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북해(北海)의 애증
그는 가슴에 꽂힌 비녀를 뽑아냈다. 비녀가 뽑히자 선혈이 화살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는 지혈시킬 생각도 않고 중얼거렸다.
"이것은 음모요... 무서운......."
엽천우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푹!
섬뜩한 소리.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소리였다.
한 자루 검이 기척도 없이 뻗어와 그의 가슴을 뚫어버린 것이다. 엽천우는 고개를
숙여 가슴을 뚫고 들어온 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회의와 불신이 뒤엉
켜 있었다.
"오자충... 너... 너마저......."
오자충의 얼굴이 괴상하게 씰룩였다.
"후후! 어차피 넌 우리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지 않느냐?"
엽천우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럼 너도... 한 패냐?"
오자충의 눈이 무감동하게 변했다. 그는 괴이하게도 무기력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든 것은 내가 계획했다."
엽천우는 충격을 받았다.
"너... 넌 대체 누구냐?"
오자충은 몸을 빙글 돌렸다. 돌아선 그의 얼굴에 흰 칠이 덕지덕지 된 탈이 씌워져
있었다. 탈의 눈구멍은 초승달 모양이었다.
"흐흐! 마교(魔敎)에서 왔다."
"마... 교!"
엽천우는 치를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저 자들도?"
"물론 마교의 고수들이다."
오자충, 아니 담자개는 권태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금의위와 동창의 오백 고수들은 널 비롯하여 오늘 부로 모두 제거된다. 죄명은 역
모를 한 죄요, 증인은 오자충과 소귀비다."
"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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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천우는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그의 가슴에서는 계속 피가 울컥거리며 나오고 있었
다.
"대체 왜......?"
담자개의 음성은 무기력했다.
"황실은 계속 혼란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엽천우의 눈에 광채가 번쩍 솟아났다. 그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그는 은밀히 체내
에 남아있는 공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두 군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제대로 진기가 유통되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내심 부르짖었다.
'한 줌의 진기만이라도... 제발 모여 다오. 마지막 한 줌의 진기만이라도.......'
한편으로 그는 담자개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놈은 누르하치와 결탁했느냐?"
황실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누르하치
였다. 그는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는 야심가였기 때문이다.
담자개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엽천우는 다시 소귀를 가리켰다.
"소귀비도... 마교 사람이냐?"
"그렇다."
"무서운... 놈들......."
엽천우의 전신은 완전히 선혈로 물들었다. 그의 체내에 있는 피란 피는 모두 빠져나
간 듯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진기를 모으고 있었다.
천우신조였을까?
마침내 단전(丹田)에 한 가닥 진기가 가느다랗게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입술을 깨
물었다.
'오직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죽음의 신공... 옥로신공(玉露神功)의 마지막 단계 무
혈천비우(無血天秘雨)에 마지막 희망을 걸리라.'
엽천우의 눈동자는 점점 빛을 잃어갔다.
'전신의 피를 모두 체외로 빼내야 한다. 하지만... 한 번...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
다. 그 후에는 영원히... 내 삶은 끝이 나겠지. 영원히.......'
엽천우는 최후의 절공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빨을 물었다.
'흐흐... 혼자 가지는 않는다. 이곳의 놈들을 모두 데리고 갈 것이다. 모두.......'
피는 계속 흘러내렸다. 그는 진기를 움직여 혈관 속에 남아있는 피를 마지막 한 방
울까지 밖으로 몰아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해 바닥은 흥건해졌다.
엽천우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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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전하의 부탁을 들어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언뜻 그의 뇌리에 한 믿음직스러운 사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용대인... 나의 마지막 부탁... 부디 이루어주오.......'
그의 눈꼬리로 한 방울의 이슬이 흘러내렸다.
아니다.
그것은 그의 체내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 방울의 피였다. 한 순간 그의 장포가 무섭
게 부풀어올랐다.
휘류류류륭!
갑자기 음산무비한 폭풍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이어 가공할 장면이 벌어졌다. 엽천
우의 얼굴이 해골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살은 급격히 말라버려 뼈에 달라붙었으며,
그로 인해 얼굴은 물론 손과 발, 목도 해골처럼 화해버렸다.
실로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할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담자개는 흠칫했다. 바로 그때 엽천우는 껑충 허공으로 뛰더니 소귀비를 향해 덮쳐
갔다.
"휘경! 조심하시오......."
그의 외침은 으스스한 악마의 광소에 묻혀버렸다.
"으하하하하! 모조리 소멸하라! 가슴속에 악을 품고 있는 자들이여!"
엄청난 광채가 뻗어나갔다. 광채는 방안을 빛의 그물처럼 가두어버렸다.
"앗!"
소귀비는 비명을 발하며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늦었다. 그녀의 몸은 빛의 그물에 여
지없이 갇히고 말았다.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크아악!"
동시에 폐부를 찢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빛의 그물 안에 갇힌
수십 명의 무사들이 거의 동시에 내지른 참혹한 비명이었다.
담자개는 망연자실했다.
빛의 그물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방안의 중앙에는 엽천우가 고목처럼 우뚝 서 있
었다. 그의 몸은 살이란 살은 모두 말라붙어 백골처럼 되어 있었다.
그의 주위에 수십 구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가공스럽게도 그 시체들 역시 밀랍(蜜蠟
)처럼 변해 있었다.
담자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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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귀비가 벽에 기댄 채 전신을 경련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역시 밀랍처럼 창백하
게 변해 있었다.
"휘경!"
담자개는 그녀에게 다가가 급히 부축했다. 그가 품에 안는 동안 소귀비의 얼굴은 빠
르게 밀랍처럼 변해갔다. 뿐만 아니라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속살도 밀랍처럼 변
해가고 있었다.
"피... 피가... 굳는 것 같아요... 담랑......."
"휘경!"
담자개의 탈 속에 들어있는 눈이 격렬한 파동을 일으켰다. 소귀비는 그의 품에 안긴
채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조그만... 가정을 이루고... 살고 싶었는데... 담... 랑... 과 함께......."
"안돼......!"
담자개는 더 이상 무감동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피를 토하듯이 부르짖었다. 소귀
비의 눈꼬리에 이슬이 맺혔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당신을 위해......."
그녀의 눈동자가 굳었다. 눈동자마저 회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랑해요... 담랑... 영원히......."
툭.
소귀비의 고개가 떨어졌다. 그토록 아름답고 윤기 넘치던 여인이 믿을 수 없게도 밀
랍인형이 되고 말았다.
"휘경......!"
담자개는 그녀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전달되지 않았다. 이미 세
상을 하직한 소귀비의 귀에 닿기에는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담자개의 눈동자가 터져나갈 듯이 충혈되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엽천우는 백골
이 된 채 못 박힌 듯 방 한가운데 우뚝 서있었다.
"으으......."
담자개의 시뻘건 눈에서 불꽃이 퉁겼다.
"네가... 마지막 남은... 내 희망마저... 앗아갔단 말이냐?"
콰앙!
그의 손에서 가공할 장력이 뻗어나가 엽천우의 시신을 때렸다. 엽천우의 시신은 산
산조각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으아아아......!"
담자개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하늘도, 땅도, 인간도, 모든 것을 부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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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하는 처절한 부르짖음이었다.
초승달 모양의 눈꼬리로 이슬이 아닌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침.
주인 잃은 태진궁의 아침은 생기를 잃고 있었다.
장천린은 떠날 채비를 마친 채 엽천우가 오기를 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
려도 그에게서는 소식조차 오지 않았다.
'몹시 바쁜 모양이군.'
그는 떠나기 전 엽천우와 작별인사를 하려 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백소저에게 인사나 하고 가야겠구나.'
장천린은 혼자 텅 빈 방을 지키고 있을 백연연을 생각하자 안Tm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발길을 그녀의 처소로 향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방 청소를 하고 있던 시녀에게 물어봤지만 모른다는 대답이
었다. 다만 시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 점점 말이 없으셔요. 그러다 병이라도 날까봐
걱정이에요."
장천린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어 화원 쪽으로 걸어
갔다.
아니나 다를까? 화원 한가운데 사륜거가 있었다. 사륜거에 앉아있는 백연연의 모습
이 유난히 애처로워 보였다. 장천린은 이슬방울이 맺혀있는 꽃 사이를 걸어갔다.
"백소저."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연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장천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백소저, 기운을 내시오. 전하께서도 이런 모습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오."
마찬가지였다. 백연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치는
것을 느꼈다.
'혹시.......'
그는 백연연의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망연자실해져 버렸다.
"백소저!"
죽어 있었다.
비운의 여인 백연연은 백화 한 송이를 가슴에 안은 채 죽어 있었다. 그녀의 죽은 모
습은 너무도 곱고 조용해 마치 잠이라도 든 것처럼 보였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가슴에 안긴 꽃에 반사되어 현란한 느낌을 주었다. 장천린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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썹을 부르르 떨었다. 도저히 현실이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것이 백소저가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는지도.......'
백연연은 화원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마치 꽃의 바다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너무
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살아있을 때 아름다웠으나 죽어서 더욱 아름다운 여인이었
다.
장천린은 그녀를 향해 장읍했다.
"백소저, 나는 영원히 당신을 잊지 못할 것이오. 영원히......."
그는 백연연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처소로 돌아온 그는 그 길로 태진궁을 떠났다. 더 이상 태진궁에 머물러 있고 싶지
도,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북경에 왔다가 태산같이 무거운 중압감만 안은 채 돌아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북경을 떠나던 그 순간 황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고 있었다는 것을
명조의 마지막 충신 엽천우를 비롯하여 충열의 뿌리가 하나 둘 잘려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북경을 떠난 지 사흘 후, 북경성의 성루에는 몇 개의 머리가 효수(梟首)되었다
. 그것은 엽천우와 백충량을 비롯하여 금의위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는 좌상
북리천(北里天)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야말로 명조를 떠받치던 마지막 기둥들이었
던 것이다.
그들의 죄명은 엄청난 것이었다.
서태비 살해를 비롯하여 소귀비를 능욕하고 살해한 대불충, 거기에 엽천우는 태진왕
을 암살했다는 혐의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장천린이 이런 통탄할 만한 소식을 접한 것은 불행히도 그들의 목이 효수된지 보름
이나 지난 후였다. 바야흐로 난세(亂世)가 도래하고 있었다.
북해(北海)의 제왕을 꼽으라면 단연 사태청(獅太廳)을 꼽는다.
사태청은 무려 이백 오십여 년간 북해무림을 군림해 온 거대한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 제 구대 청주(廳主)인 숙야염은 무공은 물론 탁월한 지략과 영도력으로 북해무림
을 군림하는데 있어 추호의 손색이 없는 거물이었다.
그의 휘하 고수는 일천이 넘었으며, 북해 삼십 이 개 방파( 派)들은 한결같이 그를
떠받들고 있었다. 중원에서 조화성주 염무가 무림의 살아있는 법이라면 숙야염은
북해의 신이었다.
백극빙모산(白克氷母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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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의 빙지에 우뚝 솟은 빙산으로 북해인이라면 이곳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것은
사태청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태청은 거대한 성채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빙양곡(氷羊谷)에 위치했다. 사시사철
눈보라가 치는 악천후 속에서도 빙양곡의 특이한 지형으로 인해 성채가 있는 곳은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태청은 불야성이었다.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대낮같이 등롱이 걸려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흥청거렸다.
그것은 이 날이 바로 사태청주 숙야염의 육순 회갑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해의
패주들과 호웅들이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모여든 것이다.
거대한 대청에서는 수백 명의 군웅들이 모여 성대한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대청 상단에는 백호피(白虎皮)를 씌운 태사의에 한 명의 노인이 즐거운 표정으로 앉
아 있었다.
그는 특이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노인의 살결은 얼음처럼 투명했으며, 눈동자마저 투명했다. 백의에 백염을 기르고
있는 노인의 인상은 그로 인해 차갑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가 바로 북해의 제왕 사태청주 숙야염이었다.
숙야염의 좌우에는 일남일녀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오른쪽에 앉아있는 청년은 준수한 용모의 미청년으로 바로 그의 아들이자 사태청의
후계자인 숙야천릉이었다. 왼쪽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녹의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바로 오래 전 모습을 감추었던 취옥교(翠玉嬌)가 아닌가!
"숭(嵩) 전주, 잠깐 이리 오시구려."
숙야염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금의노인을 불렀다. 노인은 기이하게도 얼굴이 금동불
상과 같아 보였다. 입가에는 연신 미소를 흘리고 있어 마치 환희불같은 느낌을 주었
다.
금의노인은 미소지으며 다가왔다. 숙야염은 하객들을 향해 위엄 있는 음성으로 말했
다.
"여러분. 여기 귀하신 분을 소개하겠소."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하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금의노인에게 집
중되었다.
"이분께서 바로 조화성 제이신마전의 전주이신 금불(金佛) 숭의겸(嵩義兼)이시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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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하객들은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제이신마전이라면 조화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제삼신마전에 비하면 십분지 일도 되
지 않았다. 하나 제이신마전에 소속된 인물들은 모두가 최정예 고수들이었다.
표면적으로 숭의겸의 영향력은 지난날의 제삼신마전주 태사독에 비할 수 없었다. 그
러나 실제 그의 무공은 태사독을 훨씬 능가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그는 신비
에 싸여있는 인물이었다.
결정적인 사실은 태사독이 죽은 후 제삼신마전마저 장악하여 그의 영향력이 더욱 지
대해졌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명실상부한 조화성의 제이인자로 부각되고 있었다.
하객들은 앞다투어 자리에서 일어나 금불 숭의겸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북
해의 호웅들이었으나 조화성의 제이인자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숭의겸은 호웅들이 공손히 인사할 때마다 살찐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그의 미소는 너그럽고 사람 좋아 보였다.
하지만 뉘라서 알겠는가! 그의 웃음이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웃음
속에 칼을 품은 소리장도(笑裏藏刀)야 말로 그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숭의겸은 숙야염을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삼가 성주님을 대신하여 숙야청주의 회갑을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맙소이다."
숭의겸은 미소를 흘리며 품속에서 하나의 옥갑을 꺼내 두 손으로 건넸다.
"이것은 성주께서 드리는 예물이오이다."
옥갑을 받은 숙야염은 즐거운 표정으로 뚜껑을 열어 보았다. 순간 눈부신 광채가 대
청을 환히 밝혔다. 그는 탄성을 발했다.
"오! 이 귀한 칠채보원신주(七彩寶元神珠)를 보내오다니......!"
중인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칠채보원신주는 대대로 무가(武家)의 보물로 내려오는 희세지보가 아닌가?
신주는 일곱 색의 광채를 내며 피수(避水), 피화(避火), 피독(避毒)의 효용과 함께
무인이 몸에 지니고 다니면 신주의 신비한 힘에 의해 나날이 진기가 증진되는 것으
로 알려져 있었다.
예물을 받은 숙야염은 몹시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장내의 분위
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술잔이 바쁘게 오가는 가운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환담을 나누는 소리는 갈수록
높아져 연회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숙야염은 장내를 한 차례 둘러보다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제위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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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중인들의 귀에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그는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신 것은 노부의 회갑을 자축하기 위함이었소. 하지만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소이다."
중인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숙야염은 위엄 있는 시선을 우측에 앉아있는
숙야천릉에게 돌리며 말했다.
"그것은 미거한 노부의 아들놈의 약혼식 때문이었소."
"아!"
중인들은 탄성을 발했다. 그들의 시선은 숙야천릉에게 향했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취옥교에게 향해졌다.
사실 취옥교의 미색은 그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연회가 시작될 때부터 취옥
교의 매혹적인 미색에 눈길을 팔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편 취옥교는 중인
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을 노을 빛으로 물들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허허허! 아마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 것이오. 이 아이는 노부의 여제자인 옥교요."
"와아!"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오!"
중인들은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숙야천릉은 준수한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취옥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
었다. 마침내 사랑하는 여인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게된 사실에 그는 지극한 만
족을 느끼고 있었다.
쏴아아......!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욕실이다.
욕실을 가득 메운 수증기 사이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한데 수증기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여인의 등에는 문신이 가득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피처럼 붉은 작약꽃 문신이었다. 작약꽃은 목에서부터 시작되어 등을 가득 채우고
엉덩이 아랫부분까지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는 팔까지 꽃송이가 피어나 있
었다.
눈에 띄는 것은 등 한복판에 손바닥 크기의 작약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훌륭한 솜씨였다.
쏴아아!
여인은 몸에 몸을 끼얹은 후 서서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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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힌다.
돌아선 그녀의 나신은 가히 인세의 여인이 아니었다. 봉긋한 두 개의 젖가슴은 팽팽
한 탄력으로 허공을 차고 솟아 있었으며, 그 아래로 잘록하게 패인 세류요(細柳腰)
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급격히 풍성해진 엉덩이, 군살 한 점 없는 아랫배와 그 한
가운데 앙증맞게 패여 있는 배꼽... 더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물에 젖어 찰싹 들러
붙은 짙은 밀림이 숨막히는 열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데 여인의 얼굴은 정반대였다.
만년설(萬年雪)인들 이보다 차가울까! 싸늘하고 냉랭한 인상이었다. 다만 서늘하면
서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한 쌍의 봉목(鳳目), 마늘쪽 같은 코, 붉은 입술은 조각
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절세의 우물(尤物)이었다.
물에 젖어 칠흑 같은 윤기를 내는 긴 머리카락은 두 개의 유방 사이로 흘러내리며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었다.
여인은 물기를 닦은 후 욕실을 걸어나갔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전라였음에
도 불구하고 걸음걸이는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욕실 밖은 푹신한 융단이 깔려있는 방이었다.
붉다. 방 전체가 온통 피처럼 붉은 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자줏빛 융단이 깔린 바닥
과 천장, 벽도 온통 붉은 색이었다.
융단 위에 무릎꿇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노란 옷을 입고 머리에 황
접(黃蝶) 모양의 장신구를 꽂은 귀여운 용모의 소녀였다.
소녀는 황급히 일어서며 두 손에 받쳐들고 있던 옷을 여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역시 자줏빛 비단 장의(長衣)였다.
알몸 위에 장의 하나만 걸친 여인은 손가락으로 장의를 살짝 만져보았다. 최상급 비
단이 주는 촉감을 즐기는 것 같았다. 발목까지 내려온 장의는 앞부분이 열려 있어
그녀의 아름다운 유방과 아랫배가 들여다보였다.
여인은 사뿐사뿐 걸어 보료 위에 앉았다.
소녀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천릉은 어찌 하고 있느냐?"
여인이 건넨 첫 질문이었다. 소녀는 망설이다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조금... 즐거워하시는 표정이었어요."
"즐거워한다고?"
여인의 입술꼬리에 성큼 치켜 올라갔다. 어딘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
소녀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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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호호......!"
여인은 느닷없이 교소를 터뜨렸다.
"나 구양영봉(歐陽靈鳳)이 질투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녀의 눈에서 차가운 광채가 흘러나왔다.
"나는 질투 따위는 몰라. 다만 치욕스럽게 여기고 있을 뿐이지."
구양영봉의 옆에는 검가(劍架)가 있었는데 자줏빛 수실이 달려있는 검이 걸려 있었
다. 그녀는 섬섬옥수를 뻗어 검을 잡았다.
쓰으으!
검을 뽑자 새하얀 검날로부터 으스스한 냉기가 뻗어 나왔다. 그녀는 검날을 노려보
며 입술을 움직였다.
"내일 신녀궁(神女宮)으로 돌아가야겠다."
소녀는 반색을 지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가씨."
"바보 같은!"
구양영봉은 싸늘하게 외쳤다.
"섣불리 짐작하지 마라. 그렇다고 천릉을 포기한 것은 아니야. 그는 누구에게도 뺏
길 수 없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야. 다만 여인으로써 다른 여인에게 패배하기 싫
기 때문이야."
소녀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양영봉의 끝이 치켜 올라간 눈이
그녀의 머리 위에 꽂혀있는 황접 모양의 장신구에 떨어졌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
다.
"나 구양영봉에게 절대 패배란 있을 수 없어!"
슈팟!
구양영봉의 손이 움직이며 검광이 뻗어 나갔다.
'아......!'
소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녀의 머리에 꽂혀있던
황접 모양의 장신구는 어딘 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그것은 지금 구양영봉이
수평으로 뻗고 있는 검신 위에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진 채 올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검술이었다.
"보았느냐? 누구라도 날 배신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가씨......."
소녀는 전신을 후들후들 떨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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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떨쳐졌고,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졌던 장신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눈
부신 검광의 그물이 펼쳐졌다. 그것은 빛의 그물이었다.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허공에 떠올랐던 장신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구양영봉
의 검에 미세한 분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녀는 심장이 오그려 붙는 것 같았다.
'아아... 무서운... 검법이구나.'
"누구도 마찬가지야. 날 배신한 대가는 꼭 치르게 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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