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0장 미녀와 영웅 (72/87)

제20장 미녀와 영웅 

석양이 침몰하자마자 어둠이 정복자처럼 대지를 유린해 들어왔다. 

어둠이 짙어질 무렵. 

장천린은 제일신마전에 도착했다. 미리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두 명의 시 

비가 공손히 그를 당선종에게 안내했다. 그곳은 전각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밀실이었 

다. 

"하하핫! 어서 오시오, 북대협." 

당선종은 그가 들어서자 호탕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내실이었다. 

실내의 중앙에는 타원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갖 

추어져 있었다. 

함께 있던 양도위도 반갑게 일어나 장천린을 맞이했다. 

실내에는 당선종과 양도위 외에도 구 척에 달하는 거구의 인물이 있었다. 

그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니, 얼굴만이 아니다. 

두 개의 눈구멍과 입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드러난 모든 피부를 흰 천으로 칭칭 감 

고 있었다. 

초광보다 훨씬 장대하게 느껴지는 체구의 괴인이었다. 더욱이 전신을 흰 천으로 감 

싸고 있는 모습은 왠지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으며 질식할 듯한 위압감을 풍기 

고 있었다. 괴인을 보는 순간 장천린의 뇌리에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이때 양도위가 그를 소개했다. 

"당전주님이시오." 

장천린은 담담히 공수했다. 

"북검엽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핫! 북노제, 지나친 예의는 결례라 했네. 더구나 나 당선종은 격식을 좋아하는 

인물이 아닐세." 

당선종은 자연스럽게 장천린의 양손을 마주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장천린은 잡힌 

손을 통해 엄청난 내공이 물밀 듯이 밀려옴을 느꼈다. 

'날 시험한단 말인가?' 

그는 표정 한 점 흐트러뜨리지 않고 쌍극마공을 일으켜 상대했다. 

사태가 돌변했다. 당선종은 상대의 손바닥을 통해 각각 상반된 두 가지 기운이 밀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하나는 얼음처럼 차고, 하나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기운이었다. 

그는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바로북 99 106

'과연! 목혈청의 진수를 이어 받았구나.' 

그는 곧 당선종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놓아주었다. 

"이 늙은이가 주책을 부린 모양이군. 이해하게." 

"괜찮습니다." 

"자, 우선 이쪽을 소개할까?" 

당선종은 흰 천으로 전신을 가린 거구의 괴인을 바라보았다. 

"나와 의형제 사이네. 피를 나눈 아우와도 같은 제오신마전주 철마왕 사진청이지." 

장천린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역시 철마왕 사진청이었군!' 

그렇다. 과거 만가산에서 노명 등을 상대로 공포의 살상을 벌였던 사진청이 바로 그 

였다. 당시 그는 전신을 철갑(鐵甲)으로 감싸고 있었다. 

사진청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북대협." 

장천린은 그의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고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후후! 숨어있는 명성이 어찌 쟁쟁한 위명을 날리고 있는 비마와 비교할 수 있겠나? 

사진청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과거 만가산에서 보여준 흉폭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당선종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를 권했다. 

"자, 우선 앉게. 주인의 술부터 한 잔 받아야 될 것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당선종은 은배에 가득 술을 따라주었다. 장천린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당선종은 껄껄 웃었다. 

"역시 호쾌하군!" 

몇 순배 술이 돌자 서서히 주흥이 무르익었다. 좌중의 사인은 간간이 대화를 주고받 

았다. 그들의 대화는 일상적인 것이었으나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말없 

이 술만 들이켜던 사진청의 눈빛도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사진청과 장천린이 몸을 일으키자 당선종은 몸소 

바깥까지 따라나왔다. 사진청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당노형, 다음엔 소제가 한 잔 대접하겠소이다." 

사진청은 사람 좋게 웃었다. 

"허허! 그러시게, 사아우." 

107 바로북 99

당선종의 배웅을 받으며 나온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제법 술기가 거나한 듯 사 

진청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그는 장천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우리 한 잔 더하는 게 어떤가?" 

장천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바라던 터였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천화원으로 향했다. 천화원에 당도한 두 사람은 다시 술 

판을 벌였다. 그들은 기녀도 부르지 않고 술에 한이라도 맺힌 듯 경쟁적으로 마셔댔 

다. 

사진청의 주량은 실로 엄청났다. 그는 장천린의 잔보다 열 배나 큰 사발에 술을 가 

득 채워 물 마시듯 목구멍으로 넘겼다. 

마침 천화원에 와있던 조화성의 인물들은 사진청을 보자 하나둘 눈치를 살피며 꽁무 

니를 감추었다. 사진청은 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그는 큰 소리로 내뱉었다. 

"조화성에서 영웅은 두 사람밖에 없어! 흐흐... 조화성이 천하에서 가장 큰 집단일 

지는 몰라도 나 사진청이 보기에는 모두 벼룩과 빈대들 뿐이야." 

장천린은 짐짓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 그 두 영웅은 누구입니까?" 

사진청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 같은가?" 

장천린은 잠시 생각한 후 답했다. 

"물론 조화성주도 포함되겠지요?" 

"천만에!" 

뜻밖이었다. 사진청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 다시 말했다. 

"성주는 영웅이라 할 수 없네. 오히려 효웅(梟雄)에 가깝지." 

장천린은 그의 거침없는 표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흐흐!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지. 그는 이제 과거에 연연하는 필부에 지나지 않네." 

장천린은 더욱 놀랐다. 

'이 자는 너무 함부로 말하는군.' 

사진청은 조금도 두렵지 않은 듯 거리낌없이 말을 이었다. 

"진정한 영웅은 몇 년 전 죽었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108 바로북 99

"천황 태사독이네. 그야말로 진정한 난세의 영웅이지. 안타까운 것은 그에게는 그 

기도를 뒷받침해 줄 무공이 약했었네." 

장천린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사독의 무공이 약하다고......?' 

그는 어이가 없는 느낌이었다. 

"그의 죽음은 성주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실상 조화성의 

균형은 깨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사진청은 다시 술사발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또 다른 한 명의 영웅은 당선종이라 할 수 있네. 그는 패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네. 

하지만 그 역시 단점은 있지." 

장천린은 관심 어린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요즘 와서 그는 매사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네. 특히 처남인 숙야염이 죽은 후로 그 

증세는 더욱 심해졌지." 

장천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전주의 무공은 어느 정도입니까?" 

사진청은 선뜻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최고지. 더욱이 독에 관해서 라면 무적이네. 그의 천리독무(千里毒霧)와 자뢰독강( 

紫雷毒 )은 당대무적이지." 

장천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불쑥 물었다. 

"사전주님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사진청은 흠칫했으나 곧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나 말인가? 나야말로 평범한 필부요, 범부에 불과하지. 힘은 있으나 지 

혜가 없고, 용기는 있으나 만용만 있는 보잘것없는 위인이라네." 

장천린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나친 자기비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으하하하핫......!" 

사진청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순간 장천린은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는 마음속에 불만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어딘가 모르게 사진청의 광소 속에는 공허함과 조소가 깃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의외로 이 자의 성격은 단순하지가 않다.' 

그는 음성을 낮추며 재차 물었다. 

"금불 숭의겸과 혈왕 낭리초는 어떻습니까?" 

109 바로북 99

사진청은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숭의겸은 그야말로 여우 중의 여우라고 할 수 있지. 한 마디로 간웅(奸雄)의 대표 

적인 인물이네. 그에 비하면 낭리초는 곰이야. 제 스스로 머리 좋은 척 하지만 항상 

뒤통수를 얻어맞는 곰 말일세." 

장천린은 가차없이 상대를 비평하는 사진청의 말에 거듭 놀라야했다. 

그는 사진청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때마다 사진청은 기탄 없이 자신이 느끼는 

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더구나 그는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비평을 늘어놓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거나하게 취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천화원을 나 

섰다. 밖으로 나온 장천린은 사진청에게 포권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아닐세." 

사진청은 장천린을 붙잡았다. 

"하하! 밤도 깊었는데 내 거처로 가세! 어떤가?"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왕이면 사진청에게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정보란 많을수 

록 좋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사진청의 처소에 도착했다. 뜻밖에도 사진청의 처소는 잘 정돈되어 있을 

뿐더러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들은 서재에서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중년미부가 술상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자의궁장을 입 

고 있었는데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백설같이 흰 피부에 고귀함이 몸에 배어있는 여인이었다. 사 

진청은 껄껄 웃으며 중년미부를 소개했다. 

"하하! 본인의 내자일세. 부인, 이쪽은 비마 북검엽이오." 

장천린은 즉각 몸을 일으켜 중년미부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 편히 하세요. 상공." 

여인의 음성은 부드럽고도 따뜻했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장님이라니!' 

그렇다. 놀랍게도 중년미부는 아름다운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다만 너무 아름답 

기에 그녀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힘들뿐이었다. 

110 바로북 99

중년미부는 술상을 탁자에 가지런히 차려놓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은 맹인답지 않게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곳이 인사한 후 물러갔다. 

사진청은 장천린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내자가 눈이 먼 것을 눈치챘군. 후후! 웬만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지. 그만큼 내 

자의 성격이 차분하거든." 

장천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인을 사랑하십니까?" 

사진청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천하에 여인은 많지만 내자 같은 여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확신 

하네." 

그는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킨 후 털어놓았다. 

"내자는 처음부터 장님이 아니었네. 이십 년 전... 스스로 눈을 멀게 해 버렸다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왜 그랬습니까?" 

"하하하!" 

사진청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한동안 웃다 웃음을 뚝 그치며 물었다. 

"자넨 내가 왜 얼굴을 가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진청은 장천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얼굴을 휘감고 있는 흰 천을 풀기 시작 

했다. 장천린은 뜨악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천이 완전히 풀려지고 

얼굴이 드러났다. 

"......!" 

장천린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평정을 회복했다. 놀랍게 

도 사진청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고깃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멋대로 짓이겨진 고깃덩이! 오관은 흔적 

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져 있었고, 피부는 일그러지고 뒤엉켜져 도저히 눈뜨 

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가히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끔직한 나 

찰악귀의 얼굴이었다. 

사진청은 손에 감겨져 있는 천마저 풀어버렸다. 얼굴 못지 않게 그의 손도 완전히 

짓이겨져 육괴(肉塊) 덩어리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실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사진청은 일그러지고 뭉개진 얼굴에 간신히 남아있는 두 개의 눈으로 장천린을 한동 

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 

"놀랍군. 내 얼굴을 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이지. 보자마자 혐오감 

111 바로북 99

을 느끼고 구토하거나 아니면 겁을 집어먹고 안색이 창백해지거든. 그런데 자네는 

조금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군." 

"......." 

장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라고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단지 그는 경악 

을 겉으로 표시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흐흐, 그럼 내 얘기를 들어보겠나?" 

사진청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사진청의 부친은 본래 화약(火藥)과 철(鐵)을 잘 다루던 장인이었다. 

당시 사진청은 무림인이었으므로 부친이 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었다. 이십 년 

전, 그의 인생은 한 가지 참혹한 사건으로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사진청은 당시 한 여인과 정혼한 상태였다. 그런데 혼례일을 불과 며칠 앞둔 날 예 

상치 못한 참극이 일어났다. 일하던 사람들이 화약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작업실과 

집이 통째로 날아가는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사진청의 부친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며 사진청 또한 중상을 

입은 것이다. 

사진청이 입은 상처는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어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이다. 화독(火毒)이 골수까지 파고들어 피부는 물론 근 

육조차 완전히 비틀어 놓았던 것이다. 

전도가 유망하던 준미한 청년 사진청은 그때부터 인생이 달라지고 말았다. 너무도 

끔찍한 모습으로 인해 그는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결국 그는 하늘을 저주하고 땅을 증오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철저히 기피하는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떨었다. 너무나 비극적인 과거지사였다. 그는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망연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사진청은 담담했다.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시 내자는 젊고 아름다웠지. 하지만 나는 나이가 삼십이 넘었을 뿐더러 모든 사 

람들이 꿈에 볼까 두려워할 정도로 추악하게 변모해 버렸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혼인이 깨지리라고 생각했네. 물론 나 역시 기대도 하지 않았지." 

장천린은 동정심을 금치 못했다. 

'하긴 어떤 여인이 이런 얼굴의 사내를 남편으로 맞이하겠는가?' 

사진청은 술잔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112 바로북 99

"나는 골수에 깊이 스며들었던 화독을 간신히 몰아낸 후에 내자를 찾아갔네. 파혼을 

하기 위해서였지. 정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미래를 망칠 수가 없었다네." 

사진청의 흔적만 남아있는 눈썹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한데...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그때 이미... 그녀는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네." 

장천린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사진청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네.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내가 버리면 갈 곳이 없다고 말했 

다네." 

"......." 

"내 마음이 어땠겠나? 난 감격했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하늘과 땅에 대고 맹세했네 

. 앞으로 영원히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피겠노라고 말이네." 

장천린은 두 사람의 지순한 사랑에 감동을 금치 못했다.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후후......." 

사진청의 입에서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옛 기억을 씻어 버리기라도 하려 

는 듯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제는 몇이나 두었습니까?" 

"없네." 

사진청의 고깃덩이 같은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덮였다. 

"그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지. 안타깝게도... 당시 나는 화상이 깊어 이미 남자 구실 

을 할 수 없는 몸이었네." 

장천린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 

렸다. 

'아아, 사람들은 이 자를 광폭하고 잔인하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인간이란 정녕 알 

수 없는 존재로구나. 이 자의 내면이야말로 세상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지 않은가? 

어쩌면 이 자야말로 진정한 영웅일지도 모른다.' 

사진청은 장천린을 노려보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장천린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전주, 당신은 진정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사진청은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다시 술잔을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한 잔 더 하세." 

"좋습니다." 

113 바로북 99

두 사람은 다시 권커니작커니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밤은 깊을 대로 깊었다. 그러나 진정한 지기(知己)를 만난 듯 두 사람의 술자리는 

끝날 줄을 몰랐다. 그야말로 사나이와 사나이의 의기가 투합한 그런 밤이었다. 

장천린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처소로 돌아왔다. 그는 술이 떡이 되어 걸음걸이까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침소에서 두 여인, 즉 유리공녀 

와 천사예가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응?' 

장천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유리공녀와 천사예가 술을 마시다니? 두 여인은 오랫동안 술을 마신 듯 얼굴이 빨갛 

게 상기된 채 취해 있었다. 장천린은 어이가 없다못해 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여인들은 그를 힐끗 바라보았을 뿐, 대답도 없이 똑같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 장천린은 놀라 유리공녀를 향해 말했다. 

"유리, 그대는 지난번에 술을 마시고 고생하지 않았었소?" 

유리공녀는 그를 바라보며 잔뜩 혀 꼬부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는 처음이라... 경황이 없어서... 술맛을 몰랐어요." 

장천린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다시 마시니 이번엔 기분이 어떻소?" 

유리공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맛이 좋아요. 기가... 막혀요." 

그녀는 냉큼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엑! 콜록, 콜록!" 

그녀는 사레가 들린 듯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하하하핫......!" 

장천린은 그녀의 모습이 우스워 잠시 대소를 터뜨렸으나 곧 정색을 한 후 말했다. 

"그만 하시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억지로 마시는 이유가 무엇이오?" 

두 여인은 찔끔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다음부터는 나도 되도록 술을 자제하도록 하겠소." 

장천린은 술기운 탓으로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두 사람이 날 이해해 주어야 하오." 

114 바로북 99

장천린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두 여인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가 조화성에 들어온 후 무분별한(?) 행동을 벌이는 것에 대해 애교 있는 시위를 하 

고 있는 것이었다. 

장천린은 꽤 취했다. 당선종과 마신 술이 적지 않은데다 다시 사진청과 많은 술을 

마셔서 아무리 내공이 강하고 강철같은 체력을 지녔다해도 한도가 넘은 상태였다. 

장천린은 철마왕 사진철과 그토록 많은 술을 마신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한 치 앞을 내다볼 수조차 없는 마굴에 들어온 상태였으나 최소한 그와 술 마실 때 

만은 진실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특히 사진청으로부터 비참했던 과거지사를 듣고 난 후부터는 그에 대한 인식이 바뀌 

었다. 그래서 사양하지 않고 술잔을 부딪쳐 댔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취한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는 한동안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과한 술 탓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사예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가시 돋친 음성으로 물었 

다. 

"이번엔... 또 어떤 여인을 만나 술을 마셨나요?"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에게 따지고 드는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묘한 기분이 들었 

다. 항상 다소곳하기만 한 채 자신을 내세울 줄 모르던 그녀에게서 또 다른 면을 발 

견하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천사예가 더욱 예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짐짓 껄껄 웃었다. 

"하핫! 여인은 무슨... 그런 일 없었소." 

"거짓말 마세요!" 

천사예는 혀 꼬부라진 음성으로 반발했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했다. 장천 

린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이거 놓으세요!" 

천사예는 그의 손길을 야멸차게 뿌리치며 탁자를 짚고 몸을 의지했다. 그녀는 울먹 

이며 말했다. 

"너무해요. 용대인님... 너무... 했다구요......." 

장천린은 정신이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예도... 여자란 말이에요." 

장천린은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것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얼마나 

힘든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때 유리공녀도 비틀거리며 일 

어서더니 혀 꼬부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115 바로북 99

"정말이에요. 당신... 너무해요. 우... 우리도 여자예요." 

장천린은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아니? 누가 여자가 아니라고 했소?" 

이번에는 천사예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용대인님은... 다른 여자들만... 여인 취급을 하지 않던가요? 우리는... 아 

니 저는 곁에서 조용히 있기만 하는... 인형이란 말인가요?" 

장천린은 어이가 없었다. 천사예는 입술을 악물며 말했다. 

"용대인님은... 너무 차가워요." 

장천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차갑다고?' 

문득 그는 구룡장원에서 천사예를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여인이었으나 

여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었다. 그녀에게서는 늘 쇠붙이 냄새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었다. 

강호로 나왔을 때 그녀는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녔다. 그가 원하기만 하면 밤을 

새워서 병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변해있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저도 여자란 말이에요......." 

천사예는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그 순간 장천린은 그녀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 

졌다. 그것은 술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사예." 

막 밖으로 나가려던 천사예가 돌아섰다. 장천린의 눈에 그녀의 얼굴이 여러 개로 겹 

쳐져 보였다. 

취옥교... 황보설연... 동방옥... 한때 그가 사랑했고, 또한 그를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들의 얼굴이 천사예의 얼굴과 겹쳐져 왔다. 심지어는 해당의 얼굴도 그 위에 겹 

쳐졌다. 

장천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맞아, 사예. 당신도 여자다." 

"앗!" 

천사예는 깜짝 놀라 비명을 발했다. 어찌된 셈인지 무형의 흡인력이 뻗어와 그녀는 

주르륵 장천린을 향해 딸려갔다. 아차 할 사이도 없이 그녀는 장천린의 품에 안겨버 

리고 말았다. 

장천린은 그녀를 끌어안고 서슴없이 입을 맞추었다. 

116 바로북 99

"앗... 이러면 안돼... 읍!" 

천사예는 고개를 휘젓다 장천린의 입술에 눌려 꼼짝도 못한 채 전신을 바르르 떨었 

다. 

"어머!" 

그 광경을 본 유리공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얼른 얼굴을 돌리더니 급히 밖으 

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 역시 방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한 가닥 불가사의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무섭게 끌어당긴 것이다. 그녀는 허우적대며 끌려갔다. 

"앗......." 

그녀는 장천린의 강인한 한쪽 팔에 안기고 말았다. 장천린은 팔에 각각 한 여인씩을 

껴안은 채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술기운 탓인지도 몰랐다. 그는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만큼은 욕망을 참 

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인지 

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한꺼번에 두 명의 절세미녀를 취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버둥대며 반항하던 두 미녀들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그녀들 역시 술기 

운 탓인지 평소의 부끄러움과 냉정하던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두 

여인은 못이긴 듯 장천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장천린은 두 여인을 안은 채 침상으로 향했다. 

예로부터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고 했다. 

역사의 족흔(足痕)을 남긴 사람 치고 희대의 미녀들과 숱한 염문을 뿌린 것은 주지 

의 사실이다. 미녀가 영웅을 따르는 것인지, 영웅이 미녀를 탐하는 것인지 몰라도 

말이다. 

역사에 남는 미녀들은 난세를 이끌어 온 영웅과 함께 가화(佳話)를 남겼다. 그녀들 

은 영웅을 사랑했고 영웅은 야망에 못지 않게 미녀들과의 사랑으로 숱한 일화를 남 

겼다. 

장천린의 주위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맨 처음 그는 취옥교를 사랑했다.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미녀들의 뜨거운 구애(求

愛)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황보설연이 그러했고, 동방옥의 애틋한 사랑 역시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영웅은 미인의 눈물에 약하다. 그래서 영웅의 주위에는 항상 미인이 들끓는지도 모 

른다. 

장천린은 또 다시 천사예와 유리공녀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날 밤, 두 미인은 영웅의 가슴을 열고 두 마리의 파랑새처럼 둥지를 틀었다. 뜨거 

운 밤이었다. 

117 바로북 99

창문을 통해 비쳐드는 햇살은 포근했다. 

때는 한겨울, 창 밖에서는 살을 엘 듯한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으나 방 안은 따뜻하 

고 감미로웠다. 

장천린은 침상에 길게 누운 채 부드러운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사예였다. 그녀는 뺨을 발갛게 붉힌 채 의자에 앉아 과일을 깎고 있었다. 그녀는 

매미날개처럼 얇은 나삼을 입고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무척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장천린은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유리공녀가 무릎에 머리를 받친 채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있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나른한 기분에 취해있었다. 

그는 강호에 들어서면서 한 번도 편안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는 

항상 칼날이 번뜩였고, 음모와 함정이 곳곳에 도사린 곳이 바로 강호세계였다. 

그는 상인에서 무림인으로 운명이 바뀌면서 평생 편안함은 취할 수 없을 것이라 생 

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천사예와 유리공녀로 인해 잠시나마 그는 세상에 

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되어 있었다. 

유리공녀는 섬섬옥수를 뻗어 장천린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유리는 기뻐요. 당신이 유리를... 기쁘게 해 주었어요." 

장천린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난 깜짝 놀랐지. 유리가 그렇게 정열적인 여자일 줄은 몰랐지." 

"어머! 나빠요!" 

유리공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때렸다. 

"하하하......!" 

장천린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유리공녀는 앗, 하고 비명을 

발하며 그에게 끌려갔다. 그녀는 금침 속으로 딸려갔다. 

장천린은 금침을 덮고 있었는데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다. 유리공녀가 그의 

품에 안기자 고개를 들면서 항의했다. 

"또... 예요?" 

장천린은 대답 대신 그녀의 빨간 입술을 덮어버렸다. 유리공녀는 움찔하더니 전신의 

힘을 스르르 풀고 말았다. 

천사예는 곁눈으로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모두 훔쳐보았다. 그녀는 조금도 질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그녀는 과일을 쟁반 

에 옮기며 말했다. 

"천린, 종일 침실을 떠나지 않을 건가요? 정 그렇다면 밖에 나가 방문에 못질을 해 

드릴까요?" 

118 바로북 99

"뭣?" 

장천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금침이 그의 몸에서 흘러내렸다. 

"어머!" 

천사예는 못 볼 것을 본 듯 질겁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하하핫......!" 

장천린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진동했다. 미녀와 영웅의 행복이 가득 넘치는 

정경이었다. 

119 바로북 9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