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거인(巨人)의 죽음
사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옥류향은 너무 많이 변했
다.
그는 이제 과거의 영준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십 개의 흉터가 아로새
겨져 있었다.
또한 지난날의 풍류 넘치는 미공자가 아니라 그의 전신에서는 강인한 사나이의 기상
과 집념이 활화산처럼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가 수하들을 거느리고 구룡장원을 방문한 것은 장천린이 북경으로 떠난 지 한 시
진 뒤인 신시(申時) 무렵이었다.
그의 느닷없는 방문에 낙수범은 놀랐다.
그가 놀란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그의 얼굴이 온통 흉측한 흉터로 뒤덮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금도
위축되거나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눈에 어려있는 혜광(彗
光)이 지난날보다 훨씬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바로 만금산장의 옥류향이란 사실이었다.
낙수범은 설마 그런 인물이 강남제일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일 줄은 꿈에도 상
상치 못했던 것이다.
옥류향은 얼마 전 장천린이 장원을 떠났다는 말에 무척이나 섭섭해했다. 결국 그는
구룡장원의 총관(總管)을 보고 있는 낙수범과 차 한잔을 나누고는 장원을 떠났다.
떠나기 전 그는 장천린에게 전해 달라며 세 가지 물건을 남겼다.
그가 남긴 물건 중 하나는 진시황제가 사용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자룡옥배(紫
龍玉杯)였으며, 두 번째 물건은 반 뿌리의 만년삼왕(萬年蔘王)이었다. 세 번째는 한
통의 서찰이었다.
옥류향은 그 물건을 건네준 후 총총히 구룡장원을 떠났다.
옥류향은 구룡장원을 떠나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용형, 정말 대단하오. 이토록 크게 성장할 줄은 몰랐소. 과연 용형답소.'
옥류향은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과거 금월산에서 그를 만난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용형은 나와 생사를 같이한 친구요. 나는 그대와 영원히 우정을 나누고 싶소. 하지
만 내게는 천하의 상계(商界)를 놓고 겨루어야할 적수기도 하오. 후후! 그런 점에서
는 한 치도 양보할 수가 없소. 아마 용형도 그러리라 믿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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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향은 고개 돌려 저만치 멀어져 있는 구룡장원을 바라보았다.
'어디 한 번 내가 장악하고 있는 강남으로 손을 뻗어 보시오. 내 멋지게 응수하리다
.'
이때 그의 곁을 따르던 수행원이 물었다.
"옥대인, 어디로 가십니까?"
옥류향의 눈에서 부드러운 광채가 흘렀다.
"항주로 간다."
항주란 말을 내뱉은 순간 그의 가슴에 훈훈한 바람이 일어났다.
'가영(佳榮), 이제 너도 항주를 떠날 때가 되었다. 내 이번 길에 널 데려 가리라.'
옥류향의 뇌리에 화가영의 아름다운 자태가 떠올랐다.
"가자!"
옥류향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히히히힝!
힘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일행은 자욱한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갔다.
한편, 언덕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무정도 모용초였다.
그의 손에는 술병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잔뜩 술에 취해 있었다. 멀어져 가는 옥류
향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술병을 입에 처박고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단숨에 비워버렸다.
"쿠후후후! 옥류향, 항주로 가 보거라. 네가 기다리는 화가영은 없을 것이다. 그곳
에 있는 것은 한낱 쓰레기 같은 창부일 뿐이다. 흐흐흐흐......."
그는 괴소를 흘리며 품에서 한 장의 비단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수놓아져 있었다.
<천화군방원(天華群芳院)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가영(佳榮)은 당신만을 기다리렵니다
.>
"흐... 크하하하핫......!"
모용초는 미친 듯이 웃으며 손수건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찢겨진 손수건은 바람
을 타고 날아갔다. 그는 한동안 광소를 터뜨리다가 털썩 주저앉아 술병을 다시 기울
였다. 술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술병을 냅다 집어던진 후 소매 속에서 옥피리를 꺼냈다. 은은한 청남빛을 발하
는 옥피리는 한 눈에 보아도 진품(珍品)으로 보였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피리를 내
려보았다.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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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충혈된 눈빛이 흔들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한 미녀의 영상이 떠올랐
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이십 년도 넘은... 아득한 과거로 그의 기억이 역해
해 갔다.
'취영(翠影).......'
......초랑(焦郞), 취영은 행복해요. 왜냐고요? 당신이 제 곁에 있으니까요.
......올해 안으로 아버님께 말씀드려 당신과 혼인하겠어요. 저는 당신같이 늠름하
고 잘생긴... 아들을 빨리 낳고 싶거든요.
......취영은 정말 행복하답니다. 초랑, 날 안아줘요. 취영이 느끼고 있는 이 행복
과 함께 꼭 안아줘요.......
모용초는 망연히 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눈은 허공을 덧없이 헤매고 있었다.
'나의 파랑새는 이십여 년 전 증오만을 쪼아먹고는 다시는 못 올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악몽 같은 그날의 일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날 취영은 술에 취해 있었고... 아름답던 눈에는 절망과 광기(狂氣)만이 어려 있
었지.'
......아버님을 만날 필요 없어요. 이제 당신과 나의 모든 것은 끝났으니까요.
......묻지 말아요.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요. 호호호홋... 내가 미쳤다고요? 그
래요, 미쳤어요. 호호호호홋......!
모용초는 피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 날 분명 취영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하늘에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모용초의 눈도 노을빛이 물들어갔다. 그러나 초점은
맺혀지지 않았다. 아득한 과거로 그의 의식이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초랑, 어서 와요. 이 사람들 가지고는 모자라요. 당신도 옷을 벗고
침상 위로 와요. 초랑, 어서요. 호호호.......
삐이이이익!
모용초는 피리를 입에 대고 힘껏 불었다.
피리음은 한동안 일정한 곡조도 없이 날카롭게 울리다가 구슬픈 가락으로 변해갔다.
모용초의 눈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는 피리음을 들을 수 없었다
. 그의 귓전에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후취영(侯翠影)의 음성만이 메
아리를 울리며 파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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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랑, 기억해요. 나는 이제부터 염취영(焰翠影)이 아니에요. 후취영이라고요.
내 성은 염씨가 아니에요. 또한 염무는 나의 부친이 아니에요. 호호호홋! 저주해
요! 세상 모든 것을... 아니, 하늘까지도 저주해요. 내 몸이 지옥의 겁화(劫火)에
소멸되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을 저주! 저주해요! 호호호호홋......!
삘릴리리... 삘리리리리.......
피리소리는 점점 처절하게 이어지고 황혼은 더욱 짙어졌다.
하늘은 이제 흑갈색으로 물들었다. 한 그루 고목나무 아래 기댄 무정도 모용초의 얼
굴은 마치 조각처럼 굳어져 있었다.
"대주(隊主), 왜 돌아가십니까? 지금이야말로 저 놈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
까?"
조충은 도무지 원계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계묵은 고개를 저었다.
"저 자는 분명 모용초다. 하지만 그 옛날의 무정도(無情刀)는 아니다."
원계묵은 고목나무 아래서 피리를 불고 있는 모용초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저 자를 지금 제거해 보았자 내 칼만 더러워질 뿐이다. 가자."
원계묵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조충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
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계묵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용초, 너에게도 사연이 있느냐?'
그는 고목나무 아래서 피를 불고 있는 모용초를 보는 순간 그의 내심이 고통으로 가
득 차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다.
'너는 내 원수다. 다시는 내 눈앞에 그런 모습을 보이지 말아라. 왜냐면 너는 원수
기 전에 영원한 도(刀)의 숙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네가 아니라 무정도 모용
초와 겨루고 싶은 것이다.'
원계묵은 암울해진 하늘을 응시했다.
암천에 비친 그의 얼굴은 마치 천 년을 버티고 있는 거대한 암벽처럼 보였다. 이 세
상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대륙을 남과 북으로 가르는 대운하(大運河)를 가로지르는 수상여행은 근 이십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장천린은 처음부터 육로보다는 수로를 택했으며 그의 목적지는 북
경이었다.
그는 북경에서 삽십여 리쯤 떨어진 곳에서 배에서 내렸다. 그곳은 남원(南苑)이란
곳이었다.
삼인은 말을 타고 북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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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이 앞장서고 사문도와 천사예가 그의 뒤를 따랐다. 천사예는 행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있었다. 백색의 단삼을 입고 머리는 질끈 동여매어 깨끗하고
쾌활한 미소년처럼 보였다.
천사예는 지난 이십여 일 동안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장천린의 곁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그녀는 행복의 극치를 느꼈다. 물론 감히 그에게 말을 건넬 엄두도 내지 못
했지만.
장천린은 그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사문도 역시 말이 없는 사람이라 세 사람
사이에는 별 대화가 없었다.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일행은 계속 침묵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멀리 높은 준령이 보였다. 사문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한수령(寒水嶺)을 넘으면 북경이 보일 것입니다."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문도는 참았던 질문을 던
졌다.
"형님, 운하로 갔으면 벌써 북경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이 더운 날씨에 도중에서 내
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로여행이 몸은 편해도 움직이는 데는 불편하네."
사문도는 어리둥절했다.
'움직이는데 불편하다고?'
그는 장천린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깊은 뜻이 들어있는 것 같기는 했으
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한수령을 오르는 동안에 해는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갔다.
폭염(暴炎)이었다. 살인적 더위로 수목은 잎과 가지를 축 늘어뜨렸고, 달아오른 대
지로부터 지열(地熱)이 후끈거리며 피어올랐다. 그로 인해 말들도 기진맥진하여 혀
를 길게 뺐다.
한수령의 중턱에 오르자 주점(酒店)이 나타났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에서 잠시 쉬고 가세."
사문도는 물론 천사예까지도 그 말에 얼굴을 활짝 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던
것이다.
주점은 그 규모가 보잘 것이 없었다. 손바닥만한 실내가 있었으나 차일을 쳐서 그늘
막을 만들어 놓고 더위를 피하기 위해 찾아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이미 십여 명
의 손님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장천린 일행이 들어서자 점소이가 달려왔다.
"헤헷... 무척 더운 날씨죠, 무얼 드릴까요?"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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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도가 간단히 말하자 점소이는 잽싸게 사라졌다가 술 주전자를 들고 달려왔다.
사문도는 침을 삼켰다. 그는 본래부터 술을 즐겼으므로 벌써부터 한 잔 생각이 굴뚝
같았던 것이다.
장천린이 먼저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단숨에 술을 들이켠 그는 소매로 입술을 쓱 문
질렀다.
"커! 시원하구나."
문득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십여 명의 손님들이 주변에 짝지어 앉아 술이나 간단한 음식들을 들고 있었다. 사문
도는 그들을 둘러본 후 눈썹을 꿈틀했다.
그에게는 무사 특유의 육감이 발달되어 있었다.
'저들은 지나치게 조용하다. 이 더운 날씨에 힘든 여행을 하다 쉬는 중이라면 마땅
히 웃고 떠들어야 제격이다. 한데 저 자들은.......'
사문도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는 발견한 것이다. 십여 명의 나그네들의 이마에서 한 방울 땀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땀을 흘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곳에 상당한 시간 동안 머물러 있었거나 아니면
내공의 조예가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 아닌가!'
이때 그의 귓전에 장천린의 전음(傳音)이 들려왔다.
'문도, 저들은 서로 떨어져 앉아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사문도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렇다. 이제 보니 모두 왼손을 쓰고 있다.'
십여 명의 나그네들은 모두 왼손잡이인 듯 왼손만을 사용해 술을 들고 있었다. 장천
린은 다시 전음을 전달했다.
'저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육로를 택해 이곳에 온 이유도 바로 저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네.'
사문도는 흠칫했다.
'일부러 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장천린은 고개를 돌려 천사예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천소저, 내가 부탁한 물건은 준비되었소?"
천사예는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대답했다.
"예, 대인. 어떤 것으로 할까요?"
천사예는 장천린과 사문도가 전음지술로 나눈 대화내용을 물론 알지 못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밴 땀을 훔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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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것으로."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나무 아래 묶어놓은 말을 향해 걸어갔다.
말 옆구리에는 검은 천으로 싸인 여러 가지 물건들이 매달려 있었다. 천사예는 그
중 하나를 풀어왔다. 그것은 길이가 석 자 가량 되는 기다란 물건이었다.
사문도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한 느낌이 들
었다. 무기치고는 지나치게 폭이 넓었다. 길이는 다소 짧은 검이나 도에 해당되지만
폭이 무려 한 자나 되었던 것이다.
이때 장천린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문도, 저들에게 시비를 걸어라.'
'알겠습니다.'
사문도는 즉시 몸을 일으켜 나그네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가장 가까운 거리
에 있는 자는 이마에 검은 사마귀가 돋아 있었다.
사문도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봐! 친구, 자네는 왜 기분 나쁘게 사마귀가 이마에 달렸나?"
사내는 안색이 홱 변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흐흐! 난 사마귀가 이마에 달린 놈만 보면 기분이 나빠진다. 당장 떼어버려!"
그야말로 어이없는 시비였다. 남의 이마에 사마귀가 나든 점이 박혀있든 무슨 상관
이냔 말이다. 사내의 눈이 험악하게 부릅떠졌다.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 거요?"
사문도의 입술 꼬리가 묘하게 씰룩였다.
"흐흐! 내가 너에게 시비 걸 신분이냐? 건방진 놈! 당장 사마귀를 떼어버리고 이곳
에서 사라져라!"
사문도는 거칠게 말하며 손바닥으로 사내의 어깨를 쳤다.
그 순간이었다. 사내는 어깨를 낮춰 그의 손바닥을 피함과 동시에 옆구리에서 무언
가를 뽑았다. 촤르륵! 하는 금속성과 함께 가느다란 쇠사슬이 뽑혀져 나왔다.
쐐액!
쇠사슬은 무서운 속도로 사문도의 목을 휘감았다.
"흥!"
사문도는 코웃음치며 가볍게 허리를 틀어 피해냈다. 사내는 벌떡 일어서며 탁자를
걷어찼다. 그것이 신호였다.
휙! 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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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아홉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섬으로써 사문도는 완전히 포
위되고 말았다.
사문도는 히죽 웃으며 빈정거렸다.
"이제야 마각을 드러내는군."
이때 장천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검은 보자기로 감싸진 물건을 들고 걸어가며 말
했다.
"그대들은 분명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는가?"
이마에 사마귀가 박힌 장한이 그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장천린은 빙긋이 웃었다.
"그대들의 정체는?"
"흐흐흐... 그것까지는 알 것 없다. 단지 용백군, 너만 제거하면 우리의 임무는 끝
이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은 이미 자신의 정체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는 검은 보자기를 끌렀다. 그 속에서 나온 것은 괴이하게 생긴 병기였다.
"......?"
사내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자기 속에서 나온 병기는 칼의 일종이었는데 얇
기가 종잇장 같았고 길이는 석 자, 넓이는 무려 한 자나 되었다. 그렇게 생긴 병기
는 사용하기도 몹시 불편해 보였다.
창! 차라라락!
십인의 사내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꺼냈다. 그들이 사용하는 병기는 똑같은 것이었다
오른 손에는 쇠사슬을 감아쥐고 있었으며 왼손에는 소검(小劍)을 움켜쥐었다. 소검
의 끝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삽시에 장내는 살벌하게 변했다. 장천린은 느긋한 표정으로 그들의 무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천소저, 저런 무기를 쓰는 자는 흔치 않은 것 같은데 누군지 알겠소?"
천사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쇠사슬은 백련정강으로 만든 추혼사련(追魂死連)이란 것이고 저 소검은 쌍두비(
雙頭匕)라 불러요. 저 두 개의 무기는 호북(湖北)의 대철조사(大鐵造社)에서 십 년
전 특별히 주문 받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천사예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추혼사련은 길이가 일 장으로 넓은 공간에서 싸우기에 유리하죠. 그 끝에는 독(毒)
이 발라져 있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한 답니다. 쌍두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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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인의 사내들의 안색이 변했다.
"접근전에 사용하는 것으로 두 갈래로 갈라진 끝에는 미세한 기관장치가 되어 있어
요. 그것은 상대방의 무기를 잡아채는데 그 용도가 숨어 있답니다."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사내들의 안면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도... 도대체 어떻게 우리들의 병기에 대해 저리 자세히 알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사내들의 똑같은 심정이었다. 이때 사문도가 차가운 음소를 흘렸다.
"후후... 놀라는 꼴이 마치 도살당하기 직전의 돼지 눈알 같구나."
십인의 안면은 여전히 철갑처럼 굳어 있기만 했다. 그들은 철저히 숙련된 살인 전문
가들이었다. 결코 흥분으로 인해 기(氣)를 흐트러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대치는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한 순간 청천(靑天)을 가르는 섬광처럼 무서운 파공성이 적막을 깨뜨렸다.
츠파아앗!
십인의 공세가 일제히 시작되었다.
한 마디의 말도, 기합성도 없었다. 열 자루의 쇠사슬이 동시에 뻗어나와 순식간에
하늘은 쇠사슬 그물로 메워지고 말았다.
사문도는 냉소하며 즉시 양손을 뻗었다. 천사예가 황급히 주의를 주었다.
"아... 안됩니다! 추혼사련에 그런 식으로 하시면......."
그녀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린 것이다. 천사예는 눈을 크게 떴다.
촤아악!
허공에 피보라가 뿌려지고 있었다. 사내들 중 한 명이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지고 있
었다. 그 자의 앞에서 사문도는 추혼사련의 끝을 움켜쥐고 있었다.
"흐흐! 쇠사슬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
윙!
사문도의 손에서 추혼사련이 매섭게 뻗어나갔다.
"끄아아악!"
두 마디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사내 두 명이 거꾸러졌다. 그들의 목은 칼로 자른 듯
깨끗이 떨어져 나가 버렸다.
한편, 장천린은 괴병을 잡은 채 오인의 사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내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떠올라 있었다. 삽시에 동료 삼인이 죽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147 바로북 99
장천린은 수중의 괴도를 든 채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태양을 향해 마주섰다. 오인
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미친 놈! 태양을 마주보고 싸우려 들다니.'
그들은 장천린을 향해 다가가며 공격을 가하려 했다. 한데 그때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장천린이 괴도를 들어올리자 한 자나 되는 넓은 도신(刀身)으로부터 에서 갑자기 눈
부신 광채가 폭죽처럼 반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헉......!"
막 달려들던 오인은 순간적으로 주춤거렸다. 반사된 태양 빛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시력이 무력화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쐐액!
예리한 파공성이 귓전으로 울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크아악!"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더욱 더 파란만장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삶이 소멸되는 순간은 너무나 간단했
다.
단 일초(一招)에 오인의 목이 몸체로부터 분리되어 날아갔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 오인을 동시에 이승으로 데려가 버린 것이다.
'세... 세상에.......'
천사예는 그만 손으로 입을 가려버렸다.
물론 그녀는 장천린이 괴도를 특별히 주문했을 때 그 용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절묘하게 병기의 특징을 이용하여 오인의 적을 깨끗이 해치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끄으으......."
마지막 한 명의 생존자는 목젖을 끄르륵거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사문도에 의해
사인이 제거되고 마지막 남아있는 작자였다.
그 자의 목에는 추혼사련이 감긴 채 가벼운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툭
튀어나온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때 장천린이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조화성에서 보냈느냐?"
"......."
그 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기력을 이미 상실한 듯했다.
두두두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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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두 필의 말이 달려오
더니 마상으로부터 두 명이 뛰어내렸다. 그들은 바로 위천조와 뇌찰격으로 낭인조에
속한 무사들이었다.
두 사람은 장천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대인, 한수령 주위에 매복하고 있던 쥐새끼들은 모두 제거됐습니다. 칠십 마리나
되었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추혼사련에 목이 감겨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가 너희들을 지시했느냐?"
사내는 사색이 된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사문도의 입에서 냉혹한 외침이 터져 나왔
다.
"대답하지 않으면 네놈의 껍질을 몽땅 벗겨 주마!"
"큭!"
사내는 허리를 꺾었다. 사문도의 발이 그의 복부를 걷어찬 것이다. 사내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제... 이신마전(二神魔殿)... 그 밖에는... 맹세코... 모른다."
사나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장천린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분명 백소저의 전서구를 가로챈 여인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
들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것 같구나.'
그는 눈짓을 했다.
사문도의 손이 슬쩍 움직임과 동시에 사내의 목이 깨끗이 절단되어 떨어졌다. 사문
도는 추혼사련을 던져버렸다. 아무리 특수한 병장기라도 그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
름없는 듯했다.
장천린은 괴도를 천사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출발하자."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그들이 한수령을 넘어가는 동안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피비린내 나는 일막의 살인
극이 막을 내린 것이다.
인간은 내일을 바라보며 산다.
하지만 아무도 내일을 예측하지 못한다. 방금 헤어진 사람과 내일 다시 만나기를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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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하지만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그만큼 인생사에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 자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적(敵)은 무엇일까?
죽음.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장천린은 마침내 북경에 도착했다.
그는 즉시 태진궁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그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처음 그가 본 것은 상복을 입은 관인(官人)들이었다. 그들의 옷차림을 보는 순간 가
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 기어이......?'
그는 대문을 지키는 군졸에게 명패를 보여준 후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태진왕부는
온통 침통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백연연은 상복을 입고 사륜거(四輪車)에 앉은 채 장천린을 맞이했다.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장천린이 들어서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
정이었으나 간신히 눌러 참으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어제 아침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장천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천붕(天崩)의 슬픔으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
내지는 않았다. 겉으로 슬퍼한다고 하여 그 슬픔이 지극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말없이 백연연을 바라보았다.
백연연은 특이한 여인이었다. 비록 눈이 부어있고 안색도 좋지 않았으나 그녀의 자
세는 의연했으며 태도 또한 차분하기만 했다. 도리어 그녀의 이런 침착한 모습은 섬
뜩한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용대인이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
장천린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비록 중병이시긴 하지만 그리 쉽게 쓰러지실 분은 아니었소. 아직도 최
소한 일이 년은 더 버티실 수 있었소. 백소저, 어째서 전하께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운명하신 것이오?"
그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찌르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백연연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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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이십여 일 전이었어요. 전하께서는 제가 만든 연자탕(蓮子湯)을 맛있
게 드셨지요. 한데... 그날 저녁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장천린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연자탕 속에 이물질이 들어 있는지 사전에 조사해 보았소?"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에 화를 내거나 안색이 변하기라도 할 것이다. 그러나 백
연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연자탕은 제가 손수 만든 것으로 먼저 소녀가 맛본 후에
올렸으니까요."
장천린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태진왕이 누군가?
대명조의 마지막 기둥이었다. 쓰러져 가는 명조의 국운을 한 몸에 걸머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대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쉽게 쓰러지다니...
....
장천린은 암담해지는 기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때 백연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의 백충량(白忠亮)의 말에 의하면 전하가 숨지신 원인은 뇌종양(腦腫瘍)의 악화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기혈이 거꾸로 흘러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그대로 굳어
버리는 바람에 운명하셨다고......."
장천린은 문득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전하의 사인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소. 내가 다시 한 번 조사해 보겠소."
백연연은 고개를 저었다.
"안되옵니다."
"안된다고?"
"전하의 존체(尊體)는 이미 입관되었습니다. 게다가 금의위의 고수들이 태진궁에 거
미줄처럼 깔려있습니다. 금의위의 대영반 엽천우 대인께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
여 비상대권을 발동하였습니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비상대권이라니?"
"전하께서는 평소 청렴강직한 성품 탓으로 자금성 내에 반대파가 많았어요. 전하의
갑작스런 운명으로 인해 어떤 사태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어떤 사태라니?"
장천린은 의혹을 느꼈다.
"어쩌면... 반대파가 태진궁에 쳐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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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무엇 때문에... 아니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백연연은 탄식했다.
"평소에 전하께서는 금의위와 동창의 조직을 움직여 황실 내의 부패와 관부의 비리
들을 조사하셨어요. 물론 황실의 기강을 바로잡고 명조를 정토 위에 세우려는 큰 뜻
이었지요."
"......."
"전하께서는 조사한 바와 증거물들을 상세히 기록해 두셨어요. 그로 인해 자금성의
고관들은 물론 황족들까지 늘 좌불안석이었지요."
백연연의 말은 차분하게 이어졌다.
"그 때문에 전하께서 금의위와 동창, 병권(兵權)을 마음대로 움직이셔도 그들은 자
신들의 약점 때문에 묵인해 왔던 거예요. 그러나......."
장천린은 대충 이번 사건의 윤곽이 잡혀가는 것을 느꼈다.
"전하께서 서거하신 이상 사정은 달아지게 됐어요. 누구든지 그 기록을 빼내어 자신
에 관한 부분을 삭제한 뒤에는 거꾸로 상대의 약점을 거머쥘 수 있게 된 거예요. 그
렇게 되면 황실의 대권을 장악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되는 것이죠."
장천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힘들었다.
"그 서류는 지금 어디 있소?"
백연연은 고개를 저었다.
"서류가 비장된 곳의 위치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전하 한 분만이 아시고 계셨지
요. 그렇기에 엽천우 대인은 그 서류를 찾는 일은 물론 외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
해 태진궁을 철통같이 에워싼 것입니다."
"으음."
"이미 태진궁 안에는 금의위와 동창의 고수 오백여 명이 집결하여 천라지망이 펼쳐
져 있습니다."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나는 전하와 친분이 있소. 그 분의 유체를 볼 수는 있지 않소?"
"엽천우 대인은 결코 승낙하지 않을 거예요. 이미 병권은 엽대인의 수중에 들어갔어
요. 황제폐하를 제외하고는 현재로써 그 누구도 엽대인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백연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젯밤 전하의 형님이신 정왕(整王)께서도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장천린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생각대로라면 황실이든 관부든 상관없이 태진왕의 사인을 명명백백하게 밝힌 후 통
렬하게 복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끼여들 여지조차 주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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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흑......!"
백연연은 마침내 참고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
그녀는 역시 일개 약한 여인이었다. 비록 초인적인 의지로 그 동안 슬픔을 억제해왔
으나 마침내 의지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흐흑... 평생을 국운만을 걱정하며 고독하게 사신 어른이거늘... 흐흑......."
장천린은 내심 탄식했다.
'이 여인은... 전하를 무척이나 사랑했었구나.'
그는 숨죽여 오열하는 백연연을 연민의 눈으로 응시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안타까운 것은 당금 세상에서 과연 그 누가 이 여인보다 더 전하의 운명을 슬퍼하
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전하야말로 위대한 성군(聖君)이 되실 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분의 죽음으로 간
신배와 모리배들이 득세하게 되었으니.......'
그는 몸을 일으켜 백연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잡았다.
"백소저, 마음을 굳게 가지시오."
"흑!"
마침내 여심(女心)은 자제력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백연연은 장천린의 가슴
에 얼굴을 묻은 채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장천린은 그녀의 눈물로 가슴이 젖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아... 가련한 여인이다.'
그의 눈은 허탈하게 열린 채 허공을 더듬었다.
금의위 대영반 엽천우의 표정은 냉엄했다.
그의 뒤에는 금의위 고수 십여 명이 열을 맞추어 서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장천
린과 사문도가 서있었다.
장천린은 정중히 포권한 후 입을 열었다.
"엽대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만은 전하의 유체를 뵐 자격이 있지 않겠소?"
엽천우는 안색을 차갑게 굳히며 잘라 말했다.
"한 마디만 하겠소. 황제폐하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럴 자격이 없소!"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대체 이유가 무엇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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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천우는 요지부동이었다.
"전하의 운명으로 인해 황실의 장래가 암담해졌을 뿐더러 장차 국운이 어찌 돌아갈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소. 물
론 용대인도 예외는 아니오."
장천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어쩌시겠다는 것이오?"
"모든 사건은 금의위에서 처리할 것이오. 만에 하나 이 일에 반하는 자가 있다면 신
분여하를 막론하고 처단할 것이오."
장천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속에는 본인도 포함되어 있소?"
"물론이오. 용대인과 전하의 친분은 익히 알고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예외는 아니
오."
장천린은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의 옆에 있던 사문도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는 엽천우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금의위 대영반님의 말씀은 상당히 지나치시군요."
엽천우는 힐끗 사문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찌르는 듯한 눈으로 사문도의 아래위를
훑어본 뒤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그 유명한 구룡(九龍)의 생사집혼(生死執魂) 사문도인가?"
"후훗... 그렇소."
"위명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네. 하나 명심하게. 아무리 무림고수일지라도 이곳에서
함부로 날뛰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끊어진다는 것을 말이야."
"......!"
사문도의 눈이 무서운 살기를 뿜었다.
그는 세상에서 장천린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라도 참는 성질이 아니다. 그의 사나운
눈빛은 당장이라도 살수를 뻗을 것만 같았다.
장천린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엽대인,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오."
엽천우는 나직이 웃더니 비감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제가 상잔(相殘)하고 부자가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것이 이곳 황실의 실정이오.
용대인, 전하가 살아 생전 그 얼마나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셨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혈육조차도 믿지 않는 이곳에서 어찌 나보고 용대인을 믿으란 말이오?"
장천린은 그만 침중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황실의 부패는 극을 치닫고 있었으며, 권력을 둘러싼 암투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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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 못할 정도로 깊어지고 있었다. 장천린은 반박할 말을 잃었다. 결국 그는 두 손
을 모아 포권했다.
"알겠소. 엽대인의 충고에 감사드리오."
그는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용대인."
갑작스런 엽천우의 부름에 장천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내 감히 충고 한 마디만 더 하겠소.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태진궁 내에서 당신
의 실수로 인해 벌어지는 일은 어떠한 일이라도 책임질 수 없소. 스스로의 목숨은
스스로가 알아서 보중하기 바라오."
장천린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명심... 하오리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대전을 빠져 나왔다. 사문도는 분을 참느라 거칠어진 숨결을 억
지로 삭이고 있었다.
장천린은 대전을 빠져나와 화원이 보이는 회랑을 걸어가며 자못 비감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전하! 당신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기에 돌아가셔도 유체조차 뵈올 수 없단 말이오
?'
장천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전하.......'
그의 뇌리에 살아 생전의 태진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태진왕의 음성이 귓전
에 역력히 들려오는 듯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백군, 내가 이 하늘 아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심지어는 피를 나눈 형제
들조차 믿지 못하네. 다만 자네와 엽대인 만은 믿네.
......엽대인은 사문(師門)의 대사형이라 사부나 다름없는 분이네. 그리고 자네는
내게 있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라네.
장천린은 화원의 도화가 유난히 짙은 향기를 풍기는 것을 느끼며 다시 상념에 젖어
들었다.
'엽대인은 신비에 싸여있는 남해신궁(南海神宮)의 제 십삼대 궁주로 본래의 이름은
축조망(竺祖望)이다. 그는 무공과 지혜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인물로 전하께
서 황실의 정리를 위해 끌어들인 사람이며 조화신궁의 궁주 염무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라고 했다.'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이십만 황군을 새로 양병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전하께서 점찍어 놓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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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다.'
장천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어떤 인간이든 권력이란 마력(魔力)의 지팡이를 쥐어주게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지팡이를 휘둘러보고 싶어한다. 엽천우... 전하는 어쩌면 그에게 지나치게 큰 기
대와 권력을 함께 얹어주신 게 아닐까......?'
장천린의 가슴은 무거워졌다. 그의 뒤에는 사문도가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
태진왕부는 태고(太古)와도 같은 무거운 정적에 싸여 있었다. 왕부의 곳곳에는 찌르
는 듯한 살기가 느껴졌으며, 보보(步步)마다 감시와 매복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엽천우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가 왕부에서 멋대로 행동하려 한다면 즉각 수많은 고수들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고 그 자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이다.
엽천우는 금의위의 대영반이었으며 동창을 비롯하여 황실의 병권까지 장악하고 있
었다. 따라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어떤 일이든 해낼 수가 있었다.
장천린은 일단 자중(自重)하기로 했다.
'참자, 지금 참는 것은 후일의 일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전하의 죽음에는 분명 무서
운 음모가 깔려 있다.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 그것은 서둔다고 되는 일은 아니
다.......'
그 날부터 장천린은 그에게 배정된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