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7장 두 개의 사랑 (51/87)

제27장 두 개의 사랑 

마도(魔刀) 원계묵. 

그의 이름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는 평생을 도와 함께 살아왔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손에서 도를 떼어놓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의 애도(愛刀)를 

닦고 있었다. 

기다란 장도를 닦고 있는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져 있지 않았으며 눈빛은 얼음 

장처럼 냉랭했다. 

지금 그의 등뒤에 한 사나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백살대의 무사 중 한 명인 조충 

이었다. 

장도를 세워 날을 바라보던 원계묵은 냉랭하게 물었다. 

"모용초가 근처에 나타났단 말이지?" 

"예." 

"혼자인가?" 

"아닙니다. 한 미녀와 함께 있습니다." 

"미녀라......." 

도신에 비친 원계묵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 

이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손미(孫媚).......' 

그렇다. 

손미는 본래 그의 약혼녀였다. 사부인 만승금도 도담후가 지난 날 연인의 딸인 그녀 

를 거두었고 원계묵과는 장차 가연을 맺을 사이였다. 그런데 그녀는 무정도 모용초 

의 유혹에 넘어가 사부인 도담후를 죽게 만들었다. 

손미는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그녀는 모용초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사부가 죽은 후 

모용초는 가차없이 그녀를 버렸다. 

'손... 미......!' 

칼자루를 움켜쥔 원계묵의 손등에 심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사 년 전....... 

원계묵이 백살대의 훈련을 마치고 사부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그곳에 본 광경 

은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사부인 도담후의 시체였다. 또한 그 앞에 쓰러져 있는 손미 

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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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묵은 죽어 가는 손미를 사흘밤낮을 자지 않고 간호한 끝에 기적적으로 소생시켰 

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보다는 증오가 더욱 컸다 

배신감으로 인한 그의 상처는 미증유의 증오로 바뀌었다. 더욱이 모용초에게 버림받 

았으면서도 실신 중에도 끊임없이 모용초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를 몇 번이나 쳐죽이 

고 싶었다. 

그런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대주(隊主)!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형제들 십여 명이면 놈을 충분히 제거할 수 있 

습니다." 

조충의 격앙된 음성에 원계묵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놈은 극히 영활한 놈이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혼자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다. 

반드시 어떤 흉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차갑게 되뇌었다.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 그리고... 놈은 내가 잡는다. 반드시 나 혼자.......' 

그는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조충." 

"예, 대주." 

"결코 허락 없이 움직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 알겠느냐?" 

조충은 흠칫했다. 

여러 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물론 백살대의 무사들 모두 원계묵의 차가운 음성을 

들으면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다. 조충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주!" 

"호연경에게서는 연락이 없느냐?" 

호연경은 부금진의 뒤를 추적하라고 명을 내렸던 백살대 소속의 무사였다. 조충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 달 전부터 소식이 끊겼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긴 곳이 어디였지?" 

"산서성(山西省) 태행산(太行山)입니다." 

"사흘 안으로 연락이 없으면 두 명을 선발해 태행산으로 보내라." 

조충은 공손히 대답한 후 방을 나갔다. 

그는 원계묵이 과거의 도담후를 능가하는 기도를 지녔다고 느꼈다. 원계묵은 날이 

갈수록 도담후의 모습을 닮아갔지만 도리어 왕년의 도담후보다 강해졌으며 냉엄해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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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이 사라진 후 원계묵은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모용초... 놈은 대체 무슨 일로 이 근처를 배회한단 말인가?' 

그는 알고 있었다. 

일 년 전부터 모용초는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항주에서 부터였다. 

'어차피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숙명이다, 모용초.' 

원계묵의 눈이 살모사의 눈처럼 번들거렸다. 

'개인적인 원한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세상에서 도의 길을 걷는 자는 많다 

. 하지만 일인자는 오직 한 명 뿐이어야 한다. 후훗! 난 벌써부터 너의 무정도(無情

刀)를 꺾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원계묵의 혈관 속 피는 황야를 달리는 사자처럼 뛰기 시작했다. 

물론 예전의 그는 아니었다. 장천린을 따르게 된 후부터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그를 

억제해 오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서랍장으로 걸어가 한 개의 서랍을 

잡아 당겼다. 

서랍 속에는 몇 통의 밀지(密旨)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호연경이 보내온 것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부공자께서는 개봉을 떠난 직후 계속 북상중입니다. 그 동안 만난 사람은 없었습니 

다. 다시 연락 취하겠습니다.> 

<임청(臨淸)에서 세 사람과 만났습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접근이 어려워 

듣지 못했습니다. 부공자는 그들과 헤어져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넜습니다.> 

<산서성 태행산에서 부공자의 자취를 놓쳤습니다.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찾는 대로 

연락 취하겠습니다.> 

밀지는 십여 통쯤 되었고 마지막 것은 태행산에서 보낸 것이었다. 

원계묵은 밀지를 다시 서랍 속에 거두었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진에게 무슨 비밀이라도 있단 말인가? 단도독 말대로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했을 

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무슨 목적이란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단위제도 항주를 떠난 이후로는 연락 

한 번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원계묵은 장도를 칼집에 넣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장도를 벽걸이에 걸었다. 칼은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었으나 요 

즘 들어서는 몸에서 떼어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늘 평화롭기 만한 구룡장원에서 장 

도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람을 쏘일 겸 밖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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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우거져 있었다. 

장원 후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산아래 인공호수가 있었다. 호숫가에 한 명 

의 미녀가 그림처럼 서있었다. 

마침 호숫가를 산책하던 원계묵은 미녀를 보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 

양문완이었다. 

제남 양가장의 장주 양익상의 여식으로 장천린의 외척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난날에 

비해 무척 성숙한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앳된 소녀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완숙한 여 

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원계묵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발견하자 양문완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얼굴 

을 붉혔다. 

"원무사님......." 

"양소저." 

두 남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양문완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아미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 막 장원에 도착했어요. 원무사님을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원계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망연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 년 전 양가장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청순하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년이 지난 지금 그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차갑게 식어버렸던 그의 가 

슴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움직였던 것이다. 

원계묵은 한 가닥 향기를 맡았다. 

싱그러운 바람이 양문완의 머리카락을 날리며 그의 후각에 향긋한 체취를 뿌려준 것 

이다. 원계묵은 멍한 표정으로 양문완을 바라보았다. 양문완은 그의 눈길을 받자 더 

욱 고개를 떨구었다. 

'.......' 

철의 사나이 원계묵의 가슴 한 구석이 알 수 없는 달콤한 느낌으로 사르르 녹는 순 

간이다. 그는 가볍게 호흡을 들이켰다. 코끝으로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여인의 체 

취가 밀려들었다. 

"하아아......." 

여인은 손톱을 잔뜩 세우며 금침자락을 움켜쥔 채 신음을 흘렸다. 

머리카락은 해초처럼 젖었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넘치는 희열로 보석처럼 빛나고 있 

었다. 대리석같이 곧은 두 다리는 은어처럼 파닥이며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사내는 금방이라도 달아날 듯한 여체를 포획한 채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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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여인의 유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있었으며 입술로는 여체의 곳곳을 집요 

하고도 뜨겁게 공략해갔다. 

여인은 흐느끼듯 오열하며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한 줌밖에 안 되는 그녀의 허리는 활처럼 뒤로 젖혀졌다가 퉁겨지듯 돌아오곤 했다. 

간헐적으로 머리를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사내는 더욱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으며 여인의 세류요(細柳腰)를 부러질 

듯 잡아챘다. 

두 사람의 호흡은 마치 풀무질하듯 거칠었으며 방안은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 

온 열기로 인해 후끈한 열기에 휩싸였다. 

정사(情事). 

한낮의 뜨거운 정사였다. 여자와 남자는 더 이상 벽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무언중 

에 첫 번째 정사를 벌이면서도 서로가 능숙하게 쾌락을 추구했고, 메울 수 없는 탐 

욕을 남김없이 불살랐다. 

여인은 남자를 알고 있었고 남자 또한 여인을 다룰 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완숙했고 뜨거웠다. 

"아......!" 

한껏 벌어진 여인의 입술 사이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 땀에 

젖은 사내의 몸이 딱 정지했다. 여인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등 한복판에 박혀들었 

다. 뒤로 젖혀진 여인의 얼굴에서 활짝 열린 동공이 움직임을 멈춘 채 굳어졌다. 

그리고... 무너지듯 두 개의 나신이 한 덩어리가 된 채 침상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 

졌다. 

사내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백색유삼이었다. 그는 아름답다 못해 요기(妖氣)마저 느껴질 정도로 관옥 같은 용모 

를 지닌 미서생이었다. 

모용초! 

무정도 모용초였다. 

사지를 힘없이 벌린 채 침상 위에 누워있는 여인의 표정에서는 방금 전 격렬하게 태 

운 희열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초생달처럼 가느스름하게 

열려 있었고, 열락에 겨운 듯 간간이 혀끝으로 말라버린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화가영(花佳榮)! 

놀랍게도 그녀는 항주의 기녀출신인 화가영이었다. 

모용초는 옷을 단정히 입은 후 탁자 앞에 앉아 식어버린 차를 잔에 따랐다. 그는 차 

를 한 모금을 마신 후 시선을 화가영에게 던졌다. 그의 시선이 화가영의 유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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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으로 흐르다 어느 한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의 눈빛이 괴이하게 오므라들었다. 

"옷을 입어라, 가영." 

화가영은 두 눈에 요염한 빛을 발산하며 반문했다. 

"추하게 보이나요?" 

모용초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영은 두 손을 올려 자신의 나신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흘렸다. 

"후훗, 당신이 지난 일 년 동안 탐닉한 육체예요." 

모용초는 바닥에 떨어진 문사건을 들어 머리에 둘렀다. 화가영은 비로소 몸을 일으 

켰다. 

그녀의 유방이 출렁거리며 묘한 육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와 바닥 

에 흩어져 있는 옷을 천천히 걸쳤다. 마지막으로 요대를 묶으며 그녀는 등을 보이고 

있는 모용초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담황색 옷을 입지 않는군요." 

"필요가 없으니까." 

모용초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차디찼다. 

갑자기 화가영은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홋홋......! 당신이 황국(黃菊)을 좋아 한다고요? 정말 지독한 사기꾼 같으 

니라고... 호호호호홋!" 

그녀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교소를 터뜨렸다. 모용초는 묵묵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마 

실 뿐이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날 유혹했어요. 대체 그 이유가 뭐죠?" 

화가영은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며 다그쳤다. 

"나는 처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고귀한 여자도 아니에요. 내 육체를 거쳐간 남자는 

부지기수예요. 그런 날 유혹하여 당신이 얻은 것이 무엇이죠?" 

모용초의 입에서 무감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행복한 모든 것을 증오한다." 

화가영의 안색이 변했다. 

"행복한 여자를 보면 나는 끝없이 파괴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흐흐, 내가 행복하지 

못하거늘 어찌 남의 행복한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 행복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 나 

는 희열을 느낀다. 후후... 전신이 짜릿해지도록 말이다." 

"무서운 사람이군요.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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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초의 눈빛은 무감동하게 변했다. 그는 화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흘 후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간다. 그는 용백군을 만나기 위해 구룡장원으로 가 

는 중일 것이다. 그가 누군지 아느냐?" 

"......?" 

"바로 옥류향(玉柳香)이다." 

"......!" 

화가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모용초 

는 잔인했다. 

"과거 너의 약혼자지. 흐흐, 너는 그 자를 만나야 한다. 알겠느냐? 그래서 널 이곳 

으로 데려온 것이다." 

"다... 당신......." 

화가영의 섬세한 몸이 바람을 맞은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모용초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는 처녀가 아니다. 옥류향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해라. 

수없이 많은 남자들을 거쳤지만 마지막으로 네 몸을 소유한 것은 나라고. 옥류향은 

관대한 사내이므로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 악... 마... 같은 사람......." 

화가영의 몸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모용초의 눈빛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했다. 아니, 그의 눈빛은 점차 음울하게 변해갔다.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 

갔다. 

화가영은 얼어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용초를 노려보며 힘겹 

게 말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한 가닥 결의가 어려 있었다. 

"내가... 당신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옥공자는 이미 내 마음을 떠났어요. 당신이 

뭐라 하든...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화가영은 힘주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모용초는 빈정거렸다.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데도?" 

화가영의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여염집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이제까지 상대한 그런 부 

류의 여인과는 틀려요. 나는 결코 약한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날 버릴지라도 다 

른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매달리지는 않아요." 

모용초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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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버리면 할 수 없지요. 그 순간부터 화가영의 인생은 끝난 셈이지요. 후훗.. 

. 당신이란 사람을 잘못 본 것은 다 내 탓이니까요. 정에 굶주려 온 탓에 쉽게 감동 

하는 것이 나란 사람이지만... 인생을 알 만큼은 알기에 나는 어떠한 시련도 극복해 

나갈 수 있어요." 

"......." 

모용초는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점점 더 파문을 일으켰다. 

문득 화가영은 요염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두 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 

락으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후훗! 어때요? 또 생각나시나요? 내 몸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요." 

모용초의 손이 번쩍 움직였다. 

짝! 

화가영은 뺨을 얻어맞고 그대로 침상 위로 넘어졌다. 

"호호호호... 호호호호홋......!" 

비명 대신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날카로우면서도 처절무비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절망의 궁극을 넘어버린 파국(破局)을 연상케 웃음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 

리지 않았다. 흘릴 눈물이 말라버렸기 때문일까? 다만 발악적인 웃음만을 끊임없이 

터뜨릴 뿐이었다. 

그녀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모용초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모용초의 귓전에는 아직도 화가영의 웃음소리가 윙윙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이 무섭 

게 일그러졌다. 

'웃지 마라! 웃지마!' 

그는 두 손을 들어 양쪽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그의 마음 

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갈등에 휩싸인 채 걸어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취영.......' 

한때 그가 생명처럼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 

'취영! 너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청순하고 고귀한 여인이었지. 하지만 지금의 너는 

저 여인보다 백 배 천 배나 더 더럽고 추악해졌다!' 

모용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여인은 비록 육체는 더러울지라도 마음만은 더럽지가 않다.' 

그는 자신에게 반문했다. 

'모용초. 너는 과연 저 여인의 행복을 파괴했느냐? 그리고 성공했느냐? 그렇다면 너 

는 왜 기뻐하지 않는 것이냐?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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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초는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나무에 기대었다. 

'내 마음... 내 마음이 파괴되고 있다. 이십 년 전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던 내 마 

음이... 이제는 끝없이 붕괴되고 있다.' 

모용초의 회색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는 나직이 웃었다. 그 웃음은 처절했다. 

"후... 흐흐... 흐......." 

말할 수 없이 처절한 웃음이었다. 

장천린이 구룡장원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 동안 그는 미뤄두었던 사업상의 업무로 인해 낙수범, 초광 등과 함께 산더미 같 

은 장부와 서류들을 검토하느라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의 곁에서는 황보설연과 동방옥이 세심하게 시중을 들어주었다. 

서류를 검토해 본 결과 그 동안 구룡장원의 모든 사업이 크게 번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낙수범은 천부적인 경영의 재질이 있었다. 그것을 꽃피게 한 것은 장천린이었다. 그 

가 없는 동안 낙수범은 기대 이상으로 사업을 이끌었고, 초광과 두 미녀도 한몫을 

해내어 구룡장원의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순항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그지없이 만족스러웠다. 따라서 장부검토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틀째 되는 날 미시 무렵이었다.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던 통보가 구룡장원으로 날아들었다. 

"형님!" 

평소에 한번도 당황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사문도가 굳어진 안색으로 장천린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문도." 

"형님, 이것을......." 

사문도의 손에는 한 통의 밀지(密旨)가 들려 있었다. 

장천린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 급히 받아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간략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태진왕(太眞王) 전하께서 중태이십니다. 용대인을 급히 찾고 계시니 전갈을 받으시 

는 즉시 북경의 태진궁(太眞宮)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장천린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언제 도착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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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입니다." 

장천린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서찰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사태였다 

. 그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암담하게 변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열었다. 

"문도." 

"예, 형님." 

"북경으로 떠날 준비를 해라. 그리고 위천조와 뇌찰격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사문도는 더 묻지 않고 즉시 밖으로 나갔다. 장천린의 표정으로 미루어 사태의 엄중 

함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가자 황보설연이 다가와 장천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백군,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태진왕 전하는 항시 와병중이셨어요. 별일은 없으실 

거예요." 

장천린은 침묵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하와 나는 항시 자필(自筆)로만 연락을 나눈다. 한데 이 필체는 백소저의 것이다 

. 그렇다면 전하는 글씨조차 쓰지 못할 만큼 병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장천린은 다시 한번 서찰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더욱이 이 서찰은 누군가 미리 읽어 본 흔적이 있다. 이 종이는 특수하게 만든 것 

이라 글씨를 쓴 후 한 시진 이내에 누가 만지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장천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낙수범을 향해 말했다. 

"수범, 촛불을 켜라." 

낙수범은 영문을 몰랐으나 시키는 대로 촛불을 켰다. 

장천린은 서찰을 촛불에 갖다댄 후 비쳐 보았다. 그러자 서찰 뒷면에 은은하게 누군 

가의 손가락 자국이 투영되었다. 그것은 워낙 희미해서 여간해서는 발견할 수 없었 

으나 장천린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여인의 손이라.......' 

장천린의 눈이 번뜩였다. 

'서찰을 쓴 지 일각도 안되어 누군가 전서구를 포획하여 서찰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전서구를 날린 것이다.' 

장천린의 생각은 깊어졌다. 

'일각 안이라면 태진궁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누가... 감히 전서구를 잡아 읽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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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는?' 

장천린의 생각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런 상태로 한식경이나 흘려보냈다. 

"수범, 천독고를 불러라." 

"예, 대인." 

낙수범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후 밖으로 사라졌다. 

천독고가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반식경 쯤 후였다. 그는 건장한 체격에 마의를 걸치 

고 있었는데 방안에 들어오자 깊숙이 절을 했다. 

"부르셨습니까?"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천독고는 사양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장천린은 그를 주시하며 물었다. 

"진천뢰의 도면은 보았소?" 

천독고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어렸다. 

"예, 아주 대단합니다." 

"어떻소? 그 일을 위해 날 도와주지 않겠소? 황학산 대인에게는 내가 양해를 구하겠 

소." 

천독고는 고개를 저었다. 

"황대인과 소인은 무관합니다. 조부께서 타계하신 후 우리 남매는 황대인과의 인연 

이 끊겼습니다." 

천독고는 고개 들어 장천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대인께서는 그 무서운 진천뢰를 어디에 사용하시려는 것인지... 감히 물어도 되겠 

습니까?" 

장천린은 무겁게 말했다. 

"대명(大明)의 백성을 위해서요." 

천독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명의 백성을 위해?"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피가 한 차례 뜨겁게 끓어올랐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 

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들어 보겠습니다. 하지만 작업을 위해서는 황대인이 가지고 있는 철공소 만한 시 

설이 필요합니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그것은 본인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요. 아무튼 천형이 허락하셨으니 기쁘기 그지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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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다. 참,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 

"천형의 누이에게 천형 못지 않은 실력이 있다고 들었소." 

천독고는 담담히 말했다. 

"경험과 힘은 부족하나 자질은 소인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오늘 북경으로 떠나오. 천사예 소저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있는데 허락하신 

다면 북경까지 함께 가고 싶소이다." 

천독고의 얼굴이 굳어졌다. 장천린은 부드럽게 말했다. 

"어려운 일이라면 없었던 것으로 하지요." 

천독고의 표정이 몇 차례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내심 중얼거렸 

다. 

'사예야, 어쩌면 이번 일은 하늘이 네게 은총을 내린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이 오라비는 도리어 네가 이번 일로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우려되는구나.' 

그는 장천린은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용대인께 감히...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사예를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말해 보시오." 

"사예가 다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물론이오." 

장천린은 천독고의 말을 별다른 의미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았으랴? 그 말의 이면에는 보다 절실한 오누이의 뜨거운 정이 

어려있다는 사실을....... 

두두두두......!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구룡장원을 떠나는 삼 기의 인마가 있었다. 그들은 장천린 

과 사문도, 천사예 등이었다. 

그들은 북경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원계묵이 백살대와 함께 수행하려 했지만 장천린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사문도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천사예를 대동한 것도 암중에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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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구룡장원을 떠날 때 두 여인이 문 앞에 망연한 표정으로 서서 손을 흔들었다. 

황보설연과 동방옥이었다. 

황보설연은 그늘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분은 평생 한시라도 마음 편히 쉴 날이 없으신 것 같아." 

동방옥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만 들어가요, 언니. 우리는 저 분을 이해해야만 해요. 저 분은 쉬고 싶어도 천하 

가 저 분을 필요로 하는 걸요." 

황보설연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너무나 벅찬 분을 모시고 있는 것 같아, 안 그래, 소옥?" 

동방옥은 미소 지으며 고개 숙였다. 

"하지만 저는 행복한 걸요.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호호호! 아무튼 못 말려." 

황보설연은 깔깔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두 미녀는 하나같이 아름다운 절세가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세상에서 한 남자만을 사 

랑했고 그 사랑에 추호의 의혹도 품지 않았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사 

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구룡장원으로 돌아오는 것 뿐이었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바 

라지 않았다. 

장원 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두 미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 

리 지평선에 남아있는 자욱한 흙먼지. 그것은 정인이 사라진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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