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4장 폭풍전야 (86/87)

제34장 폭풍전야 

원로원의 소집이 잦아졌다. 

최근 들어 중원각처와 조화성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다. 오 

늘도 소집이 있었다. 

도성 유백은 원로회의에서 뜻밖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담자개가 천후전으로 들어갔단 말이오?" 

그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의신수 악조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막지 않았소? 그 누구도 천후전에 출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 

소?" 

악조필은 심히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담자개는 성주의 양자요. 그러니 달리 막을 명분이 없었소이다." 

유백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다 안되겠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어떡하시려고?" 

"천후전에 가봐야겠소." 

유백은 서둘러 원로원을 빠져나갔다. 

악조필은 의혹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성주에 관해서는 늘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인상이야......." 

염무는 대전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옥으로 만든 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지금 그의 앞에는 담자개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초승달 가면에 뚫린 두 개의 눈구 

멍에서는 여전히 암담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염무는 불쑥 노리개를 내밀며 물었다. 

"자개, 이것을 보아라... 아름답지 않느냐?" 

담자개는 무기력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름답습니다." 

"허허허... 내일 취영에게 줄 것이다. 취영은 무척 기뻐할 거야." 

담자개의 눈빛은 더욱 허무하게 가라앉았다. 염무는 노리개를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 

며 중얼거렸다. 

"모용초는 왜 이리 늦는 걸까? 하긴 놈은 너무 잘났어... 여자에게 인기가 너무 많 

바로북 99 140

아. 하지만 취영과 혼례를 올린 후에도 그 아이를 울리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담자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염무는 흘낏 그를 바라보았다. 

"응? 왜 그러느냐?" 

담자개는 허무한 눈으로 마주보며 느리게 말했다. 

"취영 누님은 이미 죽었습니다. 모용 형님까지도......." 

염무의 관자놀이가 심하게 씰룩였다. 그의 눈에서는 새파란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 무슨 엉뚱한 소리냐?" 

"스스로를 기만하지 마십시오. 그런다고 죽은 분들이 다시 살아오지는 않습니다." 

담자개의 음성은 극도로 허무하게 들려 듣는 이로 하여금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 염무의 눈에서 불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닥쳐라!" 

염무는 곧바로 담자개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담자개는 웅후한 장력이 날아오는 것 

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펑! 

폭죽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담자개는 앉은 자세로 뒤로 일 장 가량이나 주르륵 

밀려나갔다. 격심한 타격이었다. 가면으로 가려진 턱 아래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 

다. 

하지만 그는 눈빛이 더욱 더 암울하게 변했을 뿐, 신음 한 마디 내지 않았다. 핏방 

울은 그의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여전히 무기력한 음성으로 말했다. 

"매듭을 만든 자만이 그 매듭을 풀 수 있는 법입니다. 아버님은 이제 스스로 만든 

운명의 매듭을 풀 때가 되셨습니다." 

담자개의 턱 밑에 위태롭게 매달린 핏방울을 보면서 염무의 안색은 경직되었다. 

"아버님은... 천륜(天倫)을 두 번씩이나 어겼습니다." 

염무는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텅 비어 있어 일체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멍하니 담자개의 턱 밑에 매달려 있는 핏방울을 바라 

보고 있었다. 

"첫째는... 취영 누님을 범한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혈기(血氣)의 역류 때문이었다 

고 하나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뚝.......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핏방울이 무릎으로 떨어졌다. 

담자개의 음성은 점점 더 가라앉고 있었다. 

141 바로북 99

"둘째... 아버님은 취영 누님의 아이를 천잔사마와 철패륵에게 보내 키우도록 했습 

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아버님을 죽이도록 패륜(悖倫)의 주문을 걸었습니다." 

염무는 느릿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힘을 다 짜낸 듯 힘겨워 보였다. 그 

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걸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더듬어댔다. 

"나는......." 

담자개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늘로 하여금 내 운명을 시험케 했다. 그 아이가 자라 날 죽인다면 하늘이 날 용 

납치 않는 것이고,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용납한 것이라 믿기에......." 

"푸후후......." 

담자개는 괴소를 흘렸다. 

"위선입니다. 아버님이 뿌린 씨앗은 아버님만이 거둘 수 있거늘, 그 아이가 무슨 죄 

가 있다고 아버님의 업보를 떠 안긴단 말입니까?" 

염무는 멍하니 듣기만 했다. 

"그 아이의 인생은 결코 아버님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푸후후... 운 

명을 시험한다고요? 분명한 것은 아버님이 죽든 그 아이가 죽든 그 역시 다시 천륜 

을 어기는 일입니다." 

염무의 눈은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퇴적되어 온 한 덩어리의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한 계절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크흐흐흐......." 

염무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마치 상처 입은 야수의 외로운 흐느낌처럼 들렸 

다. 한동안 괴소를 흘리던 염무는 담자개를 노려보았다. 

"내게 뭘 원하느냐?" 

담자개는 서슴없이 말했다. 

"아버님은 이미 조화성에서 아무런 권능도,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아 

들은 아버님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과거......." 

"그리고... 아버님답게 최후의 결정을 내리길 바랍니다." 

"결정......." 

담자개의 눈은 이제 깊고 깊은 어둠의 끝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끝나면... 이 아들이 아버님 대신 모든 것을 해결하겠습니다. 아버님 

이 짊어지셔야 했던 모든 것을 다 떠맡겠습니다." 

142 바로북 99

"......." 

"그리고 해결하겠습니다. 무영도 제가 제거하겠습니다." 

돌연 화석같이 굳어버린 염무의 눈에서 광채가 번뜩이더니 대전을 무너뜨릴 듯한 광 

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핫핫......!" 

염무의 눈에서 무덤 가의 도깨비불 같은 푸르스름한 광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담자개를 무섭게 쏘아보며 외쳤다. 

"네놈은 왜 취영을 욕하느냐! 못된 놈!" 

펑......! 

손바닥이 번뜩한 순간 담자개는 거센 충격을 받고 휴지조각처럼 한쪽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또다시 일장을 얻어맞은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신음 한 마디 흘리지 않았다. 다만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힘겹게 일 

어섰다. 그의 가면 아래로 핏방울이 아닌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염무는 그를 노려보며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나가라! 나가! 나가!" 

"......." 

"나가! 나가! 노부는 취영과 함께 있을 것이다. 나가라!" 

담자개는 소매로 턱밑을 닦아내며 말했다. 

"가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담자개는 마른 웃음을 툴툴거리며 돌아서 천후전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염무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핫핫......! 가거라! 모두 내 곁에서 떠나거라!" 

그의 광소는 텅 빈 대전을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염무는 무표정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도성 유백은 근 한 시진 동안이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사람은 천후전에 마주 앉은 채 오랫동안 침묵으로 서로를 견 

뎌내고 있었다. 

마침내 유백이 입을 열었다. 

"자개가 다녀갔는가?" 

염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신경 쓰지 말게." 

143 바로북 99

염무는 그의 말을 못들은 듯 여전히 무표정할 뿐이었다. 

유백은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탄식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겠네." 

염무는 침묵의 우리 속에 갇혀 포효하기를 잊어버린 맹수와도 같았다. 그런데 유백 

이 돌아섰을 때였다.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장인 어른......." 

유백은 빙글 돌아섰다. 

"마교의 구천마존과 조화성의 원로들을... 앞으로 열흘 안에 모두 소집해 주십시오. 

"......!" 

유백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자리에서 조화령과 태마정(太魔精)을 내놓겠습니다." 

염무의 음성은 담자개의 음성보다 더 무기력한 것 같았다. 유백은 자신의 귀를 의심 

했다. 그러나 이내 전신의 혈관 속으로 한 줄기 희열이 빠르게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억지로 태연을 유지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네, 그밖에 할 말은?" 

염무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유백은 한동안 그를 내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겠네, 사위......." 

유백은 몸을 돌리는 순간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서는 환희의 빛이 일 

렁이고 있었다. 

'천하가 눈앞에 보이는 구나... 누르하치! 이젠 네가 중원에 들어서도 될 것 같구나 

!' 

유백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염무의 어두운 그림자 뿐이었다. 

적막이다. 

구릉이었다. 멀리 설봉산의 웅장한 자태가 보이는 구릉 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장천린이었다. 

쉬이이잉....... 

펄럭! 

몰아치는 바람에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장천린은 산처럼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청 

허자와 남북쌍마, 그리고 화려한 명성을 대륙에 남겼던 기라성 같은 노기인들이 나 

란히 서있었다. 

144 바로북 99

그의 바로 뒤에는 장도를 비끄러맨 원계묵이 고목처럼 서있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폭설을 퍼부을 듯 어둡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원계묵이 보고했다. 

"신녀궁의 구양영봉은 옥류향에게 죽고 숙야천릉도 시신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장천린은 잿빛 하늘에 시선을 던진 채 묵묵히 보고를 들었다. 

"신녀십비 역시 십상객에 의해 전멸되었습니다." 

"음......." 

"숭의겸도 수하 삼백여 명과 함께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옥류향이 어떻게 그 많은 

고수들을 끌어 모았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장천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황금의 힘이겠지." 

장천린의 가슴 한 구석은 이상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울고 웃으며, 분노하고 미워하며... 수레바퀴 돌 듯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은 과연 

무엇인가? 말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산 자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죽은 자는 무 

엇을 남긴단 말인가? 

장천린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계묵." 

"말씀하시지요, 형님." 

"준비는 다 됐느냐?"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합니다. 제 일조는 백살대와 낭인조로 제가 직접 지휘합니다. 조화성의 북쪽을 

공격합니다." 

"음......." 

"제 이조는 구파일방과 정도 고수들로 태무결 방주님의 지휘 아래 남쪽을 공격하게 

됩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삼조는 천인단과 남해신궁의 고수들로 석정일랑의 지휘 아래 서쪽을 맡았습니다 

." 

"서쪽......." 

원계묵은 흘낏 청허자를 바라보았다. 청허자는 입가에 담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제 사조는 천금동에 계셨던 분들로 청허 노선배님과 산곡 어른의 지휘로 동쪽을 공 

145 바로북 99

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총지휘는 형님입니다." 

쉬이이이....... 

바람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결전만 남은 것인가? 장천린은 무심히 설봉산을 응시했다. 조화성이 웅크리고 

있는 그곳을....... 

지금 장천린이 보유하고 힘은 결코 조화성의 아래가 아니었다. 남해신궁의 삼백인 

고수들이 합류했고, 천인단도 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는 자신감이 있었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장천린은 주위의 인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일 정오... 오시 정각에 공격한다." 

"알겠습니다." 

원계묵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진천뢰는 준비됐나?" 

"예! 반형과 담형이 이미 설봉산 근처에 매설해 놓았습니다. 한데 한 가지 문제는 

사형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사형이란 사문도였다. 사문도는 벌써 한 달 이상 연락이 끊겼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장천린은 별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가 외쳤다. 

"눈이 오는군." 

장천린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보았다. 잿빛으로 낮게 깔려있던 

하늘은 기어이 눈발을 뿌리기 시작했다. 

청허자가 장천린에게 다가오며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왠지 이번 눈은 길조(吉兆)인 것 같군."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눈은 점차 굵어지더니 급기야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후전. 

조화성주 염무가 있는 이곳에 오늘따라 많은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기도를 지닌 노고수들이었다. 

146 바로북 99

지금까지 천후전은 염무만의 성역(聖域)이었다. 그런데 한꺼번에 원로급 위인들이 

집결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사시(巳時). 

정시를 알리는 타종소리가 울렸을 때, 천후전의 대전에는 모두 십육인이 모였다. 

중앙에 긴 탁자가 놓여있고, 제일 상좌인 태사의에는 조화성주 염무가 무거운 표정 

으로 정좌하고 있었다. 

염무의 좌측에는 원로원의 원주인 도성 유백을 필두로 오인의 장로들이 서열대로 앉 

았다. 그 맞은편에는 구인의 살인적인 기도를 지닌 인물들이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들의 분위기는 가히 암흑(暗黑) 그 자체였다. 

그들이야말로 마교(魔敎) 소속의 구천마존(九天魔尊)이었던 것이다. 

구천마존 중 상좌를 점하고 있는 것은 백의노인으로 얼굴에 회칠을 한 듯 창백하여 

마치 시체처럼 보이는 위인이었다. 

이 인물이 바로 구천마존의 수뇌이며 마교의 태상장로였다. 

백마(白魔) 갈훼! 

바로 그였다. 

마교와 조화성을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십오인, 그리고 마교와 조화성의 상징적인 절 

대자 염무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이제까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 

았던 파격적인 행사였다. 

"......." 

염무는 십오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기이했다. 그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반해 십육인의 시선은 화살처럼 염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죽음 같은 침묵이 흐른 후. 

염무의 무거운 입술이 떨어졌다. 

"본좌가 오늘 여러 선배를 청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오!" 

염무의 태도는 대종사답게 당당했다. 그는 침착한 동작으로 품속에서 두 가지 물건 

을 꺼냈다. 

그것은 조화성의 성주를 상징하는 조화령과 마교교주의 신표인 태마정이었다. 

"바로 이 두 가지 물건 때문이오." 

그가 꺼낸 두 가지 신물을 바라보는 십오인의 눈빛은 형형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두 신물만 수중에 넣는다면 조화성과 마교를 한꺼번에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염무의 입술 가장자리로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십오인의 눈에 탐욕의 빛이 

147 바로북 99

어리는 것을 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푸스스스! 

놀라운 일이었다. 염무는 내공을 주입하여 두 신물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 

가! 

"아앗!" 

"저... 저럴 수가!" 

십오인은 대경실색하여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들은 살기 등등한 눈빛으 

로 염무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감히 상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였다. 

쾅! 

굉음과 함께 대전의 정문쪽 철문(鐵門)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시작이었다 

. 중인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사방에서 연속적으로 굉음이 울렸다. 

쾅! 쾅! 쾅......! 

천후전의 사방에 나있는 철문이 모두 떨어졌다. 그로 인해 대전은 완전히 밀폐되고 

말았다. 제일 먼저 노성을 발한 것은 백마 갈훼였다. 

"무슨 뜻이오? 대종사!" 

다른 인물들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염무를 노려보았다. 염무는 태연했다. 그는 허공 

에 시선을 던지며 진중하게 말했다. 

"내가 천년마교(千年魔敎)의 맥을 이은 것은... 진정한 마(魔)는 정(正)보다 우위임 

을 입증하려는 뜻이었고......." 

"......." 

중인들은 숨을 죽였다. 대전 안은 공기 한 점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밀폐되었기 

에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적막했다. 

"내가 무영, 신산과 함께 조화성을 세운 것은 천하통일을 이루고 싶은 사나이로서 

가진 야망 때문이었소." 

염무는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누구에게나 야망은 있을 것이오. 나 역시 마찬가지였소. 하지만 지난 십수 년간 내 

가 깨달은 것은 오직 하나... 허무뿐이었소." 

염무의 눈빛은 완벽할 정도로 무심해졌다. 허무조차 달관하면 바로 그런 눈빛이 될 

듯했다. 

도성 유백이 듣기 싫다는 듯이 노성을 터뜨렸다. 

"성주! 자네의 지금 행동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네. 자네가 아무리 조화성주라 해 

도... 방금 전의 행위는 사전에 원로원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모른단 말인가 

148 바로북 99

?" 

"으하하하하핫......!" 

염무는 그의 말을 묵살하듯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웅... 웅......! 

어찌나 웃음소리가 큰지 광소의 잔향(殘響)이 메아리치며 중인들의 고막을 수십 차 

례나 두드렸다. 염무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며 유백을 노려보았다. 

"유백!" 

유백은 질겁했다. 

"서... 성주... 난 원로원의 원주네! 예의를 갖추게!" 

염무의 눈은 어느새 이글거리는 두 개의 광구(光球)로 화했다. 

"유백! 당신의 본명은 규초(叫肖), 현재 후금(後金)의 왕인 누르하치의 조부인 규장 

의 친형이오." 

유백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흔들렸다. 중인들이 망연자실해 하는 사이에도 염무의 

말은 계속 되었다. 

"당신은 내게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으며, 날 이용해 조화성을 세우게 하여 그 힘을 

이용하려 했소." 

"......!" 

유백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장포가 폭풍을 만난 듯 

파르르 흔들릴 뿐이었다. 

"당신은 내가 지닌 힘을 이용해 누르하치의 대륙정복을 돕고, 더 나아가서는 대명을 

멸망케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소." 

"......!" 

원로원의 다섯 원로들은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염무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유백은 발작하듯 부르짖었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하하핫......! 난 이미 십여 년 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소. 그 동안 당신이 수도 

없이 누루하치와 연락을 취했던 사실조차도 말이오." 

염무는 유백의 답변을 듣지도 않고 이번에는 백마 갈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 

길을 접한 갈훼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는 표정이었다. 

"갈훼! 당신은 마교의 태상장로이면서도 단 한 번도 마교의 일을 내게 상의조차 하 

지 않았소. 당신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야망은 유백과 같소. 마교의 힘을 이용해 

명조를 무너뜨리고 누르하치와 손잡는 것이었소." 

갈훼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149 바로북 99

"솔직히 그렇다." 

염무는 허탈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결국 나 염무는 천하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제까지 

이용만 당해 온 것이오." 

갈훼는 비정할 정도로 침착했다. 그는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염무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묶은 매듭이니... 내가 풀 것이오." 

"음......." 

갈훼가 신음을 흘리자 이번엔 유백이 냉소했다. 

"자네 혼자서 우리 십 오인을 상대하겠단 말인가?" 

염무는 그들을 쓸어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과거에는 초강자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늙었소." 

그는 느린 동작으로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기이한 일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와 달리 몸을 일으키자 그는 거대한 산을 연 

상케 했다. 단번에 좌중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아니, 설사 당신들이 여전히 초강자라 해도 나는 염무요! 무림사상 제일인자인 염 

무란 말이오!" 

그의 한 마디. 

-나는 염무요! 

이 한 마디는 십오인의 가슴을 마치 쇠뭉치로 치는 듯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염무는 가슴을 펴며 외쳤다. 

"모두 덤비시오!" 

콰르르르르....... 

순간 그의 전신으로부터 폭발적인 기세로 무형의 기운이 회오리쳤다. 그 기운에 닿 

는 것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라 해도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버릴 듯했다. 

갈훼는 염무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나 갈훼의 명예를 걸고 널 꺾겠다. 염무!" 

갈훼의 말에 용기를 얻은 듯 나머지 십사인은 눈빛을 번뜩이며 일제히 몸을 일으켰 

다. 

염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극도로 암울하게 가라앉는 눈빛을 십오인에게 

고정시킨 채 태산처럼 서있을 뿐이었다. 

150 바로북 99

쿠쿠쿠쿠쿠....... 

그의 일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점점 더 강렬해지기만 했다. 그는 염두를 굴리 

고 있었다. 

'시간은 한 시진... 그 사이에 저들을 모두 꺾으면 사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면 

나는 새로운 운명에 다시 도전할 것이다!' 

염무의 전신은 긴장으로 인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만에 하나 한 시진이 넘거나 그 사이에 내가 쓰러진다면... 이 천후전 바닥에 묻혀 

있는 십만 근의 화약과 함께 영원히 산화되리라!' 

아아! 염무! 

위대한 무(武)의 신(神)은 이미 모든 안배를 마치고 있었다. 그는 암울한 시선으로 

십오인을 한 명씩 둘러보고 있었다. 

이윽고 운명을 건 일전이 시작되었다. 

갈훼를 시작으로 십오인의 대마두가 일제히 염무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콰아아아아....... 

그것은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결이었다. 무림사상 이토록 강한 인물들이 또 있었 

을까? 맹세코 없었다. 십오인의 마도 사상 가장 강했던 고수들이 그것도 단 한 명을 

상대로 연수합격(連手合擊)하기 시작한 것이다. 

콰르르릉! 

염무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마공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양손은 하늘을 무 

너뜨리고 땅을 갈라 치는 듯했다. 

물(水)과 불(火)과 바람(風)의 정화(精華)가 그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십오인의 마 

공도 그에 못지 않았다. 다만 밀폐된 천후전에서 벌어진 전무후무한 대결은 아쉽게 

도 아무도 볼 수가 없었다. 

무림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싸움이었으나 기록을 남길 사람조차 없는 가운데... 싸 

움의 승패는 영원히 철의 장막 속에 가려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꽈... 꽈꽈꽈.... 꽝......! 

천붕지열(天崩地裂)의 폭발음과 함께 조화성 한 가운데서 치솟은 불기둥은 백 장 높 

이로 치솟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장났다. 

거대한 조화성, 무림사상 최강의 전력과 영향력으로 전 무림을 지배해 왔던 조화성 

이 한 순간에 붕멸의 폭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처음 천후전에서 일어난 폭발은 연쇄적인 폭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가공할 화염과 

폭풍, 비산(飛散)으로 인해 조화성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조화성의 성도들은 

151 바로북 99

화염의 회오리 속에 숯덩이가 된 채 타버렸고, 수 없는 누각과 대전, 첨탑들은 모래 

탑처럼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누가 감히 상상인들 하였으랴! 

그 누가 감히 불사(不死)의 상징인 조화성이 한 순간에 소멸될 줄 알았겠는가! 

믿어지지 않는 조화성의 대폭발을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는 인물들이 있었다. 

"무량수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조화성을 굽어보는 구릉 위에서 청허자는 연신 도호를 외우고 있었다. 각각 다른 세 

방향에서도 정도무림의 군웅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원계묵, 태무결, 석정일랑 등은 각각 조화성의 남쪽과 북쪽, 서쪽에서 조화성을 공 

격하기 위한 진용을 완비한 채 오시(午時)가 되기만을 기다리던 중 미증유의 폭발음 

과 함께 눈앞에서 조화성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게된 것이다. 

공격의 총지휘를 맡은 장천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연기와 비산하는 폭발의 잔재(殘滓)들을 바라보며 현 

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거인 염무... 그도 저 속에서 산화했단 말인가?' 

영원히 비밀로 묻혀버린 조화성의 붕괴! 

그는 허탈감에 사로잡힌 채 고개를 흔들었다.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염무... 그런데 이렇게 끝나 버리다니, 나와 

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휙! 

그의 앞에 장대한 체구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마도 원계묵이었다. 

"형님!"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지금은 조용히 한 사람을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어디서 와 

서 어디로 간 건지... 생각해 봐야겠다." 

152 바로북 99


0