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오파동맹(五派同盟)
"유리야!"
"아악! 아버님......!"
끔찍한 장면이었다. 아라사가 유리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다 어디선가 날아온 칼에
의해 목이 잘리고 말았다. 유리는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몸부림쳤다.
범선이 화염에 휩싸인 채 침몰하고 있었다. 선부들이 아우성을 치며 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다로 뛰어들고 있었다.
"으핫핫핫핫!"
악마와도 같은 금월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가 이빨
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안돼! 안돼! 하면서 그녀는 뒷걸음질쳤다. 등에 어딘가에 부
딪쳤다.
"흐흐......."
금월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움직이자 유리의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유
리는 공포에 질린 채 손으로 가슴을 가렸으나 소용없었다. 금월은 그녀를 낚아챈 후
징그러운 입술을 눌러왔다.
"아... 안돼!"
유리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내지른 비명에 놀라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녀의 벽안에는 공포의 빛이 가
득했다.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허름한 침상 위에 누워있었고 몸에는 얇은 이불이 덮여져 있었다.
'여기는?'
유리는 어리둥절했다. 무엇이 어찌된 상황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아!"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전신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그녀는 이
를 악물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앗!'
그녀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이불 속의 그녀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 아닌
가?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기... 기어코 그 악마에게 당했단 말인가?'
방금 전의 상황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단 말인가? 그녀는 절망에 사로잡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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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만 심은 비참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몸에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정도 몸의 감각이 돌아오자 비로소 순결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는 한숨을 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범선이 해적선에게 공격당하고 부친이
금월에 의해 목이 잘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흐흑! 아버님......."
그녀는 설움이 복받쳐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탐스러운 금발이 해초처럼
출렁이며 흰 어깨가 드러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더욱 서러운 오열
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상체가 드러났다. 연약해 보이는 어깨나 팔에 비
해 젖가슴은 놀랄 만큼 발달해 있었다. 그것은 중원의 여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으며 팽팽하게 느껴졌다.
이때 문이 열리며 방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그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방안에 들어선 인물은 가냘픈 체격의 남자였다. 남자치고는 체구가 왜소할 뿐 아니
라 용모도 예쁘장한 미소년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남장여인 천사예였다.
유리는 급히 이불을 당겨 목까지 덮어버렸다.
"깨어 나셨군요?"
천사예는 미소지으며 침상으로 다가왔다. 유리는 더욱 몸을 움츠렸다.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아가씨."
천사예는 부드럽게 말했으나 유리는 알아듣지 못한 듯 잔뜩 겁먹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천사예는 다감하게 물었다.
"제 말을 알아듣겠어요?"
유리는 그녀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천사예의 다정한 표정과 고
운 음성으로 미루어 그녀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제야 안도감
을 느낀 듯 약간 경계를 풀었다.
천사예는 품속에서 푸른색의 약병을 꺼내며 상냥하게 말했다.
"아가씨, 우선 몸의 상처부터 치료해야겠어요."
유리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천사예는 답답했다. 그녀가 한인이 아닌 것은 외모를 통해 알았지만 한어(漢語)를
전혀 못 알아들을 줄은 몰랐다. 결국은 손짓 발짓을 총동원해서야 간신히 의사를 전
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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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천사예는 침상에 걸터앉은 후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병 속에는 흰 액체가 담겨 있
었다.
"상처는 별로 심하지 않아요. 이번만 바르면 다 나을 거예요."
약을 바르기 위해서는 이불을 걷어야 했다. 유리는 이불을 단단히 붙잡고 놓으려 하
지 않았다.
천사예는 더욱 우호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설명했다.
"겁내지 말아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유리는 한동안 천사예의 눈을 바라보다 그녀의 순수한 호의를 느낀 듯 고개를 끄덕
였다.
천사예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누우세요."
유리공녀는 짐작으로 말을 알아듣고 몸을 눕혔다. 이불을 젖히자 그녀의 나신이 드
러났다.
신이 대리석으로 세공한 듯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유리의 나신은 그야말로 완
벽하게 균형 잡힌 예술품과 같았다. 같은 여자이면서도 천사예는 찬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유리에게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희다못해 투명한 느낌마저 주는 피부였다. 만지면
눈가루라도 묻어날 듯했다. 어디 그 뿐인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어깨와 상반신을 덮을 정도로 길었다.
실로 환상적인 여체였다.
천사예는 유리의 몸을 내려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같은 여인이 이런 느낌을 받을
적에 남자라면 어떻겠는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약병의 액체를 손바닥에 쏟았다.
흰 액체를 유리의 상처난 몸 곳곳에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천사예는 손바닥에 닿
는 감촉에 다시 한 번 탄성을 발했다.
'아아, 정말 너무나 부드러운 피부야.'
그녀는 은근히 질투심마저 느꼈다.
유리의 상처는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바다에 뛰어든 후 해초와 바위에 긁혀 찰
과상이 여러 군데 나있었다. 상처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어 다소 악화된 것
뿐이었다.
장천린은 담담한 눈길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천사예가 준 중원여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흔한 옷이
었으나 유리의 아름다움이 워낙 빼어나서인지 화사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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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그녀의 미모에 놀란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눈앞의 금발여인과 파자사국의 상인 아라사와의 관계였다
"......."
유리는 경계의 빛을 담은 눈으로 장천린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본 중원으로 오면서 만난 남자는 해적선 검은 바람의 금월이었다. 그의
존재는 유리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다. 따라서 그녀는 남자라면 본능적으로 적개
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장천린의 눈빛은 너무도 고요했다. 그녀가 본 금월의
사납고 욕망에 찬 눈빛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녀는 눈길을 피해버렸다. 마음이 걷
잡을 수 없이 흔들린 것이다.
지금 그녀는 눈앞의 사나이를 알지 못했다. 그가 누군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비록 그에게 구함 받긴 했으나 어떤 일들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게 될지 아무 것
도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장천린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파자사국에서 왔소?"
유리는 놀라움으로 인해 눈을 치떴다.
'우리말을 알고 있어!'
유창하진 않아도 분명 상대는 파자사국 말을 하고 있었다.
일순 굳어있던 그녀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번졌다. 마치 암흑 속에서 한 점의 불빛
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 그래요."
그녀는 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어 흥분이 깃든 음성으로 반문했다.
"파자사국을 아시나요?"
장천린은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목걸이를 보니 아가씨의 이름은 유리인 모양이구려?"
그의 손에는 유리가 늘 걸고 있던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천사예는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
을 하고 있는지 몰랐으나 그녀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장천린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혹시 아라사란 분을 아시오?"
유리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역만리의 중원에서 부친
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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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버님을 아시나요?"
장천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여인은 유리공녀로구나. 아라사공이 늘 말했던.......'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라사공과는 각별한 사이였소."
유리의 푸른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장천린은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이 목걸이는 과거 내가 아라사공에게 선물한 것이오. 그는 목걸이를 따님인 유리공
녀에게 주겠다고 말했었소."
장천린의 음성에는 감회가 깔려 있었다. 유리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럼... 당신은?"
장천린은 비로소 자신의 소개를 했다.
"남창의 장천린이란 사람이오."
"장천린!"
유리의 눈이 반가움으로 인해 빛을 발했다. 이 어찌 기묘한 일이 아니겠는가? 부친
이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수도 없이 칭찬했던 인물, 남창의 장천린이란 젊은
상인이 눈앞에 있다니! 아라사가 중원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다는 상대
가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이다.
"아아......."
유리는 눈물이 글썽해 진 채 탄성을 발했다. 너무도 벅찬 감격에 그녀는 한동안 아
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부신 듯한 눈으로 장천린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
다.
아담한 객방(客房).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개방방주 태무결과 장천린이었다. 태무결은 무척
밝은 표정이었으며 장천린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태무결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반갑게 말했다.
"용대인, 다시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소."
그는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아마 일 년이 넘었지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전 이맘 때 쯤 개봉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지요."
그는 궁금한 듯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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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방은 어떻소이까?"
"용대인 덕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평온 하오이다. 단지......."
말끝을 흐리는 태무결의 얼굴에 한 가닥 그늘이 드리워졌다. 장천린은 짐작되는 것
이 있었다.
"조화성 때문이오?"
태무결은 흠칫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이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들었소이다. 화산파 장문인이 다쳤다지요?"
태무결은 무겁게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지요."
"......."
"조화성 산동성 단주인 이능소에게 당했습니다. 오장육부가 뒤틀려 생명이 위독합니
다."
장천린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화산파는 그와 관련이 없으므로 굳이 자세한 것을 묻
고 싶지가 않았다. 다만 그의 뇌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때 태무결이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대인께서 절 만나고자 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한 가지 이유가 있어서지요."
장천린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태방주의 신의를 믿고 말씀드리겠소이다."
태무결은 긴장했다. 그가 알고 있는 용백군은 진중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그렇다
면 필시 중대한 용무가 있을 것이다.
장천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구파일방과 정도의 세력을 모아 연합맹(聯合盟)을 조직한 후 조화성과 상대하고 싶
소이다."
"......!"
태무결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장천린의 그 한 마디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뜻을 담고 있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귀
를 의심할 정도로 놀랬다. 한동안 넋 나간 표정을 짓던 그는 한편으로는 의심하면서
, 한편으로는 확인하려는 듯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장천린의 표정은 완고했다.
그의 눈빛은 철혈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어떠한 난관에 부딪친다 해도 결코 꺾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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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 집념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상인이오. 하나 천하대세를 살펴본 즉 악의 단체인 조화성이 있는 한 만백성
은 물론이고 일개 상인인 나도 안심하고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당금의 세상은 만악이 창궐하고 정도가 땅에 떨어졌소이다. 그 모든 것이 악의 온상
인 조화성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소이다."
"......."
태무결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그는 믿을 수 없을 정
도로 경이로운 심정이었다.
"그래서... 내 모든 힘을 기울여 조화성과 싸우고 싶은 것이오."
장천린은 활활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태무결을 응시했다.
"하지만 조화성은 강하오.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소이다
. 그래서 태방주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오. 구파일방과 정도의 세력들을 규합하면 충
분히 조화성을 물리칠 수 있소이다."
태무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아찔한 느낌에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무모한 일이다!'
장천린은 그의 심정을 훤히 짐작하고 있다는 듯 더욱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결코 무모한 일이 아니오. 그것은 누구라도 해야만 할 일이오. 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오.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오."
태무결은 눈을 반쯤 감았다.
마음속에서는 계속 무모한 일이야! 무모한 일이야! 하고 부르짖으면서도 확신에 찬
장천린의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장천린의 휘하에 있는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떠올려 보았다. 마도 원계묵을 비
롯한 백살대(百殺隊)와 생사집혼 사문도, 그의 말이라면 군말 없이 따르는 낭인무사
대는 또 어떤가?
그들은 개개인이 일당천(日當千)의 실력들을 갖추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하나의 뜻
으로 움직인다면?
하지만 조화성의 힘은 그들보다 수십 배나 강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두 세력
이 격돌하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태무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태방주, 이번 일에 혼을 걸어보지 않겠소?"
태무결은 고개를 들었다. 장천린의 타는 듯한 눈빛과 마주치자 그는 부끄러운 느낌
이 들었다.
'상대는 상인이다. 강호무림과는 아무 상관없는 상인이 천하의 안녕을 걱정하는데..
. 정작 백도의 영수급이라 자부하는 난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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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타(叱咤)!
태무결의 가슴속에서 회오리와도 같은 격정이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용대인. 이 태무결, 용대인과 뜻을 함께 하겠소이다!"
장천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고맙소, 태방주!"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맞잡은 손과 손을 통해 뜨거운 사나이들의
피가 흘렀다. 그것은 향후 무림을 예상치 않은 국면으로 전환시킬 폭풍의 눈이 태동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유현에서 동쪽으로 십여 리쯤 떨어진 곳에 작은 산신묘(山神廟)가 있다.
스스스......!
가을바람이 낙엽을 휘감아 올리며 공중에 솟구쳐 올랐다가 사방으로 스산한 울음을
내며 흩어져 갔다.
가을 해는 많이 짧아졌다.
인색하게 뿌려지던 햇살이 시름시름 석양 속으로 숨어드는가 싶자 금세 어둠이 앙금
처럼 풀려 내렸다. 그 어둠 속에 휑뎅그렁하니 서있는 산신묘는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 보였다.
산신묘 앞에 두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들은 얼마 전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장천린과 태무결이었다.
끼익!
그들은 산신묘의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묘당 안은 어둡고 음습했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벽과 천장에는 먼지
와 거미줄이 가득했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하늘과 통해져 있는 천장과 흙이 쌓여
있는 바닥으로 미루어 볼 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듯했다.
태무결은 묘당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과거 개방에서 사용하던 곳으로 현재는 산동성 지부의 중간 연락소로 이용
하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없는 곳이었다. 태무결은 빙그레 웃으며
오른쪽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는 비바람으로 뚫린 듯한 여러 개의 구멍이 나있었다.
그는 한 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르릉!
굉음이 울리더니 묘당의 안쪽에 놓여있던 신단이 한쪽으로 밀려나갔다. 그곳에 지하
로 통하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에는 경사진 계단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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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을 거의 내려갔을 때쯤 어디선가 긴장
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요?"
"태무결입니다."
방금 전의 음성이 안도하는 듯한 어조로 탄성을 발했다.
"아! 태방주이셨구려."
장천린의 안력은 이미 초인적인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짙은 어둠 속
이라도 주위를 분별할 수 있었다. 계단 아래는 하나의 석실 구조물로 되어 있었다.
석실 안에는 네 명의 인물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약간 뒤쪽에는 침상이 놓여
있었는데 침상 위에는 누군가 누워있었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석실 안이 밝아졌다. 누군가 유등(油燈)을 켠 것이다.
장천린은 사인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일견하기에도 기도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
들도 일제히 그를 주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의혹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사인 중 청수한 용모의 늙은 도인(道人)이 도호를 외우며 물었다.
"무량수불... 태방주, 이 분은 뉘시오?"
태무결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 여러분께 귀하신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구룡장원의 장주이신 용백군 대인이십니다."
사인은 모두 경이의 눈빛으로 장천린을 응시했다.
"무량수불......."
먼저 입을 열었던 노도인이 몸을 일으키며 합장했다.
"용공자, 빈도 운양자(雲陽子)가 알아보지 못하고 결례한 것을 용서하시오."
나머지 삼인도 다투어 일어서더니 장천린에게 인사했다. 그들의 태도는 모두 진지하
고 공손했다.
"아미타불... 노납은 홍인이라 하외다."
"노부는 위진악이라 하오이다."
"이 거지는 학군명이라 하오."
장천린은 소개를 받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야말로 강호에
서 명성이 쟁쟁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구파(九派)의 일원인 종남파(終南派)의 장문인 운양자를 비롯하여 숭양문(嵩陽門)의
문주 철검개세(鐵劍蓋世) 위진악(胃振岳), 아미파(蛾眉派)의 장문인 홍인대사(洪仁
大師), 그리고 태무결의 사형제 오인 중에서 첫째이자 개방의 두 번째 실력자인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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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신개(三絶神 ) 학군명이 그들이었다.
학군명을 제외한 사인은 모두 정도무림의 태두인 구파일방 중 사파(四派)의 영수들
이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사파의 영수들이 이런 허름한 산신묘에 한데 모여 있다니,
만일 세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놀라마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장천린은 그들이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공손한 데 대해 의아한 느낌이 들었
다. 태무결은 그의 마음을 헤아린 듯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하하, 소제를 비롯한 이곳에 있는 분들은 모두 용대인께 큰 은혜를 입은 바 있소이
다."
장천린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언제 은혜를 베풀었다고?"
운양자가 나서며 설명했다.
"허허, 일년 반 전 항주에서 용대인이 태방주를 통해 혈관음 영호해상의 움직임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지금쯤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오."
'아!'
장천린은 내심 탄성을 발했다.
'이제 보니 학군명을 제외한 이 네 사람은 당시 항주의 오파회합에 참여했던 영수들
이었구나.'
그는 비로소 그들이 자신에 대해 호의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 돌려
침상 위에 누워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얼마 전 중상을 입은 화산파의 장문인이겠구나.'
이때 태무결이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설장문인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홍인대사가 침중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절망적이외다. 오장육부가 뒤틀려 소생이 불가능하오. 잘해야 오늘밤
을 넘길 정도인 듯하오."
위진악이 노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이를 갈며 말했다.
"이능소 그 파렴치한 놈이 비겁하게 다수의 힘을 믿고 포위공격을 했소이다. 게다가
악랄하기 그지없는 부시공(腐屍功)을 사용했소!"
그는 주먹을 움켜쥔 채 긴 수염을 경련했다. 장천린은 그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려
물었다.
"소생이 설장문인의 상처를 좀 살펴봐도 되겠소이까?"
뜻밖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흠칫했다. 그들은 장천린에게 별다른 수가 있다고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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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몰라도 화산파 장문인의 상세는 치료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게다가 장천린의
말을 무시할 수는 더욱 없었다.
홍인대사가 침중하게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용시주께서 봐주신다면 기쁜 일이겠지요."
물론 그것은 상대를 존중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럼."
장천린은 중인들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보인 후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침상 위의 인물을 확인한 그는 움찔했다. 뜻밖에도 화산파의 장문인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제 이십대 중반밖에 안되어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화산파 장문인이 여자였다니.......'
장천린은 의외의 사실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때 태무결이 설명해 주었다.
"전대 장문인이신 설충 장문인께서 돌아가신 지 이 년이 지났소이다. 이 분 설옥상(
薛玉霜) 장문인은 그 분의 따님으로 대통을 이은 지 이 년이 채 되지 않았소이다."
"아!"
장천린은 그제서야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
는 젊은 여장문인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상처는 어느 부위에 있소?"
겉으로 보아서는 조금도 이상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태무결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
했다.
"놈들의 장력을 가슴에 맞았소이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옥상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버렸다. 조금도
망설임 없는 동작이었다.
설옥상은 두 팔과 다리를 모은 채 단정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장천린은 손을 뻗어
그녀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태무결을 포함한 오인은 보기가 민망한 듯 얼른 고
개를 돌려버렸다.
장천린은 거침없이 설옥상의 옷을 벗긴 후 살펴보았다. 이십대의 여인답게 설옥상의
젖가슴은 눈부시게 흰 가운데 탐스럽게 발달해 있었다.
그녀의 두 개 유방 사이에 시커먼 장인(掌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마치 먹으로
손바닥 모양을 그려놓은 듯했다.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이 부시공의 흔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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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장인의 가장자리, 즉 손가락 끝에 해당되는 곳은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장천린은 품속에서 작은 옥갑을 꺼냈다.
'이것으로 부시장독을 치료할 수 있을까?'
그가 옥갑의 뚜껑을 열자 석실 안에 청량한 향기가 감돌았다. 중인들은 향기를 맡자
가슴이 확 트이고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일제히 돌
아보았다.
옥갑 속에는 기이하게도 사람의 형상과 똑같이 생긴 삼(蔘) 반 토막이 들어 있었다.
운양자가 가장 먼저 알아보고 탄성을 터뜨렸다.
"만년삼왕(萬年蔘王)!"
"아! 그게 사실입니까?"
다른 사람들도 경이를 감추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옥갑 속의 삼을 바라보았다.
<만년삼왕(萬年蔘王)은 관외의 장백산에서만 자생하는 삼으로 만년을 성장하면 어린
아이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를 일반 사람이 복용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무공을 익힌 사람이 복용할 경우 가히 그 효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우
선 백년의 내공이 증진될 뿐 아니라 신체가 단단해져 내가수법이나 도검에 의한 상
처가 생겨도 그 즉시 아물게 된다. 또한 아무리 내공을 써도 고갈되지 않으니 무림
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보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전설처럼 나도는 만년삼왕의 효능에 대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무림인들은 꿈속에서도 만년삼왕을 찾아 왔으나 아직까지 그 누구도 만년삼
왕을 손에 넣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장천린은 대체 어디서 그것을 얻은 것일까?
그것은 반년 전 구룡장원을 방문했던 옥류향이 선물로 남긴 것이었다. 비록 반 뿌리
에 불과했으나 워낙 희세의 영약이므로 충분히 기대를 걸 만한 일이었다.
장천린은 만년삼왕을 꺼내 칼로 삼분의 일 가량을 잘라냈다. 그는 중인들이 지켜보
는 가운데 설옥상의 입을 벌리고 그것을 먹여 주었다.
'현재 이 여인의 내장기능은 극도로 약화되어 있으니 제대로 흡수하지 못할 것이다.
내공으로 도와줄 수밖에.'
이렇게 생각한 장천린은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반야대능력을 끌어올린 후 양 손
바닥을 설옥상의 젖가슴 중앙에 붙이고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스스스.......
그의 머리 위로 은은한 서기(瑞氣)가 무지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인대사는 흰 눈썹을 부르르 떨며 경악성을 발했다.
"저... 저 현상은 불문제일의 기공인 반야대능력이 극성에 이른 현상이오!"
"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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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중인들은 일제히 탄성을 발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태무결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부끄럽구나! 용대인이 저렇게 놀라운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짐작조차 못하고
그저 일개 상인으로만 알았으니.......'
그는 한 가닥 흥분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장천린이 자신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구파일방과 정도의 세력을 모아 연합맹(聯合盟)을 조직한 후 조화성과 상대하
고 싶소이다.
당시 그 말을 들었을 때, 놀라긴 했으나 별반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장천린이 일개
상인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공수위가 이렇게 고강하다면... 그의
말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스스스.......
장천린의 모습은 신비로운 서기에 휩싸여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인들은 그 광
경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 잠시 소생의 말을 들어보시오."
태무결은 중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얼마 전 장천린과 그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인들은 한결같이 기
쁜 표정을 지었다.
"아미타불... 빈승은 대찬성이오. 아미파는 적극적으로 용시주를 돕겠소이다."
홍인대사가 불호를 외우며 제일 먼저 찬동의 뜻을 표했다. 나머지 인물들도 앞을 다
투어 뜻을 같이 하겠노라 말했다.
"무량수불... 종남도 용대인과 생사를 같이 하겠소."
"하하! 숭양문도 빠질 수 없겠지요. 노부도 동참하겠소!"
이때였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울렸다.
"설마 화산을 빼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러분?"
"아!"
중인들은 일제히 침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새 설옥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미소짓고 있었다. 화사하기 그지없는 그녀
의 미소는 마치 한 송이의 국화를 보는 듯했다. 중인들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설장문인!"
"드디어 완쾌 되셨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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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사경을 헤매던 설옥상이 극적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오파의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이 밝혀진 것과 같은 일이었다.
설옥상은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장천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중인들은 놀라마지 않았다. 장천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설장문인. 이게 무슨 짓이오?"
설옥상은 고개를 숙인 채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용대인은 소녀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은인께 답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그녀는 고개 들더니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녀 설옥상은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어요. 장차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화산파는
용대인의 말을 따르겠어요."
설옥상은 화산의 장문인이다. 그녀의 말은 곧 화산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한 번 내뱉
은 이상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장천린은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중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격동을 금
치 못했다.
'힘이 합쳐지고 있다.'
그는 새삼 힘이 솟아남을 느꼈다.
'이렇게만 된다면 조화성을 깨뜨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는 형형한 시선으로 석실 안으로 육인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빛이 마주치자 중인
들은 신뢰에 찬 미소를 보냈다.
석실 안은 훈훈한 정으로 가득 찼다.
마침내 그들은 이마를 맞대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만사만악(萬邪萬惡)의 집마부(
集魔府)인 조화성을 물리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인가? 장차 무림의 운
명을 가늠할 중대사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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