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조화성(造化城)
설봉산(雪峰山).
대자연의 위대함을 수천 년 침묵의 숨결로 간직한 채 고고하게 대륙을 굽어보는 거
산(巨山)이다. 위로는 동정호(洞庭湖)와 자수(資水)를 끼고, 아래로는 위수(魏水)의
수려한 물줄기를 거느린 호남(湖南)의 양호 지대에 위치한 곳이다.
산세의 험악함은 사천험로(四川險路)를 무색케 하며, 사내의 잘 다듬어진 힘찬 근육
을 연상케 하는 산맥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설봉산은 호남성의 지맥으로 알려지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설봉산이 유명한 것은
결코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무림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한 단체가 와호잠룡(臥虎潛龍)처럼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화성(造化城)!
공포와 전율의 대명사이자 죽음과 피의 상징인 조화성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때는 만력 사십 팔 년의 겨울이다.
야차의 숨결처럼 차디차고, 야수의 울부짖음처럼 거친 북풍이 몰아치는 계절이다.
장차 무림을 경동시킬 전율스런 풍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조화성의 깊고
깊은 곳에서.......
두께가 일 장이요 높이가 오 장여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
산굽이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성벽의 길이는 백여 리에 걸쳐 뻗어있다. 성루(城樓)
만 해도 수십 곳을 헤아렸으며, 설봉산의 주봉이라 할 수 있는 천인봉(天刃峰)과 자
운봉(紫雲峰), 벽계봉(碧溪峰)을 끼고 넓은 분지를 포옹하듯 감싸안고 있었다.
분지에는 성벽을 굽어보듯 높이 치솟아 대지의 정복자처럼 찬란한 빛을 발하는 수백
여 채의 전각들이 즐비하게 축조되어 있어 도대체 일개 성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거
대한 도시를 연상케 한다.
이곳이 바로 조화성이었다.
제사신마전.
조화성의 중심부에서 바라보면 남쪽에 있는 벽계봉 하단에 위치한 곳으로 이곳은 조
화성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오 개의 마전(魔殿) 중 한 곳이다.
전주는 혈왕(血王) 낭리초(狼里超).
그는 이십 년 전 조화성에 가입하면서 염무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한 인물이다. 그
는 변화막측한 심기를 지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인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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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아는 것이 많았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의심 또한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
성격 때문일까? 그의 무공은 사악하고 음사했으며, 전갈의 독침처럼 악랄하고 치명
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사신마전에 속한 고수들의 수효는 대략 천여 명, 그들은 과거 혈우방의 제자들 중
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정예들이었다.
아무튼 풍운의 불씨는 이곳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한다.
"......."
혈왕 낭리초는 반개한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좁은 이마, 칼끝처럼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와 매부리코, 얄팍하게 맞물려진 입술은
차갑고도 배타적인 인상을 준다.
두 해를 더 지나야 육순이 되는 나이건만 나이에 비해 굵고 깊은 주름살이 거미줄처
럼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낭리초가 거울을 보는 이유는 수염 때문이었다.
옅은 갈색을 띤 채 세 갈래로 꼬여진 교룡의 수염은 그의 자랑이었다.
'오늘은 더욱 멋있군.'
낭리초의 일과는 수염을 다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적이 만족한 표정으로 거울을 내
려놓은 낭리초는 전면을 향해 거슴츠레한 시선을 돌렸다.
갈의를 입고 있는 중년인 한 명이 끈기 있게 낭리초의 일과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숨
조차 죽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평범하면서도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으나 약간 좁은 듯한 하관으로 인해 민활함을 엿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감우(甘羽)로 제사신마전 소속의 고수였다.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오래 전부터 낭리초의 한쪽 귀 역할을 하는 인
물이었다.
그는 사람 다루는 수완이 좋고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재치를 지닌 모사가로 정보수집
에 뛰어난 재간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십여 년째 낭리초의 총애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가 총애를 받는 이유 중 빼놓을 수 없는 점은 고산의 기후처럼 변화막측한 낭리초
의 비위를 맞추는 탁월한 아부솜씨 때문이기도 했다.
감우는 낭리초가 눈길을 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전주님, 오늘따라 수염이 더욱 멋들어진 위엄을 풍깁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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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리초는 썩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까지 중후하게 꾸미면서 껄껄 웃었다.
"감우, 너는 언제 보아도 그 솔직한 성품이 마음에 든다."
"감사합니다."
낭리초는 의젓하게 수염을 쓸어 내렸다.
"그래 언제 돌아왔느냐?"
"어제 도착했습니다."
"그 동안 성과는 있었느냐?"
"하명하신 대로 모든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습관일까? 낭리초는 두 눈을 갸름하게 뜨면서 말했다.
"말해봐라."
"예, 우선 구파일방과 정파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심상치 않다면......?"
"놈들의 움직임에 어떤 음모가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화성을 상대하기 위
해 결맹을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양도위 어른께서 말씀하신 그 정파의 맹주인가 하
는 작자가 주동자인 것 같습니다."
낭리초는 혀를 찼다. 그의 표정은 권태스럽고 피곤하게 변했다.
"그게 성과가 있다는 정보냐?"
'뭐가 잘못됐나?'
감우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것이......."
"감우, 그게 네가 지난 한 달 동안 수집한 정보란 말이냐?"
낭리초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쯧!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새로운 정보인 양 떠들어대다니, 실망이구나."
감우는 머쓱해졌다. 그러나 혓바닥으로 연꽃을 그려낼 만큼 상대방의 심리를 잘 파
악하는 그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물론 전주님의 치밀한 추리력과 상상도 못할 통찰력으로 이미 예견하고 계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낭리초의 표정이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변해도 정말 기가 막히게 변했다.
"허허허... 재삼 강조하지만 너는 솔직한 성품과 더불어 사람을 보는 눈이 날카롭고
정곡을 찌르는 맛이 있어."
"모든 것이 전주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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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낭리초의 극심한 변덕을 한 순간에 넘긴 감우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은 더욱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냐?"
낭리초는 다시금 갸름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감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금불(金佛) 숭전주님께서 고수들을 규합하고 계십니다. 태사독 어른의 사망 이후
은밀히 조화성 내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계십니다. 실로 숭전주님은 무섭도록 치밀하
신 분입니다."
낭리초의 표정이 싹 변했다. 피곤함과 권태를 넘어 극도의 짜증으로 번진 얼굴이었
다.
"지금 내 앞에서 금불을 칭찬하는 것이냐?"
감우는 찔끔하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움츠렸다. 낭리초는 신경질적으로 의자의 모
서리를 여러 번 두드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네 소속이 어디냐? 아예 이번 기회에 제이신마전으로 소속을 옮겨! 이 병신
아!"
'크으... 저 병적인 변덕!'
감우는 낭리초의 시선을 피하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 변덕에 비위를 맞추다가 내가 제명에 죽지 못하지. 한 달 전에는 정파의 움직임
과 금불 숭전주의 동태를 살피라 지시해놓고 저러니.......'
아무리 입심 좋은 감우라도 낭리초의 변덕에 대책이 안 설 때가 간혹 있었다. 그래
도 한 번도 겉으로 그런 감정을 표출한 적이 없었다.
"어찌 제가 전주님 면전에서 금불 숭전주님을 칭찬하겠습니까?"
"그럼 뭐야?"
"제가 아는 전주님은 오직 성주님을 제외하고는 하늘의 율법(律法)과 땅의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천하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영웅이 아니
십니까?"
이쯤 되면 아부가 지나쳐서 넘칠 지경인데, 낭리초는 다시 누그러진 기색으로 수염
을 매만졌다.
"알긴 아는구나."
"이 넓은 천하에서 제가 전주님을 모르면 누가 알겠습니까?"
"험험, 그러니까 너는 나의 충실한 수하지."
"황공하옵니다."
이렇게 죽이 잘 맞을 수가 있을까? 감우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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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숭전주님에 대한 말씀을 올린 것은 중요한 사실 때문입니다."
"무엇이냐?"
감우는 숨결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무림에 무서운 고수가 등장했습니다."
"고수?"
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자는 비마(飛魔) 북검엽(北劍葉)이란 인물로 일신의 무공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경지에 달했다고 합니다. 등장한지 몇 달도 안 되는 혜성 같은 존
재로 정사양도의 유수한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그에게 나가떨어졌다고 합니다."
"고수도 고수 나름이지."
"아, 아닙니다. 심지어는 본성의 하남성(河南省) 지단에 있는 기청 단주도 단 십 초
만에 그에게 패배했을 정도입니다."
낭리초의 안색이 변했다.
"황기청이 어떤 인물인데 십 초만에 패해? 지금 농담하는 거냐?"
감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으음, 믿을 수가 없군!"
"비마 북검엽은 천 이백 년 전 마교의 이단자로 알려진 사자천군 목혈청의 무공을
사용했습니다. 스스로도 목혈청의 후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자천군!"
낭리초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아주 짧은 순간
에 일어난 일이었다.
감우는 계속 보고했다.
"금불 숭전주님께서도 그 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후 어떻게든 포섭하려 한다는 소
문이 돌고 있습니다."
'금불이......?'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파묻는 낭리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금불 숭의겸
을 떠올리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 여우같은 놈이!'
낭리초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감우는 신나게 떠들어댔다.
"숭전주님의 생각은 남들보다 천 리를 앞서가는 것 같습니다."
낭리초는 버럭 고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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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네놈이 지금 나와 그 놈을 비교하자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어찌 전주님과 비교하겠습니까? 전주님이야말로......."
낭리초는 차갑게 내뱉었다.
"아부하지 마라!"
'빌어먹을.......'
감우는 내심 욕설을 퍼부었으나 다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전주님, 혹시 호북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독패검(毒覇劍) 북마영(北魔影)이란 분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낭리초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북마영인지 남마영인지 내가 어찌 안단 말이냐? 그런 이름도 없는 자들을 기억할
정도로 한가한 줄 아느냐?"
감우는 더욱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은 전주님과 이십여 년 전에 교분이 있었고, 또한
전주님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 되는 분입니다."
낭리초는 귀찮은 기색이었다.
"쓸모 없는 놈! 내 외증조부는 열 일곱 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고 외조부는 또 열
셋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는데 내가 어떻게 일일이 기억할 수 있단 말이냐?"
감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비마 북검엽은 바로 북마영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낭리초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감우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후 낭리초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중얼거렸다.
"북검엽... 틀림없이 북마영의 아들이란 말이냐?"
"속하가 확인했습니다."
"음. 생각난다. 북마영은 확실히 외가 쪽 사람이다. 하지만 남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먼 외척이지. 그래, 이십여 년 전 술좌석에 몇 번 동석한 적이 있긴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시 전주님께서는 혈우방을 이끌고 있을 때였습니다."
낭리초는 눈썹을 성큼 치켜세웠다.
"정말 황기청이 십 초만에 패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전주님."
낭리초는 코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으음... 황기청을 십 초만에 제압했다면 결코 나보다 하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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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으로 미루어 여러 가지를 따
져보는 듯했다. 마침내 그는 눈빛을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감우, 보름 후가 무슨 날인지 아느냐?"
그의 난데없는 질문에 감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글쎄요? 보름 후... 잘 모르겠습니다."
낭리초는 입술 꼬리를 말아 올리며 히죽 웃었다.
"내 결혼 삼십주기의 기념일이다."
"저... 정말이십니까?"
"구실이다."
"예?"
감우는 도무지 헛갈린다는 표정이었다. 낭리초가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감우, 너는 지금부터 정중하고 예의 있는 문장을 사용해 조화성 제사신마전주의 이
름으로 몇몇 인척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야 한다."
감우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이 탄성을 발했다.
"아!"
"족보를 따진다면 북검엽은 조카뻘이다. 하지만 사자천군 목혈청의 후예라면 필시
오만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예의를 표해야 한다. 물론 절대로 북검엽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선 안된다. 특히 금불은!"
"알겠습니다."
"또 한 가지."
감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명하십시오."
"발 빠른 아이들을 풀어 열흘 안에 북마영과 북검엽의 그 동안 행적을 샅샅이 조사
해 내게 가져오도록!"
"알겠습니다."
감우는 대답하면서도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무서운 어른이야. 그 짧은 순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북검엽을 끌어드릴 방법을 강구
해 내다니.......'
이번만은 결코 아부가 아니었다. 혈왕 낭리초는 변화막측한 성격과 수시로 바뀌는
변덕으로 인해 제사신마전의 전주이면서도 기실 조화성에서 그리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 낭리초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감우였다. 그는 사람들이 모르는 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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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초의 면모를 알고 있었다. 낭리초는 변덕이 팥죽 끓듯 하지만 기실 그의 내면에는
또 다른 면모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고 냉정한 분석력을 지니고 있으며 한 번
물고 늘어지면 끝장을 보는 독종의 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누
구보다도 원대한 야망을 가슴 깊이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눈앞에 있는 보검보다 숨기고 있는 비수가 더 무섭다!
낭리초는 바로 그런 위인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만 나가봐라."
"알겠습니다."
감우는 이마를 바닥에 대고 경의를 표한 후 사라졌다. 낭리초는 태사의에 몸을 깊숙
이 묻은 채 눈을 감았다.
'느닷없이 목혈청의 후예가 등장하다니 어딘가 수상한 점이 많다. 아무튼 철저히 조
사해 봐야겠다. 만일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수중에 넣어야
하겠지.'
낭리초의 두뇌는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한 장의 첩지에는 정중한 초대의 글이 적혀 있었다.
<북검엽 대공 친전.
이 글을 적는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오. 근간에 태양 같은 신위를 떨쳐
무림을 위진 시키고 있는 귀공이 나와 인척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북마영 대형의 영
식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오.
돌이켜 보면 지난 날 북마영 대형과 함께 밤을 잊은 채 술잔을 기울이며 패기(覇氣)
와 무예를 논하던 때가 어제 같건만 그 새 이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소이다. 일전
귀공의 쟁쟁한 위명을 전해 듣고 북마영 대형과의 옛일을 회상하던 중 불현듯 지난
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떠올랐소이다.
마침 돌아오는 십오야가 이 숙부의 서른 번째 결혼 기념일인지라 몇몇 인척을 초청
하였으니, 귀공께서는 필히 참석하여 이 숙부에게 늠름한 신태를 볼 수 있게 해 주
구려.
미주가효를 차려놓고 귀공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겠소이다.
조화성 제사신마전 혈왕 낭리초.>
"명문이군."
장천린은 낭리초가 보내온 초청장을 읽은 후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늙은 곰이 드디어 미끼를 물었군."
곁에 있던 유리공녀는 장천린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큰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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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천사예는 놀라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조화성의 인물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은 사람도 찾아낼 능력이 있지."
그는 초대장을 말아 쥐며 중얼거렸다.
"이제 호굴(虎窟)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군."
하늘은 암회색으로 물든 채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북녘으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
만이 천식 앓는 노파의 가래소리 같은 소음을 간헐적으로 울릴 뿐 음산한 날씨였다.
산해파(山海巴)는 설봉산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이었다.
관도에는 좀처럼 인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
탓이었다.
관도는 완만한 언덕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곳에 홀연히 삼인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장천린과 유리공녀, 천사예 일행이었다. 그들은 지금 혈왕 낭리
초의 초대를 받고 조화성으로 가는 중이었다.
유리공녀와 천사예는 별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충분한 휴식
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쉬이이... 이잉.......
찬바람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주변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천사예는 피풍을 여미며 장천린에게 물었다.
"용대인, 북검엽이란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나요?"
그 점이 내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물론이오."
천사예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낭리초가 북검엽에 대해서 조사할지도 모르잖아요?"
"틀림없이 조사했을 것이오. 하지만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걸."
"그건 어째서 지요?"
"그야 간단하지. 북검엽은 이미 십팔 년 전에 그의 부친인 북마영과 함께 무산에서
도담후란 기인에게 죽었소. 난 그 사실을 계묵에게 들었소. 물론 그 두 사람의 죽음
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소."
천사예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 고개를 끄덕했다. 장천린은 그녀를 바라보며 이상
한 표정을 지었다.
"사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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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제부터는 내게 대한 호칭에 유의해야할 것이오."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이제부터 사예는 나의 첩(妾)이오. 그러니 검엽이라 불러야 하오."
'첩이라고?'
천사예는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치는 바람에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심장이 뛰며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한편 유리공녀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첩이 뭐예요?"
천진하기만 한 그녀를 바라보며 장천린은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궁금해요. 가르쳐... 줘요."
유리공녀는 서투른 한어로 더듬거렸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순진한 그녀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그를 바라보는 유리공녀였다
. 할 수 없이 그는 대충 알아들을 정도로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유리공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알거렸다.
"으응, 그럼... 부인과 비슷한 거네요?"
"말하자면 그런 셈이요."
더 이상 설명하기도 곤란해 장천린은 긍정해 주었다. 유리공녀는 그에게 바짝 다가
서며 말했다.
"유리도... 첩이 되는 거예요?"
"아마 그래야 할 것이오."
유리공녀는 눈부시게 흰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좋아요. 유리는 이제부터 당신의 첩이에요."
첩의 진정한 의미도 잘 모르면서 유리공녀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만 곁에서
듣고만 있던 천사예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을 따름이었다.
삼인이 언덕길을 내려와 관목림을 무성한 곳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휙휙휙!
돌연 관목림으로부터 다섯 줄기의 인영이 솟구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앞에
떨어졌다.
그들은 칙칙한 복면을 뒤집어쓰고 가죽으로 된 피풍을 두른 흑의인들로 두 개의 눈
구멍으로부터 칼날처럼 예리한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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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불시에 나타난 복면인들을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인 중 중앙에
있는 복면인이 칼칼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묻겠다! 네가 비마 북검엽이란 작자냐?"
장천린은 홀연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제 보니 늙은 곰이 재주를 부리는군. 그대로는 믿을 수 없다 이 말이지.'
장천린은 무심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이름을 알면서도 뻣뻣이 서있다니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로군."
장천린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실로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이었
다. 복면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괴소를 흘렸다.
"크큿! 듣던 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작자로구나. 하지만 큰소리처럼 네 실력이
따라줄지가 의문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후회했다. 너희들도 그 전철을 밟을
테냐?"
"물론! 눈으로 보기 전엔 믿지 못하겠다!"
복면인의 말이 떨어진 순간 번쩍! 하고 한 가닥 도광이 날아왔다. 우측의 복면인이
전광석화처럼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예고도 없는 급공이었으므로 도광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장천린의 목에 칼날이 닿고
있었다. 복면인의 눈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확신했다. 상대가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게도 칼날 끝에서 장천린의 머리가 밀려났다.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도
는 빗나가버렸다. 그와 동시에 장천린의 손이 아래서 위로 움직였다.
윙!
느릿한 듯하던 수도였으나 어느 새 바람을 끊었다.
"으악!"
복면인은 참혹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며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장천린은 땅바닥에 나뒹구는 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머지 사인을 둘러보며 경멸
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루살이 같은 놈들."
복면인들은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나 장천린의 손이 다
시 한 차례 원을 그렸다.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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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실처럼 뻗어나가며 복면인들을 휘감았다. 피하고
말고가 없었다. 복면인들은 무형의 철사줄에 전신이 칭칭 감긴 듯한 느낌에 그만 뻣
뻣이 굳어지고 말았다.
장천린은 손바닥을 가볍게 뒤집었다.
"으악!"
복면인들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삼 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들은 벌레처럼
꿈틀대며 일어서려 기를 썼지만 어찌 된 셈인지 운신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장천린은 그들을 내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누가 너희들을 보냈느냐?"
"으으......."
오인의 복면인들은 신음을 발할 뿐 감히 대답조차 못했다.
"좋다, 어차피 대답하든 안 하든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장천린은 여전히 낮게 말했으나 그의 음성에는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잔인한 살
기가 배어 있었다. 복면인들은 마치 학질이라도 걸린 듯 전신을 떨었다. 그때였다.
"하하핫......! 북검엽 대협께서는 화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중년인이 숲으로부터 걸어나왔다. 장천린은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중년인은 바로 감우였다. 그는 장천린의 시선을 받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윽! 마치 얼음칼로 등골을 쑤시는 느낌이다. 소문보다 훨씬 냉혹하고 오만하구나.'
감우는 산전수전 다 겪은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는 얼른 두 손 모아 정중히 포권했
다.
"소인은 감우라고 합니다. 낭전주님의 명을 받아 대협을 영접하러 나왔소이다."
장천린은 불쾌한 듯 복면인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하루살이들은 낭전주가 날 시험하기 위해서 보냈소?"
감우는 얼른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대협의 위명이 너무나 쟁쟁해서... 경외지심에 그만 무례를 범했습니
다. 그저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천린은 약간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낭전주의 행동은 기분이 몹시 나쁘지만... 감형을 보고 참겠소."
감우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지금까지 상대에 대해 아부하고 칭찬만 해왔지 자신에
대해 호감을 보인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자의 무공으로 보아 장차 낭전주의 신임을 크게 받을 것이다. 게다가 조화성에
가입하기만 하면 출세는 맡아 논 당상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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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우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이 자에게 잘 보여서 해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신속하게 판단을 내린 감우는 천사예와 유리공녀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감모의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우신 두 분은 대협과 어떤 관계 신지요?"
장천린은 짤막하게 말했다.
"내 애첩들이오."
감우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자고로 미인은 영웅을 따르고 영웅은 명예를 쫓는다 하더니만, 오늘
대협을 뵈니 실감나는 말입니다. 두 분 미녀의 아름다움은 북대협의 늠름한 기상과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감우는 입에 침을 튀겨가며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천사예는 시종 싸늘한 표정으로 감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유리공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와요."
감우는 유리공녀의 미소를 보고 그만 아찔함을 느꼈다.
'지난 날 취옥교 소저를 보고 세상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다고 생각했었는
데... 이 여인이야말로 저 이국적인 미색은 취소저를 능가할 정도로구나.'
세상에 아름다운 여인을 싫어할 남자가 있을까?
감우는 한 눈에 유리공녀에게 반해버렸다. 물론 언감생심 넘볼 처지는 못되었으나
마음속으로 탐심을 품는 것이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자유였다. 그는 내심 침을
연신 삼키며 겉으로는 더욱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자아, 그럼 소인을 따라 오시지요."
"고맙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감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조화성으로 첫 발
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뭐라고! 기련오살이 단 일 초에 나가 떨어져?"
감우의 보고를 들은 낭리초는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감우는 혀를 내두
르며 말했다.
"한 마디로 신비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경지였습니다."
"음."
낭리초는 태사의에 앉을 생각도 잊어버린 채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기련오살을 단 일 초에... 그렇다면 황기청을 십 초만에 패배시킨 것은 너무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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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 일이다.'
새삼 북검엽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그는 어디 있느냐?"
"별전에 있습니다."
"내가 직접 가보겠다."
낭리초는 서둘러 채비를 갖추었다. 그는 앞장 서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흠, 그렇다면 이번에 그를 초청한 것은 시의적절한 조치가 되겠군."
"그렇습니다. 전주님의 현명하신 판단이셨습니다."
낭리초는 감우의 찬사(?)를 들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금불 숭의겸은 처소에서 바둑판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어젯밤 바둑실력이 뛰어
난 애첩과 둔 판을 복기 하는 중이었다.
숭의겸은 그런 인물이다. 비단 바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매사에 있어 꼼꼼하고
정확하게 진단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금불 숭의겸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었다.
"음, 확실히 좌하변에 걸친 수가 묘수였어. 묘수!"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고, 유쾌함 속에 독(毒)을 감추고 있는 인물 숭의겸, 그의
부드러운 미소와 유연한 처신 속에는 전율이 일 정도로 무서운 집념이 도사리고 있
었다.
그가 한참 복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조용히 문이 열리며 수하가 들어왔다. 그는 낮
은 음성으로 뭔가를 보고했다.
이제까지 유쾌하기만 했던 숭의겸의 표정이 굳어졌다.
"확인했느냐?"
"예! 분명히 확인을 했습니다. 낭리초가 초대한 인척들 가운데 비마 북검엽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애첩 둘과 함께 반 시진 전에 도착했습니다."
숭의겸은 눈을 반개했다.
'음! 낭리초가... 신경도 쓰지 않은 놈이었는데 선수를 치다니!'
숭의겸은 이내 유쾌한 표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결코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다시 바둑판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행동은 어젯밤 둔 묘수에 대해 재삼 검토
에 들어간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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