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신주사성(神州四聖)
눈이 내린다.
복우산으로 깊숙이 들어서자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펑펑 내리는 눈은 잠깐 사이에
발목이 묻힐 정도가 되었다. 급기야 장천린 일행은 말을 버리고 걸어가야만 했다.
더 이상 말이 다닐만한 길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도 험했다.
그 사이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곡의 기후는 예상보다 온화하
여 눈은 내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더욱이 계곡에는 홍엽(紅葉)이 매달린
수목이 우거져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홍엽이 무성했다. 그래서 홍엽곡(紅葉谷)이란 이름이 붙었는지도 몰랐
다. 마침내 그들은 홍엽곡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구불구불한 협로를 따라 홍엽곡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대략 오 리 가량
들어가자 계곡은 갑자기 넓어지면서 분지가 나타났다. 그 분지의 끝 쪽, 그러니까
절벽에 맞닿는 지점에 한 채의 작은 모옥이 있었다.
'음, 저곳인가 보군.'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옥을 향해 다가갔다. 일행이 모옥에 다다르도록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계십니까?"
몇 차례를 불러봤지만 모옥에서는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천린은 잠시 망설이다 모옥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방문이 열린 순간 그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방 안에는 이미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듯 먼지가 한 켜나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방 안의 집기나 가구 등속도 오랫
동안 쓰지 않은 듯 퇴색한 채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장천린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산노인은 이 세상을 떠났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어쩌면 이 모옥은 산노인이 살던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였다.
"무량수불......."
등뒤에서 도호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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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적지 않게 놀랬다. 도호가 지척에서 들리도록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데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노도인(老道人)이었다.
그것은 몹시 늙은 도인이었다. 아니, 늙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거의 빠져버려 몇 올만 간신히 남아 체면을 유지시켜 주고 있었
고, 피부는 쭈글쭈글하다 못해 흡사 고목의 껍질처럼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허리는
잔뜩 굽어 마치 늙은 소나무를 보는 듯했다.
노도인은 입 속으로 도호를 중얼거리며 생기라곤 한 점도 찾을 수 없는 짓무른 눈으
로 장천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보통 노인이 아니다.'
비록 너무 늙어 눈빛마저 흐릿해 보였으나 그는 노도인의 흐릿한 눈 속에서 사람의
내면을 뚫어 보는 듯한 혜지가 숨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더욱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심지어는 공기의 파동조차 없이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노도인의 신법은 도무지 불가사의하기만 한 것이었다.
노도인은 장천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주는 이곳에 사는가?"
비록 반말이었으나 장천린은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친근감마저 느꼈
다.
"아닙니다."
노도인은 장천린을 힐끗 보더니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혀를 차며 도
로 걸어나왔다.
"쯧쯧! 이 늙은이가 결국은 도망쳐 버렸군."
그는 코를 힝! 풀며 말했다.
"하지만 도망가봐야 그 자리가 그 자리지."
갑자기 그는 껄껄 웃더니 품속에서 낡아 찌그러진 동전 몇 개를 꺼내 허공으로 던졌
다.
짜르륵!
묘하게도 동전은 공중에서 몇 차례 부딪치더니 그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모두 다
섯 개였다. 뒤집혀지고 바로 된 동전을 잠시 내려다 본 노도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
렸다.
"흠, 북서쪽이라... 그럼 구곡동(九曲洞)으로 갔겠군."
그는 마치 눈앞의 사람에게 말하듯 낄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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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산늙은이.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만은 어림도 없단 말이야."
노도인은 그야말로 제멋 대로였다. 그는 힐끗 돌아서며 장천린을 향해 물었다.
"자네도 산곡(山谷)을 찾아왔나?"
장천린은 두 손 모아 공손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흠......."
노도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마치 큰 인심이나 쓰듯 말했다.
"그럼 데려다 주지. 흘흘... 산곡 늙은이를 귀찮게 하는 일이라면 이 도인 나으리가
앞장을 서지."
장천린은 갑자기 희망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따라오게나."
엇! 하고 놀랄 사이도 없었다. 노도인의 음성은 이미 사 오십 장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장천린은 크게 놀랐다.
'육지어풍비행술(陸地御風飛行術)! 전설로나 전해지던 도가의 경공술을 보게 되다니
?'
노도인은 발이 지면에 닿지도 않은 상태에서 거짓말처럼 수십 장을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갑시다!"
장천린은 멍한 표정을 짓는 유리공녀와 천사예의 손목을 잡고 신형을 날렸다.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으므로 그도 태마경(太魔經) 상에 나오는 표홀무를 전개했다.
그는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표홀무를 시전했다. 그의 신형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개가 지면을 스치듯 날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는 노도인을 따라 날아가며 개방 방주 태무결이 한 말을 떠올렸다.
......당금 무림에서 조화성주 염무의 적수는 전무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전대
기인 중에서는 같은 소속인 도성(刀聖) 유백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도성이 살아있
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제자인 무정도(無情刀) 모용초가 조화성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염무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외에는 염무와 대적할 기인이 없단 말이오?
......글쎄요, 은거고인으로는 천외삼기(天外三奇)가 있으나 그들 역시 도성 유백
보다는 한 배분이 낮습니다. 도성 유백은 현존하는 무림 최고의 배분을 지닌 고수입
니다.
......그렇다면 도성 유백과 동대(同代)의 인물은 없습니까?
......사실 본인도 그 점을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그 결과 무림에 잘 알려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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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으나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도성 유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 세 명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이 누구요?
......신주사성(神州四聖)이라고 합니다.
......신주사성?
......도성 유백도 사성 중 한 명입니다. 또한 천외삼기(天外三奇)도 그 사성 중 두
명의 제자라는 사실이 최근에야 밝혀졌습니다. 그 사실은 개방의 최고 원로인 황장
로(黃長老)로부터 들은 사실입니다. 근자 들어서야 신주사성 중에서 산곡(山谷) 노
인이란 분이 복우산에 은거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맹주, 한 번 그곳으로
가 보십시오. 어쩌면 염무를 저지할 방법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그
분들을 끌어내기만 하면 정도무림으로서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얻는 셈입니다.
장천린은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는 노도인을 바라보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신주사성 중 산곡노인을 마치 친구 부르듯 하는 저 도인은 혹시......."
그는 생각을 이어갔다.
'신주사성 중 도성을 제외하면 그 중 한 명이 산곡(山谷), 또 한 명은 도가의 시조
라 불리는 능허자(能虛子)와 백마(白魔) 갈훼(葛卉).......
여기까지 생각한 장천린의 얼굴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저 늙은 도인은 능허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산모퉁이를 돌았다. 그 순간 급격히 신형을 멈추어야 했다.
그곳은 어떤 계곡의 입구였다. 그곳에 노도인이 우뚝 서있었다.
장천린은 그의 곁으로 다가간 후에야 그가 왜 그 자리에 서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음! 계곡 입구에 바위로 진법을 펼쳐 놓았구나.'
계곡 입구에는 바위가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보통 사람은 그 모습에 아무런 이상
함을 느낄 수 없을지 몰라도 장천린은 한 눈에 그것이 무서운 절진(絶陣)이라는 것
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늙은 놈이 이곳에 진법을 펼쳐 놓았구나!"
한참을 머리를 굴려 보아도 해진법을 찾지 못하자 노도인은 욕설을 퍼부었다.
장천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인어른, 소생이 한 번 풀어 볼까요?"
"응? 자네가?"
노도인은 미덥지 않다는 듯이 그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장천린은 대꾸하지 않고 안력을 집중해 난석 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법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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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었다. 과거 부금진으로부터 어느 정도 배운 바가 있었을 뿐
더러 태마경에서도 진법에 대해 다룬 부분이 있었다.
태마경에서 다룬 것은 극히 심오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
어도 어느 정도 진법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는 터였다.
마침 우연인지 행운인지 곡구에 펼쳐져 있는 진세는 팔방석천금쇄진(八方石天禁碎陣
)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으음... 팔방석천금쇄진에 구궁연환진(九宮連環陣)과 팔괘풍운진(八卦風雲陣)이 정
반(正反)으로 겹쳐져 있구나.'
장천린은 대략 일각만에 파진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편 노도인은 시종 반신반의한 표정이었으나 그가 땅바닥에 무엇인가 어지러운 도
형을 그리며 진도를 연구하는 것을 보고는 점차 기대하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도인어른."
노도인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정말인가?"
"후후! 소생의 뒤를 따라오시면 알 것입니다."
장천린은 유리공녀와 천사예의 손목을 잡고 계곡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렇
게 되자 노도인도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천린은 어떤 일정한 규칙에 의해 곡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옆으로 도는가 하면
뒷걸음질을 쳤고, 또는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했다.
잠시 후 그들은 완전히 계곡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으허허허헛! 무량수불... 젊은 친구가 대단하네."
노도인은 칭찬을 한 후 전면의 절벽을 바라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내 당장 그 산곡 늙은이의 수염을 배추 뽑듯이 뽑아 버리겠네!"
슉!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아!"
장천린은 탄성을 발했다.
노도인이 신형을 솟구친 곳은 계곡 끝에 면해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노도
인은 무려 십 장이나 솟구쳐 올랐다가 절벽 면을 밟았다. 그런 상태로 태연히 걸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직의 절벽을 마치 평
지 걷듯 한 걸음씩 유유히 걸어 오르는 모습!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법이었다. 그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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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 유리공녀와 천사예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노인의 모습이 칠십 장 높이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절벽 중간에 동굴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또한 그는 안력을 돋궈 절벽 면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유리처럼 매끈해 보이는 절벽 면에 이삼 장마다 발을 딛을 만한 아주 작은
홈이 파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유리공녀와 천사예를 각각 옆구리에 끼었다.
"꽉 붙드시오."
말을 마친 순간 그는 신형을 날렸다.
휙! 휙!
그는 거침없이 절벽을 타고 올랐다.
두 여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의 가슴을 죽어라 끌어안았다. 무림인이 아닌
두 여인은 지금까지 본 것만 해도 너무나 신비한 것 투성이라 웬만한 일에는 놀라
지 않게 되었으나 이렇게 수직절벽을 날아오르기는 처음이라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
아야만 했다.
장천린은 순조롭게 수직절벽을 타고 올랐다. 잠시 후 그는 예상대로 절벽 중간 부분
에 바위로 가려진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동굴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껄껄껄! 산곡, 이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으렷다."
동굴 안쪽에서 노도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동굴 안은 꽤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탁자도 있었으며 나무침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병풍을 비롯하여 표구된 산수화 따위가 벽에 걸려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서
재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탁자 앞에서 한 괴노인이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정말 괴이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황포(黃袍)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길었다. 아니, 길다는 말로는 부
족했다. 너무나 길어 바닥까지 끌릴 정도였으며 수염 또한 여러 가닥으로 꼬여진 채
칡넝쿨처럼 전신을 칭칭 휘감고 있었다.
이 노인이야말로 전대의 노기인인 산곡노인(山谷老人)이었다.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붓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 늙어 죽지도 않는 능허자야! 왜 또 노부를 찾아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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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굴 안으로 들어선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군. 저 분 도장이 능허자고.......'
그는 산곡노인의 괴이한 모습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특이한 노인이군. 저런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구나.'
산곡노인은 그야말로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
그는 체구가 거대하여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작은 산이 웅크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흐흐... 노도가 왜 왔냐고? 급한 일 때문에 왔다. 그렇지 않다면 뭣 때문에 냄새나
는 네놈을 찾는단 말이냐?"
산곡노인은 자신이 쓴 글씨를 감상하듯 눈을 내리 깔았다.
"뭐가 그리 급한 일이란 말이냐?"
"도성 유백과 백마 갈훼가 등장했다."
산곡노인의 몸이 흠칫 굳는가 싶었다.
그는 내심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성과 백마라면 백여 년 전 함께
활약했던 인물들인 것이다.
산곡노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게 어쨌단 말이냐? 말코."
"뭣이 어째? 그래, 그 놈들이 나타났는데도 관심이 없단 말이냐?"
산곡노인은 피식 웃었다.
"능허 말코야."
"왜 그러느냐?"
"도대체 우리 나이가 몇이냐?"
"그건... 음... 산곡 네놈은 백 육십... 에... 그리고 또 두 살을 더 먹었지. 헤헤!
그래도 이 도사님이 조금 낫다. 백 오십 팔 세다."
산곡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면 살만큼 살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무슨 미련이 있어 세상일에 또 관심을
갖는단 말이냐? 난 흥미 없다. 도성이든 검성(劍聖)이든......."
능허자는 발연대로 하면서 노성을 내질렀다.
"놈! 우리가 백년 전 그 두 놈에게 받은 빚이 생각 안 난단 말이냐?"
산곡노인은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응, 생각이 안 나는데......."
마침내 능허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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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 왜 겁나느냐? 산곡 늙은이야? 그때 너의 누이동생이 갈훼에게 몸을 망치
고 버림받아 죽은 사실을 설마 잊을 리가 없건마는......."
쾅!
산곡노인의 주먹이 탁자를 내려쳤다. 그 바람에 탁자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다.
어디 그 뿐이랴? 산곡노인의 머리카락은 올올이 곤두서 하늘을 향해 치뻗었으며,
가닥가닥 꼬았던 수염마저도 몽땅 곤두서 버렸다.
그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얘기하면 너 능허자... 용서 못 하겠다."
산곡노인의 음성에는 무한한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물론 그런 협박에 겁먹을 능허
자 또한 아닌 듯 싶었다.
"헤헤헤! 그럴 용기가 있다면 애꿎은 이 늙은이만 잡지 말고 갈훼 그 놈의 눈알이나
뽑아 버려라."
"이 말코 늙은이가......."
산곡노인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하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장탄식을 터뜨렸
다.
"휴우! 말코, 노부가 졌다. 대체 어찌 하라는 거냐?"
"진작 그럴 일이지."
이때 뒤늦게 장천린 등을 발견한 듯 산곡노인이 물었다.
"한데 저 아이는 누구인가?"
능허자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 산곡, 자네의 진을 저 젊은이가 뚫었네."
산곡노인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장천린은 공손히 포권하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무림말학 용백군이라 합니다."
"용백군?"
산곡노인은 처음 듣는 이름인 듯 중얼거리더니 장천린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좋은 재목이야. 쓸만해......."
장천린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어르신께 드릴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내게 부탁을......?"
"그렇습니다."
장천린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후 당금 무림의 정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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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산곡노인은 누구인가?
그의 별호는 환존(幻尊)이었다. 변장술, 진법을 비롯하여 각종 장법(掌法)과 신공(
神功) 방면에 있어 가히 천하제일이란 호칭을 받을 수 있는 일대기인이었다.
천외삼기에 속해있는 장왕(掌王) 만노군(萬路君)은 그가 이름을 올려주지 않은 무기
명(無記名) 제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노군은 수십 년 전 그에게 단 삼
일을 배우고도 장왕이란 외호로 무명을 드날리게 되었다.
또한 검군(劍君) 궁일평도 그에게 보름을 배운 후 훗날 천외삼기의 대열에 들 수 있
었다. 그 만큼 산곡노인은 타고난 무광(武狂)으로 평생 동안 무공 익히기를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기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존이란 별호가 말하듯 그의 장기는 각종 환술(幻術)을 능수능
란하게 구사하는데 있었다.
장천린은 조화성이 일으키고 있는 혈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특히 조화성주
염무가 여진의 누르하치와 손잡고 명조를 무너뜨린 후 무림을 장악하려 한다는 사실
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산곡노인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무림계의 일을 잊고 지낸 지가 언젠데 이제 또 다시 과거의 은원에 휘말려
들게 되다니......."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며 낭랑하게 말했다.
"당금 무림의 상황을 비추어 볼 때 개인의 은원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무림에
몸을 담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의를 보고 나서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음성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헛헛헛......!"
산곡노인은 너털웃음을 웃더니 말했다.
"썩 괜찮은 놈이로군. 하지만 아이야, 너도 노부처럼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이 허허
로워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는 고개 돌려 능허자를 향해 물었다.
"말코 늙은이야. 그래, 무슨 계획이라도 있느냐?"
능허자는 몇 올 되지도 않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험! 계획은 무슨......."
문득 그는 장천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아이의 머리가 꽤 좋아 보이는데 한 번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나?"
산곡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쓸개 빠진 늙은이 같으니! 그래 아무 계획도 없이 찾아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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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허자는 돌연 껄껄 웃었다.
"이제 우리들의 시대는 벌써 다 지났네.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에 밀린다고 하지
않던가? 어디 이 아이에게 한 번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나?"
산곡노인은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가 떴다.
"용백군이라 했던가? 그래, 자네가 노부를 찾아온 목적은 무엇인가?"
장천린은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적을 치려면 장수부터 치고, 범을 잡으려면 호굴로 들어가라 했습니다. 소생은 적
을 알기 위해 조화성으로 들어갈 계획입니다."
산곡노인과 능허자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실상 그들은 오랫동안 은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래도 들리는 풍월은 있어 조화성이 어떤 단체인지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산곡노인은 큰 관심을 보였다.
"저의 얼굴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변장한다 해도 염무를 비롯
한 조화성 마두들의 안목을 속이기는 불가능합니다. 해서 노선배님께 환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허어!"
산곡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 밑천을 달라고?"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물론 공짜로 바라지는 않습니다."
산곡노인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어떤 대가를 줄 텐가?"
장천린은 느긋이 말했다.
"두 분이 강호에 나가 거처하실 곳과 시중들 사람을 마련하겠습니다."
능허자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아이쿠야! 여기 지독한 놈이 있었군. 이제 보니 우리 늙은이들을 실컷 부려먹을 생
각까지 하고 있군, 그래!"
"허허헛......."
산곡노인도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장천린을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그야말로 창졸지간의 일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있었으므로 도저히 피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장천린은 할 수 없이 손바닥을 마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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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수밖에 없었다.
쾅!
하는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장천린은 순간적으로 대반야능력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혈이 온통 뒤집히
는 것을 느끼며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가야 했다. 반면 산곡노인은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산곡노인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떠올랐다.
'대... 대단하군! 노부가 백 세 때도 저 정도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거늘.'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가 실로 대단하구나.......'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좋다. 네 말을 들어주마."
장천린은 진탕하는 기혈을 억누르며 싱긋 웃음을 떠올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때 능허자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이 늙은이의 거처를 어떻게 알았나?"
장천린은 순순히 대답했다.
"개방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허! 그 거지들의 소식통은 정말 대단하군, 그래."
산곡노인은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는 천사예를 바라보더니 눈을 번뜩였다.
"저 남장을 한 계집애는 자네의 계집인가?"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천사예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산곡노인은 계속 천사예를 주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보기 드문 내미지상(內美之相)이로군. 잘만 닦으면 천하제일의 미인이 되겠어.
자질도 놀랍고 말야."
그 말에 능허자는 낄낄 웃었다.
"이 음흉한 늙은이야! 빙빙 말 돌리지 말고 속내를 털어놓아. 그 계집애를 제자로
두고 싶은 게지?"
이 뜻밖의 말에 장천린은 내심 무척 기뻤다. 그는 급히 천사예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예,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무엇하오? 이런 일은 금생에 다시없는 기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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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예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자 천사예... 사부님께 인사드립니다."
"어... 흠흠......."
산곡노인은 시인도 부인도 않은 채 연신 헛기침만 했다. 장천린은 눈앞의 두 노기인
들이 뜻밖에도 천진하다는 것을 느끼고 내심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저 노인들이 이토록 오래 사는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성
품 때문일 것이다.'
이때 장천린은 능허자의 눈빛이 유리공녀를 향해 야릇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
고는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후후... 능허자 노선배는 유리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군.'
그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천린은 구곡동에서 보름간에 걸쳐 환법을 익혔다. 변장술, 역용술을 비롯하여 변
성술과 갖가지 기기묘묘한 환술에 이르기까지 산곡노인은 아낌없이 자신의 기예를
전수해 주었다.
산곡노인의 환술은 약이나 면구(面具)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내공(內功)을 이용하
여 용모와 체격, 음성을 바꾸는 것이므로 아무리 안목이 날카로운 사람일지라도 절
대로 발견할 수 없는 신비한 술법이었다.
유리공녀는 능허자의 제자가 되었다. 그녀는 연일 무공을 익히느라 금발을 휘날리며
땀을 흘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들은 모두 구곡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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