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세 여인
처소로 돌아왔을 때 장천린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를 맞이하는 두 여인, 즉 유리공녀와 천사예의 눈빛이 이상했다. 그녀들은 마치
이상한 짐승이라도 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사예?"
장천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는데도 천사예는 시무룩하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
다.
"사예!"
음성을 높이자 천사예는 마지못한 듯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장천린은 내심 뜨끔했다. 어떻게 어젯밤의 일을 얘기해 줄 수 있겠는가?
"일이라니?"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천사예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나직이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리공녀만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된 일이오? 무슨 일이 있었소?"
질문을 유리공녀에게로 돌리자 그녀는 역시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아주 예쁜 여인이 찾아왔어요."
장천린은 안색이 변했다.
'맙소사!'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유리공녀의 말을 듣자마자 한 요염한 미녀의 모습이 떠오
른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조옥령이구나! 감히...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유리공녀는 그의 심중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한숨을 쉬어요?"
"아, 아무 것도 아니오."
장천린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유리공녀는 그의 눈치를 보며 더듬
거렸다.
"천소저... 화난 것 같아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나... 이해해요. 천소저가... 당신을... 아니... 검엽을... 사랑해요. 이 유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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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고개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맑은 음성에 어울리지 않게 서투른 한어
를 구사하는 그녀가 몹시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유리공녀의 손
목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유리도 화가 났소?"
유리공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니... 유리는 괜찮아요. 하지만 마음은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장천린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이해해 주시오. 내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소."
유리공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유리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고맙소. 유리."
제일신마전의 내전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흑의노인의 모습은 괴이했다. 용모는 청수한 편이었으나 깡마른
체격에 움푹 패인 눈빛이 자광(紫光)을 띄고 있어 음산한 느낌을 준다. 그는 눈앞
에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무심해 보였다.
흑의노인의 앞에는 독전우사(毒電羽士) 양도위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무릎꿇고 있
었다.
흑의노인은 제일신마전의 전주인 독제(毒帝) 당선종(唐先宗)이었다. 그는 자광이 감
도는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요즘 성내는 한 인물로 인해 말들이 많더군."
양도위는 움찔한 반응을 보였다.
"비마 북검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가 아니고 또 누가 있느냐?"
양도위는 불안한 듯 눈알을 굴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낭리전주도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정
신이 없다고 합니다."
당선종은 눈빛을 번쩍 빛내며 물었다.
"그만큼 실력이 있느냐?"
양도위는 고개를 숙였다.
"소문대로라면... 최소한 낭리전주의 하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흠, 믿을 수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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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종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당선종의 눈치를 살피며 양도위는
신중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양도위는 오악장에서 기가 꺾인 후로 매사에 조심스러워진 나머지 섣불리 나서는 법
이 없어졌다. 그는 한동안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심지어는 성주께서도 그 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계신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당선종은 나직이 신음을 발한 후 물었다.
"요즘 숭의겸의 태도는 어떤가?"
"여전히 오만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당선종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숭의겸의 무공은 태사독보다 한 수 위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릇만은 비교할
수 없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과거의 태사독 같은 인물이 성주의 주위에 없는 게 문제야."
양도위는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어쨌든 제이신마전이 너무 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당선종은 침묵했다. 한참 후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무에 가지가 지나치게 많다면 쳐주어야겠지."
의미심장한 말에 양도위의 안색이 변했다.
"도위."
"네."
"내일쯤 북검엽을 한 번 만나보아라."
양도위는 움찔했으나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장천린의 처소.
소리 없이 창문이 열리며 체구가 섬세한 여인이 뛰어 들었다. 그녀는 바로 무쌍화
조옥령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후 기민한 동작으로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 무엇인가 감추는 것이 있을 텐데.......'
그녀의 눈빛은 영활하게 빛나고 있었다. 장미림 출신답게 그녀는 첩자술이 몸에 배
어있었다. 따라서 방 안을 뒤지는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뿐더러 아
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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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한 번 뒤진 물건들을 정확히 제 위치에 복원해 두는 솜씨는 경탄할 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방문이 열렸다.
"......!"
조옥령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갑자기 누군가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방 안에
들어선 사람은 천사예였다. 그녀의 안색은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무슨 일로 이 방에 침입한 거죠?"
천사예는 만면에 적의를 품은 채 차갑게 물었다. 조옥령은 당황했지만 입가에 달콤
한 미소를 띄웠다.
"제가 이 방에 있으면 안되나요?"
적반하장이다.
천사예의 안색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장천린과 조옥령의 관계에 대해
소문을 들은 터가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흥!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다니......."
조옥령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
"저는 이 방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여자예요."
"자격? 흥! 대체 무슨 자격이......."
천사예의 언성이 높아지는데 이번에는 유리공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방에
두 여인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조옥령을 향해 말했다.
"검엽이... 당신더러 전하랬어요. 지금 오라고......."
천사예의 눈썹은 위로 치켜 올라갔고 반면 조옥령은 그것보라는 듯이 득의한 표정으
로 반문했다.
"어디로 오라시던가요?"
"제사... 신마전의 연회청에 계신 댔어요."
"호호호! 알겠어요."
조옥령은 교소를 터뜨리며 천사예의 곁을 휭하니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천사예는
그녀의 등뒤에 대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여우같은 계집!"
유리공녀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저 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천사예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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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 분이 저 여자를 불렀나요?"
유리공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부른 건 맞지만 제사신마전이 아니라 천화원으로 오라고 했어요."
천사예는 멍해졌다. 설마 유리공녀가 거짓말을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유
리공녀는 그녀를 바라보며 달콤한 미소로 말했다.
"천소저가 대신 가 봐요."
천사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일반적인 여자들에 비해 감정이 무딘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유리공녀가 장천린을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질투심을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산곡노인의 제자가 된 이후로는 성품이 무척 변했다. 산곡노인은 그녀가 내
미지상(內美之相)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천사예는 지금까지 자신이 여자인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여성미가
안으로 숨어버린 것이었다.
산곡은 그녀를 제자로 거둔 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천사예는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게 됐으며 점차 본연의 여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녀
는 점차 마음이 여려지고 급해졌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용모도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아름다워졌다.
'아아! 내가 이렇게 마음이 좁아졌다니.......'
천사예는 유리공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하는 한편 자신을 반성했다. 실상 유리공녀
도 자신 이상으로 장천린을 사랑하지 않은가? 또한 자신보다도 훨씬 불행한 처지이
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그래도 믿음직스러운 오빠가 있을 뿐더러 중원출신이다. 반면 유리공녀
에게는 천애에 의지할 사람 없었고 타향살이를 하는 신세였다. 그런데도 자신을 위
해 마음을 쓰고 있으니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 용대인에 대한 내 감정은 일방적인 것일지도 몰라. 더구나 용대인은 평범한
분이 아니야. 내가 투기를 하면 그 분은 날 싫어할지도 몰라.'
천사예는 천진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유리공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유리공녀 같은 여인이야말로 그 분에게 사랑 받을 수 있을지도.'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소저."
"네?"
유리공녀는 돌아섰다. 그녀의 벽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왜... 가지 않아요?"
천사예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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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 용대인께 가요. 그럼 용대인도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내가... 왜......?"
"호호! 그러잖아도 중원풍습에 서툴기 때문에 용대인도 무척 걱정을 하셨거든요. 이
번 기회에 연회에 참석해 중원풍습을 배우는 것도 좋을 거예요."
유리는 멍한 표정이었다.
"내가 가면... 안 섭섭해요?"
천사예는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유리소저, 우리는 같은 처지예요. 지금까지 친자매같이 지내왔잖아요? 걱정하지 말
아요. 내겐 얼마든지 기회가 있어요."
유리공녀의 푸른 눈에 물기가 서렸다. 그녀는 무척 감동한 듯했으나 언어가 서툴러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눈시울만 붉혔다.
"자자, 어서 가요. 용대인이 기다리실 거예요."
천사예는 그녀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고마와요."
유리공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에게 밀려 밖으로 나갔다.
장천린은 천화원에서 제삼신마전 소속의 인물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자리에는 특별히 해서오궁(海西五宮)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삼신마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로 장천린은 그 사이 두 번 만나 어느 정도 친분이 다져
진 터였다.
해서오궁은 장천린에 대해서 몹시 적극적이었다. 그를 끌어들임으로써 제삼신마전의
성세를 높이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핫핫......!"
호탕한 웃음과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술잔이 부지런히 교환되었다. 그들간의 대화
는 대체로 농담으로 일관되었다.
문득 임충후는 눈을 가늘게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조소저는 천화원의 화중지화인데 북대협께서 독차지하는 바람에 질투가
나서 못 견디겠소이다."
"하하하......!"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해서오궁 중 이화궁(離火宮)의 화노(火老)가 붉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고로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 했거늘 당연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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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입죠!"
중인들은 재빨리 맞장구쳤다. 그러자 임충후는 장천린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북대협, 술자리가 무르익었으니 기왕이면 이 자리에서 북대협의 절기를 한 번 시연
해 보여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의 안목을 키워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와아!"
기다리나 한 듯 장내의 중인들은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실상 임충후가 특별히 해서오궁을 이 자리에 오게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해
서오궁의 원로들로 하여금 장천린, 즉 북검엽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시킴으로써 그를
끌어들이자는 의도였다.
장천린은 마음에도 없는 겸양의 말을 했다.
"보잘 것 없는 솜씨로 고인들의 눈을 어지럽혀 드려야 쓰겠소?"
그는 입으로는 겸양을 하면서도 못 이긴 듯 점원을 불렀다.
"이봐, 가서 종이 한 장을 가져오게."
점원은 군말 없이 달려가더니 잠시 후 종이를 가져왔다.
"......?"
중인들은 장천린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천린은 주
위를 둘러보더니 난간의 기둥에 눈길을 던졌다. 그것은 나무기둥이 아니라 철기둥이
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며 말했다.
"여러분 중에서 저 철기둥이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할 분이 없소?"
삼십대 가량 되어 보이는 청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생 자오검(子午劍) 진성(陣星)이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철기둥 앞에 서서 기둥을 만져본 후 고개를 저었다.
"허! 이건 청동기둥으로 단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럼 제가 검으로 한 번 시험
해 보겠습니다."
그는 쾌속하게 검을 뽑아 기둥을 베었다.
캉! 하는 금속음과 함께 시퍼런 불똥이 일어났다. 진성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
며 비틀비틀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후 그는 검을 살펴보며 울
상을 지었다.
"이건 명검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대철조사(大鐵造社)에서 은자 삼백 냥이나 주고
구입한 건데 이빨이 다 빠져 못쓰게 됐습니다."
"와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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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는 금세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진성은 철주를 살펴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기둥엔 한 푼밖에 자국이 나지 않았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소이다. 진형의 장검은 후일 내 더 좋은 것으로 선물하겠소."
그 말에 진성은 입이 찢어졌다.
"그... 그렇게 까지야."
장천린은 좌중을 둘러보며 힘주어 말했다.
"본인의 재주는 별것이 아니지만 여러분이 모두 원하시니 추태를 한 번 보이겠소이
다."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번쩍! 하며 한 가닥 섬광이 그의 수중으로부터 뻗어나갔다
"와아!"
"시... 신기(神技)요!"
여기저기서 경악성과 탄성이 터져나왔다.
보라! 청동으로 주조된 철제기둥에 한 자루의 도가 깊이 박혀있는 것이 아닌가? 더
욱 놀라운 사실은 그 도는 칼이 아니라 방금 전 점원이 가져다 준 종이라는 사실이
었다.
고작 한 장의 종이칼을 날려 철주에 박아버린 것은 전대미문의 신기가 아닐 수 없었
다.
"와아!"
짝짝짝......!
함성과 박수소리는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장천린은 한 번의 신기를 보여줌으로써 중인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로 인해 모두 그를 신처럼 우러러보게 되었다. 해서오궁의 다섯 늙은이들도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소, 북대협."
"하하! 보잘 것 없는 재주일 뿐입니다."
장천린은 손을 젓다가 흠칫했다. 한 미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공녀?'
뜻밖에도 유리공녀가 장내에 나타난 것이다. 유리공녀는 사뿐사뿐 걸어와 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조소저는 일이 있어 제가 대신 왔어요."
중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의 얼굴에는 온통 감탄과 부러움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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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에 금발을 지닌 이국미녀의 미모에 한결같이 넋이 나간 듯했다.
임충후는 부러운 듯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하하! 정말 북대협은 복도 많습니다."
다른 자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조소저 못지 않은 미녀입니다."
"아니, 아니오. 더 나은 절세미인이외다!"
중인들은 모두 홀린 듯 유리공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한편 장천린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공녀는 그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화내지 마세요. 조소저는 유리가... 따돌렸어요."
장천린은 비로소 사정을 알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화를 내다니? 당신이 나타나니 더욱 유쾌하구려."
그는 손을 뻗어 유리공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유리공녀
는 뜻밖의 그의 행동에 놀란 듯했으나 곧 얼굴을 붉히며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활기가 돌았다. 부지런히 술잔이 오갔으며 웃음소리는 더욱
더 커졌다. 그러는 동안 장천린은 더욱 제삼신마전의 인물들에게 우상이 되어갔다.
한편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독전우사 양도위였다. 그는 제삼신마전의 인물들 속에 끼어있는 장천린을 바라
보며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저 자는 은연중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어
쩌면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인물일지도.......'
양도위는 머리가 복잡해진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된다.
술에 취하면 대부분 말이 많아지고 대범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대범해지게 되면 평소와 달리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감정을 거침없이 토
해내게 된다. 유리공녀도 그 점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장천린의 팔에 매달린 채 비틀거렸다.
평소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따라주는 술잔을 연거푸 받아 마셔 엉망으로
취해있었다.
"아아... 어지러워......."
장천린의 팔에 매달린 채 마치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늘어진 그녀는 입에서 술냄새
를 풍기며 자꾸만 종알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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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왔소, 유리. 조금만 참으시오."
장천린은 유리공녀를 부축한 채 걸었다.
보통 취한 사람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유리공녀는 달
랐다. 마치 꽃물이 오른 듯 붉게 달아오른 뺨이며 촉촉이 젖은 채 몽롱하게 풀어진
푸른 눈동자, 흐느적거리는 몸매는 더욱 더 매력적인 느낌을 주었다.
유리공녀는 걷기조차 힘든 듯 전신을 그에게 의지했다. 그 바람에 장천린은 그녀의
뭉클한 젖가슴을 팔꿈치에 느껴야만했다.
"정말이지... 오늘... 죄송해요."
"됐소."
"조소저를 속인 것... 후회하지 않아요... 나쁜... 일인 줄은 알지만......."
장천린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주었다. 유리공녀는 마치 꿈을 꾸는 듯이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는... 기뻐요....... 어쩌면 오늘처럼... 기쁜 날을 맞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요."
그녀는 흐트러진 금발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대인... 아니 검엽... 당신이 화내지 않아서... 기뻤어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내가 왜 화를 내겠소?"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리는 불안했어요. 당신 때문에......."
확실히 술기운에 과감해졌다. 그녀는 장천린에게 당신이란 호칭을 서슴없이 사용하
고 있었다.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어깨에 약간 세게 안으며 말했
다.
"많이 취했소, 유리."
유리공녀는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그의 팔에서 몸
을 빼내려했다.
"유리......."
"자... 잡지 마세요."
그녀는 억지로 그의 손을 뿌리친 후 두어 걸음 물러났다. 매우 불안해 보이는 모습
이었다. 그녀는 안간힘으로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취하지 않았어요. 절대로!"
"유리."
장천린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지 마세요. 내 말에 솔직히 대답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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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대답을 하란 말이오?"
"이런 제 모습... 실망하셨죠, 추해 보이지요? 천박한 계집이라고 마음속으로 욕을
하고 계시죠?"
장천린에게 유리공녀의 그런 모습은 귀엽게만 보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소."
유리공녀는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그럼 말해줘요... 어떤 느낌인지?"
장천린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름답소. 몹시."
"거짓말!"
유리공녀는 반항적으로 내뱉었다. 장천린은 그녀를 응시하며 힘주어 말했다.
"사람들은 태양이 빛나고 있는 대낮에는 빛의 밝음을 잊어버리고 지내지. 하지만 어
둠 속에 들어서는 순간 한 자루의 촛불도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오.
유리공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유리의 모습은 바로 그런 빛과도 같소. 지금 내 눈에는 어둠을 빛내고 있는 촛불처
럼 아름답소."
"정말?"
"정말이오. 지금 유리의 모습은 어느 누구보다 아름답게 보이오."
"정말... 인가요?"
유리공녀의 푸른 눈에 출렁일 정도로 물기가 고였다. 그녀는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해요... 정말 모르겠어요. 당신을... 당신을 볼 때마다 유리는 눈이 부셔요.
유리가 촛불이라면 아마 당신은 태양인가 봐요."
"유리."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듯 장천린은 그녀를 강하게 껴안았다. 유리공녀도 화답하듯
그의 목을 세차게 껴안았다. 두 사람은 하나가 된 채 서로를 찾았다. 두 사람의 입
술이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꿀을 찾는 벌인 양 장천린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열었
고 유리공녀는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한껏 입술을 벌렸다.
격정의 불꽃이 튀었다. 그 불꽃은 유리공녀의 혈관을 타고 급속히 전신으로 번져나
갔다. 그녀는 뱀처럼 장천린의 목을 휘감으며 열정적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전신이 녹아나는 듯한 황홀감을 느끼며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두 사람의 혀
와 혀가 하나가 되기 위해 춤추며 엉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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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유리공녀는 천지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마침내 그녀는 나락으로 침몰해버렸다. 장천린은 그녀의 동체가 갑자기 힘을 잃고
흐느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술에 만취한 데다 열정이 폭발한 나머지 의식을 잃고 만
것이었다.
"유리!"
그는 급히 그녀를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번쩍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발갛게 상기된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
굴을 사랑스러운 듯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유리. 그대는 확실히 사랑스런 여인이오."
그가 처소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을 서성이고 있던 천사예는 기가 막힌 듯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어떻게 된 거예요?"
술냄새가 푹푹 풍기는 유리공녀를 받아 침상에 눕히며 그녀는 연신 혀를 찼다. 장천
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잠을 푹 재우면 깨어날 거요. 아마 이후로는 술 근처에도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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