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9장 환광(幻光)의 도법 (81/87)

제29장 환광(幻光)의 도법 

천유객점(天遊客店). 

객점의 후원에 있는 별실(別室)에서 봉두난발의 사나이가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내게 아직도 이런 의미가 남아 있었다니......." 

방 한쪽에 사검(邪劍) 막청이 우뚝 서있다. 그는 탁자에 앉아있는 사나이를 바라보 

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술주정뱅이거나 거지 중의 상거지로밖에 볼 수 없는 사내. 

무정도(無情刀) 모용초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제일의 미남자였던 그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흐흐! 그렇군. 혁련노후의 복수를 끝내는 일을 잠시 잊고 있었군." 

모용초의 시커멓게 때에 절은 손에는 한 장의 첩지(帖紙)가 들려 있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진강(鎭江) 백하사(白河沙)에서 만나 은원(恩怨)을 청산하자. 

마도(魔刀) 원계묵(元桂默).> 

모용초의 술에 찌들대로 찌든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첩지를 들여다보 

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마도와 무정도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일전(一戰)이지." 

막청이 차갑게 말했다. 

"모용초, 정신이 있느냐? 그런 몸 상태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것이냐? 네 손을 봐라!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 

모용초의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수전증(手顫症)이었다. 

칼을 쓰는 자에게 있어 수전증은 치명적이다. 간발의 차이로 목이 날아가는 비정한 

승부세계에서 수전증이 있는 상태로 어찌 대결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모용초는 변했다. 

과거의 그는 완전히 사라졌고 이젠 폐인(廢人)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신산을 죽인 

후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 주원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후취영의 환상에서 헤 

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일 년여 동안, 막청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이유는 그를 보호하기 위 

해서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마도 원계묵이 아니라 일개 평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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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낭인무사라도 모용초를 쉽게 죽일 수 있었다. 

"흐흐... 염려 말게, 막청. 나는 무정도일세. 무정도......." 

모용초는 괴소를 흘리며 일어섰다. 그는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탁 

자 주변에는 빈 술병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흐흐... 마도... 오냐. 널 베어 진정한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가 누군지를 가르쳐 

주마." 

그는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막청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서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웩웩거리며 토하 

는 소리가 들렸다. 

막청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안 되는 일이야......."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모용초는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욕실에 들어간지 만 하루가 지났다. 

그 동안 밖에서는 끊임없이 불을 때고 있었다. 

물은 뜨거웠다. 웬만한 사람은 발을 담그기도 힘들 정도다. 그는 탕 속에 몸을 담근 

채 하루종일 나오지 않았다. 그는 운기(運氣)로 신체의 모공(毛孔)을 몽땅 열어놓 

은 상태였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는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겼다. 그것은 술냄새였다 

'주기(酒氣)를 뽑아내야 한다.' 

모용초의 두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탕 속의 물은 처음에는 맑은 색이었으나 지금은 탁하게 변해 있었다. 일 년 이상을 

술독에 빠져 있던 그의 신체는 주독(酒毒)에 절을 대로 절어 있었다. 그는 마도 원 

계묵과의 대전에 앞서 주독을 뽑아내는 중이었다. 

달달달....... 

떨린다. 

젓가락을 잡은 손이, 아니 손가락 끝이 떨고 있다. 

젓가락 끝은 둥글었다. 그 젓가락으로 구슬(珠)을 집고 있었다. 간신히 집었다 싶으 

면 떨어졌다. 떨구고... 다시 집고... 힘들게 집은 구슬은 한 알씩 다른 그릇에 옮 

겼다. 

모용초는 젓가락으로 구슬을 집어 옮기는 행위를 반복했다. 하룻밤 내내 수백 번이 

나 반복했다. 

둥근 젓가락으로 구슬 삼백 개를 집어 옮기는 작업은 보통 사람이 하기에도 힘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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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하물며 수전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힘들 것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 

었다. 

새벽이 밝아왔을 때, 모용초는 손을 떨지 않게 되었다. 비로소 쉽게 구슬을 옮길 수 

가 있었다. 

쿠쿵! 쿵......! 

폭포수다. 

이른 아침의 폭포수는 얼음처럼 차갑다. 계절은 벌써 초동(初冬)으로 접어들고 있었 

다.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전신으로 맞으며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모용 

초였다. 

그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는데 손에 장도(長刀)를 움켜쥐고 벌써 한 시 

진이 넘도록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아직도 탁했다. 

'탁기(濁氣)를 몰아내고 정신을 통일시켜야 한다.' 

쏴아아아! 

알몸 위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의 압력은 가히 천근이었다. 그는 수압을 견디며 계 

속 버티고 있었다. 그가 딛고 있는 흑암(黑巖)에는 한 치 깊이 족인(足印)이 새겨져 

있었다. 

두 손으로 움켜쥔 장도는 정확히 그의 미간 사이에 치켜세워져 있다. 그는 칼날을 

통해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포수 맞은편에 막청이 팔짱을 낀 채 서있는 것이 보였다. 폭포수로 인해 그의 모 

습이 뿌옇게 보였다. 

모용초의 눈이 문득 빛났다. 

"마도......."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다음 순간 눈앞의 칼이 사라졌다. 대신 막청의 모습이 뚜렷 

이 보였다. 

"타......!" 

번쩍! 

그의 칼이 막청을 베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막청의 모습이 원계묵으로 보였다. 

"......!" 

막청은 눈을 크게 떴다. 

폭포수가 도광(刀光)이 번쩍인 순간 중도에서 끊어진 것이 아닌가? 비록 찰나적인 

순간이었으나 분명 폭포수는 비단천이 갈라지듯 끊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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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 쿠쿠쿵......! 

폭포수는 변함없이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려 방금 전에 본 것이 환각(幻覺)이 아닌 

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막청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착각을 한 것일까?' 

이때였다. 

"으하하하하하핫......!" 

돌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슈파... 앗! 

모용초의 몸이 도신일체(刀身一體)가 되어 빛살처럼 쏘아 나왔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막청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축... 축하해야 하나?" 

물을 뚝뚝 흘리는 모용초를 바라보며 막청은 쓰디쓰게 웃었다. 

아무 것도 입고있지 않은 모용초의 전신에는 살얼음이 덮여 있었다. 그런 모용초의 

눈빛은 과거처럼 무심무정(無心無情)했다. 

그는 칼을 도집에 꽂으며 말했다. 

"이제 준비가 끝났네." 

모용초는 옷을 입었다. 

그의 손을 유심히 살펴본 막청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손을 떨지는 않는군.' 

정오(正午). 

진강(鎭江)의 백하사(白河沙)는 강 하류에 널려 있는 모래톱의 이름이다. 이곳의 모 

래는 유난히 희어 햇볕을 받으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곤 했다. 

쏴아....... 

진강의 물결이 초겨울의 햇살을 받아 물고기의 편린처럼 빛나고 있었다. 

멀리 백사장에 두 개의 검은 점이 나타났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왔다. 

"만일 내가 죽으면... 유골을 항주(抗州)의 화가영에게 전해주게." 

나란히 걷던 모용초의 말이었다. 막청은 흠칫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불길한 말을......?" 

"오랫동안 방황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후취영은 나의 꿈이었고 목표였고, 삶 그 

자체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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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그녀가 타락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네. 그때부터 나는 타인의 행 

복을 증오하게 되었네. 특히 행복해 보이는 여인이라면 무조건 망치려 들었지." 

모용초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후취영이 미쳐버린 이유를 알았을 때 나 자신도 돌아버리는 줄 알았네. 그래서 결 

국... 그녀를 망치게 한 신산을 죽였네." 

"......." 

"신산을 죽이고 나니 더욱 허전해지더군. 더 이상 삶의 희망도 목적도 상실한 채 나 

는 끊임없이 썩어갔지. 내 몸을 괴롭힘으로써 시름을 잊으려 하였네." 

모용초의 눈길은 하얗게 반짝이는 진강의 수면으로 향했다. 

"하나 이제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네. 후취영의 죽음으로 은과 원은 

다 끝났네." 

막청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진정인가?" 

"후후... 이제는 다른 여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네. 바로......." 

"후훗... 가영낭자 말인가?" 

모용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특이한 여인이네. 그리고 나... 모용초를 사랑해 줄 유일한 여자네." 

그는 막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만일 원계묵을 죽이게 되면 그 즉시 조화성을 떠나겠네. 아니, 십삼사에서도 내 이 

름을 지우겠네." 

막청의 안색이 변했다. 

"자네가 대신 성주께 전해주게. 모용초는 죽었다고. 아니면......." 

모용초의 눈은 백사장으로 향했다. 

백사장 한 가운데 누군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도(魔

刀) 원계묵이었다. 그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나이에 의해 내가 죽는다면... 아까 말한 대로 실행해 주기 바라네." 

"모용초......." 

"후후... 마음이 편하네. 일찍이 수십 년간 이렇게 편해보기는 처음이네." 

모용초는 웃었다. 창백한 그의 얼굴이 문득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천하제일의 미남자로, 일세를 풍미한 풍류객(風流客)으로서의 그의 일생은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온통 증오와 한(恨)이 점철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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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생의 진정한 의미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데 있는 것이라고. 

...... 

태양은 중천(中天)에 떠올랐다. 

두 사나이. 

어쩌면 대륙(大陸)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를 두 사나이의 머리 위에서 초겨울의 햇살 

은 바랜 듯한 희미한 빛을 뿌렸다. 

"......!" 

원계묵은 놀랐다. 

듣기로 무정도 모용초는 폐인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한데 지금 그의 눈앞에 서있 

는 모용초는 다소 창백한 안색에 수척해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그런 느 

낌이 들지 않았다. 

모용초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는 원계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나이는 적었으나 대종사(大宗師)의 기 

도가 풍기고 있었다. 

두 사나이는 서로를 주시했다. 

한데 기이한 것은 그들의 눈빛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서로의 눈을 보는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서 적개심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또 하나의 자기(自己), 그들은 상대의 눈에서 바로 그것을 본 것이다. 

원계묵은 어깨에 걸고 있던 장도를 내리며 공수했다. 

"만나서 반갑소, 모용선배." 

그는 존칭을 썼다. 그의 입에서 존칭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용초도 마주 예를 표했다. 

"동감이오. 원대협." 

그것이 끝이었다. 그들 사이에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태양은 정확히 그들의 중간지점에 떠 있었다. 

진강의 물결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마주선 채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화석이라도 된 

듯했다. 

막청은 지루함을 느꼈다. 그는 눈이 피로해졌다. 너무나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탓이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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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원계묵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따라서 모용초의 눈에는 정면으로 햇빛이 비쳤 

다. 그 광경에 막청은 미소 지었다. 아주 오래 전 모용초와 비무(比武)하던 광경이 

기억 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때 그는 해를 등지고 있었다. 그는 정면으로 해를 바라보는 모용초가 당연히 불리 

하므로 자신이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막상 칼을 나누었을 때, 그는 모용초가 교묘히 도신(刀身)을 틀어 햇볕을 반사 

시키는 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칼등으로 어깨를 맞았던 것이다. 

'어쩌면.......' 

막청은 희망을 느꼈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이 칼을 뽑은 것이다. 

원계묵은 모용초가 칼을 뽑는 동작을 예의주시하며 장도를 뽑았다. 그는 칼을 수평 

으로 뻗으며 중단으로 겨누었다. 반면 모용초는 두 손으로 칼을 잡은 채 상단, 즉 

미간 사이로 칼을 세웠다.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터져 나갈 듯이 팽팽해졌다. 어느 덧 두 사람의 귀에는 진강 

의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이 울리는 고동소리와 혈관을 타고 점 

점 빨라지는 피의 흐름을 느낄 뿐이었다. 

문득 원계묵은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태양광(太陽光)! 모용초가 미간 사이로 세운 칼에 반사된 태양이 눈부신 빛을 발산 

한 것이다. 

"......!" 

그는 눈이 시렸다. 그래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고수의 싸움은 순식간에 결정 나 

기 때문이었다. 반사광은 너무나 부셔 그의 눈을 아프게 할 정도였다. 

'조금만... 상대가 움직이면 단칼에 벤다.' 

원계묵은 수평으로 뻗은 칼에 힘을 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앗!' 

원계묵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없어졌다. 햇살이 마치 한 곳에 뭉쳐진 듯 황금의 광선이 모용초의 칼 주위로 모이 

는 듯한 순간에... 칼도, 모용초도 사라진 것이다. 

"타......!" 

싸늘한 냉갈이 들린 것은 그의 머리 위에서였다. 

모용초는 도약했다. 그는 미간에 올린 칼이 태양광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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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얼마 전 폭포수에서 체득한 새로운 도법(刀法)이었다. 

지금 그의 눈 아래로 원계묵이 똑똑히 보였다. 원계묵은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을 보 

이고 있었다. 모용초는 공중에 뜬 채 칼을 휘둘렀다. 

'베었다!' 

그는 원계묵이 정확히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을 보았다. 분명히 그는 원계묵을 벤 것 

이다. 

"이겼다......." 

그의 입에서 만족스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주르르....... 

문득 피보라가 황금빛 노을 속에서 환상처럼 피어올랐다. 

쿠웅! 

쓰러졌다. 마침내 도(刀)의 제일인자가 쓰러진 것이다. 

"헉!" 

막청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모용초는 원계묵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칼은 원계묵을 겨누었고 

내려치기만 하면 원계묵은 양단될 것으로 보였다. 

한데 착각이었을까? 

눈부신 도광(刀光)이 지면에서 하늘을 향해 뻗은 것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장면 

이 일어났다.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친구의 몸이 두 동강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친구의 몸은 두 쪽으로 분리되어 피보라와 함께 떨어졌다. 

"......." 

원계묵은 장도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가슴이 허전했다. 

장도 끝으로 핏방울이 타고 내려와 하얀 모래에 점점이 피꽃을 수놓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모용초. 훌륭한 도법이었소. 다만 안타까운 것은 당신이 본 것이 빛무리가 이루어 

낸 환각에 불과했다는 것이오. 당신은 환영을 베는 데 그친 것이오." 

두 동강이가 난 모용초의 시신을 끌어안고 막청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원계묵을 노려보며 말했다. 

"원계묵, 지금 너와 싸우지 않겠다. 왜냐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패하면 사 

랑하는 친구의 시신을 거둘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막청의 눈에서 복수심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반드시... 널 죽이겠다! 기억해 둬라. 반드시... 친구의 목숨을 돌려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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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묵은 칼을 회수했다.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소." 

그는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석양(夕陽)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갔다. 

"크으윽... 놈... 정말 강하다! 하나 널 기어이 꺾고 말겠다!" 

막청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솟아났다. 

그는 소리 죽여 오열하며 모용초의 동강난 시신을 옷자락으로 묶은 후 들쳐업었다. 

그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갔다. 석양과 반대 방향으로. 

이 시대에서 가장 위대했던 도(刀)의 고수. 무정도 모용초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날씨는 점점 더 쌀쌀해지고 있었다. 

강남 상계(商界)의 본령이랄 수 있는 구룡장원(九龍莊院)에는 느닷없이 많은 사람들 

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으로 미루어볼 때 거의 모두 상인들로 보였다. 

구룡장원이 강남 상계의 거목이니 그런 모습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누 

가 알겠는가? 겉은 상인이되 그들의 실체(實體)는......? 

장천린은 내실에서 백호피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예정대로 거의 대부분 모였습니다." 

낙수범이 공손히 서서 보고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방주(太 主)의 수완이 놀랍군. 구파일방 중 콧대가 높기로 정평이 나있는 소림 

과 무당까지 말을 듣게 만들다니......." 

낙수범은 빙그레 웃었다. 

"모두 용대인께서 배후에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흠, 그들이 상인으로 가장하고 본장에 모여든 것을 이상히 여기는 자는 없을까?" 

낙수범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미리 손을 써 놓았습니다. 성내와 인근의 시진에 많 

은 물품을 풀어 각처의 상인들을 모여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구파일방의 인 

물들이 본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수범." 

"네?" 

장천린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사람을 참 잘 골랐다는 느낌이 드네.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숨은 재능을 

보았는데 지금 기대 이상으로 잘해내고 있지 않은가?" 

낙수범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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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용대인의 덕분입니다." 

"하하하......!" 

"......?" 

"수범, 그대의 소원이 목장을 직접 경영하는 것이라고 했지 않은가? 내년쯤에는 한 

곳에 마련해 보도록 하게." 

낙수범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나타났다. 

"용대인......." 

"하하하! 이제 구룡장원은 그대가 할 일이 별로 없네. 그대가 독립해도 무방할 때가 

되었네." 

"대인......." 

고개 숙인 낙수범의 얼굴에 감동의 물결이 번졌다. 

"형님, 돌아왔습니다." 

"아, 계묵인가? 잠시만 기다리게." 

장천린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품에 안겨있던 동방옥이 살짝 눈을 흘겼다. 

"아이... 원대협은 눈치도......."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장천린이 그녀의 유두를 살짝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 

람은 이제 막 잠자리에 들어 사랑의 행위에 돌입하려는 찰나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다녀와서 화끈하게 해줄 테니." 

"어머......!" 

동방옥은 그의 저속한 말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황급히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썼 

다. 

구룡전(九龍殿). 

이곳은 구룡장원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그대가 석정일랑(石井一郞)인가?" 

장천린은 흑포를 입은 한 청년을 주시하며 물었다. 

그는 영준한 용모에 귀골(貴骨)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의 옆에는 세천상유(細天

常有)가 서 있었다. 그는 애꾸눈에 검은 안대를 두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용백군 대인?" 

"그렇소." 

장천린은 석정일랑을 보고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느꼈다. 

한편 세천상유는 장천린이 초면이 아니었다. 그는 애꾸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경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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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석정일랑, 내가 그대의 천인단(天忍團)을 통째로 사겠다. 어떤가?" 

장천린의 제의에 석정일랑의 무심한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의외로 그의 한어(漢語)는 유창했다. 

"저는 당신이 천인단을 통째로 사는 데 그 능력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나......." 

그는 장천린을 정시했다. 

"가격보다도 우리에게는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대인께서 조화성을 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조화성에 있는 해적 

집단 검은 바람의 두목 금월(金月)과 그의 수하 오교(五蛟)를 넘겨주십시오." 

장천린은 눈빛을 번쩍였다.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그 일념만으로 이국 땅에 왔습니다." 

장천린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하핫......!" 

석정일랑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장천린은 문득 냉엄한 어조로 말했다. 

"만일 그대가 청부를 거절하거나 분수를 모르고 날뛰었다면 그대들은 물론 천인단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석정일랑의 안색이 변했다. 세천상유는 칼자루에 손을 갖다댔다. 여차하면 출수할 

기세였다. 

"그대들이 중원에 허락 없이 들어와 청부살인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면 이 땅은 이족들이 멋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천린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위엄이 넘치고 

있었다. 

"하나 그대는 내게 순순히 응했고 또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좋다. 들어준다. 그 대 

신 복수를 끝낸 후 그대들의 나라로 돌아가라." 

"으으......." 

세천상유는 분노를 참지 못한 듯 얼굴에 심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석정일랑은 달 

랐다. 그는 정중히 포권했다. 

"고맙습니다. 대인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금월과 그의 수하들을 죽인 후 바로 떠 

나겠습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그대들을 고용하는 대가로 일인 당 은자 만냥(萬兩)씩 계산하여 도합 백만 냥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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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 

세천상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석정일랑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는 중원의 방식으로 정중히 공수를 

표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음, 차후 부르겠네." 

석정일랑은 다시 한 번 공수한 후 물러갔다. 

그가 물러간 후, 장천린의 옆에 서있던 원계묵은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장천린은 기소를 흘렸다. 

"후후... 계묵, 석정일랑의 눈빛을 보지 못했는가? 그는 보통인물이 아니다. 이렇게 

기를 꺾어 놓아야 그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장천린은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야겠네. 소옥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걸세. 하하하하핫!" 

"......!" 

원계묵은 내전으로 걸어가는 장천린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탄복과 존경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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