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칼 끝에 지고 제3부 대륙의 회오리 제2권
▣등장인물
◈장천린(蔣天麟) - 강남 무창의 동정호반에서 신선루를 경영하던 젊은 상인으로 정
인 취옥교의 의문의 배신과 신산 제갈사의 계략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의 나락에서 되살아나 용백군이라는 전도유망한 청년상인으로의 새 인생을 시
작하게 되는데... 사랑을 되찾고 누르하치의 음모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그의 앞날은
과연.......
◈취옥교(翠玉嬌) - 장천린의 정인으로 신선루를 운영하던 절세의 미인. 천린으로부
터 청혼을 받은 꿈같은 날 어둡기만 한 과거로부터의 부름이 있게 된다. 사랑을 위
해 배신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운명... 조화성의 명에 따라 금백만을 살
해하고 천린의 곁을 떠나는데.......
◈원계묵(元桂默) - 마도(魔刀)라 불리워지는 당대 도법의 일인자. 조화성의 살수
모용초에 의해 연인 손미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부인 만승금도 도담후가 살해당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백살대를 조직하여 필살의 의지를 불태우던 중 용백군이라는 젊은
상인을 만나게 되는데.......
◈모용초 - 조화성의 살수이자 마교십삼사의 일원. 절세의 미남자로 여인을 유혹하
여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무정도(無情刀)라는 별호만큼이나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여인에 대한 유별난 증오심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으니.......
◈부금진(符錦眞) - 피리를 즐겨 부는 미소년으로 약칭으로 소진(小眞)이라고도 불
리워진다. 영물에 가까운 흰 앵무새 백아를 데리고 다니며 비도술 및 의술에 일가를
이루었다. 신비에 싸인 인물. 그의 과거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위제(檀偉帝) -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으로 형부도독(刑府都督)이자 동창의
대영반. 청렴강직하며 흉악무도한 범인을 체포하는데 달인의 솜씨를 지니고 있으며
미궁(迷宮)에 빠진 사건을 처리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
◈반송(盤松) - 해적선 검은 바람에 의해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백군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화포인 진천뢰를 제작할 수 있는 인물로서 천월도법의 달인.
◈담오(覃吾) - 북방의 고랍특성 낭인시장에서 몸값 삼십만 냥에 자신의 인생을 내
놓은 무사.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아내 아랑을 저주한다. 용백군과의 조우 이후 돈과
세상을 함께 저주하는 그의 인생이 뒤바뀐다.
◈태진왕(太眞王) 주익적(朱翊 ) - 신종(神宗) 만력제(萬歷帝)의 이복동생으로서
어지러운 황실을 구하기 위해 뜻있는 충신들을 규합하고 변방을 강화하였다. 황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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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기관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의 실세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연연(白娟娟) - 태진왕을 마음 속 깊이 사모하고 있는 지혜로운 여인. 환관의
음모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충신 백시열(白時悅)의 딸로 태진왕에 의해 목숨을
구함 받고 태진궁의 시비로 살아간다.
사문도(射文島) - 생사집혼(生死執魂)이라는 별호를 가질 정도로 엄청난 무공의 소
유자. 친부모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비극의 사생아로서 조화성을 멸하고 염무를 죽여
야만 비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존재. 철저히 비밀에
가려진 사문도와 조화성과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황보설연(皇甫雪燕) - 개봉부 지부대인(支府大人) 황보인(皇甫仁)의 외동딸. 탐관
오리인 아비와는 달리 순수한 정열을 가진 미인. 운명적인 만남 이후 장천린의 일행
이 개봉부를 떠나는 날, 그녀는 일생일대의 운명을 건 결단을 단행하는데…….
◈동방옥(東方玉) - 해남도 동방사성의 여동생. 황금에 눈이 먼 오라버니의 속임수
에 빠져 장천린을 함정에 몰아넣게 되지만, 여인의 사랑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게 마
련이다. 무공을 익혔으며 비파의 달인으로서 천린의 여인이 된다.
◈고검령(古劍靈) - 별호는 무영(無影). 최소한 천하무공의 칠할을 파악하고 있다
알려진 신비의 인물. 문과 무를 겸비하였으며 어떤 무공이든 세 번만 보면 완전히
익힐 수 있다. 신산과 더불어 조화성이 가장 두려워 하는 인물이지만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제갈사(諸葛師) - 무공은 고검령에 비해 약하지만 신산(神算)이라 불리워지는 지
략의 천재. 장천린을 계략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 악의 온상이라는 조
화성을 격멸하고 염무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양심일지라도…….
◈천황(天皇) 태사독(太嗣篤) - 조화성의 제삼신마전주(第三神魔殿主)로서 심기가
깊을 뿐 아니라 무공의 깊이 또한 추측할 수 없다 알려진 신비의 인물. 실제적인 조
화성의 제 이인자. 이십여 년간 계속되어 온 신산 제갈사와의 숙명의 대결……. 과
연 승부의 향방은?
◈옥류향(玉柳香) - 취옥교의 손에 죽은 금백만의 뒤를 이어 만금산장의 장주가 된
전도유망한 청년상인. 세상의 어떤 일도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은 없다 믿는다. 그러
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파란만장한 미래…….
◈화가영(花佳榮) - 항주에서 가장 큰 기루인 천하군방원의 여주인. 만금산장의 장
주 옥류향의 정인으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인해 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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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련(邪戀)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담자개(譚子凱) - 조화성의 일원이자 마교의 소종사로서 마교십삼사의 일원. 늘
초승달 모양으로 웃고 있는 모양의 조악한 탈을 쓰고 다닌다. 처절한 비극이 안겨다
준 불행한 운명에 괴로워하는 그에게서는 오히려 인간적인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유리공녀(琉璃公女) - 파자사국의 상인인 아라사의 외동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그녀가 중원으로 오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마주친 것은 절망과 비극
이었다.
◈천사예 - 황가철장(黃家鐵莊) 최고의 장인이었던 천일학 노인의 손녀. 병기에 대
한 박학한 지식과 함께 병기제조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풀무질에 단
련된 강철같은 여인 사예에게도 수줍은 사랑은 찾아오고…….
◈비마(飛魔) 북검엽(北劍葉) - 혜성같이 나타나 무림의 고수들을 차례로 무릎 꿇게
한 신비에 싸인 존재.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조화성의 각 신마전에서는 각축전이 벌
어지고…….
◈염무(焰武) - 조화성의 성주이자 마교의 교주로서 천하무공의 구할을 수집한 극강
한 무공의 소유자. 무영과 신산을 죽이기 위해 살인혈첩을 흩뿌리는 그에게도 철저
히 가려져 있는 비밀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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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산이라 불리는 노인
화려한 내실.
미녀가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은 속살이 비칠 듯 말 듯한 망사의였으며 속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약간 벌어진 가슴 섶 사이로 팽팽한 유방의 계곡이 고스란히 보
이고 있었다.
폭발적인 염기를 품고 있는 농염하게 무르익은 육체였다. 더구나 한쪽 무릎은 세우
고 한쪽 다리는 길게 뻗고 있어 몹시 자극적인 자세를 하고 있었다.
고혹적인 자태와 달리 미녀의 얼굴은 싸늘했다.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간 봉목(鳳目)은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었으며 조각처럼 섬세한
오관에는 서리처럼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미녀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검 끝은 허벅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미녀와 검!
상반된 느낌 속에서 방 안의 분위기는 야릇하기만 했다.
침상 아래에는 한 청년이 무릎꿇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청년의 용모로 반면(半面)
은 준수하기 그지없는 미남이요, 반면은 불에 탄 듯 온통 흉측한 흉터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 청년은 누구인가?
바로 북해 사태청의 청주 숙야염의 아들 숙야천릉이었다.
그는 사태청이 멸망할 당시 화상을 입어 반미반추(反美反醜)의 얼굴이 되어버린 것
이다.
침상 위의 미녀는 신녀궁(神女宮)의 구양영봉(歐陽靈鳳)이었다. 숙야천릉은 사태청
이 멸망할 때 간신히 구사일생한 후 이곳 신녀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구양영봉은 숙야천릉은 쳐다보지도 않고 교소를 흘렸다.
"호호...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죠?"
숙야천릉은 고개를 숙였다.
"내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흐흥! 사태청을 멸망시킨 신산과 오성단은 마교십삼사에 의해 몰살했는데 또 무슨
복수가 필요하죠?"
숙야천릉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직... 무영은 살아 있소. 뿐만 아니라 배신자 금불 숭의겸이 있소. 그들을 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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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오."
"호호호호홋......!"
구양영봉은 고개를 젖혀 요란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비웃듯이 물었다.
"내가 과연 당신을 도와주리라 생각하나요?"
그녀는 검 자루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자루의 오색 수실이 그녀의 유방을 간지럽
혔다.
"우리 신녀궁은 지난 수백 년간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어요. 한데 당신 때문에
신녀궁의 금기를 깨고 소중한 인명까지 희생시킬 순 없어요."
숙야천릉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도와주시오. 날 도와준다면 영혼이라도 팔겠소."
"호호호호홋......!"
구양영봉은 다시 한 번 흐드러지게 웃었다.
"당신의 혼을 팔면 취옥교가 슬퍼하지 않을까요?"
숙야천릉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듯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양영봉
은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당신의 영혼을 내게 팔 건가요?"
숙야천릉은 일그러진 반쪽 얼굴을 씰룩였다.
"진심이오."
"호호! 하나 이걸 알아야 해요. 당신은 과거의 멋있는 숙야천릉이 아니야. 지금은
그저 보기만 해도 혐오스런 추남일 뿐이야."
"......!"
"흥! 당신이 취옥교에게 빠져있는 지난 몇 년간 난 수치와 모멸감에 세월을 보내야
했지. 이제 그 모든 것을 돌려 받을 차례야."
구양영봉의 봉목에서는 득의의 빛이 흘러나왔다.
"약속대로 무영과 금불 숭의겸을 제거시켜 주겠어. 하나......."
구양영봉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평생 이 구양영봉의 종이 되어야만 해.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는 충직한
종 말이야. 어때? 이래도 하겠어?"
숙야천릉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하... 하겠소."
"흥! 맹세할 수 있을까?"
"맹세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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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영봉의 입가에 잔인한 승리감이 피어올랐다.
"그럼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의 입에서 취옥교란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해."
"알... 알겠소."
구양영봉의 얼굴에는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자, 그럼 이리 가까이 와."
숙야천릉은 머뭇거리다 그녀가 누워 있는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구양영봉은 한쪽
발을 들어 숙야천릉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자, 시작해 봐."
"무... 무엇을......?"
숙야천릉은 멍청해졌다. 코앞에 구양영봉의 발이 뻗어 있었다. 다리가 약간 들려졌
으므로 망사의가 아래로 흘러내려 눈부시게 흰 허벅지가 드러나고 있었다.
"흐흥! 당신이 취옥교에게 해준 그대로 말이야. 하나 내게는 그보다 더 잘해야 돼,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듯이 말야. 호호호! 어서 시작하시지 그래."
순간 숙야천릉의 눈자위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
꼈다.
그는 비로소 구양영봉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녀는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것이다. 하
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 채 손을 뻗었다.
"호호! 잘해야 돼, 내가 만족하도록......."
구양영봉은 검 자루를 당겨 입술에 가볍게 문지르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숙야천릉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서서히... 입술을 그녀의 발가락에 대었다. 그는
입술과 혀로 그녀의 발가락을 조금씩 핥으며 애무하기 시작했다.
"으음... 더 위로......."
구양영봉은 쾌감을 느끼는 듯 검 자루를 이빨로 잘근 깨물며 재촉했다. 그녀의 얼굴
은 도화빛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으응... 그래 좀 더......."
숙야천릉은 변했다.
아니 변해야만 했다. 그는 이제 사태청의 멋지고 패기만만한 미남 소청주(小廳主)가
아니었다. 그는 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혼(魂)은 죽었다. 그의 반미반
추의 기괴한 얼굴에는 더 이상 표정이라 부를 만한 일 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
다.
그는 두 손으로 구양영봉의 다리를 껴안은 채 열심히 혀를 놀렸다. 그의 혀는 어느
덧 그녀의 무릎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구양영봉의 다리가 벌어졌다. 앞을 채우지 않은 망사의가 점점 좌우로 벌어지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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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로 적나라한 여체가 드러났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다.
구양영봉은 여전히 검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검 자루를 이빨로 깨물며 검 끝은
사타구니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야말로 야릇한 자세였다.
숙야천릉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는 구양영봉이란 여인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좀처럼 쉽게 만족할 줄 모르는 집요한 여인이었다.
그의 입술은 여인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다.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살결이었다. 하
지만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싸늘한 대리석에 입을 맞춘들 무엇이 다를까? 그
는 무심한 표정으로 혀를 놀렸다.
한 줌의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은 이상 꺼려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는 더욱 더 위로
입술을 가져갔다. 이제 남은 것은 여인의 비지(秘地)였다. 그런데 그곳을 막고 있
는 것이 있었다. 검이었다.
"헉......."
그는 숨을 토했다.
모든 것을 죽여버렸건만 검 끝이 가로막고 있는 여인의 비지에 다다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고 말았다. 그의 영혼은 죽었으나 본능만은 살아있었다.
그는 구양영봉의 사타구니를 막고 있는 검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
었다. 그는 입술을 벌리며 검을 물려했다.
퍽!
"윽!"
그는 비명을 질렀다.
느닷없이 구양영봉이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구양영봉은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톡 쏘듯
말했다.
"왜? 화가 나나요?"
"으으......."
그녀를 올려다보는 숙야천릉의 눈빛이 야수처럼 이글거렸다.
"호호호호호......!"
구양영봉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한동안 웃던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그치며 싸늘하
게 말했다.
"당신이 과거의 늠름한 자태를 잃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망가졌어도 여전히 사랑했을
지도 모르지......."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싸늘해졌다.
"하지만 당신의 지금 모습은 너무나 비굴해 보여요. 당신의 부탁은 들어주죠. 그 대
신 철저히 당신을 괴롭히겠어요. 당신은 두 번씩이나... 나 구양영봉의 가슴을 찢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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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았으니까 말이에요!"
구양영봉은 말을 마치자마자 교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한참 동
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침상 아래서 그녀를 바라보던 숙야천릉은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그의 눈자위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이여...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이럴 수밖에 없소이다.'
숙야천릉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손톱이 장심으로 파고들어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힘을 상실한 이 놈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지 않소......?'
그의 눈자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눈물과 핏물이 섞였으나 그 색은 붉을 뿐이었다
. 붉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쪽은 절세미남의 얼굴이요, 다른 한쪽은 추
악하기 그지없는 괴물의 얼굴이었다.
숙야천릉과 구양영봉.
애증(愛憎)이 뒤엉킨 남녀의 운명은 또 다른 출발을 하고 있었다.
조화성의 산동지단이었던 오악장이 멸망한 지 보름이 지났다.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숭산 소실봉에 있는 소림사로 한 통의 밀서가 날아들
었다. 밀서는 소림의 방장에게 전달되었는데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고, 오
직 방장만이 읽어야 한다는 별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소림방장은 주위를 물리친 후 밀서를 개봉했다.
그 날 이후 소림방장은 두물불출했다.
밀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소림방장은 며칠째 방장실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식음마저 전폐해 버렸다. 며칠 후 그가 방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
를 수행하던 동자승은 그의 표정이 딴판이 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간 조화성의 준동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진 무림계로 인해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
던 소림방장의 안색이 간만에 밝아져 있었던 것이다.
대체 밀서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동자승은 궁금하지 그지없었으나 감히 질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한 달음에 달려가 차를 끓이는 일 뿐이었다.
복우산(伏牛山).
하남성(河南省)을 가로지른 산맥으로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하게 드러누운 천우(天
牛)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다.
휘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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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풍이 불고 있다.
어느덧 중원대륙에 겨울이 오고 있었다. 북녘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엘 듯
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복우산으로 향하는 연도에 세 필의 말이 나타났다. 마상의 삼인은 두터운 털옷을 입
고 있었는데 이남일녀였다.
기실 한 명은 남장여인이었다. 바로 천사예였다.
세 필의 말 중 가운데 말에 타고있는 늠름한 청년은 바로 장천린이었다. 오른쪽에는
남장을 한 천사예, 왼쪽에는 유리공녀가 타고 있었다.
장천린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네 가지 천하대계(天下大計) 중에서 두 가지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고 있다. 이
제 남은 것은 두 가지 계획이다.'
장천린은 자금성을 떠나면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다. 그를 위해 네 가지의 원대한
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왕검(王劍)의 완성이었다.
스스로 강하지 않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에 그는 전설
로 내려오는 왕검의 도(道)를 이루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숨어있는 검의 달인인 한
선생을 방문했다.
왕검을 득(得)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평생을 바쳐야할지도 몰랐다. 설사 그렇다한들
그는 반드시 왕검을 이루겠다고 결심했다.
두 번째 계획은 피폐해져 가는 중원무림의 정도(正道)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이권이 다르고 생각이 틀린 그들을 규합하는 일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
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공했다.
오파연맹의 맹주에 오름으로써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계획은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복우산으로 향하는 것은 바로 세 번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산길은 점차 협소해지고 있었다.
장천린은 천천히 말을 몰면서 계속 상념에 잠겼다.
'구룡장원의 일도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다.'
그는 고개 들어 멀리 보이는 복우산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곧 다가올 대결전을 위해서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야 한다.'
그의 뇌리에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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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묵과 문도... 그 두 사람은 내게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장천린의 생각은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반송이 만드는 진천뢰도 이 겨울이 지나가면 완성을 볼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안팎으로도 싸움은 해 볼만한 것이 된다.'
한편 그의 왼쪽에서 말을 몰고 있는 유리공녀의 표정은 꽤 밝아 보였다. 그녀는 하
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듯했다.
그녀는 부친의 죽음을 목도하고 해적선 검은 바람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바다에 뛰어든 후로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장천린을 만난
것은 일생의 행운이었다.
장천린은 그녀를 위해 만년삼왕(萬年蔘王)을 일부분 잘라 복용시켰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녀의 건강은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아니, 지난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이제 그녀는 과거의 병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금발은 더욱 눈부시게 빛났으며 피부
는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녀의 뺨은 차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붉게 상기되어 마치
장미처럼 빛나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줄곧 그녀는 장천린과 동행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으려니와 경계심도 품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당히 친밀감
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친밀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부친인 아라사가 죽은 지금 그녀는 고향인 파자사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일지 않았다
. 그곳에 돌아가 봐야 친지라고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가 세상에
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장천린 뿐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몰래 장천린을 훔쳐보곤 했다. 그러다 혼자 배시시 웃곤 했다.
'좋은 분이야... 유리에게는 더욱.......'
그녀는 평소 아라사가 장천린에 대해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아버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완벽하신 분이야.'
유리공녀는 본래 성격이 명랑했다. 일단 슬픔에서 벗어나자 본래의 성격을 되찾았으
며 모든 것을 낙천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그녀의 전 관심은 온통 장천린 뿐
이었다.
한편 천사예는 유리공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같은 여인이기에 감정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리공녀가 장천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질투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투기가 심한 여인도, 그렇다고 마음이 섬약한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의 성격은 대범했다. 그러나 유독 장천린에 대해서만은 유순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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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몸과 마음은 언제나 장천린이 가는 곳을 따르고 있었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
르면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런 여인이었다.
설사 유리공녀가 장천린을 사랑한다해도 그녀는 질투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중
요한 것은 장천린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유리공녀와 스스럼없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어색할 수도
있는 일행이었으나 그녀의 이런 성격으로 인해 세 사람 사이에는 한 번도 마찰이 일
어난 적이 없었다.
유리공녀는 아직 한어에 서툴렀다.
그녀는 복우산의 웅장한 산세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이 산... 대단히 높아요."
장천린은 생각에서 깨어나면서 미소지었다.
"그렇소.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오."
유리공녀는 그가 대꾸해 준 것이 무척이나 반가운 듯 물었다.
"지금... 어디 가나요?"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중이오."
"한... 사람? 누... 구?"
호기심이 유난히 많은 유리였다. 더욱이 그녀는 고귀하기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알
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하는 버릇이 있었다.
장천린은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공녀는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하나 그녀는 화를 내지 못했다. 장천린 앞에서는
온순해지기만 하는 것이 요즘의 그녀였다.
일행은 가파른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희끗희끗한 것이 찬바람에 섞여 날리기 시작했다.
"아! 눈이 오네요!"
천사예가 맑게 외쳤다.
함박눈이었다. 길을 가는 동안 눈발은 점점 굵어지더니 급기야는 펑펑 쏟아져 내리
기 시작했다. 산이며 숲이며 길이며 온통 은백색으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장천린은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왠지 희망이 생기는 느낌이 들었다.
백설을 보는 순간 마음까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전신에 새로운 힘이 솟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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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눈을 기쁜 마음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커다란 눈송이 하나를 받아 보았다.
눈은 손바닥에 차가운 감촉을 주다가 금세 녹아버렸다.
"눈... 예뻐요......!"
옆에서 신기한 듯 유리공녀가 두 팔을 벌리며 들뜬 음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천사예
는 동심을 느낀 듯 고개를 젖힌 채 입술을 벌려 눈송이를 받아먹는 시늉을 하고 있
었다.
'천진한 여인들이다.'
장천린은 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복우산 기슭에서 아늑한 분지를 이루는 곳에 화전(火田)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사냥 따위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손발이 갈라지도
록 일을 해도 좀처럼 가난을 떨치지 못하는 그런 전형적인 마을이었다.
사십여 호 남짓한 마을은 지붕이 낮았으며 울타리라고 따로 없을 정도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장천린 일행은 마을로 들어섰다.
그들이 나타나자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낯선 여행객들을 구경하기
에 여념이 없었다.
장천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모옥에서 중년쯤 되어 보이는 장한 한 명이 걸어나
왔다. 장천린은 가능한 한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말씀 좀 묻겠소이다."
장한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물어 보십시오, 공자."
"혹... 산노인(山老人)이란 분을 아십니까?"
"산노인?"
장한은 커다란 머리를 바보스럽게 갸우뚱거렸다.
"글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장천린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화전민 촌락이니 그가 찾는 산노인에 대해서 알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장천린 일행을
둘러쌌다. 특히 사내들은 금발의 이국 미녀인 유리공녀를 보자 넋을 잃은 듯했다.
호기심에 빛나는 시선을 좀처럼 유리공녀에게서 뗄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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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아낙네들의 눈길은 장천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늘 거칠고 우악스럽기만
한 사내들 속에서 지냈던 그녀들이기에 준수한 장천린의 모습에 마치 꿈속의 왕자님
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장천린은 아낙네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낯이 뜨거워졌다. 이때 예의 장한이 다가오더
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어... 그 분이 누군지 몰라도 촌장 어른께 물어보면 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장한은 확신한다는 듯이 조금 음성을 높였다.
"촌장 어른은 나이가 구십이 넘어 복우산 일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
거든요."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수고스럽지만 촌장 어른께 안내해 주시겠소?"
"헤헤... 쉬운 일입죠."
장한은 마치 특전이라도 받은 양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앞장섰다.
장천린 일행이 그를 따라가자 아이들과 마을사람들도 졸졸 그 뒤를 따랐다. 웬만해
서는 외부 사람들을 보기 힘든 그들이었기에 좀처럼 호기심을 거두려 하지를 않았다
"이곳입지요.."
장한은 마을 한쪽의 다 쓰러져 가는 모옥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낡은 문짝을 주먹
을 두드렸다.
"촌장 어른! 촌장 어른!"
잠시 후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만면에 온통 주름살 투성이의 백발노인
이 고개를 내밀었었다.
"쿨룩... 쿨룩! 누군가? 원 소란스럽기는... 하(河)... 자네로군."
장천린은 얼른 말에서 내려 정중히 손을 모았다.
"촌장 어른께 여쭤볼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촌장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듯 흰자위가 유난히 많은 눈을 한동안 끔뻑거렸다.
"뉘신지......?"
"사람을 찾는 중입니다."
"누구를 말이오?"
촌장의 눈에는 눈곱이 잔뜩 끼어 있었다.
"혹시 산노인이란 분을 아시는지?"
촌장의 흰 눈썹이 꿈틀했다.
"그... 그 분은 왜 찾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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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아는 사람을 만났으니.......'
그는 음성을 가다듬어 말했다.
"그 분의 먼 친척 되는 사람입니다. 만날 수 있겠습니까?"
촌장은 눈알을 끔뻑이더니 머리를 긁적댔다.
"허... 그거 참 기억이 잘 안 나서서 말이야... 아주 오랜 이야기라서......."
촌장은 다시 기침을 했다. 그러자 하씨(河氏)라는 장한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한참
후에야 촌장은 기억을 어렵게 살려냈다.
"에에... 그 분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셨소."
촌장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왜냐면...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도 그 분은 나만큼이나 늙은 모습이었단 말이오.
으음... 그런데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 모습이었단 말씀이외다. 콜록...
콜록......."
장천린은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그 분은 저 복우산 만큼이나 신령스런 기운을 가진 분이셨지요. 아마... 오
십 년이 넘었을 게요. 그런데도 그 분은 여전히 내가 어렸을 적에 보았던 모습 그대
로였으니까......."
촌장은 무척이나 공경하는 표정으로 회상에 잠겼다.
"어쩌다 우연히 그 분을 보게 될 때는... 마치 산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지요. 이 복
우산 만큼이나 큰산처럼... 정말 대단한 분이셨지요. 허허... 난 그 분이 혹 산신령
님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소."
장천린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분은 어디 계시오?"
"쿨룩... 쿨룩! 그 분은 그러니까... 한 삼십 년 전쯤 되었을까? 이곳을 떠나셨소."
장천린은 몹시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글쎄... 그 뭐라더라... 사냥꾼 동(銅) 영감이 우연히 그 어른의 모습을 보았다던
데... 아, 참! 홍엽곡(紅葉谷)에서 보았다더군."
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데... 그때 연세가 백세가 훨씬 넘었으니 지금은 아마 돌아가셨을 것이오."
장천린은 갑자기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촌장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쿨럭... 그런데 무슨 일로 그 분을 찾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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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촌장과 헤어졌다.
그는 헤어지기 전 약값에 보태 쓰라고 은덩이 몇 개를 건네주었다. 촌장의 입이 크
게 벌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일행은 산촌을 벗어나고 있었다. 장천린은 상념에 잠긴 듯 말이 없었으며 두 여인은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침묵을 지켰다.
얼마쯤 갔을까?
한동안 눈치만 보던 천사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대인, 산노인은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장천린은 담담히 대꾸했다.
"일이 있어서요."
천사예는 그가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아 섭섭한 기분이 들었으나 다시 공손히 물
었다.
"아까 촌장의 말대로 라면 지금쯤 나이가 이백 세에 가까울 텐데 아직 살아있을까요
?"
장천린은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함박눈은 계속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송
이가 그의 이마에 떨어졌다가 금세 녹아 흘렀다. 그는 잿빛의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
을 깨물었다.
그도 역시 산노인이 살아있으리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
는 일이었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이번 일은 산노인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가 없다.'
이때 유리공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이백 세 가까이 살 수가 있을까? 그럼... 유리의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다
해도 그 분의 할아버지에... 아버지쯤 될까?"
천사예는 옆에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유리공녀의 모습이 너무도 천진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천린은 웃지 않았다. 그
의 뇌리에는 촌장이 말한 산노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었다.
'촌장이 어렸을 적에도 늙은 모습이었다고...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똑같은 모습을
지녔다니... 복우산 만큼이나 큰산을 느끼게 하는 분... 허연 백발이 마치 산을 휘
감고 있는 넝쿨 같은 느낌을 주는 노인이었다.......'
비록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장천린은 산노인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
곳 복우산으로 긴 여행을 마다 않고 온 것은 오직 그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그가 세운 네 번째 계획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삼십 년 전에 복우산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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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망도 잠깐 하늘을 우러러보는 동안 가슴속에서 새로운 용기가 솟아올랐다.
'인사재인 성사재천(人事在人成事在人:일은 사람이 꾸미나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이
라고 했다. 최선을 다하기 전에는 어떤 절망도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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