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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간심난측(奸心難測) (69/87)

제17장 간심난측(奸心難測) 

밤이 깊자 임충후를 위시한 제삼신마전의 고수들은 거나하게 취했다. 장천린도 흐트 

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임충후는 무쌍화 조옥령에게 눈짓했다. 

조옥령은 그의 뜻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장천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요. 소첩이 모시겠나이다." 

장천린은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냐, 오냐! 오늘밤은 너와 함께 하는 거다. 자, 이만 일어나자." 

조옥령은 그를 부축하여 이끌었다. 

"헤헤... 북대협, 좋은 밤 되십시오. 소인들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임충후의 배웅을 받으며 장천린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조옥령이 안내한 곳은 방향이 물씬 풍기는 침전(寢殿)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색 양 

탄자가 푹신하게 깔려있고 천장에는 궁등(宮燈), 벽에는 그럴 듯한 산수화와 각종 

벽장식이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는 아늑한 곳이었다. 

장천린은 침상에 걸터앉으며 조옥령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함부로 주물렀다. 

조옥령은 몸을 비틀며 애교 있게 말했다. 

"소첩, 북대협 같은 분을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이에요." 

장천린은 기소를 흘렸다. 

"후후, 나도 너 같은 미녀를 알게되어 행운이다." 

"어머! 정말인가요?" 

"후후! 그렇잖고." 

장천린은 입술로 조옥령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동시에 양손으로는 부지런히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그야말로 난봉꾼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으응......." 

조옥령은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부어지자 가벼운 신음을 발했다. 장천린의 손은 

그녀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장천린은 조화성에 들어오는 순간 비마 북검엽이란 인 

물의 행세를 해야했다. 그는 신분을 위장했을 뿐더러 환존(幻尊) 산곡노인으로부터 

익힌 역용술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곡노인은 변장술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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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조화성으로 들어서면서 산곡이 한 말을 머릿속에 철저히 담아두고 있었다. 

......완벽하게 변장하려면 몸은 물론 마음이나 생각마저도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 

변장한 대상의 행동 습관이나 평소의 버릇, 그의 성격까지도 닮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장천린은 산곡의 말을 그대로 시행했다. 그는 현재 장천린이 아닌 비마 북검엽이었 

다. 북검엽은 소문난 무림의 탕아(蕩兒)였다. 

장천린은 조옥령의 고개를 돌려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을 점령했다. 술냄새를 풍기 

며 그녀의 입술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손도 가만 두지 않았다. 어느 

새 옷섶을 헤치고 들어간 손은 그녀의 풍만한 유방을 거머쥐었으며 다른 손으로는 

성급하게 치마를 벗기고 있었다. 

조옥령은 그의 손길을 피하려 해보았으나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는 

반라(半裸)가 되고 말았다. 

장천린은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는 둔부를 어루만지며 그녀 

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옥령, 오늘 밤 널 취해야겠다." 

조옥령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음성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소첩이 비록 기녀이긴 하오나 함부로 몸을 굴리지는 않사옵니다. 나리께서 그냥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원치 않사옵니다."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흠? 그렇다면 어떤 것을 원하느냐?" 

그의 손은 조옥령의 허벅지로 이동했으나 워낙 다리를 굳게 오므리고 있어 더 이상 

파고들 수가 없었다. 조옥령은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약속해 주세요." 

"무엇을 말이냐?" 

"나리의 곁에 두어 주신다고요."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러나 곧 결정을 내렸다. 

'나는 장천린이 아닌 북검엽이다. 북검엽이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다. 약속하마." 

"정말이신가요?" 

"후후! 이 북검엽을 못 믿는단 말이냐?" 

"믿어요. 믿고 말고요." 

조옥령은 그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장천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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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했다. 

조옥령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리,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우선 목욕부터 하시고요. 밤은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 

장천린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아, 네 말이 맞다." 

욕실로 들어서자 뜨거운 김이 확 밀려왔다. 조옥령은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둔 듯했 

다. 

쏴아....... 

뜨거운 물을 끼얹는 조옥령의 손길은 나긋나긋했다. 그녀의 행동은 실로 입안의 혀 

와도 같았다. 부드러운 손으로 장천린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을 씻겨 주는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장천린은 욕조에 앉아 그녀의 시중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손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그 

의 손은 조옥령의 유방이며 둔부를 쉴새없이 오르내렸다. 무림의 탕아 북검엽 다운 

행동이었다. 

조옥령은 이번에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따금 장천린의 손길이 그녀의 민 

감한 부분을 건드릴 때는 야릇한 콧소리를 내기도 했다. 욕실의 훈기로 인해 이마와 

콧잔등에 작은 땀방울이 맺힌 채 복숭아빛 화색을 띈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육감적 

이었다. 

그녀의 손길은 실로 교묘했다. 

사내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자극을 주는지도 훤히 알고 있 

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 여자의 손길이 닿으면 돌부처라도 가만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하! 더 이상 못 참겠다!" 

장천린은 철저히 북검엽이 되기로 했다. 그는 악의 온상인 조화성에 들어오기로 결 

심했을 때부터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한 바 있었다. 필요하다면 양심 

이라도 내놓을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의 것도 버릴 결심을 단단히 굳히고 있었다. 

그는 조옥령을 번쩍 안고 일어섰다. 

"어머!" 

조옥령은 깜짝 놀란 듯 교성을 발하며 그의 목을 두 손으로 껴안았다. 장천린은 단 

번에 그녀의 옷을 벗겨버렸다. 물에 젖은 데다 이미 절반 이상 벗겨진 터라 그녀는 

금세 알몸이 되었다. 

장천린은 그녀를 안고 침상으로 향했다. 여체는 침상 위에 눕혀졌다. 조옥령은 눈을 

감은 채 그가 하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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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나신을 감상하다 옷을 벗어 던졌다. 마침내 정사 

가 시작되었다. 여인의 가슴은 사내의 손길이 닿자 더욱 팽팽하게 부풀어올랐으며 

연분홍빛 돌기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음!" 

조옥령은 여염집 여인이 아니었다. 장천린의 애무가 시작되자 거침없이 신음을 토해 

냈으며 적극적으로 응해왔다. 아니 도리어 능동적으로 사내에게 파고들었다. 

장천린은 본래 여자경험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뜨겁고 적극적인 여 

인은 처음이었다. 침실 안은 급기야 열풍에 휩싸이고 말았다. 

불같은 여인이었다. 조옥령의 지체는 뱀처럼 유연하게 장천린의 몸을 휘감았으며 무 

쇠라도 녹일 듯한 열기를 토해냈다. 

정사는 뜨거웠다. 짧지 않은 밤이 열풍에 타올랐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차례나 계속된 폭풍 같은 정사로 인해 장천린은 녹초가 되버리고 말았다. 조옥령 

의 폭발적인 정염에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열기가 차츰 가라앉고 두 사람은 땀으로 흠씬 젖은 채 떨어졌다. 장천린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럴 수가! 처녀였다니......!' 

그의 눈은 침상보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 한 송이의 혈화가 선명하게 피어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뜻밖이었다. 그는 무쌍화 조옥령이 순결을 간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까 하신 약속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조옥령은 정사 후의 나른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겨들며 속삭였다. 장천린은 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내 어찌 널 버릴 수 있겠느냐?" 

이때였다. 

장천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혈장미(血薔薇)! 

그것은 분명 혈장미 문신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조옥령의 겨드랑이 안쪽에 혈장 

미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장미림(薔薇林)......!' 

장천린은 전신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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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이 여인은 장미림의 첩자였구나!' 

그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장미림은 신산이 만든 첩보조직이다. 분명 신산은 죽었다. 그런데도 장미림이 활동 

을 계속하고 있단 말인가? 더우나 이곳 조화성에서?' 

그의 가슴속에는 의문이 가득 일어났다. 

'죽은 제갈공명이 사마중달을 희롱한다더니.......' 

장천린은 문득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니다, 어쩌면 신산이 죽은 후 무영(無影)이 대신 나섰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향후의 일은 더욱 복잡해 질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장천린은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흠, 어쨌든 이 여인은 이중신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더욱 잘된 일이다 

. 만일 무영 고검령이 등장했고 그의 지시를 받는 것이라면 내게는 불리하지 않다. 

도리어 이 여인을 통해 그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천린은 일단 마음을 느긋이 갖기로 작정했다. 그는 조옥령의 풍만한 가슴을 어루 

만지며 호색한처럼 키들거렸다. 

"흐흐! 옥령, 너는 정말 기막힌 계집이다. 숱한 계집을 안아봤지만 너처럼 뜨거운 

계집은 처음이다." 

새벽. 

장천린은 조옥령과 헤어졌다. 

밤중 내내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인지 그의 안색은 다소 창백해 보였다. 물론 그 

것도 일부러 꾸민 것이었다. 무림의 탕아 북검엽답게 보이기 위한 조치였다. 

장천린은 제사신마전을 향해 걸어갔다. 

조화성은 건물 사이사이에 화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몇 개의 건물을 돌아 넓은 화원 

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 명의 뚱뚱한 체격의 금포노인(錦袍老人)을 

만났다. 

노인의 용모는 특이했다. 둥근 얼굴에는 함빡 웃음이 피어올라 있어 마치 환희불(歡

喜佛)을 보는 듯했다. 

장천린은 노인을 보는 순간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굴까?' 

그는 궁금히 여기며 금포노인을 지나쳤다. 그가 막 노인을 등졌을 때 등뒤에서 너털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자네가 바로 비마 북검엽인가?" 

장천린은 돌아서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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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장은 누구요?" 

그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건방져 보였다. 금포노인은 매화 한 송이를 꺾어들고 냄새 

를 맡으며 대소했다. 

"헛헛! 이 늙은이는 숭의겸이라 하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금불 숭의겸!' 

금불이라면 바로 제이신마전주의 전주로 제삼신마전주 태사독이 사망한 직후 조화성 

의 최고 실력자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아! 숭전주이시군요." 

그는 주먹을 모아 예를 표해 보였다. 마치 마지못해 건성으로 예를 취하는 듯했다. 

숭의겸은 개의치 않고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의 이런 면에 종종 착각을 했다. 너그러운 표정, 

여유 있는 웃음, 악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가느다란 실눈... 그러나 그렇게 단 

정한다면 필경 후회할 수밖에 없다. 

금불 숭의겸은 웃으며 살인을 하며(笑中殺), 웃음 속에 칼을 감춘(笑裏藏刀) 무서운 

인물인 것이다. 

"허헛... 내 자네에게 사과하려고 여기서 기다렸다네." 

장천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사과라니?" 

"허허! 수하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자네에게 실수한 것에 대해 내 친히 사과하겠네. 

오사령이란 놈이 귀인을 몰라보고 건방지게 날뛰었다더군?" 

장천린은 가슴이 섬뜩했다. 

'이 자는 조화성 내에서 지고무상한 지위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 것 없는 

일개 떠돌이에 불과한 내게 자신의 자세를 낮추다니... 정말 보통 무서운 심계의 소 

유자가 아니다.' 

장천린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일은 이미 까맣게 잊었소이다." 

그는 몸을 돌려 가던 길로 향했다. 

"그럼 난 이만 가겠소이다." 

"아, 잠깐." 

장천린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허허! 뭐가 그리 급하나? 노부와 천천히 얘기 좀 하면 안 되는가?" 

숭의겸의 얼굴에는 예의 환희불과 같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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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는 자네에 대한 소문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네. 그래서 언젠가 한 번 만나고 싶 

었다네." 

장천린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랬었소?" 

"솔직히 노부는 강호의 뜬소문을 믿지 않는 편이라네. 그런데 직접 보니 소문이 와 

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네. 허허, 낭리초가 부럽네. 자네와 같은 훌륭한 수하를 

거두었으니 말일세." 

장천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오해 마시오. 난 낭리전주의 수하가 아니오. 그와 나는 아무 관계도 없소이다." 

장천린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홱 돌려 걸어갔다. 숭의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음성은 장천린의 귀에도 들렸다. 

"수하가 아니라고? 그럼 노부가 잘못 생각했었나 보군." 

장천린이 사라진 후 숭의겸의 눈빛이 번쩍 신광을 발산했다. 그는 수중의 매화를 코 

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놈이 반발하는 걸 보니 낭리초와 그렇게 가까운 관계는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여 

지가 있는 셈이군. 하지만 조심해야겠군. 저놈의 심중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으 

니.'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며 생각을 이었다. 

'어찌 보면 턱없이 건방지기만 한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깊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기(心機)가 뛰어난 놈인 듯도 하단 말이야.' 

그는 누군가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옥령은 분명 북검엽과 관계를 치렀느냐?" 

화원 어디에선가 한 가닥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틀림없습니다. 속하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숭의겸은 수중의 매화를 뚝! 꺾었다. 

"옥령에게 당부해라.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북검엽을 절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전해라." 

"전달하겠습니다. 조옥령은 분명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음, 믿어 보마." 

숭의겸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화원 저쪽으로 사라져갔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부러 

진 매화가지가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 

장천린은 인공연못을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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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규모가 큰 연못으로 한쪽 가장자리에 정자가 한 채 세워져 있었다. 정자 쪽을 바 

라보며 걷던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홍의를 입은 여인이 정자 안에 서 있었던 것이 

다. 

장천린은 홍의녀의 자태가 눈에 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굴까?' 

그는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홍의녀가 몸을 약간 돌렸으므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장천린은 놀란 나머지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해당(海堂)!' 

그렇다. 

놀랍게도 홍의녀는 해당과 똑같은 용모를 하고 있었다. 

'설마.......'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해당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해당과 닮은 여인 

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정자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홍의녀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힐끗 그를 바라본 후 갑자기 신 

형을 날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는 미처 제지하지 못했다. 홍의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뒤늦게 신형을 날려 정자에 당도한 장천린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 방금 전 홍의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해당과 너무나 똑같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다만 그때의 해당은 어린 소녀였으나 홍의녀는 성숙한 여인이라는 점이 틀릴 뿐이 

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으므로 해당을 지금 본다면 홍의녀 만큼 성숙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장천린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그녀가 해당이었을까? 아니다. 해당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장천린은 문득 해당의 가슴에 혈관음 문신이 새겨져 있던 것을 떠올렸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이 내려앉았다. 

'혈관음 문신은 보통 문신이 아니다. 해당의 몸에 어려서부터 문신이 새겨져 있었던 

것은 분명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혈관음은 마교십삼사의 일원... 만 

일 그녀가 해당과 관련이 있다면 아까 그 여인이 해당일 가능성이 있다.' 

장천린은 생각에 잠겼다. 

바람이 불어와 연못의 수면에 파문이 일고 있었다. 

낭리초는 장천린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물었다. 

"자네 어젯밤 어디 갔었나?" 

낭리초의 얼굴에 의심의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것을 보며 장천린은 묘한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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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렸다. 

"후후,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술과 계집 속에 푹 빠졌지요." 

그는 연신 히죽거리며 어젯밤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물론 무쌍화 조옥령이 

장미림의 첩자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금불 숭의겸을 만난 

일도 말해 주었다. 

낭리초의 안색이 굳어졌다. 

"숭전주를 만났다고? 그가 뭐라고 하던가?" 

장천린은 숨김없이 그와 나눈 대화를 전해주었다. 낭리초의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다 

.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안광을 번쩍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 

장천린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뭘 말입니까?" 

"금불 말일세."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온화한 성품인 것 같더군요." 

낭리초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사람은 겉으로만 보면 모르는 법일세. 사실 그 자는 음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작자로 뱃속에 구렁이가 천 마리도 넘게 들어있는 놈이네." 

장천린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그런 건 같지는 않던데......." 

"자넨 강호경험이 얕아 잘 모르겠지만 놈은 본래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는 아주 음 

흉한 놈이란 말일세." 

낭리초는 한동안 숭의겸을 헐뜯는 말을 계속했다. 그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같이 중 

상모략이었는데 입에 침이 튀도록 거듭해서 설명했다. 

장천린은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아야했다. 

'이 자는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기는 해도 의외로 단순한 면이 있군. 아마도 내가 금 

불과 친해질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군.' 

낭리초는 문득 은근한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제삼신마전 쪽에서 자네에게 호감을 갖는 것 같더군."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흠! 그들과는 가까이 지내도 좋네. 그들은 태전주가 죽은 후 사기가 무척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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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자네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은 과히 나쁘지 않은 현상이네." 

장천린은 내심 욕을 퍼부었다. 

'시커먼 속셈을 드러내는군. 이 자는 날 이용해서 제삼신마전마저 삼키겠다는 수작 

이로군.' 

장천린은 조화성에 대해서 인식이 새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조화성은 겉으로는 통일 

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는 단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상호간에 분열되어 있었으며 불신감이 만연되어 있었다. 따라서 표 

면적으로 일사불란한 조직체로 보였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의외로 일이 쉬워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승기를 잡을 때까 

지 매사에 빈틈없이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주, 이곳에는 생각보다 미인이 무척 많더군요." 

느닷없는 말에 낭리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미인? 그게 무슨 말인가?" 

장천린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어젯밤 천화원에서 만난 조옥령만 해도 꽤 미인이었는데 오늘 아침 연못가 정자 속 

에서 홍의미녀가 서 있는 걸 봤지요. 그녀도 대단한 미인이더군요." 

낭리초는 안색이 변하며 물었다. 

"홍의를 입었단 말인가?"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머리에 혈봉잠을 꽂지 않았던가?" 

장천린은 잠시 생각한 후 더욱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더군요." 

낭리초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녀만은 건드리지 말게. 차라리 노부의 딸을 건드릴지언정... 그녀를 섣불리 건드 

리다간 큰 화를 초래하게 되네." 

장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녀가 누구이기에 안된다는 겁니까?" 

"그녀는 혈의나찰(血衣羅刹)이란 별호를 가지고 있네. 이름은 해당이라고 하네." 

장천린의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행여나 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 

이었다. 

'역시 해당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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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리초는 행여 그가 말썽을 피울 것이 근심스러운 듯 설명을 계속했다. 

"그 아이는 십삼사(十三邪)의 한 명인 혈관음 영호해상의 딸이네. 무공이 고강함은 

물론 성격 또한 독랄무비하여 모두들 사갈을 본 듯 피하지.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 아이의 뒤에 혈관음이 버티고 있다는 점일세." 

장천린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어디 그뿐인가? 혈관음의 뒤에는 성주께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서운 존재가 도사 

리고 있다네." 

장천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이곳에 조화성주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자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네. 그 분은 마교 원로원(元老院)의 태상원로이신 백마(白魔) 갈훼(葛卉)란 분 

이라네." 

장천린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분은 연세가 백 육십이 넘었으며, 마교 출신이면서도 백 년 전 전설적인 이름을 

날렸던 신주사성(神州四聖) 중 한 분이라네." 

장천린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한데 그와 혈관음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낭리초는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혈관음은 바로 백마 갈어른의 부인이라네." 

"아!" 

장천린은 탄성을 발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백마 갈훼가 혈관음의 남편이었다 

니, 그렇다면 해당은 갈훼의 딸이 되는 것이다. 

장천린은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갈훼의 나이가 백 육십이 넘었다면 어떻게 

해당과 같이 어린 딸을 둘 수 있단 말인가? 해당의 나이로 볼 때는 딸이 아니라 증 

손녀 이상이 되어야했다. 

"아무튼 그녀만은 건드리지 말게. 알았나?" 

낭리초는 불안한 듯 당부했다. 

"그야... 그녀가 그렇게 까다롭다면 함부로 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미련이 남는 듯 입맛을 다셨다. 

"명심하게. 절대로 그녀를 건드리면 안되네. 이건 자네를 위해서나 노부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네. 명심해야 하네." 

낭리초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몇 번이나 다짐했다. 

"아, 알았소이다. 젠장." 

장천린은 투덜대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낭리초는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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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라면 구름처럼 많네. 정 뭐하면 노부가 매일 밤 자네 마음에 드는 미녀들을 보 

내줄 수도 있네. 하하, 자 이제 그 얘긴 그만 하세." 

그는 장천린의 어깨를 친숙한 듯이 두드리며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 자네는 내 말을 잘 들어야하네. 내 자네를 전력으로 밀어 주겠네. 대신 내 

곁을 떠나지 말아야하네. 알겠나? 그렇게만 한다면 자네가 출세하는 건 시간문제일 

세." 

장천린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늙은 여우같으니! 결국 날 꼭두각시로 만들겠다는 거겠지. 하지만 뜻대로는 

안될걸?' 

그는 더 있다가는 낭리초의 헛소리를 계속 들어야 할 것 같아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이만 쉬어야겠소이다." 

"아, 그렇지. 허허헛! 어젯밤 꽤 피곤했나 보군?" 

낭리초의 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장천린은 내심 역겨움을 느끼며 그와 헤어져 자 

신의 처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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