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해란(海亂) (61/87)

제9장 해란(海亂) 

끝없이 펼쳐져 있는 망망대해(茫茫大海). 

바다는 짙푸른 색으로 출렁이고 있다. 해상에는 한 척의 범선이 돛을 펄럭이며 항해 

하고 있었다. 

쏴아아! 

범선이 지나간 곳에는 파도가 흰 물살을 일으키며 긴 흔적을 남기곤 한다. 

범선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의 용모는 한결같이 이국적이었다. 우뚝 

하게 높이 솟아오른 콧날, 움푹 패인 벽안(碧眼)에 빛나는 금발을 한 인물들이었다. 

뚝딱! 땅! 땅! 

선부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갑판 위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를 

흰 천으로 감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반월형의 짧은 도를 차고 있었다. 

선실로부터 금포노인이 걸어나왔다. 그 역시 벽안에 금발을 한 인물로 부드럽고 온 

후한 인상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라사(阿羅斯)였다. 

아라사는 갑판 위에서 일하고 있는 선부들을 향해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들 힘내라. 오늘 저녁이면 청도(靑島)에 도착할 것이다." 

파자사국의 거상 아라사- 그는 중원과의 교역을 위해 항해 중이었다. 

오 년 전 중원에 온 바 있던 그는 본국인 파자사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상업적 기반 

을 확고히 다졌다. 그리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라사는 잔잔한 눈빛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의 뇌리에 한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허허... 장대인, 지금쯤은 무척 많이 변했겠구려." 

그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내심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태양의 눈을 선물한 미녀와 결혼하여 잘 살고 있겠지.' 

그는 감회에 젖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개봉부로 가 상관대인을 만난 후 남창으로 가봐야겠구나.' 

그는 갑판을 한 차례 돌아본 후 선실로 돌아갔다. 

선실 안에는 한 여인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병약해 보였으나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빛나는 금빛 머리 

카락은 어깨를 뒤덮고 있었으며, 꿈꾸는 듯 그윽한 벽안은 마치 심해(深海)를 연상 

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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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정성껏 그린 듯 섬세한 콧날과 앵두빛 입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 

는 상아빛 치아는 가히 선계의 여인을 보는 듯했다. 

피부는 진주빛이었으며, 투명할 정도로 희었다. 

미녀는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인 취록색 의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잘록한 허리의 선이 

강조되는 요대를 두르고 있었다. 가히 매혹적인 미인이었다. 

여인은 섬섬옥수를 놀려 가끔 책장을 넘기며 독서에 몰두하고 있었다. 

선실 문이 열리며 아라사가 들어섰다. 

"유리야, 몸은 좀 어떠냐?" 

유리(琉璃)라 불린 미녀는 고개를 들며 생긋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이제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아라사는 혀를 찼다. 

"쯧! 아무래도 널 공연히 데리고 온 듯 하구나." 

유리는 응석을 부리듯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배를 처음 타보는 데다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라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의 꿈꾸는 듯한 벽안에 기대의 빛이 서렸다. 

"전 상관없어요. 솔직히... 가슴이 두근거려요. 내일이면 말로만 들던 중원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허허......." 

아라사는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리는 벽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냈 

다. 

"참, 아버님을 도와주셨다는 장대인이란 분도 꼭 만나보고 싶어요." 

"녀석." 

아라사는 대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선실 밖에서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아라사님!" 

아라사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괴선박이 접근 중입니다." 

"괴선박?" 

아라사는 안색이 변하며 급히 선실 밖으로 나갔다. 

"저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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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을 바라보던 아라사는 안색이 홱 변했다. 

쏴아아! 

범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괴선(怪船)이 있었다. 괴선은 실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선수에는 길고 뾰족한 쇠가 뻗어 나와 있었으며 갑판은 강철로 덮여 있 

었다. 활짝 펼쳐진 돛폭이 빽빽한 것이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철갑선의 형태였 

다. 

돛대에는 검은 색의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바람을 맞아 펄럭이고 있었다. 

'검은 바람(黑風)!' 

아라사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임전태세를 갖추어라!" 

"옛!" 

수하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일제히 옆구리에 차고 있던 반월도를 뽑았다. 

해적선 검은 바람이 가까워지자 갑판 위의 인물들이 보였다. 그들은 선수 쪽에 몰려 

있었는데 흑의를 입은 무사 수십 명이 도열한 채 서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번쩍이 

는 병장기가 쥐어져 있었다. 

선두에는 한 쌍의 남녀가 해풍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우뚝 서있었다. 

아라사의 금빛 눈썹이 부르르 경련했다. 두 사람은 그가 익히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 

다. 

금월(金月)과 요미(妖美)였다. 

금빛의 구레나룻을 턱밑까지 기른 금월은 번쩍이는 황금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머 

리에도 휘황찬란한 금관(金冠)을 쓰고 있었다. 

삼십대 후반으로 접어든 그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금빛 털의 독수리가 걸터앉은 채 붉은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요미 역시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홍의(紅衣)에 가슴의 굴곡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육 

감적인 차림새였다. 허리에는 황금과 보석이 장식된 채대를 두르고 있었다. 

양 손목과 가슴에도 광휘를 발산하는 장신구들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 요 

요한 미소를 문 채 아라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라사는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해적선은 범선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금월은 아라사를 향해 괴소를 흘렸다. 

"흐흐! 오랜만이오, 아라사공." 

그의 말은 유창한 파자사국어였다. 

"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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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사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금월의 눈빛이 번쩍였다. 

"십오 년만에 만나는 것 같구려." 

아라사는 할 말을 잃었다. 드넓은 해상 한 가운데서 금월을 만난 것은 가히 충격적 

이었다. 

'저 놈은... 파루다섬에 유배되어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살아 있다니.' 

그는 불신에 찬 눈으로 금월을 바라보았다. 

금월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아라사, 널 만나게 해준 하늘에 감사한다. 으하하하핫!" 

금월의 광소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반면 아라사의 심장은 얼어붙고 있었다. 

금월은 파자사국의 귀족 소와루의 아들이었다. 

십오 년 전, 그들 부자는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반란은 실패했고 

소와루는 사형되었다. 그의 아들 금월은 파루다섬으로 유배되어 평생을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감금되었었다. 

한데 파루다섬에 있어야할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파자사국의 귀족이었던 아라사는 소와루 부자의 반란을 감지하고 그들의 모반을 분 

쇄했던 당사자였다. 소와루를 사형에 처하고 금월을 유배시킨 것 또한 아라사의 공 

이었다. 

금월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라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라사, 이제 드디어 아버님의 복수를 할 때가 왔다." 

그는 뒤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휙! 휙! 

흑의무사들이 기쾌무비한 신법으로 범선으로 날아왔다. 

쐐애액! 

"크윽!" 

흑의무사들은 범선에 내려서자마자 일제히 살수를 펼치기 시작했다. 갑판 위는 금세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칼을 맞고 쓰러지며 부르짖는 단말마 

, 토막난 사지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갑판은 순식간에 핏물로 물들고 말았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고도의 무공을 닦은 해적들의 살수에 범선의 선부들은 처음부 

터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공격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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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느새 덮쳐온 금월에 의해 사로잡히고 말았다. 금월 

은 그의 맥문을 움켜쥔 채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아라사, 네게 이런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소매 속에서 종잇장같이 얇은 면도를 꺼냈다. 아라사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아버 

렸다. 

"가거라! 아라사." 

면도는 아라사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으아아악!" 

아라사는 참혹한 비명을 질렀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피보라가 자욱히 일어났다. 파 

자사국의 거상 아라사의 몸은 정수리에서 가랑이까지 분리되어 즉사해버리고 말았다 

실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아악! 아버님!" 

비단폭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과 함께 섬세한 인영이 선실로부터 뛰쳐나왔다. 

"음?" 

금월은 고개를 돌리다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선실 문 앞. 

유리가 망연자실한 채 서있었다. 그녀의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에는 절망과 비탄, 경 

악이 뒤엉켜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금월의 눈이 괴이한 빛을 발했다. 그는 유리의 매혹적인 아름다움 

에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이때 믿을 수 없는 부친의 죽음에 넋을 잃고 있던 유리는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저 

주에 찬 눈빛으로 금월을 쏘아보았다. 

"이... 원수!" 

그녀는 비통하게 부르짖으며 금월에게 덤벼들었다. 

"어딜!" 

연약한 여인의 돌진은 무모하기만 했다. 그녀는 맥없이 금월의 손에 맥문을 잡히고 

말았다. 

"흐흐... 네가 아라사의 딸이냐?" 

금월은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유리의 몸을 훑어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계집이구나." 

그는 유리의 매혹에 반한 듯 슬며시 손가락으로 유리의 뺨을 건드렸다. 유리의 눈썹 

이 바르르 경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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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적! 아버님... 흑!" 

유리는 오열을 터뜨리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무공을 익히지 못한 그녀는 갈고리처럼 

맥문을 옥죄고 있는 금월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금월은 탐욕의 눈빛을 번쩍이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 앙탈을 부리니 더욱 귀엽구나." 

그는 수하들에게 유리를 밀쳤다. 

"이 계집을 배로 끌고 가라." 

"옛!" 

해적 한 명이 힘차게 대답하며 유리를 끌고 해적선으로 몸을 날렸다. 

"놔! 놔라......." 

유리는 앙칼지게 외치며 반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해적의 옆구리에 끼워진 

채 해적선으로 사라졌다. 

한편, 요미는 독기 어린 눈빛으로 금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치켜 올라간 눈 

에는 질투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금월은 진작부터 그런 요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냉 

혹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판 위에는 즐비한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아라사의 수하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멸한 것이다. 

"불을 질러라." 

명을 내린 그는 곧바로 해적선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막 선실을 향해 걸어갈 때였 

다. 수하 한 명이 사색이 된 채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두령, 크... 큰일났습니다." 

금월의 안색이 음침하게 변했다. 

"방금 뭐라고 불렀느냐?" 

흑의무사는 황급히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금월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기억해라. 나는 제국의 왕이다.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 

"그... 그 계집이 바다에 투신했습니다." 

"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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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월의 안색이 싹 변했다. 

"병신 같은 새끼!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하느냐?" 

펑! 

그는 분통이 터진 듯 냅다 발길로 수하를 걷어찼다. 수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저만치 굴러갔다. 금월의 분노에 찬 외침이 떨어졌다. 

"찾아라! 네 목숨을 걸고라도 찾아 내 앞에 대령해라!" 

"아... 알겠습니다." 

수하는 황급히 대답하며 그대로 신형을 날려 바다 속으로 뛰어내렸다. 

"빌어먹을......." 

금월은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안면을 잔뜩 구겼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기다렸다 

대략 일각쯤 되었을까? 

온몸이 흠뻑 젖은 수하가 갑판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의 몹시 낭패한 표정이었다. 

그가 뭐라 입을 열려 하는데. 

"목숨을 걸라고 했다!" 

콱! 

"끄윽!"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막 고개를 숙이던 수하의 뒤통수를 금월의 발이 짓밟았다. 

흑의무사의 머리는 수박처럼 으깨지며 갑판 위에 허연 뇌수를 쏟고 말았다. 한 번의 

실수가 죽음을 부른 것이다. 

"가자!" 

금월은 아쉬운 듯 바다를 노려보다 명을 내렸다. 방금 전 잠시 보았던 유리의 매혹 

적인 모습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저으며 선실로 향하고 있었다. 

쏴아아....... 

해적선 검은 바람은 파도를 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라진 바다에는 불 

붙은 범선이 검은 연기를 내며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정유현(靜有縣). 

청도(靑島)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작은 어촌으로 주민들 대부분이 고기잡이로 먹고 

사는 곳이다. 

오후 무렵 마을 입구에 말 탄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장천린과 천사예였다. 

두 사람은 꽤 친밀하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단 둘만의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자 

연스럽게 분위기가 익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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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천사예의 감정은 고조될 대로 고조되어 있었다. 장천린을 향한 그녀의 애모는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비록 짝사랑이긴 하나 그녀의 마음은 온통 장천 

린에게 쏠려 있었다. 

다만 장천린은 천사예의 그런 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천사 

예를 이성(異性)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만 누이 정도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호칭도 천소저(千小姐)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장천린은 마을 어귀에서 말의 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사예, 피로하지 않소?" 

천사예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아요." 

"하하! 거짓말. 매일 수백 리를 달려왔는데 어찌 피곤하지 않겠소?" 

천사예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묘한 매력을 풍겨냈 

다. 

"정말 조금도 피곤하지 않은 걸요." 

장천린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언제라도 힘들면 얘기하시오." 

천사예는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요. 저 같은 계집에게......." 

장천린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다음 부턴 그런 말하지 마시오." 

"네......." 

모기소리만하게 답하는 천사예의 눈에는 기쁨이 넘쳐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 한 가운데로 들어서자 어민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어민들은 두 사람을 향해 잔뜩 경계의 빛을 띠는 것이 아 

닌가? 그들은 눈길이 부딪칠 때마다 황급히 시선을 피하곤 했다. 

'이상하군. 아무리 외인이라 해도 지나치게 경계하는군.' 

장천린은 의아한 느낌을 받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의 한쪽에 객점(客店)이 있었다. 

청해객점(靑海客店)이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음, 이곳이로군.' 

그는 객점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객점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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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점 안은 초라할 정도로 단조로운 규모였다. 불과 대여섯 개의 탁자가 창가에 면해 

붙어 있을 뿐 손님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늙은이 한 명이 탁자의 먼지를 

털다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장천린과 천사예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무엇을 드시겠소?" 

장천린은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노인장이 청해객점의 주인 곽호진이오?" 

"그렇습니다만......." 

노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장천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외다." 

"무슨 말씀인지?" 

"태무결(太無缺) 방주를 만나고 싶소." 

순간 노인의 안색이 싹 변했다. 

슉! 

곽호진은 전광석화처럼 수도를 세워 장천린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야말로 돌발적인 

공격이었다. 장천린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가볍게 피한 후 손목을 낚아챘 

다. 

"윽!" 

곽호진은 맥문이 제압되며 웅후한 잠력이 혈맥을 차단하자 비명을 질렀다. 장천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손을 놓아주었다. 

"개봉부의 총단에서 귀띔 받고 왔소이다." 

장천린의 말에 곽호진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귀하는... 뉘시오?" 

장천린은 품속에서 목패(木牌)를 꺼내 보였다. 

검은 나무로 된 목패의 중앙부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금빛 수실이 열 가닥의 매 

듭을 하고 있는 특이한 모양이었다. 곽호진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개방의 삼결제자 곽호진이 삼사 태상장로께 인사드립니다." 

놀란 것은 도리어 장천린이었다. 

'태상장로?' 

그가 지닌 목패는 일 년 전 태무결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런데 목패를 보여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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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 태상장로(太上長老)란 말을 듣다니. 

곽호진은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그 목패는 본방에 하나뿐인 성개령(聖 令)입니다. 방주께서는 개방의 전 제자들에 

게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성개령을 소지하신 분께는 태상장로의 호칭과 더불어 방 

주님과 동등한 대우를 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아울러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라 하셨 

습니다." 

장천린은 비로소 이해가 갔지만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했다. 

'태무결은 날 위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개방 소속으로 밀어 넣은 셈이군.' 

그는 내심 고소를 지었으나 불쾌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태무결 방주가 이곳에 있는 것이 틀림없소?" 

"그렇습니다." 

"지금 어디 계시오?" 

"오늘 아침 팔결장로 분들과 함께 출타하셨습니다. 저녁 안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곽노인,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소?" 

곽호진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민들이 외부인을 경계하는 눈치였소. 게다가 태방주가 개봉에서 갑자기 이곳으로 

온 이유도 궁금하오." 

곽호진은 멈칫하더니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실은 닷새 전 이곳에서 큰 싸움이 있었습니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큰 싸움이라니?" 

"조화성의 산동성(山東省) 단주인 오악마군(五惡魔君) 이능소(李凌召)가 화산파의 

고수들과 충돌했습니다." 

곽호진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 싸움에서 양자간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바람에 죄 없는 어촌 사람들도 십 

여 명이나 죽음을 당했지요. 더욱이 화산파의 장문인은 치명상을 당했습니다." 

"음." 

"어제까지만 해도 조화성의 인물들이 마을을 샅샅이 뒤지며 살아남은 화산파 제자들 

을 수색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마을이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화성에서는 

화산파의 생존자들을 찾지 못하자 비로소 어제 철수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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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비로소 정유현 어민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렸 

다. 

'조화성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군.'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하긴 신산이 죽은 이상 그 누가 염무를 견제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장천린은 가슴이 무겁기만 했다. 

쏴아아... 철썩! 

망망대해로부터 밀려온 파도가 해안에 부딪쳐 흰 거품을 내며 스러진다. 

오후의 햇살이 해안에 떨어져 바다와 백사장이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멀 

리 바라보이는 수평선에는 그림처럼 하나의 섬이 떠있었다. 

장천린과 천사예는 나란히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두 시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태무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 

며 바닷가를 산책하는 중이었다. 

해안은 절경이었다. 특히 수천 년 동안 파도에 깎이고 깎여 온갖 기괴한 형상을 하 

고 있는 암벽이나 바위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따금 큰 파도가 밀려와 암벽 

에 물거품을 토해내며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다. 

두 사람은 대자연이 만든 장엄하고 신비한 정경을 감상하며 모처럼 만의 한가함을 

즐기고 있었다. 

간혹 어구(漁具)를 손질하던 어민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리며 경계의 표정을 짓곤 했 

다. 장천린은 어민들의 태도에 고소를 지었다. 

천사예도 부담스러운 듯 말했다. 

"정말 조화성으로 인한 피해가 대단한 것 같아요. 이 마을 뿐 아니라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숱한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정유현으로 오는 동안 조화성이 일으킨 수많은 혈겁의 흔적들을 볼 수 있 

었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무림장악에 나서고 있었다. 유일하게 조화성을 견제하던 

신산이 죽은 후로 조화성은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장천린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염무가 아무리 강하다해도 혼자서 조화성의 수만 명에 달하는 고수들을 모두 다스 

리지는 못한다. 따라서 그의 통제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그 

와중에서 조화성을 등에 업고 숱한 패륜과 혈겁이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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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천사예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녀의 큰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실려 

있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저... 저게 뭐죠?" 

천사예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장천린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다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들의 일 장 거리에 한 마리의 게 

가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사예, 저 놈을 보고 놀란 것이오?" 

"이... 이상하게 생긴 동물이에요." 

"바닷가에서는 흔한 놈이오. 게라고 하는 것이지." 

장천린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바다는 난생 처음인 걸요." 

천사예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린은 문득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예는 아직도 그의 팔을 꼭 붙잡 

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장천린은 문득 부드럽고 탄력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팔꿈치가 천사예의 가슴 부 

위를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비로소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사예, 이제 그만 팔을 놓아주시오. 게는 벌써 사라졌소." 

"어머!" 

천사예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녀는 얼른 팔을 놓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애꿎은 소맷자락만 만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장천린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만 돌아갑시다. 사예." 

"네......." 

천사예는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황혼이 사위에 황금빛을 뿌리는 가운데 

그녀의 목덜미도 금빛으로 물들었다. 

바닷가의 바위 옆에 여섯 명의 아이들이 빙 둘러싼 채 나뭇가지로 무엇인가를 건드 

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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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는 사람이 길게 누워있었다. 그것도 금발의 여인이었다. 

여인은 죽은 듯 누워있었는데 얼굴과 몸이 해초에 감겨 있었고, 옷은 군데군데 찢겨 

나가 있었다. 

아이들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금발여인의 몸을 여기저기 건드리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것 봐. 아직도 안 죽은 것 같다." 

"대체 뭘까? 머리카락이 금색인 건 처음 봤어." 

"혹시... 인어가 아닐까?" 

"에이, 인어라면 꼬리가 있어야지." 

"바보! 나찰(羅刹)이야. 이 머리카락 좀 봐. 이런 머리카락을 본 적이 있니?" 

"글세... 나찰 치고는 너무 예쁜데?" 

"어른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쳇! 어른들이 알면 틀림없이 이 여자를 죽일 거야." 

"그럼 어떻게 하지?" 

아이들은 갑론을박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일남일녀가 불쑥 아이들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로 돌아가던 장천린과 천사예였다. 

아이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겁먹은 표정을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 중에서 

제법 머리가 큰 아이가 다급히 변명했다. 

"우... 우린 아무 잘못도 없어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 

호이기라도 한 듯 다른 아이들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쳐 버렸다. 

장천린은 아이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순진한 아이들이거늘 이토록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니.' 

그는 고개를 돌려 금발의 여인을 내려보았다. 순간 그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파자사국의 의복이다!' 

그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금발여인의 복장은 분명 중원여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비 

록 군데군데 찢겨져 나가긴 했어도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인 복장은 파자사국 여인들 

만의 고유의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급히 여인에게 다가가 얼굴에 휘감겨 있는 해초를 걷어내고 진흙을 대충 닦아 

냈다. 

"......!" 

장천린은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해초와 진흙으로 가려져 있던 여인의 용모는 너무 

도 아름다웠다. 매혹! 그 자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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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이는 이십 전후였으며 그린 듯이 선명한 오관에 피부는 진주빛이었다. 

장천린은 한동안 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뒤늦게 그녀의 목에서 금빛이 반사되는 것 

을 발견하고 목걸이를 찾아냈다. 

목걸이는 황금에 보석을 박아 넣은 것으로 한 눈에 보기에도 성(城)을 살 정도로 값 

비싼 것이었다. 

'이 목걸이는!' 

그는 두 번째 충격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목걸이를 뒤집어 보았다. 그곳에는 

지렁이처럼 몇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파자사국의 문자였다. 장천린은 과거 아라사와 교분을 맺고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글을 해독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유리(琉璃)에게......> 

'유리!'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이 여인이 아라사공의 딸 유리공녀(琉璃公女)란 말인가?'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파자사국의 거상 아라사의 

딸이 어찌하여 중원의 한 어촌 바닷가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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