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칼 끝에 지고 제2부 풍운만장편 제3권
▣등장인물
◈장천린(蔣天麟) - 강남 무창의 동정호반에서 신선루를 경영하던 젊은 상인으로 정
인 취옥교의 의문의 배신과 신산 제갈사의 계략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의 나락에서 되살아나 용백군이라는 전도 유망한 청년상인으로의 새 인생을 시
작하게 되는데... 사랑을 되찾고 누르하치의 음모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그의 앞날은
과연.......
◈취옥교(翠玉嬌) - 장천린의 정인으로 신선루를 운영하던 절세의 미인. 천린으로부
터 청혼을 받은 꿈 같은 날 어둡기만 한 과거로부터의 부름이 있게 된다. 사랑을 위
해 배신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운명... 조화성의 명에 따라 금백만을 살
해하고 천린의 곁을 떠나는데.......
◈원계묵(元桂默) - 마도(魔刀)라 불리워지는 당대 도법의 일인자. 조화성의 살수
모용초에 의해 연인 손미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부인 만승금도 도담후가 살해당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백살대를 조직하여 필살의 의지를 불태우던 중 용백군이라는 젊은
상인을 만나게 되는데.......
◈모용초 - 조화성의 살수이자 마교십삼사의 일원. 절세의 미남자로 여인을 유혹하
여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무정도(無情刀)라는 별호만큼이나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여인에 대한 유별난 증오심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으니.......
◈부금진(符錦眞) - 피리를 즐겨 부는 미소년으로 약칭으로 소진(少眞)이라고도 불
리워진다. 영물에 가까운 흰 앵무새 백아를 데리고 다니며 비도술 및 의술에 일가를
이루었다. 신비에 싸인 인물. 그의 과거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위제(檀偉帝) -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으로 형부도독(刑府都督)이자 동창의
대영반. 청렴강직하며 흉악무도한 범인을 체포하는 데 달인의 솜씨를 지니고 있으며
, 미궁(迷宮)에 빠진 사건을 처리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
◈반송 - 해적선 검은 바람에 의해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백군의 도움으로 살아난
다. 화포인 진천뢰를 제작할 수 있는 인물로서 천월도법의 달인. 담오 - 북방의 고
랍특성 낭인시장에서 몸값 삼십만 냥에 자신의 인생을 내놓은 무사.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아내 아랑을 저주한다. 용백군과의 조우 이후 돈과 세상을 함께 저주하는 그
의 인생이 뒤바뀐다.
◈태진왕(太眞王) 주익적(朱翊 ) - 신종(神宗) 만력제(萬歷帝)의 이복동생으로서
어지러운 황실을 구하기 위해 뜻 있는 충신들을 규합하고 변방을 강화하였다. 황실
의 특무기관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의 실세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연연(白娟娟) - 태진왕을 마음 속 깊이 사모하고 있는 지혜로운 여인. 환관의
음모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충신 백시열(白時悅)의 딸로 태진왕에 의해 목숨을
구함 받고 태진궁의 시비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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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상술(商術)
황보설연(皇甫雪燕).
그녀의 모습은 변했다.
눈부시게 흰 백삼을 입고 허리를 바짝 졸라맸다. 붉은 빛이 감도는 폭 넓은 비단 요
대로 인해 그녀의 가는 허리는 더욱 강조되어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인다.
짧은 머리카락은 바짝 빗어 넘긴 후 이마를 흰 두건으로 둘러맸다. 여장도 남장도
아닌 기묘한 복장이었다. 백옥같이 흰 피부와 시원스럽게 큰 눈, 선연한 이목구비(
耳目口鼻)는 상큼한 인상을 주었다.
띵... 디딩!
그녀는 백옥 빛의 비파를 뜯으며 고운 음성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호피가 씌워진 의자에는 장천린이 비스듬히 기대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그는 차맛을 음미하며 음률을 감상하고 있었다.
영혼을 움직일 듯 감미로운 비파음과 은쟁반이 옥구슬이 구르는 듯 아름다운 노랫소
리, 그리고 지상에서 몇 안될 정도로 절세적인 가인(佳人)의 자태.......
세상 어느 사내라도 이 광경에 혼백을 뺏기지 않는다면 장님이거나 귀머거리, 그것
도 아니라면 바보천치일 것이다.
황보설연은 남자로 하여금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이상한 마력을 지
니고 있었다. 게다가 사나이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모든 요건을 지니고 있
었다.
딩!
비파음이 멈췄다.
황보설연은 노래를 멈춘 후 고혹적인 눈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오."
황보설연은 비파를 내려놓은 후 사뿐사뿐 걸어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쓰러질
듯 몸을 던져 장천린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손이 대담하게 장천린의 목을 껴안았다
"호호, 지루한데 일부러 들어준 것 아니에요?"
애교가 넘치는 음성이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싱그러운 난초 향을 맡으며 말했다.
"아니오, 설연. 그대의 솜씨는 일품이오."
황보설연은 콧등을 찡긋하며 말했다.
"흥, 동방옥이란 소저도 솜씨가 대단하다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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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에 은은한 질투의 빛이 어렸다. 장천린은 씩 웃었다.
"설연, 이곳엔 그대와 나밖에 없소. 소옥의 얘기는 할 필요가 없소."
황보설연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달콤한 어조였다.
"사랑해요. 백군."
장천린은 그녀를 번쩍 안아 무릎에 앉혔다.
"당신은 사랑스런 여자요."
그녀가 콧소리로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네?"
장천린의 눈에 웃음이 들었다.
"그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소?"
"응......."
황보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콧소리로 대답했다. 장천린은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
굴을 가져가며 말했다.
"사랑하오."
그의 입술이 황보설연의 꽃잎 같은 입술을 덮었다.
"음."
황보설연은 신음을 발하며 장천린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열렬한,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아주 길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바
라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두 남녀의 입맞춤은 먼저보다도 훨씬 격렬하게 이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황보설연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새처럼 가슴을 할딱이며 말했다.
"행복해요. 설연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랑스런 여인이었다
행복해질 가치가 충분히 있는 여인이었다.
장천린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상기된 뺨을 감쌌다. 그의 손은 가녀린 목줄기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가슴에서 잠시 멈추었다.
황보설연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어렸다. 그녀의 뺨은 노을이 되었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장천린은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지그시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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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써요."
황보설연은 곱게 눈을 흘겼다.
"하하하!"
장천린은 대소를 터뜨리며 그녀를 끌어안더니 이번에는 더욱 더 뜨거운 입맞춤을 퍼
부었다.
"읍!"
황보설연은 상체를 뒤로 젖히게 되었다. 허공을 한 바퀴 춤추던 그녀의 손은 장천린
의 목을 휘감았다. 더 이상 뒤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자연스런 몸짓이기도 했다. 그
녀는 장천린의 입맞춤에 온몸이 녹아 내리고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전
율을 금치 못했다.
선실 밖.
반쯤 열린 창문으로 만경창파(萬頃蒼波)의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구룡상선이 항주만에 입항한 것은 신시(申時) 무렵이었다.
배가 닻을 내리자 무사들은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구룡상선에서는 엄청난 양의 물
품(物品)들이 하역되었다.
실상 장천린이 항주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사업 때문이었다.
항주 최대의 거부 손일산(孫一山)과 거래하는 것이 이번 항해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는 사천과 몽고에서 가져온 최고급 모피(毛皮) 사만 장을 손일산에게 팔고, 중원
제일의 명차인 용정차(龍井茶)를 대량으로 구입하는 것을 이번 항주 방문의 목적 속
에 포함시켰다.
뿐만 아니라 회회교도(回回敎徒) 출신의 상인으로부터 양탄자 일만 장을 구입한 후
그에게는 엄청난 양의 비단을 되팔기로 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희귀한 물품들을 북경으로부터 가지고 왔다. 그것은 주로 여인
들이 쓰는 장신구와 보석 등속이었는데 그 중에는 색목국(色目國)에서 건너온 향수(
香水)처럼 값진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천린은 색향으로 이름난 항주에서 그런 품목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구룡상선이 항구에 접안하자마자 그 소식을 접하고 수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그
들은 이미 구룡상선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상계(商界)의 큰손들이었다.
수십 채의 마차와 가마, 그들이 데리고 온 수행원들로 항구는 북적대었다. 그 중에
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이십여 명의 수행원들을 거느린 한 대의 화려한 사두마차였
다. 마차는 곧바로 장천린이 항구 한쪽에 임시로 친 거대한 막사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육순 가량의 혈색 좋은 비단 옷의 노인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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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넉넉한 살집에 귀밑에 혹이 하나 달려 있어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항주제일의 거부인 손일산이었다.
손일산은 막사 앞을 지키고 있는 백살대의 무사들에게 명첩(名帖)을 보여준 후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허허헛! 소문은 많이 들었소이다. 용대인."
막사 안. 손일산이 장천린과 손을 마주잡았다.
"손대인의 말씀도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장천린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상인들의 손은 부드럽다. 무인의 손처럼 강하지도 않고, 농부의 손처럼 못이 박혀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손에는 대단한 힘이 깃들어 있다. 특히 그 손에
황금이 쥐어지게 되면 곧바로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이 바로 상인의 위대함
인 것이다.
황금을 주무르는 사람들.
그들은 상대방의 손을 잡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손이 얼마나 많은 황금을 만져본 손
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손일산은 눈앞의 용백군이란 젊은 상인의 손에서 놀라운 느낌을 받았다. 그는 결코
보통 상인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헛헛! 미리 연락 받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소이다. 물론 모피는 가져 오셨겠지요?"
"물론입니다. 아마도 손대인께서는 그 품질에 만족하실 겁니다."
장천린은 손짓을 했다. 그러자 즉시 백살대의 황계가 미리 준비한 대여섯 장의 모피
를 두 손에 받쳐들고 왔다.
"손대인께 보여 드려라."
"넷."
황계는 모피를 바닥에 쭉 펼쳐 놓았다.
곰(熊), 호랑이(虎), 양(羊), 흑표(黑豹) 등의 갖가지 짐승들의 모피가 바닥에 널렸
다. 장천린은 미소지으며 설명했다.
"사천의 산악에서만 나는 야생동물들과 몽고의 초원에서 방목하는 양 모피는 그 질
이 최상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가져온 모피 중에서 좋은 것만 고른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꺼낸 것이니 만큼 질은 어느 것이나 동일하지요."
손일산의 반달처럼 가느다란 눈이 빠르게 모피를 훑었다. 잠시 후 그는 희미한 미소
를 지었다.
"구룡(九龍)의 용대인께서 거래하는 물품은 그 품질에 정평이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노부는 모피를 사기로 이곳에 올 때부터 결정을 내렸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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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몇 장이나 구입하시겠습니까?"
"삼만 장을 사겠소이다."
장천린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과연 손대인답습니다. 원래는 일만 장 정도를 사실 것이라 예상했는데 대인은 본인
의 생각보다 더 손이 크시군요."
사람은 누구나 칭찬에 약한 법이다. 손일산의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헛헛! 과찬이시오. 하지만 이곳에서 노부 말고 어디 상대자가 있어야지요. 이번에
용대인께서 오셔서 노부는 무척 기쁜 심정이외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껏 중원 각처를 다녔어도 손대인처럼 시원스런 분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장천린의 곁에 시립해 있던 낙수범의 눈에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내심 중얼
거리고 있었다.
'과연... 용대인이야말로 상술의 귀재(鬼才)로구나. 상대방을 부추기면서도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이렇듯 막대한 물량의 거래를 단숨에 끝내다
니.......'
"수범."
장천린이 그를 불렀다.
"예, 대인."
"손대인께 모피 값을 계산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낙수범은 즉시 장부를 꺼내 미리 계산된 것을 손일산에게 넘겨주었다. 손일산은 손
을 저었다.
"헛헛! 되었소이다. 물품과 함께 청구서를 노부의 대보장원(大保莊院)으로 보내 주
시오. 그때 대금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손일산은 몸을 일으켰다.
"혹 용대인께서 시간이 나신다면 한 번 노부의 장원으로 모시고 싶구려."
장천린도 몸을 일으켰다.
"초대해 주신다면 큰 광영으로 여기겠습니다."
"허헛헛! 그럼."
손일산은 포권한 뒤 막사를 나갔다. 그가 떠난 후 장천린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낭랑
한 음성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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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범, 초광은 물품 분류와 수급을 관리하고 있네. 앞으로 모든 계산과 장부관리는
그대에게 맡길 생각이네."
낙수범은 흠칫 놀랐다.
"감히 제가......."
"하하하!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자네는 탁월한 사업능력이 있네. 다만 오랫동안 그것
을 발휘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동안 그대가 틈틈이 정리한 장부와 기록들을 보았네
. 그만하면 충분히 구룡상선의 일을 맡을 수 있다고 판단했네."
낙수범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흘렀다.
"고맙습니다. 대인, 보잘것없는 소생을 이렇게 믿어주시니......."
장천린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수고해 주게. 술시(戌時)가 되기 전에 거래를 일단 마무리짓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낙수범은 공손히 포권한 뒤 밖으로 사라졌다.
장천린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자 막사 안쪽의 휘장이 살며시 들려지더
니 황보설연이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김이 나는 찻잔이 받쳐져 있었
다.
"후후! 정말 놀랬어요. 백군은 정말 천재예요. 장사도 그렇지만 사람 다루는 솜씨
는 정말 기가 막혀요."
장천린은 빙긋이 웃었다.
"그 말속에는 그대도 물론 포함되어 있겠지?"
"어머!"
황보설연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곱게 눈을 흘겼다.
"하하!"
장천린은 찻잔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녀의 나긋한 허리를 끌어 당겼다.
"아이. 누가 들어오면......."
"어떻소?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오. 어... 왜 이리 어둡지? 아무 것도 안 보이
는군, 하고 말이오."
"순 엉터리... 읍."
황보설연은 말을 다하지 못했다. 장천린의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점령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작은 주먹으로 그의 넓은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그녀의 주먹질은 점차 느려지더니 마침내 힘없이 떨어졌다. 그것도 순간, 그녀의 손
은 강하게 장천린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찻잔은 식어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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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항구에 구름처럼 몰려든 상인들과 구룡상선의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낙수범은
주판을 퉁겨가며 능숙하게 계산을 해댔다. 그의 계산은 동전 한 닢의 오차도 없었다
한편 초광은 무사들과 인부들을 능숙하게 지휘하며 물품의 수급에 조금도 차질도 일
으키지 않았다. 거대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매사 신속정확했다. 결국 술시가
되기 전에 물품거래는 막을 내렸다.
낙수범은 장부를 들고 막사로 들어섰다.
장천린은 점잖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황보설연은 휘장 안쪽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을 손질하고 있었다. 아마도 흐트러진 옷매무새도 황급히 고치고 있을 것이다.
낙수범은 장부를 두 손으로 바쳤다.
장천린은 눈을 반개한 채 장부를 훑어보았다. 낙수범은 그가 장부를 읽는 속도에 맞
춰 차분한 음성으로 보고했다.
"사천과 몽고에서 가져온 모피 삼만 장은 손일산이 구입해갔고, 남은 일만 장은 이
곳의 모피상 여섯 명이 나누어 구입해 갔습니다."
"음."
"그들은 모피의 질이 좋다고 만족해했습니다. 대체 이 많은 모피를 어디서 구했느냐
고 묻더군요. 물론 가격에도 만족하는 눈치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좀 더 값을 올
려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장천린은 장부에서 고개를 들며 빙긋 웃었다.
"수범."
"......?"
"물건값을 비싸게 받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네. 최상의 상거래 원칙은 매입 가격
이 비싸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네. 또한 너무 싸도 안 좋은 것이네. 상인이란 적당한
이문을 남겨야 만족해하는 법이네. 그들이 물건을 비싸게 사면 이익을 적게 남기거
나 손해를 볼 것이고, 나중에 우리를 욕하게 되네. 그렇게 되면 다시는 거래를 하지
않겠지. 또한 물건값이 너무 싸면 상품의 질을 의심하게 되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들로 하여금 적당한 이익이 보장될 만한 선에서 가격을 결정한다네."
낙수범의 안색은 몇 차례나 변했다.
그는 비로소 용백군이란 젊은 상인이 어찌하여 단기간에 중원유수의 거상이 되었는
지 이해하고 있었다. 장천린의 말이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교역에 있어서 파는 일만 하는 사람은 늘상 눈앞의 이익에 얽매인다는
점이네. 그러나 싼값으로 사 적정가격으로 팔고, 또 그 돈으로 현지에서 흔한 물건
을 싸게 사 다른 지역이나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이득을 남겨 파는 것... 그런 상호
무역(相互貿易)을 해야만 넓은 안목을 가질 수 있으며 적정가격도 산출해 낼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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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법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장천린은 빙긋이 웃었다.
"오늘의 이익금은 얼마나 되느냐?"
낙수범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대충 백만 냥 정도 됩니다."
장천린은 화제는 돌렸다.
"수범, 며칠 후 사람을 시켜 막남(漠南)의 임단한(林丹汗)과 금천(金川)의 합이납본
(哈伊拉本)에게 각각 은자 십만 냥씩을 보내주게. 단 은밀히 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낙수범은 그의 지시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만 장의 모피를 구하는 데 막남의 영웅 임단한과 금천의 추장 합이납본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장천린은 호의를 반드시 갚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와 한 번
만난 사람들은 늘 그를 잊지 못하고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금천은 장천린이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 장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교역하던 중 알게
된 곳으로 사천 북방에 위치한 고유의 종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인구는 오만 정도로 그곳의 주민들은 험악한 산악지대에서 사는 탓으로 한결같이 용
맹하고 몸이 날랬다. 물론 성격도 거칠고 포악한 편이었으나 의리만은 강했으며 신
의를 중시하는 종족이었다.
장천린은 금천의 추장 합이납본을 만난 후 막역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결국 그를 통해 다량의 모피를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대가로 매년 사람
을 보내 상당량의 사냥도구 및 의류와 식량들을 보내주고 있었다.
장천린은 장부 검토를 마친 후 말했다.
"앞으로 할 일은 물건을 사는 일이네. 항주는 중원에서 가장 큰 용정차의 산지네.
앞으로 사흘간 자네는 항주는 물론 근방의 용정차를 구할 수 있는 데까지 구하게.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네."
낙수범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수확하지 않은 것도 해당됩니까?"
"물론이지. 지주(地主)를 만나 앞으로 수확하게 될 양을 검토한 후 전량 매입하게."
낙수범은 눈썹을 찡그렸다.
"용정차를 매점 한단 말입니까?"
"그렇네."
낙수범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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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위험합니다. 용정차가 비록 귀물이긴 하지만 개인이 매점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양입니다. 더욱이 그것을 모두 구입하게 되면 나중에 팔 때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적어 값이 폭락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
다."
장천린은 기이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범, 자네가 할 일은 물건을 최대한 많이 구입하는 일이네. 파는 것은 내가 알아
서 한다."
낙수범은 고개를 숙였다.
"회회교도 상인들에게 양탄자를 구입하는 것도 이상 없도록 해주게."
"알겠습니다. 최대한 회회인들의 밑천을 바닥낼 생각입니다."
"흠, 앞으로 한 달은 이곳에 머물게 될 것이네. 그 동안 무척 바쁠 것이네. 자네는
이만 가서 쉬게."
"알겠습니다."
낙수범은 깊이 읍한 후 돌아섰다. 장천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
다.
'대단한 인재야. 상술의 감각이 뛰어나고 적응력도 대단하다. 계산도 정확하고 무엇
보다 좋은 점은 무림보다도 오히려 상계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
낙수범은 미처 몰랐다. 장천린의 곁에 있는 동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생이 변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낱낱이 장천린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원한 삶인지도 몰랐다. 피비린내 나는 무림계의 인생- 그것이
싫어 조화성을 벗어나지 않았던가!
단위제는 과연 약속을 지켰다.
술시가 지나 날이 어둑해지자 그는 원계묵과 운표, 조충, 황계 등을 비롯하여 평소
마음이 통하는 백살대의 무사들을 대동하고 당당하게 항주의 기루로 쳐들어간 것이
다.
야화루(夜花樓)는 항주에서도 손꼽히는 기루였다.
일행이 놀란 것은 이미 야화루가 단위제에 의해 예약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야
화루의 주인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근 백여 명의
기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단위제는 야화루를 통째로 예약한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방마다 기녀가 배치되어 있었고 산해진미(山
海珍味)로 차려진 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술과 요리는 하나같이 최고급이었으며 기녀들도 상급에 속하는 미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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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주귀(酒鬼)에 색광(色狂)을 겸한 단위제는 낮에 먹은 보약주(?)를 실험하려는
지 옆구리에 자그마치 다섯 명의 미녀들을 끌어다 앉혀 놓았다.
"핫핫핫!"
"와... 아!"
단위제를 따라온 무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백살대의 무사들이었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눈과 입, 그리
고 손(?)까지 최상의 만족을 누리고 있었다.
방마다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간간이 기녀들의 간드러지는 교성과 이
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야화루는 개업이래 최대의 번성을 맞이했다.
같은 시각.
사문도는 낭인무사들의 영수급인 위천조와 뇌찰격을 위시하여 낭인무사들을 데리고
다른 기루로 향하고 있었다.
방금 전 무슨 생각에서인지 장천린은 사문도에게 거액의 전표를 몇 장 내주며 이렇
게 말했었다.
'오늘은 자네 마음대로 이 돈을 쓰게나.'
사문도는 그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거액을 만져보았다. 그는 이
런 돈을 써보기는커녕, 본 적조차 없었다. 결국 전표를 쓰는 방법은 하나였다. 낭인
무사들을 이끌고 기루로 향하는 것이었다.
낭인무사들은 오랜만에 눈에 빛이 감돌았다.
색향으로 유명한 항주가 아닌가? 그들의 지친 영혼과 여색에 굶주린 육체를 마음껏
풀어버릴 기회가 온 것이다.
게다가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백살대도 없을 뿐더러 은연중 마음에 드는 사문도까
지 있지 않은가. 낭인무사들의 삭막한 얼굴에는 가벼운 흥분마저 어리고 있었다.
항주는 온통 불야성(不夜城)이었다.
거리는 대낮같이 밝았으며 청등홍등이 여기저기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여인들의 지분 내음에 밤공기는 야릇한 열기를 띄고 있었다. 행인들도 오히려 낮보
다 밤이 더 많았다.
장천린과 낙수범은 나란히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장천린은 과거 항주에 여러 차례 온 적이 있었으나 낙수범은 처음이었다.
그는 신기한 듯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진한 화장을 한 채 나와 있는 야화(夜花)들은 그의 마음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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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들뜨게 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항주는 과연 절강(浙江)의 성도로 손색이 없군요. 아니 오히려
북경보다도 훨씬 흥청거리는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은 돈을 쓰지 않고는 단 하루도 지낼 수 없는 곳이지.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항(蘇杭)이 있다고. 이곳은 소주(蘇州)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항주라네."
낙수범은 동감인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단도독은 정말 빠르군요. 어느새 없어졌는지 모릅니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지금쯤 백살대와 함께 어느 기루에서 한 잔 하고 있겠지. 수범, 우리도 항주에 왔
는데 바람만 마시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자, 우리도 가세."
낙수범은 흠칫했다.
"아는 집이라도 있습니까?"
"있지. 천화군방원(天華群芳院)이라고 항주에서 첫 손 꼽는 기루라네."
두 사람은 주거니받거니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다.
대략 일각쯤 걸었을까? 장천린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 청년 때문이었다. 거리의 등불 빛을 받은 청년의 모습
은 너무도 준수했던 것이다.
연남빛 유삼을 입고 옥선(玉扇)을 가볍게 움켜쥔 청년의 오관은 붓으로 그린 듯 섬
세했으며 말할 수 없는 고귀함을 느끼게 했다.
장천린은 청년을 발견하고 내심 탄성을 발했다.
'대단한 미청년이구나. 옥류향도 미남이지만 저 사람에 비하면 현격한 차이를 느끼
게 하는 구나.'
장천린은 유삼청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요기(妖氣)마저 느껴지는군.'
유삼청년은 그의 곁을 지나갔다. 그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장천린을 미처 의식
하지 못한 듯했다.
천화군방원은 항주에서 첫손꼽는 기루로 오층의 화려한 누각이 볼만했으며 규모로
보나 호사스러움으로 보나 가히 황궁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낙수범은 천화군방원에 들어서는 순간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전청의 바닥에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대리석이 깔려 있었으며 천장에는 헤아릴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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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기둥과 벽에는 갖가지 고급스런 벽화
와 장신구가 걸려 있었다.
낙수범은 한 눈에 그것들이 모조품이 아니라 진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는 혀를 내둘렀다.
같은 시각, 옥선을 흔들며 걷고 있는 연남빛 유삼 차림의 청년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
이토록 아름다운 용모의 사나이가 일단 칼을 들면 한 점의 정(情)도 남기지 않는다
면 믿겠는가?
무정도(無情刀) 모용초.
이것이 그의 신분이었다.
그의 곁을 스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용모에 홀리고 말았다. 같은 남자이면서
도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곤 했다.
특히 거리의 야화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아아! 저런 분께 하룻밤만이라도 안겨봤으면 여한이 없겠네.......'
그러나 너무 아름다운 것도 문제다.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을 정도로 준미한 모용초는
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야화들에게 일종의 벽을 느끼게 했다. 그녀들은 그의 용모
에 질려 감히 유혹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모용초는 섭선을 흔들며 한 객점으로 들어갔다.
점소이가 달려나오자 그는 담담히 물었다.
"혹시 이곳에 막노대(莫老大)란 손님이 없느냐?"
점소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머리를 탁, 쳤다.
"예, 예! 지금 이층에 계십니다. 손님이 찾아오실 거라고 하시더니 바로 공자님이셨
군요?"
"안내해 주게."
"예예!"
점소이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 후 앞장 서 이층으로 올랐다. 모용초는 섭선
을 흔들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층 창가에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이 홀로 앉아 자작하고 있었다. 그는 애꾸눈에다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는데 탁자 옆에는 한 자루의 고검(古劍)이 기대어져 있었다.
그는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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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검(邪劍) 막청(莫靑)! 바로 그였다.
모용초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막청은 힐끗 고개를 들더니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
를 지었다.
"좀 늦었군."
"음, 사소한 일이 있었지."
모용초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 동안 어디 있었나? 금월산 이후로는 통 연락이 없더군."
막청의 외눈에 섬뜩한 광채가 솟아났다.
"서문표와 함께 용문전장 근처에 있었네."
"그래? 뜻밖이군."
모용초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최근 원로회의에서 자네와 서문표에 대해 이야기가 많네. 특히 제이신마전주 금불(
金佛) 숭의겸은 태사독의 죽음에 자네의 책임이 크다고 떠들어대고 있지."
막청의 입가에 조소가 매달렸다.
"미친 늙은이."
모용초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나도 숭전주와 동감이네. 자네와 서문표가 태전주를 도왔더라면 그는 죽지 않을 수
도 있었네."
막청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모용초. 자네는 벌써 잊었군. 이 년 전 태전주의 수하인 천강삼십육검수가
조금만 도와주었더라면 귀송자(鬼松子) 혁련 어른은 원계묵에게 죽지 않을 수도 있
었어. 혁련 어른은 우리 마교십삼사(魔敎十三邪)의 원로이셨네. 태전주는 간접적으
로 혁련 어른의 죽음과 관계가 있네."
모용초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십삼사를 건드리는 놈은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네. 태사독 마찬가지야. 흐흐... 더
욱이 태사독은 나와 서문표를 우롱했네."
모용초는 피식 웃었다.
"자네의 말을 숭전주가 들었다면 그의 안색은 황금빛이 되겠군."
막청은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와 서문표는 용문전장 근처에서 신산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지. 하지
만 죽이지 않았네."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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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초는 눈살을 모았다.
"흐흐, 성주의 살인혈첩은 이미 태사독의 말에 의해 효력을 상실했네. 살인혈첩을
다시 받기 전에는 손쓰고 싶은 생각이 없네. 서문표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네."
모용초는 고소 지었다.
"모두 미쳤군."
막청은 냉소했다.
"나는 마교 출신이지 조화성 출신은 아니네."
그는 술을 벌컥벌컥 마신 후 화제를 돌렸다.
"자네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나?"
모용초는 더욱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구룡상선이 오늘 저녁 이곳에 도착했네."
막청의 외눈이 번뜩였다.
"그럼... 원계묵도 왔겠군."
"물론......."
모용초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
"손을 쓸 셈인가?"
"물론!"
"도움은?"
"필요 없네. 놈과 나 둘이서 결판을 낸다."
막청은 무겁게 말했다.
"조심하게. 원계묵은 혼자가 아니네. 그의 주위에는 백살대가 있고 또한 원계묵을
거느리고 있는 용백군이란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네. 겉으로는 상인이지만 그의 무
공은 상당수준에 달하고 있네. 더욱이 무서운 것은 그의 두뇌네."
모용초는 담담히 말했다.
"관계없네. 원계묵을 제외하면 그 어떤 자도 나의 칼을 막을 수 없네."
막청은 잠시 생각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자네 얼굴을 봤으니 이만 가보겠네."
"어디로 갈 셈인가?"
막청의 외눈에 문득 쓸쓸한 빛이 흘러나왔다.
"발걸음 닿는 곳으로. 이 항주는 내 적성에 맞지 않아. 미친 곳이야."
막청은 한 걸음을 옮기다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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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잊을 뻔했군, 소종사(小宗師)가 이 항주에 와 있네."
모용초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담아우가?"
"가겠네."
막청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모용초는 혼자 남아
맞은편에 놓인 술잔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담자개(譚子凱)가 이곳 항주에 왔다고?"
그의 눈에 짙은 고뇌가 어렸다. 실로 복잡한 눈빛이었다. 그는 막청이 남기고 간 술
잔을 들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잊혀진 과거다. 이미 지난 일이다. 연기처럼 흩어진... 다시는 끌어 모을 수 없는
슬픈 과거의 잔재만 남아있을 뿐.......'
술잔을 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창밖으로 청아한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모용초의 눈에 거리를
지나는 교자가 보였다. 교자 위를 보는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미녀였다. 그것도 그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절세 미녀였다.
고귀한 분위기와 화려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미녀가 교자에 탄 채 지나가고 있었다.
섬세한 육체는 연홍색 하늘거리는 나삼 속으로 그 풍요로운 굴곡을 숨기고 있었으
며, 궁장으로 틀어 올린 머리에는 비취로 된 장신구가 꽂혀 있었다.
'아름답군.'
모용초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게다가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구나.'
그는 점소이를 불렀다. 점소이는 한 달음에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나으리?"
"누군가?"
"예?"
점소이의 눈알이 굴러갔다. 모용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가영(佳榮)님을 보고 반하셨군요."
'가영?'
모용초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미모가 대단하군. 대체 어떤 여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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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소이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 항주에서 가장 큰 기루인 천화군방원의 여주인입지요. 헤헤! 어디 그 뿐입니
까요? 그밖에도 일곱 개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대단한 부자입니다."
점소이는 문득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원래는 기녀출신입죠. 하지만 성공한 여자입죠. 천부적인 사업수완으로 지금은 엄
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습죠."
모용초의 눈은 사라져 가는 교자를 좇고 있었다.
"이건 비밀인뎁쇼. 가영님은 과거 항주의 풍류공자이셨던 옥류향 대인과도 친분이
있습니다요. 소문에 의하며 장래를 약속한 연인이라나요?"
'옥류향!'
모용초의 안색이 변했다. 점소이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튼 대단한 여장부입죠."
그는 모용초의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흘렸다.
"헤헤! 손님은 관심을 가지지 마십쇼. 손님도 풍류를 무척 즐기시는가 본데 저 여자
는 옥류향 대인을 안 이후로는 만금(萬金)을 줘도 다른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까요. 헤헤... 그 동안 항주의 난다긴다하는 분들이 건드려 봤지만 얼굴빛 하나 변
하지 않는 분입죠."
"수고했다."
모용초는 은자 한 냥을 던져 주었다.
"아이코! 감사......."
점소이는 이게 웬 횡재냔 듯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모용초는 창가에 팔꿈치를 기댔다. 교자 위의 여인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옥류향의 정인, 천부적 상술을 지녔다고.......'
그의 마음은 점차 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가영(佳榮)이라.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리고 행복해 보였다.'
무정도 모용초의 눈빛은 한순간 무감동하게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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