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7장 의혹(疑惑) (79/87)

제27장 의혹(疑惑) 

"으하하하하핫... 드디어 완성이다!" 

텁석부리의 사나이 반송(盤松)은 희열에 젖어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온통 시커먼 때와 쇳가루, 녹물 등에 물들어 있었다. 

고슴도치처럼 빳빳한 수염도 세 치가 넘게 자라나 있었고, 머리카락은 수세미를 방 

불케 했다. 

그의 앞에는 웃통을 벗은 천독고가 역시 희열에 젖은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구룡장원 내에 특별히 마련된 철공소였다. 그 동안 두 사람은 한 

가지 일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고 있었다. 

그들이 정열을 다 바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은 진천뢰(震天雷)의 제작이었다. 반송이 

포국으로부터 가져온 설계도면에 따라 두 사람의 혼연일체가 되어 만들어 온 것이 

다. 

진천뢰를 제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 동안 숱한 실패와 좌절을 거쳤던 것이다 

. 그러던 중 마침내 십문(十門)의 진천뢰를 완성했고, 아울러 십이 종류의 다른 화 

탄(火彈)을 제작하는데도 성공한 것이다. 

그 동안 반송은 그 좋아하던 술도 끊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독고와 더불어 

철공소에서 쇳덩이와 화약을 만지며 살아왔다.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死鬪)를 벌인 

셈이었다. 

결국 그들은 성공했다. 

슈우우우... 우! 

꽝! 꽈꽈꽈꽈... 꽝! 

십문의 진천뢰로부터 일제히 뿜어댄 불꽃이 맞은편 산등성이에 떨어진 순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는 듯한 굉음과 함께 산등성이 하나가 삽시간에 평지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와... 아!" 

"저... 저럴 수가......!" 

"우우......." 

구룡장원의 사람들은 경천동지할 진천뢰의 위력에 모두 입을 딱 벌렸다. 반송은 진 

천뢰 앞에 선 채 입을 귀밑까지 찢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핫! 어떠냐? 이 정도면 백만대군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단 말이다!" 

바로북 99 46

'으음... 정말 대단한 위력이군.' 

장천린은 화염에 휩싸인 백 장 밖의 언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설마 

진천뢰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진천뢰가 완성되자마자 그는 위력을 확 

인하기 위해 직접 시험에 참관한 것이다. 

반송은 장천린을 향해 다가오며 특유의 너털웃음을 쳤다. 

"헛헛헛! 어떻습니까? 용대인."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치하했다. 

"정말 훌륭해, 반송. 그대는 정말 큰일을 해냈소." 

반송은 히죽 웃으며 한 쪽에 서있는 사나이를 가리켰다. 

"진짜 고생한 것은 바로 천독고입니다." 

장천린은 천독고를 바라보았다. 

천독고는 오로지 철을 다루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사나이였다. 그의 심장은 쇠를 녹 

이는 뜨거움이었고, 그의 손은 쇠를 주무르는 망치였다. 

천독고는 진천뢰를 성공적으로 제작했을 뿐더러 원계묵이 이끄는 백살대(百殺隊)와 

사문도의 낭인무사들에게도 값진 선물을 했다. 그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병장기를 

선물한 것이다. 

천독고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명장이었다. 그가 만든 병기는 하나같이 후대에 물 

려줄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었다. 

장천린은 문득 어젯밤 일이 기억났다. 

밤늦게 천독고가 찾아왔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꿇고 이렇게 말했었다. 

......용대인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뭘 말인가? 

......사예를 거두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천독고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 

다. 

......음. 그것이 어찌 은혜란 말인가? 

......아닙니다. 천한 누이동생을 지체 높으신 용대인께서 아껴주시니 뭐라고 감사 

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장천린은 천독고의 눈에서 진한 혈육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은근히 그의 형 

제지정에 부러움마저 느꼈었다. 

실상 천사예는 이제 그의 아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녀는 더욱 완숙해져 지난날 

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과거 철공소에서 땀을 뒤집어쓰고 있던 그녀가 

아니었다. 

"하하핫! 용대인, 오늘밤에는 밖에 나가 실컷 술이나 마셔야겠습니다. 그 동안 굶었

47 바로북 99

더니 뱃속의 주충들이 난리법석이지 뭡니까? 하하핫......!" 

반송의 호탕한 웃음에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마시게. 술이 떨어지면 성내의 모든 주점을 다 뒤져서라도 자네에게 보내 

주겠네." 

"하핫! 역시 용대인이십니다." 

반송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소리쳤다. 

"야! 운표, 황계, 조충! 너희들도 애들을 데리고 따라와라. 오늘은 내가 한턱 단단 

히 내겠다!" 

그 말에 백살대의 고수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특히 운표는 내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이쿠! 그 동안 저 술귀신에게서 벗어나나 싶었더니 오늘부터 또 시달리게 되었군 

!' 

원계묵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의 무릎에는 장도(長刀)가 길게 누워 있었다. 그의 눈은 지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래... 그가 지금 근처에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주." 

문 앞에 무릎꿇은 청년은 백살대 소속의 어양(魚陽)이란 검수였다. 

"어떻게 변했느냐?" 

"그는... 타락했습니다." 

원계묵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했다. 

"타락했다구?" 

"예, 그는 매일 술을 마시며 아무 계집이나 끼고 잡니다. 그리고... 목욕도 세수도 

안 해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헝클어졌으며......." 

"그만!" 

원계묵의 음성에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 

"한 가지만 말해라. 그는 손에 칼을 가지고 있느냐?" 

어양은 원계묵의 험상궂은 표정에 질린 듯 두려운 음성으로 말했다. 

"없... 었습니다. 그가 아직도 칼을 쓸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술잔을 쥔 손이 수 

전증으로 떨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순간 원계묵의 주먹이 바닥을 쳤다. 

쾅! 

48 바로북 99

그 바람에 탁자가 박살나 버렸다. 

"으으... 그가... 그 정도로 타락했단 말이냐? 그 놈이......?" 

원계묵의 눈썹이 푸들푸들 떨렸다. 

"사부님을 죽인 그가... 그렇게 되다니... 무정도 모용초가 나 원계묵의 칼을 받기 

도 전에 형편없는 주정뱅이가 되었다니......." 

그랬던가? 

바로 무정도 모용초를 말하는 것인가? 

북해에서 신산 제갈사를 죽이고 사라졌던 비운의 사나이 모용초가 그런 모습으로 전 

락했단 말인가? 

"안돼! 놈은 다시 무정도가 되어야 한다!" 

원계묵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놈을 기다렸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원계묵은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생사집혼 사문도는 요즘 말이 없어졌다. 

하루가 갈수록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덮이고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커다란 의혹에 

휩싸여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째서 나의 무공이 조화성주 염무의 마교 무공과 같단 말인가? 

그렇다. 사문도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의 신세에 대해 점점 더 커다란 의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배운 개세의 무공들이 조화성주 염무의 마교비전과 유사하다는 소리를 그 동안 

수도 없이 들었다. 특히, 강호정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부금진으로부터 자신의 

무공이 대부분 마교의 무학이라는 것을 듣고 난 후에는 더욱 커다란 의혹에 휘말리 

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정말로 내 무공이 마교무학이란 말인가?' 

그의 성명암기인 만자혈폭륜(卍字血爆輪)은 모두 열 개였다. 한데 그는 염무가 나머 

지 두 개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사실은 더욱 큰 의문을 낳았다. 

사문도는 최근 들어 명상의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항상 자신의 신세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부친의 이름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부(義父)나 네 명의 사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째서 아버님이 내게 보낸 서신에서 신세를 알려면 조화성을 멸하고 염무를 죽이 

라 했을까? 대체 염무와 나의 관계가 어떤 것이기에? 또한 염무를 죽이는 것만이 운 

명의 굴레를 벗는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사문도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49 바로북 99

그는 자신의 그 동안의 행위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에 나온 지 수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신세에 대해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운명 

조차 모르는 채 허송세월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화성은 아직도 건재했다. 물론 염무는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조화성을 무너뜨리고 염무를 죽인다고 해서... 내 운명의 굴레가 벗어진단 말인가? 

결국 염무를 죽이면 내 신세는 더욱 비밀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닐까? 아아......!' 

사문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문득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그렇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사부들에게 물어보자! 이제는 그들도 말해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문도는 갑자기 머리 속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한정 기다릴 수만은 없다. 이젠 내 스스로 알아 

볼 것이다!' 

사문도는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빛이 어리고 있었다. 

'네 분 사부가 계시는 흑룡산(黑龍山) 마애동(摩崖洞)으로 가리라!' 

사문도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서는 신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소에서 나온 사문도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화원을 지나던 중 그는 다정한 모습 

으로 마주 서있는 남녀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원계묵과 양문완이었다. 

사문도는 두 남녀가 최근 들어 부쩍 가까워졌음을 알고 있었다. 양문완은 양가장보 

다는 구룡장원에 머무는 날이 훨씬 많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잘 어 

울리는 한 쌍이었다. 

'몹시 다정해 보이는군.......' 

사문도는 홀연히 외로움을 느꼈다. 고독이 체질화된 그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 

이었다. 본래 그는 그렇지 않았었다. 그런데 한 소녀를 만나면서부터 부쩍 외로움을 

타게 되었다. 

'해당이라고 했지. 개봉부에 있는 꽃집을 떠난 후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사문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 양문완이 그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사대협, 어디로 가시는 중인가요?" 

사문도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어디 다녀올 데가 있어서......." 

50 바로북 99

그는 곁눈으로 원계묵을 보았다. 원계묵은 늠름해 보였다. 

그에게서는 대종사(大宗師)의 기도가 넘치고 있었다. 그런 원계묵을 보면 사문도는 

항상 위축감을 느끼곤 했다. 

원계묵은 사문도가 어깨에 일월쌍극을 매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듯 물었다. 

"사형, 어디 가는 중이요?" 

사문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사문도는 몇 걸음 걷다가 생각난 듯 돌아서며 말했다. 

"참, 용형님께는 원형이 대신 전해주십시오. 문도가 인사도 없이 간다고... 곧 돌아 

오겠다고 말입니다." 

원계묵은 눈썹을 꿈틀했다. 

"아니? 어디로 가기에......." 

사문도는 본래 거짓말을 잘 하는 위인이 못되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럼......." 

사문도는 몸을 돌렸다. 양문완이 급히 그를 불렀다. 

"사대협!" 

"......?" 

사문도는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양문완은 원계묵의 팔을 다정하게 끼며 자랑 

스러운 듯 말했다. 

"우리 앞으로 결혼할 거예요. 보름 후에 하기로 했어요. 사대협께서도 축하해 주시 

겠지요?" 

사문도는 놀랐지만 곧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양소저. 정말 기쁜 일입니다." 

그는 평소에 안 하던 농담까지 덧붙였다. 

"어쩐지 요즘 양소저께서 더욱 아름다워진다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머......." 

양문완은 얼굴이 빨개졌다. 사문도는 원계묵에게도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원형." 

"고맙소, 사형." 

축하 인사를 받긴 했지만 원계묵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사문도의 얼굴은 웃고 있 

었으나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형님께는 곧 돌아온다고 전해주십시오." 

51 바로북 99

사문도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이상한 일이군." 

원계묵이 중얼거리자. 

"뭐가요?" 

양문완은 그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아... 아니오, 아무 것도......." 

"아이, 좀 더 다정하게 굴어줘요,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요." 

양문완이 어리광을 부리자 원계묵은 싱긋 웃었다. 

"이렇게 말이요?" 

"어머머... 읍......!" 

양문완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원계묵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다짜고짜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너무 

나 갑작스런 기습이라 그녀는 꼼짝도 못하고 당했다. 하지만 몇 차례 주먹으로 원계 

묵의 넓은 가슴을 때리는 듯 하더니 도리어 그의 굵은 목을 끌어안아 버렸다. 

원계묵은 양문완의 달콤한 입술에서 그윽한 여인의 체취를 들이마시며 내심 중얼거 

리고 있었다. 

'그래... 잊자. 손미는 죽었다. 이제 새로 출발하는 거다. 새로.......' 

손미와의 해후는 일 년 전에 이루어졌다. 일단 만나보니 과거의 묵은 한이 모두 풀 

리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손미도 희생양에 불과했던 것이다. 

원계묵은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모두 잊기로 했다. 일단 그렇게 마음먹자 정신적으 

로도 안정이 되었으며 특히 양문완이 다가오는 바람에 그의 마음은 봄눈 녹듯 사르 

르 녹아버렸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던가? 무뚝뚝한 사나이 원계묵도 결국은 양 

문완의 끈질긴 구애에 강철같던 가슴을 열어 버리고 만 것이다. 

원계묵에게 남은 것은 이제 한 가지 일 뿐이었다. 

무정도 모용초. 사부의 원수인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 일만 마치면 그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장천린은 사람을 시켜 원계묵을 불렀다. 

잠시 후 원계묵이 들어서자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계묵, 시킬 일이 있어 널 불렀다." 

원계묵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요즘 형님 뵙기가 무척 힘드는군요." 

52 바로북 99

"음......?" 

"어여쁘신 형수님들이 형님을 에워싸고 있는 바람에 어디 접근이 쉬워야지요." 

장천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무슨 소리냐? 내 듣기에 너는 요즘 문완과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다던데 어디 

내 생각이나 했겠느냐?" 

"형님도......." 

원계묵은 한 방 얻어맞은 듯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형님, 사문도가 떠났습니다." 

장천린은 안색이 변했다. 

"형님께 어딘가 다녀온다고만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한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습 

니다." 

"이상하다니......?" 

"뭔가 비장한 결의를 한 것 같은 눈칩니다." 

장천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으음. 짐작 가는 것이 없느냐?" 

"전혀... 아무튼 사형은 그 일을 별로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장천린은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원계묵은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 

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장천린은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잠시 내버려두기로 하자. 문도는 자신의 일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니까. 그 

건 그렇고 내가 널 부른 것은 한 가지 일을 시키기 위해서다." 

원계묵은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형님." 

"혹시 최근에 천인(天忍)이란 단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느냐?" 

"천인......!" 

원계묵은 안색이 변했다. 

"천인은 일명 죽음의 그림자, 즉 사망영(死亡影)이라고도 부르지. 그들은 동정호 근 

방에 있네." 

"천인... 사망영......." 

원계묵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도 천인이란 단체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들어오고 있었다. 강호에 전해지는 소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천인(天忍)은 왜국(倭國)에서 건너온 인자(忍者)들이 세운 살인청부단체다.

53 바로북 99

......그들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지 해내는 자들로 하나같이 냉혹비정하여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낮에는 백의백건(白衣白巾)을, 밤에는 흑의흑건(黑衣黑巾)을 착용하며 

, 철저히 신비에 가려져 있어 조직의 체제나 주인조차 누군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에게 청부하려면 동정호 상류에서 청부서(請負書)를 병에 밀봉하여 띄우 

면 된다. 그들은 철저히 약속을 지키며 항상 깨끗하게 뒷마무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천인단(天忍團)을 불러오게. 그들을 통째로 산다고 하게. 대가는 부르는 대로 준다 

고 하게." 

원계묵은 눈썹을 꿈틀했다. 

"하필이면 왜놈들에게......?" 

장천린은 담담히 웃었다. 

"후후... 계묵, 때로는 원수도 친구가 될 때가 있는 법이네. 조화성과 상대하는데 

우리측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그들을 쓴들 무슨 상관인가?" 

원계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나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단체는 아닌 것 같으니까." 

원계묵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장천린이 천인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계묵, 세천상유(細天常有)란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느냐?" 

"세천... 상유... 세천......!" 

중얼거리던 원계묵의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해남도에서 본 그 자 말입니까?" 

장천린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천인단에서 가장 잔혹한 인물이 바로 세천상유다 

.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해남도에 왔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 황금 때문에 왔는지 

아니면 왜국의 내부문제 때문인지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들은 그후로 소식이 없 

었다." 

"......."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천인단은 모두 백팔인(百八人)이다. 그들은 왜국 정통의 인자 

술을 익히고 있는 정예들이다. 또한 가장 기이한 것은 바로 천인단의 단주(團主)다. 

"......?" 

"그 자는 뜻밖에도 나이가 어린 인물로 석정일랑(石井一郞)이란 자다. 그는 과거 멸

54 바로북 99

망한 풍신막부에 속했던 대장군의 맥을 이은 귀족 출신이다." 

원계묵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한동안 그 자는 덕천가강을 무너뜨리려 부심하는 것 같았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중 

원으로 건너왔다." 

장천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짐작컨대 그 이유는 복수 때문일 것이다." 

원계묵은 눈을 크게 떴다. 

"복수?" 

"해남도 사건으로 인해 석정 일행은 대부분 죽었다. 그들을 죽인 자는 해적 집단인 

검은 바람이었지." 

"......!" 

"금월(金月)이란 자가 바로 검은 바람의 수령이다. 그런데 현재 그 자는 조화성에 

들어가 있다." 

원계묵은 비로소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금월을 죽이기 위해? 중원으로 건너왔단 말입니까?" 

"그렇지. 결국 천인단도 조화성과 숙적인 셈이지. 그래서 나는 그들을 끌어들일 생 

각을 했다." 

원계묵은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형님께선 어떻게 이 사실을 자세히 알고 계실까?' 

사실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장천린은 조화성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은 장미림의 첩자인 조 

옥령이 조화성에 머물고 있기 때문으로, 그녀를 통해 조화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 

세히 보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계묵, 동정호로 가라. 거기서 석정일랑을 만나 내 뜻을 전해라. 아마 그는 거절하 

지 않을 것이다."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내일 떠나겠습니다." 

"수고해 다오." 

장천린은 문득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이 끝나면 문완과 결혼식을 올리게." 

원계묵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띵... 띠딩... 띵....... 

55 바로북 99

아름다운 음악은 사람의 감정을 부드럽고 감미롭게 이끌어 준다. 

동방옥의 비파 솜씨는 가히 악선(樂仙)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장천린은 내실에서 백호피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동방옥이 탄주하는 비파음 

을 듣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미녀들이 붙어 앉아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배가 제법 불러 보이는 황보 

설연과 유리공녀, 천사예 등이었다. 

비파음에 취한 듯 여인들은 모두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유리공녀는 완전 

히 도취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중원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악기(樂器)에 대해 지대한 관 

심을 가지고 있어 요즘 들어 동방옥으로부터 비파를 배우는 중이었다. 

장천린은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안온한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리 하루의 일 

과가 고달파도 그를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피로가 씻은 듯이 가 

셨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문득 급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운표의 다급한 음성이 전해졌다. 

"용대인! 급한 일입니다!" 

장천린은 감았던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호연경이 돌아왔습니다!" 

장천린은 안색이 변하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 어디 있느냐?" 

"대청에 있습니다." 

장천린은 미간을 좁히며 내심 중얼거렸다. 

'호연경은 이 년 전 떠났는데 이제야 돌아오다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간다고 일러라!" 

호연경은 실로 눈뜨고 못 볼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는 혼자 서있기도 불가능한 상태로 황계와 조충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전신 

이 온통 넝마처럼 너덜너덜해 진데다 한쪽 다리는 절단되어 있었다. 

"용대인......!" 

그는 무릎을 꿇으려 했다. 장천린은 급히 그의 몸을 부축했다. 

"이럴 것 없네. 대체 어찌된 일인지 말해 보게." 

그는 호연경을 바닥에 눕혔다. 

56 바로북 99

다리가 절단된 터라 세워두기도 앉히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호연경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어찌나 깡말랐는지 뼈만 앙상했으며 두 눈도 움푹 꺼져 들어 

가 있었다. 

"이제야 돌아와 죄송합니다, 용대인." 

장천린은 가슴이 찡한 것을 느꼈다. 

그는 새삼 백살대의 강한 충성심과 의지를 확인했다. 그는 이 년 전부터 그의 모습 

이 보이지 않자 원계묵에게 물었었다. 그러자 비로소 원계묵이 그에게 부금진을 미 

행하도록 지시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이 년이 넘도록 그가 돌아오지 않자 필경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감동마저 느꼈다. 

'과연 백살대다.' 

호연경은 숨을 헐떡거리다 간신히 진정되자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장천린 원계묵의 명으로 부금진의 뒤를 미행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호연경 

은 본래 추적술을 익혔으므로 약아빠진 부금진 조차도 그의 미행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는 끈질기게 미행한 끝에 마침내 부금진이 한 노인을 만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 

다. 놀랍게도 그 노인은 부금진의 부친인 취헌(醉軒) 부백경이었다. 

호연경은 갈등했다. 

계속 부금진을 미행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부백경을 미행해야할 것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부백경을 미행하기로 했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 

때문이었다. 

과연 부백경은 이상했다. 

길을 가는 동안 부백경의 얼굴이 매일같이 바뀌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부백경의 

변신술이 거의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농부로, 때로는 중년문사로, 때로는 늙 

은 거지로 변신하는 그를 알아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호연경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를 미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연경 잠 한 숨 

안 자면서 집요하게 그를 추적했기에 간신히 놓치지 않고 따라 잡을 수가 있었다. 

얼마나 미행했을까? 

수없이 모습을 바꾼 끝에 부백경이 찾아간 곳은 뜻밖에도 장미가 만발한 한 화원이 

었다. 

그곳은 바로 장미림(薔薇林)이었다. 

그곳에서 부백경은 장미림의 주인인 희사를 만났다. 호연경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그만 실수로 희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희사로부터 한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 다행히 다리 하나를 잃은 

57 바로북 99

채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상을 치료하느라 꽤 오랜 시일을 소모해야만 

했다. 

호연경은 그래도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외다리가 된 상태에서도 끈 

질기게 장미림 주위를 맴돌며 취헌 부백경을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뜻밖의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것은 강북 상계의 거봉인 옥류향이 장미림을 방문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 

백경을 만났다. 호연경은 옥류향과 부백경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 

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힐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한계를 느끼고 서둘러 구룡장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호연경의 말이 끝났다. 

장천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부백경이 장미림의 희사와 친하고... 옥류향이 부백경을 만난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설정할 수 없었 

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상념에 잠겼던 그는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른다.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눈길을 호연경에게 옮겼다. 

호연경은 보고를 마친 후 혼절해 있었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이 지경이 되고도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니 

......!' 

그는 호연경의 충성심에 탄복했다. 그것은 백살대의 용맹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이 

런 백살대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켰다. 

"운표, 호연경을 치료하고 극진히 대우해 주어라.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어라." 

운표는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용대인." 

장천린은 대청을 빠져 나와 낭하를 걸어갔다. 

사위가 조용했다. 그는 대청을 끼고 길게 뻗어있는 낭하를 걸어가며 상념에 잠겼다. 

'결국 모든 것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안개에 가려져 있던 일들이 조

58 바로북 99

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아울러 그 동안 추진했던 일들도 체계를 갖 

추어 간다. 이제 남은 것은.......' 

장천린은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창천이 눈을 부시게 했다. 아득한 창공 위에서 까만 점 하나가 선 

회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익어가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기지개를 켜는 일이다.' 

장천린의 눈에서 신광이 번쩍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조용했던 밤하늘에서 성좌(星

座) 하나가 급격히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독수리는 상공을 선회하다 먹이를 발견했는지 어딘가로 급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59 바로북 9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