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진천뢰(震天雷)
화로(火爐).
새파란 불꽃이 뱀의 혓바닥처럼 춤추고 있다. 순도(純度) 높은 불꽃을 내고 있는 이
화로는 보통 화로가 아니라 쇠를 녹이는데 쓰이는 단로다.
화로 앞에 두 명이 정좌하고 있었다.
우측에 앉아있는 사람은 중년인으로 예리한 눈빛이 마치 두 자루의 비수를 보는 듯
했다. 기이하게도 그는 눈썹이 없었다. 상반신은 벌거벗었는데 여기저기 불에 데인
듯한 흉터가 나 있었다.
좌측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대략 이십 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백색의 마(麻)로 된 평범한 단삼에 머리는 역시
흰 두건으로 감싸고 있었다. 일견하기에 청순한 느낌이면서 건강미가 넘쳤다.
철공소 안이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인해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서 두 남녀는 화로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중년인은 집게를 화로 속으로 넣어 무엇인가를 집어냈다. 그것은 발갛게 달
구어진 일월쌍극(日月雙戟)이었다.
그는 입에 한지를 물었다.
폐 속의 탁한 기운이 호흡을 통해 쇠에 닿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일월쌍극을
받침쇠 위에 올려놓고 힘차게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땅! 땅!
망치를 두드리는 동작은 일정했으며 그 힘이나 위치도 정확했다. 특히 망치를 내려
칠 때마다 그의 팔과 어깨 근육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가 입에 물고 있는 한지는 열기로 인해 점점 검게 그을려 갔다. 중년인의 눈썹이
하나도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고열의 쇠를 두드리다 보면 눈썹은 물
론 머리카락까지 타버리기 일쑤인 것이다.
철공소 안의 공기는 후끈하다 못해 따갑기까지 했다. 그러나 중년인은 조금도 느끼
지 못하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더욱이 표정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 그는 일월쌍극을 다시 화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여인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중년인은 입술에서 한지를 떼며 냉담하게 말했다.
"입 벌리지 마라."
정(情)이라고 한 점도 깃들어 있지 않은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는 화로를 지켜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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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 한지를 입에 물더니 화로 속에서 일월쌍극을 꺼냈다.
이번에는 더욱 빠른 속도로 한지가 타들어 갔다.
땅! 땅! 땅!
중년인은 계속 망치질을 했다. 그는 똑같은 과정을 열 여덟 차례나 반복했다. 그러
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여인은 여전히 화로 앞에 앉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
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마의도 땀에 젖어 한층 요염한 느낌을 주었다.
치이이이익!
일월쌍극을 냉각수에 넣자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다시 화로에 넣어 달군
후 냉각수에 식히기를 여덟 번... 일단 담금질은 끝났다.
중년인은 일월쌍극의 날을 갈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는 여전히 한지가 물려져 있었
다.
쓱! 쓱! 쓱!
날을 가는 작업은 단순한 듯하면서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다. 너무 갈
면 날카로운 반면 약해지기 쉽고 덜 갈면 또한 무뎌서 쓸모가 없었다.
중년인은 마치 도인(道人)과 같은 자세로 날을 갈았다.
마침내 그는 일월쌍극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냈다.
찬란한 은빛 광채가 철공소 안을 휘황하게 밝혔다. 일월쌍극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
다. 날카롭게 날이 섰으며, 매서운 광채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중년인은 손가락으로 일월쌍극의 날을 어루만지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좋은 병기다. 나 천독고(千獨古)의 일생을 통해서 다시 만들기 힘든 작품이야."
그가 손을 내밀자 여인이 목함을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중년인, 천독고는 조심스럽게 일월쌍극을 목함 속에 갈무리하고는 뚜껑을 닫았다.
비로소 그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여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
"오라버니께선 철계로 돌아가실 건가요?"
천독고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여인은 설득하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철계에는 오라버니 말고도 장인들이 많아요. 게다가 황학산 대인도 오라버니께서
여기 계신다고 하시면 용대인과의 관계로 보아 쾌히 허락하실 거예요."
"사예(思藝)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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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독고는 여인- 천사예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용대인을 사랑하고 있느냐?"
천사예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바보 같은......."
"오라버니......."
천독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감히 그 분과 어울릴 것 같으냐? 용대인은 거부다. 너는 천민 출신인 일개 장
인의 딸일 뿐이야. 게다가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남보다 월등하게 아름답지도 않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쇠를 만지는 것 뿐인데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냐?"
천사예의 얼굴에 애잔한 고통의 빛이 흘렀다.
"포기해라! 더 큰 상처를 받기 전에."
천독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체구는 생각보다 컸다. 더욱이 벌거벗은 상체의 근육은 마치 강철같아 보는 이
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할 정도였다. 그는 고개 숙인 천사예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
드리며 말했다.
"사예야, 네 남자는 이 오라비가 골라 주마."
살며시 고개를 드는 천사예의 흑백이 분명한 눈에 뿌연 물막이 어렸다.
'알아요. 오라버니의 염려를...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천독고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저녁 무렵.
두두두두......!
구룡장원의 정문으로 일단의 인마(人馬)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들이닥쳤다.
모두 십이 필의 황마(黃馬)였는데 마상에는 한결같이 건장한 체격에 험상궂은 사나
이들이 타고 있었다.
마침 문 앞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백살대의 조충과 황계는 눈살을 찌푸리며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인마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계속 질주해 왔다.
조충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버럭 외쳤다.
"멈춰라! 네놈들은 누구......?"
그는 미처 말을 맺지 못했다. 그의 눈이 크게 떠지고 있었다.
마상 위에서 한 사나이가 자색 피풍을 펄럭이며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얼굴 전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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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나룻으로 시커멓게 뒤덮여 있었는데 땅에 내리자마자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핫핫핫......! 조충. 일 년 만에 만났더니 벌써 날 잊었단 말이냐?"
조충과 황계의 한동안 멍한 표정이다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반대협!"
그렇다.
갑자기 구레나룻의 사나이야말로 반송(盤松)이었던 것이다. 일 년 전 낭인무사 십여
명과 함께 포국(葡國:포르투갈)으로 떠났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반송은 어깨에 잔뜩 내려앉은 먼지를 툭툭 털며 걸걸한 음성으로 물었다.
"핫하! 그래 용대인은 안에 계신가?"
조충은 길을 터주며 앞장섰다.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반대협."
이때 다른 기마인들도 일제히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들 중에는 요북(遼北)의 사도(
死刀) 담오의 모습도 보였다.
반송은 장원 안으로 들어서면서 감개무량한 듯 중얼거렸다.
"야! 오랜만에 중원에 돌아오니 정말 꿈만 같군."
그는 고개를 돌리며 쾌활하게 말했다.
"자! 모두 들어가자. 용대인께 인사한 후 사흘 동안은 계속 퍼마셔야겠다. 그래야
먼지에 막혀있던 목구멍이 뚫릴 것 같단 말야!"
그는 피풍을 요란스럽게 휘날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충과 황계는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쯧! 여전하시군."
"제 버릇 개주나? 후후, 아무튼 우리 대주만 죽었군. 며칠간 입에서 술냄새가 가시
지 않은 채 성가시게 굴텐데."
두 사람은 마주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요북의 사도 담오는 묵묵히 반송을 따라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
나 조금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
사문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월쌍극이 완성된 것이다. 천독고에게 맡긴 지 백 일 만에 둔탁하던 병기가 예리한
신병(神兵)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그는 태어난 후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한편, 반송과 담오의 귀환으로 인해 구룡장원은 온통 들뜬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기쁜 일은 두 사람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장천린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반
년 동안 구룡장원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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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이슥해지도록 장원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장원의 일천여 명에 달하는 식솔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
서 반송과 담오는 처음 보는 사문도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반송은 유감없이(?) 자신의 술실력을 발휘하려는 듯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구
룡장원의 대청은 밤새도록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폭소, 환담을 나누는 소리로 가득
했다.
오랜만에 목욕을 한 장천린은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에서는 동방옥(東方玉)이 기다리고 있다 깨끗이 손질해 놓은 백색의 금삼(錦衫)
을 그에게 입혀주었다.
"고맙구나, 소옥."
장천린은 호피가 깔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넓은 방안 한가운데에는 황보설연이 앉아 흑의(黑衣)에 금빛수실로 용문양을 수놓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수놓는 모습이 그지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한편 동방옥은 의자 뒤에서 아직 젖어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질했다.
"머리가 많이 자랐어요. 묶거나 자르지 않으실 건가요?"
"아직은 괜찮다. 별로 불편하지 않으니까."
동방옥은 나직이 웃었다.
"훗! 이제야 그 퀴퀴하던 냄새가 없어졌어요."
장천린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냄새가 심했었나?"
수놓던 황보설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몰라서 그래요. 어젯밤 장원으로 돌아온 당신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아세
요? 흥!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구요. 구룡장원 주인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었어요."
"허! 그래도 돌아오자마자 목에 매달린 건 누군데?"
황보설연은 그만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코웃음쳤다.
"흥, 오해하지 말아요. 그건 동정심 때문이었다구요."
"흠, 그래서 어제부터 내내 이 방을 떠나지 않은 건가?"
"흥! 흥! 그건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앞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장천린은 동방옥에게 물었다.
"소옥, 너도 같은 생각이냐?"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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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옥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황보설연은 다그치듯 말했다.
"소옥, 괜히 마음 약해질 필요 없어요. 저 분은 바람 같은 분이니 나중을 위해서라
도 미리 꽉 잡아놓아야 한다구요."
장천린은 혀를 찼다. 동방옥은 킥, 하고 웃음을 참으며 계속 그의 머리를 손질해 주
었다.
이때 황보설연이 수틀을 놓고 일어섰다. 그녀는 백색 능라의를 입고 있었는데 붉은
색의 요대로 허리를 꼭 졸라매고 있어 늘씬하고 육감적인 몸매가 더욱 강조되어 보
였다. 머리카락도 전보다 훨씬 길었다.
그녀는 사뿐사뿐 다가오며 물었다.
"대체 지난 반 년 간 무엇을 하신 거예요?"
장천린은 대답 대신 그저 담담히 웃기만 했다.
황보설연은 그의 무릎에 걸터앉으며 한 손으로 목을 껴안았다.
"혹시 저희가 싫어지기라도 했나요?"
장천린은 히죽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황보설연은 한숨을 쉬더니 붉은 입술을 그의 이마에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백군. 당신은 구룡장원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기둥이에요. 당신이 없으면 저
희는 살아가는 의미를 잃고 말아요."
장천린은 감미로운 입김을 느끼며 그저 듣기만 했다.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요. 다시 그러면 설연도 똑같이 할 거예요."
장천린은 손바닥으로 황보설연의 둔부를 가볍게 치며 웃었다.
"하하하! 옛날처럼 얼굴에 흙을 바른 개구쟁이 소년으로 행동한단 말인가?"
"흥! 못 할 것도 없죠."
장천린은 그런 그녀가 무척이나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방옥은 그의 머리 손질을 끝낸 후 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피부가 많이 타신 것 같아요."
"왜? 보기에 안 좋은가?"
"아니에요. 더 건강해지신 것 같아요. 전에는 다소 창백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
"하하핫......!"
장천린은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지난 반 년 간 구룡장원에 있지 않았다. 줄곧 장원 밖에서 생활했으며 반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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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처럼 살았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마음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
했다.
그 동안 그는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대나무를 베어 죽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때로는
강에 나가 낚시질도 했으며 또 나무를 베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온 반년 동안의 생활은 그의 모습마저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는 섬세한
공자대부의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야성(野性)이 느껴지는 늠름한 장부의 기질이 넘쳐
흘렀다.
황보설연과 동방옥은 그런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무척이나 낯선 느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런 모습이 더욱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방옥은 방 한쪽으로 가더니 칠현금을 가져왔다.
"소옥이 대인을 위해 한 곡 탈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옥, 대인이란 말은 어색하구나. 앞으로 백군이라 불러라."
동방옥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뿌옇게 젖어들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었다.
"소옥, 어디 한 번 불러봐라."
동방옥은 고개를 푹 떨구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알겠어요. 배... 백군......."
"하하하! 그것 봐라. 한결 듣기 좋지 않느냐?"
이때 그의 무릎에 앉아있던 황보설연이 그의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핀잔을
주었다.
"하여튼 당신은 여자의 마음을 휘어잡는데 천재예요."
장천린은 슬며시 그녀의 둔부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야 이를 말인가? 그러니 당신도 후려낸 거 아니오?"
"후... 후려요?"
황보설연은 아연해 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확 붉혔다. 장천린의 손이 그녀의 어딘가
를 건드린 것이다.
동방옥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현을 고르며 물었다.
"백군, 무슨 곡을 탈까요?"
장천린은 지긋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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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행(琵琶行)."
"알겠어요."
황보설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망연한 눈으로 장천린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
거렸다.
'이 분은 아직도 취옥교란 분을 잊지 못하고 있구나.......'
갑자기 그녀는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설연은 비파행이 싫어요. 다른 것으로 해요."
장천린은 눈을 떴다.
"설연......."
황보설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셔야 해요. 전 살아있는 실체예요. 당신이 허상을 좇는
것을 계속 바라볼 수만은 없어요!"
다소 강하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장천린의 눈썹이 흔들렸다
'옥교.......'
이상하게도 황보설연의 얼굴 위에 취옥교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황보설연은 그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을 읽었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식는 것을 느
꼈다. 그녀는 내심 애타게 말했다.
'백군, 제발 내 앞에서 그녀를 떠올리지 마세요. 저는 그 분의 대역이 아니에요. 저
는 단지 설연일 뿐이에요. 옥교가 아니란 말이에요.'
황보설연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천린은 내심 탄식했다.
'내 평생 옥교 외에 다른 여인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식어버린 내
마음에 다시 사랑을 심어준 것은 바로 설연 당신이오. 당신은 누구보다도 귀엽고
따스한 여인이오.'
장천린의 눈앞에서 취옥교의 모습은 점점 옅어졌다. 대신 황보설연의 처연한 얼굴이
점점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언제부터인가 그랬다. 그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취옥교의 영상이 차츰 희미해져 갔다
. 그는 흐려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되살리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그 모습은 더욱
더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대신 새롭게 가슴을 채우는 것은 바로 황보설연이었다.
"......."
장천린은 정신을 차렸다. 칠현금을 안은 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동방옥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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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옥, 해당별곡(海堂別曲)을 부탁한다."
"아......."
황보설연이 기쁨의 탄성을 발하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해당별곡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동방옥은 고운 아미를 숙이며 긴 손가락으로 현을 퉁기기 시작했다.
디디딩.......
청량한 금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다가 서서히 소나무 가지
를 흔드는 봄바람처럼, 또는 계곡의 물소리처럼 변해가더니 점점 음률이 고조되어갔
다.
황보설연은 금음에 도취된 듯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장천린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팽팽한 젖가슴이 부드럽게 눌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황보설연은 가벼운 신음을 발하며 더욱 그의 가슴에 깊이 안겨들었다. 그녀의 눈꼬
리에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이슬이 매달려 있었으나 뺨은 해당화처럼 발갛게 달아오
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천뢰震天雷)입니다."
탁자 위에 펼쳐진 것은 하나의 도면(圖面)이었다. 그것은 화포(火砲)의 구조를 그린
설계도로 방금 전 반송이 내놓은 것이다. 방안 한쪽에는 담오가 양손을 소매에 찔
러 넣은 채 서있었다.
장천린은 한동안 도면을 내려보다 물었다.
"나는 화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네. 그런데 도면을 보니 상당히 큰 것 같군."
반송은 턱수염을 쓱 문지르며 말했다.
"예, 이 화포는 포신(砲身)의 길이만 해도 이장(二丈)이 넘고 무게는 대략 팔천 근
정도입니다. 열두 필의 말이 끌어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위력은?"
"엄청납니다. 사정거리는 백 장에서 이백 장이 넘고 조준만 잘하면 오백 장까지 가
능하다고 합니다. 화탄(火彈)이 떨어지면 그 주위 이십여 장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개미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합니다."
반송은 힐끗 담오를 바라본 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가 일 년 전 담형과 함께 급히 포국으로 간 이유는 진천뢰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포국의 화포 제작기술은 아주 우수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곳에
서 진천뢰를 만들지 못한 이유는 이곳까지 운반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반송은 탁자 아래 내려놓았던 상자로부터 시커먼 색의 철구(鐵球) 하나를 꺼내 올려
놓았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통 만한 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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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곳에서 만든 진천뢰의 화탄입니다. 열 두 가지 화탄 중에서 화류성(火流
星)이란 것으로 여섯 번째입니다."
"화류성?"
장천린은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예, 간단히 말해서 이 화류성 속에는 화약과 함께 손톱 만한 크기의 철편이 수천
개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터지면 수천 개의 철편이 사방으로 확산되면서
마치 유성처럼 주위를 휩쓸어 버립니다. 그 철편의 위력은 바위까지 뚫을 정도지요.
그야말로 대량 살상을 하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장천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송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일부터 진천뢰의 제작에 들어가겠습니다. 대인께서는 기술자 몇 명을 구해 주십
시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어떤 기술자 말인가?"
"저는 설계도대로 화포를 만들 수는 있지만 직접 쇠를 다루는 기술은 없습니다. 그
래서 철의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장천린은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천독고.'
천독고는 천일학 노인이 죽은 이후로는 쇠를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는 단연 중원제일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가 곧 구해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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