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비운의 두 사나이
만력 사십팔년 십이월 삼일.
사천성(四川省) 공명산(空明山).
휘이이잉!
바람이 분다. 살을 엘 듯한 매서운 한풍(寒風)이 천지간을 휩쓸고 있었다. 마치 시
퍼렇게 날 선 칼날이 대지를 가르는 듯했다.
잔설(殘雪)이 얼음으로 변해 삭막하게 동결된 험산이었다. 앙상한 나목(裸木)의 가
지는 바람이 불 때마다 부러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산기슭에 청삼을 입은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 나타났다.
독사처럼 예리하게 번쩍이는 두 눈, 날카롭게 휘어진 매부리코와 각진 턱이 잔인하
면서 음독한 인상을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신이 강철처럼 단단한 느
낌이었다.
청년의 냉혹한 모습 이면에는 어딘가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을 일컬
어 고독(孤獨)이라 하던가?
청년은 어깨에 한 자루의 장도(長刀)를 메고 있었다. 그는 살갗을 벗겨낼 듯한 한풍
속을 일정한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마도 원계묵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본래 구룡장원에 있어야할 그가 이 멀고 먼 사천 땅에 나타나다니
원계묵은 고개 들어 공명산 줄기를 바라보며 눈썹을 쫑긋하고 있었다.
'육 년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군.'
그의 얼굴에 쓰디쓴 감회가 어렸다. 그의 뇌리에는 고통에 가까운 기억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산을 바라보는 그의 사목(蛇目)은 겨울의 산만큼이나 황량해 보였다.
'이맘때만 되면 육 년 전 그 처절했던 날이 생각난다. 몇 번이고 악몽에 시달리다
식은땀에 전신이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나곤 했지.'
원계묵의 강퍅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고통의 선(線)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휘이이잉!
휘몰아치는 바람 속으로 그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 그의 뇌리에는 과거의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 있었다.
'손미... 너는 지금 어떻게 되었느냐?'
그의 눈빛이 흔들림을 보였다.
암자(庵子)는 공명산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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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세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산중 깊은 곳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암자의 문 위에는 청해암(靑海庵)이란 편액이 붙어있었는데 비구니들만 사는 곳이었
다. 규모는 비록 작았으나 정결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멀리서부터 향냄새가 은은히
풍겨 나오고 있었다.
원계묵이 청해암에 들어선 것은 오후 늦은 무렵이었다.
그는 곧바로 암자로 들어섰으나 아무도 가로막는 사람이 없었다. 암자의 문을 넘자
정면에 법당이 있었다. 그는 법당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향연이 타오르고 있는 법당 안.
한 명의 늙은 여승이 염주를 쥔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잿빛의 승포, 잔주름으로 덮인 얼굴에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원계묵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혜공(慧空)이란 법명을 지닌 여승은 청해암의 암주였
다. 그는 잠시 여승을 바라보다 바닥에 무릎 꿇었다.
"손미의 정신이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미타불......."
혜공은 반개했던 눈을 뜨며 염불을 외었다. 주름진 얼굴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호수
처럼 깊고 맑았다. 원계묵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고해의 빛이 떠올랐다.
"원시주께서 손미를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손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원계묵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그의 음성은 냉철했다.
혜공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원계묵의 태도는 강철과도 같아 감정이 들어갈 틈이
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눈까풀을 내리며 답했다.
"정심원(靜心院)에서 요양 중입니다."
"만나보겠습니다."
원계묵은 분명하게 말했다.
"원시주."
혜공의 눈에 간절한 빛이 어렸다.
"손미는 본시 유약한 아이입니다. 지난 육 년 간 암흑의 세월을 견디며 이미 무한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원계묵의 얄팍한 입술 끝에 조소가 걸렸다.
"나는 그보다 열 배는 더 심한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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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에 회한의 빛이 떠올랐다.
"내가 왜... 육 년 전 그녀를 죽이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
"그것은 손미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죽이기에는 한(恨)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혜공의 안면이 파르르 떨림을 보였다. 그녀는 원계묵의 강철같은 의지에 대항하기에
는 자신이 너무 연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원계묵의 입가에 칼날과도 같은 비정한 미소가 어렸다.
"그래서 손미의 기억이 돌아온 후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뼈아픈
후회를 안겨준 뒤 죽일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음성은 갈수록 냉정해지고 있었다. 혜공은 가슴이 얼어붙는 듯했다. 원계묵은
혜공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냉혹하게 말을 이었다.
"육 년을 기다렸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손미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찌 스님의 말 한마디에 내 가슴이 찢어지도록 받은 그 상처를 잊
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혜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해결 방안을 찾지 못
했다. 원계묵은 할 말을 마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만나보겠습니다."
"원시주!"
혜공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마디를 해야만
했다.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
"손미는 당시의 일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후회?"
원계묵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그는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인간은 죄를 저지르면 마땅히 업보를 받아야 합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처
럼 말입니다. 후회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과오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혜공은 내심 탄식했으나 할 말은 해야했다.
"손미는 오늘 부로 부처님께 귀의할 예정이었습니다."
원계묵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부처님은 죄인들의 도피처가 아니오!"
차갑게 내뱉은 그는 휙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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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혜공은 원계묵의 완강한 등을 바라보며 염불을 외었다. 반쯤 감은 그녀의 눈에는 고
해와 번민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심원은 청해암 뒤편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한 칸의 작은 암자였다.
"마하바라반야......."
정심원에 다가가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여인의 염불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원계묵은 암자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염불소리가 귓전에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손미의 음성.......'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음성을 잊는다해도 손미의 음성만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
다. 지난 날 그의 품에 안겨 갖은 아양을 떨면서 사랑을 속삭이던 달콤한 음성이었
다. 더구나 그 모든 것이 거짓으로 위장한 가증스러운 것들이었음을 알았을 때 느꼈
던 처절한 배신감! 당시 가슴이 찢어져 나갈 듯했던 감정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
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손미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는 암자의 문을 이글거리는 눈
으로 노려보던 원계묵은 마침내 벌컥 문을 밀었다.
"......!"
그는 방문 앞에서 목석인 양 굳어졌다.
잿빛 승복을 걸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윤기 나는 치렁치렁한 흑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그림처럼 단정한 자세로 앉아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원계묵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지그
시 깨물었다.
"손미......."
극도로 감정이 억제된 음성이 흘러나온 순간 염불이 뚝 그쳤다. 승복을 입은 여인의
어깨가 파도치듯 흔들렸다. 그 뿐이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동안 두 사람은 망부석인 양 서있었다.
한참 후에야 여인은 몸을 돌렸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니, 너무나 아름다워 처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슬픈 미인의 얼굴이었다. 유난히 가
늘고 긴 목과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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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노라면 왠지 가슴이 젖는 듯 애련한 감정이 일어났다. 더구나 종잇장처럼 창백
한 피부에 핼쑥한 얼굴은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계... 계묵......."
여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원계묵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올랐다. 격렬한 감정의 소용
돌이가 일고 있었다.
여인 손미는 얼어붙은 듯한 표정이었다. 원계묵을 바라보던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문득 눈물이 차 올랐다.
원계묵은 겉잡을 수 없는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넌... 나와 함께 청춘의 아름다운 꿈을 설계했던 여인이지 않느냐? 그때는 그저 바
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날 배신했다. 그런데 왜 지금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냐? 내게서 뭘 원하느냐?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라! 그 정도에 마음이
약해지기에는 너무 늦었단 말이다!'
짧은 순간에 원계묵의 가슴은 터질 듯한 격정으로 끓어올랐다. 전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격심한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떨리는 음성으로 먼저 입을 연 것은 손미였다.
"오랜... 만이군요."
"육 년이다."
원계묵의 음성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손미의 눈에 눈물이 찰랑찰랑 고였다. 오랜 회한과 고통이 이제는 정제된 듯 투명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은 낮게 잦아들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긴 세월이 지난 것도 같고, 바로 어제 일 같기도 하고......."
원계묵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말이야."
손미의 창백한 뺨으로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픔을 삼키며 여린 미소
를 지었다.
"제 눈이... 멀었었나 봐요. 정신을 되찾은 후...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
어요."
원계묵은 아무런 말이 없다. 단지 그는 식어버린 눈빛으로 손미의 말을 무감동하게
듣고 있을 뿐이었다. 손미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뒤엉킨 눈으로 원계묵을 바라보
았다.
"하나... 당신을 만나니 도리어 평온해 지는군요."
그녀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처연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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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묵, 당신과... 의부님께 어떻게 사죄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원계묵의 눈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당신이 어떻게 한다해도... 손미는 할말이 없어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육 년을 기다려 왔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원계묵의 입술이 열리며 무섭도록 가라앉은 음성이 흘
러나왔다. 손미의 교구가 경련했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손미는... 계묵, 당신의 손에 생명을 맡기겠어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스윽!
원계묵은 장도를 뽑아들었다. 그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날 배신한 것은 아무리 큰 모욕이라도 참을 수 있는 일이다. 하나 손미, 최소한 사
부님에게만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손미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어요."
손미의 감은 눈썹 아래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원계묵은 장도를 번쩍 치켜들
었다.
손미의 얼굴에 공포나 두려움의 빛은 전혀 없었다. 평온함이 있을 뿐이었다. 평온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만이 회한의 표징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계묵의 철벽과 같던 마음이 일순 흔들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손미, 내 손에서 인정을 바라지 마라."
그는 수중의 도를 힘껏 내리쳤다.
손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장도를 쥔 원계묵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바
람을 끊고 떨어지던 장도가 손미의 머리 위에서 딱 멈췄다. 머리카락 한 올을 사이
에 두고서.
원계묵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각, 그의 마음은 수천 아니 수만 번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아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장도를 움켜쥐고 있는
순간 거짓말처럼 손미의 흑단 같던 머리칼이 하얗게 은색으로 세어버리는 것이 아
닌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흑발
이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완전히 백발이 되어버린 것이다.
장도는 여전히 손미의 하얗게 센 머리 위에 멈추어져 있었다. 장도 끝이 덜덜 흔들
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손미는 지난 육 년간 암흑의 세월을 견디며 이미 무한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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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의 간절한 음성이 원계묵의 귓전을 울렸다. 장도 끝이 다시 흔들렸다.
......손미는 오늘 부로 부처님께 귀의할 예정이었습니다.
원계묵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손... 미......."
마침내 신음처럼 흘러나온 한 마디.
"......."
손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원계묵의 눈에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네가 지금 죽는다 해도... 돌아가신 사부님의 한은 풀리지 않는다."
"계... 묵......."
손미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자책의 빛이 떠올랐다. 원계묵은 그녀의 가슴에 비수
를 박듯 비정하게 말했다.
"참회하라. 불존 앞에서 평생을 참회하라. 그리고... 사부님의 영혼 앞에 네 일생을
두고 사죄해라!"
손미의 교구가 경련했다.
"계묵......."
"내 아픔은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널 믿었던 사부만은 이제 더 이상 아
프게 하지 마라."
손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원계묵은 장도를 거둔 후 몸을 돌렸다.
"계묵!"
손미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그의 귓전을 찢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날 부르지 마라. 널 보면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속죄란 이름으로... 결코 성
스런 불문을 더럽히지 마라."
말을 마친 후 원계묵은 등을 보인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계묵!"
손미는 무너지듯 바닥에 엎어지며 오열을 터뜨렸다. 돌아서 걷는 원계묵의 입술 사
이로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끝내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흐흐흐흑......."
손미의 흐느낌이 원계묵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는 걸어가며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사부, 제자를 욕하지 마십시오. 제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안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핏발선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평생
눈물이라곤 모르던 사나이 원계묵의 눈에서 눈물이라니!
피처럼 붉은 노을이 공명산을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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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원계묵은 하산하고 있었다.
뎅.......
멀리 산 위에서 들려오는 청해암의 범종소리가 노을 밑으로 깔리고 있었다.
고제갈공사지위(故諸葛公師之位).
위패와 함께 차가운 관이 어두운 석실 안에 모셔져 있다.
한 사나이가 무릎 꿇고 있다.
산발에 상복을 입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끔찍한 얼굴이
드러났다.
온 얼굴에 한 치의 틈도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검흔(劍痕)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 온통 흉터로 이루어져 있는 얼굴이 유등(油燈) 빛을 받아 소름끼칠 정도로 흉측하
게 보였다.
위패를 바라보는 사나이의 눈은 한과 비통함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 사나이는 바로 옥류향(玉柳香)이다.
이제 그에게서는 더 이상 아름답고 풍류 넘치는 미공자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철저히 망가진 얼굴에는 한과 복수심만이 뒤엉켜 악마의 화신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태고 이래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아버님, 당신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두 달이 흘렀습니다. 이 아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영원히 패배를 모르는 불사신이었소.
......당신께서 북해의 차가운 땅 위에서 시신조차 보존 못하고 돌아가셨을 때 이
아들은 믿을 수가 없었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생각했었소.
......안타깝게도 그것은 현실이었소. 위대한 신산(神算)의 전설은 무너졌소. 하지
만 무엇보다도 이 아들에게 있어 슬픈 것은 하나 뿐인 아버님인 당신이 돌아가셨다
는 사실이오.
놀라운 일이다.
옥류향의 내면에서 울리는 비통한 독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산 제갈사가
바로 그의 부친이었단 말인가?
옥류향의 눈에 핏발이 서고 있었다.
'마교십삼사... 나 옥류향은 아버님의 영전 앞에서 맹세한다. 너희들의 목을 모두
베어 아버님의 제단에 바칠 것을......!'
옥류향은 두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지난 날 금월산에서 얼굴이 망가지면서까지 모든 것을 숨겨왔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신산의 아들로서... 복수를 시작할 것이다.'
옥류향의 눈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신산의 위패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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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당신은 패했지만 이 아들은 패하지 않을 것이오. 신산의 아들이 신산보다
백 배 더 무섭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말겠소.'
옥류향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마교십삼사... 그리고 모용초!'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 밖에는 상복을 입은 십 인이 지면 위에 무릎꿇고 있었다. 그들은 삼십대 중반쯤
의 나이였는데 한결같이 비통한 표정들이었다.
옥류향은 그들을 둘러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아버님께 남은 것은 이제 나와... 너희들 뿐이다. 오성단마저 붕괴된 지금 신산의
세력은 초토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류향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무한한 증오가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다. 나와 너희들은 아버님이 이십 년을 두고 안배한 최고
의 정화(精華)다. 그렇지 않느냐, 십군자(十君子)?"
십군자라 불린 십인은 일제히 고개를 들며 비장하게 외쳤다.
"이제부터는 십상객(十喪客)이라 불러 주십시오!"
십인의 입에서 똑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인물이 주먹으
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십군자는 사라졌습니다. 제갈 어른께서 돌아가신 그 순간부터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른의 복수가 끝나는 그 날까지... 저희들은 상복을 벗지 않을 것입
니다. 대신 십상객이 등장할 것입니다."
옥류향의 눈에 감동의 물기가 번졌다. 그는 십상객을 한 명씩 둘러본 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좋다. 이제 떠난다. 복수가 끝나는 그 날까지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을 것이다."
십상객은 일제히 머리를 땅에 찧으며 부르짖었다.
"맹세합니다, 피로써!"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의 이마는 깨어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무도 인상
을 찡그리는 자는 없었다.
"일어서라."
옥류향의 말에 예의 청년이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항주다."
청년이 움찔한 표정을 짓자 옥류향은 차갑게 말했다.
"오해하지 마라.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잔정의 찌꺼기를 없애 버리려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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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옥류향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엿보이지 않았다.
항주의 천화군방원(天華群芳院).
여인의 달콤한 체향이 은은히 흐르는 규방이다.
규방은 주인을 닮은 듯 정갈하고 기품 있게 장식되어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분위기가 감도는 규방 안에서 천화군방원의 원주인 화가영은 상아침상의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때 미색으로 항주에 숱한 염문을 뿌렸던 절세미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매혹적인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수척해 보였다. 그 동안 정신적
인 고초에 몹시 시달린 탓인 듯했다.
방 안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옥류향이었다.
그는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벗어둔 죽립이 있었고, 그는 맨
얼굴 그대로였다.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온 얼굴에 징그러운 상흔이 그어져 있는 야차와도 같은 얼
굴이었다.
옥류향은 항주에 들어서자마자 화가영을 찾았다. 명패를 본 화가영은 두말없이 그를
자신의 규방으로 불러 들였다.
얼굴이 망가진 이후 옥류향은 그녀를 찾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용모가 변했다고 그녀와의 사이에 어떤 변화가 오리라고는 상상하
지도 않았다. 그만큼 애정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잊으라고 말했다. 자신은 이미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상실했으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노라고 말했다. 그 대상이 모용초란 사실을 알았을
때 옥류향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로부터 다시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난 것이다.
규방 안의 분위기는 두 사람의 침묵만큼이나 무겁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옥류향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녕... 항주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냐?"
"그래요."
화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말했다. 옥류향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용초를 진정 사랑하느냐?"
화가영은 흠칫했다. 그녀는 옥류향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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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옥류향은 허탈하게 웃었다.
"놈은... 철저히 내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군."
화가영은 더욱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귓전에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가영, 네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바다. 하지만 너에게 느끼는 것은 증오 뿐이구나."
"죄송해요."
화가영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이로써 모든 것이 명백해진 셈이다. 옥
류향은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탁자 위에 벗어둔 죽립을 눌러쓰며 말했
다.
"죄송할 것 없다. 어차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너와 나 사이에 남아있는 마지막 잔
재를 지우기 위함이었다. 애초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성격을 잘 알
기 때문이지."
그의 뇌리는 명료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명심해라."
몸을 돌리며 그는 말했다.
"가영, 너의 행복을 깨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만... 모용초를 살려둘 순 없다."
"......."
옥류향의 음성에는 꺾을 수 없는 사나이의 결연한 의지가 들어 있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풍류공자가 아니었다. 오직 복수만을 위해 모든 감정을 죽인 채 살아가는 화
신체가 되어 있었다.
옥류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화가영의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다.
하지만 어찌 완벽하게 숨길 수 있겠는가? 바닥을 향해 떨어져 있는 그녀의 눈망울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결정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 하지만 알면서도 그 길을 가려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스러웠다.
옥류향은 천화군방원을 나섰다.
대문 앞에 십상객이 말을 탄 채 도열하고 있었다. 우두머리 인물이 공손히 물었다.
"일을 마치셨습니까?"
옥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무 미련도 없다."
말을 하는 순간 비로소 가슴속이 완전히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타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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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 십상객을 바라보았다.
"십상객."
"예!"
"날 위해 생명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십상객은 일제히 답했다. 옥류향의 눈에 신뢰의 빛이 어렸다. 그는 신형을 날려 마
상 위로 올랐다.
"가자!"
그를 선두로 십상객이 채찍을 휘두르며 뒤따라 달렸다.
옥류향과 십상객은 항주를 끼고 흐르는 전당강변을 달렸다.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진눈깨비는 추적거리며 내렸다.
말을 달리는 십일인의 머리와 어깨는 곧 축축하게 젖어갔다.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
지 않았다.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앞만 바라보며 달리는 십일인의 가슴은 비감(悲感)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옥류향은 말고삐를 움켜쥔 채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내가 지닌 모든 힘을 이용하여 조화성을 철저히 붕괴시키리라!'
죽립 아래로 보이는 그의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진눈깨비조차 그의 눈빛에 부딪
쳐 산화하는 듯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달렸을까?
"음?"
옥류향은 말고삐를 당겼다. 말은 속도를 급격히 늦추었다. 십상객도 거의 동시에 속
도를 줄였다.
옥류향의 시선은 전당강변의 한 지점에 꽂혔다. 그곳에 마의를 입은 노인이 낚싯대
를 드리운 채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진눈깨비 휘날리는 겨울에 낚시라니.......
노인은 머리에 챙이 넓은 죽립을 쓰고 있었는데 을씨년스런 날씨와는 달리 무척이나
평화롭고 한가한 모습이었다.
옥류향은 잠시 그를 주시하다 천천히 말을 몰아 노인의 곁을 지나갔다. 그런데 마의
노인의 담담한 음성이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자네가 신산의 아들인가?"
옥류향은 말고삐를 당겼다.
"노인장은 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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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 돌려 마의노인을 내려다보았다.
"허허......."
마의노인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단 일어
서고 보니 체구가 놀랍도록 컸다. 노인은 슬쩍 수중의 낚싯대를 흔들었다.
쌔액!
귓전을 스치는 파공성이 울렸다. 옥류향과 십상객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지극히 짧은 순간 노인이 휘두른 낚싯대 끝에서 실과 바늘이 호선(弧線)을 그렸고,
아차 하는 순간 옥류향과 십상객의 소매가 모두 일정한 길이로 찢겨나간 것이 아닌
가?
옥류향은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무서운 고수다! 천하에 이런 고수가 존재했다니.......'
그는 불신의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염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는 침중한 음색으로 물었다.
"노인장은 뉘시오?"
똑같은 질문을 두 번씩이나 한 셈이었다.
마의노인은 죽립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백발에 은염을 기른 위풍당당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노부는 자네가 어릴 적에 한 번 본 적이 있지."
그는 옥류향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산을 매우 닮았구나."
"노인장께서는......?"
"노부는 고검령, 남들이 흔히 무영(無影)이라 부르지."
옥류향과 십상객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노인의 말이 천둥처럼 고막을
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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