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대의(大義) (56/87)

제4장 대의(大義) 

만경궁(萬鏡宮). 

목종(穆宗)이 죽은 후 서태비는 만경궁에서 조용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 태진궁에 들릴 뿐,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간 채 한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시(午時) 무렵, 고요하기 만한 만경궁에 때아닌 폭풍이 몰아쳤다. 

불시에 들이닥친 금의위의 고수들이 만경궁의 나인들과 궁녀들을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태비의 거처까지 뛰어들었다. 

"무엄하구나!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난입하는 것이냐?" 

육순을 넘겼으나 서태비는 여전히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곱게 주 

름진 옥안에서는 고귀함이 넘쳤으며 자세 또한 일점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지금 그녀는 만면에 노기를 띄우고 있었다. 파르르 눈꼬리를 떨며 무단 침입한 금위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의위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엽천우였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서태 

비를 마주보며 잘라 말했다. 

"서태비 마마, 마마를 태진왕 전하의 시해범으로 체포합니다." 

서태비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 무슨 망측한 말이냐?" 

그녀는 안면 가득 노기를 띤 채 전신을 경련했다. 엽천우는 냉엄한 어조로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마시오. 백충량이 이미 자백했소이다." 

서태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체포하라!" 

엽천우의 명이 떨어진 순간 금의위는 신속히 서태비의 주위로 접근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우왁! 하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금위의 고수 삼인이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벌렁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서태비의 수중에는 어느새 옥척(玉尺)이 들려있었다. 그것을 본 

엽천우의 눈에 살기가 짙어졌다. 

"드디어 마각을 드러냈구나. 무엄하게도 태비마마로 변장하여 전하를 시해하다니!" 

그는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잡아라! 단, 절대 죽여서는 안된다." 

말이 떨어진 순간. 

스스슷! 

바로북 99 51

금의위의 고수 오인이 서태비를 신속하게 포위했다. 그들은 방금 전 동료들의 죽음 

을 본 터라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고 검을 뽑아 곧바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흥!" 

서태비는 코웃음치며 옥척을 휘둘렀다. 

쐐쐐액! 

옥척이 허공에 환영을 뿌리는 순간 뼈를 에일 듯한 냉기가 뻗어나갔다. 지독한 냉기 

에 금의위의 고수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차차창! 

검과 척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백련정강으로 만든 검과 옥척이 부딪쳤지만 도 

리어 검이 퉁겨져 나갔다. 싸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십여 합을 지났지만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서태비 쪽이 훨씬 유리한 듯했다. 

엽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놀라운 무공이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서태비는 쉬지 않고 옥척을 휘두르며 냉랭하게 말했다. 

"엽천우! 폐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너는 능지처참 당하고 말 것이다.!" 

엽천우는 냉소했다. 

"그 전에 네 목이 먼저 날아갈 것이다." 

"호호호호......!" 

서태비는 요사스런 교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빠른 동작으로 검은 장갑을 끼더니 무 

엇인가를 홱 뿌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뿌려진 것은 흑색의 모래알 같은 것이었다. 순간 살이 썩는 악취가 

풍기며 처절한 비명이 주위를 찢어발겼다. 

"크아악!" 

금의위 고수 두 명이 얼굴을 감싸쥐며 비틀거렸다. 그것도 일순, 그들은 얼굴에서 

손까지 순식간에 누런 피고름으로 화해버리더니 잠깐 사이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 

고 말았다. 

엽천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이다! 조심해라." 

그는 황급히 외치며 신형을 날려 서태비를 덮쳐갔다. 

우우웅! 

그의 장력이 웅후한 파공성을 내며 서태비를 향해 몰아 쳐갔다. 서태비는 비웃음을 

입가에 날리며 장갑 낀 손을 휘둘렀다. 

츠츳! 

52 바로북 99

이번에는 괴이한 음향이 났다. 엽천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서태비의 손으로부터 

가느다란 철사가 뱀처럼 뻗으며 자신을 목을 향해 뻗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백전노장이었다.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흘리며 손가락을 구부려 철사를 낚아 

챘다. 서태비의 얼굴에 희색이 번졌다. 

"죽으려고......."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탕! 

철사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다가 끊어졌다. 

"악!" 

서태비는 비명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그녀의 입가에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렸다. 

엽천우의 번뜩 신형을 날려 서태비의 손목을 낚아채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번개처럼 

그녀의 안면을 긁었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서태비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정교한 인피면구(人皮面具)가 찢겨 

져 나갔다. 그러자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은 뜻밖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미녀의 얼굴이었다. 선이 뚜렷하고 장미를 문 듯 입술이 붉은 요염한 미녀였다. 

엽천우의 안면에 살얼음이 덮였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미녀의 얼굴을 노려보며 물 

었다. 

"너는 누구냐?" 

핏물이 흘러내리는 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엽천우의 눈에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서태비 마마는 어찌했느냐?" 

여인은 독랄한 눈빛으로 엽천우를 쏘아볼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짝! 

엽천우는 손바닥이 미녀의 따귀를 쳤다. 

"으음......." 

여인의 고개가 홱 돌아갔으나 그녀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되돌렸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더욱 독랄한 눈빛으로 엽천우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물론 그런 

눈길에 기가 죽을 엽천우 또한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냉엄하게 다그쳤다. 

"말하라!" 

이번에는 따귀를 치는 대신 미녀의 맥문에 내력을 주입시켰다. 

"......!" 

미녀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혈맥을 뒤틀고 당기고 쥐어짜는 무서운 고통 때문이었다

53 바로북 99

. 그래도 그녀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다만 입과 코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뿐이었다. 

엽천우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여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었다. 문득 그녀의 입술이 비틀리듯 열리며 차갑고 오 

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호홋! 어차피 난 목적을 달성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나... 엽천우... 너는. 

.. 내가 죽은 이후에도... 우리의 손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엽천우의 짙은 눈썹이 꿈틀 치켜 올라갔다. 그는 눈에 한 가닥 의혹의 빛이 어렸다. 

그때였다. 

여인은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이... 이런!" 

엽천우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급히 미녀의 턱을 손아귀를 잡아 억지로 벌렸다 

.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입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확 풍겼다. 그는 낭패를 금치 못 

했다. 

'독단을 깨물었군!' 

이때 방안으로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장천린과 단위제였다. 두 사람은 여인의 

시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엽천우는 침중한 표정으로 장천린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하는 

동안 단위제는 방안을 둘러본 뒤 목을 꺾은 채 쓰러져 있는 여인을 조사했다. 

여인의 고개를 바로 세우는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채령.......' 

그의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음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화... 네가 이 일에도 연관되어 있느냐?' 

그의 내면의 말은 물론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었다. 이때 엽천우가 그의 안색이 심 

상치 않음을 보고 물었다. 

"아는 여자입니까, 대영반?" 

단위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엽천우와 장천린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단위제는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혈관음(血觀音) 영호해상(令狐 孀)의 제 이대 제자인 채령이오." 

"혈관음!" 

엽천우의 안색이 급변했다. 

찌익! 

54 바로북 99

그는 망설임 없이 여인, 즉 채령의 가슴 부위의 옷을 잡아채 찢었다.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가고 탐스러운 젖가슴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비록 생명은 없으나 젖가 

슴이 빚어내는 그 순백의 아름다움만은 보는 이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한데... 실로 섬뜩한 것이 있었다. 눈처럼 흰 젖가슴 사이에 마치 피로 찍은 듯 선 

명한 혈관음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처절하도록 요기스러운 문신 

이었다. 

장천린은 충격을 받았다. 

"이... 이것은......!" 

그는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기억 때문이었다. 이 년 전 

항주 근처에서 만났던 소녀의 젖가슴 사이에도 그와 똑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지 않 

았던가. 

어디 그 뿐인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기소녀 해당(海堂)에게도 똑같은 혈관음 문 

신이 있었다. 

장천린은 비로소 명백해지는 것이 있었다. 

'해당... 그녀는 분명 혈관음과 모종의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 년 전 그는 해당이 있었던 동릉현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해당이 사라 

지고 없었다. 텅 빈집에는 정적과 함께 먼지만 수북히 쌓여있을 뿐이었다. 

엽천우는 만경궁에서 돌아온 후 수하로부터 급보를 전해 받았다. 

그것은 한 통의 서찰이었는데 서찰을 읽은 후 그의 안색은 괴이하게 변하고 말았다. 

마침 함께 차를 마시던 장천린은 그의 태도에 의혹을 느끼고 물었다. 

"엽대인, 무슨 일이오?" 

"아... 아무 것도 아니외다." 

엽천우는 급히 고개를 흔들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잠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안색을 부드럽게 바꾸며 입을 열었다. 

"용대인, 노부의 말 한 마디만 들어주시겠소?" 

장천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보십시오." 

엽천우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허... 용대인을 못미더워 한 노부가 갑자기 부끄러워지는구려." 

"하하! 그것은 피장파장이겠지요. 소생도 엽대인에게 불경을 저질렀소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엽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55 바로북 99

"용대인의 쌍극마공에 자칫 이 늙은이의 목이 달아날 뻔했소이다." 

"무슨 말씀을......."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엽천우는 문득 장천린의 손을 잡았다. 

"용대인. 전하께서 돌아가신 지금 황실 내에서 용대인을 인정할 자는 아무도 없소이 

다. 그것은 동창의 단대영반도 마찬가지 입장이오." 

장천린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 

다. 엽천우의 눈에 강인한 의지가 떠올랐다. 

"하나 나는 다르오. 나는 금의위 대영반에 있은 지 이미 수년이 지났소. 황실의 누 

구도 감히 날 무시하지는 못하오." 

장천린은 담담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조만간 황실의 일각에서는 날 제거하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게 될 것이오." 

엽천우의 음성이 비장해졌다. 

"하나 그렇다고 황실을 떠날 수는 없소. 전하와 약속한 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말이 

오." 

엽천우의 눈빛이 강렬한 신념의 불꽃을 발산했다. 그에게서는 뜨거운 충혼이 느껴졌 

다. 

"나는... 나라는 인간이 완전히 소멸되는 그 순간까지도 싸워야 하오. 밖으로는 후 

금(後金)의 야적들과 안으로는 득실거리는 간신들과 말이오." 

장천린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엽천우의 반달 같은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엽천우의 눈빛은 타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충혼의 열기가 장 

천린의 가슴속으로 화살처럼 날아왔다. 

"용대인." 

엽천우는 장천린의 손을 잡고 힘을 주었다. 

"내일 태진궁을 떠나주시오."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엽천우를 바라보았다. 엽천우는 진심 어린 음성으 

로 말했다. 

"황실 문제는 용대인이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아도 되오. 개입은 나 혼자 만으로도 충 

분하오." 

"하나......." 

장천린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려 했지만 엽천우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는 진중 

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56 바로북 99

"용대인께서는 해야할 일이 따로 있소이다. 그것은 정도와 사마외도로 각기 가지를 

뻗고 있는 무림계를 일통시키는 일이오."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너무도 뜻밖의 말이었다. 

"용대인이라면 능히 할 수 있으리라 믿소." 

엽천우의 음성은 비장했다. 그의 뜨거운 열기가 장천린의 마음을 움직였다. 대의(大

義)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노충신의 마음이 그에게 뭉클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엽천우는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림의 세력이 일통되면 그 힘으로 무너져 가는 대명제국의 기둥이 되어 주시오. 

용대인,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오." 

쓰러져 가는 대명제국의 기둥이 되어주시오! 

이 한 마디는 장천린의 가슴을 뜨겁게 흔들었다. 그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엽천우의 깊고 고요한, 그러나 뜨거운 충심이 일렁이는 노안(老眼)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눈빛을 바라보며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엽대인... 이 분을 믿은 전하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진정한 

충신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을.......' 

결국 그는 엽천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엽천우의 안면에 훈훈한 미 

소가 번졌다. 

다음 순간 그들은 서로 굳게 손을 맞잡고 뜨거운 격동을 나누었다. 양인의 입가에 

약속처럼 피어오르는 미소, 그것은 신뢰와 우정, 아니 그 이상의 것이었다. 

엽천우는 품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하나의 영패와 책자 한 권이었다 

. 그는 두 가지 물건을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 용대인께 드리겠소." 

장천린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남해신궁의 궁주가 직접 현신한 것이나 다름없는 힘을 지닌 영패요. 그리고 

이것은... 남해신궁의 비전절기가 적힌 무공비급이오." 

장천린은 멈칫했다. 

"이것을 어찌 내게......." 

"노부는 필요 없소이다. 어차피 노부는 진작부터 무림인이 아니오. 노부가 죽는 그 

순간까지 황실을 위해 싸워야 하오. 다시는 남해신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외다. 

엽천우는 호쾌하게 말했다. 

"남해신궁을 용대인께서 접수해 주시오. 미비하나마 무림을 일통 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오." 

57 바로북 99

"엽대인......." 

장천린은 다시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짐을 어쩔 수 없었다. 엽천우는 대소를 터뜨렸다 

"헛헛헛! 용대인과의 만남이 너무 짧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당부했다. 

"노부는 지금 화영궁으로 갈 것이오. 노부가 일이 있어 조금 늦더라도 내일 아침에 

는 반드시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장천린도 함께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엽천우는 몸을 돌렸다. 돌아서는 그의 등이 유난히 넓고 허허로워 보였다. 

엽천우는 금의위 고수 십인을 대동하고 화영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동안 내내 

그의 머리 속에는 한 가닥 의혹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여 갑자기 소귀비가 병부상서 오자충과 날 화영궁으로 부른단 말인가?' 

그는 도무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한 시진 전, 그가 수하로부터 전달받은 첩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오대감과 더불어 지금 급히 화영궁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소귀비(素貴妃).> 

첩지를 받은 엽천우는 즉각 오자충에게 연락을 취한 후 화영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소귀비는 만력제가 지극히 총애하는 귀비였다. 따라서 황실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태진왕이 죽은 지 

금에 있어서 그녀의 권력은 더욱 심대해졌다 할 수 있었다. 

엽천우는 그녀가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노부를 포섭하여 황실내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둘 

째는... 은밀히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대한 일을 상의하려는 

것일 게다.' 

엽천우는 금의위 대영반이라는 막강한 위치에 있지만 소귀비의 초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로서도 소귀비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보 

다는 그에게도 한 가지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소귀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황실 내부의 내분과 분열을 어느 정도 진 

정시킬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엽천우는 그런 생각으로 소귀비의 초청에 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 알 

겠는가? 한 치 앞의 일을 모르는 것이 인간인 것을. 

58 바로북 99

엽천우가 화영궁에 도착하자 시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나리. 귀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마마께서는 어디 계시냐?" 

"내청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엽천우는 수행한 부하들에게 당부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엽천우는 시비의 안내를 받아 화영궁의 내청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이 나라의 주인 

인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엽천우는 자못 꺼려졌으나 귀비가 직접 초청한 

일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청은 대명제국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귀비의 처소답게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 엽천우는 그 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소귀비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시비가 사라진지 일다경(一茶頃) 쯤 지났을까? 

"들어오세요, 엽대인." 

내청 안쪽으로부터 달콤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음성의 주인은 소귀비였다. 그는 난감했다. 신하된 몸으로 어찌 황제의 애첩이 있는 

내실로 들어간단 말인가? 

"괜찮아요. 중대한 일이 있어 특별히 청한 것이니까요." 

소귀비의 음성은 깨끗했다. 조금도 음악한 느낌이 풍기지 않았다. 

엽천우는 가슴을 쭉 폈다. 

'대장부가 마음이 밝은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랴?' 

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내실로 걸어 들어갔다. 

내실은 호사스러웠다. 침소로 통하기 전의 방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여인 특유의 

방향이 코를 찔렀다. 

"어서 오세요, 엽대인." 

소귀비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황제의 애희답게 현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엽천우는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 

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맑고 화사하여 요염하거나 교태를 풍기지 않았다. 전신에서 

흐르는 고고한 기품이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할 정도였다. 

"신(臣) 엽천우 마마를 뵈옵니다." 

소귀비는 우아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대인." 

59 바로북 99

"황송하옵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소귀비는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오자충 대감께서는 왜 오시지 않나요?" 

"예, 연락은 했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소귀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진궁은 좀 진정이 되었나요?" 

엽천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정이라니? 주인이 죽었는데 지금 와서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한숨을 쉬었다. 

"대충 정리는 되었습니다." 

소귀비는 가볍게 탄식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태진왕 전하의 죽음은 황실로서도 큰 별 하나를 잃은 셈 

이에요." 

엽천우는 침묵했다. 그는 태진왕이 죽은 이후 한 번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보필하여 태진왕이 죽은 것 같아 늘 자책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소귀비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녀는 미리 끓여놓은 차주전자를 손수 들며 말 

했다. 

"그 동안 노고가 많으셨어요. 마침 향지국(香旨國)에서 특산품인 차가 들어와 준비 

했답니다. 대인께 드리려고요." 

그녀는 손수 차를 따랐다. 엽천우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황송하옵니다. 마마."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이 차는 기를 북돋워 주고 피를 맑게 한다더군요." 

소귀비는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턱짓을 했다. 

"그럼......." 

엽천우는 두 손으로 찻잔을 받친 채 차를 마셨다. 벽록빛의 차는 입술에 닿기도 전 

에 단아한 향기를 풍겼다. 그는 한 모금을 마셨다. 따스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 

갔다. 그도 차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소귀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엽천우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슴이 뜨끔했다. 

'과연... 소문대로 소귀비는 절세우물이로구나. 미소 한 번에 내 마음이 흔들리다니 

.......' 

그는 소귀비로부터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참, 마침 대인께 드릴 선물이 있어요." 

소귀비는 밝게 말하며 교구를 일으켰다. 

60 바로북 99

엽천우는 그녀가 왜 그렇게 자신을 환대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싫지 

는 않은 기분이었다. 

소귀비는 침전 안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흰 가죽으로 된 검 한 자루를 받쳐들고 

왔다. 

엽천우는 무인이다. 그는 한 눈에 그 검이 보통 검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한 번 뽑아 보세요. 우연히 얻은 것인데 엽대인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엽천우는 별반 생각없이 검을 받았다. 그는 흰 가죽으로 된 검집을 쓰다듬다가 서서 

히 검을 당겼다. 

스르르릉! 

청아한 진동음과 함께 눈부신 백광이 뻗어나갔다. 동시에 차디찬 검기가 흘러나왔다 

엽천우는 탄성을 발했다. 

"좋은 검입니다!" 

"설백아(雪白兒)란 것으로 천하 오대명검(五大名劍) 중의 하나지요." 

엽천우는 홀린 듯 설백아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귀비의 눈에 야릇한 광채가 

반짝 빛났다. 

"엽대인께 드리겠어요." 

엽천우는 깜짝 놀랐다. 

"마마! 어찌 이 귀한 것을......." 

소귀비는 교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소귀비는 자신의 옷을 찢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마마......!" 

엽천우는 대경실색했다. 말리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었다. 그가 넋이 나가는 사이에 

옷이 이리 저리 찢기며 소귀비의 눈부신 나신이 노출된 것이다. 

박 속처럼 희고 풍만한 유방이 찢어진 옷을 뚫고 불쑥 튀어나왔으며, 치마도 갈기갈 

기 찢겨져 나갔다. 대리석처럼 늘씬한 다리와 허벅지까지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호호호홋! 엽천우! 너는 절대 우리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라가 되어버린 소귀비는 득의에 찬 교소를 터뜨렸다. 

'우리라고?' 

엽천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내실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엽천우는 놀라 벌떡 일어 

섰다. 문 앞에 병부상서 오자충이 서 있었다. 

61 바로북 99

오자충은 방안의 풍경에 대경실색한 표정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혼백이 나간 듯했다. 

소귀비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오... 오대감! 저... 저 자를 빨리... 체포하세요!" 

그녀는 두 손으로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개의 작은 

손바닥으로는 다 가릴 수 없어 반 이상 비어져 나와 있었다. 

"저 자가 난입하여 절... 욕보이려고 했어요." 

엽천우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경험했다. 

'아뿔싸!' 

비로소 그는 함정에 걸린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도저히 발뺄 수조차 없는 무서운 

함정! 

지금 그의 손에는 설백아가 싸늘한 검신을 드러낸 채 뽑혀져 있다. 누가 봐도 상황 

은 명백했다. 그는 소귀비의 육체를 탐해 그녀를 위협하여 겁간하기 직전인 것이다. 

한편 오자충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말조차 제 

대로 하지 못했다. 

"엽... 엽대인... 당신이......!" 

엽천우는 검을 내던지며 크게 외쳤다. 

"음모요! 오대감......!" 

그러나 오자충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밖을 향해 노성을 질렀다. 

"여봐라! 여기 대역죄인이 있다! 당장 저 자를 끌어내라!" 

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밖에서 수십 명의 무사들이 물밀 듯 

이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 

엽천우는 무사들에게 겹겹이 포위된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수염은 진노 

를 억제치 못해 바람을 맞은 듯 휘날렸으며, 두 눈은 찢어질 듯이 부릅떠진 채 소귀 

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낙엽처럼 작은 손바닥 하나는 풍만한 유방을, 또 하나는 하반신의 주요 부분을 가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귀비의 영악한 모습이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그의 동공에 

비쳤다. 

"요사한 계집! 이제 보니 날 함정에 몰아 넣었구나!" 

소귀비는 도리어 무사들에게 날카롭게 명령했다. 

"여봐라! 어서... 저 흉적을 체포하지 못하겠느냐?" 

62 바로북 99

"옛!" 

무사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엽천우를 향해 좁혀갔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엽 

천우는 치를 떨며 한 걸음 떼어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가슴이 뜨끔했다. 

'독(毒)!' 

그의 안색이 푸르게 질리고 말았다. 

'그럼 아까 마신 차 속에 독을?' 

엽천우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제 아무 것도 가릴 것이 없었다. 

휙! 

신형을 날린 그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사를 향해 장력을 날렸다. 무사는 눈을 크 

게 떴다. 미처 비명을 발할 사이도 없이 그의 가슴이 으스러져 버렸다. 

엽천우는 남해신궁의 궁주였다. 그의 가공할 무공을 당해낼 자가 있을 리 없었다. 

다시 한 번 그림자가 번뜩 했을 때, 그의 손에는 소귀비의 가냘픈 손목이 잡혀 있었 

다. 

"아악!" 

소귀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엽천우는 그녀의 손목을 거 

머쥐고 차갑게 웃었다. 

"흐흐... 귀비마마, 당신이 날 우롱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소?" 

그 광경에 오자충은 대로했다. 

"저... 저런 무엄한 자!" 

그는 무사들을 향해 호통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잡아라!" 

엽천우의 냉막한 음성이 그의 호통을 눌렀다. 

"움직이지 마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귀비를 죽여 버리겠다!" 

오자충은 눈을 부릅떴다. 

"네... 감히 대역죄를 범하겠다는 것이냐?" 

엽천우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어차피 그간 노부가 황실에 기울였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오늘 부로 노부는 과거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그냥 물러가지는 않겠다." 

엽천우의 눈에서 푸른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더럽게 썩어버린 것들을 모두 제거한 뒤 물러갈 것이다!" 

그때였다. 맥문을 잡혀있던 소귀비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홋! 꿈꾸는구나. 엽천우." 

63 바로북 99

엽천우의 안색이 급변했다. 

소귀비의 한쪽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머리에 꽂고 있던 옥비녀를 뽑더니 그 

대로 엽천우의 가슴에 꽂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욱!" 

피가 튀었다. 비녀는 엽천우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엽천우는 비틀거렸다. 

"네... 네가......!" 

그는 회의에 찬 눈으로 소귀비를 노려보았다. 

"호호호호호......!" 

소귀비는 영활한 물고기처럼 그의 손을 벗어나며 교소를 터뜨렸다. 그 바람에 드러 

난 젖가슴이 요란하게 출렁거렸으나 조금도 가리려 하지 않았다. 

"엽천우. 내가 말했지 않느냐? 너는 결코 우리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엽천우는 뒤로 물러나며 오자충을 바라보았다. 오자충은 망연한 표정으로 소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엽천우는 한 가닥 희망을 느꼈다. 

"오대감... 보시오. 소귀비는 무공을 알고 있소.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 나는......." 

오자충은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엽천우는 품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그 

에게 던졌다. 

"그것은 날 이곳으로 부른 소귀비의 서찰이오. 읽어보시오." 

오자충은 의아해 하며 서찰을 읽어보았다. 잠시 후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렸 

다. 

"이럴 수가!"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엽천우를 노려보았다. 

"엽대인! 당신......." 

엽천우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손을 내밀었다. 

"대체 왜 그러시오? 그 서찰은......." 

휙! 

오자충은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버리는 듯 서찰을 내던졌다. 서찰을 받아 읽어본 

엽천우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소귀비를 능욕한 뒤 죽여라.> 

놀라운 일이었다. 서찰의 내용이 어느새 바뀌어 있는 것이 아닌가? 

64 바로북 99

"이럴... 수가!" 

엽천우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더듬거리며 부르짖었다. 

"오대감... 이건... 뭔가 잘못 되었소!" 

65 바로북 9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