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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차도살인(借刀殺人) (55/87)

제3장 차도살인(借刀殺人) 

석실 안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온통 경악에 찬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금의위에 속해 있는 자들로 하나같이 일급고수들이었다. 

안쪽에는 단(壇)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 황금빛의 관(棺)이 놓여 있었다. 관 

앞에 태진왕의 위패가 보였다. 

위패 앞에는 한 노인이 무릎 꿇고 있다 막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금의위의 대 

영반 엽천우였다. 

엽천우의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눈 아래는 까칠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피곤과 

슬픔에 젖어 무척이나 초췌해 보였다. 그는 시선을 장천린에게 향하더니 분노에 찬 

음성을 발했다.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군. 용대인!" 

장천린은 그의 반응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러나 곧 치미는 분노에 앞으로 성큼 나 

서며 냉엄하게 말했다. 

"본인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 것이오, 엽대인." 

놀랍게도 엽천우의 안색은 금세 물처럼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전하의 유체를 기어코 조사하겠다는 것이오?" 

장천린은 조소를 흘렸다. 

"시치미 떼지 마시오. 해우선사를 시해하고 전하가 남긴 서류를 훔쳤으면서도 발뺌 

을 하다니... 정말 가증스럽소. 엽천우 대인." 

엽천우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요? 해우선사를 죽이다니?" 

그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장천린의 분노는 더해졌다. 

"내 그대의 가면을 벗겨주리라!" 

차갑게 말을 자른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멈추시오!" 

휙휙! 

금의위 고수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장천린의 앞을 막았다. 장천린의 얼굴에 살얼 

음 같은 살기가 덮였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문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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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엽대인과의 싸움에 그 누구도 끼여들게 하지 말라." 

그의 음성은 너무도 차가워 사문도조차 가슴이 섬뜩할 정도였다. 

"형님, 차라리 소제에게 맡겨......." 

"문도!" 

장천린의 단호한 음성이 사문도의 입을 얼어붙게 했다. 사문도는 장천린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알았습니다. 형님." 

그는 신형을 날려 금의위의 고수들을 막은 후 등뒤의 일월쌍극(日月雙戟)을 뽑았다. 

"누구든지 움직이기만 하면 생명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살기 띤 그의 음성에 금의위는 한결같이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들도 고수였다. 

더구나 국록(國祿)을 받는 관인들이었다. 

"어림없는 소리!" 

"감히... 황실에 반역할 셈이냐?" 

차차창! 

예리한 병장기들이 뽑혀지며 금속성을 울렸다. 그들은 즉각 사문도를 공격하기 시작 

했다. 

사문도의 짙은 눈썹이 꿈틀 치켜 올라갔다. 

"이미 경고했다!" 

위이... 잉! 

말과 함께 일월쌍극이 교차하며 번갯불을 토해냈다. 단 한 번의 동작에 자욱한 피보 

라가 일어났다. 

전면의 두 명의 인물이 병기와 팔뚝이 그대로 잘려나가며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그 

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무리 담대한 금의 

위라 해도 공포심에 뒤로 비실비실 물러나고 말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엽천우의 안색이 가볍게 굳어졌다. 

한편 장천린은 엽천우와 마주선 채 냉랭하게 말했다. 

"무기를 뽑으시오. 엽대인." 

엽천우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용대인, 그대는 지금 뭔가를 오해하고 있소." 

"오해?" 

장천린은 조소를 흘렸다. 

"후후! 전하께서 그대 같은 사람을 믿었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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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천우의 눈이 가늘어지며 번갯불 같은 광망이 솟아 나왔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군, 용대인!" 

"말보다는 힘이 먼저겠지." 

장천린은 차갑게 내뱉으며 일장을 뻗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가공할 암경이 실린 장력이 엽천우의 가슴을 향해 뻗어나갔 

다. 엽천우의 입술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뻗으며 냉갈을 터 

뜨렸다. 

"경솔하시오, 대인!" 

펑!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치자 가죽북 터지는 듯한 소음이 일어났다. 

'읏!' 

장천린은 막강한 여파에 충격을 받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엽천우 역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장천린은 내심 경각심을 돋우었다. 

'과연 해우선사가 당할 만하다. 이 자는 해우선사보다 월등하구나.'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과연 보통이 아니군. 엽대인." 

그는 내공을 배가시켜 끌어올렸다. 한편 엽천우는 마음을 가라앉힌 듯 차분한 시선 

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대인, 그대는 상인이지 무림인이 아니오. 결코 노부의 적수가 아니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장천린은 차갑게 말을 끊으며 양손을 교차시켰다. 교차한 쌍수가 각각 한 개씩의 원 

을 그리더니 벼락같이 뻗었다. 쌍극마공(雙極魔功)을 펼친 것이다. 

엽천우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황급히 손을 뻗어 맞받아 쳤다. 

펑! 

고막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엽천우는 휘청거리며 네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반면 장 

천린은 다섯 걸음을 주르륵 밀려났다. 

엽천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무공은 마교의 쌍극마공(雙極魔功)인가?" 

장천린은 차갑게 대꾸했다. 

"과연 남해신궁(南海神宮)의 궁주답군." 

그는 눈을 가늘게 한 채 쌍극마공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그러자 괴이한 현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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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다. 왼손은 붉은 빛을 띠었으며, 오른손은 선명한 청색으로 물든 것이다. 

엽천우의 안면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는 뒤로 삼 보 물러서며 말했다. 

"용대인,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노부를 원망 마시오." 

그는 소매를 한 차례 휘둘렀다. 

우웅....... 

괴음과 함께 그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한편 중인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금위위는 이미 한쪽으 

로 물어나 있었고, 사문도도 잔뜩 긴장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여차하 

면 뛰어들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부금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사문도에게 말했다. 

"엽천우 대인의 무공은 불도유(佛道儒)의 백도삼대기공(白道三大奇功) 중 하나인 유 

문(儒門)의 옥로진기(玉露眞氣)입니다." 

그는 경직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 무공이 일단 시전되면 어떤 물체라도 스치기만 해도 이슬방울처럼 분쇄되고 맙 

니다." 

사문도의 안색이 굳어졌다. 

'백도삼대기공이라고?' 

그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엽천우를 주시했다. 그의 뇌리 속으로 과거 사부가 들려준 

말이 생생히 떠오른 것이다. 

......문도야. 네 무공은 감히 마도제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마도에서 너의 적 

수는 염무(焰武) 외에는 없다. 다만 백도에서 네 적수를 찾는다면 불도유의 삼대기 

공을 익힌 자라 할 수 있다. 불문(佛門)은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이요, 도문(道門) 

은 자하천강(紫霞天 ), 유문(儒門)은 옥로진기(玉露眞氣)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 

삼대기공 중 하나라도 익힌 자를 만나게 되면 조심해야 한다. 

부금진의 초조한 음성이 들렸다. 

"쌍극마공이 마도의 으뜸가는 절학이라지만... 옥로진기 못지 않습니다. 저 두 분이 

격돌한다면 승부는 결국 내공수위로 결정될 것입니다." 

사문도는 무거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주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장천린은 전신에 팽팽한 압력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의 장포가 바람 

을 안은 듯 부풀어오름에 따라 주변의 공기가 압축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위기감을 느낄 때마다 냉정한 이성으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면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순간 그는 전신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지백혈에 힘이 넘치고 백팔경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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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가공할 마공의 기운이 빠르게 일주천(一週天)했다. 

장천린이 시전한 것은 천 이백 년 전 마도의 이단아 목혈청이 창안한 경세지학이었 

다. 그는 쌍극마공의 위력을 믿었다. 

한편, 부금진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사문도를 향해 말했다. 

"말려야 합니다. 이 싸움은 뻔합니다. 누가 이기던 간에 두 분은 모두 살아남지 못 

할 것입니다." 

사문도는 안색을 굳힌 채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말릴 수 없네." 

부금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형님!" 

"내가 말린다면 형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네." 

사문도는 간단히 말한 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부금진은 다급히 단위제를 돌아다보 

았다. 단위제는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단도독님!" 

단위제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그는 부금진이 다시 부르려는 순간 번 

쩍 눈을 뜨더니, 사문도를 향해 말했다. 

"문도, 엽대인은 무고하다. 고로 이 싸움은 말려야 한다. 해우선사는 엽대인이 죽이 

지 않았다." 

사문도의 안색이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단위제는 주머니에서 푸른빛 실오라기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것은 해우선사의 방에 있던 것이다. 자세히 보아라. 푸른색이다. 절간에서 청색 

옷을 입는 승려는 없으니 이것은 해우선사를 해한 자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음성은 차분했다. 

"엽대인은 며칠째 계속 상복(喪服)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 이 푸른색 실오라기는 그 

의 것일 리가 없다." 

사문도와 부금진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경청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엽대인은 지금까지 태진궁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해우 

선사가 죽은 것은 어제 저녁 무렵으로, 당시 나는 태진궁에 있었고 때마침 화원에서 

엽대인이 백소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단위제는 정색하며 사문도에게 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우선사의 몸에 난 상처다. 그 상처는 급소에 있어 치명적 

인 상해를 입혔다. 그런 상처를 입은 채로 엽(葉)이란 글자를 죽기 전에 남길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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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생각하나?" 

사문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안면은 점차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더욱이 글씨가 너무 깨끗했다. 그 정도 글씨를 남길 기력이라면 범인의 이름을 다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남해신궁에는 연검을 사용하는 무공이 없다." 

사문도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우르르릉!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중인들의 고막을 울렸다. 사문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썹이 부르르 진동했다. 

장천린의 쌍장에서는 붉고 푸른 두 가지 상반된 기류가 맹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뻗어나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장내는 두 가지 색의 기류로 뒤덮였다. 

반면 엽천우도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듯 놀라운 신위(神威)를 드러내고 있었다. 

우우우웅! 

찢어질 듯 펄럭이는 장포 주위로 엄청난 회오리가 일어나며 사위를 가공할 압력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급기야 두 사람의 내공이 굉음을 내며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부금진이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사형님! 건원(乾元) 방위를 차단하십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합과 함께 사문도의 양손이 섬전처럼 뻗었다. 

"타!" 

순간 그의 양손에 감겨있던 검은 천이 산산조각 나며 날아갔다. 이어 실핏줄까지 환 

히 드러나 보이는 투명한 옥수(玉手)가 나타났다. 그 손은 너무나 희고 깨끗하여 여 

인의 섬섬옥수를 방불케 했다. 

옥수가 환영처럼 허공을 가른 순간. 

파파파파팍! 

번갯불 같은 섬광이 폭사되며 눈이 멀 듯한 불꽃이 뻗어나갔다. 불꽃은 장천린과 엽 

천우의 사이, 즉 건원 방위를 차단했다. 

콰콰콰쾅! 

장내가 무너질 듯한 진동과 굉음이 울렸다. 마치 만균뇌정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 

다. 삼인의 내공이 동시에 격돌한 것이다. 

화려한 침전(寢殿). 

실내는 온통 현란한 광채를 발산하는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윽한 

방향(芳香)이 감돌고 있었다.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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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손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이 가지처럼 지금쯤 엽천우는 죽었을 것이오." 

축축한 안개처럼 감겨드는 음성의 주인은 담자개였다. 그는 창가에 서있었다. 그의 

뒤편으로 넓은 침상이 보였다. 침상 위에는 속이 은은히 비쳐 보이는 망사의만 걸친 

소귀비가 요염한 자태로 누워있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 유려한 몸매... 망사의를 금방이라도 뚫 

고 나올 듯이 풍만한 젖가슴은 숨을 쉴 때마다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세의 

우물(尤物) 다운 모습이었다. 

소귀비는 교태로운 눈빛으로 담자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담하시나요?" 

담자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천우의 무공은 강하오. 하나 사문도와 용백군 두 사람의 합공은 당하지 못할 것 

이오." 

문득 그는 만족스러운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이로써 황궁의 가장 큰 눈엣가시는 제거된 셈이오." 

소귀비는 가지런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극히 단순한 하나의 동작 

에서도 요기(妖氣)가 흘러 넘치는 듯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턱을 고이며 교소를 

발했다. 

"후후... 늘 느끼는 거지만 당신은 정말 교활해요, 담랑." 

"교활?" 

담자개는 무기력한 눈으로 소귀비의 미려한 동체를 쓸어보며 말했다. 

"휘경, 그 말은 내게 있어 모욕이오. 나는 교활한 것을 싫어하오. 현명하다면 모르 

지만." 

소귀비는 슬쩍 한쪽 다리를 세웠다. 엷은 망사 사이로 그녀의 은밀한 부위가 은은한 

그늘을 이루었다. 사나이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인 자태였다. 그러나 담 

자개의 음성은 여전히 건조하기만 했다. 

"더우기 나는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는 절대 교활하지 않소." 

이때였다. 문 밖으로부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종사께 아룁니다." 

"뭐냐?" 

담자개는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방금 전 백충량이 금의위에 의해 잡혀갔습니다." 

담자개의 눈빛이 응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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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냐?" 

"엽천우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럴 리가......!" 

탈 속에 숨어있던 무기력한 눈동자가 일순 기괴하게 굳어졌다. 

장방형의 석실은 지하에 있었다. 

사면이 밀폐된 곳이라 음습하고 침침한 느낌을 준다. 그나마 천장에 박혀있는 야명 

주에서 희미한 빛이 뿌려지지 않았다면 더욱 음산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석실 안쪽에는 마의(麻衣)를 입은 노인이 기둥에 묶여 있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듯 얼굴은 해쓱하게 핏기가 사라졌으며 여기 저기 푸른 멍 

이 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까칠하게 마른 입가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누군가? 

바로 어의(御醫) 백충량이었다. 

그의 앞에는 장천린과 엽천우, 단위제가 우뚝 서있었다. 단위제는 관복으로 깨끗하 

게 갈아입고 있었다. 

엽천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백충량, 이제 네 마음속에 있는 말을 토해낼 때가 되지 않았느냐?" 

백충량은 고통스런 표정이었다. 모진 고문을 견뎌내기에 그의 육체나 정신력 모두가 

부족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 그를 지탱케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엽대인... 노부가 모든 것을 말씀드린다면... 내 딸아이의 생명을 보장해 주실 수 

있소?" 

마침내 그의 입이 열린 것이다. 엽천우의 눈썹이 곤두섰다. 

"백충량! 네 딸의 목숨이 가까운 것은 알면서 어찌 대명황실의 존망은 도외시한단 

말이냐?" 

백충량은 허허로운 눈빛으로 엽천우를 향해 말했다. 

"그 아이는 어미 없이 자란 불쌍한 놈입니다. 대인... 눈멀고 말까지 못하는 그 아 

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어버이가 자식을 염려하는 것은 인륜(人倫)이다. 백충량의 늙은 눈 속에서 간절한 

빛이 흘러나왔다. 

"노부...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소이다. 하나 그 아이만큼은......."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심금을 울릴 정도로 애절한 느낌이었다. 

그그긍......! 

돌과 돌이 마찰되는 듯한 소음이 울리며 석실 한쪽 벽이 열렸다. 그곳으로부터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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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물이 들어왔다. 그들은 부금진을 위시하여 사문도, 그리고 금의위의 인물들이 

었다. 

장천린은 부금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의 유체를 살펴보았느냐?" 

"예." 

"결론은?" 

부금진의 영준한 얼굴에 그늘이 어렸다. 

"일종의 만성(慢性)에 속하는 무형지독(無形之毒)에 당하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종 

류 미상의 흥분제까지 복용하여 피가 역류했습니다." 

백충량의 눈에 경이로운 빛이 떠올랐다. 그는 부금진을 한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힘 

없이 떨구었다. 

엽천우의 냉엄한 눈길이 그에게 향해졌다. 

"백충량, 네 딸의 생명은 내가 책임지겠다." 

"가... 감사하오이다." 

백충량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엽천우는 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심문하듯 물었다.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한다. 배후자는 누구냐?" 

백충량은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체념한 듯 말했다. 

"태진왕 전하의 생모이신 서태비 마마십니다." 

"그... 그럴 수가!"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장천린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는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청천벽력!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이마를 손으 

로 짚었다. 이때 엽천우가 노갈을 터뜨렸다. 

"백충량! 네놈이 감히 누구를 모함하는 것이냐?" 

그의 눈은 무섭게 부릅떠져 있었다. 백충량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추호의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소인이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는 눈을 반쯤 감으며 털어놓았다. 

"노부에게 만성독약과 흥분제를 제조하도록 하명하신 분은 틀림없이 서태비 마마십 

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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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부인하고 싶었다. 이때 엽천우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돌아가신 그날 아침... 서태비 마마께서 전하를 뵈러 오신 적이 있었소." 

단위제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말했다. 

"백소저가 손수 만든 음식에 독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태비 마마 뿐이오." 

그는 홱 고개 돌려 엽천우를 향해 내뱉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엽대인도 가짜가 있다는 사실이오." 

그의 말은 다시 한 번 중인들의 가슴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스스스스......! 

바람이 분다. 

황량한 벌판에는 새벽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으나 바람이 불자 이리 저리 

안개가 밀려나갔다. 안개가 걷힌 벌판 한쪽에 사당(祠堂) 한 채가 쓸쓸히 서있는 것 

이 보인다. 

사당은 낡고 황폐하여 금방이라도 와르르 허물어져 내릴 것 같았다. 

인영 하나가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벌판에 나타났다. 얼굴에 괴이한 탈을 쓰고 있 

는 인물, 바로 담자개였다. 

그는 사당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 물었다. 

"누가 십삼사(十三邪)의 특수 표기를 내게 보냈는가?" 

스산한 바람소리만 날 뿐 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담자개는 다시 그 억양 그대 

로 입을 열었다. 

"십삼사의 일원인가?" 

끼... 익! 

사당의 문이 기분 나쁜 소성과 함께 열렸다. 한 가닥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보냈소. 소종사." 

사당 안으로부터 걸어나온 인영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흰 색의 죽립을 썼 

으며 신발에 이르기까지 온통 백색일색인 인물이었다. 

실바람처럼 부드럽고 온유한 인상을 지닌 인물- 그는 왼손에 한 송이의 백장미를 들 

고 있었다. 백장미를 가볍게 흔들자 장미향이 진동했다. 

담자개의 무기력한 눈빛이 흔들렸다. 

"서문형......." 

백의인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이오. 소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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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백의인은 독로장미 서문표였다. 또한 마도십삼사의 일원이기도 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서문표였다. 

"소종사가 북경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흘을 달려왔소." 

봄바람이 귓전을 간질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담자개는 무기력한 음성으로 물었다. 

"삼랑(三狼)에 구목(九目)의 표기는 화급을 요하는 표기거늘... 무슨 일로 표기를 

남겼소?" 

"성주님의 명이오. 최단시일 내에 강북에 있는 십삼사를 소집해 북해로 가라는 명령 

이오." 

담자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무엇 때문이오?" 

서문표는 소매 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건네주었다. 

담자개는 서찰을 받아 펼쳐 보았다. 흰 종이에 쓰여진 섬뜩하도록 붉은 글씨가 눈을 

찔렀다. 

<살인지령(殺人指令). 

집행대상자(執行對象者): 신산 제갈사와 오성단(五星團). 

집행자(執行者): 십삼사(十三邪).>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충격은 컸다. 담자개의 손등에 심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서문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보름 전 제갈사는 오성단을 이끌고 북해 사태청(獅太廳)으로 떠났소." 

담자개는 묵묵히 서찰을 접으며 물었다. 

"성주님은?" 

"제갈사가 북해의 숙야염을 치는 것을 방해하지는 말라 하셨소. 단 제갈사가 돌아오 

는 길목을 차단한 후 몰살하라는 명을 내리셨소." 

담자개는 침묵했다. 한참 후에야 무기력한 음성으로 물었다. 

"떠날 시기는?" 

"지금." 

담자개의 눈빛이 괴이하게 변했다. 

"지금 북경에서... 내가 벌인 일에 약간의 차질이 생겼소. 하루의 여유를 가지고 싶 

소." 

서문표는 고개를 흔들었다. 

"성주님께서는 손을 떼라 하셨소. 태진왕이 제거된 이상 목표는 달성된 것이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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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태진왕을 제거하는데 이용한 모든 것들은 완벽히 소멸하라 하시었소." 

담자개는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탈의 구멍 속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무색(無

色)이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서문표는 정중히 포권했다. 

"그럼 오늘 저녁 이곳에서 기다리겠소." 

"서문형." 

"말씀해 보시오, 소종사." 

담자개는 무심하게 물었다. 

"모용 형님은 지금 어디 계시오?" 

서문표는 멈칫하더니 담담히 말했다. 

"뵙지 못한지 꽤 되었소. 성주께서도 찾고 계시오." 

담자개는 음울한 눈빛으로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려면 아직 네 시진은 더 

있어야 될 것이다. 그는 몸을 돌렸다. 

"네 시진 후 이곳으로 오겠소." 

담자개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한 줄기 바람처럼 그의 모습은 안개 속으로 사라 

졌다. 

그가 떠난 후에도 서문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의 입가에 이해하기 힘든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때 사당 안으로부터 한 가닥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전의 소종사가 아니다. 감정에 무척 흔들리고 있다." 

마치 쇠를 긁는 듯이 듣기 거북한 음성이었다. 곧 사당 안으로부터 몸집이 거대한 

괴인이 걸어나왔다. 

키는 구 척이 넘었으며 흑갈색 피부에 움푹 들어간 눈, 날카로운 매부리 코, 선이 

분명치 않은 입술은 약간 뒤집어져 있었으며 무성한 구레나룻 수염을 턱 아래까지 

기르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육순 정도 되어 보였다. 

괴노인은 어깨에 관(棺) 하나를 멘 채 걸어나왔다. 

"그렇게 보셨습니까, 관어른?" 

"물론이지. 나는 한 번도 내 눈이 틀린 적이 없다는 걸 믿는다." 

괴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십여 년 전 나 시마 관중이 본 소종사가 결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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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屍魔) 관중(關中). 

그도 역시 마교십삼사의 일원이 아니던가? 항상 관을 어깨에 둘러메고 다닌다는 괴 

인 시마 관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속속 출현하는 마교십삼사... 이들의 출현은 아직은 고요하기만 한 무림에 일대풍운 

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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