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0장 벗겨지는 신비(神秘) (82/87)

제30장 벗겨지는 신비(神秘) 

방의 분위기는 기이했다. 

단 한 개의 촛불이 벽과 벽이 이어지는 사각에서 소리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방은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암회색의 절망적인 빛 속에 잠겨 있었다. 

방 안에 한 사람이 있었다. 

사검(邪劍) 막청이다. 

그의 두 눈은 극도로 무심했다. 표정은 마치 굳어버린 석고처럼 무표정하여 도무지 

인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방 안의 절망적인 분위기와 막청의 모습은 한 덩어리가 되어 더 이상 내 

려갈 수 없는 절망의 심연 속으로 끝없이 침몰하는 것 같았다. 

막청은 두 손에 상자를 받쳐들고 있었다. 작은 상자였다. 

흰 비단 천으로 감싸진 상자는 한 인간의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 막청은 유골(遺骨) 

이 든 상자를 든 채 말없이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 

한 사내가 막청의 손에 들려진 유골상자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다. 

마교의 소종사이자 마교십삼사의 일원이기도 한 담자개가 초승달 눈 모양의 가면을 

쓰고 바위처럼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유골상자에 못 박혀 있었다. 

"......."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 

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두 사람의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한 사람의 죽음을 세 치 

혀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담자개는 떨리는 손을 뻗어 유골상자를 잡았다. 그의 입에서 억눌렸던 감정이 토해 

져 나왔다. 

"이것이... 진정 모용형님이란 말입니까?" 

막청은 억양을 잃어버린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소종사." 

상자를 잡고 있는 담자개의 손이 거센 떨림을 일으켰다. 

"믿을 수가 없어... 그토록 강하시던 형님이......." 

"모용초는 무공에서 진 것이 아니오. 단지 운명이 그의 편에 서지 않았을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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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자개는 떨리는 손끝으로 유골상자를 더듬었다. 마치 모용초의 영혼을 더듬어 보려 

는 듯이. 하지만 이미 한 줌의 재로 변한 모용초의 영혼은 아픔으로 그의 가슴을 젖 

게 할뿐이었다. 

'형님.......' 

담자개는 절망으로 텅 비어버린 시선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누굽니까?" 

"원계묵." 

"마도?" 

"그렇소, 마도 원계묵이오." 

담자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절망의 빛으로 채색된 허공을 노려보며 힘없는 웃 

음을 흘렸다. 

"취영누님이 돌아가시고... 이제는 형님마저... 푸후후후......." 

담자개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마치 회색의 하늘처럼 암울한 빛이었다. 

막청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모용초란 이름도 역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게 됐소. 나와 소종사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 

"하지만 나 막청은 모용초란 인간이 이대로 스러져 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소. 

담자개는 암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의 괴괴한 빛 속에서 막청은 화석처 

럼 보였다. 

"모용초의 소원을 풀어주고... 원계묵과 싸울 것이오." 

막청은 느릿하게 손을 내밀었다. 

"소종사, 이만 가보겠소." 

"형님의 유골은 어디로?" 

"소종사, 그곳은 모용초의 작은 행복이 깃든 곳이오. 평생을 불행이란 숙명에 이끌 

려 살아온 그였지만 죽어서나마 작은 행복을 찾기를 바랄 뿐이오." 

담자개는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왜 죽어서야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왜 살아서는 불행해야 하는 것일까.... 

..?" 

중얼거리는 담자개의 손에서 막청은 유골상자를 느릿하게 빼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우리 십삼사는 공동운명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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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자개는 더욱 무력하게 중얼거렸다. 

"죽은 자는 무엇을 남겼고... 살아있는 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막청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한 인간의 죽음을 안고 있 

기에 그의 뒷모습은 어둠보다 짙은 허무에 싸여 있었다. 

"푸흐흐흐......." 

담자개는 나직이 웃었다. 

그 웃음은 황폐했다. 마치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그렇게 황폐했다. 끝없는 절망 

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신은... 대체 우리에게 얼마나 더 잔인할 것인가?" 

담자개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황폐한 웃음을 그치지 않았 

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마지막 결단 뿐인가?" 

초승달 속에 숨어있는 두 눈에서는 이슬이 어리고 있었다. 

장천린은 처소에 조촐한 술상을 마련하고 부금진을 불렀다. 

미소녀와도 같은 부금진의 얼굴에는 어느덧 은은한 주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두 사 

람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그 동안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금진은 술잔을 들다 궁금한 듯 물었다. 

'사문도 형님이 며칠째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음, 어디 좀 다녀온다고 했다." 

장천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부금진은 염려스러운 모양이었다. 

"며칠 전 보니 무척 심각한 표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인가 중대한 일이 있는 듯 

합니다." 

장천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문도는 자제력이 강하다. 별일 없을 것이다." 

그는 웃음을 거두며 부금진을 정시했다. 

"소진." 

"네......?" 

"너와 내가 만난 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 

부금진은 잠시 생각해 본 후 대답했다. 

"벌써 오 년째입니다." 

부금진의 발그레한 얼굴에 감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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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 나이 십육 세였는데 지금은 벌써 이십 일 세가 되었습니다."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소진, 너도 얼마 안 있어 가정을 이루어야겠구나." 

부금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 문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장천린은 술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 

"소진 너와 만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 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구 

나." 

부금진의 준미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너무 신비하다. 모든 것이 안개에 가려져 있는 듯 하단 말이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켰다. 부금진의 안면이 경직되었다. 

"오늘 널 부른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 때문이다." 

장천린은 부금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장미림(薔薇林)의 희사를 아느냐?" 

부금진의 어깨 근육이 심하게 경련했다. 

"표상아, 감운경, 조옥령 등도 알겠지?" 

부금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눈을 들어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장천린의 눈빛은 깊고도 고요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의 내심을 측정하기란 불가 

능했다. 

"소진, 봐라." 

장천린은 벽으로 걸어가더니 검가에서 검을 들어 뽑았다. 발검(拔劍) 하자마자 그는 

한 가지 검법을 시연(試演)해 보였다. 

환상처럼 검광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환우구검( 宇九劍) 중 

기수식이었다. 

"이 검법을 아느냐?" 

"......!" 

부금진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장천린은 검을 거둔 후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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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 너의 아버님인 취헌 어른은 지난 수십 년간 무림활동을 안한 것으로 되어있 

다. 하나 실상 그 분은 누구보다도 많은 활동을 하셨다." 

부금진의 짙은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저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것입니까?" 

"무영(無影)에 대한 모든 것이다." 

부금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침묵을 지켰 

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침묵이 흘렀다. 

장천린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고개 숙인 부금진의 안색은 몇 차례 변화 

를 일으켰다. 심한 갈등을 겪고 있음이 분명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금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아버님은... 섬서삼변 총독 자리를 물러나신 후 중원을 유랑하셨습니다. 그러다 우 

연히... 두 사람을 만나게 되어 의기가 투합했지요." 

부금진의 음성은 가늘었다. 그는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장천린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진, 말하기 힘들면 그만 두어도 좋다." 

부금진은 심호흡을 두 번 한 후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님께서 만난 두 사람은 바로 신산과... 염무였습니다. 그 분들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능력에 반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각자가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으 

면서도 하나의 괴물과 같은 단체를 공동으로 창조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장천린은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그것이... 바로 조화성입니다. 아버님은... 무영 고검령이란 새로운 신분으로 활동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부금진의 음성은 갈수록 차분해지고 있었다. 파랑이 일던 그의 눈빛도 점차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님은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애초부터 염무가 마교의 대종사임을 알고 

계셨지요. 그러면서도 염무를 도와 조화성을 세운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습니 

다." 

부금진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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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시종일관 담담하기 만한 표정이었다. 

부금진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준미한 얼굴에는 한 가닥 그늘이 드리워지 

고 있었다. 

"하지만 염무의 야심은 아버님의 생각보다 컸습니다. 결국 아버님은 위기를 느끼고 

신산과 함께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 

"염무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 후 아버님은 신산과 손잡고 오성단을 비롯하여 많은 고 

수들을 길러내 염무와 상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염무의 힘이 갈수록 팽배해지자.. 

. 아버님은 은거해 버렸습니다." 

"......." 

"그 시기에 아버님은 어머님을 만나셨지요." 

문득 부금진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바로 장미림의 주인인 희사... 그 분이 저의 어머님이십니다." 

부금진은 그 말을 마친 후 고개를 푹 떨구었다. 

무영 고검령, 아니 부백경! 

그는 개성이 강할 뿐더러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희사 

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희사는 온갖 정성을 쏟아 부백경을 사랑했다. 당시만 해도 그녀의 그런 감정은 지극 

히 순수한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부백경이 무영 고검령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 

다. 

마침내 희사의 헌신적인 사랑은 부백경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버렸다. 그 후 두 

사람은 결합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게 이어져 나갔다. 

그러나 행복은 얼마가지 않아 곧 깨지고 말았다. 결합한 지 일 년이 지난 후 부백경 

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장미림에 붙어있는 것을 못 견뎌 했던 것이다 

결국 방랑의 기질을 버리지 못한 그는 장미림을 떠났고, 천애(天涯)를 떠돌며 유랑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이 계속 바깥으로 나돌자 희사의 결혼생활은 불행해 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녀의 순수한 애정도 차츰 식게 되었다. 대신 남편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원망만이 

가슴에 가득 차게 되었다. 원망은 차츰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로 자리잡게 되었다. 

희사 역시 부백경 만큼이나 개성이 강한 여인이었다. 결국 그녀는 더 이상 부백경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첫 아들 부금진을 출산한 직후. 

그녀는 숱한 남자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부백경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괴로움을 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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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몰랐다. 결국 그때부터 장미림에는 끊임없이 남자들 

이 드나들게 되었다. 

희사는 본래 그리 착한 여인이 아니었다. 만일 부백경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 

떤 모습이 되었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백경이 그녀를 버려둔 채 천애를 

떠도는 방랑자가 되어있는 동안 희사는 점차 요화(妖花)가 되어가고 말았다. 

그런 모친의 방탕한 모습을 보고 자란 부금진은 날이 갈수록 모친에 대한 혐오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희사가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다른 남자를 침실로 불러들여 열락의 신 

음을 발하며 몸부림치는 모친의 부도덕한 행위를 볼 때마다 그의 가슴은 온통 분노 

와 증오로 끓어올랐다. 

그는 매일 모친상을 조각했다. 그리고 완성된 조각을 처참하게 망가뜨림으로써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증오를 표현하곤 했다. 부금진의 어린 날은 그렇게 채색되었던 것 

이다. 

"어머님은... 날 아버님에 대한 미움의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부금진의 안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버님은 날 남자답게 키우라고 어머님께 당부하셨지요. 하지만 어머님은 앙갚음이 

라도 하듯 그 분의 양녀인 네 소녀와 함께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게 하면서 여장을 

시켜 키웠습니다." 

장천린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금진의 과거야말로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절한 것이었다. 그는 비로소 

부금진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와도 같은 장막의 내력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부금진은 현명한 소년이었다. 

그는 십오 세가 되자 더 이상 자신의 구속된 삶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장미림을 뛰쳐나와 천하를 헤매며 부친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도 원계묵을 만나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접근하게 되었다. 원계묵을 만 

나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장천린까지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부금진의 

삶의 역정이었다. 

장천린은 시종일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럼... 소진, 너는 아버님이 무영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느냐?" 

부금진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도 얼마 전에야 알았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만난 것은 선인대에서였습 

니다. 그곳에서 아버님은 한선생이란 신분으로 은거하고 계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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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금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용대인, 소진은 결코 대인을 속이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 이해한다. 너는 좋은 녀석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건 네 아버님 무영... 

그 분도 위대한 어른이시다." 

부금진의 눈에 감격의 빛이 어렸다. 장천린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오늘 너의 말은 정말 고마웠다." 

부금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진, 나는 내일 갈 곳이 있어 이곳을 떠난다. 같이 가겠느냐?" 

부금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만 두겠습니다. 저는 며칠 후 장미림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을 용서해라. 누가 뭐라 해도... 자식이 부모를 미워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금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소진, 너는 장차 아버님을 능가하는 기인이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는 

다. 자, 그럼 난 나가봐야겠다." 

장천린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나간 후 부금진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의 가슴속에는 한 

기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님, 당신은 진정 위대한 분입니까?' 

그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부친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쓰디쓴 감정이 고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복우산(伏牛山) 홍엽곡(紅葉谷). 

만추(晩秋)의 단풍으로 인해 홍엽곡은 온통 타오르고 있었다. 자연의 조화가 빚은 

장관이었다. 

스스스....... 

단풍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추풍에는 왠지 허무함이 묻어있는 듯했다. 

홍엽곡 입구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장천린과 원계묵이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계곡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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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인영이 그들의 앞에 떨어지며 벼락같은 공격을 가했다.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어깨 위의 장도를 빼지도 않은 채 수도(手刀)를 뻗 

었다. 

팍! 

무엇엔가 부딪치는 듯한 파열음에 이어 참담한 비명이 울렸다. 

"크윽!" 

암습을 가한 상대는 곤두박질치며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그는 후닥닥 일어서며 이 

쪽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의 표정이 서려있었다. 

오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강직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장천린은 그를 한 눈에 알아 

보았다. 노인이야말로 다름 아닌 단심객 유유평이었던 것이다. 

원계묵은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고도 없이 공격하다니... 예의를 모르는 자로군." 

유유평은 침중한 안색으로 장천린과 원계묵을 응시했다. 

"그대들은 누군가?" 

기실 그의 놀라움은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암습을 원계묵이 단 한 수에 격퇴 

해 버린 것이 아닌가? 

이때였다. 뒤쪽에서 청아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유노인, 침입자인가요?"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바로 호연이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일신에 녹색의 경 

장(輕裝)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것이었다. 

몇 달 사이에 그녀는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 몸매 또한 늘씬해졌으며 얼굴의 피부도 

희어지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호연은 장천린과 원계묵의 아래위를 미심쩍은 듯 훑어보았다. 

그녀는 장천린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북검엽으로 행세했으므로 본 모습 

으로 돌아온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일단 두 사람을 침입자로 간주한 듯 날카로운 음성으로 다그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거친 말투에 장천린은 내심 혀를 찼다. 

'쯧! 여전히 입은 거칠군.' 

원계묵은 호연의 태도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난 본래 여자가 날뛰는 꼴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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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음산한 어투로 내뱉었다. 

"어린 계집아이가 입에 똥만 들었나 보구나." 

"뭣이?" 

호연의 눈이 상큼 치켜 올라갔다. 

"흐흥! 생긴 것은 독사 같은 작자가 꼴에 자존심은 내세우려 드는구나." 

그녀는 코웃음치며 앞으로 나섰다. 

"내 당장 네 상판을 구겨 놓아주마!"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는 다짜고짜 손바닥을 뻗어 원계묵의 얼굴을 후려쳐 왔다. 

원계묵은 냉소했다. 

"무공을 제법 하는 모양이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는 슬쩍 피하며 어깨의 장도를 뽑지도 않은 채 도집으로 호연의 엉덩이를 후려갈 

겼다. 

짝! 

"어머!" 

요란한 소리와 비명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호연은 소스라치게 놀란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과 수치 

감이 범벅이 되었다. 

쨍! 

마침내 그녀는 검을 뽑았다. 사생결단이라도 내려는 듯 만면에 살기를 등등하게 세 

우며 다가왔다. 

'이거 큰일나겠군.' 

장천린은 보다못해 나서려 했다. 

쐐애액!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호연은 이를 악물며 검을 신랄무비하게 휘둘렀던 것이다. 

원계묵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어렸다. 

"이제 보니 검을 조금 깨우쳤군." 

그의 수중에서 장도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것으로 호연의 공세를 피하며 그는 칼 

자루로 그녀의 손목을 쳐버렸다. 

"악!" 

호연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검을 놓쳐버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녀의 커다랗게 떠진 눈에는 경악과 불신의 빛이 가득 어려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이없게도 단 일 초에 검을 날려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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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움은 곧 수치로 변해 그녀의 옥용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냥 두지 않겠다!" 

그녀는 입술을 잘끈 물며 다시 검을 집어들고 원계묵을 향해 덮쳐왔다. 장천린은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원계묵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계묵, 비켜나거라." 

스스스! 

그는 표홀무의 신법을 펼쳐 유령처럼 호연의 정면으로 이동했다. 호연의 검이 난무 

하는 사이로 마치 그물을 피해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파고 들어간 그는 그녀의 손목 

을 낚아채 버렸다. 

"놔... 놔라!" 

호연은 버둥거리며 앙칼지게 외쳤다. 장천린은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호소저, 나 북검엽이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오?" 

"......!" 

호연은 멈칫하더니 황급히 장천린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당신이... 북검엽이란 말인가요?" 

그녀는 온통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실제 이름은 용백군이오." 

호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음성은 비슷한데......?" 

장천린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믿겠소? 소저는 천금동에서 벌어진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소?" 

호연은 물론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억해요." 

장천린은 낭랑하게 웃으며 당시의 일을 설명했다. 

"하하! 나는 천금동에서 청허자 노선배를 만나기 위해 소저를 안고 그곳으로 간 적 

이 있소. 당시 소저는 아주 짧은 옷을 입고 있었소. 맞소?" 

호연은 잠시 멍해지더니 곧 활짝 웃었다. 

"정말 북검엽이었군요!" 

그녀는 펄쩍 뛰며 기뻐했다. 감정의 표출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반가워 

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며 물었다. 

"청허자 노선배는 어디 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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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오세요. 그 동안 사부님께서는 용대인의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호연은 앞장서며 밝은 음성으로 재잘거렸다. 

홍엽곡 안. 

울창한 수림에 둘러싸인 곳에 한 채의 모옥이 있었다. 그곳은 과거 산곡노인이 거처 

하던 곳으로 깨끗하고 아담한 곳이었다. 

모옥 안에는 꽤 많은 인물들이 탁자를 마주한 채 둘러앉았다. 

먼저 오인의 노인이 눈에 띄었다. 

환존 산곡과 능허자, 즉 신주사성의 두 사람을 비롯하여 청허자와 남북쌍마가 그들 

이었다. 

그들 다섯 노인의 맞은편에는 장천린과 원계묵이 자리하고 있었고, 탁자 한쪽에는 

호연이 찻잔을 놓은 채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좌중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산곡노인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의 추측대로라면 염무는 과거 조화성을 세울 때의 염무가 아닐세." 

그는 나직이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염무에 관한 여러 가지 소식을 접한 바에 의하면... 염무는 지금 무서운 광성(狂性

)에 빠져있네. 무영과 신산에 대한 증오로 불타고 있는 상태일세." 

"......."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날이 갈수록 성격이 거칠고 황폐해져 가 

고 있네. 과거의 냉철하고 이지적인 그가 아닐세." 

장천린은 동감이라는 듯 말했다. 

"그 말씀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제오신마전주 사진청조차도 염무를 과거의 그와 다 

른 한낱 필부로 평가했습니다." 

남마 소진청이 궁금한 듯 물었다. 

"대체 염무가 그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오?" 

산곡노인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것은... 오직 염무 자신만이 알 뿐이네." 

이번에는 북마 합비령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흠, 염무가 그렇게 변했는데도 조화성이나 마교의 고수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또 

무엇이오?" 

이번에는 능허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도성 유백과 백마 갈훼 때문이라 할 수 있소." 

중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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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이나 갈훼가 아무리 기력이 예전만 못하다 해도 전설적인 명성은 아직까지 조 

화성과 마교의 인물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오." 

능허자는 청허자를 향해 물었다. 

"사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천린은 흠칫했다. 

'능허자가 청허자 선배의 사제였단 말인가?' 

그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무량수불......." 

청허자는 나직이 도호를 외웠다. 잠시 후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빈도의 생각으로는 조화성이나 마교는 각기 유백의 원로원과 갈훼의 천마루가 그 

지주나 다름없다고 보네. 그것이 무너진다면 자연히 그들 사이에 엄청난 내분이 벌 

어질 걸세." 

"......." 

"십오 년 전 빈도가 천금동에 갇힌 이유는 도성 유백과의 싸움에서 반 초 차이로 패 

했기 때문일세." 

장천린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청허자 같은 기인에게도 패배가 있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청허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그 싸움을 지금 분석해 보면 유백은 당시 무공이 최고정점에 달했던 것으 

로 판단할 수 있네." 

청허자의 입가에서 감회가 어렸다. 

"당시 빈도는 이미 기울어져 있던 상태였지. 그래서 패했던 걸세." 

그는 미소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빈도의 경우로 짐작하면 지금 유백의 무공 역시 노부가 밟아온 전철을 답습했을 것 

으로 보네. 어차피 인간은 신이 아니니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일세." 

산곡노인이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상당히 나약한 말씀이나... 결코 틀린 것은 아니오." 

그는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노부의 생각으로는 조화성이나 마교 전부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오. 유 

백과 갈훼만 제거하면 절반 이상은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소." 

남마 소진청이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유백이나 갈훼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 분명하오. 더 

구나 그들의 주위에는 진전을 물려받은 제자들이 철저히 보호하고 있지 않겠소?" 

산곡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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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오. 하지만 어떤 경우든 틈은 있는 법이오." 

이때 묵묵히 중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원계묵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유백은... 제가 한 번 상대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산곡노인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는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내공은 비교가 안될지언정 근력이나 패기는 역 

시 유백이 저 젊은이에 비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원계묵의 용기와 패기를 높이 평가했다. 잠시 후 그는 장천린을 향해 물었다. 

"백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장천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제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중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 선배님들께서는 도와만 주시면 됩니다." 

산곡노인은 신뢰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어떤 일이든 힘껏 도와주겠네." 

"감사합니다." 

장천린은 중인들을 돌아보았다. 

중인들은 그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용기가 나는 것을 느끼며 품속 

에서 두 권의 책자를 꺼내들었다. 

"이것은 조화성을 분쇄하는 책략을 적은 것이고 이것은 마교를 상대하는 법을 적은 

것입니다." 

그는 책자를 산곡노인의 앞으로 내밀었다. 

"읽어보시고 허점을 지적해 주십시오." 

산곡노인은 책자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점만 보완되면 올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천린의 눈에서는 신념의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천하무림의 흥망성쇠가 걸린 중 

임을 어깨에 걸머진 그였다. 과연 난세의 기린아인 그가 뜻을 이루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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