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반목(反目)
그의 눈은 힘없이 웃고 있었다.
그 눈에는 일말의 생기(生氣)도 없었다. 다만 절망과 무력함을 담은 채 회백색의 색
조를 띨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은 웃고 있었다. 아무 의미도 담겨있지 않은 그런 괴상한
웃음이었다.
눈(眼). 또 다른 두 쌍의 눈은 그 눈을 바라보며 분노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침상 위에 남녀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남자는 꽤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었고, 여인은 아직 나이 어린 소녀였다. 그들은
어딘가 모르게 닮은 점이 있어 보였다.
침상 앞에는 한 명이 우뚝 서 있다.
후리후리한 키의 비단옷을 입은 인물이었다.
한데... 얼굴이 없었다.
그는 탈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섬뜩한 느낌이 드는 괴이한 모양의 탈이었다. 탈 한
가운데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웃는 형태의 눈구멍만이 뚫려 있을 뿐.......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눈썹도, 귀도, 코와 입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머리카락조차 없었다.
오직 웃는 모양의 눈구멍만 뚫려 있을 뿐, 더욱이 탈에는 조잡한 솜씨로 횟빛 칠이
더덕더덕 칠해져 있어 더욱 공포스런 느낌을 주었다.
자세히 보면 탈에 뚫려 있는 두 개의 구멍 속으로 보이는 그의 눈에는 극도의 무기
력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
그는 힘없이 침상 위의 두 남녀를 내려다보았다.
침상 위의 중년인은 청수한 용모였고 제법 위엄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소녀는 십 육칠 세쯤 되어 보였는데 대단한 미모였다. 다만 아직 덜 성숙해서 인지
가냘픈 느낌을 주었다.
이때 중년인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귀하는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멋대로 침입한 것이오?"
탈은 쓴 인물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만약 밖에 있는 고수들이 이 사실을 알며 당신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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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탈을 쓴 괴인의 눈이 더욱 힘없이 웃었다. 아니 탈속의 그 눈은 웃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만 탈의 눈이 웃는 모양이기에 괴인의 눈도 웃는 것처럼 보이는 지도 몰
랐다.
중년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방금 전의 일이 생각났다.
괴인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한 쪽 팔에 끼고 들어와서는 자신을 단 삼 초만에 간단히
제압했다.
그래도 진강(鎭江) 일대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자신을 말이다.
괴인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유관웅(柳官雄). 나이 삼십 칠 세, 별호는 군자검(君子劍). 진강채(鎭江寨)의 주인
......."
괴인의 음성은 너무나도 힘이 없었다.
그의 무기력한 눈이 이번에는 소녀에게로 옮겨졌다.
"유하림(柳河林). 나이 십 육 세. 유관웅의 하나 뿐인 누이동생......."
그 말을 듣는 동안 유관웅과 유하림은 전신에 소름이 쭉 끼쳤다. 괴인의 음성은 도
무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유관웅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귀하가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오? 다 들어 줄 테니 제발... 그냥 물러가 주시오.
괴인의 눈이 일순간 무심하게 변했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노전익(魯殿翼)은 어디 있느냐?"
유관웅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다... 당신은 누구요?"
"노전익은 어디 있느냐?"
괴인의 음성은 방금 전과 똑같았다.
유관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직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경련할 뿐이었다. 그
러나 그는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모르오."
괴인의 눈이 힘없이 웃었다. 그는 침상 곁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흰 손이었다.
남자의 손인지 여자의 손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그런 희고 창백한 손이었다.
"무... 무슨 짓을?"
유하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괴인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뻗어왔기 때문이
다. 괴인은 말없이 유하림의 가슴 섶을 잡더니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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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 익!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갔다.
"아악!"
유하림은 비명을 질렀다. 괴인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몇 차례 손이 움직이는 사이
에 그녀의 옷은 사정없이 찢겨져 나갔다.
"머... 멈추시오!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나 괴인은 손을 멈추지 않았고, 잠시 후 유하림은 완전한 나체가 되고 말았다.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육체였다.
눈부시게 흰 피부에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은 아직 완전한 여인의 면모를 보
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수치감 탓인지 젖가슴 정상에 매달린 작은 유실이 바르르 경
련하고 있었다.
그녀는 맥없이 사지를 내던지고 있었다. 혈도가 찍혀있는 것이다.
"노전익은 어디 있느냐?"
괴인의 눈은 유하림의 가녀린 나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그런 사람 모르오!"
유관웅은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괴인은 중얼거렸다.
"아름답군."
비로소 그의 힘없는 눈이 유하림의 나신을 느릿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창백한 손으로 유하림의 봉긋한 젖가슴을 가만히 쓰다듬더니 강하게 움켜쥐었
다.
유하림은 비명을 질렀다.
"악! 오라버니... 살려줘요! 아악!"
그녀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괴인의 손이 슬슬 내려가더니 그녀의 아랫배를 쓰다
듬고 있었다. 아니, 그는 거침없이 그녀의 하반신으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유관웅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자... 잔인무도한 놈!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유관웅은 움직일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인 듯 온몸을 경련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천벌?"
괴인은 유하림의 아랫도리에서 손을 뗐다. 그는 조용하고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세상에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썩은 세상이다. 신마저도 야욕과 탐
욕으로 썩어버린 것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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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을 쓴 괴인의 음성은 더욱 무심해졌다.
"인륜(人倫)이 무너지고 도덕이 말살되어 가고 있다.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가
딸을 죽인다. 돈 몇 푼에 부모는 자식을 팔아먹고 자식은 늙은 부모를 헌신짝처럼
내버린다. 인간은 물론 신조차 썩었는데 누가 과연 내게 천벌을 내린단 말이냐?"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다.
"미... 미친... 궤변이다!"
유관웅은 마치 악마의 저주라도 들은 듯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이때 괴인의 눈에서
처절한 빛이 흘러나왔다.
'으으.......'
유관웅은 그 눈빛을 보자 마치 흉신악살이라도 본 듯 공포에 질려버렸다. 그러나 괴
인의 눈빛은 다시 무기력하게 변해버렸다.
"어차피 무너진 천륜, 지금부터 너희들도 그 행렬에 동참해줘야겠다."
괴인은 갑자기 창백한 손을 뻗었다.
"무... 무슨 짓을!"
찌... 익!
유관웅의 옷이 찢어져 나갔다. 유관웅은 불현듯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치뜨며 애원했다.
"제... 제발 그만두시오. 제발!"
아무 소용없었다. 괴인의 손이 몇 차례 움직이는 사이 그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 말았다.
우람한 체격이었다. 특히 가슴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하게 발달해 있었으며 수북하게
털이 나 있었다.
"제발... 제발!"
유관웅은 넋을 잃은 채 부르짖었다. 괴인은 그의 팔을 들어 유하림의 젖가슴 위에
얹어 놓았다.
"괜찮을 것이다. 네 누이는 처녀니까......."
유하림은 수치와 공포로 인해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더구나 유관웅의 털북숭이
손이 자신의 젖가슴 위에 얹혀지자 그녀는 절망의 외침을 발했다.
"오... 오라버니!"
유관웅은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발... 그만 두시오......."
그의 음성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괴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관웅의 손을 잡고 유하림의 몸을 더듬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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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바람에 유관웅은 누이동생의 젖가슴과 부드러운 아랫배를 쓰다듬게 되었다.
"흑!"
유하림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때 유관웅은 두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뜨며 외쳤다.
"천벌을 받을 놈! 네 놈은 저주받을 것이다!"
"저주?"
괴인은 무기력하게 웃었다.
"후후... 너는 스스로 군자임을 자청했다. 그러나 군자란 위선 속에서 남이 모르는
악행을 얼마나 저질렀더냐?"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괴인은 유관웅의 손을 유하림의 아랫배에 갖다 댄 후 손을 뗐다.
"소... 손을 치워다오!"
괴인은 여전히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유관웅. 너 같은 군자가 왜 십 년 전에는 살려달라고 비는 한 나이 어린 소녀를 강
제로 겁탈했느냐?"
유관웅의 얼굴은 철퇴를 맞은 듯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때 그 소녀도 네 누이와 비슷한 십 육 세였다."
유관웅의 얼굴은 그만 잿빛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그것은 일생 동안에 걸쳐 단 한 번의 오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데 어떻게?
유관웅의 얼굴에 회의가 떠올랐다.
"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
"그 소녀의 이름은 채홍(蔡虹)이었다. 그녀는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의 손
에 생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유관웅의 눈이 급격히 빛을 잃었다.
"나... 나는... 그녀를 죽이지는 않았다."
괴인은 무감동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자결했다.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유관웅의 얼굴은 완전히 핏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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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웅, 그러고도 네가 군자냐?"
괴인은 그의 몸을 번쩍 들어 유하림의 몸 위에 겹쳐 엎드리게 했다. 유관웅은 전신
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불쌍하리만큼 비굴하게 말했다.
"제... 제발!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 테니 제발 이것만은......."
괴인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침상 위의 남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유하림을 덮어 누르고 있는 유관웅과 그 밑에 깔린 채 경련하고 있는 가냘픈 나신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기묘한 흥분의 빛이었다.
문득 그는 눈을 감았다. 탈에 뚫린 눈구멍은 웃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굳게 감겨져
있었다.
이십 삼 년 전.
소년은 누나를 놀라게 해주려고 밤을 새워 하나의 탈을 만들었다.
서툰 솜씨로 깎은 탈은 다만 두 개의 초승달 모양의 웃는 눈구멍이 전부였다. 눈썹
도, 코도, 눈도, 귀도, 머리카락도 없는 것이었다.
탈에는 조잡한 솜씨로 하얀 색만 더덕더덕 칠해놓아 볼품이 없었다.
소년은 아름다운 누나,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고 단정한 모습의 누나를 존경하고 좋
아했다. 소년은 누나가 놀라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킥킥 웃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 소년은 탈을 안고 누나의 방으로 발끝을 들어올린 채 소리없
이 다가갔다.
달빛이 소년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소년은 살며시 문을 열었다.
순간 소년의 눈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누나의 방안에서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을 목
도한 것이다. 결코 보아서는 안될... 도저히 보아서는 안될 광경을 보아버린 것이다
하늘도, 땅도, 심지어는 신조차도 용서하지 못할 광경을 보아 버리고야 만 것이다.
순간 소년의 손에 들려져 있던 탈이 부서질 듯 흔들렸고, 소년의 눈은 그때부터 색
깔을 잃었다. 아니 완전히 생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방문을 등지고 나올 때 소년은 초승달 모양으로 웃는 눈구멍만 파여진 탈을 쓰고 있
었다.
그것이 바로 이십 삼 년 전의 일이었다.
괴인은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유하림에게 떨어졌다. 그녀의 눈이 크게 열려 있었다. 그 눈에는 공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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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저주의 빛이 엉켜 있었다.
'바로 저 눈이다. 저 눈. 흐흐... 그때 누님의 눈이 바로 저런 눈이었다.'
괴인의 눈꼬리에 가느다란 이슬이 맺혔다. 그는 입술을 열었다.
"유관웅!"
유관웅은 죽은 듯이 엎드린 채 대답이 없었다.
"노전익은 어디 있느냐?"
"......."
"노전익은 어디 있느냐?"
유관웅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이어 메말라 터진 입술 사이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
왔다.
"서호(西湖)... 곡류하(曲流河)에 있다."
괴인의 눈이 힘없이 웃었다.
"고맙다. 유관웅."
유관웅의 입가에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네 놈의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느냐?"
괴인은 무기력하게 말했다.
"담(譚)... 그 한 자만 기억해라."
유관웅의 눈동자가 험악하게 굴러갔다.
"죽는 그 날까지... 잊지 않겠다. 네놈을......."
괴인은 창백한 손으로 침상 한 모퉁이를 내리쳤다.
팍!
침상 모서리의 나무가 마치 예리한 보검으로 자른 듯 떨어져 나갔다. 괴인은 잘려진
조각을 들고 물었다.
"또 알고 싶은 것이 있느냐, 유관웅?"
유관웅의 눈썹이 경련했다.
"더러운 네 놈의 얼굴을......."
"내 얼굴 말이냐?"
괴인은 손을 들어 탈을 잡았다.
"자, 봐라."
괴인은 탈을 벗었다. 유관웅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목 뒷부분에 삼각형의 나무토막이 그대로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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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윽!"
유관웅은 눈알을 부릅뜨고 있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그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가 본 괴인의 얼굴에는 똑같은 탈이 씌워져 있었다
"유관웅, 너는 날 알 기회가 영원히 없어졌다."
유관웅의 목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밑에 깔려있는 유하림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유하
림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피에 젖은 그녀의 반쪽 얼굴에 박혀있는 눈동
자에는 저주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저 눈이다. 저 눈.......'
괴인은 어깨를 흔들 했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유령처럼 사라졌다.
항주(抗州).
절강성(浙江省)의 성도인 항주는 서쪽으로는 서호(西湖)를 끼고 있으며 풍광 수려한
전당강(錢塘江)의 하구(河口)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대륙의 남과 북을 관통하는 대운하(大運河)의 종점이기도 하며 남송(南宋)
때는 황도이기도 했다.
항주에는 두 가지가 유명한데, 그 하나는 용정차(龍井茶)로 그 맛과 향이 일품이라
오랫동안 황제에게 진상되는 명품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풍류(風流)다
항주에 가지 않고 풍류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만큼 항주에는 홍등가와
기루(妓樓)가 즐비했으며 도박장과 객잔, 주류업이 성행했다.
한 여름으로 접어들면 항주의 밤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밤이 되면 여인들이 야단스럽게 화장을 하고 나그네를 유혹한다. 물론 그녀들의 값
은 천차만별이다. 때로는 엽전 한 푼에서 금자 백 냥이 넘는 경우도 있으니 그야말
로 백화난방한 셈이다.
수많은 풍류객들이 수레에 가득 은자를 싣고 항주에 찾아와 온갖 향락을 즐긴 후 빈
털터리가 되어 돌아간다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곳. 항주는 그런 곳이
다.
쏴아......!
파도를 가르며 항주만으로 들어서는 범선이 있다.
구룡상선이었다.
범선은 황하구를 빠져나와 동해를 남하하여 항주만으로 입항하고 있었다. 때는 칠월
중순,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갑판 위에는 흑삼(黑衫)을 걸친 청년이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검은 두건에
손에 검은 장갑을 낀 그는 사문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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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발치에는 흰색의 다람쥐가 쪼그려 앉은 채 앙증맞은 자세로 밤을 까먹고 있었
다. 다람쥐는 낭인무사대의 위천조(韋天朝)란 인물이 기르던 것으로 사문도에게 선
물로 준 것이었다.
사문도는 장천린 일행에 합류한 후 줄곧 상선에 머물고 있었다. 본래 그는 고독한
성격이었다. 따라서 장천린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잘 사귀지 못했는데 유독 낭인무사
대 중에서 두 사람과 가깝게 지냈다.
위천조와 뇌찰격(雷刹格)이란 인물이었다.
위천조는 사천(四川) 출신으로 전력은 살인청부업자였다. 그는 삼 년 전 청부업에
발을 뺀 후 낭인시장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그는 나이는 삼십 세로 별로 말이 없는 과묵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문도는 처
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그가 대단한 고수라는 것을 직감했었다.
뇌찰격은 본래 오사장(烏斯藏) 출신으로 라마교(喇磨敎) 고미타사(古彌陀寺)의 승려
였다.
그는 고마타사의 수장인 달라이라마를 모시고 있었다. 오년 전 그는 달라이라마 오
세가 총애하던 라마승 감단(甘丹)과 심한 말다툼을 벌인 끝에 술김에 일장에 쳐죽이
는 사고를 저질렀다.
그는 술이 깬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달라이 오 세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게 뻔했
다. 그래서 곧장 오사장을 등지고 도망치게 되었다.
그 후 납달극(拉達克) 지방으로 이주했으나 라마 고수들의 끈질긴 추격을 받게 되어
할 수 없이 포달랍궁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포달랍궁의 규율은 너무나 엄했다. 결국 그는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포달랍궁을 떠
나게 되었다.
그 후 천애를 유랑하다 자신을 추격하던 고미타사의 기승 팔사파(八思巴)의 제자 노
천(露天)을 죽이고 막남몽고까지 흘러들어 가게 되었다. 이후 낭인시장에 자신의 몸
을 던진 것이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사문도는 그러한 경력을 지닌 위천조와 뇌찰격이 낭인무사대 중에서 가장 강한 자라
고 판단했다.
그런데 사문도가 나타나면서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위천조와 뇌찰격은 사문도에게 매력을 느낀 듯했다. 그것은 그들을 포함하여 낭인무
사들이 거의 모두 황야를 누비는 늑대 같은 삶을 살아온 거친 인생의 소유자였기 때
문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엄격한 훈련에 길들여진 백살대와 함께 행동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
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백살대는 정통무공을 수업 받은 젊은 고수들로, 기질은 활달했으나 행동에 품격이
있었고, 철저히 규범을 지키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도 늑대같이
거친 낭인무사들이 마땅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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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백살대에는 마도 원계묵이란 영도자가 군림하고 있었다. 그것은 늘 낭인무사들
에게 위축감을 주었다.
그러던 차에 등장한 것이 사문도였다.
사문도의 고독한 성품, 음침하면서도 깊이 갈무리된 야성(野性)은 낭인무사들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마침내 그들 사이에서 사문도를 영수로 삼아 백살대와 맞서려는 움직임이 싹트게 되
었다.
위천조와 뇌찰격은 은연중 낭인무사대의 우두머리급이었는데 그들이 사문도에게 접
근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비록 사문도는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으나 그 역시 백살대보다는 야성적인 낭인무
사들에게 정을 느끼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각! 사각!
흰 다람쥐는 작은 이빨로 밤을 갉아먹는다.
사문도는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림자 하나가 그의 발아
래 드리워졌다.
"......?"
사문도는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안색의 인물이었다. 나이는 삼십 정도에 일신에는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
의 왼쪽 눈 아래에는 섬뜩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찍!
다람쥐는 밤을 먹다말고 쪼르르 그의 발등을 타고 오르더니 순식간에 백의인의 어깨
위로 달려 올라갔다.
백의인은 손을 뻗어 다람쥐를 어루만져 주었다.
사문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한가하군요, 대형(大兄)."
언제부터인가?
낭인무사들 대부분이 그에게 대형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오직 강자만이 위에
설 수 있다는 철칙이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사문도는 그런 호칭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굳이 말하기 싫어 그냥 내버
려두고 있었다.
"웬일이시오, 위형?"
사문도는 여전히 편히 앉은 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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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인, 즉 위천조는 그의 곁에 주저앉더니 바닥에 흩어져 있는 밤을 다람쥐에게 주
었다. 그는 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방금 전 뇌찰격이 백살대의 조충과 다투었소."
조충은 백살대에서 운표 다음으로 강한 인물이었다. 사문도는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도무지 표정의 변화가 없다.
"뇌찰격은 밀종(密宗)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요. 솔직히 과거 그의 성질 같았으면 그
작자와 싸웠을 것이오. 하지만 그가 참은 것은 원대주(元隊主)의 총애를 받는 조충
을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대형, 나 위천조는 과거 살인청부업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한 번
보기만 해도 능력을 파악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형의 능력은 원대주의 하수가 아
닙니다. 아니, 그 이상일 수 있습니다."
사문도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위형, 대형이란 칭호를 빼주시오. 위형은 나보다 십여 세나 연장이지 않소? 듣기가
거북합니다."
그는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백살대와는 되도록 충돌하지 마시오. 그들은 예의가 바르며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소. 모두 훌륭한 무사들입니다. 아마 뇌찰격형이 조무사와 다툰 것도 뇌형
이 먼저 실수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위천조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사문도는 몸을 일으키더니 음울한 표정으
로 그를 바라보았다.
"위형, 너무 언짢게 생각 마십시오. 항주에 닿으면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위천조는 그만 멋적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문도는 몸을 돌렸다.
"그럼 용대인께 가보겠습니다."
그는 뚜벅뚜벅 선실을 향해 걸어갔다. 위천조는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
었다. 그의 이마가 서서히 접혀져 갔다.
사문도는 갑판 위를 가로지르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넓은 갑판 위에는 백살대와 낭인무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백살대는 백살
대끼리, 낭인무사들은 낭인무사들끼리만 어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문도는 내심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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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저들간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고 있구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걸으며 염두를 굴렸다.
'이것은 일종의 경쟁의식이다. 그것을 자초하는 것은 백살대 보다는 낭인무사들에게
있다. 그들은 묘한 열등의식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저만치 앞에서 한 명의 거한(巨漢)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십척(十尺)에 가까운
거구를 지닌 그는 초광이었다.
초광은 한 손에 수십 권의 책을 쌓아올린 채 들고 있었다. 하나같이 두꺼운 책이었
으나 그가 들고 있으니 마치 장난감처럼 작게만 느껴졌다.
두 사람이 마주치는 순간 사문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초형, 며칠 동안 못 뵌 것 같습니다."
초광은 담담히 미소지었다.
"예. 일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앞으로는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그냥 제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사문도는 멈칫했다. 그는 아직 초광이란 인물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는 그는 천생의 역사(力士)였다. 또한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겸손할 뿐더러 두 눈에는 지혜가 깊이 도
사려 있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 대단한 독서광이라는 것이었다.
'틈만 나면 책 읽는 것이 취미라더니.......'
사문도는 슬쩍 초광이 들고 있는 책을 훑어보았다.
"어려운 책을 읽으시는 군요."
초광은 멋적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 조금 읽는 정도지요. 사실 책 속에는 위대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겉 핥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문도는 얘기하는 동안 점점 더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회교(回敎)를 믿으신다고요?"
초광의 순한 얼굴에 진지한 빛이 떠올랐다.
"종교란 무엇을 믿든 신성한 것이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회교를 믿었습니다."
초광은 문득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제가 사문도님께 한 말씀 올려도 결례가 되지 않을는지요?"
사문도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세이경청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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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광은 갑판 위의 무사들을 한 차례 둘러 본 후 말했다.
"보십시오. 낭인무사들은 지금 모두 흩어져 있어 저들끼리도 잘 융화되지 않고 있습
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개인적입니다. 게다가 백살대에게 은연중 열등의식을 갖고
있지요. 이런 상황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점도 있습
니다. 그들은 모두 사문도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문도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초광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어투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지금 그들은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문도님께서 낭인무사들의 마음을
하나로 융합하신다면 백살대와의 알력을 해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 사
이에 건전한 경쟁의식을 불어넣을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장차 그들의 능력을 더욱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사문도는 침묵했다. 초광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제 말이 너무 건방졌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사문도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말씀 매우 잘 들었습니다."
그는 상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초형과는 앞으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겠군요."
초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매우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한 번쯤 사문도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초광은 책을 든 상태라 포권 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보통 사람보다 보폭이 두 배는 넓었다. 사문도는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구룡상선의 사람들 중 가장 겸손한 인물이다. 큰 체구와 이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 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훌륭한 현자다. 본 받을 점이 많은 사
람이야.'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걸어갔다.
"어딜 가시오, 사형?"
뒤쪽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원계묵과 낙수범이 다가오고 있
었다.
사문도는 담담히 미소지었다.
"원형과 낙형이군요."
원계묵과 낙수범은 개봉부에서 처음 만난 이후 급격히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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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줄곧 같이 붙어 다녔다. 겉보기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었
으나 그 점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반면 원계묵과 사문도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들이 동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한
서로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기도 했다.
사문도는 원계묵을 보면 황야에 우뚝 선 고봉(高峰)에서 포효하고 있는 사자(獅子)
를 느끼곤 했다. 원계묵이 사용하는 칼의 깊이 또한 추측조차 되지 않았다.
원계묵은 사문도를 처음 보는 순간 질투심과 함께 강한 경쟁의식을 느꼈다. 지금까
지 그는 무도(武道) 방면에서 유일무이한 경쟁자로 오직 무정도(無情刀) 모용초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사문도는 모용초보다 더 강한 느낌을 주었다. 따라서 승부근
성이 강한 원계묵의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저는 지금 형님께 가는 중입니다."
사문도의 공손한 말에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되었군요. 저도 마침 형님께 가는 중이오. 같이 갑시다."
"그러지요."
세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다.
장천린의 처소는 구룡상선의 후미 쪽 선실에 있었다. 세 사람은 걸어가면서 침묵했
다.
사문도는 세 사람 사이의 침묵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원계묵의 삭막한 얼
굴을 보자 그만 입을 열고 싶지가 않았다. 살모사 같은 원계묵의 눈빛은 늘 그에게
먼 느낌이었다.
원계묵과 사문도는 나이가 같았다. 그러나 원계묵이 몇 살 위인 듯이 느껴지는 것
또한 부담스러웠다. 원계묵에게는 누구라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과 대종사와
같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사실이 그러하기도 했다. 원계묵은 구룡상선에서 가장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늑대 같이 거친 낭인무사들도 감히 그의 신경을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 아
닌가?
세 사람이 선실 앞에 당도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단위제가 걸어나왔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아니, 자네들이 웬일인가?"
원계묵은 담담히 말했다.
"형님을 뵈러 왔습니다."
단위제는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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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헛! 그만두는 게 좋을 걸. 나도 따가운 눈총만 받고 쫓겨 나왔으니 말이야."
원계묵은 어리둥절했다.
"눈총이라니요?"
단위제는 껄껄 웃었다.
"하긴? 자네는 사랑 한 번 못해본 쑥맥이니 알 리가 있나?"
그는 세 사람의 어깨를 얼싸 안으며 밀고 나갔다.
"자, 자!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나와 같이 가서 한 잔 하세."
기어코 술타령이 나오고 말았다. 그는 그저 입만 뻥긋하면 술이었다.
"으핫핫! 오늘은 여기서 하루종일 마시고 저녁때는 항주의 기루에서 한 잔 하세."
술 얘기가 나오자 그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항주는 유명한 색향(色鄕)이지. 오늘밤 항주 계집 몇 명을 품고 자지 않으면 이 단
위제의 성을 갈 것이네."
원계묵과 사문도는 서로를 돌아보며 실소를 흘렸다. 단위제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세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자, 내 방으로 가세. 자네들에게 비장의 술을 공개하겠네."
"비장의 술?"
"흐흐! 한 잔이면 하룻밤 내내 여자를 죽일 수 있는 술이라네."
이제껏 말이 없던 사문도가 호기심을 보였다.
"무엇으로 만든 것입니까?"
단위제는 음흉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하며 말했다.
"흐흐... 교미하는 뱀들을 잡아서 직접 담근 것이지. 이것 한 잔이면 오늘 밤 항주
로 쳐들어가 기루란 기루는 몽땅 엎어버릴 수가 있지. 크흐흐......."
원계묵과 사문도, 낙수범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이게
무슨 망발인가?
단위제는 뱁새눈을 뜨며 낙수범의 어깨를 툭 쳤다.
"낙가야."
"예... 엣?"
"오늘도 달아나면 낙씨(駱氏)를 낙씨(落氏)로 만들어 버리겠네. 오늘은 무조건 빠져
나가지 못하네. 알겠나?"
낙수범의 얼굴은 마치 분가루를 뒤집어 쓴 듯 하얘지고 말았다.
"으핫핫! 자, 자! 어서 방으로 가세."
단위제는 대소를 터뜨리며 세 청년들을 개 몰 듯 하며 자신의 선실로 향했다.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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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멀어져 가는 청춘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
을 쓰는 것일까?
아무튼 단위제야 말로 아무도 못 말리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끌려가는 세 청년은 마
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인 듯 모두가 떫은 감 씹은 표정들이었다.
<3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