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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사련(邪戀)의 시작 (44/87)

제20장 사련(邪戀)의 시작 

아침부터 장천린은 바빴다.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난다.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해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항상 일찍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다. 

그것은 남보다 일찍 활동함으로써 더 많은 일을 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실상 항주의 거부 손일산과의 거래는 그의 일정상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항주는 물론 절강성 일대의 상인들과 만날 약속을 해두고 있었다. 

항주에 도착한 이래 수많은 거래가 이루어졌다. 

개중에는 물품의 직거래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서류상의 계약 건이 더욱 많았다. 계 

약으로 오고가는 은자의 액수는 범인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편 낙수범은 장천린의 지시에 따라 항주 일대의 용정차를 닥치는 대로 매입했다. 

심지어는 아직 수확하지 않은 다전(茶田)까지 통째로 계약해 버렸다. 

구룡상선에는 한 시도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으며 하루에서 수십 건의 계약을 치르느 

라 장천린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천린은 한 번도 자세가 흐트 

러지지 않았다. 실로 초인적인 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고했다, 수범." 

장천린은 잠시 짬이 난 듯 낙수범과 대화를 나누었다. 

"일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나?" 

낙수범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상태로 가면 보름이면 항주 근방의 용정차를 거의 모두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습 

니다. 다만 은자가 너무 많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들어갈 것 같은가?" 

낙수범은 눈을 반쯤 감으며 계산하더니 대답했다. 

"구백만 냥이나 어쩌면 그 이상이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천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자금은 걱정 말고 계속 일을 추진하게." 

낙수범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대체 용대인은 얼마나 많은 자금을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용정차 매입에만 천만 

냥 이상이 들어가고 또 이곳에서의 계약 건도 최소한 이삼천만 냥은 들것이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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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는 어째서 용정차를 그렇게 많이 구입하려는지 이해가 안 갈 것이네." 

낙수범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매점 하려는 것은 알지만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용정차는 차 중에서도 특상품으로 친다네. 중원인들, 특히 상류층 인사들은 습관적 

으로 차를 마시지. 그것도 하루에 최소한 대여섯 잔은 마시게 되네. 다시 말해 그들 

에 의해서 매년 소비되는 양은 대체로 일정하네. 물론 그 양은 엄청나지." 

장천린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다전의 농민들이나 주인들은 올해의 수확량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낙수범은 즉시 대답했다. 

"예년에 비해 상당히 양이 줄 것이라 합니다. 기후가 불규칙했기 때문입니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맞아, 올해는 흉년일세. 나는 이미 절강성 일대의 차 재배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놓았네." 

낙수범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올해의 용정차 값은 폭등하겠군요?"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지난 몇 년이래 계속된 풍년으로 물량은 풍부하네. 하지만 시중의 용정차 

를 모두 구입해 버리고 현재 재배하고 있는 것마저 모두 거두어들인다면 내년에는 

용정차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될 걸세." 

장천린은 눈을 반개하며 담담히 말했다. 

"내년의 용정차 값은 최소한 열 배는 뛸 것이네." 

'열 배!' 

낙수범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용정차 파동은 이번 한 차례 뿐이네. 다시 흉년이 들라는 보장도 없고 더욱이 내년 

에 값이 폭등하면 재배 면적이 대폭 늘어날 거야. 그렇게 되면 공급이 넘치고 다시 

값이 폭락하게 되지. 설사 내년에도 흉년이 든다해도 일단 재배 면적이 늘었으므로 

공급량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네." 

낙수범은 들으면 들을수록 아연한 기분이었다. 

"용정차는 일종의 기호품이네. 돈이 있는 자만이 마신다네. 없는 자들의 돈을 빼앗 

는 것은 죄악이지만 부자들의 돈을 빼앗는 것은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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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장천린의 눈은 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찻값이 열 배로 뛴다해도 있는 자들은 부담 없이 구입할 것이네. 그러나 전 중원의 

있는 자들이 부담 없이 마시는 용정차로 인해 얻는 이익을 한 군데로 몰게되면 그 

액수는 어떻게 되겠나?" 

장천린의 표정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이 년 안에 최소한 오륙 천만 냥은 모을 수 있네." 

'오륙 천만 냥!' 

낙수범은 넋을 잃고 말았다. 장천린의 상술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펼치는 논리(論理)는 앞을 몇 단계나 뛰어넘는 것이었다. 

삼 일이 흘렀다. 

낙수범은 장천린을 수행하면서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감탄을 넘어 

경외지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장천린의 상술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절강성 일대의 난다긴다하는 거 

부거상들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낙수범은 내심 중얼거렸다. 

'상술의 천재라 불리던 금백만도 용대인에게는 적수가 못 될 것이다.' 

과거 낙수범은 목장을 경영했었다. 그때부터 사업에 관심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짧 

은 기간 동안 장천린을 수행하며 보고 느낀 것들은 그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무너뜨 

리고 말았다. 

물론 그는 까맣게 몰랐다. 장천린이 일부러 그의 능력을 배양시켜주고 있다는 사실 

을. 

<성명: 화가영(花佳榮). 

나이: 이십 사 세. 

내력: 천부적인 미모를 활용하여 재산을 모음. 십구 세 때 자신의 이름을 기적(妓籍

)에서 지우고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음. 그 후 옥류향의 도움으로 나날 

이 성장하여 현재 항주에서 가장 큰 기루인 천화군방원(天華群芳院)을 비롯하여 도 

박장 한 개, 주루 두 개 등 도합 일곱 개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음. 천성적으로 사업 

에 관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여인으로 옥류향과 사랑하는 사이로 추정됨. 

성격: 지극히 계산적인 성품으로 장사에 관한 한 인정(人情)을 베푼 적이 없음. 다 

만 정에 굶주린 탓으로 마음속에 여린 면도 있음. 

기타: 매달 스물 다섯 째 날 고선사(苦禪寺)로 불공을 드리러 간다. 좋아하는 색은 

담황색이나 한 번도 담황색 옷을 입은 적은 없음. 좋아하는 꽃은 황국(黃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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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 그밖에 그녀에 관한 모든 자료를 보냅니다.> 

한 장의 서찰과 한 권의 책자. 

서찰을 살펴보는 눈에서 신비한 광채가 솟아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눈의 주인공은 

서찰을 내려놓고 책자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고선사(苦禪寺). 

항주에서 유수한 사찰로 이름난 이곳은 풍광이 수려하고 법력이 높다고 알려져 있어 

주로 항주의 고관이나 명문가의 불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화가영은 대웅전에서 반 시진 동안 불공을 올린 후 사뿐사뿐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그녀는 마당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 

쪽빛처럼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환상적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상쾌했다. 그 동안 분망한 사업으로 인해 심신이 피로할 대로 피로했 

던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 오게 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한가한 마음으로 고선사 경내를 산책했다. 

걷는 동안 한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류향.......' 

옥류향을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에는 달콤한 미소가 그려졌다. 

'올해 말쯤 오신다고 했지. 그리고... 혼례식을 올린다고 하셨어.' 

화가영은 섬섬옥수를 들어 뺨을 감쌌다. 

'가영... 너는 분에 넘칠 정도로 행복한 여자야.' 

그렇다. 

그녀는 불행한 삶을 딛고 지금의 위치까지 힘겹게 올라온 여인이었다. 

어릴 적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남의 문전에서 유리걸식하던 때도 

있었고, 얼굴이 좀 예쁘다고 열 두 살 때 기루에 팔린 후 뭇 사내들의 거친 손길에 

시달림을 받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항주에서 가장 큰 기루의 여주인이며, 도합 일곱 개의 사업체를 경영하는 손꼽히는 

사업가가 되었다. 게다가 그녀를 사랑해 주는 남자도 있다. 

옥류향은 그녀의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사랑해주었다. 

물론 화가영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인생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아니, 보랏빛 꿈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날이 행복감이 충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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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선사의 뒤쪽으로 걸었다. 이곳에 오면 항상 들르는 

곳이었다. 

낙안애(落雁涯)라 했다. 

아득한 옛날 기러기 한 쌍이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았었다. 그런데 수컷이 죽자 

암컷이 낙안애에 몸을 부딪쳐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명소였다. 

낙안애는 수직 절벽으로 절벽 아래는 그 깊이가 천장(千丈)이 넘는다. 

고선사는 낙안애의 중간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낙안애의 절벽에는 수많은 불상(佛像)들이 새겨져 있었고 수백 편의 시구들도 있었 

다. 또한 사랑하는 남녀들이 새긴 사랑의 서약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 

고선사의 후면. 

화가영은 깎은 듯이 잘려져 나간 절벽 위에 서서 항주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항주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도끼로 찍어낸 듯한 수직절벽의 중 

간부분은 구름이 휘감고 있어 신비한 느낌을 주었으며, 군데군데 천년고송이 휘어져 

있어 마치 신선도(神仙圖)를 보는 듯했다. 

그녀는 아래로는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로는 수직절벽으로 연결된 길을 천천히 걸었 

다. 

그녀의 마음은 지금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녀가 사랑 

하는 옥류향이 곁에 없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 분과 함께 이곳에 올 거야. 여기서 사랑의 맹세를 하면 백년해로한다고 

했지.......' 

화가영은 사랑하는 사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시간이 

꽤 흐른 듯 서녘 하늘에 석양이 물들기 시작했다. 

삘리리리리....... 

문득 처량한 피리소리가 들렸다. 

"......!" 

피리소리를 듣는 동안 그녀는 망연해졌다. 음률이 그녀의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았 

다. 

'아! 정말 대단한 솜씨구나. 대체 누가 부는 걸까?' 

그녀는 기루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으므로 음률 방면에 일가견이 있어 피리소리가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고 피리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건 연암선생(燕岩先生)의 해악부(海嶽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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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곡은 그녀가 유난히 좋아하는 것이었다. 

몇 걸음 걷는 동안 곡이 바뀌었다. 화가영의 눈시울이 자신도 모르게 젖어갔다. 

'이건... 옥선자(玉仙子)가 사랑하는 정인이 세상을 먼저 뜬 것을 비감하며 만들었 

다는 구주비창제(九州悲愴啼).......' 

슬픈 과거를 안고 있는 여인은 감정이 민감한 법이다. 피리의 음에 빠져든 화가영의 

뺨은 눈물로 흥건히 젖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절벽의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녀의 눈에 바위 위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고 있 

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 

그녀의 아미가 파르르 떨렸다. 담황빛 유삼(儒衫)에 같은 색깔의 문사건을 두른 미 

서생이었다. 

관옥(冠玉) 같다고나 할까? 

때마침 기울어 가는 석양빛이 미서생의 얼굴을 비치며 숨막힐 듯한 마력을 이끌어냈 

다. 

화가영은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미서생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속에 피 

할 수 없는 숙명의 화살이 박혀버리고 말았다. 

미서생은 입술에서 피리를 떼어내며 망연히 하늘을 응시했다. 노을을 바라보는 서생 

의 얼굴에는 왠지 비감이 어려있었다. 

그때였다. 미서생은 갑자기 피리를 꺾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화가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미서생은 부러진 피리를 절벽 아래로 던진 후 허리를 굽혀 무엇인가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본 화가영은 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미서생이 집어든 것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국화였던 것이다. 

아쉽게도 황국은 시들어 있었다. 

미서생은 황국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더니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황국의 꽃 

잎을 한 장 한 장 떼어 부는 바람에 던졌다. 시들어 버린 꽃잎은 바람에 실려 멀리 

멀리 날아갔다. 

화가영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소리를 내는 것은 미서생에게 큰 죄를 짓는 

것 같았던 것이다. 

미서생은 한동안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비로소 그의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우수와 고독이 깃든 듯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마 위에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이 다소 퇴폐적인 인상이었으나 도리어 그 점 

이 더욱 심미적인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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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서생은 마침 고개를 돌리다 화가영을 발견하자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쓸쓸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는 바위에서 내려오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미서생은 천천히 걸어 왔다. 

"......!" 

화가영은 숨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가까이 올 때까지 그녀는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얼음조각처럼 굳어져 있었다. 

미서생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녀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지나칠 때 화가영은 은은한 국화향기를 맡았다. 그것은 그녀가 즐겨 애용하는 

향수와 같은 냄새였다. 

미서생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시선에서 사라져버렸다. 화가영은 그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나도록 망연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으나 너무도 강렬한 인 

상을 남기고 사라진 미서생. 바위 위에 앉아 피리를 불던 그의 모습은 마치 화인(火

印)처럼 그녀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버리고 말았다. 

'어떤 분일까?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곳에서.......' 

그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분의 눈빛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어.' 

휘이잉! 

바람이 분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내버려둔 채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아직도 그녀의 귓가에는 구슬픈 피리소리가 남아있었다. 

어찌 알았으랴! 

이것이야말로 슬픈 사련(邪戀)의 시작이라는 것을. 

항주제일의 거상 손일산의 대보장원(大保莊院)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장천린은 그곳에서 융숭한 식사 대접을 받은 후 나왔다. 그의 좌우에는 원계묵과 사 

문도가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전당강 언덕의 수만 평 부지에 화려한 성채(城砦)를 이루고 있는 손일산의 

장원에 대해 이야기하며 말을 타고 천천히 강가를 달리고 있었다. 

"아아아악......!" 

문득 한 가닥 처절한 비명이 황혼의 정적을 산산이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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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곳입니다. 형님." 

원계묵은 말고삐를 당기며 침중하게 말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세." 

그들은 지체없이 말을 몰았다. 잠시 후 그들은 강가의 모래사장에 세 구의 곧 그들 

은 비명이 들린 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잠시 후 그들은 강가의 모래사장에 세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외로 그들은 거지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이마 한복판에 똑같은 모양의 핏 

빛의 비녀가 박혀있다는 것이었다. 

원계묵은 비녀를 뽑아냈다. 비녀의 표면에는 봉황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혈봉잠(血鳳簪)!" 

장천린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알고 있는 것인가?" 

원계묵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마교십삼사(魔敎十三邪) 중에서 가장 무섭다는 혈관음(血觀音) 영호해상(令狐 孀) 

의 독문표기입니다." 

"혈관음?" 

장천린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마교의 일맥으로 신비에 싸인 저주의 마류(魔流) 혈교(血敎)의 교주이기도 합니다. 

장천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항주성에 마교의 고수가 등장하다니.......' 

원계묵은 혈봉잠에 묻은 피를 시체의 옷자락으로 닦아낸 후 품속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혈관음 영호해상은 마교에서도 공포적 존재입니다. 그는 여인이며 모습이나 나이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것이 전무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의 무공은 마교십삼사 중 

에서도 으뜸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태사독보다 한 단계 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천린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조화성의 제이인자인 태사독보다 한 단계 위라니.... 

... 

이때 거지들의 시신을 살펴보던 사문도가 말했다. 

"이들은 개방(  )의 제자들로 허리의 매듭으로 미루어 오결제자(五結弟子)인 것 

같습니다." 

장천린도 개방에 대해서는 다소 아는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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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결이라면 상당히 높은 위치인데.......' 

당금무림의 중추세력인 구파일방 중에서 개방은 가장 많은 인원과 조직을 갖고 있는 

방파로 현재의 개방은 사상최강의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문도도 혈봉잠 하나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이 자들을 죽인 범인은 혈관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처 부위가 일정히 않고 그 

깊이도 각각 다릅니다." 

그의 눈에서 음산한 빛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진짜 혈관음이라면 내 손으로 해치워 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텐데 아 

쉽군요." 

장천린은 어이가 없었다. 천하의 혈관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세. 이곳에 있어봐야 좋은 일은 없을 것 같네." 

세 필의 말은 관도(官道)를 달려갔다. 

석양이 떨어지고 사위에는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별이 떠올랐으 

며 반쯤 잘린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쯤 갔을까? 

"음?"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길 우측으로부터 들려온 것이다. 

휙! 

장천린의 왼쪽에서 말을 달리던 사문도가 날아갔다. 그는 허공에서 빙글 회전했다가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는 듯한 신법으로 한 그루 나무를 향해 덮쳐갔다. 

막 나무에 떨어진 사문도는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 나뭇가지에 기댄 채 걸터앉아 있었다. 뜻밖에도 이제 십 오륙 세 밖에 안되 

어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했으며 가슴과 복부가 온통 피 

로 물들어 있었다. 

사문도는 그녀를 옆구리에 낀 채 땅에 떨어졌다. 장천린이 물었다. 

"상태가 어떤가?" 

사문도는 소녀의 맥문을 잡은 채 눈살을 찌푸렸다. 

"숨결이 미약합니다. 상처가 너무 심해 회생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음, 일단 상처를 살펴보게." 

사문도는 길옆으로 자리를 옮겨 풀밭에 소녀를 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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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드러난 소녀의 용모는 아름다웠다. 눈썹이 붓으로 그린 듯 길게 뻗어 있었다 

.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찌익! 

사문도는 그녀의 상의를 찢어냈다. 젖가리개가 드러났다. 다시 옷을 잡아 찢으니 그 

녀의 아랫배가 드러났다. 온통 선혈이 엉겨붙어 있었다. 

원계묵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독한 내가장공(內家掌功)에 당했군." 

사문도도 동감인 듯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오장육부가 완전히 파열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소녀가 왼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가락을 억 

지로 펼치자 핏빛의 비녀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것은 혈봉잠이었다. 

사문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 소녀는 혈관음의 제자란 말인가?" 

원계묵이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혈관음의 직계제자라면 가슴을 살펴보시오. 관음상 문신이 있을 것이오." 

사문도는 즉시 소녀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천을 뜯어냈다. 순간 세 사람의 안색은 

일제히 변하고 말았다. 

아직 여인의 티가 완연하지 않은 젖가슴이었다. 그저 손바닥 하나로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크기였다. 그런데 두 개의 작은 육봉 사이에 핏빛 선명한 관음상(觀

音像)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문신이었다. 

"혈관음상... 틀림없는 혈관음의 제자입니다." 

원계묵의 말에 장천린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의 시선은 소녀의 젖가슴 사이에 못 

박혀 있었다. 그의 검미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것은......!' 

......후훗! 아저씨, 재미있는 것 보여 드릴까요? 

......제 가슴에 있는 관음상은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 아마 절 버린 부모님이 독실 

한 불교도였던 모양이죠?' 

'해당!' 

장천린은 내심 부르짖었다. 적지 않은 충격이 왔다. 

지난 날 그가 만났던 유랑소녀 해당의 젖가슴에도 분명 똑같은 혈관음상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눈앞의 소녀의 가슴에 새겨진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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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습니다." 

사문도의 침중한 말에 장천린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멍한 눈으로 소녀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죽은 소녀의 가슴에 새겨진 관음상과 유랑소녀 해당의 가슴에 새겨진 

관음상!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일이었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해당... 그녀가 혈관음과 무슨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 

이때 사문도가 물었다. 

"형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장천린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묻어 주게."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시체를 건드리지 마시오!" 

어디선가 한 가닥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슷! 

문득 일진선풍이 일더니 허공으로부터 다섯 개의 인영이 매화 모양으로 떨어져 내렸 

다. 그들이 출현한 순간 원계묵과 사문도는 신형을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장천린의 

좌우를 막아섰다. 

뜻밖에도 나타난 인물들은 거지였다. 

사인의 늙은 거지와 삼십 대로 보이는 백의청년이었다. 늙은 거지들이 청년거지를 

은연중 호위하는 모습이었다. 

청년은 비록 거지복장이었으나 특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군데군데 해지 

긴 했으나 깨끗이 빨고 기운 백삼문사의(白衫文士衣)을 걸치고 있어 탈속한 느낌마 

저 주었다. 

청년의 오관은 청수하면서도 수려해 보였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두 눈이 길고 가늘 

게 뻗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눈을 가진 자는 심기가 깊고 지혜로운 법이었다. 

청년거지는 오른손에 강철로 만든 섭선을 쥐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만인을 압도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가히 일대종사(一代宗師)의 풍모였다. 

원계묵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개방의 고수들이다!' 

그는 거지들의 허리춤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청년거지의 허리춤의 매듭은 열 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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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또한 늙은 거지들도 여덟 개의 매듭을 짓고 있었다. 

'십결이면... 개방의 방주( 主)가 아닌가!' 

그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청년거지를 쏘아보았다. 

'그렇다면 저 자는 삼 년 전 방주에 올랐다는 개방의 풍운아 백의신룡(白衣神龍) 태 

무결(太無缺)일 것이다!' 

개방 방주(   主) 태무결(太無缺). 

그는 개방이 낳은 최대의 기인이었다. 

불과 삼십 세의 나이에 개방 방주에 올랐으며, 방주에 오른지 이 년 만에 개방을 사 

상최대의 부흥기로 끌어올렸다. 

상대(上代) 방주인 육지신룡(陸地神龍)이 남북개방(南北  )으로 분열되어 있던 수 

십만의 방도들을 일통시키는데 주력했다면 그는 겉으로만 뭉쳤을 뿐 융화되지 않고 

있는 개방인들을 탁월한 영도력과 지혜로 묶어놓는데 성공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개방은 사상최강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은 

연중 구파일방의 영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때 백의신룡 태무결이 강철섭선을 흔들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귀하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 소녀의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가볍게 냉소하며 말했다. 

"이 소녀가 개방의 소유라도 된단 말이오?" 

태무결은 의외인 듯 원계묵을 바라보았다. 

"귀하의 존함은?" 

"흐흐... 천하를 떨어 울리는 백의신룡보다야 훨씬 미미한 존재요. 감히 밝히지 못 

하겠구려." 

태무결의 안색이 굳어지며 가느스름한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러자 네 명의 늙은 

거지들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건방진 놈이로다!" 

한 노개가 나서려 하자 태무결은 섭선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는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은 개방의 방주인 태무결이라 하오. 귀하들의 존함을 알고 싶소이다." 

그의 태도는 겸손했다. 그러면서도 풍기는 기도는 대단한 것이었다. 원계묵의 살모 

사 눈에서 음침한 빛이 흘러나왔다. 

"흐흐, 본인은 하오문(下五門)의 무명소졸이외다." 

다분히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태무결의 청수한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의 수중에 

있던 강철섭선이 차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활짝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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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탓!" 

금빛 광채가 부챗살처럼 뻗어나갔다.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원계묵의 눈에서 야수와 

도 같은 빛이 번뜩였다. 그는 어깨에 걸쳐 멨던 장도를 선뜻 잡더니 칼을 뽑지도 않 

은 채 받아쳤다. 

땅!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퉁겼다. 

"......!" 

태무결의 안색이 변했다. 원계묵은 장도를 네 차례나 연속 위맹하게 휘둘렀다. 

우우우웅!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비록 칼집도 벗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기(刀氣)가 얼 

음장처럼 싸늘하게 느껴졌다. 

태무결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섭선으로 눈부신 빛살을 뿌리며 연속 칠팔 초를 펼 

쳐내 간신히 칼을 막아낸 다음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났다. 그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원계묵은 장도로 땅을 짚으며 차갑게 말했다. 

"원계묵이라 하오." 

"마... 마도(魔刀)!" 

뒤에 서있던 사인의 노개들이 거의 동시에 부르짖었다. 그들의 낡은 옷자락이 바람 

도 없는데 펄럭이는 것으로 미루어 크게 놀란 듯했다. 

태무결도 안색이 변하지는 않았으나 실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마도 원계묵! 

무림에서 밥을 먹는 자라면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죽음의 칼(死刀), 야성(野性)의 살인마도(殺人魔刀)! 그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절리 

는 것이 당금무림의 현실이 아니던가! 이 아닌가? 

백의신룡 태무결은 현명했다. 

그는 철선을 거두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실례했소이다. 상대가 원대협인 줄 알았으면 감히 덤비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개방 방주라면 그 신분은 지고(至高)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렇게 낮출 수 있다니 보통 파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태무결의 모습은 조금도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원계묵은 상대가 겸손하게 나오자 조금 멋쩍어졌다. 본래 그는 선천적으로 겸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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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상대에 따라서였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답 

례를 대신했다. 

태무결은 소녀의 시신을 가리키며 낭랑하게 말했다. 

"저 소녀는 마교의 고수인 혈관음의 제자 중 한 명입니다. 사흘 전부터 본 방의 고 

수 열 여섯 명을 연속 살해했지요. 그래서 본인이 직접 나서서 추적하던 중이었소이 

다." 

태무결은 다시 한 번 정중히 말했다. 

"저 소녀의 시신을 본인에게 넘겨주실 수 없겠소이까?" 

원계묵은 고개를 돌려 장천린을 쳐다보았다. 결정은 그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천린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혈관음의 제자가 무슨 이유로 개방의 고수를 죽였소이까?" 

태무결의 가느다란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이 사람은 또 누군가?' 

그때였다. 원계묵이 칼칼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태무결은 처음으로 안색이 변했다. 

'이 자가 형님이라고?' 

이때, 장천린의 왼쪽에 서있던 사문도의 눈에서 검날처럼 예리한 안광이 번쩍였다. 

동시에 그는 흑삼 소매를 떨쳐냈다. 

슉! 

하는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가 뒤쪽의 나무 위로 뻗어나갔다. 실로 전광석화와 같 

은 반응이었다. 

"아악!" 

나무 위에서 비명과 함께 한 인영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인영은 역시 상당한 미모를 지닌 십 육칠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흑의 

미소녀였다. 그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숨을 거둔 것이다. 

소녀의 양손에는 검은 가죽장갑이 끼워져 있었는데 한쪽 손에 검은 모래가 한 줌 쥐 

어져 있었다. 

차르르륵! 

괴이한 소리와 함께 소녀의 심장에 박혀있는 쇠사슬이 빠져나오며 사문도의 소매 속 

으로 사라졌다. 

중인들은 언제 어떤 수법으로 쇠사슬이 발출되었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그 

광경에 개방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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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고수다. 천하에 이토록 정확하고 신속한 수법을 전개하는 자가 있었다니... 

....' 

이때 노개들 중 한 명이 죽은 소녀의 가슴 부분 옷을 찢어냈다. 

먼젓번의 소녀보다 조금 나이가 든 탓인지 흑삼소녀의 젖가슴은 꽤 풍만했다. 그녀 

의 젖가슴 사이에는 마찬가지로 혈관음상의 문신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노개가 죽장(竹杖) 끝으로 소녀의 손에 쥐어져있는 검은 모래를 파헤치며 침중하게 

말했다. 

"독철사(毒鐵砂)입니다. 이 계집애는 혈관음의 열세 번째 제자인 독부용(毒芙蓉) 묘 

화(苗花)입니다. 방주." 

그는 순식간에 검게 변색되어 버린 죽장으로 땅을 툭툭 치며 덧붙였다. 

"아마 이 독철사로 우리를 암습하려 한 모양입니다." 

태무결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청장로(靑長老), 이 계집의 몸을 조사해 보시오." 

"예!" 

청장로는 공손히 대답한 후 명을 시행했다. 

그는 거침없이 소녀의 옷을 모두 벗겨버렸다. 달빛 아래 소녀의 알몸이 눈부시게 드 

러났다. 방금 죽은 터라 왼쪽 젖가슴을 관통한 상처만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듯이 생 

생해 보였다. 

장천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시신이라지만 소녀의 알몸을 그대로 보기가 

민망했던 것이다. 

달빛이 소녀의 나신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백설처럼 흰 피부, 군살이라곤 한 

점도 없는 아랫배, 날씬하게 뻗어 내린 두 다리... 그리고 부드러운 방초(芳草)가 

덮여있는 소녀의 은밀한 부위까지 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장천린은 청장로의 행위가 못마땅했다. 이때 청장로가 소녀의 시선 옆에 한쪽 무릎 

을 꿇고 앉더니 거침없이 손을 소녀의 사타구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 광경에 장 

천린은 분노를 느끼며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청장로의 음성이 들렸다. 

"여기 있습니다." 

장천린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청장로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 반 개 크기의 가느다 

란 원통형 물체가 쥐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리 주시오." 

태무결은 원통을 건네 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서 돌돌 만 종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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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망월(望月) 남병산(南屛山) 정자사(靜慈寺) 해시(亥時).> 

종이에는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태무결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잠시 후 그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결국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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