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혈교출현(血敎出現)
항주의 거리는 비에 젖고 있었다.
연일 내리는 비 탓인지 그리 덥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풍류도시 항주의
야화(夜花)나 풍류객들은 이 비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날씨가 쾌청하면 전당강에 배를 띄우고 가무(歌舞)를 즐길 수 있으나 비로 인해 그
러한 재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항주의 기루나 객점에는 손님이 평소
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유시(酉時).
항주의 부청(府廳)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화복을 입은 뚱뚱한 중년관리가 뻣
뻣한 자세로 서 있었다. 청 아래에는 세 명의 관졸이 비를 맞으며 역시 뻣뻣한 자세
로 서있다.
탁자 위에는 방금 그들이 부리나케 마련한 각종 서류가 쌓여 있었다.
단위제는 탁자 앞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 서류를 읽고 있었다. 객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전후로 지금까지 항주에서 발생된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을 기록한 서류였다
단위제는 치밀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살폈다. 그가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중년관리는 별로 덥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
는 감히 땀을 닦을 엄두도 못 낸 채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단위제는 한 장의 서류를 뽑더니 입을 열었다.
"흠. 지난 열흘 동안 항주에서 상(喪)을 당한 곳은 모두 서른 두 군데로군."
그는 중년관리를 바라보았다. 관리는 그의 시선을 받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항주지부의 형부(刑府) 책임자였다.
"허! 자네 웬 땀을 그렇게 흘리나?"
단위제가 의아스러운 듯이 묻자 그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더... 더워서요."
"쯧쯧! 이렇게 시원한 날씨에? 자네 몸이 허한 것 같군? 여자를 너무 밝힌 탓 아닌
가?"
관리는 안색이 허옇게 질려 다급히 말했다.
"그, 그럴 리가요."
"흠, 여자를 밝히는 것도 좋지만 몸 생각도 좀 해야지. 그리고 그 방면은 알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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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여자라고 무턱대고 올라타면 자칫 복상사하기가 십상일세. 생각해 보게. 자네 나
이에 복상사하면 마누라와 애들 보기에 무슨 꼴인가?"
중년 관리는 그만 죽상이 되고 말았다.
평소에 한껏 위엄을 부리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말단 부하들 앞에서 망신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아닌게 아니라 세 명의 관졸들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죽어라 깨
물어대고 있었다.
단위제는 서류 검토를 마친 후 중년 관리를 불렀다.
"이리 와 보게."
"예!"
중년 관리는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서있어 다리에 쥐가 나 있었다. 엉겁결에 크게
대답하며 걸음을 떼려 했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어......?"
꽈당탕......!
그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비대한 체구가 어이없게도 바
닥에 나뒹굴어버렸다.
"허! 심각하군. 계집을 너무 밝혀 하체에 힘이 빠졌어."
단위제의 능글능글한 말에 관리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세 명
의 관졸들은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부... 부르셨습니까? 도독 어른."
관리 사마천(司馬千)은 더듬거렸다. 단위제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나?"
"그, 그야 관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단위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군."
사마천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찬이십니다."
단위제는 손가락으로 수염을 꼬며 다시 물었다.
"그럼 지난 십 일 동안 죽은 사람이 서른 두 명이니 팔린 관도 서른 두 개면 맞겠지
?"
"예."
"그런데 이걸 보게. 지난 십 일 동안 팔려나간 관이 모두 서른 일곱 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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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낯빛이 누래졌다.
"그야... 관의 품질이 안 좋으면 바꿀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을 대비하여 미리
사놓을 수도 있을 테고......."
단위제는 손가락으로 그의 배를 쿡 찔렀다. 축 처진 뱃살이 출렁거렸다.
"이곳이 어디냐?"
사마천은 눈을 끔벅이며 대답했다.
"항주... 입니다."
"항주는 절강의 성도(省都)다. 이런 대도에서 만든 관이 저급품일 수 있느냐? 게다
가 관이란 미리 살펴보고 사기 마련인데 어떤 멍청한 놈이 무턱대고 샀다가 물리지
도 않고 또 산단 말이냐?"
단위제는 아예 반말이었다.
"네놈은 부모가 죽을 때를 대비해서 관 두 개를 미리 사놓았느냐?"
사마천은 더듬거렸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다. 단위제는 한심한 생각이 들어 사마천의 비곗살로 축 처
진 배를 꽉 잡았다.
"윽!"
사마천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 돼지 같은 몸으로 무슨 사건을 해결하겠느냐?"
그는 비곗살을 잡고 흔들었다.
"너 같은 놈이 일을 해결한답시고 설쳐대니 엉뚱한 피해자가 생기는 법이다."
단위제는 주먹으로 그의 배를 냅다 질러버렸다.
"어이쿠!"
사마천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단위제는 버둥거리는 그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너! 한 달 후에도 그 비곗덩어리를 매달고 있다면 그 때는 내가 직접 칼로 도려내
주겠다."
단위제는 벌떡 일어나 대전 아래로 내려갔다.
"너희들은 날 따라와라."
"넷!"
세 명의 관졸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대답했다. 단위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청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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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葬儀社)의 홍노인은 잔뜩 긴장했다.
그의 주위에는 여러 종류의 관이 쌓여 있었다. 장의사란 원래 기분 나쁜 곳이다. 이
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체적으로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단위제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그의 뒤에 관졸 두 명이 나란히 서있었다. 지금 그
는 탁자 위에 골패(骨牌)를 늘어놓고 패를 떼고 있었다.
"어젯저녁 관을 다섯 개 팔았다 그 말이지?"
"예."
홍노인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으나 즉시 대답했다.
'호, 혹시 한 달 전 입관할 때 송대감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몰래 뺀 걸 알고 이러는
게 아닐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그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응?"
단위제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이 늙은이가 그만 욕심이 생겨... 반지는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단우제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무슨 말인지 짐작한 듯 고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탁자에 떨군 채 패를 뒤집었다.
"그 관을 사간 사람은 누구였지?"
홍노인의 안색은 완전히 우거지상이었다.
"여... 여자였습죠."
"여자?"
단위제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는 고개 들어 홍노인을 직시하며 말했다.
"홍노인, 자세히 이야기해주면 자네 죄를 묻지 않겠네."
홍노인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아왔다.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입을 열었다.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요. 입술 아래 조그만 점이 있었는데... 매혹적이었습
죠. 나이는 대략 이십 세 중반 정도였습니다요."
단위제는 눈빛을 번뜩였다.
"관만 사갔나?"
"예, 소인이 입관시켜 주겠다고 했는데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관은 누가 운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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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노삼(張老三)이라고... 소인의 집에서 일하는 놈입니다요."
"그를 불러주게."
"예!"
홍노인은 급히 안채로 달려갔다. 이때 밖에서 관졸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비
를 맞은 듯 전신이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도독님, 수문장에게 알아봤더니 오늘 새벽 묘시 경에 서문(西門)으로 다섯 대의 마
차가 빠져나갔답니다."
단위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홍노인이 한 중년장한과 함께
돌아왔다. 그 자는 겁에 질려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단위제는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네가 장노삼이냐?"
"예... 예."
"어제 저녁 관을 옮겨 주었다고?"
"예예."
"어디까지 운반해 주었나?"
장노삼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서문 근처입니다요."
"서문 근처 어디?"
"성문에서 조금 못 미친 곳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섯 대였습지
요. 그리고... 마차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있었습죠."
단위제의 가느다란 눈에서 빛이 번쩍 일어났다.
"네가 입관했느냐?"
"그... 그렇습니다."
"확실히 시체더냐?"
장노삼은 멍청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모... 모르겠습니다. 당시는 아직 어두웠기 때문에......."
"마차 주위에는 누가 있더냐?"
"모두 여자였습니다. 아마 다섯... 명쯤 되었습니다."
단위제의 안광은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그들 중에 혹시 손에 장갑을 낀 여자는 없었느냐?"
장노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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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습니다. 무척... 아름다운 여자였습죠. 한데 표정이 얼음처럼 싸늘하고... 그
렇습니다! 흰 장갑을 낀 것 같았습니다."
장노삼은 눈알을 굴리며 덧붙였다.
"한 여름에 장갑을 끼고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습죠."
단위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화산파의 인물을 납치해간 여자일 것이다. 날카로운 철사를 암기로 사용하려면 손
에 장갑을 끼지 않으면 위험할 테니.......'
그는 패를 접으며 몸을 일으켰다.
"서문으로 간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의사 문을 열고 나갔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전
히 비가 내리고 있어 거리에는 행인이 거의 없었다.
단위제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관졸들은 감히 우산을 쓰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항주에서 납치된 인물은 화산파 인물 말고도 네 명이 더 있다. 그렇다면 범인 또한
다섯 명이다. 그것도 모두가 아름다운 여인들.......'
여기까지 생각하던 단위제의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
'그렇다면!'
보름쯤 전, 원계묵으로부터 전당강에서 혈관음의 제자들이 죽은 것을 들은 바가 있
었다.
'비약일까?'
그는 계속 생각했다.
'아니다, 화산파 인물을 살해하고 납치해갈 정도로 무공이 강한 여인들이라면 혈관
음의 제자일 가능성이 크다.'
단위제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맞은편에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있었는데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어 용모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걸어오는 자태가 지극히 곱고 교태가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단위제는 눈을 크게 떴다.
'상당한 미녀로군!'
그는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녀가 절세미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인은 곧
그의 곁을 지나쳐갔다. 단위제는 아쉬움을 느끼며 힐끗 뒤돌아보았다.
'쩝, 시간만 있었더라면.'
시간이 있다면 어찌 하려고? 아무튼 술과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단위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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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우산을 받친 채 걷고 있었다.
지우산(紙雨傘)을 받친 채 가느다란 비를 맞으며 걷는 여인의 모습은 몹시 인상적이
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어딘가 모르게 바빠 보였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눈길이 한곳에 멎었다.
허름한 마차였다. 물품을 실어주고 돈을 받는 마차로 뼈다귀가 튀어나온 비쩍 마른
말하며 찌그러진 바퀴 등이 몹시 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부석에는 비를 막는 낡은 천이 씌워져 있었는데 그곳에 한 장한이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여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마차로 다가갔다.
"여보세요."
꿈결같이 달콤한 음성이었다. 마부는 선잠에서 퍼뜩 깨어나 눈을 비볐다.
"어디로 모실 갑쇼?"
면사여인의 말은 엉뚱한 것이었다.
"마차를 저에게 팔 수 없나요?"
"예?"
장한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이 마차는 소인의 것이 아니라......."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인이 내민 하얀 손바닥에 누렇게 빛나는 금덩이가 보였
기 때문이었다.
"파... 팔겠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계산해 보아도 그 정도면 새 마차를 몇 대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와요."
여인은 그에게 금덩이를 건네준 후 마부석에 올랐다. 그녀는 곧바로 채찍을 휘둘렀
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달려갔다. 장한은 멍하니 마차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미친 여자로군. 저런 고물 마차를......."
갑자기 그의 안색이 변했다.
"아차! 혹시......?"
그는 황급히 금덩이를 이빨로 깨물어보았다. 금덩이에는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찍혔
다.
"진짜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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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닷냥은 될 것 같다. 횡재다! 이게 웬일이냐? 흐흐흐......!"
장한은 보랏빛 환상에 젖어 눈빛이 몽롱해졌다.
한편, 여인은 마차를 몰고 남문(南門)을 빠져나갔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쉬지 않고
채찍을 휘둘러 항주성을 뒤로하고 달려갔다.
빗물이 면사를 적시자 자꾸만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면사를
벗어버렸다. 드러난 얼굴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는 천화군방원의 여주인 화가영이었다.
그녀는 계속 마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서호(西湖)였다.
"이랴!"
화가영은 고혹적인 붉은 입술을 깨물며 몰아치는 빗발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마차를
몰았다.
얼마 후, 그녀의 눈앞에 푸른 물결이 끝없이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났다.
서호였다.
이곳은 항주의 명물 중 하나로 맑은 물과 인근의 수려한 풍광으로 인해 풍류객이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몰리는 곳이었다.
서호의 주변에는 갈대숲이 밀집해 있었고, 만송령에 면해 있어 더없이 아름다운 경
관을 이루고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서호에 많은 유선이 뜬다. 유선으로부터 주악 소리가 끊임없이 울
려 인간계가 아닌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이룬다. 예로부터 소주(蘇州)와 항주(抗
州)를 일컬어 지상낙원이라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서호는 아름다운 곳이
었다.
쏴아아.......
빗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서호의 수면에 무수한 파문이 번졌다. 호숫가에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 바위 위에
담황색 유삼을 입은 서생이 서있었다.
호숫가는 비안개가 자욱히 덮여 있어 그의 모습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들렸다.
삘리리... 삘릴리리.......
애잔하기 그지없는 피리소리가 흘러나와 사방에 퍼지고 있었다.
왜일까?
피리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아니, 왈칵 설움이 일어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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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영은 바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차를 멈춘 채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서생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아직도... 계셨어.'
오늘 오후의 일이다.
그녀는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서호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예전에 없던 일이었
다. 선상에서 감상에 잠겨있던 그녀의 귓전에 애절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을 느낀 그녀는 피리소리의 출처를 찾다 호숫가 바위 위에서 피리를 불고 있
는 서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담황색 유삼을 입은 미서생이었다! 얼마전 고선사(
苦禪寺)에서 만난 적이 있던 그 서생이었던 것이다.
그 날 고선사에서 내려온 후 그녀의 뇌리에서는 줄곧 미서생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
다. 기이하게도 그의 인상이 뇌리에 박혀버린 것이다. 아무리 지워보려 애써도 서생
의 영상은 점점 더 또렷해질 뿐이었다.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을 나무랐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이 무슨 불순한 생각이란 말인가......?'
여심이란 묘한 법이다.
분명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이끌린 마음은 자꾸만 기울고 있었다
. 그녀는 온실에서 곱게 자란 화초 같은 여인이 아니었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었
고, 수많은 남자들을 알고 있었다. 한때는 잡초 같은 운명 때문에 방황을 한 적도
있었다.
옥류향을 만난 후에야 그녀는 긴 방황을 끝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옥류향에게 바
치리라 결심했고, 지금까지 한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선사에서 피리를 불던 서생을 본 후로 그녀의 마음은 다시 갈대가 되고 말
았다. 부는 바람에 여지없이 흔들리고 만 것이다.
참다못해 그녀는 두 번이나 고선사로 그를 찾아가 보았다. 다행히도(?)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서호에서 다시 그를 보게된 것이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
다. 그래서 서둘러 천화군방원으로 돌아왔고, 변복을 한 후 마차를 사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왜 이런 미친 짓을 했는지 스스로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비안개 속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서생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피리소리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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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은 피리를 부러뜨려 버렸다.
'아, 또.......'
화가영의 가슴에 은은한 아픔이 일어났다. 서생은 부러뜨린 피리를 호수에 던지고
있었다.
'저 분의 고통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괴로워하시는 걸까?'
어느새 마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그녀였다.
내리는 비에 머리카락이, 의복이 온통 젖는 것도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싶어.'
그녀는 서생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이 예고하는 것이 참혹한 운명의 벼랑인지도 알
지 못한 채.
서생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관옥 같은 서생의 얼굴에는 아무
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바위에서 내려와 앞으로 걸어왔다. 화가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날...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서생은 그녀를 지나치고 있었다.
화가영은 절박해졌다.
'안돼! 이대로 헤어질 순 없어.'
그녀는 입술을 악물며 말했다.
"저... 잠깐만요."
그녀를 지나치던 서생이 돌아섰다.
"절... 모르시나요?"
화가영은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내어 그렇게 말한 후 가슴을 졸였다. 서생은 잠
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할 수 없이 허무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는 입술을 열었
다.
"낙안애에서......."
화가영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기억하고 계셨어.......'
그녀는 감동으로 인해 다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호수의 수면에는 무수한
동그라미가 생겨났고 동그라미는 파문(波紋)으로 화하다 다시 떨어지는 빗방울에
부서지고, 또 부서지면서 끝없는 파문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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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대의 마차를 모두 보았다고?"
서문을 지키던 관졸들은 바짝 얼어 있었다.
"예... 예!"
형부도독 단위제 앞에서 그들은 몸도 마음도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단위제는 차갑
게 물었다.
"그래 마차는 조사해 보았느냐?"
"예......."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
"관이었습니다......."
"관을 열어 보았느냐?"
관졸들은 그만 사색이 되었다.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왜지?"
"그건......."
관졸은 대답하지 못했다. 새벽부터 관 실은 마차를 본 것만도 재수가 없는데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나 되는 관을 모두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위제는 내심 중얼거렸다.
'하기야 네놈들이 열어 봤댔자 소용없었을 테지. 만일 이상을 느끼고 따졌다면 벌써
죽었을 테니까.'
그는 표정을 풀며 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하더냐?"
얼굴이 약간 긴 관졸이 대답했다.
"천둔산(天屯山)으로 향한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단위제는 눈을 가늘게 한 채 생각에 잠겼다.
'그 계집들은 결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데다 다섯 대나 되는 마차
를 끌고 어딜 가겠는가? 어쩌면 정말 천둔산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입술을 눈썹을 꿈틀했다.
'가 보아야겠다.'
문득 그는 망설였다.
'사노제나 원노제를 데리고 가는 게 어떨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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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필요 없다. 그 계집들과 부딪치지만 않으면 될 테니.'
그는 결정을 내리고 관졸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돌아가 있거라. 나중에 연락하마."
"넷!"
관졸들이 돌아가자 단위제는 말을 타고 서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추적을 시작한 것
이다. 끝없는 추적, 그것은 곧 그의 인생이기도 했다.
칠흑 같은 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공동묘지에 가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뒷골이 뻣뻣해지고
두 다리가 무엇에 묶인 듯 잘 걸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벌써 한 시진 째 단위제는 무덤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천둔산의 공동묘지는 항주 일대의 행려자, 또는 가족이나 연고가 없는 시신들을 묻
는 곳이었다.
단위제는 한 시진 째 조사해 봤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발길에 채이는 것이 무덤이었다. 어떤 때는 들짐승이 파헤친 무덤 가에서 뼈다귀가
발길에 걸려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천하의 단위제였으나 으스스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그는 독종이었다. 일단 사건을 해결하고자 마음먹으면 지옥이라도 쫓아가는
위인이었다.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 그의 눈에는 집념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도 점차 지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잘못 짚었나?'
그는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널려있
는 무덤 뿐이다. 비는 조금씩 그치고 있었으나 대신 밤안개가 자욱히 깔리고 있었다
무덤 사이로 스물거리며 피어오르는 밤안개.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머물 수 없는
공포스런 곳이었다. 단위제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다. 내 육감은 지금까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 분명 그 계집들은 이곳에 왔
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마차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르.......
마차바퀴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단위제는 신형을 날렸다. 허공에 떠오른 채 한 그루의 나무를 향해 무엇인가를 뻗었
다.
소리 없이 황금포승이 뻗어나가 나무에 감겼다. 그것이 줄어드는 탄력을 이용해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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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처럼 나뭇가지 속으로 숨어들었다. 마침 나뭇잎이 무성하여 몸을 숨기기에 좋았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잠시 후 마차가 밤안개를 헤치고 나타났다.
하나... 둘... 다섯 대의 마차였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단위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서문을 통해 사라졌던 예의 마차가 분명했다. 아니
나 다를까? 마차가 멈추더니 여인들이 뛰어 내렸다.
여인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단위제는 안력을 돋궈 여인들을 살펴보다 그 중
한 여인이 흰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흐흐! 단가야. 역시 너는 똑똑해.'
단위제는 자화자찬을 하며 더욱 몸을 웅크렸다.
여인들은 민첩한 동작으로 마차에서 관을 끌어낸 후 마차를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여인들은 관을 바닥에 나란히 정렬시켰다. 이어 벌어진 광경은 단위제로 하여금 침
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갑자기 여인들이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
단위제는 그만 가슴을 쳤다. 여인들이 옷 벗는 광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 놈의 안개가 한이었다.
여인들은 옷을 갈아입었다. 한결같이 피처럼 붉은 홍의(紅衣)였다.
'저 복장은 혈교(血敎)의 것이다. 역시... 혈관음의 제자들이었군!'
홍의여인들은 관을 둘러싼 채 도열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단위제는 쓴 입맛을 다셨다.
'제기랄, 안개 때문에 망쳤군. 보기 드문 광경이었는데. 그런데 누굴 기다리는 걸까
?'
갑자기 가슴이 써늘해졌다.
'혈관음일지도 모르겠군!'
혈관음 영호해상.
그녀는 마교십삼사 중에서도 가장 신비롭고 무서운 존재로 알려져 있다. 생각만 해
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삐익.......
가느다란 호각소리가 밤안개를 뚫고 울려왔다.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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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구나.'
단위제는 잔뜩 긴장했다.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방아 찧는 소리로 들릴 정도였다
. 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안개 사이로 기이한 행렬이 나타났다.
핏빛 교자(轎子:가마의 일종)를 이십 명이 넘는 여인들이 둘러메고 날 듯이 달려오
고 있었다. 가마를 멘 여인들은 모두 홍의를 입고 있었다.
마침내 교자가 당도했다.
"실수 없이 데려왔겠지?"
교자 안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의외로 여인의 영롱한 음성이었다. 어찌나 나긋나긋한
지 심혼을 녹일 듯했다.
"예! 교주님."
다섯 명의 여인들은 일제히 엎드렸다.
"관 뚜껑을 열어라."
교자 안의 여인은 혈교의 교주 혈관음이 틀림없는 듯했다.
여인들은 즉시 관 뚜껑을 열었다. 관 속에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안색이
밀랍 같아 시신처럼 보였다.
"시작해라."
"예!"
한 여인이 소매에서 금합을 꺼냈다. 그녀는 금합 속에서 다섯 개의 침(針)을 꺼냈는
데 손가락 정도 되는 길이였다.
그녀는 시신들에게 침을 놓았다. 똑같이 뒤통수에 있는 옥침혈(玉枕穴)에 깊이 박아
넣었다.
잠시 후 오인이 일제히 눈을 떴다. 그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여인은 금합을 갈무리한 후 양손을 합장한 채 주문(呪文)을 외었다.
'뭐하는 거지?'
단위제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거리가 멀어 여인이 무슨 주문을 외우는지 들리지 않
았다.
"일어서라!"
갑자기 여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자 관 속에 누워있던 인물들이 벌떡 몸을 일으
켰다. 괴이하게도 무릎 관절을 구부리지 않은 뻣뻣한 자세였다.
여인은 그들의 눈앞에 무엇인가를 흔들어댔다.
"너희들은 오파(五派)의 유능한 제자들로 개방의 태무결로부터 연락 받고 비밀리에
회합을 갖기 위에 항주로 왔다.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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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오인은 몽롱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여인은 다시 물었다.
"그럼 묻겠다. 태무결은 무슨 연유로 오파 장문인들을 항주로 오라고 했느냐?'
오인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여인은 거듭 물었다.
"무슨 이유로 왔느냐? 대답해라."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여인은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다른 질문을 했다.
"너희들은 오파 장문인들의 수행원이면서 어찌 오파 장문인들과 함께 오지 않았느냐
?"
맨 오른쪽의 중년인이 대답했다.
"장문인의 엄명 때문입니다. 장문인께서는 단독으로 행동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중년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다른 수행원들도 각자 별도로 행동하게 되어 있느냐?"
"예."
"오파 장문인들은 수행원을 몇 명씩 데리고 왔느냐?"
"열 명입니다."
이번에는 오인이 동시에 대답했다.
여인은 칼칼한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오파 장문인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오인은 모두 벙어리가 된 듯 침묵했다.
여인은 다시 물었다. 역시 오인 중 대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파 장문인과 연락을 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역시 침묵이었다. 여인은 끈질기게 물었다.
"어떻게 연락을 취하느냐?"
이때, 교자로부터 예의 영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철저히 교육받았구나. 만일 첩자를 통하지 않았다면 오파 장문인들이 이곳으로 모
이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홍해(虹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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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교주님."
주문을 걸었던 여인이 대답했다.
"다시 한번 물어봐라. 오파 장문인들의 회합 장소와 일시를 말이다."
"네."
홍해라 불린 여인은 시키는 대로 오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오인은 마치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교자 안에서 노기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독하게 훈육해 놓았구나. 이 모든 것이 태무결 그 놈의 교활한 머리에서 나왔을
테지."
교자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일신에 피처럼 붉은 홍의를 입고 있었는데 괴이하게도 머리카락이 은발(銀髮
)이었다. 뿐만 아니라 눈썹 또한 은빛으로 세어 있었다.
반면 그녀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피부는 옥처럼 투명했으며, 잘
되야 삼십대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린 것 같기도
했다.
단위제는 안개로 인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이 놈의 안개 때문에 그토록 신비하다는 혈관음을 제대로 볼 수가 없구나. 빌어먹
을 안개!'
혈관음은 오인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들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접한 오인
은 전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혈관음은 오인을 바라보며 영롱한 음성으로 물었다.
"오파 장문인들은 어디서 만나기로 했느냐?"
오인은 침묵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혈관음의 음성은 더욱 고혹
적으로 흘러나왔다.
"어디서 만나기로 하였느냐?"
마침내 오인 중 한 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호(西湖) 소영주(小瀛洲)......."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무서운 광경이 벌어졌다.
"으아아악!"
오인은 처절한 비명을 터뜨리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칠공
으로 핏줄기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그들은 몸 안의 피를 모두 뿜어낸 뒤
벌렁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그들은 죽고 말았다.
나무 위에서 숨어 있던 단위제는 그 광경에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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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마녀(魔女)다!'
그의 심장은 바짝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누군가? 귀신도 벌벌 떨게 만든다는 형부도독 단위제가 아닌가? 그런 그가 이
런 공포감을 느끼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이때 혈관음의 음성이 들렸다.
"홍해(虹海)."
"네."
"너는 내일부터 소영주에 아이들을 배치해라. 오파 장문인이 그곳으로 모이는 즉시
제거한다. 지휘는 내가 직접 하겠다."
"알겠습니다. 교주님."
"채령(蔡鈴)."
"네. 교주님."
이번에 대답한 여인은 손에 백색 장갑을 낀 여인이었다.
"너는 저들의 얼굴 가죽을 벗겨내 다섯 명을 변장시킨 후 수행원들 사이에 끼게 해
라. 오파 장문인들이 소영주로 가는 일정을 자세히 알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네."
혈관음은 지시를 마친 후 고개를 들어 안개 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일이 보름인데 탁애장과 난추평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대답한 것은 홍해였다.
"독부용과 소선(素仙)은? 아직 소식이 없느냐?"
"네... 그것이......."
"그럼 이상이 생긴 것이다. 내일 중으로 그 아이들을 찾아보아라."
"알겠습니다."
혈관음은 몸을 돌려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단위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바로 자신이 숨어있는 쪽
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들켰단 말인가?'
그는 급히 입술을 오므려 괴상한 음향을 냈다.
그가 낸 소리는 마치 뱀이 나무를 휘감고 혀를 날름대는 듯한 소리였다. 청각이 영
민하지 않으면 도저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소리였다.
혈관음은 한동안 나무를 노려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의 시선은 교자 쪽으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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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녀의 눈빛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얘야, 밖으로 나오지 않겠느냐?"
단위제는 가슴을 쓸어 내림과 동시에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교자 안에 또 누가 있었단 말인가?'
이때 문이 열리며 한 명의 홍의소녀가 나왔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아니, 너무나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형용이 부족했다. 그녀는
도무지 인간계의 여인 같지가 않을 정도였다.
머리에 혈접(血蝶:붉은 나비) 모양의 장신구를 꽂았는데 나이는 대략 십 팔구 세 가
량 되어 보였다. 새까만 흑요석 빛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나고 있었으며,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은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지면 묻어날 듯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와 흑발, 피처럼 붉은 홍의는 몸서리
처질 정도로 극미(極美)한 느낌을 주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는 해당(海堂)이었다. 삼 년 전 동관현(銅官縣)에서 몸을 팔던 떠돌이 소녀 해
당이었다.
삼 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삼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욱 더 성숙해 졌고, 아름
답다 못해 마력적인 미색이 더해졌다는 것 뿐이었다.
혈관음은 해당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얘야, 너도 이제부터는 이 어미의 곁을 따라다니며 배워야 한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을 어미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당이 그녀의 딸이란 말인가?
혈관음은 인자한 표정으로 해당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힘이란다. 힘, 그러니 넌 강해져야 해. 어미가
널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마. 또한 널 혈교의 후계자로 만들어
주겠다."
해당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허공을 바
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공허한 느낌이었다.
"아가야, 과거는 잊어버려라. 한 바탕 악몽을 꾸었으려니 생각하면 된다. 이제부터
너는 지난날의 네가 아니라 혈교의 소교주(少敎主)다."
혈관음의 음성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사랑하는 내 딸 해당아......."
그녀가 한 마지막 말은 너무도 작아 단위제는 미처 듣지 못했다.
그녀는 해당의 뺨에 입술을 갖다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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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들어가자."
그녀는 해당의 손을 잡고 교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 이십여 명의 홍의
여인들은 즉시 교자를 메고 일어섰다. 잠시 후 교자는 안개를 헤치며 유유히 사라져
갔다.
한편 단위제는 교자의 뒷부분에 흰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것
은 이화(梨花)의 문양이었다.
단위제는 가슴이 격탕했다.
'이화라니.......'
그는 넋을 잃었다.
'혈관음도 이화를 좋아하는가?'
그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아득한 과거의 추억 때
문이었다. 이화에 얽힌 그만의 추억, 그것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으로 지금까
지도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혈관음이 타고 다니는 교자에 이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이상한 느낌을 주었
다.
'어쩌면 내가 잘못 보았는지도.......'
단위제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흔들었다. 환상을 보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남아 있던 다섯 여인은 시체를 관에 밀어 넣은 후 마차에 실었다. 잠시 후 그
녀들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단위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마치 천 년을 숨어 있었던 것 같군. 허허! 천하의 단위제가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는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튼 무서운 일이다. 항주에서 오파간의 회합이 벌어지는 것이나... 오파 장문인
들을 혈관음이 노리고 있는 것이나.'
단위제는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혈교의 여인들인 사라진 지 이미 일다경이 흘렀
지만 그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가자.'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느낀 그는 자욱한 안개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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