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천금동(天禁洞)의 기인들
한 채의 아담한 석옥(石屋)이 잡목림 속에 은밀히 자리잡고 있었다.
유등이 방 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삼인의 인물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운데 인
물은 너무 늙어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노도장(老道長)으로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
는 표정이었다.
성성한 백발과 백염이 잡초처럼 어지럽게 자라있었으며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 뒤
덮여 있었다. 피부는 검고 푸석했으며 눈빛 또한 흐릿한 채 탁하기만 했다.
왼쪽의 노인은 뚱뚱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부담감을 느끼게 할 정
도로 비대한 체격으로 목과 얼굴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살이 쪄 있었다.
둥근 코에 살집에 덮여 가늘게 실처럼 그어진 눈,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안면에는 실
실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오른쪽 인물은 그와는 반대로 대나무처럼 말랐다. 안색은 백랍처럼 창백했으며 눈은
음산한 회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들 삼인은 각자 개성이 뚜렷하여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장천린은 그들의 맞은편에 서있었다. 그의 품속에는 예의 장발소녀가 안겨있었다.
소녀는 혼절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방 안의 한쪽에는 설산오후와 단심객이 나란히
서있었다.
노도장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이유로 우리를 만나자고 했는가?"
그의 음성은 억양의 변화를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음성이 흐릿하여 힘이
라곤 없어 보였다.
장천린은 대답 대신 삼인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세 분이 이곳을 대표하는 분들이오?"
비쩍 마른 갈의노인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조화성의 감찰관이라면서 우리를 모른단 말이냐?"
황의를 걸친 뚱보노인이 거들었다.
"놈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갈의노인은 장천린을 노려보며 험악한 어조로 내뱉었다.
"어서 연아를 내놓아라.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대면 당장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장천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리 쉽지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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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의노인의 안면이 대뜸 무섭게 일그러졌다.
"어린놈이 기만 살았구나!"
위잉!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장천린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장천린은 냉소하며 안고있던
소녀의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억!"
갈의노인은 기겁하며 급히 장력을 회수했다. 하마터면 소녀의 몸을 박살낼 뻔한 그
는 치를 떠는 듯했다.
마침 주위의 소란에 소녀가 깨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장천린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깨닫고 대뜸 소리쳤다.
"이놈아! 내려놔라! 더러운 손으로 누구를 안고 있느냐?"
장천린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난 목욕한지 얼마 안 됐소. 더럽기는 아가씨가 더한 듯 하오."
"이... 이......."
소녀는 모욕감으로 제대로 말도 못한 채 교구를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주먹으로 힘껏 장천린의 가슴을 질렀다. 주먹은 정확히 격중했으나 그 위력은 신통
치가 않았다. 장천린은 싱긋 웃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함부로 움직이면 위험하오. 아가씨는 지금 경혈이 제압되어 있어 내공을 쓰지 못한
다는 걸 알아야 하오."
"......!"
"말하자면 앙탈해봐야 좋을 것이 없단 말이오."
소녀는 수치심과 분노로 인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절대 널 그냥 두지 않겠다!"
장천린은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계속 떠들면 그 입마저 막아버리겠소."
소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정말 그가 입을 막아버릴까 겁나는 듯 슬며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장천린은 시선을 노도장에게 돌리며 지금까지와 달리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소생은 용백군이라 합니다."
노도장은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생이 이곳에 온 것은 바로 여러분 때문입니다."
갈의노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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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때문이라고?"
뚱보 황의노인도 조소를 흘려냈다.
"흐흐! 조화성이 이곳에 위락시설이라도 해 준단 말이냐?"
갈의노인은 회색의 눈에서 원한에 찬 광기를 뿜으며 외쳤다.
"모두 필요 없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백마 갈훼와 염무의 모가지뿐이다!"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백마(白魔) 갈훼(葛卉)!'
백마 갈훼라면 신주사성의 한 명이 아닌가?
갈의노인은 장천린을 노려보며 노갈을 터뜨렸다.
"어린 놈!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왔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절대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
장천린은 그들의 완고한 태도에 짜증을 느끼며 소리쳤다.
"영감들! 좀 조용히 하시오."
"영... 영감?"
갈의노인의 창백한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놈이 감히! 우리 남북쌍마를 영감이라고 부르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황의노인도 안면이 푸르뎅뎅하게 변하며 분노로 씩씩거렸다.
'남북쌍마(南北雙魔)!'
장천린은 내심 충격을 받고 부르짖었다. 그들이 남북쌍마라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남마(南魔) 소진청(蘇眞靑).
북마(北魔) 합비령(閤飛嶺).
그들은 백 년도 전에 활동했던 노마들이었다. 당시에도 그들의 나이는 중년이 넘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의 나이는 최소한 백 사오십 세는 됐을 것이다.
마도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들을 추앙했었다. 그들은 신주사성보다는 다소 배분이
낮았으나 거의 동배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무림활동이 왕
성했으므로 신주사성보다도 더욱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노마들은 벌써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니.......'
이때 노도장이 손을 들어 남북쌍마를 저지한 후 입을 열었다.
"시주에게 거짓이 있고 없고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다. 지금 시주가 안고 있는 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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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빈도의 제자다. 우선 그 아이를 놓아주게. 그 다음에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
장천린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소생은 이 아가씨를 돌려드릴 수가 없소."
노도장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어렸다.
"빈도가 돌려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앗!'
장천린은 내심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전신으로 엄청난 압력이 밀려드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장발소녀를 안고 있
던 양손이 무형의 경기에 밀리며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는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내공은 마치 바
다 속에 빠진 돌멩이처럼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고, 소녀의 몸은 스르르 빠져나가 허
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허공에 뜬 소녀의 동체는 누군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노도장을 향해 딸려가고 말
았다.
장천린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내공은 이미 이 갑자 이상이었다. 한데 거리를
한참 격한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의 손에서 소녀를 데려가다니... 도저
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상상도 못할 엄청난 내공이다!'
장천린은 넋을 잃고 말았다.
'신주사성에 속한 산곡노인이나 능허자도 이 정도는 못될 것이다.'
그는 노도장에 대해 강한 의문이 일어났다.
'대체 저 도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때였다. 갈의노인, 즉 남마 소진청이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린 놈, 이젠 노부가 네놈에게 받은 수모를 돌려줄 차례다."
그가 막 손을 뻗으려 할 때 장발소녀가 발딱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남마 할아버지! 저놈은 제게 맡겨 주세요. 제가 처치하겠어요."
그녀는 아까 당한 모욕을 분풀이하겠다는 듯 기세 등등하게 나섰다. 그러나 노도장
이 조용한 어조로 만류했다.
"소(蕭)시주는 그만두게. 연아야, 너도 물러나거라."
그는 끌끌 혀를 차며 장발소녀, 즉 호연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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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야, 너는 가슴의 옷이나 좀 여며야겠구나."
호연은 움찔하며 급히 고개를 숙여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언제
그리 됐는지 가슴 부분의 옷자락이 벌어져 이제 막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사과 같은
젖가슴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어멋!"
호연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후닥닥 가슴을 가리며 노도장의 등뒤로 숨어 버렸다
. 그녀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장천린을 쏘아보았다.
이때 남마 소진청이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노도장에게 말했다.
"청허 선배, 저놈을 어찌 그냥 두란 말이오?"
청허라 불린 노도장은 나직이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저 시주의 눈빛은 정명(正明)하네. 결코 악의 무리는 아닐세."
그 말에 남마 소진청은 불만이 역력한 눈치였으나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났다.
그는 청허도장을 무척 공경하는 듯했다.
청허도장은 장천린을 주시하며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 이름이 용백군이라 했는가?"
"그렇습니다."
"빈도는 청허자일세."
'청허자.......'
장천린은 내심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쉽사리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청허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무량수불....... 그럼 이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 보게."
장천린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감사합니다."
곧 그는 차분하게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가 진행
되는 동안 중인들은 안색이 거듭 변화했다. 하지만 청허자 만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
이었다.
그러나 환존 산곡과 능허자를 만났던 과정을 설명할 때는 청허자의 안색도 미미하나
마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산곡과 능허가 아직 생존해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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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불......."
청허자의 안색은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침묵했다. 장
천린은 내친 김에 환존의 변장술을 익혀 조화성에 침투한 과정과 지금가지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묵묵히 듣고만 있던 북마 합비령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자네의 본 얼굴을 보여주게."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저의 변장은 한 번 지우면 복원할 수 없소이다. 그만큼 특수한 변장술이기 때문이
오."
합비령은 냉소했다.
"노부도 변장술을 알고 있네. 자네의 얼굴은 변장한 것이 아니야. 흔적이 전혀 없네
. 노부는 천하에 그런 변장술이 있다고 믿을 수 없어."
청허자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합시주, 산곡의 변장술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네. 빈도는 그의 변장술을
인정하네."
그 말에 합비령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청허자는 장천린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주의 검이 왕검지경(王劍之境)에 들었다던데?"
장천린은 겸손하게 말했다.
"아직 미비합니다."
청허자는 미소지으며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미비하다한들 왕검지경에 든 자가 고금이래 몇이나 되겠는가? 실
로 경하할 일이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바람에 장내는 기묘한 침묵에 잠겼다. 남북쌍마도, 호
연도, 용백군도 감히 침묵을 깨지 못하고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빈도는 시주의 말을 믿겠네."
마침내 떨어진 한 마디에 장천린은 반색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남북쌍마가 못마땅한 듯 반발했다.
"청허선배!"
그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청허자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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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걱정 마시게. 이번은 틀림없네."
"어떻게 장담합니까?"
남마 소진청이 못미더운 듯 반박했다. 청허자는 자신 있게 말했다.
"산곡의 환용비술이 저 시주의 얼굴에서 보이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은 못 봐도 나
는 볼 수 있네."
"......."
"환용비술은 산곡의 독창적인 비술(秘術)이네. 허허! 두 분은 너무 깊이 생각할 필
요가 없네."
남북쌍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천린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여전
히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호연도 마찬가지였다.
'흥!'
호연은 내심 코웃음을 날리며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장천린을 쏘아보았다. 장천린
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은 꽤나 고달프겠구나.'
두 사람.
청허자와 장천린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단 둘이 석옥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손바닥만한 하늘만 뚫려 있을 뿐 분지는 완전히 밀폐됐다고 할 수 있었지만 어
디선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청허자는 천천히 걸으며 이곳에 갇혀있는 고수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장천린은 그가 하는 말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머리 속에 새겨 넣었다. 한
동안 경청하기만 하던 그는 줄곧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의문점에 대해 물어보았다.
"대체 이 많은 고수들을 납치해 가두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청허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고수들이 잡혀온 것은 염무보다는 백마 갈훼의 때문에 시작된 일이네."
"......?"
"그것은 중원무림에서 염무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적수를 미리 제거하기 위함이라네."
장천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분들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한 장소에 갇
혀있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흐릿한 청허자의 눈빛이 더욱 암울해지는 것 같았다.
"이곳의 인물들 중에는 무공은 강하지만 암습에 당한 자들이 상당수네. 대부분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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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고수들에게 당했지."
청허자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해도 어둠 속의 암전(暗箭)을 피하기는 쉽지 않는 법이네. 교
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치밀하게 각개격파를 당했으니 모두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네
."
"그랬군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말이 끊어졌다. 청허자는 걸음을 멈추고 조그맣게 보이는 하늘
을 올려보았다.
"그러니까 육 년 전... 백변천군 노명이 이곳에서 육십육인을 데리고 탈출을 한 적
이 있네."
그것은 장천린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노명은 두뇌가 명석하고 실행력이 있는 인물이었지. 특히 기관과 진법에 관한 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인물이었네."
장천린은 청허자의 옆모습을 보았다.
'음... 이 분은 노명 노인이 과거 태진왕의 명을 받고 잠입했던 사실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가 탈출을 시도했을 때 우리들 중 아무도 성공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네. 그런데
결과는 성공이었네."
청허자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제오신마전 고수들의 추격을 받고 몰살했지. 노명의 탈출 성공은 이곳
사람들에게 잠시 희망을 주었으나 종래에는 더욱 큰 좌절감을 안겨 주었지."
장천린은 흠칫했다.
"좌절이라니요?"
"그들의 탈출로 인해 이곳의 유일한 통로였던 천금동에 각종 기관과 진법 등이 수십
배나 강화되었다네."
장천린은 눈을 빛냈다.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조화성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탈출이 성공했으
니 더욱 보강을 했겠지요."
청허자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좌절감을 느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네."
"......?"
"노명 등이 탈출했으면서도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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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스.......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은 나이만큼이나 퇴색해 버린 청허자의 머리카락을 어
지럽게 날렸다. 흩날리는 머리칼처럼 청허자의 마음도 어지러운 듯이 보였다.
청허자는 까칠한 입술을 열었다.
"조화성이 우리들에게 제공한 음식 속에 극미량의 마약(痲藥)을 넣기 시작했다는 것
이네. 결국 그로 인해 우리들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무공이 반감되고 말았다네."
장천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우리들의 좌절감이 어느 정
도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 악랄한 짓이로군. 겉으로는 이곳에 몰아넣고 별다른 금제를 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마약을 사용하여 그야말로 완벽한 금제를 가했군.'
그는 또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조화성은 왜 여러분들을 제거하지 않는 것입니까?"
청허자는 담담히 대꾸했다.
"이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네."
"이용하다니요?"
"이곳에 잡혀 온 사람들은 개개인이 모두 중원무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
는 명숙들이라네. 그 자들은 훗날 우리를 이용해 무림을 장악하려하고 있네."
장천린은 신음을 흘렸다.
"음, 정말 치밀하군요."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한 얘기였다. 아니, 정말 무서운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무림
각파의 명숙들을 앞세워 협박한다면 무림제파를 손아귀에 넣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장천린은 한동안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그럼 노명 어른이 탈출에 실패한 이후로는 더 이상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단 말
입니까?"
"아니지, 이곳을 탈출하는 것은 우리들의 염원이네. 설사 그보다 더 큰 희생이 따른
다해도 탈출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럼 왜......."
"한 가지 난점이 있다네."
장천린은 의아한 듯 청허자를 바라보았다.
"노명의 탈출 사건 이후 염무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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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이라니요?"
"이곳에 있는 사백십이인에게 영원히 탈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했네."
"아니? 그런 요구를 하다니? 서약하지 않으면 그 뿐이 아닙니까?"
"허허! 놈들이 어떤 놈인가? 우리는 그 서약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네. 놈이 대신
내건 조건 때문이었지. 우리 모두가 서약해야만 식량 속에 미량으로 탔던 마약을 중
단하겠다고 했다네."
장천린은 절로 신음이 나오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얼마나 악랄한 조건인가? 이곳 분지는 황량한 곳으로 아무리 둘러봐도 식
량을 조달할 방법이 없는 곳이었다. 만일 그들이 식량 지원을 끊어버린다면 굶어 죽
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상의한 끝에 염무의 조건을 수락했네. 각자의 명예를 걸고 서명한 연
판장을 염무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었지."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해할 수가 없군요."
"허허, 마약으로 인해 무공을 완전히 상실한다면 탈출할 기회조차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지. 하지만 힘을 비축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탈출할 수 있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만 연판장이 염무에게 있는 한 약속을 깰 수 없지 않습니까?"
청허자는 탄식하듯 말했다.
"그래서 자네를 비롯해 후량과 후조를 죽이려 했던 것이네."
"......?"
"감찰관인 자네와 수호무사를 제거한 후 이곳 인물이 변장한 후 조화성으로 돌아가
연판장을 빼낼 계획을 세웠었네."
"으음......."
장천린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들어오고, 이들은 탈출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염무는 약속을 지켰네. 그래서 우리는 잃었던 무공을 되찾았네. 도리어 마약을 물
리치는 과정에서 지난날보다 더욱 무공이 정진된 상태네. 이 정도면 조화성조차 우
리들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라고 자부하네."
"......."
"연판장만 빼낸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탈출할 수 있네."
장천린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천금동의 통로 말고도 탈출로가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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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금동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기관장치와 진법이 가히 절세적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잠시 후 듣게 된 청허자의 답변은 가
히 놀라운 것이었다.
"원(元)이 중원을 장악했을 당시 남송(南宋)의 잔여 군사세력은 남송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장군 여문추에 의해서 이곳에서 도망쳐 와 힘을 기르고 있었네. 결국은
이곳도 발각되어 대부분의 병사들이 몰살 당했다네. 하지만 여문추 장군을 비롯한
꽤 많은 병사들이 살아 도망쳤다네. 물론 유일한 통로인 천금동이 아닌 다른 통로를
통해서였다네."
장천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다른 탈출구가 있단 말입니까?"
청허자의 흐릿한 눈에 실낱같은 기광이 번뜩였다.
"맞았네. 우리는 필경 다른 탈출구가 있다고 생각했네."
"......!"
"어차피 이곳을 만든 것은 조화성이 아닐세. 자연의 산물인 셈이지. 그러니 조화성
도 모르는 탈출구가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네."
장천린은 급히 물었다.
"찾았습니까?"
청허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네."
"어디입니까?"
"자네가 이곳으로 들어올 때 오물이 쌓여있는 연못을 보았을 것이네. 바로 그 연못
밑에 수로가 있네. 그 수로는 분지 밖으로 통하게 되어있지."
"아!"
장천린은 탄성을 발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수로가 막힌 곳도 있었지만 우리는 몇 년에 걸쳐 수로를 복원해
놓고 오물로 위장을 해놓았네."
실로 기막힌 착상이었다.
"그 동안 무공도 회복했고 탈출로도 확보했지만 연판장 때문에 탈출하지 못하는 것
뿐이네."
실로 기막힌 일이었다. 수백 명의 고인들이 고작 연판장 하나 때문에 탈출하지 못한
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들이 명예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명숙들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장천린은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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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연판장만 빼내면 되겠군요."
"바로 그렇네."
청허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린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황이 명백해진 이상 그가 할 일 또한
명확해진 것이다. 두 사람은 석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청허자가 말했다.
"자네는 남북쌍마가 어째서 자네를 불신하는 줄 아는가?"
"글쎄요."
장천린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에 대해 불신감을 품던 남북쌍마를 떠올렸다.
"과거 자네와 똑같은 말을 한 자가 있었네. 그 자 역시 탈출을 돕겠다고 했지. 물론
자네와 같은 경로로 찾아왔었네."
장천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당시 우리는 그 자에게 모두 속았네. 모두들 그 청년을 굳게 믿었었지."
"음......."
"빈도도 마찬가지였네. 그래서 빈도가 알고 있는 검법의 최정수인 달마삼검(達磨三
劍)까지 전수해 주었네."
'달마삼검!'
장천린은 충격을 받았다.
그의 뇌리에는 과거 낙일검 유겸승이 한 말이 떠올랐다. 달마삼검이야말로 천하에
존재하는 검법 중 가장 강한 검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청허자에 대해서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청허자야 말로 백 년
전 도성 유백과 더불어 검도쌍절(劍刀雙絶)을 이룬 인물이 아니겠는가? 청허자는
도가(道家)에 속한 인물이면서도 불문의 절대검학인 달마삼검을 달통한 기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격동을 느끼며 새삼스럽게 청허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알겠군요! 노도장께선 바로 검도의 달인이신......."
"허허......."
눈빛만큼이나 공허한 웃음이 청허자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자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누구에게 검을 사사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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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굳이 속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일개 상인(商人)이었던 그가 어느 날 노
명 등을 만나게 된 사연으로부터, 반가대선사에게 왕검십결해와 태마경을 얻게 된
경위, 그리고 한선생을 만나 열흘 동안 검법에 대한 도리를 사사 받은 일들을 자세
히 말해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청허자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한선생......?"
그는 의아한 듯 물었다.
"어떻게 생긴 인물인가?"
장천린은 한선생의 용모를 설명했다. 그래도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지 청허자는 흐릿
한 눈을 모처럼 빛내며 말했다.
"그에게 배운 검법을 시전해 보일 수 없겠나?"
장천린은 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장천린은 한 차례 심호흡 한 후 손을 검처럼 세워 검법의 변화를 펼치기 시작했다.
스읏!
처음 손끝으로 수직을 그리며 시작된 검세는 화려한 변화를 일으키며 점차 빠르고
강하게 전개되었다. 첫 수와 마지막 수가 마치 한 동작으로 연결된 듯 순식간에 구
식의 변화를 펼쳐 보였다.
검세를 모두 마치자 청허자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환우구검( 宇九劍)!"
장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알고 계십니까?"
"그렇네."
청허자는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장천린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가 누굽니까?"
"천하에서 환우구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무영 고검령 뿐이네."
"넷?"
장천린은 대경실색했다. 그가 이렇게 놀라기는 조화성에 들어온 이래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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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악.
그는 이미 십여 년 째 분지에 갇혀있었다. 과거 배교(拜敎)의 교주였으며, 장천린이
사진청에게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이겠다고 말한 인물이었다.
호태악이 과거 북마영을 상처 입힌 것은 사실이었다. 장천린은 그 사실을 개방을 통
해 알았다.
물론 장천린은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묘한 상황이었다. 지금 그는 호태
악과 대면하고 있었다. 청허자와 상의한 결과 호태악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호태악은 배교의 교주다.
배교는 사술(邪術)과 환술(幻術)에 능했다. 사백십이인의 서약이 담긴 연판장을 찾
기 위해 천금동을 빠져나가려면 죽은 후량과 후조 대신 두 사람이 변장을 해야만 했
다. 그래서 그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튼 장천린과 호태악은 묘한 상황에서 대면하게 되었다.
호택악은 하관이 좁고 빠른 인물로 음독한 인상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그는 장천린
의 설명을 듣고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큿큿! 그런 일이라면 이 호태악을 따라올 인물이 없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오랜만에 자신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호태악은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장천린을 훑어보며 말했다.
"후량과 후조라면 노부도 익히 안면이 있는 녀석들이지."
"그럼 좀더 쉽게 진행될 수 있겠구려."
"물론이다."
호태악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후량은 체격이 푸짐한 편이니 단심객 유유평이 적당할 테고, 후조는 체격이 왜소한
편이니 내 손녀인 호연이 적당하겠다."
"얼마나 걸리겠소?"
"지금 시작하면 반 시진이면 충분하다."
장천린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기다리겠소."
"큿큿! 오랫동안 솜씨 발휘를 못했는데 뼈마디와 근육이 제대로 움직여 줄지 모르겠
군."
호태악은 단심객과 호연을 불러 들였다. 그는 바로 두 사람을 변신시키는 작업에 들
어갔다.
호연은 장천린에게 이기어검술을 전개하며 덤벼들었던 야성적인 성질을 가진 소녀였
다. 그녀는 십 년 전 호태악과 함께 이곳에 잡혀온 소녀였다. 현재 나이 십육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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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자의 기명제자이자 일신에 남북쌍마의 무공까지 전수 받은 바 있었다. 더욱이
이곳의 기인들에게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숱한 무공을 배워 나이에 비해 엄청난 무공
을 소유하고 있었다.
호태악은 두 사람을 변신시키는 작업에 열중했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장천린
은 몸을 일으켰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호태악은 그가 나가건 말건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발휘하는
환술에 빠져 있는 듯했다.
장천린이 석옥 밖으로 나오자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마 합비령이었다. 그는 대뜸 눈알을 부라리며 시비를 걸었다.
"흐흐! 모두가 널 믿는다 해도 노부는 못 믿겠다!"
장천린은 피곤해졌다.
"노부는 네놈의 진정한 목적을 밝혀내고야 말겠다!"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생은 이미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소. 어째서 당신은 믿지 않는 것이오?"
"놈! 네놈의 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내 네 입에서 바른 소리가 나오도록 만들어
주겠다."
합비령은 대뜸 공격을 취하려 했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쾌속하게 뻗어갔다. 그러
나 그 보다 빠르게 가슴이 서늘해졌다. 한 자루의 검이 그의 가슴에 닿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 달마삼검!"
"그렇소."
장천린은 검끝으로 합비령의 심장을 겨눈 채 오연하게 말했다. 합비령은 입술을 비
틀며 물었다.
"청허 선배가 가르쳐 주었느냐?"
"물론이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청허 노선배께서 어째서 달마삼검을 내게 전수해 주었겠소? 그 분이 날 믿지 않았
다면 결코 검결(劍訣)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 것이오."
사실이었다.
청허자는 그에게 달마삼검의 구결을 전수해 주었다. 장천린은 이미 왕검십결해와 무
영 고검령으로부터 환우구검을 익힌 바 있었으므로 단지 구결을 전해 받은 것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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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달마삼검의 기수식 정도는 전개할 수가 있었다.
합비령은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노부가 너무 방심했다."
장천린은 차갑게 말했다.
"설사 방심하지 않았다 해도 노선배와 내가 싸운다면 양패구상할 뿐이오."
합비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노선배, 인간사가 아무리 험악하다해도 때로는 믿어야 할 것이 있는 법이오. 설사
지난 날 같은 일로 실수한 적이 있다해도 지금의 상황은 다른 것이오. 매사를 불신
으로만 여기면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겠소?"
장천린은 말을 끝내고 검을 내렸다.
그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진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지
금까지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는데 인색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장사를 하는 데도 마
찬가지였다. 그래서 그가 상인으로써 유능했는지도 몰랐다.
그의 진심 어린 말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합비령은 한동안 그를 노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널 믿어보마. 하지만 지금의 네 말과 행동이 거짓이라면... 이후로 노부는
어떤 인간도 신임하지 않을 것이다!"
장천린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널 추적하여 죽이고 말 것이다!"
장천린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그의 웃음은 천 마디 만 마디의 말보다 더 깊은 의
미를 담은 것 같았다.
합비령은 마침내 탄식을 터뜨렸다.
"미안하네, 젊은 친구. 이곳에 갇혀있는 동안 노부의 성격이 지나치게 협소해 진 것
같네. 솔직히 자네를 믿고 싶지만 십 년 전 우리를 속인 그놈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 자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당시에 놈은 자신을 조운(趙雲)이라고 했지. 하지만 분명 가명일 것이네."
장천린은 그 이름을 머리에 새겨두었다.
"언제고 그 자를 만나면 대가를 치르게 하겠소이다."
합비령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탁하네. 놈이 내게 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네."
장천린은 합비령이 부쩍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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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대마존도 한 인간에 대한 배신감을 쉽게 견뎌내지 못하는 구나.'
장천린은 서둘러 천금동으로 돌아왔다.
물론 후량과 후조로 변신한 것은 단심객 유유평과 호연이었으나 워낙 완벽하게 변장
하여 그 자신조차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천금동의 석실에서 극차명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었는데 무사하셨군요."
극차명은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듯 노골적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회분을 바른 듯
음침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자네 말대로 다시는 오고싶지 않은 곳이군."
"후후! 속하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절대로 올 곳이 못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천린은 그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 허점이 드러
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여러 모로 편리를 봐준 것에 대해 사전주께 특별히 말씀 드리겠네."
극차명의 입이 벌어졌다.
"그럴 것까지야... 감사합니다."
장천린은 서둘러 천금동을 빠져 나왔다.
빛 한 점 없는 천금동을 벗어나자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저승세계에 다녀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는 일부러 느리게 걸었다.
후량과 후조로 변신한 두 사람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적당한 핑계를 댄
후 그와 다시 만나기로 약조했던 것이다.
다행히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극차명은?"
후량으로 변신한 단심객 유유평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놈은 아무 것도 모르더군. 무사히 따돌렸지."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오."
"물론이지."
유유평은 비교적 호쾌한 표정이었으나 후조로 변신한 호연의 눈빛은 쌀쌀하기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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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흥, 명심해요. 만의 하나 우리를 속인다면 죽여버릴 테니까요!"
장천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소. 의심받기 전에 빨리 갑시다."
<3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