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북해의 비극
제갈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이제 한계를 드러내는구나. 네가 아무리 강하다해도 염무보다는 아래다. 오성단의
다섯 수뇌는 염무와 상대하기 위해 무영이 직접 키운 고수라는 사실을 알았어야했다
.'
그는 믿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해도 그들의 적수는 아니다.'
이때였다.
"욱!"
신음과 함께 숙야염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흑묵룡의 검이 어깨를 스친 것이다.
숙야염은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그때였다.
펑!
폭음과 함께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가 뒤로 젖혀졌다.
"흐흐......."
광무염은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장력이 숙야염의 어깨를 강타한 것이다. 숙야
염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중심을 잃었다.
오성단의 다섯 수뇌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가공할 공격을 퍼부었
다. 장풍검영이 난무하는 가운데 숙야염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숙야천릉은 마침내 빙백전에 다다랐다. 그의 뒤에는 이십여 구의 오성단 고수들이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빙백전을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돌연 처절한 비명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숙야천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비명이야말로 너무도 귀에 익은 음성이 아
닌가?
'아... 안돼!'
그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빙백전 안으로 뛰어 들었다.
대전 안에 들어선 그는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 보라! 눈앞에 펼쳐진 참혹무비한 광경을.
숙야염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술에 취한 듯이 휘청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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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성성하던 백염백발마저 온통 시뻘겋게 피에 젖어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한 자루 검이 깊숙이 관통해 있었으며 복부에는 단창이 박혀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전신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에는 오성단의 다섯 수뇌 중 한 명인 육자경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상
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단천굉이 입과 코로 선혈을 흘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나머지 삼인도 무
사하지 못했다. 극심한 상처를 입은 듯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고 있었다.
다만 제갈사만이 안색을 무섭게 굳힌 채 한쪽에 우뚝 서있었다.
장내를 둘러본 숙야천릉의 안면근육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아버님!"
그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숙야염에게 달려갔다. 그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숙야염을 두 손으로 부축했다.
"천... 릉......."
숙야염의 입술이 힘겹게 움직였다. 그는 숙야천릉에게 노구를 의지한 채 고개를 저
었다.
"이곳을... 떠나라. 너에게... 복수를 부탁......."
굳어버린 혀를 간신히 움직이며 토해낸 것은 그 한 마디 뿐이었다. 그의 코와 입으
로 검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 뿐이었다. 숙야천릉의 부축도 아랑곳없이 그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아버님!"
숙야천릉은 급히 그를 일으켜 안으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북해의 제왕 숙야염의 최후였다. 북해의 큰 별이 진 것이다. 너무나 허망하고 처참
한 죽음이었다.
하필이면 만인의 축복을 받는 자신의 회갑일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일대의 효웅
이었던 북해의 제왕 숙야염의 최후치고는 너무도 참혹한 일이었다.
숙야천릉은 넋을 잃었다.
믿을 수 없는 부친의 죽음 앞에서 그는 입이 얼어붙어 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텅 빈 눈동자로 잿빛이 되어버린 부친의 얼굴을 하염없이 응시할 뿐이
었다. 마치 넋이 나가버린 듯했다.
천붕(天崩)의 슬픔이라고 했다.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믿었던 부친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충격
을 준 것이다.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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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에서 절규에 가까운 부르짖음이 얼어붙은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한편 등뒤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은 단천굉의 눈에 살기가 번쩍 일어났다. 그는 손에
쥔 단창을 신속하게 움직였다. 목표는 숙야천릉의 등이었다.
슉!
단창은 섬광처럼 뻗어갔다.
숙야천릉은 완전히 넋을 잃고 있어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니, 설사 알
았다고 해도 도저히 방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단창이 그의 등 한복판을 관통할 찰나.
휙!
무엇인가 숙야천릉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단창은
불꽃을 튀며 방향이 빗나가 버렸다. 동시에 바닥에 무엇인가가 떨어져 뒹굴었다.
그것은 한 자루의 비수였다.
"누구냐!"
단천굉이 노성을 지르는 순간 인영 하나가 빠르게 날아와 숙야천릉을 옆구리에 끼더
니 다시 반대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와장창!
인영은 창문을 부수며 날아갔다. 일련의 상황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것이라 마치 현실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제갈사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림없는 수작!"
그의 손이 창 밖을 향해 뻗었다고 느낀 순간.
"아악!"
창 밖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제갈사는 빛살처럼 날아갔다. 그의 뒤를
광무염도 지체없이 따랐다.
창밖에 내려선 제갈사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저 멀리 하나의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사라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광무염을 향해 짧게 말했다.
"무염. 잡아라."
"알겠습니다."
쉭!
광무염은 등뒤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허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올랐다.
숙야천릉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혼백이 육체를 이탈해 버린 듯한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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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런 그를 안은 채 사력을 다해 달리는 그림자는 자의여인이었다. 문득 여인은 불타
는 전각 곁에서 푹 고꾸라졌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의 안색은 잿빛이었다. 방금 전 제갈사의 장력을 등에 정
통으로 맞은 탓이었다.
두 사람은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사태청을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다
.
"......."
숙야천릉은 여전히 망연한 표정에 초점 없는 눈빛으로 멍하니 불타는 전각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의 동공에 불꽃이 춤을 추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했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여인이 힘겹게 몸을 뒤채며 고개를 들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용모였다. 피부는 빙결처럼 맑았으며 눈매는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다. 오똑한 콧날과 앵두같은 입술은 요염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이름은 매소련. 자봉(紫鳳)이란 외호를 지니고 있었다.
매소련은 힘겹게 기어가 숙야천릉의 손을 잡았다.
숙야천릉은 비로소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매소련을 바라보며 아
연한 표정을 지었다.
매소련은 힘겨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급소를... 맞았어요. 트... 틀린 것 같아요."
"소련......."
숙야천릉은 얼른 매소련을 부축했다.
매소련의 얼굴에는 이미 사색이 짙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사형... 이미... 사태청은 끝났어요. 숭의겸은 마교고수들을 끌고 이곳을 떠났어요
.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오직 당신 자신뿐이에요......."
그녀의 음성은 귀 기울여 들어야할 정도로 미약했는데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해요... 사형......!"
그녀는 힘을 다해 말했다. 숙야천릉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며 외쳤다.
"소련! 죽으면 안돼!"
매소련의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잦아드는 음성으로 더듬
더듬 말했다.
"그 동안... 옥교 언니가 무척... 부러웠어요......."
숙야천릉의 눈빛이 흔들렸다. 매소련은 편안하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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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의 가슴은 무척... 따뜻하군요......."
"소련... 너......."
숙야천릉은 가슴이 꽉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매소련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달콤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숙야천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
다. 그녀의 눈동자가 열린 채 굳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소련!"
그는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매소련의 심장에 황급히 귀를 갖다댔다. 그러나 이미 심
장은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숙야천릉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럴 수가......!"
그는 입술을 꽉 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혈관 속 피가 부글
부글 끓어올랐다. 전신을 태울 듯한 분노와 원한이 혈관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는
증오심에 몸부림치며 자신의 심장을 쥐어뜯었다.
그는 오열하며 매소련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뜬 채 숨져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매소련의 동공 속으로 하나의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난 것을.
그 그림자는 금세 동공을 가득 메웠다.
숙야천릉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악물었다. 그는 앉은 채 빙글 몸을 돌리며 손을 뻗
었다. 섬광(閃光)이 허공을 갈랐다.
"가거라!"
쌓이고 쌓인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해버린 일격이었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뒤이어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며 한 인영이 양단된 채 날
아갔다.
저만치 두 부분으로 분리된 채 추락한 인영은 광무염이였다. 두 사람을 추격해 왔던
그는 암습하려다 도리어 당하고 만 것이었다.
숙야천릉의 손에는 한 자루의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투명한 검신에서는 핏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
숙야천릉은 차가운 시선을 매소련에게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감정이 완전히 배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뉘 알겠는가? 무감(無感)의 동공 깊은 곳에 하늘도 치를 떨 정
도의 원한이 깊숙이 배어있다는 것을.
쿠쿠쿵.......
전각은 불덩이가 된 채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숙야천릉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오직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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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뿐이에요.
매소련의 마지막 말이 그의 뇌리를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었다.
"흐흐흐......."
숙야천릉의 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음울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중얼거렸다.
'옥교.......'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휘이이잉!
북해의 바람은 뼛속까지 얼릴 듯이 차다. 더구나 폭설까지 동반한 채 휘몰아치는 눈
보라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백극빙모산(白克氷母山) 중턱.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리면 사태청이 온통 화염에 휩싸인 채 검은 연기를 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좌측으로는 깎아지른 벼랑에 닿고 있었고 위쪽으로는 정상
에 이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설지 위에 취옥교가 누워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섬세한 몸 위로 속속 떨어져 내리
고 있었다. 혈도가 찍힌 듯 그녀는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맞으면서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옆구리에 인공으로 만든 날개를 단 조인(鳥人)이 음산한 웃음을 흘리
며 우뚝 서있었다.
"후후......."
조인은 야우혈성 소속의 고수였다.
상황은 간단했다. 취옥교는 숙야천릉이 밖으로 나간 후 급히 옷을 입고 뒤따르다 그
만 제압 당하고 만 것이다.
기실 취옥교의 본래 무공은 약하지 않았다. 어쩌면 야우혈성의 인물쯤은 혼자서 서
너 명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 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무공수련을 놓아버렸다. 가혹한 운명
앞에서 꺾인 이후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야우혈성의 인물 한 명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혈도를 찍힌 채 이곳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눈매가 가늘고 음침한 인상의 사나이는 힐끗 불길에 휩싸인 사태청을 바라보았다.
그의 얄핏한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어렸다.
"흐흐, 이제 사태청도 끝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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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 돌려 취옥교를 내려보았다. 그의 가느다란 눈빛에서 야릇한 빛이 일어났
다.
"후후... 사태청에서 너 같은 미녀를 만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취옥교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지 위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
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사내들의 넋을 빼놓기에 족했다.
사나이는 노골적으로 음욕을 드러냈다.
"흐흐, 이건 분명 굴러 들어온 복이렷다."
그는 취옥교의 완숙한 몸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내 평소 여색을 밝히지는 않지만 너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해. 너무 아름
답단 말이다."
취옥교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안타깝게도 오성단의 율법에는 여색을 탐하는 것이 금기로 되어있다. 하지만... 난
오늘 금기를 깨야겠다."
사나이의 눈빛이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취옥교는 절망을 느꼈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녀의 옥용은 말할 수 없이 해쓱
해졌다. 그녀는 도무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건 악몽이야 악몽! 결코 현실이 아니야! 그녀의 내부에서 끝없이 부정하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토록 당당했던 북해의 제국 사태청이 불바다가 되어버리고 지난 밤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숙야천릉은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니,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
는 지금 그녀의 육체를 범하려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취옥교의 가슴은 미어지다못해 터질 듯했다.
'나란 계집은... 왜 이다지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까?'
새삼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시려왔다. 가지런한 그녀의 속눈썹 사이로 맑은
이슬방울이 맺혔다.
짧은 순간 그녀의 뇌리 속으로 여러 개의 얼굴들이 스쳐갔다. 그 가운데서 가장 절
실히 떠오른 얼굴은 두 사나이였다. 장천린과 숙야천릉이었다.
체념은 빠를수록 좋았다.
취옥교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꿈에서 깨듯이 이성을 되찾았다.
"흐음......."
어느새 사나이가 그녀의 몸을 덮치고 있었다. 사나이의 투박한 손이 가슴속으로 들
어와 유방을 주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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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내의 손길을 느끼자 취옥교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침착해야 해!'
그녀는 싫은 표정을 짓지 않은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술에 취한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유방을 더듬어 대며 한 손으로는
자신의 옷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한창 열에 들떠 있던 사내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취옥교는 차분하게 말했
다.
"이런 상태에서 야합하고 싶진 않아요."
"음?"
사내의 가느다란 눈매가 춤추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단 말이냐?"
취옥교는 씁쓸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난 당신의 적수가 못돼요. 그리고... 난 처녀가 아니에요."
"호오! 그래서?"
"남자를 느끼고 즐길 줄 아는 몸이에요. 기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자유로운 상
태에서 당신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사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나도 나무토막을 안고 하는 건 별로다."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퉁겨 취옥교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취옥교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먼저 그녀는 풀어 헤쳐진 가슴의 옷매무새를 가다
듬었다.
사내는 조급한 표정으로 팔을 벌렸다.
"자, 이리 오너라. 설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
취옥교는 서늘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다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군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사내의 안색이 홱 변했다.
"무슨 뜻이냐?"
취옥교는 대답 대신 뒤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황급히 외쳤다.
"서라. 뒤는 절벽이다!"
취옥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잔하게 말했다.
"알아요. 이곳 지리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죠. 어릴 적부터 자라온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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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그녀의 음성은 더없이 쓸쓸했다.
"절벽 아래에는 한혈계(寒血溪)가 흐르죠. 그곳에 빠지면... 시체조차 찾지 못해요.
사내의 안색이 거듭 변했다.
취옥교는 말하면서 계속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사내는 충격을 받은 듯 말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취옥교는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과거... 나는 그곳에 빠져 죽은 사람을 몇 명 알고 있어요."
"서... 서라."
"이제 곧 그들의 숫자에 한 명이 더 추가될 거예요."
"아... 안 된다."
취옥교는 빙글 몸을 돌렸다. 이제 그녀는 절벽을 향해 선 자세였다. 사내는 땅을 박
차고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취옥교는 그가 당도하기 전에 몸을 날려버린
것이다.
"이런!"
사내는 절벽에서 멈춘 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취옥교의 교구가 빠른 속도로 떨어
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없었다. 그는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인공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그의 몸은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갔다.
쏴아아!
찬바람이 귀를 찢을 듯했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내려가도 취옥교가 떨어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
가 절벽을 채 반도 내려가기 전에 취옥교의 모습은 절벽 아래를 흐르는 한혈계 속으
로 모습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비... 빌어먹을......."
사내는 소태 씹은 표정으로 내뱉으며 날개를 휘저었다.
한혈계에 떨어지기 직전 그는 다시 솟아올랐다. 허공을 한 바퀴 원을 그린 그는 한
스러운 듯 도도히 흘러내리는 한혈계를 내려보며 욕을 퍼부었다.
"지독한 년! 죽음을 택할 줄이야."
그는 미련이 남은 듯 한혈계 위를 몇 바퀴 선회하다가 어딘 가로 사라져 버렸다.
쿠르르릉.......
한혈계는 비운의 여인을 삼킨 채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계곡을 휘감아 끝없이 굽이치
며 흘러갔다.
제갈사는 잔해만 남은 채 연기를 뿜고 있는 사태청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게 좁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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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눈, 무심한 표정에서는 도무지 내심을 엿볼 수가 없었다. 그의 뒤에는 단천굉을
위시하여 대독관과 흑묵룡이 서있었다.
단천굉이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결국 북해 사태청은 우리의 손에 무너졌습니다. 강호계에서 이 사실을 알면 경악할
것입니다. 하하핫! 지금 제일 보고 싶은 건 염무의 일그러진 얼굴입니다."
그는 기분이 무척 좋은 듯 대소를 터뜨렸으나 제갈사가 여전히 침묵하고 있지 헛기
침하며 말했다.
"사태청의 인물 중 칠 할 이상이 척살됐습니다. 나머지 놈들은 모두 도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사태청을 재건하긴 불가능할 겁니다."
제갈사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우리 쪽 피해는?"
단천굉의 호쾌하던 얼굴에 그늘이 어렸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백 팔십 명이 죽었습니다. 특히 육자경과 광무염의 죽음은 뼈아픈 손실입니다."
제갈사는 눈을 감았다.
'백 팔십... 오성단의 절반 가까이 사라진 셈이군.'
그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돌아가자."
둥!
갑자기 어디선가 둔중한 북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북소리가
한 번에 천지가 온통 뒤흔들렸다.
북소리의 음파는 처음에는 은은했으나 여운이 이어지면서 우레처럼 가슴을 진동시켰
다. 제갈사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 소리는......?'
이때 둥! 하고 다시 북소리가 들렸다.
중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두 번째 북소리에 기혈(氣血)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제갈
사는 침중하게 외쳤다.
"마고(魔鼓)!"
흑묵룡의 시커먼 얼굴이 마구 씰룩였다.
"고왕(鼓王) 해사아(海斯兒)!"
둥!
세 번째 북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더욱 큰 울림이었다.
위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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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음파에 진동되어 미친 듯이 회오리쳤다. 뿐만 아니라 북소리가 백극빙모산의
계곡을 타고 메아리치며 무시무시한 굉음(轟音)을 전파시켰다. 메아리가 되어 돌아
온 북소리는 갑자기 사방에서 수백 개의 북을 치는 듯이 증폭되었다.
그 순간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꽈르르르... 릉!
눈사태였다.
백극빙모산의 정상 부분은 물론이려니와 계곡과 산기슭에 천년 만년을 두고 형성되
었던 눈과 얼음에 균열이 가며 마침내 거대한 눈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끼... 아... 아... 악!"
무시무시한 괴성이 들렸다. 그것은 너무나도 날카로워 마치 쇠를 긁는 듯했다. 그야
말로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단천굉은 제갈사를 바라보며 경악성을 발했다.
"영주님! 이 소리는 시마(屍魔) 관중의 천마음(天魔音)입니다!"
제갈사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눈빛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매사를 치밀하고 완벽한 계산 속에 시행하는 제살사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십삼사(十三邪)가.......'
그는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아는 자는 조화성에서 오직 금불 숭의겸 뿐
이다. 하지만 설사 그가 이 사실을 알렸다해도 십삼사가 이곳까지 올 시간적인 여유
가 없지 않은가?'
제갈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둥!
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제갈사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전면을 노려보았다. 설풍 속에
육인의 인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영이 보였다 싶은 순간 그들은 유령처럼 제갈사의 코앞에 당도했다.
맨 앞에는 허연 칠을 한 탈을 쓴 인물, 담자개가 옷자락을 나부끼며 서있었다. 마교
의 소종사인 그가 앞장 선 것이다.
그의 옆에는 잔혹한 인상의 애꾸눈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상흔 투
성이였는데 손에 장검(長劍)을 움켜쥐고 있었다.
사검(邪劍) 막청이었다.
또 한 명의 괴인, 그는 괴이하게도 관(棺)을 짊어진 거구의 인물로 시마(屍魔) 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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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흰색의 죽립을 쓰고 손에는 백장미를 쥐고 있는 사나이 독로장미 서문표도 입가에
기소를 문 채 서있었다.
또 다른 인물은 양손에 작은 북채와 북을 들고 있는 키 작은 노인이었다. 제갈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고왕 해사아......."
그는 시선을 돌렸다. 여섯 번째 인물은 여인이었다.
흑발을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기른 여인이었다. 무섭도록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귀기(
鬼氣)를 느끼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이기도 했다.
'귀서시(鬼西施) 우문산요(宇文珊妖).......'
제갈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교 십삼사 중 육인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제갈사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육사의 뒤로 수백 개의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다가오
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제갈사는 그만 가슴이 식는 것을 느꼈다.
'염무! 그에게 역으로 걸렸다. 놈은 사태청을 미끼로 이곳 북해에 날 끌어들인 것이
로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으나 제갈사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됐다.
'한데 어떻게 내 계획을 눈치챘단 말인가?'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마교 소종사 담자개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
기 때문이었다.
"신산 제갈사, 이제 그대는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다."
신산은 과연 신산이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자네가 천면종(千面宗) 담자개이면서 동시에 마교의 소종사인 인물인가?"
담자개는 탈 사이의 그 무기력한 눈동자를 깜박였다.
"그렇다."
제갈사는 지그시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소문은 많이 들었다."
담자개의 눈이 괴이한 빛을 띠었다.
"우리의 출현이 매우 뜻밖이었을 것이다. 신산."
제갈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염무의 계략이었나?"
담자개는 괴소를 흘렸다. 그러는 사이 그의 눈빛은 더욱 무기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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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살인혈첩이 전달되었지."
제갈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어떻게 내 계획을 알았느냐?"
그때였다.
"그 대답은 내가 해주지."
뜻밖에도 그 음성은 제갈사의 등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
제갈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생각은 짧은 수록 좋은 것이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이었다. 일단 늦은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불러일으켰다.
펑!
"우욱!"
돌아서는 순간에 가슴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제갈사는 뒤로 칠팔 보나 밀려났
으며 입과 코로 피분수를 뿜어냈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그를 공격한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뇌호 대독관이었다.
"대독관... 네가 배신을......?"
대독관은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방금 날 대독관이라 했느냐?"
"......?"
"대독관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그... 그럼?"
대독관은 괴소를 흘리며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호면구를 벗었다. 그러자 전혀 다
른 얼굴이 나타났다. 요기를 느끼게 할 정도로 준수한 미남자의 얼굴이었다.
그의 몸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일어나더니 거구였던 몸이 두 자나 줄어들어 적당
히 헌칠한 체격으로 변모했다. 제갈사는 폭풍을 맞은 갈대처럼 몸을 흔들었다.
"무정도... 모용초!"
마교 십삼사의 일원인 무정도 모용초였다. 그가 바로 대독관으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초는 예전보다 많이 초췌한 모습이었다. 특히 그의 두 눈은 과거보다 더욱 더
무정해 보였다. 그는 제갈사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난 반년 간 신산 그대를 제거하기 위해 심혈을 다 기울였다."
그의 눈빛은 음산했다. 모골이 송연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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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사는 입 가장자리로 피를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단천굉이 폭갈을 터뜨렸다.
"모용초! 네놈을 죽여주마!"
그는 두 개의 단창을 뽑자마자 즉각 모용초를 공격했다. 그러나 단창이 채 뻗어나가
기도 전에 앞을 가로막는 인영이 있었다. 사검 막청이었다.
"흐흐! 너는 내가 상대해 주마."
어느새 발출된 검이 번뜩 섬광을 뻗었다.
카캉!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퉁기며 두 개의 단창은 뒤로 퉁겨나갔다.
단천굉은 처음부터 막청의 적수가 아니었다. 막청이 재차 검을 휘두르자 그는 대번
에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연신 뒤로 밀려나갔다.
한편 무정도 모용초는 제갈사를 노려보며 음산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흐, 제갈사. 너는 이십 년 전 내가 가졌던 행복이 모두 무너뜨렸다."
제갈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모용초의 눈에서 얼음장같은 냉기가 피어올랐다.
"네가 세운 계획으로 인해 성주께서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지. 성주는 그 상처를 치
료하는 과정에서 내 행복을 무너뜨렸다. 내 사랑하는 여인을......."
제갈사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천의 두뇌를 지녔다해도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일이었다.
모용초는 감정이 격해진 듯 안면 근육을 경련했다.
"그 사실을... 반년 전에야 알았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해
야할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신산 제갈사는 난생 처음으로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널 죽이는 것이다. 제갈사!"
스르... 릉!
모용초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았다. 검을 치켜세움과 동
시에 냉갈을 터뜨렸다.
"무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의 최후 초식이다."
파아아!
그는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의 신형은 칼과 하나가 된 채 허공에 떠올랐다. 도약한 순간 그의 뇌리에 환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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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후취영(侯翠影)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반년 전이었다. 당시 그녀는 술과 황음(荒淫)에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죽어가면서 그녀는 허망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가증스럽고도 저주스러운 그녀의 한(恨)을... 그녀가 왜 그토록 미쳐야만 했었는지
를.
......초랑. 이십 년 전 무영과 신산이 아버님을 해치던 그날이었어요. 두 사람의
합공(合攻)과 치밀한 함정에 걸린 아버님은 극적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로 인해 중상을 입어 태양십팔경락(太陽十八經絡)을 다치는 불운을
당했어요. 한데 그 상세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만.......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말았답니다. 결국 벌어져서는 안될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아버님은 양기(陽氣)가 팽창하여 이성을 잃은 채 그만 간호 중
이던 날... 겁간하고 말았어요.
......호호호홋! 부녀가 상간(相姦)을 한 것이죠. 초랑, 그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단 말인가요?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다고 했지만... 그건 내겐 너무나
먼 것이었어요.
......초랑, 모든 것을 저주해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아버님은 물론 당신조차도
증오해요. 더불어 더러운 내 육체와 영혼까지도 저주해요.
......이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날 거예요. 호호홋! 더러운 삶과 지긋지긋한
한까지도 말이에요. 호호호! 하늘도 땅도, 신까지도 과연 이런 날 받아줄 수 있을까
요?
모용초는 허공에 떠 있었다.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내심 부르
짖었다.
'취영, 너는 죽었지만 네가 내게 남긴 그 상처는 영원히 치유할 수 없게 되었다.'
칼과 몸! 두 개의 각각 다른 개체는 하나가 되었다. 도신일체(刀身一體)가 된 그의
몸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우주와 동일한 존재가 되었다. 우주와 인간이 하나가 되
었을 때 공간이 갈라졌다.
파아아아......!
허공 가득 선혈의 비가 뿌려졌다. 회오리바람에 춤추던 눈송이조차 한 순간에 새빨
갛게 물들어 버렸다.
제갈사는 눈을 감았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염무, 네가 이겼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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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희디흰 설지 위에 시뻘건 피가 확 번졌다.
양단된 신산 제갈사의 몸은 새하얀 눈 위에 선혈을 뿌리며 서서히 쓰러졌다. 일세를
지략으로 풍미했던 한 기인의 최후는 그렇게 막을 내린 것이다.
평생을 오직 조화성을 무너뜨리겠다는 한 가지 집념만으로 살아왔던 천의 두뇌를 지
녔던 불세출의 기인. 신산 제갈사란 이름이 무림사의 뒷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무정도 모용초는 여전히 칼을 움켜쥔 채 우뚝 서있었다.
사위는 조용했다.
그토록 기승을 부리며 몰아치던 눈보라조차 어느새 멎어 있었다. 모든 것이 적막에
잠겨 있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정지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또 한 사람.
단천굉도 설지 위에 누워있었다. 그의 허리는 분리된 채 상체 따로 하체 따로 눈 위
에 엎어져 있었다.
다시 또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흑묵룡이었다. 그는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단천
굉의 곁에서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북해의 제국 사태청을 궤멸시켰던 오성단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 마교육사
와 그들을 따라온 마교의 고수들에게 포위되었다. 양자간에 용납할 수 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죽느냐, 죽이느냐?
오직 두 가지 길밖에 없는 갈림길에서 양대세력은 살기 위해서 처절한 몸부림을 쳤
다. 결과는 너무나 일방적으로 마감되었다.
무적을 자랑해 오던 오성단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눈 위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전멸해버린 것이다.
적멸(寂滅).
완벽한 침묵이 설지 위에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시체들뿐이었고,
희디흰 눈은 고유의 색을 잃고 시뻘겋게 젖은 채 녹아 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넋 나간 듯 멍하니 서있는 모용초의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다가갔다. 담자개
였다.
"형님......."
모용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로 희끗한 눈송이 하나가 떨어지더니 금방 녹아 내렸다.
그의 눈 가장자리로 굵은 눈물이 솟아 나왔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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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자개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그 순간이었다.
"흐흐흐흐......."
"......?"
"흐흐... 하하하하하......."
모용초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작정 걸어가면서 그는 눈앞에 누
군가 있기라도 한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취영, 네 한은 내가 갚았다. 한데 너는 왜 울고 있느냐? 왜?"
"형님!"
담자개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모용초는 버럭 외치더니 그를 뿌리치고 휘청휘청 앞으로 걸어갔다.
"취영... 취영... 취영......."
그의 모습은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으하하하하하......!"
멀리 절규와 같은 모용초의 광소가 들려왔다.
모용초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제정신을 상실한 듯 싶었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은
눈 덮인 벌판 저쪽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때까지 마교십삼사의 인물들은 어두운 안색으로 그가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침묵은 영원히 그들의 가슴을 지배할 것
만 같았다.
문득 사검 막청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대로 둘 순 없다. 내가 뒤따라 가 보겠다."
귀서시 우문산요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조심하세요. 모용공자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니에요."
막청은 힐끗 그녀를 바라보며 쓴웃음 지었다.
"그가 날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소. 왜냐하면......."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나의 친구니까."
그의 모습도 모용초가 사라져 간 곳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남아있는 자들은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 두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오랫동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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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마교십삼사. 그들은 보이지 않는 운명의 질긴 끈에 묶인 공동운명체들이기 때문이었
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더니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비극이 벌어진 곳, 그곳은 북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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