건네주었다.
사문도도 미소지으며 받아먹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마치 친형제로 착각을 할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천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형은 어째서 유랑생활을 하는 것이오?"
사문도의 안색이 굳어졌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하오. 쓸데없는 질문을 한듯 하구려."
"아닙니다. 실상......."
사문도의 눈빛이 침잠해졌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 문제는 제 가슴에 언제나 응어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털어
놓고 싶었습니다."
사문도는 잠시 말을 끊은 후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술병을 내려놓은 그는 더욱 가
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에게 부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절 키워준 분은 양부와 네 명의 사
부(師父)입니다."
사문도의 눈빛은 고독해 보였다. 모닥불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음영이 져있어 더욱
더 고독해 보였다.
"양부는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 분 사부도 모두 불구자들이었지요.
그 분들은 언제나 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유일하게 하시는 양부의 말씀은 언제나 똑
같았습니다."
장천린은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강해져라. 강해져라. 이 하늘 아래 가장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 말씀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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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하셨습니다."
사문도.
그가 살아온 곳은 항상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있는 동굴 속이었다. 빛이라곤 고작해
야 손바닥만큼의 공간밖에 밝혀주지 않는 침침한 유등(油燈) 뿐이었다.
그 속에서 네 명의 불구자 사부와 두 다리가 없는 양부 밑에서 그는 무공을 익혔다.
그것도 철이 들기 훨씬 전인 어릴 때부터 혹독하고 처절한 고련을 해야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고련(苦練)으로 인해 사문도는 하루도 살가
죽이 성할 날이 없이 살아야 했다.
"만일 지금 다시 그 짓을 하라고 한다면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그 과정을 견뎌낸 이유는 양부의 말과 부친이 보낸 한 통의 혈서(血書) 때문이었습
니다."
사문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비운(悲運)의 운명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문도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가 혈서를 읽던 순간의 감정들을. 피로 쓴 혈서의 그 내용들을.......
<너는 결코 태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인간이다. 너는 신(神)의 저주로
태어난 비극의 사생아(私生兒)다. 네 몸 속에는 내 피가 흐르고 있으나 너는 나의
아들이 아니고 나 또한 네 부친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용서해 다오. 나의 아들아...
내가 널 이렇게 부를 수 없는 것은 운명이 어쩔 수 없이 맺어준 너와 나의 질긴 인
연(因緣) 때문이다. ...... (중략) ...... 아들아, 나는 너를 지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으로 키웠다. 그것은 네가 네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게끔 해주는 것
이 아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 (중략) ...... 네가 그것을 모
두 이루었을 때, 너의 몸에 씌워진 저주의 굴레는 벗겨지고 너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들아.......>
장천린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사문도가 들려준 혈서(血書)의 내용이 너무나도 처절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전
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대체 어떤 운명을 타고났기에 그토록 처절한 혈서를 남겼단 말인가?'
사문도의 눈에는 공허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아버님이 공동산( 山)의 동굴에 남긴 서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조화성(造化城)을 멸하고 조화성주를 척살(刺殺)하라.>
장천린의 가슴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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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도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저는 공동산을 떠났습니다. 일 년 전의 일이었지요. 조화성주 염무를 죽이고
조화성을 붕괴시키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야만 아버님을 뵐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공허한 그의 눈에서 얼음보다 차가운 광채가 번뜩거리고 있었다. 실로 소름 끼치도
록 섬뜩한 안광이었다.
장천린은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끼며 침묵했다.
"오 일 전 저는 금월산에 난 불을 보고 양부의 유골을 찾으러 금월사로 올라갔습니
다. 그러나......."
사문도는 모닥불을 응시했다.
"금월사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어 유골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화
성의 무리들과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장천린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혹시 태사독과 만나지 않았소?"
사문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죽였습니다."
충격!
장천린은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악마(惡魔)의 혈우겁(血雨劫)!
강호에 파다하게 퍼져나간 당시의 일이 바로 사문도가 일으킨 것이었다니! 그가 바
로 혈우겁의 장본인이었다니!
장천린의 놀라움은 컸다.
그는 멍하니 사문도를 바라보았다. 이 말없는 과묵한 청년. 선천적으로 어둠을 끌어
안고 있는 듯한 청년이 바로 무림을 위진시킨 악마의 혈우겁의 장본인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모닥불은 점차 사그라져 갔다.
장천린은 상당히 취해있었다. 반면 사문도의 눈에서는 조금도 취기가 엿보이지 않았
다. 아니, 도리어 술이 깬 듯 영롱하기만 했다.
그는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달이 떠 있었다.
시간은 어느 덧 자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술도 고기도 거의 다 떨어졌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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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도는 급히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장천린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부축은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백사장을 걸었다. 백사장에 그들의 두 그림자가 길
게 이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이제껏 나눈 대화가 너무도 많고 길었기 때문일까?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으나 조금
도 부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사문도는 장천린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입
을 열었다.
"용대인님."
장천린은 그를 쳐다보았다.
"어려우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좋을는지요?"
장천린은 그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사형의 부탁이라면 어떤 것이든 들어드릴 용의가 있소이다."
사문도는 망설이다 어렵게 말했다.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절 곁에 두어 주시겠습니까?"
장천린은 멈칫했다.
그는 유심히 사문도를 응시했다. 그는 사문도의 눈에서 그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
온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사형......."
사문도의 말이 그의 말꼬리를 잘랐다.
"아우라 불러 주십시오."
장천린은 그를 주시하며 물었다.
"왜 그런 부탁을? 내가 보기에 사형은 천하의 누구보다도 강하고 능력이 있소. 왜
구태여 스스로를 구속하려 하오?"
사문도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이 넓은 천지에 오직 저 혼자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상대해야 할 존재는 너무나
거대합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무림인이 아니라 일개 상인일 뿐이오. 사형을 도울 능력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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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도는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 옆에서 방향만 지시해 주십시오. 염무를 상대하는 일은 소제가 할 일입니다. 용
대인님은 다만 지시만 해주십시오."
장천린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의 말은 계묵의 말과 너무나 같구나. 무슨 일일까? 계묵과 성격도 비슷하고
무공도 강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상대 또한 모두 염무다.'
그렇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이한 일이었다.
사문도는 진지하게 말했다.
"지난 오 일 간 저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솔
직히 말한다면 저는 의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용대
인께 의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조금이나마 저의 고독함을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사문도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제가 너무 이기적이라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이것은 저의 진심입니다."
그는 장천린을 뜨거운 눈으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용대인님이 무림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치 않겠습니다. 제가
용대인을 따르고 싶은 것은 절대 무공 때문이 아니니까요."
장천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사형, 잠깐 팔을 풀어 주겠소?"
"네......."
장천린은 그의 부축에서 벗어나 몇 걸음 걸어가다 멈춘 후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달이 비쳤다.
장천린은 사문도가 좋았다.
그의 성격이 좋았다. 아니 처음 볼 때부터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상인이었다. 만일 그가 사문도를 거둔다면 너무도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자칫 조화성의 표적이 될 우려가 있었다.
어쩌면 멸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사문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장천린을 바라보
고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장천린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
문도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용백군, 아니 장천린을 볼 때부터 그의 가슴이 한없이 넓고 푸근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떠한 일이라도 그의 가슴은 포용해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를 찾아 개
봉으로 왔던 것이다.
장천린은 시선을 돌려 사문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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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제,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게."
사문도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노제라고.......'
그 말이 너무나 정겹게 들렸다. 그는 가슴이 다 뭉클할 지경이었다.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약속하겠습니다."
장천린은 엄숙하게 말했다.
"내 곁에 있는 한 자네 임의의 행동을 허락할 수 없네. 하지만 그것이 싫으면 언제
든지 떠나도 좋네."
사문도는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백사장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맹세합니다. 제 이름... 아니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 사문도 비록
큰놈은 아닐지라도 사나이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 사나이의 명예를 걸
고 맹세하겠습니다."
장천린은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반갑네, 아우."
"형님!"
두 사람은 굳세게 서로를 포옹했다.
사나이의 뜨거운 포옹. 그 순간에 사문도의 고독하던 눈에 뿌연 안개가 서렸다.
두 사나이.
이렇게 되어 장천린과 사문도는 운명적으로 합쳐졌다.
훗날 무림사상 가장 강한 고수의 한 명으로 불려지며 숱한 전설과 신화를 뿌리게 될
미증유의 고수 사문도.
그와 장천린의 운명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회하의 물결에 비친 달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장천린은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순간 그는 골치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일어난 곳은 침상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언제 돌아왔단 말인가?'
그는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은 사문도와 개봉부로 들어
오다 이차로 어떤 주루로 들어가 다시 술을 마셨다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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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간간이 기억이 끊겨 있었다.
'거의 날이 샐 때까지 마신 것 같은데.......'
다시 골치가 쑤셔왔다.
'사문도는 어디로 갔을까?'
이때 문이 열리며 한 미녀가 들어왔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녀는 바로 황보설연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자신의 침실로 들어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보설연은 활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깨어나셨군요, 용대인님."
장천린은 상체를 일으키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저가 어떻게 이곳에?"
"훗!"
그녀는 옥수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속은 괜찮으세요?"
"그렇소만......."
"그럼 이 연자탕(蓮子湯) 좀 드세요. 속이 풀리실 거예요."
황보설연은 다가와 침상 가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향기로운 냄새와 김이 오르는 그릇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숟가락으
로 연자탕을 한 술 떴다.
"자, 드세요."
장천린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 아니오. 내가 들겠소."
황보설연은 두 눈을 예쁘게 굴리면서 웃었다.
"호호! 용대인님 답지 않게 당황 하시네요. 부담 갖지 마세요. 그러면 오히려 소녀
가 불편하잖아요."
장천린은 거북스러웠다.
본래 그는 거부 출신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시녀의 시중을 받아오면서 자랐다. 또한
절세미녀인 취옥교나 동방옥의 시중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황보설연과 그는 거리감이 있는 사이였다.
장천린은 계속 그녀가 수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
다는 생각에 할 수 없이 받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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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
황보설연은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잠시 후 장천린은 연자탕 한 그릇을 말끔히 해치울 수 있었다. 그는 연자탕의 맛을
몰랐다. 그것은 바짝 붙어 앉아 시중을 드는 황보설연 때문이었다.
연자탕 그릇이 치워지자 장천린은 다시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 주시겠소?"
황보설연은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도리어 반문했다.
"오늘 새벽의 일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는단 말인가요?"
장천린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생각나지 않소이다."
황보설연의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장천린은 가슴이 뜨끔했다.
'혹시 내가 취중에 실수라도 했단 말인가?'
그는 어색한 느낌이 들어 말을 돌렸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었소?"
"오시예요."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벌써 오시? 한낮이 되었단 말인가?'
이때 문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험! 용대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단위제의 음성이었다. 장천린은 그의 출현이 반가웠다.
"들어오십시오, 단도독."
문이 열리며 단위제가 들어왔다. 황보설연은 쟁반을 챙긴 후 허리를 숙였다.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어요."
그녀는 단위제에게도 인사를 했다.
"대영반님, 용대인님과 말씀 나누세요."
단위제는 껄껄 웃었다.
"허허허, 수고했소. 황보소저."
황보설연이 나가자 단위제는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용대인은 복도 많소이다. 저런 미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니 말이오."
장천린은 당황하여 급히 말했다.
"오해 마십시오. 황보소저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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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핫, 용대인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황보소저가 대인을 바라보는 눈빛은 심상치가
않소이다."
장천린은 고소 지으며 말했다.
"단도독, 내가 어제... 아니 오늘 언제쯤 돌아온 것이오?"
"인시 경이었소이다."
단위제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무척 취하셨소이다."
"혹시... 내가 황보소저에게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지?"
단위제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느긋이 말했다.
"어제 용대인이 늦는 바람에 우리는 물론 황보소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밖에 나와
있었지요. 한데......."
단위제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용대인은 무척 기분이 좋은 듯 우리에게 한 마디씩 하였소. 그리고 황보소저에게.
......"
장천린은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단위제는 흐흐 웃으며 말했다.
"황보소저를 덥석 안더니 입을 맞추시더군요."
장천린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황당무계한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소! 내가 어찌 그럴 리가......."
단위제는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헛헛! 솔직히 그것은 이 단위제가 본 중에 가장 용감한 모습이었습니다. 만일 그곳
이 방이었다면 우리는 모두 자리를 비켜 주었을 것이오."
"그... 그럴 리가......."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황보소저의 태도였었지요. 그녀는 용대인의 갑작스런 행
동에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우리가 깜짝 놀랐을 정도로 말이외다."
장천린은 처음에는 그의 말이 거짓이라 여겼으나 나중에는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황보설연의 태도가 납득이 갔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단위제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이때 단위제는 웃음을 그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용대인이 실수를 한 것이 아니외다."
"그게 무슨... 뜻이오?"
"용대인은 취중에 황보소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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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옥교 소저로 말이외다."
장천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보소저를 껴안으며 연신 옥교라고 외쳤소이다. 사랑한다고......."
장천린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비로소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꿈을 꾸었나 싶었다. 꿈속에서
취옥교와 만난 것 같았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옥교와 만나 뜨겁게 포옹했었다. 그런
데 그것이 꿈이 아니라 취중의 현실이었을 줄이야.......
장천린은 강하게 고개를 저은 후 물었다.
"혹시... 나와 함께 온 사람이 없었습니까?"
"사문도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장천린은 의아했다.
"단도독께서 그를 아시오?"
"허헛! 이 단위제가 모르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실상 사문도와 만난 것은 이 단위
제가 먼저올시다. 그와 술을 마신 적이 있었으니 말이오."
단위제는 개봉의 한 술집에서 사문도를 만났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허허! 그 사가 아이는 어젯밤 이곳에서 잤소이다. 아침 일찍 목욕하고 지금 밖에서
원제와 이야기하고 있소이다."
단위제의 말이 끝나자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들어오라고 해주시겠습니까?"
"헛헛! 그러지요."
단위제는 너털웃음 치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사문도가 들어왔다. 그가 들어선 순간 장천린은 놀라마지 않았다.
사문도는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일신에는 깨끗한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으며, 양손에는 붕대 대신 검은 장갑을 끼
고 있었다. 이마에도 역시 검은 색의 두건을 둘러 전신이 온통 검은 색 일색이었다.
일월쌍극도 검은 천으로 단정하게 감싸 등뒤에 메고 있었다. 그야말로 산뜻하고 멋
진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사문도는 원계묵과 함께 방으로 들어서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 좀 괜찮습니까?"
"나 말인가? 하하! 물론 괜찮지!"
장천린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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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 후, 장천린은 떠날 채비를 차렸다.
북경에 있던 부금진과 초광이 구룡상선(九龍商船)을 이끌고 돌아온 것이다. 구룡상
선에는 백살대의 무사들과 낭인무사들이 모두 타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배에서 내려 개봉지부로 들어오자 지부대인 황보인은 정신이 없을 정도
로 바빠졌다. 한꺼번에 많은 손님을 맞이해야 했던 것이다.
아직도 장천린을 황족으로 알고있는 그는 백살대와 낭인무사대도 황궁의 위사로 착
각하고 있었다. 다만 낭인무사들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험악한 것이 다소 의아해하긴
했지만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그들을 맞이했다.
개봉부중은 그 바람에 시끌벅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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