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광인(狂人)
은기보(銀旗堡)는 조화성의 십삼개 지단 중에서 호남성지단(湖南省支壇)으로 보주는
구지신마(九指神魔) 궁록(宮錄)이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개성이 있다.
궁록 역시 남다른 개성이 있었다. 조화성 십삼 개 지단을 맡고 있는 자들 중에서 가
장 잔인한 위인이 오악신군 이능소라면 그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치광이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자랑하는 구마철지(九魔鐵指)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능히 한 자 두
께의 철판을 단번에 꿰뚫는 절학이었다. 그는 조화성 원로원의 한 사람인 진강조수
(進江釣 ) 곡상문(曲尙文)의 제자이기도 했다.
궁록은 나이 칠십 세가 넘어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
이르도록 버리지 못한 한 가지 취미가 있었다.
여색(女色)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는 미식가(美食家)가 아니라 대식가(大食家)에 속하는 부류라
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온갖 부류의 여자를 가리지 않고 즐기는 성격이었다
여자에 관한 한 그는 실로 다양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유
녀(遊女)에게 동정을 바친 이후로 그가 상대한 여인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다
양한 여자들을 경험한 그의 전 생애는 온통 색(色)의 향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은기보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은기보 사람들은 서슴없이 말한다.
바로 보주의 침실이라고!
배가 조금만 고파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궁록은 여자가 생각나면 한시도 참
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지금 한낮이다.
격자 무늬의 커다란 창으로 눈부시게 밝은 햇살이 흘러들고 있는 화려한 침실에서는
한창 격렬하고 난잡한 정사(情事)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도 매번 같은 방법으로 되풀이하면 지루해 진다. 궁록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 그는 한꺼번에 여러 여자들을 동시에 상대하
는데 맛을 들이고 있었다.
보통 침상의 다섯 배는 족히 될 듯한 거대한 침상 위에서 뱀처럼 뒤엉킨 네 사람의
나신이 물살에 흐느적거리는 수초처럼 끊임없이 움직였다.
한 여자보다는 두 여자가 신나고 두 여자보다는 세 여자가 자못 흥미롭다는 듯이,
마치 개구쟁이 아이가 이 나무와 저 나무를 올라타며 즐거워하듯 궁록은 마음껏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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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애첩을 희롱하고 있었다.
출렁거리는 침상 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성이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근
간 들어 궁록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 같은 정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그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나는 늙지 않았다!'
글쎄? 칠십의 나이가 결코 청춘(靑春)은 아니건만 그는 끝없는 쾌락에 탐닉하고 있
었다.
낮 시간은 무료했다.
특히 정문을 지키는 무사에게는 이 시간이 가장 지루했다. 이 시간이면 마누라의 허
벅지를 느긋하게 베고 달콤한 낮잠을 즐기기에 알맞건만 별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것은 따분한 노릇이었다.
해서 은기보의 정문을 지키는 왕당(王棠)과 당호(唐浩)는 한참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지루할 때 잡담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왕당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난 봤다."
"뭐... 뭘?"
당호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히히... 거 새로 들어온 보주의 애첩 가희(佳姬)란 여자 말이야?"
당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반문했다.
"그래, 뭘 봤다는 말이야?"
"히히히... 배꼽 밑에 갈색 점이 세 개나 있는 걸."
"저, 정말이야? 그걸 어떻게 봤냐?"
당호는 몹시 부럽다는 표정으로 실실거리는 왕당을 바라보았다.
"다 방법이 있지."
"어떤 방법인데?"
"말 안 해."
당호는 몹시 실망한 듯했으나 옆으로 달라붙으며 재촉했다.
"왕가야, 너와 난 친구가 아니냐? 옛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
다고 하셨다."
"좋아! 너한테만 말해주지."
당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 여자도 보주 못지 않게 색골인데... 희한하게도 새벽이면 후원에 있는 연못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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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하는 버릇이 있거든."
"그, 그래?"
"얼마 전 새벽에 깨 뒷간을 갖다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라구."
"꿀꺽......."
당호는 절로 침을 삼켰다.
그때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황가달(黃家達)이란 이름의 무사가 눈을 부스스
뜨며 투덜거렸다.
"한심한 녀석들... 허구한 날 계집 얘기만 하고 있으니......."
왕당과 당호는 머쓱해졌다. 황가달은 기지개를 켜면서 중얼거렸다.
"지금이 계집 얘기나 할 때냐? 열흘 전 호북지단이 쑥밭 나 본성에서는 난리라는데.
왕당은 흠칫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호북지단이 웬 신비인들에게 박살났단 말이다."
당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박했다.
"미친 소리! 호북지단은 일류고수만 수백 명이 되는 지단 중에서도 가장 큰 곳인데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황가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제 온 전령한테 들은 얘기야. 아무튼 요즘에 정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잖아. 게
다가 이상한 소문마저 떠돌고 있다구."
"소문이라니?"
"신주사성 중 환존(幻尊)과 능허자가 나타났다는 거야."
"시... 신주사성!"
황가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돌연히 폭풍을 몰고 오는 듯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세 사람의 대화 속으로 뛰어들
었다. 세 사람은 급히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십여 대의 마차가 질풍같은 속도
로 은기보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웬 마차지?"
"그, 글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세 사람은 각기 한 마디씩 하면서 눈을 가늘게 하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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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큰 마차야!"
"보나마나 내일 연회에 쓸 술통과 고기를 가져오는 마차일거야."
왕당이 아는 척 하자 황가달은 손으로 코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마부가 어떤 놈인지 미쳤군! 저렇게 빨리 달리다니......."
두두두두!
마차는 자욱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정문을 향해 달려오더니 십 장 쯤 떨어진 곳에
서 급격히 방향을 선회하며 멈췄다. 기이하게도 마차는 방향을 거꾸로 돌려 뒷모습
을 보인 채 멈췄다.
"빌어먹을! 이 먼지......."
세 사람은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였다. 마차의 뒷부분이
일제히 열리며 시커먼 화포(火砲)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엇! 저게 뭐냐?"
"화... 화... 화포다!"
황가달이 질겁하여 외치는 순간.
열 대의 마차에 실려있던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콰콰쾅!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시커먼 포신이 불을 뿜었다. 뒤이어 코를 찌르는 화
약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
"으으......."
"피... 피해!"
세 사람은 사색이 되어 부르짖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불덩이가 날아온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굉음과 함께 은기보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꽈꽈꽈... 꽝!
가히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열 대의 마차에서는 쉬지 않고
화포가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불지옥이 따로 없었다.
손은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입으로는 계집의 젖가슴을 번갈아 희롱하던 궁록은 퉁기
듯이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연속적인 폭발음이 울린 것이다.
"이게... 웬?"
놀라고만 있을 여유가 없었다. 천장과 벽, 심지어는 침상까지 와르르 흔들리고 있었
다. 그는 부랴부랴 장삼을 걸친 후 밖으로 달려나갔다.
꽈...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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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밖으로 나온 그의 눈에 맞은편 전각의 지붕에서 폭음이 울리더니 순식간에 붕괴
되고 있었다.
"헉......."
전각이 무너지며 와르르 잔해가 그가 있는 곳으로 비산(飛散)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는 급히 신형을 날려 피했으나 도무지 제정신 아니었다.
사방이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은기보는 연신 터지는 폭음 속에 온통 불바다가 되고
있었다. 사방에서 무사들이 허둥거리며 불을 끄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난데없이 담을 뛰어 넘어온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무차별
로 병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그렇지 않아도 날벼락에 정신이 없는 상태인 은기보의 무사들은 무엇이 어찌된 것
인지도 모른 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이이......."
궁록은 그만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었다.
그는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흑의인들을 향해 벼락같이 덮쳐갔다. 그러나 공격
을 전개하기도 전에 사방으로부터 십여 자루의 검이 날아왔다.
"크아아아악!"
궁록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의 목은 목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
리대로 분리되어 화염 속에 처박히고 있었다.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은기보는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로써 은기보란 이름은 영
원히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타버린 건물의 잔해와 즐비한 시신만을 남긴 채.......
조화성(造化城).
무림사상 초유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거대집단의 힘의 원천은 원로원(元老院)이다
. 원로원은 지금 터질 듯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원래 원로원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은 모두 팔인이었다. 그런데 동천우와 함호성이
죽었으므로 그 수는 육인으로 줄어들었다.
"......."
햇볕이 스며드는 것이 싫은 듯 원로원의 대전 사방에 있는 창문은 두터운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대전 중앙에는 거대한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주위에는 다섯 명의
노인들이 마치 화석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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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이 백여 세가 넘어 보이는 노인들의 모습과 음산하기 만한 대전 안의 분위기
는 동화(同化)된 듯 보였다.
그들 다섯 명이야말로 당금의 조화성을 떠받치고 있는 절대권력의 핵심인물들이었다
조화성의 십삼 개 지단 중 가장 최근에 무너진 궁록의 은기보를 포함하여 지난 두
달 사이에만 구 개 지단이 무너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조화성이 창건된 이래 최
대의 위기였다. 그로 인해 원로원에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원로원의 원로들은 각지에서 날라든 정보를 이미 검토했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그야 정파 놈들의 짓이 틀림없소. 구파일방이 아니고 또 누구겠소?"
"아니오!"
"아니라니......?"
말상의 얼굴에 주름살이 거미줄처럼 얼굴을 뒤덮고 있는 화의신수(花衣神手) 악조필
(岳造畢)은 형형한 안광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부정한 사람은 진강조수(進江釣 ) 곡상문(曲尙文)으로 한 자루 낚싯대로
하늘까지 낚아낼 수 있다는 전설적인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곡장로는 그럼 누가 주동자란 것이오?"
곡상문은 뾰족한 턱을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눈은 다른 사람에 비해 두 배나
컸으며, 그에 반해 얼굴은 의외로 작아 다소 기형적인 느낌을 주었다.
"환존 산곡과 능허자요."
"......!"
"신주사성의 두 사람인 그들만이 감히 본성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오."
곡상문은 확신한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잠시 뜨악한 표정이었으나 잠시 후 악조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소. 게다가 은기보의 경우를 보면 놈들은 화약을
사용했소.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으음......."
"거 참......"
원로원 장로들은 모두 입맛을 다셨다. 은기보의 멸망은 그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켰다
. 지금까지 무림계에서는 대대적으로 화탄을 사용한 전투가 벌어진 예가 거의 없었
던 것이다.
아침 일찍 시작한 회의는 오후가 되도록 끝나지 않고 있었다. 범인에 대한 흐릿한
윤곽만을 잡았을 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논쟁만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의견이 모아진 것은 있었다. 그것은 조화성의 무서움을 보여주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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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설왕설래하며 분분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대전으로 한 노인
이 들어섰다.
그는 문사(文士) 차림이었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피부는 허물 벗겨지듯 일어서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
고 노인의 전체적인 인상은 단아했다.
잘 손질된 백발, 서리처럼 하얗게 빛나며 귀밑까지 날카롭게 뻗친 백미(白眉), 정제
된 오관(五官)에 일신에 걸친 백색 문사의도 깔끔했다.
노인의 모습은 일견하기에도 학자풍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투명한 눈을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은 사라지고 만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노인에게서는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폭풍과 같은 기세를 느끼게 했다.
도성 유백이었다.
무림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도의 성인(聖人)이라 불린 사람. 신주사성의 일원이기도
한 그가 들어서자 오인의 장로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원로원의 원주(院主)에
대한 예우였다.
유백은 비어있는 상좌에 앉으며 악조필을 향해 물었다.
"어떻소? 결론은 내려졌소?"
"대충... 내렸소이다."
"어떤 결론이오?"
악조필은 미간을 좁히며 느린 어조로 대답했다.
"범인은... 정파의 연합세력이 아니면 환존(幻尊) 산곡과 능허자인 것 같소이다."
유백의 심유한 눈 속에서 파랑이 일어났다. 잠시 후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산곡과 능허자가 그럴만한 무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인정하나... 그들에게는 세력
이 없소. 우리의 열세 곳 지단 중 아홉 군데를 괴멸시키려면 최소한 그에 준하는 세
력은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오."
유백은 압도적인 눈빛으로 좌중을 한 차례 쓸어보았다. 그는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분명... 정파의 연합세력이 범인일 것이오."
"으음......."
"맞는 말씀이오.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세력이 없다면 어찌......."
장로들은 침음성을 흘리며 유백의 말에 동조했다.
이때 진강조수 곡상문이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소리쳤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소! 놈들을 박살내야 하오!"
악조필도 두 눈에 살광을 번뜩이며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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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눈! 이에는 이! 놈들에게 우리 조화성을 건드린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오!"
장로들은 모두 같은 의견인 듯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그로 인해 장내는 잠시 소란
스러워졌다.
유백은 묵묵히 장로들의 말을 들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그는 결
론을 내렸다.
"그럼 노부가 직접 성주를 만나보고 오리라!"
천후전(天候殿).
황금으로 주조된 편액이 태양에 반사되어 찬란한 광채를 뿌리는 거대한 전각.
조화성의 인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천후전 앞에서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다. 그 만큼 천후전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이곳에 조화
성주 염무가 기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무는 오랜 세월동안 천후전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한번도 천후전을 떠나지 않았으나 그의 존재는 무림 구석구석에 그 영향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어두운 곳에 은둔하면서도 수시로 살인혈첩(殺人血
帖)을 발부하여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이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그는 끊임없이 신산과 무영의 죽음을 주문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살인혈첩이 강호에 띄워졌으며 그때마다 무림의 일각에서는 피의 선풍이 일곤
했다.
조화성주 염무.
그는 일반 무림인에게는 공포의 대명사였으며 조화성의 인물들에게는 신적(神的)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
암울한 공기가 흐르는 실내.
염무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만지고 있는 것은 진흙덩어리
였다. 메말라 뼈가 불거진 손가락 사이에서 주물러지고 있는 진흙덩어리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황촉 하나만이 실내를 밝히고 있어 텅 빈 듯 넓은 실내는 침침하기만 했
다. 그 속에 홀로 앉아있는 그는 나이보다도 훨씬 늙어 보였다.
일신에 곤룡포를 걸친 그는 약간 마르긴 했으나 청수한 용모였다. 짙은 눈썹에 우뚝
선 콧날, 날카롭게 각진 턱선에서는 예리함이 느껴졌으며 가느다란 눈매에서는 광
기(狂氣)에 가까운 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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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덩어리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진지하
고도 신중해 보였다.
진흙덩이는 점차 형상을 갖추어 갔다. 그것은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리 정교하지
는 않았으나 분명 여인의 상(像)이었다.
여인상이 거의 완성되어갈 즈음, 염무는 갑자기 진흙 덩어리를 거칠게 뭉개버렸다.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란 말이야!"
그때였다. 염무의 등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성주, 내가 왔네."
염무의 몸이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이 앉은 채 빙글 돌았다.
그의 앞에 도성 유백이 서있었다.
"흐흐흐... 흐흐......."
기이한 일이었다. 유백을 바라보는 염무의 입에서는 광기에 찬 괴소가 흘러나왔다.
유백은 한동안 염무를 바라보다 들릴 듯 말 듯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성주, 몸은 어떤가?"
광기로 번질거리던 염무의 두 눈이 문득 암청빛 심해(深海)처럼 가라앉았다.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인어른, 이것 좀 보십시오. 이 얼굴... 취영을 닮지 않았습니까?"
염무의 손에는 반쯤 뭉그러진 여인상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여인상을 불쑥 유백의
앞으로 내밀었다. 유백은 억지스런 미소를 지었다.
"많이 닮았군."
염무는 손을 거두며 물었다. 그의 어조는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화령(造化令)을 빌리려 왔네. 큰일이 생겨 조화성 전체를 움직여야할 상황이네.
그래서 조화령이 필요하네."
염무의 눈이 다시 광기를 띄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성주......!"
갑작스런 변괴가 일어났다. 염무는 돌연 노갈을 터뜨리며 유백을 향해 일장을 내뻗
는 것이 아닌가?
우우우웅!
유백은 흠칫 놀라며 급히 신형을 날려 피했다.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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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가 뻗어낸 장력은 한쪽 구석에 놓인 거대한 청동화로에 격중되었다. 수천 근은
됨직한 청동화로는 단 일장에 걸레 쪽처럼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
가히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유백의 안색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염무는 언제 무서운 장력을 날렸냐 싶게 다시 수
중의 진흙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가야.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널 완전하게 만들어 주마... 슬퍼하지 말아라. 내
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는 다시 완전해질 수 있다......."
'광기가 날로 심해가고 있다!'
유백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몇 가지만은 철저히 지키고 있다. 조화령도 그 중 하나다. 어느
누구라도 조화령에 관한 말만 꺼내면 당장 죽이려드니.......'
유백은 목상처럼 우뚝 선 채 한동안 염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염무는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듯 진흙을 만지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가야.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너는 완전해진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사이에 진흙은 다시 여인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유백은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사위, 취영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군."
염무는 힐끗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물론이지요. 내 딸이니 아름답지요...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눈부시게 아름다웠지
요."
"그래. 취영은 매우 아름다워......."
"흐흐흐... 이제 곧 모용초와 결혼할 것이고, 그래서 이 아이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유백의 안색이 흐려졌다.
"사위, 취영의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염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십 오 년 전 천잔사마(天殘四魔)에게 자네의 무공비급과 함께 맡기지 않았나?"
유백은 내친 김에 계속 이야기했다.
"노부도 알고 있는 사실이네. 그 동안 천잔사마는 그 아이를 키우며 죽음보다 더 무
서운 훈련을 시켜오지 않았나?"
염무의 전신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백의 말이 이어졌다.
"비록 그 아이는 태어나지 않아야 할 비극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지만 그 아이만 모
르면 되지 않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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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겐 그 아이가 필요하네. 어디 있나?"
순간 염무는 손에서 진흙이 무참히 뭉개졌다.
"으핫핫핫핫핫......! 그 아이는 죽었소. 이십 오 년 전 그때 죽었소."
느닷없이 터져 나온 광소로 인해 실내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유백은 크
게 당황했다.
"사위!"
"갈(喝)!"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돌아선 고개를 돌린 염무의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뿜어져 나
왔다. 그는 잡아먹을 듯이 유백을 노려보며 말했다.
"장인어른! 날 이용하려 들지 마시오."
유백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갈사부나 당신은 처음부터 날 이용한 것이오. 하지만... 나 염무는 더 이상은 속지
않을 것이오."
유백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 그의 눈앞에 있는 염무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산악(山嶽)처럼 보였다. 시퍼런 광채를 뿜어내는 눈에서는 광기가 아닌 패
기(覇氣)가 넘치고 있었다.
유백은 그만 가슴이 써늘해지고 말았다.
"으핫핫핫핫핫......!"
다시 한 차례 광소를 터뜨린 염무는 고개를 돌린 후 진흙덩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흐흐흐... 영아야. 이제 곧 있으면 날이 밝을 것이다. 지금은 봄이니까... 네 머리
에 꽃을 꽂아주마."
진흙은 다시 여인의 형태에 가까워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유백의 가슴은 막막할 뿐
이었다.
'이대로 가면 조화성은 끝이다. 더구나 성주가 이십 년 전부터 정신이상을 일으키
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지 않은가?'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조화성 내에서부터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이대로... 둘
순 없는 일이다.'
유백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사위, 이만 가보겠네."
유백은 몸을 돌렸다.
'아무리 강하다해도... 광인(狂人)은 필요 없다. 한시 바삐 다른 인물을 성주로 택
해야 한다. 그것만이 조화성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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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은 문을 밀고 사라졌다. 그 동안 염무는 진흙을 만지는데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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