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4장 용의 출사(出師) (48/87)

제24장 용의 출사(出師) 

숭불사(嵩佛寺)는 항주의 북쪽에 있다. 

유독 높은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배불봉(拜佛峯)에 있는 숭불사는 일반 사찰(寺刹

)에 비해 독특한 규칙을 갖고 있다. 

그것은 외부인의 공양은 물론 예불조차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숭불사의 승려들은 

선(禪)을 수행하는 자들로 하루 온종일 벽만 마주보고 앉아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숭불사의 뒤편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수직으로 서있는 높이 백 장이 넘는 암벽이었 

데, 그곳에는 수많은 동혈(洞穴)이 뚫려 있었다. 동혈마다 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그 

숫자는 천 개에 달해 천불동(千佛洞)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승려들은 일단 천불동에 들면 백일면벽에 들어간다. 그 만큼 불심이 깊은 선승들이 

었으나 워낙 배타적이어서 일반인들은 숭불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반가(盤伽) 사백님께서는 외인을 접견하지 않으십니다. 워낙 고령이셔 

서 열반에 드실 날만 기다리고 계십니다." 

홍인대사(洪仁大師)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의 앞에는 장천린과 원계묵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느닷없이 숭불사를 방문했는데, 지객스님 홍인대사는 처음부터 기분이 좋 

지 않았다. 특히 원계묵이 눈에 거슬렸다. 신성한 사찰에 피비린내 나는 장도를 어 

깨에 걸치고 찾아온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장천린은 몇 차례나 공손히 청을 했다. 그래도 홍인대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계속 불 

가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원계묵은 은근히 노기를 느꼈다. 

'이 늙은 땡초가 사람을 이리도 무시하다니.......' 

그는 장천린의 뒤에 선 채 눈알을 부라렸다. 홍인대사는 그만 심금이 떨려왔다. 그 

는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여 겁먹은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사백님께 전해는 드리겠습니다. 하나...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장천린은 왜 그가 태도를 바꾸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정중히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참, 개봉부에 있는 금월사(金月寺)의 담운 노선사님의 소개로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홍인대사는 시큰둥하게 코대답하며 손에 쥔 방울을 흔들었다. 동자승이 방안으로 들 

어왔다. 그는 동자승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 

동자승이 사라지자 장천린은 찻잔을 내리며 칭찬했다. 

"차 맛이 무척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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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대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구룡차(九龍茶)입니다. 본래는 용정차를 마셨는데 요즘 용정차가 품귀현상인지라 

바꾸었습니다." 

장천린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흠, 효력이 의외로 빨리 나타나는군.' 

그가 용정차를 매점했으므로 시중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의 동자승이 들어와 보고했다. 

"반가 조사님께서 손님을 접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인대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켰다. 

"차 잘 마셨습니다." 

"아미타불, 별 말씀을......." 

장천린은 동자승을 따라 나섰다. 원계묵은 나가면서 홍인대사를 향해 히죽 웃어 보 

였다. 홍인대사는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노승(老僧).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피부는 회색에 가까웠다. 

왜소한 체구에 머리는 천령개가 움푹 꺼져 들어가 있었고, 눈두덩도 움푹 패여 있어 

마치 해골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깡마른 몸에 걸친 법의도 어찌나 낡았는지 살 

짝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이 노승이 바로 반가대선사였다. 

그는 천불동의 한 동굴 속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역시 그 못지 

않게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곡류하(曲流河)에서 낚시질을 하던 노전익이 

었다. 

그들은 세교(世交)를 초월한 지우(知友)였다. 

아득한 과거, 노전익은 가슴에 야망을 가득 품고 있었고 반면 반가선사는 숭불사의 

동자승이었다. 

노전익이 검을 안고 무림계에 뛰어 들었을 때 반가선사는 불도를 깨우치기 위해 천 

하를 돌아다니며 고행(苦行) 하고 있었다. 이렇듯 길이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서로 

를 존중하며 평생을 지우로 지내고 있었다. 

"허허, 과거가 생각나는군." 

노전익은 주름진 눈에 회상의 빛을 담았다. 

"반가, 자네에게 세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네." 

반가선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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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엇인가?" 

노전익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득한 옛날, 내가 만송령에서 검술을 익힌 후 천하를 얻으러 가겠노라고 말했을 

때 자네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네. 그런데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이었나?" 

반가선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이 친구, 아직도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있나?" 

"물론이네. 나는 그 때 자네의 웃음을 보고 자신감을 안은 채 무림으로 떠났다네." 

반가선사는 염주알을 굴리며 담담히 말했다. 

"아무 의미가 없었네. 단지 친구로서의 격려일 뿐이었네." 

노전익은 눈을 가늘게 한 채 노우를 바라보았다. 

"단지 그 뿐이었나?" 

"허허, 그렇네." 

노전익은 한동안 침묵하다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오십 년 전... 내가 좌절을 겪고 검은 꺾은 채 만송령으로 돌아왔을 때 

자네가 보여주었던 웃음은?" 

반가선사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지었다. 

"역시 아무 의미가 없었네. 단지 위로의 뜻이었을 뿐이네." 

노전익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동굴 벽에서 말없이 타고있는 유등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자네의 웃음을 보는 순간 투지가 되살아났네. 그래서 검을 새로이 갈고 닦 

은 후 다시 무림으로 떠났지. 그리고... 마침내 신검(神劍)이란 별호를 얻어냈네." 

그는 고개를 돌려 반가선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십 년 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만송령으로 돌아왔을 때 자네는 또 날 보고 

웃었네." 

반가선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건 축하의 의미였네. 자네가 드디어 인생을 깨달았기에 진심으로 축 

하한 것일세. 친구로서 말이네." 

노전익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문득 웃음을 흘렸다. 

"허허, 반가. 자네는 좋은 친구일세. 자네를 친구로 삼은 것은 내 평생의 행운이었 

네." 

반가선사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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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리 말게. 자네는 도움을 받았다고 여길지 몰라도 실상 내가 더 자네의 도움 

을 많이 받았네." 

그는 눈을 반개하며 담담히 말했다. 

"어린 시절 유약하기만 했고 유혹에 곧잘 흔들리던 내가 고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 

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자네 때문이었네. 자네가 무림을 종횡무진하며 좌절과 역경 

을 겪으면서도 오연히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을 보며 나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었고, 

그 만큼 노력하게 되었네. 허허! 지나고 보니 긴 세월 속에서 자네는 내 마음속의 

부처님과도 같았네." 

노전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기나긴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기에 그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황혼 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지나간 세월은 일장춘몽과도 같은 것이다. 

이제 그들은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남은 생애를 정겨운 대 

화를 나누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문득 반가선사가 입을 열었다. 

"참, 자네 이제 집에 가봐야지. 호아가 목 빠지게 기다릴 걸세. 벌써 이틀째 이곳에 

있었지 않나?" 

노전익은 손자의 모습이 떠오른 듯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 떠날 생각이네. 동자승을 시켜 연락을 취해 놓았으니 걱 

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때 동굴 안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동자승이 들어와 엎드렸다. 

"조사님, 용시주께서 오셨습니다." 

반가선사의 눈에 보일 듯 말 듯 이채가 어렸다. 

"어서 드시라 해라." 

장천린은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반가선사를 보고 내심 탄성을 발했다. 

'역시 보통 스님이 아니구나.' 

반가선사는 오래 전 불도를 완성한 듯 세속을 초월한 듯한 은은한 기품이 전신에 풍 

기고 있었다. 

장천린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장읍(長揖)했다. 

"말학 용백군이 반가대선사님을 뵈옵니다." 

반가선사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앉으시오, 용시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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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고승 앞에서 지나치게 예의를 따지는 것 또한 불경임을 알고 있기에 사양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허허! 빈승은 지난 수년 동안 외부인을 접촉하지 않았소. 오만을 떨기 위해서가 아 

니라 빈승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을 뿐이오. 하지만 담운의 소개로 오셨다 

니 거절할 수가 없었소이다. 허허......." 

반가선사는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탈속하면서도 소박한 웃음이었다. 장천린은 갑자 

기 기분이 좋아졌다. 

'담운노선사의 말씀은 과장이 아니었구나. 과연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불자시다.' 

반가선사가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담운은 잘 있소?" 

"소생과 만난 직후 열반에 드셨습니다." 

장천린은 거짓말을 했다. 눈앞의 고승에게 차마 금월산에서 일어난 참변을 들려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반가선사는 한동안 불호를 외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담운은 자질에 있어 빈승보다 훨씬 뛰어났었소. 다만 젊은 시절 다른 곳에 신경을 

써 불도정진에 장애를 가져왔을 뿐이오. 어쨌든 해탈했다니 축하해야 하건만... 좋 

은 불우가 사라졌으니 애석한 일이구려." 

말을 끝낸 반가선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얼굴에 은은한 신광이 감돌았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 분은 담운선사의 죽음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나.' 

반가선사는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담운이 시주를 보낼 때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 

"하셨습니다. 소생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반가선사는 눈을 번쩍 떴다. 

"시주의 손을 보여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장천린은 의아했으나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반가선사는 그의 손바닥을 펼쳐 살펴보았다. 그의 감은 듯 뜬 듯한 눈에는 혜광이 

충만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미타불... 시주는 불문과 기이한 인연이 있소이다. 시주의 몸에는 불문의 정기가 

충만하오. 그것도 극히 광명스런 정기요. 한데 그 기운이 내부로 깊이 잠재되어 있 

으니 실로 기이한 일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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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기억에는 불문과 인연을 맺은 적이 없었던 것 

이다. 

"용시주는 혹시 몇 년 전 불문의 이인(異人)과 만난 적이 없소?" 

장천린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시주의 내부에는 놀라운 불문의 기공이 잠재되어 있소이다." 

장천린의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혹시 귀원대사(歸元大師)가 전해준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만가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오! 소림신승 귀원의 불력을 받았단 말이오?" 

반가선사가 탄성을 발하자 노전익도 크게 놀란 듯 장천린을 향해 눈빛을 번쩍였다. 

사문도는 노을이 핏물처럼 번지는 남병산 기슭에서 한 그루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앉 

아 있었다. 벌써 한 시진이 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허기가 지자 허리춤에서 건량을 꺼내 조금씩 뜯어먹었다. 

노을에 물든 구름 아래로 새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사문도는 새떼를 바라보며 건량 

을 모두 먹었다. 

그는 곁에 세워놓은 물건을 집어들었다. 주먹 양쪽에 뾰족한 창날이 솟아있는 적수 

과라 불리는 병장기였다. 

그는 적수과를 흰 천으로 감쌌다. 어느덧 어스름해진 하늘로 달이 뜨고 있었다. 잠 

시 후 그는 손에 낀 검은 가죽장갑을 단단히 여민 후 일어섰다. 

'남병산 정자사 해시. 천중노개 탁애장과 구지신개 난추평, 팔결장로 녹배상이라 했 

지.......'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그의 발길은 산 위로 향했다. 어디선가 은은한 범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유등 아래에 세 권의 낡은 책자가 놓여 있었다. 

반가선사는 눈을 반개한 채 말했다. 

"이것은 오십 년 전 담운이 빈승에게 보관시킨 것이오." 

그의 음성에는 짙은 감회가 서려 있었다. 

"담운이 불도에만 정진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책자 때문이었소." 

장천린은 묵묵히 경청했다. 

"이 세 권은 모두 무경(武經)이오. 담운은 젊은 시절 우연히 이것을 얻은 후 야심이 

일어났소. 하지만 십 년 만에 이것을 익히는 것을 포기했소. 그 후로 자신의 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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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자람을 탄식하며 이것을 빈승에게 보낸 것이오." 

"......." 

"담운은 비록 스스로 내공을 소실시켰지만 대단한 안목이 있었던 듯하오. 아마도 시 

주의 체내에 흐르는 반야대능력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보낸 것 같소. 다시 말해 이 

책자를 시주에게 주라는 뜻일 것이오." 

장천린은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담운 노선사가 무공을 지녔었다고?' 

그는 마음이 산란해졌다. 담운과의 마지막 광경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에게 떠나라고 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대웅전 불상 위에 놓여졌던 그의 

목... 그런데 잘려진 그의 수급은 조금도 고통스런 표정이 없었을 뿐더러 도리어 평 

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가선사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시주는 난세의 영웅지상이오. 장차 천하에는 대난세(大亂世)가 도래할 것이오. 하 

지만 시주는 아직 잠룡(潛龍)이오. 이제부터 시주는 난세에 출사(出師)하여 겁란(劫

亂)을 막아내야 하오." 

장천린은 안색이 변했다. 

"담운은 아마도 시주를 보고 그것을 느꼈을 것이오." 

반가선사의 음성에는 말할 수 없이 신비한 힘이 들어있는 듯했다. 

"난세에는 힘이 필요하오. 시주는 그 힘을 얻어야 하오. 이 세 권의 책자는 시주에 

게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줄 것이오." 

반가선사는 한 권의 책자를 집어들며 말했다. 

"이것은 무상금강결(無想金剛訣)이오." 

장천린은 경건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 무상금강결은 시주의 체내에 잠자고 있는 백 이십 년에 해당하는 내공을 일깨워 

줄 것이오. 아울러 반야대능력과 합쳐져 진정한 반야대능력의 정수(精髓)를 얻게 

해 줄 것이오." 

장천린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반가선사는 두 번째 책자를 집어들었다. 

"이것은 천 이백 년 전 마교의 이단자인 사자천군(獅子天君) 목혈성(穆頁醒) 이 저 

술한 대마경(大魔經)이오." 

'마교!' 

장천린의 안색이 변했다. 

"사자천군 목혈성의 무공은 마교의 교주 이상이었소. 그는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이 

단자로 낙인이 찍혀 숙청 당하고 말았소. 이것은 그가 죽기 직전 최후의 힘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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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것이오. 따라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마교에 대한 저주가 담겨 있소. 여기 

에 수록된 것은 마교의 천마구예(天魔九藝)를 능가하는 가공할 마예(魔藝)들이오." 

장천린은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아미타불! 이마제마(以魔制魔)라는 말이 있소. 마(魔)를 모르고는 마를 제거할 수 

가 없는 것이오. 이것은 시주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오. 마를 꺾기 위해서는 상대 

의 마공보다 더 강한 마공을 터득해야만 할 것이오." 

반가선사는 장천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마지막 책을 집었다. 

"이것은 왕검십결해(王劍十訣解)란 것이오. 저자는 불명(不明)인데 무척이나 어려운 

책이오. 허허! 빈승이 주제넘게 몇 번 읽어보았으나 그 뜻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 

소. 여기에는 검의 궁극적인 경지인 왕검(王劍)에 대한 이론이 적혀 있는 것 같았소 

." 

왕검십결해! 

어찌 알았으랴? 훗날 그 한 권의 책자가 장천린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될 줄 

이야! 왕검십결해야 말로 인간세상에서 가장 신비스런 검서(劍書)였던 것이다. 

문득 노전익의 안색이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번쩍이는 시선으로 왕검십결해를 노려 

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어럽게 입을 열었다. 

"반가, 그 책을 잠시 봐도 되겠나?" 

반가선사는 웃음을 흘렸다. 

"허허, 자네에게 아직 검에 대한 애착은 남아있나 보군." 

그는 이의없이 책자를 건네주었다. 

노전익은 급히 책자를 받아 펼쳐보았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그의 늙은 얼굴에는 점 

점 더 경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으음! 실로 대단한 검론(劍論)이네. 가히... 당세제일(當世第一)이랄 수 있네." 

그는 눈빛을 번뜩이며 단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일 뿐 실제가 아닐세. 이 책을 남긴 사람은 아마도 평생에 걸쳐 

검에 대해 연구한 모양이네. 안타깝게도 그 자신 역시 왕검에 도달하지 못했네. 단 

지 이론만을 남긴 것이네." 

노전익은 책자를 덮었다. 

"어쨌든 훌륭한 업적을 남겼네. 무림사에 기록된 적도 없는 일개 무명인이 이런 검 

의 이론서를 남길 수 있다니 과연 천하가 넓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군!" 

반가선사는 너털웃음 쳤다. 

"허헛! 자네는 십 년 전에 검을 버렸고 후계자도 두지 않았네. 하지만 자네가 터득 

한 검이 당대의 으뜸이라는 것을 알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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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과찬이네." 

반가선사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떤가? 그것을 그냥 버리지 말고 용시주에게 넘겨주는 것이?" 

노전익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힐끗 고개 돌려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노안에 갈등이 어렸다. 

"아미타불... 미련을 두지 말게. 자네는 이제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었네." 

노전익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품속에서 한 개의 두루말이를 꺼냈다. 

"허허! 내 죽을 때 함께 가져가려 한 것인데... 젊은 친구, 자네가 한번 이것을 이 

용해 보게. 가능하다면 무림사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다는 왕검의 경지를 깨우쳐 

보게나." 

장천린은 망설였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엄청난 내력을 갖고 있는 무경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별 관 

심이 일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상인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힘보다는 두 

뇌가 세상을 이끈다고 믿고 있었다. 

반가선사는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세에는 수많은 마귀가 창궐하는 법일세. 시주는 난세에 태어났네. 하늘이 시주를 

난세에 떨군 것은 시주로 하여금 어떤 임무를 준 것이라고 생각하네." 

장천린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시주는 용이지만 아직까지는 잠룡(潛龍)이라네. 오늘날의 시대는 참다운 용을 원하 

고 있네. 그것도 강한 용을 말일세. 시주는 승천하는 용이 되어야 할 사람이네. 그 

운명을 거부해서는 안되네." 

장천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용이라... 승천하는 용.......' 

장천린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노선사님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제가 나가야 할 길을 일러주십시오." 

"허허헛......." 

반가선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부처님의 미소와도 같았다. 

"으아악!" 

개방의 팔결장로 녹배상의 입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 

려 있었고, 입 가장자리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정수리에는 주먹 모양의 적수과가 붙어 있었는데 주먹 한쪽 끝에 달려있는 뾰 

족한 칼날이 정수리에 깊이 박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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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수과가 정수리로부터 뽑혀 나오는 순간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끄으으......." 

녹배상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쿵! 하고 쓰러졌다. 

천중노개 탁애장과 구지신개 난추평은 경악과 분노에 사로잡힌 채 한 흑의복면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적수과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양손에 검은 색의 장 

갑을 끼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남개방의 실질적인 지도자 난추평은 흰 수염을 떨며 물었다. 그러나 복면인은 대답 

하지 않았다. 복면 사이로 뚫려있는 두 개의 눈구멍에서는 무심한 눈빛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장소는 남병산 정자사의 한 법당이었다. 

법당 안에는 향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향로 뒤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이 자애스런 

표정으로 녹배상의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널 보냈느냐?" 

난추평은 두 번째 질문을 던졌으나 복면인은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난추평의 가슴 

에는 거대한 의혹이 일어났다. 

'이곳에 우리가 모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다면... 혈관음 뿐이다. 

한데 혈관음은 오지 않고 어찌하여 이 자가 나타나 살수를 펼친단 말인가?' 

난추평의 흰 눈썹이 부르르 진동했다. 

'대체 누가 이놈을 보냈단 말인가? 녹배상이 단 일초에 당하다니... 상상도 못할 무 

서운 고수다.' 

탁애장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까풀은 축 쳐져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 

차 힘에 겨운 듯이 보였다. 사실 그는 너무나 늙어 있었다. 온 얼굴이 주름살 투성 

이에 머리카락은 반 이상이나 빠져 있었다. 

난추평은 입술을 지그시 물며 내뱉었다. 

"좋다! 내 네놈을 잡아 직접 문초하겠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는 한 쌍의 초자곤(樵子棍)이 들려 있었다. 

우웅! 

초자곤 한 쌍이 웅후한 경풍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득 메웠다. 

흑의복면인- 사문도의 눈빛이 침잠해졌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적수과가 순 

간적으로 움직였다. 

카카캉! 

귀청을 찢을 듯한 금속음이 연달아 울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칠팔 초를 연속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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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것이다. 

'으으.......' 

난추평은 비틀거렸다. 그는 남개방 제일의 고수로 무공에 관한 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병기가 부딪칠 때마다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상대 

의 무기가 중병(重兵)인데다 힘에 있어 밀리고 있었다. 

한편 의자에 앉아 졸린 듯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탁애장은 더 이상 눈을 뜨고 있 

기조차 힘든 듯 아예 감아버렸다. 

"크으윽!" 

난추평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에서 초자곤이 날아가 버렸다. 그의 복부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사문도의 적수과가 지나간 것이다. 

난추평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복부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선혈과 함께 내장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난추평의 눈동자가 불신과 의혹을 담은 채 서서히 뒤집혀졌다. 

"영호... 해상... 왜 그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가......?" 

그는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쓰러졌다. 생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사문도는 무심한 눈길로 탁애장을 바라보았다. 탁애장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일어서 무기를 뽑으시오." 

사문도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탁애장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탁하고 흐렸다. 

그는 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젊은 친구, 노부의 나이 백십 세일세. 너무 늙었네. 과거처럼 무기를 들고 싸울 기 

력이 없다네. 허허허! 태무결 그 아이는 너무나 머리가 좋군." 

탁애장의 눈에 뿌연 안개가 서렸다. 

"전대방주인 육지신룡 범천구는 그 아이를 개방방주로 지목하지 않았네. 하나 태무 

결에게는 야심이 있었지." 

사문도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조화성의 살인혈첩이 범천구에게 떨어진 것을 미리 알고도 그 아이는 대비하지 않 

았지. 범천구가 실종된 후 그 아이는 차기방주로 지목되었던 범천구의 사제인 구양 

수를 제거했네. 그의 사형제들과 손을 잡고 말일세. 그 후 개방을 손에 넣었지." 

탁애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경악스런 것이었다. 사문도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난추평은 야심 때문에 이번 일에 개입했고 이 늙은이는 제자 구양수 때문에 개입했 

네. 하지만 헛헛... 하늘은 역시 태무결 그 아이의 편이었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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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애장의 허무한 눈길은 천장으로 향해졌다. 

"그 동안 수없이 갈등을 느꼈네. 한데 지금 결론을 얻었네. 태무결은 야심은 많아도 

능력이 있네. 장차 개방은 그 아이로 인해 최대의 전성기를 맞게 될 것이네. 우리 

들의 죽음으로 개방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테니까....... 허허허허허......." 

문득 그의 입가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전해 주게... 태무결... 그가 이겼다고......." 

사문도의 눈빛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의자에 앉은 채 탁애장이 고개를 푹 떨군 것이 

다. 

그는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을 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사문도는 무겁게 고개 

를 저었다. 그는 적수과를 벽 쪽으로 던져버렸다. 

퍽! 

적수과는 벽에 깊숙이 꽂혔다. 

사문도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불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마당에 내려섰을 때 만월이 

그를 비추었다. 그의 발 밑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른 장소. 

만월이 떠있는 곳이 있었다. 

만송령 기슭을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이미 살아버린 평생의 친구 

인 노전익과 반가선사였다. 

"허헛! 반가. 자네가 웬일로 날 여기까지 전송하는가?" 

노전익의 말에 반가선사는 미소지었다. 

"글쎄... 나이가 드니 감상에 젖는지도 모르지. 허허! 늙은 벗이 간다니 섭섭하군." 

노전익은 눈썹을 치떴다. 

"이 늙은 땡초야! 내가 사는 곳이 얼마나 멀다고 그런 소릴 하는가? 내일 또 천불동 

에 갈 수도 있네." 

"허허허!" 

"헛헛!" 

백 년을 함께 살아온 두 지우는 마주보고 웃었다. 그들의 눈에는 따스한 정감이 흐 

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휘영청 솟아오른 만월의 빛을 받으며 나란히 걸어갔다. 

반가선사가 중얼거렸다. 

"호아가 단단히 골이 났겠군." 

"그래서 미리 과자를 사가는 게 아닌가?"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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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전익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 보게. 반가." 

반가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노전익의 어깨를 쳤다. 

"노우, 자네가 내린 결정은 정말 훌륭했네." 

그것은 장천린에게 검결을 준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노전익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이봐, 땡초. 나도 알고 보면 꽤 그릇이 큰 사람일세." 

그 말에 두 사람은 마주보며 대소했다. 잠시 후 반가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겠네." 

"잘 가게. 땡추." 

"허허... 나무관세음보살." 

반가선사는 불호를 외우며 걸어갔다. 노전익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몸을 돌려 걸어갔다. 

곡류하의 물소리가 야음을 타고 잔잔하게 들려왔다. 노전익은 고개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만월이 숲을 포근하게 비추고 있었다. 

'허허! 달이 꽤 밝군.' 

달 속에 한 귀여운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호아, 이놈... 잠들었을까?' 

노전익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천만 년의 풍상을 견뎌온 바위 앞이었다. 바위의 표면은 잔뜩 금이 가고 이끼가 잔 

뜩 끼여 있었다. 곡류하에서 낚시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갈 때면 늘 지나게 되는 바 

위였다. 

바위 위에 한 사나이가 등을 돌린 채 걸터앉아 있었다. 

'누굴까? 이 밤에.......' 

노전익은 왠지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몇 걸음 더 걸어갔다.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사나이가 돌아앉았다. 

노전익은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돌아앉은 사나이의 얼굴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 

는 탈을 쓰고 있었다. 

탈의 눈은 초승달 모양으로 웃는 듯이 보였다. 그 밖에 코도, 눈도, 귀도 없었다. 

탈 표면에는 흰색이 덕지덕지 칠해져 있을 뿐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탈에 뚫려 있는 

두 개의 눈구멍에서는 무기력한 동공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기다리는 자다. 결코 좋은 뜻은 아닌 것 같다.' 

노전익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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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담자개는 바위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그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신검(神劍) 노전익......." 

노전익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동정(洞庭)의 담우공(譚羽公)을 아는가?" 

"그대는......." 

"담우공의 손자." 

노전익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담우공의 죽음은 노부와의 정당한 비무(比武)로 인한 것이었네." 

담자개는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삼십 년 전 그 정당한 비무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이에 천애고아가 되었 

다." 

노전익은 탄식했다. 

"젊은이, 노부는 이미 십 년 전에 검을 버렸네." 

"검은 다시 잡으면 되는 것!" 

담자개의 소매 속에서 종잇장같이 얇은 면도가 소리도 없이 뽑혀 나왔다. 

'진짜 살의를 품고 있다. 게다가 무서운 검기를 뿜고 있다.' 

노전익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섬뜩한 한기가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는 것 같았다. 노전익은 손을 뻗어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든 

후 비스듬히 지면을 가리켰다. 그의 왼손에는 여전히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달빛이 눈부시게 밝았다. 

시간이 흘렀다. 

노전익과 담자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전익의 자세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고 

그의 눈빛은 마치 강물처럼 깊어 보였다. 

담자개의 음울한 눈빛이 흔들렸다. 

'과연 신검답구나. 검을 놓은 지 십 년이나 지났는데 자세에 조금도 허점을 노출시 

키지 않는구나.' 

그는 면도 끝을 세웠다. 

치치릿....... 

예리한 검기가 독사의 혀끝에서 독이 뿜어지듯 흘렀다. 담자개의 눈에서 일순 번갯 

불 같은 광채가 번뜩였다. 그의 손에 쥔 나뭇가지 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스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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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느리게 움직여 보기에도 지루할 정도였다. 담자개의 눈빛이 음침하게 움직였 

다. 

"만검(晩劍)의 달인이군." 

그의 면도가 섬광처럼 움직였다. 

"타!" 

뇌전이 뻗었는가? 담자개의 면도가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허공을 베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전익의 나뭇가지는 여전히 눈에 띄게 느릿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신형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전익의 나뭇가지가 간신히 중단 부위쯤에 올라갔을 때 담자개의 몸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탁! 

바닥에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그것은 두 동강이 난 탈이었다. 

"만중쾌(晩中快)... 과연 신검이라 부를 만 하군." 

지면에 기울어져 있는 담자개의 면도 끝으로부터 핏방울 하나가 똑 떨어져 내렸다. 

노전익은 반대편에서 등을 돌린 채 서있었다. 그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보라! 

그의 가슴 섶이 시뻘겋게 물들고 있지 아니한가! 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늘어져 있던 

탐스런 백염(白髥)도 삽시에 벌겋게 물들고 말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가다 바위에 부딪쳤다. 

"그... 그 무공은 마교(魔敎)... 염무... 염무의......." 

노전익의 입에서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바위에 기댄 채 과자봉지를 

가슴에 꽉 끌어안았다. 

쏴아아! 

이제까지 들리지 않았던 곡류하의 물소리가 밀려들어 왔다. 노전익은 노안을 치뜨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둥근 달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아... 그 놈... 잠들었을까?' 

바위에 기댄 채 노전익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바위의 한 부분이라도 된 

듯. 그의 손에서 과자봉지가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담자개는 몸을 돌렸다. 

그의 발치에는 동강난 탈이 떨어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똑같은 탈이 씌워져 있었 

다. 

그의 눈은 여전히 무기력했다. 그는 무기력한 눈길로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동공 

에 보름달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은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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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령의 울창한 송림 사이로 사라졌다. 

한 통의 서찰이 파르스름한 연기를 내며 타 들어가고 있다. 채 타지 못한 부분에 쓰 

여진 글씨가 보인다. 

<......약속을 지킨 것에 감사드리오. 덕분에 오파 회합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소. 

이 태무결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것들은 지킬 것이오. 서찰과 함께 은자 백만 냥을 

보내드리오. 거듭 감사.......> 

서찰은 완전히 타버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장천린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그어지고 있 

었다. 

'대단하군. 내가 보낸 서찰과 똑같은 방법으로 서찰을 만들어 보내다니.......' 

문이 열리며 원계묵이 들어왔다. 

"형님, 단도독께서 서찰을 보내왔습니다." 

장천린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서찰을 두 번이나 받아 보는군.' 

<용대인. 서찰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하오이다. 노부 급한 일이 생겨 떠나는 길 

이오. 이것은 사적인 일이오. 어쩌면 평생의 한(恨)을 풀게 될지도 모르겠소이다. . 

..... (중략) ...... 앞으로 반년 동안은 못 뵈게 될 것 같소이다. 그러나 용대인이 

가는 곳은 언제든지 파악할 수 있으니 후일 다시 찾아 뵙겠소이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단도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그는 뒷짐을 지고 서성이다 한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소진에게서도 아직 연락이 없고.......' 

"형님, 어떻게 할까요?" 

"준비가 끝났으니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 구룡상선을 출발시키게." 

"예." 

원계묵은 힘차게 대답한 후 밖으로 사라졌다. 

장천린은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서랍장으로 가 서랍 하나를 열 

었다. 그 속에는 낡은 책자 세 권과 두루말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용의 출사(出師)라......." 

중얼거린 그는 서랍을 닫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붉게 물든 노을이 전당강의 수면을 환상적인 색채로 물들이고 있었다. 장천린은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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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위에 선 채 노을을 응시했다. 

쏴아아아......! 

문득 파도가 크게 치며 배가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귓전에 달콤한 여인 

의 음성이 들려왔다 

"백군,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요?" 

황보설연이 다가와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그러지 말아요. 당신이 근심스런 표정을 짓기만 해도 모두들 걱정이 태산이에요. 

당신은 구룡상선의 정신적 지주잖아요?" 

장천린은 빙긋이 웃었다. 

"오늘따라 당신은 더욱 아름답군." 

"어머!" 

황보설연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장천린은 그녀의 가는 허리를 살며시 껴안았 

다. 

"아이, 누가 보면......." 

"하하! 그들은 알아서 피할 것이오." 

장천린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쏴아아아! 

구룡상선은 전당강의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전진했다. 노을은 더욱 화려한 색채로 

삼라만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만력(萬歷) 사십육년. 

대륙에 풍운이 일다. 

후금(後金)의 왕 누르하치는 부친 타실(他失)과 조부 규장이 과거 명(明)에 의해 참 

혹하게 죽음을 당한 일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가슴속에 대야망(大野望)을 품었었다. 

십구 세 때 무순(撫順) 일대에서 상업활동을 하여 중원인과 활발히 접촉하여 선진문 

화를 습득하고 이십 사 세에는 부락의 추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때부터 야망을 본격 

적으로 실현하여 마침내 여진(女眞)을 통일했다. 

이후 후금을 세워 북방의 제왕(帝王)이 된 그는 야망의 눈길을 중원으로 돌렸다. 

그는 부친과 조부의 복수를 위해 제단(祭壇)을 쌓아 자신의 칠대한(七大恨)을 하늘 

에 고한 후 대군을 일으켜 병마를 몸소 지휘하여 명을 치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은 그는 삽시에 무순(撫順)을 함락시키고 폭풍 같은 기세로 남하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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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복수심에 불타 올랐던 그의 병사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과 방화를 한 후 퇴각 

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섭혁(葉赫)을 공격한다. 섭혁은 명조에 구원을 청하여 명에서는 

양호(揚鎬)를 요동경략에 임명하고 누르하치를 막아내려 했다. 한편 명의 장군 두 

송(杜松)으로 하여금 삼만의 군대로 무순을 치게 했다. 또한 이여백(李如柏)은 이만 

오천의 병력으로 두송의 군대를 지원했다. 마림(馬林), 유정(劉綎) 등도 가세하니 

명은 일거에 누르하치의 후금을 격멸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누르하치는 각개격파의 기동 전술을 동원하여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켜 살이호(薩爾

滸:요녕성 무순 동쪽)에서 두송의 주력군을 기습 공격하여 두송을 전사시키고 마림 

의 군대까지 패퇴시켰다. 

연후 흥경으로 진격하여 유정의 군대도 물리쳤다. 이 역사적인 살이호 전투는 겨우 

닷새 동안 진행되었는데 명의 구만대군이 후금의 육만 기병에게 참패함으로써 치욕 

적인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그로 인해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누르하치는 여세를 몰아 더욱 진군에 박 

차를 가했으니... 마침내 요북(遼北)이 그의 발길 아래 떨어지고 말았다. 

만력 사십칠년, 누르하치는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공략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명은 대장군 웅연필(熊延弼)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간신히 그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일 년 간을 팽팽하게 대치하게 되었을 뿐, 욱일승천(旭日昇天) 같 

은 기세로 나날이 강대해지는 후금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대륙은 흔들렸다. 

바야흐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중원 곳곳에서 일어났다. 전 대륙이 걷잡을 수 없이 

전란의 회오리에 휩싸인 것이다. 

무능한 군주와 부패된 관리들로 인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 사이에서는 반란 

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무림에서도 패주(覇主)들이 준동하기 시작하니 

그들은 왕법(王法)을 철저히 무시한 채 멋대로 행동을 벌였다. 

중원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결정적인 것은 조화성(造化城)의 등장이었다. 오랫동안 수면 하에서 암약하던 조화 

성이 마침내 무림패도(武林覇道)를 선언하면서 드러내 놓고 정도무림을 짓밟기 시작 

한 것이다. 

정도의 지사들은 조화성의 마수에 추풍낙엽처럼 거꾸러져 갔다. 조화성주는 본격적 

으로 무림의 제왕이 되기 위해 혈풍(血風)을 일으킨 것이다. 

조화성의 거대한 세력과 힘 앞에 상대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관부에서조 

차 속수무책이었다. 아니, 때로는 지방관부가 조화성의 손과 발이 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했으니... 천하는 온통 암흑천지(暗黑天地)가 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항간에는 난세(亂世)를 비관하는 노래가 나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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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관외(關外)는 야족(野族)의 말발굽 아래 찢어지고 

관중(關中)은 조화(造化)의 불길에 타는구나 

우매한 군의 발아래 보이는 것은 간특한 무리들 뿐이오 

충효열사(忠孝烈士)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구나 

농민들은 호미를 버리고 화적(火賊)이 되어 천하를 유랑하고 

뜻 잃은 영웅들은 눈물 속에 무기를 꺾는다 

분노한 지사들이 숨겨 두었던 검을 뽑아 들지만 

검은 녹슬고 뜻 또한 따라주지 않으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달빛은 칼끝에 지건만 천하는 아직도 어둡기만 하구나! 

월락검극천미명((月落劍極天未明)! 

(달빛은 칼끝에 지건만 천하는 아직도 어둡기만 하구나!) 

이 같은 노래는 삽시에 전 중원에 퍼져나갔다. 그만큼 세상이 혼탁함을 말하는 것이 

요, 암담하기만 한 미래를 표현하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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