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왕검출현(王劍出現)
청도(靑島).
산동성(山東省) 반도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무림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오악장(五岳莊)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조화성 산동성지단(山東省支團)이기도 한 오악장의 장주는 오악신군(五岳神君) 이능
소(李凌召)다. 그는 조화성의 산동성 지단주가 된 후로 더욱 산동성 일대에서 맹위
를 떨치고 있었다.
무림에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조화성의 조직은 의외로 간단했다.
염무는 자신의 휘하에 오전(五殿) 십삼단(十三團)을 두고 있었다. 오전은 오신마전(
五神魔殿)을 말하는 것이며 십삼단은 중원 십삼개성(十三個省)에 각각 위치하고 있
었다.
각 단(團)의 인원은 많은 곳은 천 명이 넘었으며, 아무리 작은 곳이라도 수백 명이
넘었다. 실상 지금까지 무림에 혈겁을 일으킨 세력은 대부분이 십삼단 소속이라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악장은 그리 규모가 큰 편이 아니었다.
오악신군 이능소도 조화성 내에서 특별한 신임을 받는 자는 아니었다. 그는 조화성
에 가입한 지 십 년도 채 되지 않았을 뿐더러 성격이 지나치게 괴팍하고 흉폭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인이 오만한 그는 염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아래로 보
고 있었다.
오악전(五岳殿).
오악장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악신군 이능소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지금 한 방에서 두 명의 노인이 술을 들고 있었다. 한 명은 금의를 입고 태사의에
앉아 있었는데 보통 사람의 두 배나 되는 거대한 체구에 이마에는 주먹만한 혹이 매
달려 있어 흉폭한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오악신군 이능소였다.
그의 맞은 편에는 문사 차림의 오십대 중반 가량 되어 보이는 인물이 앉아 있었다.
용모는 청수한 편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문사의 이름은 양도위(揚道位)였다.
조화성 제일신마전에서 서열 이위에 해당되는 인물로 독전우사(毒電羽士)란 외호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 그는 금월산(金月山)에서 낙수범에게 동생을 잃은 바 있었다. 자영구살중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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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양전(揚田)이 바로 그의 아우였던 것이다.
이능소를 조화성에 가입시킨 것은 바로 양도위였다. 그는 제일신마전주 독제(毒帝)
당선종의 강력한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양도위는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단주, 너무 심려 마시오. 항주에서 오파회합 분쇄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이능소는 꺼칠한 수염을 잡아당기며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이미 화산파의 설가 계집은 나의 부시공에 적중되어 지금쯤 시체가 되었을
것이네. 더욱이 정유현 근방 백여 리에는 노부의 수하들이 천라지망을 펴고 있으니
반드시 놈들의 자취를 알아낼 것이네."
양도위는 눈살을 찌푸리며 신중하게 말했다.
"개방의 태무결은 보통 놈이 아니오. 과거 항주의 소영주에서도 놈은 귀신처럼 눈치
채고 도망갔었소. 그래서 혈관음을 무색케 했지 않소이까?"
이능소는 술을 벌컥벌컥 마신 후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혈관음과 날 어찌 같이 비교하는가?"
그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쳤다.
"흥! 혈관음 영호해상에 대한 전설은 꽤나 화려하지만 나는 믿지 않네."
양도위는 고소를 지었다.
"마교십삼사는 모두 무서운 고수들이오. 그들의 무공은 오전주들에 비해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단 말이오."
양도위는 언뜻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들은 조화성 내에서도 죽음의 전사로 불릴 정도로 강한 자들입니다."
이능소는 조소를 흘렸다.
"흐흐... 그건 그들이 진짜 강한 적수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이네."
양도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 그 무서운 신산과 오성단도 십삼사에 의해 깨졌습니다."
이능소는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 낮게 침음하며 말했다.
"신산의 죽음은 확실히 충격적이네. 하지만......."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참, 당전주(唐殿主)께서는 요즘 어떠신가?"
"당전주께서는 숙야청주의 급서 이후 침통해 하고 계십니다."
이능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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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선종과 북해 사태청주 숙야염과의 각별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당선종의 부
인은 바로 숙야염의 친누이동생이었던 것이다. 즉 당선종과 숙야염은 처남매부지간
인 셈이었다.
양도위는 침중하게 말했다.
"당전주의 슬픔은 제가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숙야청주와 당전주님은 평소에 우
의가 깊었습니다. 소제도 과거 동생이 죽었을 때 근 일 년 간 분노와 슬픔으로 인해
모든 일에서 손을 놓다시피 했으니까요."
"으음. 그럴 테지."
고개를 끄덕이던 이능소의 눈빛이 괴이하게 번뜩였다. 돌연 그는 창문을 향해 장력
을 날렸다.
"어떤 놈이냐?"
펑!
창문이 그의 장력에 박살나는 순간.
"으하하하하......!"
낭랑한 웃음과 함께 인영이 방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문사- 태무결이었다.
태무결은 여유만만하게 옥선을 흔들고 있었다. 이능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부
르짖었다.
"태무결!"
태무결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능소, 네가 날 찾는 것 같기에 직접 이곳으로 왔다."
이능소의 눈에서 흉광이 뿜어져 나왔다.
"오냐! 아주 잘했다. 태가 어린 놈!"
그는 다짜고짜로 장력을 날렸다.
위이잉!
"하하하하!"
태무결은 낭랑히 웃으며 슬쩍 어깨만 움직여 장력을 피해냈다. 그 바람에 애꿎은 한
쪽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때였다.
"후후! 미친 망아지가 발광을 하는 군."
휙휙!
뚫어진 벽으로부터 육인의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이능소는 물론 양
도위도 안색이 밀랍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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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않다.'
양도위의 안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는 눈앞의 육인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종남파의 장문인 운양자, 아미 장문인 홍인선사, 숭양문의 문주 위진악, 화산 장문
인 설옥상, 삼절신개 탁군명을 비롯하여 백의를 입은 죽립인이 나란히 서있었다.
이능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특히 백의인에게서는 왠지 섬뜩한 느낌
을 받았다.
"하하하! 이능소, 네가 오파회합을 분쇄하겠다고 큰소리 쳤지 않느냐? 어디 우리가
직접 왔으니 해결해 봐라."
태무결의 말에는 조롱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능소는 본래 성격이 불처럼 급한 위
인이었다.
"태무결! 네놈이 감히 노부를 희롱하겠다는 거냐?"
우르릉!
그는 다시 일장을 날렸다.
하지만 태무결이 누구인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섭선을 휘둘렀다.
펑!
폭음이 울린 순간 태무결은 뒤로 삼 보 물러났고 이능소는 어깨를 흔들었다.
태무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과연 오악신군 답구나.'
이때 운양자를 비롯한 오인은 이능소와 양도위를 포위했다.
그들은 모두 일파의 지존들이므로 방안의 공기는 금세 터질 듯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 이능소는 다급함을 느꼈다.
'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놈들을 모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무결은 그의 마음을 눈치챈 듯 냉소했다.
"이능소, 수하들을 부를 생각이면 포기하는 것이 좋다."
"......!"
"후후! 네 수하들은 대부분 정유현으로 출동했다. 남아있는 자들이라야 고작 수십
명에 불과하지 않느냐? 놈들은 이미 깨끗이 잠들었다."
이능소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때 백의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태무결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태방주, 이능소는 내가 제거하겠소이다."
태무결은 공손히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맹주께서 직접 수고하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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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주(盟主)라니?'
이능소와 양도위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당금의 오파지존이 맹주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백의인은 담담히 말했다.
"오악신군의 실력을 한 번 평가해 보려는 것이오."
이능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태무결은 씩 웃으며 말했다.
"맹주께서 직접 나서신다면야 이능소는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뒤로 물러나며 이능소를 향해 괴소를 흘렸다.
"후후! 이능소, 이 분은 우리 오파(五派)의 공동맹주이시다. 맹주께서는 영광스럽게
도 친히 널 상대하실 것이다."
"으으......."
이능소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백의인은 물론 장천린이었다.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능소, 내 그대의 부시공을 한 번 견식해 보겠다."
이능소는 곤혹에 휩싸여 버렸다.
그는 평소 자신을 믿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파의 공동맹주라는 신비인의 존재가 어
쩐지 꺼림칙했다.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잔뜩 공력을 끌어올렸다.
장천린은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기검(奇劍)을 뽑아냈다. 그 검은 폭이 좁고 얇은 것
으로, 검이라기 보다는 한 자루의 꼬챙이처럼 보였다.
이능소는 흉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흐흐! 오파 공동맹주나리, 대체 얼굴이 어떻게 생겼기에 죽립으로 가리셨나?"
장천린은 여전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능소 자네보다야 조금은 나은 편일세."
이능소는 평소 자신의 외모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타인이 용모를 거
론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흐흐! 나 이능소가 두려워 한 자는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선공했다.
파파파팍!
쌍수를 칼처럼 세워 좌우로 갈라 치며 전광석화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장천린은 그
의 갑작스런 공격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좌수를 비스듬히 뻗어냈다.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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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가죽 북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이능소의 신음이 울렸다.
"흑!"
이능소는 두 팔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세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나갔
다. 반면 장천린은 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헉! 이럴 수가... 놈의 내공이 노부를 능가한단 말인가?'
이능소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수치와 분노를 함께 느꼈다. 그는 비장의
절기인 부시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우우웅!
기묘한 진동음과 함께 금포가 바람을 안은 듯 팽팽히 부풀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얼
굴과 손이 온통 먹빛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방안에는 시체가 썩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관전하던 태무결이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십시오, 맹주. 부시공입니다!"
"죽어랏!"
우우웅......!
시커먼 먹빛 장기(掌氣)가 장천린을 향해 뻗어 나갔다. 중인들은 속이 메스껍고 현
기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였다.
슥!
장천린의 검이 움직였다.
검은 천중(天中)을 겨냥한 채 유유히 먹빛 장기를 가르며 나아갔다. 실로 불가사의
했다. 검의 유유한 움직임에 먹빛 장기는 마치 물이 갈라지듯 좌우로 밀려나가는 것
이 아닌가?
태무결은 긴장 중에도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과연.......'
그 순간이었다.
우웅!
진동음과 함께 먹빛이 짙어지면서 역한 냄새가 강해졌다. 그러나 장천린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장공을 가르며 검을 뻗었다.
검세는 그 변화가 눈에 보일 정도로 느렸다. 손을 뻗기만 하면 검날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능소의 안색이 무참하게 변하고 있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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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기 핏줄기가 허공으로 뻗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능소의 두 팔목이 댕강 잘려나간 것이 아닌가? 그 뿐이 아니었
다. 팔목에 이어 그의 머리통이 어깨에서 분리되어 떠올랐다.
단 일초(一招)!
일초 만에 오악신군 이능소는 황천으로 직행해 버리고 말았다.
중인들은 눈을 크게 떴다.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 이럴 수가......!'
중인들의 한결같은 느낌이었다.
주위는 찬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모두들 넋이 빠진 듯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다
만 그 와중에서 화산 장문인 설옥상만은 눈빛이 야릇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때였다.
넋 나간 듯 멍청히 서있던 양도위가 갑자기 심하게 몸을 떨며 실성한 듯 부르짖었다
"와... 왕검(王劍)이다! 왕검......!"
그의 눈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있었다. 문득 눈앞에 인영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장
천린이 코앞에 다가왔다.
"그대가 양도위인가?"
"그... 그렇다."
양도위는 벌벌 떨었다. 장천린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대 역시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살려주겠다. 가서 염무에게 알려라. 오늘 부로 정
도무림은 하나로 뭉친다고. 조화성은 더 이상 악행을 계속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전해라."
"으......."
"한 가지만 더. 언젠가 내 검이 염무의 목줄기를 끊어줄 것이라 전해라."
양도위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장천린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전설의 왕검(王劍)이 출현한 것이라면... 가능할는지도 모른다.'
그는 황급히 대답했다.
"조... 좋다. 그대로 알리겠다."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 물었다.
"한데... 당신의 이름은?"
죽립인은 담담히 말했다.
"그 이상 알 필요는 없다. 오파의 공동맹주면 족하다."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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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양도위는 한 마디를 남기고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장천린은 방안의 육인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갑시다, 여러분."
태무결은 한숨을 길게 내쉰 후 중얼거렸다.
"진정... 평생 처음 보는 멋진 한 수였습니다."
운양자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무량수불... 맹주께서 설마 왕검지학(王劍之學)을 터득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소
이다."
장천린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직 초보단계에 불과합니다."
이번에는 설옥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 정도면 능히 염무와 대적이 가능할 거예요."
설상옥의 눈빛에는 기이한 열기가 들어 있었다. 이미 장천린의 존재는 그녀의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장천린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만일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그
는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오파 장문인들의 말처럼 조화성주 염무를 그리 쉽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사기가 오른 정도무림의 맥을 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 이제 그만 갑시다."
그는 앞장섰다.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진 방에는 피바다 속에 오악신군 이능소의 시체가 누워있었다. 몸체에서
떨어져 나간 이능소의 머리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마치 분하고 원통하다는 듯이
. 어쩌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정도무림(正道武林)과 조화성의 싸움은 그 막이 오른 셈이었다.
호륜지(呼倫池).
산해관(山海關) 너머 몽고와 여진(女眞)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호수(湖水)로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주변의 삭막한 분위기에 비한다면 제법 아늑한 풍치를 보
여주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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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었다.
북방의 바람은 벌써부터 한기를 품고 있었다. 삭풍은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따각, 따각.......
세 필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상에 타고 있는 세 사람은 한결같이 험상궂게 생겼으며 체구도 건장했다. 중년의
나이인 그들은 등과 허리에 기형무기(奇形武器)를 꿰어찼으며 몸에는 가죽과 털로
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생김새나 복장으로 미루어 몽고족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삼 기의 인마는 호륜지에 다달았다.
한가운데 있는 장한이 손을 이마에 가져가더니 짐짓 탄성을 발했다.
"정말 경치가 좋은 곳이군!"
우측의 사내가 괴소를 흘렸다.
"흐흐! 경치를 감상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을 보니 부럽군."
좌측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너무 긴장할 건 없네. 요즘 이곳 북방은 누르하치가 임단한으로 인해 바짝 긴장하
고 있어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지. 하지만 우리에겐 도리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네
."
가운데 장한이 맞장구쳤다.
"그럼! 그야말로 고랍특성의 낭인시장(浪人市場)에서 잘만 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
는 기회지."
우측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어떻게 배운 무공인데, 흐흐... 결코 싸구려가 될 순 없지."
"듣자하니 임단한은 요즘 과이심부와 충돌한 이후 고수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더군."
"클클! 결국 낭인시장에서는 요즘 우리 같은 사람들의 주가가 점점 오르고 있다는
거야."
삼인은 낭인무사들로 고랍특성의 낭인시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대막에서 우리들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분명 크게 중용될 것이네."
낭인무사들은 호숫가를 따라 돌았다.
"조금만 더 가면 막남(漠南)의 경계지점에 이른다. 자, 빨리 가세."
두두두......!
마음이 급한 듯 그들은 박차를 가했다. 말은 크게 울더니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놓으며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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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쯤 갔을까?
'응?'
나란히 말을 달리던 장한들은 동시에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전면, 호숫가의 나무 아래 한 여인이 기대 서있는 것을 발견
한 것이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여인의 자태는 지극히 아름다워
보였다.
낭인무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계속 말을 몰았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여인의 자태가 선명히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아니, 눈이 부실만큼 빼어난 미녀였다.
여인은 대략 스물 서넛 쯤으로 여진(女眞)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아도 매
우 값진 복장이었다.
삭풍은 차가웠으나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언뜻언뜻 사라졌다 드러나곤 하는
미녀의 얼굴은 꿈꾸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미녀는 취옥교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취옥교가 여진족의 복장을 하고 이런 외딴 곳에 서있다니?
낭인무사들은 그녀가 있는 곳에 이르자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가운데 장한이 머뭇
거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소저, 말 좀 물어도 되겠소?"
"......."
취옥교는 말이 없었다. 장한은 쓴 입맛을 다셨다.
'아름다운 만큼 도도하구나.'
그는 다시 말을 걸었다.
"심사가 울적하나 보구려? 어찌 혼자서 이런 곳에 계시오?"
취옥교는 여전히 못들은 듯 대답하지 않았다. 장한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소저, 본인의 말이 말 같지 않소?"
취옥교는 여전히 검푸른 호수만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 장한이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취옥교에게 다가갔다. 그는 잠시 그녀의 얼
굴을 살펴보다가 그만 멍해졌다.
'기... 기막힌 미인이다! 내 평생 처음 보는......!'
그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저, 최소한 대꾸는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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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취옥교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야말로 백치(白痴
)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초점 없는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혹시... 청류장을 아시나요?
"청류장?"
장한은 어리둥절했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취옥교는 배시시 웃었다. 역시 백치와도 같은 미소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속삭이
듯 중얼거렸다.
"버드나무가 푸르게 늘어져 있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죠... 사람들의 마음은 부드
럽고 상냥하지요... 더욱이 그곳에는 사랑하는 임이 살았죠."
장한은 눈썹을 꿈틀했다.
'이제 보니 정신이 이상해졌군.'
취옥교는 계속 꿈꾸는 듯이 속삭였다.
"한데 그분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요. 아주 잘 생긴 분인데......."
취옥교는 빤히 장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분의 이름을 아시나요?"
장한은 음흉하게 말했다.
"혹시 나같이 생기지 않았소?"
취옥교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아니에요. 그분은......."
갑자기 그녀는 머리를 움켜쥐더니 괴로운 듯 부르짖었다.
"아! 아! 모르겠어, 모든 것이 엉망이야......!"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흐흑... 그가 아니야, 다른 분이야. 천릉... 천... 아니야, 모르겠어."
취옥교는 느닷없이 허리를 흔들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홋......!"
장한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괴로운 일이 있나 본데 위로해 주고 싶구려, 소저."
마상의 장한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다 호수 한쪽에 형성되어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의사
가 통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으로 갑시다, 소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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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 한 명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숲으로 이끌었다.
취옥교는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여전히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장한들에게 이끌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흐흐... 오늘 이거 횡재했구나.'
장한들은 한결같이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외부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숲 속으로 들어가자 한 명의 장한이 취옥교의 가
느다란 허리를 껴안으며 수작을 걸었다.
"흐흐... 소저, 내가 소저를 즐겁게 해 드리겠소."
그는 거침없이 취옥교의 가슴을 더듬어 갔다. 한데 그때였다.
"손을 떼고 물러나라."
장한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의 노인이 숲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머
리카락은 붉은 색이었으며 깡마른 몸매에서는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더더욱 괴이한
것은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온통 흰 동자뿐이었다.
그렇게 생긴 사람은 결코 흔치 않았다.
그는 바로 여진족 출신의 제일고수로 불리는 사존(邪尊) 적리휼이었다.
낭인무사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늙은이! 방금 전 당신이 말을 했나?"
취옥교를 희롱하던 장한이 눈알을 부라리며 거칠게 물었다.
적리휼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그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 한 마디로 너는 두 번 죽었다."
"미친 늙은이! 감히......."
장한은 막 주먹을 날리려다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적리휼이 그저 손가락을 가볍게
퉁기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는 붉은 광채가 일직선으로 뻗었
다.
"으아악!"
"케에엑!"
비명이 연달아 울렸다. 세 명의 낭인무사들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날아갔다.
그들의 등줄기로 핏줄기가 화살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으... 이럴 수가......?"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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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나가 떨어졌던 장한은 자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을 내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것도 일순, 의식이 하얗게 비는 것을 느끼며 몸을 뻗고 말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그를 포함한 세 구의 시체는 쭈글쭈글해지더니 금세 의상만을 남기고 피고름으로 화
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적리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돌려 취옥교에게 다가갔다.
취옥교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가자, 소저.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하다."
취옥교는 문득 꽃잎 같은 입술을 움직였다.
"할아버지......."
"응?"
"저 벌판이 끝나는 곳에... 그분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적리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민지정을 느낀 듯 그는 취옥교의 연약한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날씨가 쌀쌀하다. 너의 몸이 상할까 걱정이구나."
취옥교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적리휼은 그녀를 껴안으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사연이 있는 아이일 것이다.'
두 달 전이었다.
그는 우연히 북해를 지나다 한 강가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그때 취옥교는 온몸이 반
쯤 얼어 있었다.
그는 취옥교를 구한 후 치료해 주었다. 그러던 와중에서 그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 그것은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그에게 친손녀와도 같은 정감이 생겨난 것이다.
정성껏 치료한 탓이었을까?
취옥교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녀
는 늘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먼 하늘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적리휼은 그 동안 취옥교의 신상에 대해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렇다할 단
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이 아이는 북해 사태청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가 발견된 강은 사태
청이 있던 백극빙모산의 계곡에서 발원된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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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렇게 짐작했을 뿐이었다.
적리휼은 취옥교를 데리고 호수를 따라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전방으로부터 말발굽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잠시 후 한 필의 건장한 적토마(赤土
馬)가 나타났다. 마상에는 건장한 체격에 패기가 넘치는 호상(虎相)의 청년이 타고
있었는데 그는 익숙한 마술(馬術)로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당도했다.
적리휼은 얼른 손을 모았다.
"왕자님."
"하하! 적리사부, 여기 계셨구려!"
호탕하게 웃어 제치는 청년은 황태극(皇太極)이었다.
그는 여진(女眞)의 풍운아로 훗날 명조(明朝)를 무너뜨리고 중원대륙에 청(淸)을 건
국하게될 운명의 사나이였다.
적리휼은 정중히 물었다.
"왕자님께서 어인 일이시오?"
황태극은 눈을 번쩍 떴다.
"아버님께서 적리사부를 부르시오, 중대한 일인 것 같소이다."
그는 적리휼의 품에 기대있는 취옥교를 뒤늦게 발견하고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취옥교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꿈꾸는 듯한 눈동자가 황태극의 시선을 잡아끌
었다.
"이분 소저는......?"
"노부가 새로 맞이한 손녀올시다."
황태극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소생 황태극이라 하오, 소저."
취옥교는 멍하니 황태극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한 광채
가 발산되었다.
"당신은... 그 분들을 닮았군요."
"......?"
황태극은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는 취옥교의 눈을 마주 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그는 황급히 눈길을 거두고 말았다. 왠지 그녀의 눈빛에
빨려들 것만 같았던 것이다.
여인은 취옥교, 사내는 여진의 풍운아 황태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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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운명은 이렇게 출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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